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憶해 두어야 할 이야기

대우패망秘史

이강기 2015. 11. 3. 16:04

정규재 칼럼

대우패망秘史 1

한국경제

2014년 08월 27일

어떤 기록이든 개인사적이다. 인식 편향을 벗어날 수 없다. 희미한 기억은 종종 거짓을 만들어낸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 차관을 빌렸다는 기억도 그런 종류에 속하지만 이런 오류는 광주건, 5·16이건, 민주화의 기억에서건 결코 피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라쇼몽의 진술들 사이에서 진상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현장에서 같은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의 기억도 다르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위증 무고 사기가 넘쳐난다. 그짓을 잘하면 국회의원도 된다. 국회의원들의 자서전류 출판기념회는 대부분 거짓말 잔치다. 사람들은 구역질을 하면서도 돈 봉투를 내민다.

회고록 분야에서 아마도 최악의 경우라면 춘원 이광수일지도 모르겠다. 춘원은 친일의 기억을 애써 감추려는 듯 잘 알려진 저명한 독립투사의 회고록을 썼다. 유려한 문체의 백범일지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유명 소설가에게 제안이 먼저 갔지만 우여곡절 끝에 춘원에게 일감이 돌아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오발탄이 되고 말았다는 점을 춘원에게 말해주고 싶다. 뒤틀린 시대를 살아내기란 그렇게 어렵다.

누구나 회고록을 쓴다. YS 회고록은 직설적인 표현들이 많아 이회창 김대중 등 많은 경쟁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겼다. 전두환도 노태우도 신정아도 르윈스키도 회고록을 썼다. 그러나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의 회고록은 박정희 개발연대를 추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다. 오원철 수석의 회고록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남덕우 부총리의 《경제개발의 길목에서》를 읽지 않았다면 한국의 경제개발을 논할 수 없고 강만수의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는 개인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70년대 이후 90년대까지의 경제정책사다. 자료가 방대하고 구체적이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기록의 미학이다.

레이건도 썼고 고르바초프도 썼다. 리콴유도 《일류 국가의 길》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발표했다. 자신이 집권했던 50년대에는 싱가포르 여대생들이 필리핀에 식모살이를 갔지만 지금은 필리핀에서 싱가포르에 식모들이 들어온다는 자부심에 가득찬 바로 그 회고록 말이다. 처칠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옛 소련 외무장관 그로미코는 회고록에서 “(외교관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협상 상대에게 은밀히 정보를 흘리는 역공작도 감행한다”고 폭로했다. 전문 외교관이라면 그로미코를 읽어야 한다.

오늘 신장섭 교수가 집필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가 공식 출시된다. 다급했던 춘원이 아니더라도 집필자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안철수 생각》의 저자처럼 펜대는 종종 화자에게 포획당할 위험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는 거인을 상대하는 신 교수를 우선 위로해야 한다. 이 책은 많은 구체적 사실들은 생략한 채 분노와 주장과 때늦은 반발을 쏟아내고 있다. 숫자가 넘치지만 반대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예민한 부분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여전히 말끝을 흐린다. 고의가 아니라면 기억의 편향성이다. 그리고 김 전 회장의 경영철학은 놀랍게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헌재 회고록 《위기를 쏘다》가 김우중의 반격을 불렀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 반발할 김우중은 아니다. 한때는 ‘대우스탄’의 제왕이었던 그다. 이헌재는 놀랍게도 “빅딜을 거부하는 LG반도체의 돈줄을 조았다”는 식의 기억들을 토해 놓았다. 죽이는 측은 완장 증후군일지 몰라도 죽임을 당하는 측의 비명소리는 어떻게 들어야 하나. 지금의 이헌재라면 ‘아뿔싸!’를 연발할 것이다. 기업구조조정은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합리적 인간과 합목적형 인간은 너무도 달라서 결코 화해할 수 없다. 한쪽은 교수나 관료가 되고 다른 쪽은 정치가 혹은 기업가가 된다. 그 점은 우리가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을 때 기억해야 한다. 그 책이 지금 막 배달되어 왔다. (대우패망비사2는 ‘누구 말이 맞나’로 이어진다)
 

 

대우패망秘史 2-그들은 빈정거렸다
 
한국경제
2014년 9월 1일
 
DJ 신흥관료들 기업 이해 없었고
청와대선 재벌 해체론까지 비등
기업에 대한 냉소 저주만 넘쳤다


 
기억을 짜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헌재 회고록《위기를 쏘다》에는 사실(facts)이 적다.《김우중과의 대화》는 자기 최면에 가깝다. 이헌재 전 장관은 “대우는 자살도 타살도 아닌 병사(病死)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제 곽수일 서울대 교수는 “대우 해체는 김우중 회장이 ‘자초한 기획해체’”라고 말했다. 그는 대우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기도 했다. 기획해체에 방점을 찍는 것도 논리적이다. 1970년대 재벌해체론으로부터 형성된 오랜 반(反)기업 적대 진영의 기획 말이다. 그들은 대우의 병사를 지켜보며 냉소를 날렸고, 시체를 치우면서 침을 뱉었다.

며칠 전 김우중 회장은 “당시 내가 국내 사정을 잘 몰랐다. 1년에 240일씩 해외로 나돌아 다니는 사람이 국내 상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는 말을 했다. 무엇보다 정권 교체를 김 회장은 과소평가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동에서 서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그리고 보수에서 진보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재벌 대기업을 경상도 정권과 동일시하는, 본능적 적대감이 신권력을 지배했다. 김 회장은 이 점을 몰랐다. 재계에도 물리적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는 권력 측의 주장이 난무했다. 사정 태풍이 몰아칠 뻔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부랴부랴 소떼를 몰고 북으로 올라갔다. 역시 정주영이었다. 삼성조차 김용철 변호사를 서둘러 채용할 정도로 허둥지둥하던 시절이었다. 김우중은 DJ를 동맹군이라고 착각했다. 좌익 경제학자 고(故) 박현채 교수가 썼다는《대중경제론》이 이제 막 날개를 달았다.

김태동 경제수석이 재벌해체론을 꺼내든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물론 지나치게 과격한 주장이라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그렇게 대부분 재벌은 피해 갔지만 결과적으로 부실그룹 대우는 걸려들었다. 김태동 강봉균 이윤재 등은 모두 시장주의가 아닌 구조개혁 라인업이었다. 처음부터 기업을 이해하는 뇌 구조가 아니었다. 1998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클린턴은 놀랍게도 5대 재벌의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고 비판했다. 대우차를 인수하려던 GM의 로비였을 수도 있지만 한국 측 요구였을 수도 있다. 사실 IMF와의 협상부터가 그랬다. 한국 경제관료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개혁 과제를 IMF 측에 슬쩍 흘리고 IMF가 역으로 그 항목들을 공개리에 요구하도록 잔머리를 굴렸다. 국민들은 그때마다 IMF를 원망했다. 금융감독기구 통합 같은 것들은 그렇게 나왔다. 재벌 개혁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흥 경제관료들의 기업관, 재벌관은 극도로 나빴다. 저주와 비판, 냉소와 빈정거리는 언어들이 춤을 췄다. 대우그룹이 몇 개 계열사를 팔아보겠다고 발표하자 “시장 가격이 낮아 잘 안 팔릴 것”이라며 소금을 뿌렸다. 산업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기업 과잉투자의 뒤치다꺼리를 맡아왔던 그들이었다. 기업이라면 이마를 찌푸리고 재벌이라면 고개를 돌렸다. 대우그룹의 마지막 구조조정 몸부림이었던 1999년 7월 김우중 회장의 사재출연에조차 그랬다. 사재출연 발표가 나오자마자 강봉균은 “김우중은 이미 대주주 자격을 잃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한마디로 계열사 매각은 물건너갔다. 김우중은 강봉균을 탄핵하는 편지를 썼지만 대통령의 회신은 없었다. 강봉균 전 장관은 지금도 빈정거리는 어투로 이야기하는 말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투는 종종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헌재는 치밀한 해체 작업이었다고 자랑했다. 복잡한 워크아웃 절차를 말한 것이었지만 대우 해체를 말하는 중의적 어법일 수도 있다.

 
대우가 법정관리를 추진했을 때 청와대는 “그랬다가는 험한 꼴 보게 될 것”이라며 법정관리 아닌 워크아웃으로 몰았다. 신흥 관료들의 기획해체라는 주장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독설의 포화는 지금도 교환되고 있다. 최근 김 회장의 한 측근은 이헌재와 강봉균이 안철수 진영에 들어갔던 일을 놓고 “원래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라고 비꼬았다. 김 회장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대우패망秘史 3 - 부채의 영구기관論
 

한국경제

2014년 09월 12일

 

기획해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수많은 반론도 존재한다. 부채가 사상 최대였다는 법의학적 증거도 있다. 이는 명백하다. 우선 1997년 말 이후 1998년 9월 말까지 불과 9개월 동안 기업어음(CP)만도 12조3000억원까지 불어났다. 1997년 말의 3조6000억원에서 거의 4배가 됐다. 회사채도 두 배나 늘어났다. 8조4000억원이던 회사채는 16조3000억원에 이르렀다. 아직 대우 해체 1년 전이었고 그것도 분식회계를 감안하지 않은 수치다.

CP와 회사채 등 소위 시장성 차입이 급증하는 것은 최근의 LIG그룹과 동양그룹, STX에 이르기까지 기업이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판박이 과정이다. 제도권 금융이 막히면 기업들은 시장으로 달려간다. 절벽으로 치달아가는 마지막 순간은 그렇게 배임과 사기죄의 경계선에서 외줄을 타게 된다. 대우그룹은 정부가 은행 차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자금난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럴듯한 논리다. 수출금융이 막혔기 때문에 여기서만도 15조원의 자금핍박이 있었고 쌍용차를 인수한 이후 다시 3조원을 회수당했다는 것이다. 또 1998년 7월 CP에 대해, 10월엔 회사채에 대해 발행제한 조치가 내려진 것도 대우그룹의 붕괴를 노린 음모론적 공세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대우에 직격탄을 날린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노무라증권의 보고서도 10월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가 발표된 직후에 터진 것이다. 과연 대우의 이런 논리는 맞는 것일까. 불행히도 김우중에 대한 불신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김우중은 ‘금융’을 갚아야 할 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 않나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김 회장은 조달이 가능한 동안은 최대 규모의 확장경영만을 시도해왔던 터여서 부채의 한계 이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억원이 있으면 100억원을, 100억원이 있으면 1000억원짜리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사람이 김우중이었다. 아니 10배 정도가 아니라 150배를 운영했다는 일부의 분석도 있다.

김 회장의 ‘부채 경영’은 실제로 대우그룹에 대한 시중의 그런 오해를 강화시켜왔다. 회사채와 CP 발행 제한 조치들은 모두 대우그룹에만 해당됐다. 이것은 표적 설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우의 취약성이기도 했다. 수출을 할 테니 무역금융을 달라는 김 회장의 호소를 강봉균 수석은 “자금 융통을 위해 거꾸로 외상 수출을 하려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아니 강 수석의 생각마따나 김 회장은 10조원을 주면 100조원을 더 달라고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후자가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만일 김 회장의 ‘부채-확장 노선’이 관철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대우는 국내 1위 그룹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필시 제2의 외환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무한 자기동력, 즉 영구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부채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그런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 회장은 지금 다시 금융이 밀어줬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김우중 아닌 그 누구라도 금융이 밀어주는 동안 망할 기업이 있겠는가. 충분한 금융이 주어졌더라면 짧은 시간 내에 대우는 중국에서 인도까지, 그리고 대우스탄을 아우르는 신흥시장을 지배하는 최강자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몽골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김 회장은 킴기즈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지만 몽골이 무너진 것과 같은 이유로 무너지고 말았다. 영토 확장이 끝나면 제국도 끝나는 것처럼 대우도 금융 확장이 끊어지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김 회장이 국가적 손실을 거론하면서 분노하는 대우자동차 헐값 매각 주장은 다소 의외다. 아파트도 건물도 땅도 공장도 팔려나오면 헐값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옷장사도 나중에는 무게를 달아 팔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소유권에 지각변동이 오고 쌓인 시체 위에서 서서히 원래 가격이 회복되는 것이 경기 순환이요 기업의 삶과 죽음이다. 더구나 김 회장의 처지라면 더욱 헐값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 김 회장 본인도 그렇게 헐값으로 기업을 인수하면서 대우그룹을 일궈 오지 않았던가.

 

대우패망秘史 4·끝 - 김우중과의 식사

한국경제
2014년 9월 15일
 
"제가 국제적 사기한이고 대우그룹이 범죄집단이었다면 어떻게 지금도
대우가 만든 마티즈가 로마 시내를 가장 많이 질주하고 있고, 전 세계 바다
위를 대우가 만든 수백 척의 배들이 항해하고 있으며, 대우가 건설한
아프리카 중동의 그 많은 고속도로 위로 차들이 질주할 수 있겠습니까"

김대중 정권이 기업들을 죄수 딜레마 게임으로 몰아넣은 것이 빅딜
삼성그룹의 자동차·전자 빅딜 거부가 대우 자금난에 결정타 날려
기업가 멸종 시대에 김우중 대우 회장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

음모론은 복잡한 인과관계를 쉽게 이해시킨다. 그러나 신흥관료 집단의 기획 해체라는 음모론적 주장을 수용하더라도 의문들은 여전히 남게 된다. 빅딜은 과연 누구의 기획이었는지, 김우중은 결국 삼성 이건희와의 대결에서 패한 것이 아닌지, 왜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해외로 도피했는지 하는 의문들 말이다. 기업가 김우중과 정치인 김대중의 내밀한 관계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가장 큰 의문은 역시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 본인에게 돌아간다. 김우중 회장은 과연 모래성을 쌓았을 뿐인가. 한마디로 그는 국제적 사기한이었는가. 이 마지막 질문에 이르면 평가는 극명하게 갈라진다.

김 회장이 해외 도피생활 2년여 만에 당시 경제부장이던 필자에게 보내왔던 편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죽기보다 사는 것이 더욱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참담한 문장으로 시작한 이 편지는 우리가 그에게 던지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제가 국제적 사기한이고 대우그룹이 범죄집단이었다면 어떻게 지금도 대우가 만든 마티즈가 로마 시내를 가장 많이 질주하고 있고, 전 세계 바다 위를 대우가 만든 수백 척의 배들이 항해하고 있으며, 대우가 건설한 아프리카 중동의 그 많은 고속도로 위로 차들이 질주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의외지만 강만수 전 장관도 그렇게 보는 사람이다. 그는 산업은행 회장 시절 대우건설, 조선해양, 증권을 직접 경영하면서, 대우의 세계경영 현장을 세밀하게 추적한 경험을 지금도 김우중이라는 이름 석 자와 함께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강만수 회장이 세계를 돌며 대우의 세계경영 현장을 뒤늦게 재확인해나갔던 이 기억의 종합은 어느 정도는 평가자들의 합의 수준과 부합한다. 세계를 무대로 장사를 하는 상사맨들에게 어느 회사가 가장 우수한 경쟁사인지 물으면 기다릴 필요없이 대우인터내셔널이라는 답을 지금도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지원도 충분치 않은데 정말 잘해 나간다”는 답을 듣는 것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GM으로 간판을 갈아끼운 대우차는 우즈베크 등 과거의 ‘대우스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다. 대우건설은 원전 건설 경험을 온전히 갖고 있는 유일한 한국의 건설사라는 이유로 해외 매각이 사실상 금지돼 있다고 할 정도다. 대우증권은 증권계 인재의 풀이요 사관학교다. 대우그룹에 속한 기업들 중 어느 하나 근거 없이 과대평가된 기업은 없다. 그런데 그 대우가 무너졌던 것이다. 수출 애국에 청춘을 바쳤던 대우맨들은 지금까지 세계경영연구회 등의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미련은 너무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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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선진국 아닌 중국과 동구권과 스탄지역들과 남미를 석권할 태세였기 때문에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됐더라면 개도국들이 날개를 펼친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차원을 달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에…”라는 것은 없다. 대안(alternative)의 역사는 패배자의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대한민국 재계 1위를 꿈꾸었던 대우였으니 왜 회한이 없을 것이며, 땅을 치는 억울함이 없을 것인가. 대구의 방천시장에서 새벽 신문을 팔던 소년 김우중은 당시에도 외상으로 신문을 먼저 돌리고 돈은 나중에 받는 기발한 영업 수완을 발휘했다. 오늘날 무역금융의 기능을 고스란히 활용했던 장사꾼 김우중이었다. 그러나 장사꾼이 합리주의자, 주자학자들이 지배하는 관존민비의 시대를 살아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관료지배를 가능하게 해준 IMF통치는 지금도 내재화돼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아직 김 회장은 78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도피생활이 길어진 것은 독일서 심장수술을 받아야 하는 등 건강이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 다른 사람이 볼까봐서인지 식당에서도 출입구 쪽에 등을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그는 15년이나 도피와 감옥과 은둔자의 생활을 보냈다. 자세도 편치 않았다. 곤란한 질문들은 종종 잘 못 알아들었다. 새로운 단어와 문장과 논리를 이해하고 치열하게 토론하기에는 이미 고령이었다. 대통령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질문 자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예전에는 달변인 그였지만 자꾸 말이 끊어졌다. 대선자금에 대한 질문은 아예 원천 부인했다. 삼성과의 빅딜에 대한 질문은 특히 불편해했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메인요리도 안 먹겠다고 했다. 그러나 화제가 바뀌고 기분이 풀리자 웨이터를 불러 다시 요리를 주문했다.

예전 같았으면 얼굴을 붉혀서라도 날카롭게 주장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이 있어서”라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이 서둘러 자리를 뜨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화제는 선을 넘지 말아야 했다. 그는 지난 15년간 수도 없이 복기하고 또 복기했을 것이다. 화제는 기억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김 회장과의 짧은 식사 만남은 그렇게 겉돌았다. 베트남에서 한국 청년들을 무역인재로 새로 키워내는 일에 화제가 미치자 예전의 속사포 같은 언어들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100세까지만 살 수 있다면 청년 무역인재 100만명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놀랍게도 그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병철 석 자가 먼저 튀어나왔다. 빅딜이 사실은 재계 판도를 일거에 뒤엎어버리자는 대우의 그랜드 디자인이 아니었던가를 묻고자 했지만 질문도 겉돌았고 답을 듣지도 못했다. 아니 빅딜 자체를 건성건성으로 말했다.

자동차 빅딜은 삼성 측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성이 대우전자를 가져가고 자동차를 대우에 넘긴다는 계획을 삼성이 먼저 제안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업구조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회장은 1998년 봄 이미 쌍용차를 인수한 터였다. 3조~4조원대의 인수금융을 받고 삼성자동차를 인수한다는 전략은 남는 장사였다. 김 회장은 인수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 회장의 야전 집무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삼성 실사팀은 대우전자 인수불가 판정을 먼저 내렸다. 분식회계 장부를 들고 삼성에 투항한 대우 측 임원도 있었다. 대우전자 인수작업에 참여했던 전 삼성그룹 관계자는 대우전자 분식에 대해 지금도 고개를 흔들고 있다. 시간은 대우에 불리했다.

대우 못지않게 삼성에도 충성스런 부하들이 많았다. 어떤 부하는 빅딜 반대를 내걸고 이건희 회장에게 사표까지 냈다. 삼성과의 빅딜이 성공했더라면 대우는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기어이 삼성자동차를 독자 청산하기로 했고 대우의 손을 뿌리쳤다. 대우에 인수금융을 주면서 끌려갈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정권은 이렇게 기업가들을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몰아넣었다. 사재 출연 등 적지 않은 출혈이 있었지만 삼성은 결국 독자 청산의 길을 택했다. 문제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삼성의 일부 금융계열사들이 대우채를 회수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김 회장이 허리를 굽혀 이 회장의 집(승지원)에까지 찾아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회장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달랐다. 대우는 이헌재와 강봉균의 말마따나 시장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김우중만한 기업가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창업가요, 신천지의 발견자요, 세계 지배의 야망을 꿈꾸었던 사람 말이다. 아니 기업 행위를 사실상 불법화해놓은 경제민주화의 관치국가에서 더 이상 무슨 큰 기업가가 나올 것인가. 대우사건은 그렇게 성장체제의 문을 스스로 닫아 걸어버린 사건 중의 사건이다. 의도와 결과는 천양지차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더는 세계를 경영할 의욕도 능력도 없다는 것인지, 이제 한국인은 세계시장 따위는 잊은 것인지를 김 회장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