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북한 주민의 통일 열망
남북한은 사실상 전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1974년 분단된 지중해의 섬나라 키프로스를 제외하면 그렇다. 독일, 베트남, 예멘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캄보디아 등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런데 왜 남북한은 통일을 못하고 있을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통일을 국시(國是)로 규정해 놓고 살아 온지 어언 70년이 지났지만 분단은 지속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남북한 주민이 통일을 바라지 않아서일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상징하듯이 남북한 주민들의 통일에 대한 지통일시대지와 열망은 매우 강력하다. 2014년 통일연구원의 『통일정책연구』에 따르면 제3국에서 북한 주민 100명을 면접조사 한 결과, 95명이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답변했고, 나머지 5명만 ‘반반이거나 그저 그렇다’고 답변했다. 반면에 2014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남한 주민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55.8%가 ‘통일이 필요하다’고 했고, 21.7%가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답변했다. 남한 주민의 통일에 대한 지지는 북한주민의 열망에 비해 다소 떨어지긴 해도 여전히 통일을 반대하는 것보다는 통일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론이 상대적으로 높다. 남북한 주민들의 통일 열망은 통일 이전의 독일 국민들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높다. 남북한 주민들의 통일의지는 과거의 독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89년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기 약 6개월 전 독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통일을 기대한다’는 응답은 약 15%에 불과했다. 남북한 주민들의 통일 열망만 보면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2. 한반도의 ‘반(反)통일세력’
통일이 안 되는 이유를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제도적 차이 때문에 통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1인 수령독재로 전락했고, 계획경제는 붕괴된 지 오래이며, 국유제는 유명무실해졌고, 맑스주의는 오래 전에 폐기되었다.형체도 없는 사회주의 때문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 않다.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통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수령세습독재 사회이기 때문에 통일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수령세습독제 체제인 북한정권의 존재 자체가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과거보다는 줄었지만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의 절대적인 통일 열망에 비해, 북한 정권의 통일에 대한 의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정권은 통일 자체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물론 북한의 통치자와 집권층은 수시로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당위를 주장하는 것과 실제 통일을 바라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남북한의 차이가 ‘정상’ 대 ‘비정상’, ‘문명’ 대 ‘비문명’에 이르게 되어 통일은 기존체제에 안주해 온 북한정권에게는 변화의 강요로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수령세습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조건에서 한반도 통일을 원한다고 볼 수는 없다. 수령체제의 유지와 통일이 양립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으로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으며, 폭압통치의 이완은 수령체제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어 체제붕괴의 위험이 크다. 북한정권이 ‘남북통일=체제붕괴’라고 생각하는 이상 통일논의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 수령체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정권은 한반도 통일을 반대하는 유일한 ‘반(反)통일세력’이다.
3.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
다양성에서 발생하는 ‘차이’보다는 ‘격차’에서 오는 불균형이 통일에 심각한 어려움을 준다. 통일은 각기 다른 2개의 주권을 하나의 주권으로 합치는 ‘권력투쟁의 과정’이다. 통일논의에서는 반드시 주도권의 문제가 생겨나 쌍방이 합의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극단적인 격차가 존재하거나 합의에 의한 통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극단적인 적대관계에 있는 남북한이 통일에 나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대등한 입장에 섰을 때 가능한데, 남북한의 경제격차는 국민총소득은 42배, 1인당 국민총소득은 20배에 이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한의 격차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통일하자고 나설 리가 만무하다. 북한정권은 남한의 월등한 국력과 경제력 때문에 한반도 통일이 독일처럼 흡수통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남북한의 극단적인 격차는 북한정권으로 하여금 남한주도의 ‘흡수통일’을 경계하게 만들었다. 흡수통일은 북한체제와 정권의 생존문제와 직결된다. 북한이 흡수통일 경계론을 일관되게 강조해 온 이유이다. 설사 북한을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에서 합의에 의한 대등한 통일을 한다고 해도, 통일 이후 북한의 현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통일한국에서 수령세습체제와 극악한 공포통치가 유지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리고 통일 이후 일정기간 과도기를 통해 북한의 현 체제와 시스템을 유지시켜준다 하더라도 수령독재와 계획경제시스템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두 체제 사이에 적절한 중간지대나 제3의 길을 위한 타협점을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북한의 이념과 제도의 좋은 점을 절반씩 받아들여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식으로 만드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북한정권이 수령세습독재 체제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면, 남한 주도의 통일에 동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이 통일국가의 체제 선택에 대한 주도성과 확실한 지분을 가질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남북한이 통일여부에 대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남북한 전체 주민을 상대로 한 의사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통일체제와 통일헌법, 통일대통령 및 지역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필요하다. 최소한 한두 번의 국민투표는 피해갈 수 없고 남북한 주민 모두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남북한 주민의 인구구조가 2배 차이가 나는 조건에서 남한의 국민들이 현재의 북한체제와 정권을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주민의 상당수도 김정은을 ‘통일대통령’으로 뽑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선거를 통한 통일한국의 대통령으로 누가 김정은을 선택하겠는가?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통일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북조선 주도의 ‘적화통일’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공가능성도 극히 낮지만 북한이 남한을 적화해 본들 자유에 적응된 남한 주민들을 북한식 공산독재에 적응시키고 통제할 능력이 있을까?
북한정권과 집권층은 통일 후 자신들의 기득권 상실 걱정 때문에 통일에 적극 나서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누려온 각종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굳이 통일을 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대등한 수준에서 권력분배가 이루어지는 통일이 아닌 이상, 남한주도의 체제통일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진다고 보기 때문에 반대한다. 엄청난 이권사업을 포기해야 하거나, 부정 축재한 재산을 몰수당하고 처벌받을 수통일시대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북한의 기득권 세력이 통일에 나서려면 최소한 이러한 문제를 눈감아 주거나 용인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가능하다. 특히 북한의 집권세력은 각종 반인권적인 행위의 가해자였기에 과거사청산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특권층은 기득권 보장과 처벌면제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이는 통일에 적극성을 가질 이유가 없다.
4. 김정은의 통일전략
1990년대 이후 북한의 통일전략은 ‘분단체제의 현상유지’로 전환했다고 판단된다. 북한정권은 한국 주도의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으며, 자신의 주도권이 보장되는 통일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남북의 격차가 심해지고 북한의 체제실패가 돌이키기 어렵게 되면서, 북한 주도의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져 버렸다. 남북한 힘의 역관계 변화를 인식한 북한정권은 점차 통일논의를 기피하는 방어자세로 전환했다. 통일논의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의도와 무관하게 남한의 주도성 확보를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적화통일 노선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한국’ 또는 ‘분단의 영구화’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겉으로는 ‘하나의 조선’ 논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체제생존을 위해 남북공존과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다. 대남전략의 핵심이 ‘체제유지’에 있는 조건에서 북한이 주장해 온 남조선 혁명전략과 통일전선전술은 지금에 와서는 현실성이 극히 낮아져버렸다. 김일성 시대에는 대남적화통일을 적극 고려했겠지만, 김정은시대에는 적화통일은 고사하고 체제유지에 집중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남북관계의 발전이 통일논의로 이어질 것을 걱정한다. 남북화해와 교류가 확대되어 북한의 변화 압박이 증대되면 체제불안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발전은 통일논의로 이어져 북한주민의 통일열망을 자극할 수 있다. 북한주민들의 통일 열의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북한체제의 불안정성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과도한 남북관계의 발전은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때문에 김정은 정권의 입장에서는 남북관계를 냉온탕을 오가는 식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어 합의 번복과 대남 무력도발을 수시로 행하고 있다. 북한 내부 상황의 불안정성 때문에 남북관계의 예측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북한정권과의 통일논의가 갈수록 어려우지고 있는 이유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는 한 북한이 우방국의 힘을 빌어 남북통일에 적극 나설 가능성도 별로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통일 환경 자체가 북한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방인 러시아와는 이미 동맹관계에서 정상적인 국가 간의 관계로 전환된 지 오래이고, 중국과도 혈맹관계에서 정상적인 국가 간의 관계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있다. 앞으로도 북중관계나 북러관계는 국제적인 진영논리보다는 실리적인 관계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과거처럼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원을 앞세워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에 중국이 북한을 버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이 북한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북한 중심의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사고치지 않는 수준에서의 현상유지나 안정적인 관리가 당면한 목표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 주도의 통일을 내놓고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통일시대그렇다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지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김정은으로서는 통일논의 자체를 부담으로 느끼고 있다. 일관되게 주장해 온 연방제 통일방안도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은 실행의지가 결여된 선전문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남북한 간의 ‘느슨한 연방제’도 큰 부담을 느낄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김정은은 당 창건 70년 기념 논문에서 ‘조국통일은 민족의 최대과업이며, 외세를 배격하고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통일에 대한 입장도 아버지 김정일의 통일에 대한 주장과 거의 다를 게 없다. 표면상 통일을 원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통일논의를 피하며 체제유지에 주력하고 있다. 당위와 명분 때문에 남북관계의 발전과 통일의 필요성을 주민들에게 언급하고는 있지만 남북대화와 통일논의 자체를 기피하는 태도는 강화되고 있다.
5. 우리의 통일전략
한국 내 민간의 통일운동에서도 북한의 처지를 반영한 뚜렷한 변화가 발생했다. 북한체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통진당류의 종북세력은 북한의 통일기피증을 간파하지 못하고 80년대 식 통일운동의 관성에서 잘 벗어나지 못했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내세운 ‘코리아연방공화국’은 민주노동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통령 후보의 ‘상상하라 코리아연방’으로 이어졌다. 반면 비종북좌파 세력들은 언제부터인가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을 잃었고 통일을 사회운동의 주제에서 거의 배제해 버렸다. 대조적으로 보수우파는 점차 통일운동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어 통일운동이 좌파의 전유물이었던 80~90년대의 판도가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한의 주장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던 통일운동이 급속히 퇴조하였다는 점이다. 반면에 북한이 처한 현실과 북한정권의 통일에 대한 태도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통일운동의 과제를 요구하고 있다. 분단의 고착화를 원하는 북한의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통일 회피 전략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이다.
통일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회피하려는 북한의 태도와 체제유지 전략이 바뀌지 않는 한 통일은 요원하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북한이 통일을 원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이 통일에 나설 의사가 없다면 우리의 대북·통일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한반도 통일논의가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일의 동력을 찾아야 한다. 통일을 이끄는 동력은 북한 정권이 아닌 남북한 주민, 특히 북한주민의 통일열망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주민의 마음을 얻는 노력,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북한체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통일논의는 무의미해 질 수 있다. 통일의 주체도, 통일을 이끄는 힘도 남북한 주민들에게서 나온다는 진리를 새겨보아야 한다. 남북한 간의 통일 논의가 본격화되기 위해서는 북한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대북·통일전략과 정책이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만이 통일시대를 제대로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