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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정치사상

이강기 2015. 11. 2. 21:02
[일반논문]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정치사상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새댖정신 2011년 겨울호

 

I. 하이에크가 그리워지는 이유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래, 반(反)시장 기류가 급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본가의 탐욕과 부자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시장경제는 실업, 빈곤, 양극화 그리고 각종 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자유 자본주의에 맡길 수 없다고 한다. 그 대신에 정부가 경제규제를 강화하고 재정(돈)을 풀어야 경제도 살아나고 번영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지와 규제를 강조하는 칼레츠키(A. Kaletsky)의 ’자본주의 4.0‘에 열광하고 있다. ’정의‘를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마이클 샌들 열풍도 만만치 않다. 월가의 반(反)금융자본 시위를 따라 하기에 여념이 없는 좌파집단도 있다. 반값등록금, 무상복지가 정치적 상한가다. 여기에 친(親)서민 정책과 공정사회, 동반성장론, 상생발전론의 슬로건이 재분배정책의 탈을 쓰고 여론을 쫓아가고 있다.

흥미롭게도 20세기 정치와 지식인을 지배했던 ‘큰 정부 작은 시장’의 이념적 기류가 21세기에도 되살아났다. 구(舊)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와 같은 ‘뜨거운 사회주의’는 죽었지만 케인스(J. M. Keynes)가 호령하고 베버리지(W. Beveridge)가 인기를 끄는 ‘차가운 사회주의’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도 살아서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이 같은 암울한 시기에 그리워지는 인물이 있다. 영국의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지(誌)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자유의 대변인”이라고 칭송했던 하이에크(F. Hayek, 1899~1992)이다. 그는 좌파적 이념에 의해 20세기 지구촌 전체가 벌겋게 물들었던 시기에, 정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자만’이라고 외치면서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고자 온 몸을 던졌던 비엔나 출신의 인물이다. 사회철학자 겸 정치경제학자였던 그는 경제를 혼란에 빠트린 것은 시장의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의 규제와 정부재정(돈)의 확대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경제를 구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라는 것, 대중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면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사유재산과 경제적 자유만이 부와 풍요의 원천이며, 정부의 지적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정부는 문제이지 해결이 아니기에 정부를 믿지 말고 자유사회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흥미로운 것은 하이에크가 어떤 정치사상적 기반에서 그와 같이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정부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억제하고 한국사회가 나갈 ‘자유의 길’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필자가 다른 장소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하이에크는 경제학을 넘어서 두뇌이론, 법철학, 역사학, 과학철학, 윤리학, 정치철학 등을 종합하여 자유주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매우 심원하고 복잡하고 ‘학제융합적’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사상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럽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이에크의 정치사상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인간이성의 한계, 둘째로 자생적 질서, 셋째로 법의 지배 원칙과 마지막 네 번째로 문화적 진화이다. 하이에크의 정치철학적 그리고 공공정책적 논거들은 이 네 가지 기본요소에서 도출한다. 필자는 이들을 중심으로 그의 정치철학과 공공정책을 해명할 것이다.

 

II. 인간이성의 한계와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첫 번째 핵심은 지식이론적 관점에서 정치와 사회 그리고 법과 도덕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철학은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와 관련된 인성(人性)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홉스(Th. Hobbes)의 전통에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전제하고 이로부터 사회철학을 전개한다. 공동체주의는 이타심을 전제하여 사회철학을 전개한다.

이 전통의 공통점은 인간들이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동기나 목표이외에도 지식이 필요한데 그들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지식의 문제(Knowledge-Problem)’는 이미 해결된 것처럼 취급한다. 하이에크는 그의 유명한 1973년 저서 『법, 입법 그리고 자유』의 제1권 『규칙과 질서』에서 이런 전제를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ic rationalism)’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와 대비되는 진화적 합리주의(evolutionary rationalism)를 전제로 하여 정치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두 합리주의를 비교하면서 각각의 공공정책의 의미를 설명할 것이다.

 

1.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지적 자만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 의하면, 인간이성은 사회와 독립적으로 그리고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이 같은 이성을 통해서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의 원조는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을 확립한 데카르트이다. 이 전통은 다시 루소, 홉스, 벤담(J. Bentham), 밀(J. S. Mill) 등을 거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기초가 되었고, 현대에서는 케인즈와 롤스(J. Rawls)의 사상 그리고 복지국가론 등, 각종 개혁이론의 지적 바탕이 되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 시대의 정신과 정치를 지배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합리주의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인간이 사는 사회에는 지식을 산출하고 테스트하고 모방할 행동의 자유도 불필요하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성공적인 행동방식을 알려주는 도덕규칙과 법, 관습, 관행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인지를 유도하는 문화적 요소도 불필요하다. 시장경제도 불필요하다. 정부규제와 계획경제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의 1944년에 출간된 책 『노예의 길』과 1988년에 출간된 『치명적 자만』의 제목이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람직한 사회를 설계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사회구성원들을 정부나 집권자의 노예로 만드는 일이요, 그것은 처참한 빈곤과 실업, 위기와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2. 자유의 존재이유와 지식의 문제

 

인간이성에 의해서 빈곤과 실업을 없애고 번영을 약속하는 사회질서를 만들겠다는 야심, 간단히 말해서 ‘구성주의적 합리주의’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구(舊)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물론이요 스웨덴, 독일에서도 반(反)시장주의 복지국가의 거대한 실패이다. 빈곤과 실업을 그리고 경제위기를 야기한다는 것도 그 같은 거대한 실패가 말해주고 있다.

하이에크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대신에 인간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정치가든 관료든 또는 학자나 자본가나 노동자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인간들은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한줌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부분적인 지식이다. 인간이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를 만큼(unknown ignorance) 무지하고, 이 무지는 구조적이다.

하이에크의 이 같은 인식론적 입장은 애덤 스미스(A. Smith), 데이비드 흄(D. Hume)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몽테스키외(Montesquieu), 칸트(I. Kant), 멩거(C. Menger), 미제스(L von Mises), 레오니(B. Leoni) 등을 거처 오늘날 “진화론적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있다. 이 합리주의는 그가 1948년 저서 『개인주의와 경제질서』에서 자세히 설명하듯이, 중요한 철학적 그리고 공공정책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치가들이나 관료들 또는 그 어떤 엘리트도 각처에 분산되어 존재하거나 새로이 생겨날 지식을 전부 수집하여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성공적인 경제규제나 경제계획을 작성하여 집행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이에크는 계획경제의 실패와 규제의 빈번한 실패 원인을 이 같은 ‘지식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정부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은 지적으로 자만할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겸손할 것을 촉구한다. 따라서 정부는 경제를 계획하여 시민들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대신에 비록 한줌의 지식이지만 사회구성원들 각자가 가진 지식을 스스로 이용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학습할 자유를 그들 모두에게 차별 없이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자유사회 속에서 인간이성이 진화하고 발전한다. 자유는 바로 인간 이성이 개발될 수 있는 조건이다.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이에크는 자유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개인의 자유의 존재이유를 지식이론의 관점에서 정당화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정치가나 관료 또는 경제학자 같은 엘리트가 가진 지식이 아니라 각처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개인들이 갈고 닦은 지식이라는 것이다. 광범위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번영과 사회적 번영의 열쇠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서 인간의 이성이 비로소 개발되고 발전한다.

 

III. 자생적 질서와 자유주의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면 빈곤과 실업, 위기 등,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에 국가의 규제와 경제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反)시장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이 같은 주장은 질서를 자연적 질서(물리적 질서, natural order)와 인위적 질서(artificial order) 또는 조직(organization)으로 이분하는 이분법적 사고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제3의 질서로서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를 강조하면서 이분법은 자생적 질서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거나 무시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1. 시장경제와 자생적 질서

 

자생적 질서는 질서 잡는 사람의 계획이 없다고 해도 인간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형성되는 질서이다. 인위적으로 설계하지 않고서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자생적으로’ 인간들의 사회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 자생적 질서의 존재를 인식한 것, 이것은 하이에크의 탁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이 자생적 질서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 언어이다. 상관습(商慣習)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기로 작정하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상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시장질서이다. 이것은 누가 계획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자생적 질서는 포퍼의 열린사회, 애덤 스미스의 ‘거대한’ 사회와 같은 개념이다. 그것은 오늘날 국제적으로 확대된 분업을 특징으로 하는 확장된 질서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회질서가 자생적으로 형성되는가, 심지어 국제적으로까지 확대된 질서가 어떻게 자생적으로 형성되는가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하이에크의 접근은 독창적이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인간은 구조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살 수도 없다. 타인들과 협력과 분업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분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은 타인들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그 수단이 언어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언어는 대면 사회에서처럼 서로 들을 수 있는 사이에서만이 가능하다. 열린 거대한 사회에서는 서로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서로 만지거나 표정을 읽을 수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화폐로 계산된 가격이다. 이 가격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 그리고 의도들을 추상화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가격은 인간의 인지능력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끼리의 분업과 교환을 넘어서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가격이 없었으면 오늘날처럼 분업과 교환이 국제적으로까지 확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가격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하여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부의 자의적인 개입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화폐가격뿐만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칙을 구현하는 행동규칙이다. 이에 속하는 것이 도덕, 상 관행, 전통, 법 등이다. 이런 행동규칙들 속에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이 반영된다. 수십 세대, 수백 세대를 거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인데, 이 같은 문화적인 요소들이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다.

하이에크는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은 자생적 질서의 형성을 방해하여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고 경고한다.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문제를 더욱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 자생적 질서에 대한 정부개입이라는 것이다.

 

2. 케인즈와 하이에크

 

그럼에도 시장경제의 불안정성을 논하고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케인즈이다. 불황은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이며 정부가 재정(돈)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세계의 지식과 정책, 정치 분야를 지배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불경기의 발단은 결코 자생적 질서에서 생겨나는 자연적인 경기변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속적인 통화팽창이 그 원인이라고 보았다. 통화팽창에 의한 인위적인 이자율 하락은 가격구조와 생산구조를 왜곡하고 결국 파국을 부른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진지한 경제학자들은 하이에크의 분석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대공황 직전에 미국 연방정부의 금융완화 정책으로 거품이 형성됐고 이것이 결국 불경기로 이어졌는데, 이 불경기를 타개한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개입함으로써 장기적이고 심각한 공황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이를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믿고 이제는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지한 경제학자들은 하이에크의 경기변동과 경험적 검증을 기초로 하여 그 위기도 시장경제의 탓이 아니요, 시장을 감시․감독하지 못한 정부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연방정부의 통화팽창 정책과 1인 1주택을 위한 주택정책이 위기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불경기는 고통스런 과정이기는 하지만 정부의 방만한 통화정책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왜곡된 생산구조가 원상태로 회복하는 자생적 과정이다. 하이에크는 불경기를 살리기 위해서 정부가 재정(돈)을 풀면 그 같은 자생적 조정과정이 방해되고 가격구조와 생산구조가 더욱 더 왜곡되고 그 결과 불경기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역사상 가장 심각하고 장기적으로 지속된 1930년대의 대공황이다. 불경기를 공황으로 이끈 것은 보호무역과 각종 규제 등으로 구성된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었다.

정부가 개입하여 경기변동을 상쇄시키려는 노력도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왜냐 하면 상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정치가나 관료들 그리고 학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경제주체들이 자신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장지식’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안정정책을 통하여 경기변동을 상쇄시키려는 노력은 치명적인 지만이요 ‘이성의 남용’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자생적인 힘이다.

 

3. 분배정의에 대한 공격

 

분배정의에 대한 하이에크의 공격도 흥미롭다. 분배정의는 시장경제의 분배결과를 수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폭력, 강제, 사기, 행동방해 등과 같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금지하는 일반적인 정의의 규칙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경제에서 개인 소득은 개인들의 노력과 능력 그리고 개인들의 위험 부담과 시장 상황, 우연 등,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하이에크는 분배정의의 개념 그 자체도 잘못일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보수의 분배를 정의롭게 만들려는 노력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식의 평가는 행동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분배정의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장에 분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장경제에서는 모든 개인들의 소득을 계획하여 분배하는 사람이 없다. 경제적 보수는 그 어떤 계획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무의도적인 자생적 결과이다. 분배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시장경제의 분배결과를 분배정의로 평가하는 것은 그래서 의인화의 오류이다.

 

4. 하이에크와 롤스

 

롤스는 자유시장경제의 분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인의 소득을 결정하는 선천적인 능력이나 재주, 개성은 개인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행운의 여신의 제비뽑기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분배는 도덕적으로 볼 때 자의적이다. 도덕적 정당성을 얻으려면, “차등원칙”이라고 부르는 그의 분배정의에 따라 재분배해야 한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롤스의 해결책을 동의할 수 없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는 재산에 대한 자연권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는 자연권이란 없다. 이 점에서 하이에크는 자연권 시각에서 재분배를 반대하는 로크(J. Lock)나 노직(R. Nozick)과 다르다. 하이에크가 분배정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시장경제가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자생적 질서에는 분배하는 실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배적 결과에 대한 도덕적 판단도 할 수 없다.

자생적 질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기회를 극대화하는 조건이다. 재분배는 이런 조건을 열악하게 만들 뿐이다. 분배목표가 무엇이든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분배목표를 달성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부작용만 발생할 뿐이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의료, 교육, 실업, 주택, 그리고 최소의 소득과 같은 기본적인 편익의 부분에서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능력자, 결손가정, 그리고 극빈자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참한 빈곤 문제에서 국가를 동원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단순한 봉사기능일 뿐이다.

 

IV. 법치주의와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사상 가운데 중요한 세 번째 국면은 법의 지배 원칙이다. 그는 1960년 저서 『자유의 헌법』에서 다이시(A.V. Dicey) 이래 가장 명료하게 법치주의의 정치적 이상을 재정립했다. 그 핵심내용은 국가가 강제를 동원하여 집행할 법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즉 법이 법의 지위를 갖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조건을 말한다. 그 조건은 보편성, 추상성, 그리고 확실성의 조건이다.

따라서 법치주의는 어떤 내용을 가진 법이든 관계없이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시민들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1. 법의 도덕성과 법치주의

 

법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서 하이에크가 각별히 중시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행동규칙이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일반적이어야 한다. 개인들의 특정한 사정이나 특수한 장소와 시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이나 그룹을 차별하는 내용이 없어야 한다. 정부의 특혜나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법은 법의 지배 원칙에 해당되지 않는다. 둘째, 법은 목적이나 동기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그래서 탈 목적적인 행동규칙이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추상적이어야 한다. 특정의 행동을 금지하는 내용을 가진 행동규칙이다.

하이에크에게 법의 일반성과 추상성의 조건은 흄, 칸트의 법철학적 전통이다. 법치주의는 ‘정의의 규칙’에 관한 윤리학적 관점을 법에 적용한 것이다. 정의의 규칙에는 행동동기나 행동목적과 같은 내면적인 것들이 들어있지 않다. 금지될 행동만을 기술한다.

법치주의의 사회적 기능은 다양하다. 첫째로 자유를 보장하고 증진하기 위한 원칙이다. 법으로 예외 없이 금지하는 행동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 그리고 생명을 침해하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그래서 법치주의에서 법은 자유의 법(nomos)이다. 이 같은 법이 자생적 질서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행동규칙이다. 그래서 법치주의와 자생적 시장질서는 쌍둥이 개념이다,

두 번째로 법의 지배원칙은 소유권법, 계약법 또는 불법행위법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인들이나 인간 그룹들이 자신들이 정한 목적이나 삶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준다. 셋째로 법의 지배원칙은 문명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원칙이다. 경제적인 번영은 물론 정신적 번영을 야기하는 사회의 틀을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번영과 비물질적 번영, 그리고 도덕심의 발전도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증진하는 법 때문이다.

 

2.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하이에크는 자신의 유명한 1960년 저서 『자유의 헌법』제7장 ‘다수의 지배’라는 주제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엄격히 구분한다.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내용, 법의 내용을 중시한다. 누가 통치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를 중시한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이 법치주의이다. 이에 반하여 민주주의는 권력의 원천, 법의 원천을 중시한다. 이를 가장 적절히 구현한 것이 주권재민사상이다.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은 법은 그 내용은 무엇이든 법이라고 인정한다. 전형적인 법실증주의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내용이 무엇이든 다수의 지지를 받은 권력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1978년 저서 『법, 입법 그리고 자유』제3권 『자유인을 위한 정치질서』에서 민주주의의 집단적 의사결정의 치명적인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민주적 입법은 차별적이고 타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동이 아님에도 이를 금지하는 입법, 특정한 산업이나 지역 또는 특정한 집단에 유리한 입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적 입법은 법의 지배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이 같은 입법은 대중민주주의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대중영합적인 입법이야 말로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입법이다. 마구 찍어 내는 복지정책과 복지입법, 정부지출과 정부부채의 급증 등은 무제한적 민주주의(unlimited democracy), 즉 대중민주주의 치명적 결함이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억제된 민주주의(limited democracy, demarchy)를 제안하고 있다.

민주정치와 정부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법의 지배원칙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하이에크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제한적 민주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민주주의를 극복하고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양원제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인 헌법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이 같은 제안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헌법을 통하여 입법권을 비롯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해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정부의 공권력 남용을 막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V. 문화적 진화와 자유주의

 

자유사회의 기초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 사유재산의 안정, 동의에 의한 재산의 이전, 계약의 자유 등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도덕규칙과 제도이다. 하이에크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원천이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계획된 것도 아니요,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고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자유를 보장하고 신장하는 도덕과 그리고 시장경제를 야기한 것,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런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를 야기한 것, 이것이 문화적 진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진화와 자생적 질서는 쌍둥이 이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1. 본능과 이성의 중간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로서 문화적 진화는 이성과 본능의 중간에 위치한 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성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진화적 과정에서 형성된 것들이 인간이성에 의해 만든 것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덕규칙과 제도들은 어느 한 정신이나 정신 그룹들이 도저히 가릴 수 없는 수많은 인간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언어, 관습, 종교규칙, 도덕규칙, 시장 등과 같이 문화적 진화의 선물은 인간 이성의 능력을 능가한다.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도덕적 전통과 제도들에 대하여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자유의 기반이 되는 도덕규칙의 진화, 자생적 질서의 진화를 원시사회의 극복에서 찾고 있다. 그는 자유는 문명된 인간들의 가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자생적 질서와 자유의 가치를 반영하는 정의의 규칙을 원시 부족사회를 지배한 도덕과 비교한다.

연대감, 나누어 먹기 모럴, 경쟁을 싫어하는 것, 그룹에 대한 애착심과 애정, 집단주의 사고, 감성적인 사고, 책임을 타인이나 집단에게 돌리는 것 등, 연대모럴(solidarity moral)은 호모 사피엔스의 신경구조와 본능이 형성되면서 점진적으로 생성된 도덕적 가치이다. 이 모럴을 기반으로 하여 15~30명의 부족과 혈연으로 구성된 소규모 사회를 이루면서 수렵과 채취생활을 영위했다. 서로 돕고 나누어 먹으면서 애정과 연대로 뭉쳤다. 인류는 이런 모럴 속에서 생활한지는 수십만 년이나 된다. 시장모럴 속에서 살기 시작한지는 겨우 100~300세대로 알려져 있다.

연대모럴은 우리의 본능에 정착되어 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오늘날 우리의 본능 속에도 남아 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인식대상이 바로 이런 본능적인 인간행동, 본능적인 모럴과 같은 행동규칙, 본능적인 선호구조이다. 오늘날 이런 본능을 구현하여 등장한 미시사회의 예를 들면 가족, 친족관계, 종교단체, 동창회, 향우회 그리고 친구, 친지 관계 등이다. 취미클럽 등과 같은 소규모의 공동체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개인주의, 계약의 충실성, 사적 소유의 존중, 솔직성과 성실성 같은 시장모럴은 배워 습득한 것이다. 인구의 증가와 기술발전, 그리고 특히 정착생활 등으로 인하여 점차 이런 자유주의 모럴이 형성되었다. 시장모럴이 점차 본능적인 모럴을 억누르면서 교환관계가 부족을 넘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폐쇄된 도덕에서 열린도덕으로, 차별적인 도덕에서 보편적인 도덕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부족과 소규모 지역 그리고 심지어 대규모 지역을 넘어서 시장이 확대되었다. 이런 확대와 더불어 부(富)가 증가했고 이로 인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2.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

 

복지국가의 도덕적 기초는 연대이다. 이것은 실업, 일자리 불안, 소득불안, 건강과 노후 불안 등, 모든 불안을 사회구성원들이 연대감을 갖고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연대모럴은 집단주의적이다. 그 원천은 소규모 그룹생활에 적응된 원시시대의 유물이다. 복지국가는 이 같은 소규모 사회의 모럴을 대규모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복지국가 이념을 원시사회의 낭만적인 향수와 합리주의가 결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가 수백만 또는 수천만이 제각기 필요로 하는 다양한 복지수요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회에서나 적합한 도덕적 가치를 극복한 것이 문화적 진화이다. 문화적 진화를 통해서 대규모 사회에 적합한 도덕을 산출한 것이다.

그럼에도 소규모 사회에 적응된 도덕적 가치를 대규모 사회에 적용할 경우 그 결과는 자기 책임, 독립심 등, 대규모 사회의 도덕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연대 도덕은 소멸되고 사회가 갈등 속에 빠진다.

그렇다고 거대한 열린사회에서 애착심, 연대감, 애정 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의 지배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는 그런 이타심이나 연대성의 감정을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인간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런 수많은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본능적인 도덕적 정서, 감성을 향유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도 소규모의 공동체에 적용되는 도덕을 거대한 사회에 적용하려는 야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이에크가 복지정책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선별적 복지이다. 극빈자에 대한 의료와 교육, 주거서비스의 국가 공급, 최소의 소득과 같은 기본적인 편익의 부분에서 정부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능력자, 결손가정 그리고 극빈자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참한 빈곤문제를 당한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국가의 도움은 국가의 중요한 서비스 과제이다.

 

VI.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사상의 이념적 위상

 

하이에크의 정치사상의 이념적 위상은 무엇인가? 이념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여 그의 이념을 보수로 규정하는 것이 온당한가? 이념을 좌익-우익으로 구분하여 그의 사상을 우익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가?

이념을 보수와 진보 또는 우익과 좌익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념의 다양성을 반영할 수도 없고 그 같은 구분은 이념의 내용이나 이념이 지향하는 공공정책의 방향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념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의 구분이 그것이다.

 

우리가 인식론을 기초로 하여 이념들을 구분하면 <그림>과 같이 ‘이념 삼각형’으로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이념들도 제각기 변형된 다양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에도 여러 형태의 자유주의가 있다. 자유이론적 자유주의와 권리이론적 자유주의 등이 그것이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어떤 이념적 위치에 있는가?

하이에크의 이념적 위상은 자유이론적 자유주의에 속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와 흄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에 따른 자유주의이다. 자유와 자유의 기반이 되는 도덕적 기초를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는 자유주의이다. 그래서 그의 자유주의를 ‘진화론적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로크와 노직, 라스바드(M. N. Rothbard) 등의 자유주의는 권리이론적 자유주의로서 이들은 합리주의 전통에 따른 자유주의이다. 합리주의라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권리이론적 자유주의 또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위치에 서있다. 이는 인간이성을 통해서 이상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고 믿음을 전제한 것이다. 자연권이론적 자유주의도 인간이성에 의해서 자연의 법칙처럼 인간사회에도 시간과 장소에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도덕적 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이성에 대한 자연권이론의 낙관은 사회민주주의 이념과도 흡사하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와 같은 선상에 있다. 전자와 후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회의 자생적 변화에 대하여 전자는 매우 낙관적인데 반하여 후자는 비관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변화와 진화를 전제하는 자생적 질서를 중시한다. 그의 자유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환경변화에 대해 사회질서가 스스로 적응할 수 있는 자생적인 힘을 믿는데 반하여, 보수주의는 외부의 현명하고 선한 권위가 없이는 질서의 생성과 유지가 가능하지 못하다고 믿는다.

하이에크는 질서의 원천은 엘리트의 이른바 과학지식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터득한 현장지식이다. 자생적 질서는 이 같은 지식의 산물이다.

 

VII. 맺는 말: 하이에크가 옳았다

 

하이에크의 핵심적인 정치사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정부의 성공적인 계획과 규제는 ‘지식의 문제’ 때문에 가능하지 않고, 1930년대 공황이나 2008년 금융위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오히려 빈곤과 실업 그리고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회질서는 정부가 법치주의를 통하여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확실하게 보호하기만 하면 시장경제와 같이 자생적으로 질서가 형성되는데, 이 자생적 질서야 말로 인간들에게 자유와 번영 속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옳았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례는 많다. 1980년대 그의 추종자였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의 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성공이 그 대표적이다. 독일과 스웨덴에서도 시장경제원칙을 존중하는 정부는 성공했고 그것을 무시한 정부는 실패했다. 오늘날 남유럽이 국가부도 상태로까지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반시장정책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캐나다의 프레이저 연구소의 세계 경제자유지수이다. 이 연구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가 많을수록, 개인소득도 커지고 빈곤도 줄어들고, 일자리 창출도 많아지고 삶의 만족감과 행복지수도 높아진다. 심지어 평균 수명도 높다.

하이에크는 자유를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자유(사유재산)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때문에 한국사회가 문명된 사회로 진입했고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고한 발전을 불러왔다. 바로 이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하이에크의 사상은 한국사회의 장래와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