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근대사분과)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45분 곤녕합. 사복을 입고 도검으로 무장한 일본자객 5~6명이 고종과 왕비의 처소에 돌진하는 순간, 궁내부대신 및 일부 시위대 소속 장교가 고종을 보호하려고 시도했다.
일본자객이 곤녕합 방에 침입하자 궁내부대신 이경직은 곤녕합의 방으로 뛰어갔다. 당시 곤녕합의 방에는 왕비를 비롯한 3명의 여인이 있었다. 이경직은 왕비를 구하기 위해서 일본자객에게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이 순간 일본자객은 칼을 번쩍이면서 이경직의 두 팔을 잘랐다. 이경직은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경직이 방바닥을 뒹굴며 몸을 가누지 못하자 일본자객은 이경직을 옆방으로 옮겨서 폭행했다. 이경직이 간신히 몸을 빼서 마루 끝으로 나아갈 즈음, 일본자객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이경직의 다리에 총을 쏘았고, 칼로 찔러 죽였다.
[사진 1] 1900년대 초에 촬영한 건천궁 곤녕합 옥호루 모습 ⓒ문화재청 경복궁 홈페이지
두 팔이 잘려 피를 흘리며 이경직은 생각했을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다 비열한 인간인 거야. 만일 조선인이 비겁하게 도망가면, 그는 비열한 인간일 뿐이야.’
시위대 1대대장 이학균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변의 시위대 병사와 함께 일본자객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그 순간 이학균은 누군가에 의해서 떠밀려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이학균은 일본자객이 궁녀를 추격하며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느새 의식을 찾아보니 이학균은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전투 현장을 누비며 부하를 늠름히 지휘하던 그였다. 서글펐을 것이다.
시위대 연대장 현흥택은 곤녕합 주변을 포위한 일본인 20여명을 목격했다. 현흥택은 칼을 소지한 유럽식 복장, 칼을 찬 일본인 복장, 총을 멘 일본 군대 복장 등의 일본인을 목격했다. 5시 50분경 곤녕합에 들어간 현흥택은 시위대 군복을 유지했기 때문에 바로 일본자객의 표적이 되었다.
“왕비가 어디 있느냐?”
일본자객은 손을 묶은 상태에서 현흥택을 구타하며 답변을 강요했다.
“나는 시위대 현흥택이다. 너희들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난 왕비가 어디 계신지 모른다.”
현흥택은 끝까지 저항했다. 고종 앞에서 현흥택이 끝까지 침묵하자 일본자객은 현흥택을 건청궁 주변에 있는 각감청으로 끌고 가서 또다시 왕비의 소재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현흥택은 반응했다. 고통에 대해 비명과 눈물로 대답했다. 비열함에 대해서는 분노로,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구역질로 대답했다. 이것이 그의 삶의 선택이었다.
5시 50분경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는 건청궁에 도착했다. 곤녕합의 오른쪽 왕비의 거실 옥호루에 여인들의 시신이 안치된 것을 목격했다. 고바야카와를 비롯한 일본자객은 그 중에 왕비의 시신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미닫이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처참하게 들려 왔다.”
고바야카와는 건청궁 곤녕합에 도착했던 순간을 기록했다.
곤녕합의 마루 옆의 침실에서는 일본 병사와 자객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두려움에 정신을 잠시 잃었던 고종은 곤녕합 마루에 환관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흰옷을 입은 여인들이 “산 사람의 몰골이라고는 볼 수 없듯이 부들부들 떨면서” 곤녕합 마루로 밀려 나왔다.
그 중에는 “흰옷에 선지피의 핏발을 받아 얼굴에까지 핏방울이 튄 기품 있는 연소한 여인”도 있었다. 그 여인은 왕세자비였다. 그 때 곤녕합 주변에는 왕비가 몸을 피해 숨어버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순간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國友重章)는 피를 뒤집어 쓴 왕세자비를 붙잡고 칼날을 가슴에 겨누었다.
“왕비가 있는 곳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구니토모는 일본어로 위협했다. 왕세자비는 너무 화가 나서 심지어 울고 싶기까지 했다.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 가슴에 얹혀서 계속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이고!”
왕세자비는 단지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왕비가 어디론가 숨었다는 소식에 곤녕합 주변이 더욱 소란해졌다. 다급해진 일본 군인과 자객은 무기를 들고 건청궁 주변의 빈 방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 중 일부는 시위대가 버리고 간 총을 이용하여 닫힌 문짝을 부수었다. 다른 일부는 곤녕합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왕비를 찾았다. 6시까지 일본 군인과 자객은 혈안이 되어서 건청궁의 여기저기를 수색했다.
일본 군인과 자객은 지칠 대로 지치고 숨결마저 거칠어 갔다. 이 모든 것은 한 여인을 수색하여 살해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국모의 살해를 위해서!
사바찐은 그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명령을 기다릴 필요 없이 사바찐은 곤녕합 난간에서 신속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환영받지 못한 목격자 사바찐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외국으로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사바찐은 10월 18일 오전 8시 30분 프랑스 함장 리베 일행과 함께 가마를 타고 제물포로 출발하였다.
사바찐은 뮈텔주교를 포함한 주변 사람에게 말했다.
“텐진(天津)으로 떠나며 2달 후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바찐의 도착지는 즈프(芝罘)였다.
[사진 2] 최근 복원된 건천궁 전경 ⓒ문화재청 경복궁 홈페이지
제물포에서 포함 까레이쯔(Кореец)에 몸을 실으며, 사바찐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기나긴 도피에 대해서도, 기나긴 하루에 대해서도, 또다시 조선에 돌아갈 수 없다는 우울한 소식에 대해서도. 지금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자는 생각뿐일 것이다.
사바찐은 살고자하는 본능 때문에 자신의 목격을 모두 증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비겁한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생사를 넘나든 을미사변의 하루를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사바찐은 즈프에서 기억의 편린을 복원하는 보고서 작성에 매달렸다. 보고서 완성의 순간 비밀의 방이 사바찐의 마음속에 꿈틀 거렸다. 그 방문을 열려는 순간 사바찐은 또다시 본능적으로 그 비밀의 방에 자신을 숨겼다.
‘높이 샘솟는 분수가 눈물처럼 흘러내리듯 내 마음 속에 가눌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분수의 물보라가 다시 속삭이듯 나의 슬픔이여 기쁨이...’
[사진 3] 『명성황후 최후의 날』(말글빛냄, 2014) ⓒ말글빛냄
*이 글은 위의 책 김영수,『명성황후 최후의 날』(말글빛냄, 2014)에 기초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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