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韓, 南北關係

북한과 함께 몰락의 길 걸은 조총련 60년

이강기 2016. 1. 5. 15:26

[파워인터뷰] 북한과 함께 몰락의 길 걸은 조총련 60년


[양정아 | 편집장 ]

시대정신 2015, 11.12월호

 

광복 70주년을 맞아 해외 동포들의 아픔과 조국애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재일교포들은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투영하고 있는 존재다. 지금은 차별과 한계를 딛고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둬 자신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지만 재일교포 사회에는 남북한 못지않게 갈등과 분열을 겪어 온 역사가 있다. 동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후 북한 정권을 대변하는 존재로 전락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때문이다.


조총련은 조선노동당의 직접 지도 아래 일본 안의 북한 공화국을 만들었다. 북한과 동일한 조직 체계, 교육체계를 갖추고 수령절대주의를 주입시켰다. 일본은 비록 자유민주주의 사회이지만 교포 사회 내의 폐쇄성과 일본 사회의 차별이 맞물려 60년 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실체가 전 세계에 드러나고 경제적으로도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조총련 또한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이번 호 시대정신은 조총련 출범 60주년을 맞아 박두진 코리아국제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박 소장은 조총련 핵심세력을 키워내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를 지내 북한과 조총련의 실체에 밝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토론회 참석 차 9월 중순 서울을 방문한 그는 한국의 전문가들이 북한을 정확히 보지 못한 채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총련과는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나


나는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북한 귀국운동이 벌어졌다. 그때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심했고 빈곤했기 때문에 북한이 지상낙원이고, 자기 능력에 따라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다들 가고 싶어 했다. 물론 조총련이 나서서 이런 허위선전을 했지만 교포들이 조총련 말만을 무조건믿은 것은 아니다. 일본의 미디어, 정치 등 모든 사회가 나서서 북한은 좋은 나라라는 선전을 했다. 귀국운동의 열기가 있을 때 조총련의 청년운동에 나섰고 이후 추천을 받아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공부하게 됐다. 졸업 후에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 조총련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조총련의 실체가 밝혀지게 됐다. 차별과 빈곤을 없애기 위해 이 운동에 나선 것인데 알고 보니 지도부 사람들은 귀족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밑에는 혁명을 요구하면서 자기들은 자본주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이용당하는 인생을 살면 진실성을 잃게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선대 교수라는 직위와 조총련에서의 경력이 내가 가진 전부였지만 가짜 인생을 던질 필요가 있었다.


그 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우연하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서 7년쯤 함께 일했었고 이후에는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2000년쯤 황장엽 선생을 만난 것을 계기로 북한민주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2006년 코리아국제연구소를 만들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북한민주화를 위해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탬이 될 말한 일을 하고 있다.


북한 직접 지시 아래 조총련 만들어
북송사업으로 막대한 자금 원천 확보


조총련은 올해로 출범 60주년을 맞았다. 조총련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해방 직후 일본에 있던 재일교포들은 식민지의 쓰라린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의식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텔리들은 거의 좌파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맑스-레닌주의를 통해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고 소련이 식민지 해방운동도 지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해방 직후 1945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이라고 해서 조련이라는 조직이 생기게 되는데 우파와 좌파가 함께 만든 재일교포 조직이었다.


그러나 아까 말했던 데로 좌파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1년 뒤에는 우파를 쳐내고 조직을 장악했다. 거기서 나온 사람들이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만들었다. 지금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모태가 된 단체다. 당시 교포들은 머지않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제 아래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조련에서도 본국 귀국을 돕는 사업, 권리 옹호 사업을 비롯해 교육 사업을 중점적으로 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전에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국어강습소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600여개가 운영됐고 4만 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이곳이 조선학교의 시발점이 됐다. 주로 일본에 유학하러 온 인텔리들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때 조련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국제공산주의운동은 기본적으로 1국1당 원칙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일본 공산당 밖에 인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에 있으면 조선 사람이라도 일본 공산당원에 속한다. 결국 조직은 조선인 조직이었지만 일본 공산당이 지도하는 구조가 됐다. 그러다 1949년 한반도에서 전쟁의 전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미군 점령군이 공산당을 전부 폐쇄했다. 마침내 전쟁이 터지자 일본 공산당은 과격한 투쟁을 시작했다. 북한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철길을 막는다든지 화물차를 저지하는 방식의 폭력을 사용했다. 거기에서 선봉대 역할을 한 것이 조선인이었다. 다치기도 일쑤였고, 경찰에도 많이 잡혀갔다. 그 와중에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한덕수 등이 북한으로 사람을 보냈고, 김일성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과도 협의를 하고 일본 공산당에도 서신을 보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공산당 지도 아래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국제 공산당 지도자와도 얘기가 됐기 때문에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조선 노동당으로 오너 체인지가 돼서 조선노동당이 재일본 조선인 좌파 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55년 5월 25일 조총련이 만들어졌다. 조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지지·옹호하는 것과 한반도 통일을 실현 하는 것, 민족 권리를 지키는 것 등 총 8개의 강령을 정했다. 조총련 결성 전 1952년에는 좌우파 교포들이 함께 신용조합을 만들었는데 조선학교와 함께 조총련을 떠받드는 두 개의 기둥이 되었다. 조총련의 최전성기는 1960년대로 당시 전체 재일교포를 60만 명이라고 했을 때 그 중 50만 명은 조총련의 영향 하에 있었다. 군대와 감옥만 없을 뿐 그 외에는 다 있었다. 일본 속의 북한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국가와 마찬가지였다.


북송사업을 통해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 동안 대략 10만명의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나


당시 우리 누나 가족들도 북한으로 갔었다. 그때는 북한에 큰 배가 없어서 소련에서 배를 두 척 빌렸다. 1960년과 1961년 두 해 동안 전체 귀국자 10만 명 중 80%가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 이후에는 숫자가 줄었다. 북한에 막상 가보니 일본에서 들었던 선전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이후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귀국사업에 적극 호응하지 않았다. 조총련으로서는 귀국사업을 통해 막강한 재정 원천을 확보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사회에 가면 돈이 필요 없으니까 일본에 두고 가라고 하며 조총련에 기부할 것을 종용했다. 우리의 역사를 모르면 안 된다고 해서 학교도 확대됐다.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교포들이 차별과 빈곤 속에서 살았다. 공부를 한다고 해도 될 수 있는 직업이 없어 대부분 공장에서 일했다.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귀국운동을 통해서 젊은이들도 희망을 갖게 됐고 민족적 자각도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는 민족적인 각성을 높이고 동포사회를 활성화시킨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을 오고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편지를 보면 나쁜 내용도 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1975년 북일 교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고, 이후 실상이 차차 알려졌다. 그러나 이 귀국 사업을 통해 북한과 떨어질 수 없는 가족이 10만 명이나 생겨나게 됐다. 동포 사회 전체가 북한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본국에 있는 가족들이 인질이 되어 재일교포사회가 구속을 당하게 됐다. 오늘날까지도 북한이 재일교포 사회에 힘을 가지는 원천이 됐다.


북한 입장에서도 귀국사업은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 면이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사회주의 사회로의 유례가 없는 민족대이동은 국제공산주의운동 측면에서도 큰 선전이 됐다. 일본 입장에서는 당시 재일본 조선인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생활보호 대상자가 꽤 있었다. 이들이 대거 북한으로 감으로써 재정 부담이 줄었다. 일본 공산당 활동에서 알 수 있듯 반정부 투쟁에는 주로 조선 사람이 앞장섰다. 또 가난하니까 범죄도 꽤 있었기 때문에 치안이 좋아지는 효과도 기대했다.


수령 우상화 등장으로 초기 조총련 사명 끝나

숙청작업 벌어지고 김일성 우상화 일색으로 변질


조총련에 대한 북한의 지배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나.


북한과 니가타에 한 달에 몇 번씩 배가 오가면서 재일교포 사회와 북한 권력이 직접 연결되게 됐다. 북한의 지배가 직접 조총련에 미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조선노동당 세포조직인 학습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학습조를 통해서 조선노동당의 정책이나 김일성 숭배가 유입됐다. 조선학교에서도 소년단, 청년동맹 등 정치 조직을 만들어 북한 정책을 침투시켰다. 조총련 결성 당시는 일반적인 사회주의 국가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 밑에 있었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가 지도사상이었다. 1967년까지 기본 교양 사업은 사회주의를 위주로 이뤄졌지만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장군 등 비교적 민족적인 내용도 배웠다. 우리나라 민요나 문학도 배웠다. 좌파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개인숭배가 나올 수 없었고, 김일성을 과목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소련 군대에 의해 해방됐다는 것도 가르쳤다. 북한 자료는 옛날 자료일수록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1967년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통해 수령절대화가 이뤄진 후 그 영향이 직접 들어왔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김일성 왕조 국가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이전 조총련과 이후 조총련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다양성은 있었다. 조선노동당도 집단주의에 의해서 지도되고 있었고 개인이 좌지우지 하지 못했다. 당시 조총련 내부에서도 일본 공산당 출신과 한덕수 계열 간 대립이 있었지만 독재체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령우상화가 시작된 시점부터 초기 조총련의 사명은 끝나버렸다.


수령우상화 과정에서 조총련 내 갈등은 없었는지


당연히 큰 갈등이 생겼다. 맑스주의를 따르던 사람들은 개인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총련 내에서도 숙청작업이 진행됐다. 당시 김병식 부의장의 주도로 숙청이 이뤄졌다. 수령에 대한 관점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지만 개인적 복수심도 섞여 있었다. 구 간부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 총화사업을 진행했고 거의 4, 5년간은 이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반대하는 사람은 종파로 몰렸다. 자살하는 사람도 나왔고, 목숨만 겨우 부지해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총련 내 보위부와 같은 비밀진압부대를 만들어서 반대파를 공격하거나납치했다. 1972년에는 김병식이 한덕수까지 제치고 자기가 총련의 의장이 되려는 음모 사건이 폭로 되면서 일반 사람들은 몰랐던 실태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빈곤을 없애기 위한 운동을 했던 것이고, 그런 만큼 조총련 지도부들도 공정하게 사업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우리에게는 호화롭게 살면 타락한다고 하면서 인건비도 덜 주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 시키던 사람들이 오히려 귀족처럼 자본주의 생활을 했다. 나중에 복귀하기는 하지만 결국 김병식은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서 찍혀 나갔다. 이 과정에서 나도 조총련 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조총련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실망하게 된 것도 있지만 이때까지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틀렸다는 것이 부끄러워 더 이상 교단에 설 수 없었다. 그때 다른 간부들도 많이 이탈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김일성 절대화가 점점 심해지고 조총련도 재편됐다. 북한과 똑같이 교육이 마비되고 이때까지의 교육도 부정됐다. 김일성 노작, 당 정책 이런 과목을 공부했다. 내가 가르치던 정치경제학부의 경우도 김일성 일색화해야 한다고 해서 농업경제학, 통계학 등의 과목을 전부 없앴다. 결국 남조선 혁명과 조국 통일, 김일성 노작 이런 과목들만 남았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비웃는 의미로 과목이 없어서 시간이 남으니까 ‘한가한 정치경제학부’라 불렀다. 역사지리학부는 세계 역사는 없고 김일성 역사만 가르치니까 ‘바보의 역사학부’, 문학부는 김일성 우상화 외에는 글을 쓸 수 없으니까 ‘쓸 수 없는 문학부’, 외국어학부는 김일성 노작만 번역하고 실제로 말하는 과목은 없으니까 ‘이야기 하지 못하는 외국어학부’ 이런 식으로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조총련은 북한 정권의 자금줄 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지원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중앙본부 건물이 매각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악화됐는데


일본의 고도성장이 70년대부터 시작했다. 덕분에 정치적으로는 조총련 내부적으로 문제를 내포하면서도 경제력은 커졌다. 아까 말했듯이 조은신용조합이 조총련의 주요 자금원이 됐다. 이들은 주로 사람들의 탈세를 도와주는 방식으로 재력을 확대해 나갔다. 금융업, 빠칭코, 야키니쿠(고기구이 식당) 등 교포들이 하던 사업들이 성장하면서 예금액이 최고로 불어났다. 조총련은 중앙집권적 제도를 갖고 있으니까 신용조합의 힘도 하나가 되어 막강한 자금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80년대에 허종만이 재정담당 부의장이 됐는데 김정일이 세운 사람이었다. 의장인 한덕수는 김정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허정만이 신용조합을 비롯해서 재정 관리를 담당했다. 한덕수도 돈이 필요하면 허정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에 돈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북한이 80년대부터 경제적으로 내리막길이었는데 조총련 덕분에 경제적으로 지탱했다. 그러다 1989년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1990년대 들어서서 일본 버블 붕괴가 시작되면서 불량채권들이 많이 생겼다. 이때부터 신용조합들이 무너지기 시작해 전국에 36개 있었던신용조합이 6~7개 정도 남았다. 일본은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조은에 1조 4천억 엔을 투입했다. 대신 일본 금융청이 직접 관리하게 된다. 당시는 일본도 금융재편성이라고 해서 은행들이 합병되는 시기였다. 자금력이 격감하는 것과 함께 조총련의 힘도 급속히 약해졌다. 1970년대 정치적 혼란으로 쇠약해지던 조총련은 일본의 경제성장세로 인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서 버블이 꺼지면서 경제력이 급속하게 약화됐고, 본래 쇠약했던 정치력은 더 무너지게 된다.


김정은, 고영희 때문에 우상화 힘들어
북한 정권 허약해지면서 천천히 붕괴 중


조총련의 세력 약화는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이후에 본격화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조총련은 그동안 납치는 절대 없다고 주장했고, 재일 동포들도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2002년 일본인 납치에 대해 김정일이 사죄한 뒤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탈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1989년 사회주의 붕괴, 1990년대 중반의 경제 위기, 2002년 납치 사죄, 이 3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약해졌다. 특히 2002년 납치 사죄 이후 조총련에 대한 눈초리가 차가워졌다. 그러면서 조선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많이 바꾸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국적 취득자들이 늘어나고 2002년 납치 사죄 계기로 굉장히 촉진됐다. 지금은 조선적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3~4만 명 정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조총련에서 일하면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민족 반역자라고 했는데 지금은 국적은 바꿔도 좋으니 충성심만 잃지 말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조선학교의 절반가량도 한국 국적이라고 한다. 따지면 이제는 한국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됐다. 조총련의 기반이 그만큼 허약해졌다.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또한 부정적 여론을 가중시켰다. 우리 같이 수령절대화를 경험한 사람 입장에서도 세습은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3대 세습까지 갔으니까 우리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생겼다. 젊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 옛날과 같은 충성심은 거의 사라졌다. 조총련에 들어가는 것도 장사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나 거의 다 조선학교 졸업생이니까 동창생 기분으로 모이는 거다. 옛날처럼 수령을 따라가자 그런 것은 3대 세습으로 인해 사라졌다고 한다.


김정은 정권이 처음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나는 안정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안정적이라고 하면 장성택 처형과 같은 그렇게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김정일 때도 장성택 문제는 여러 번 나왔지만 김정일은 그 힘을 활용하면서도 통제할 수 있었으니까 숙청까지는 하지 않았다. 김정은은 힘이 없으니까 장성택 세력에 대해 겁을 먹고 공포통치를 한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부모가 도량이 있고 힘이 있으면 얼마든지 자식을 설득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으면 폭력을 쓴다. 폭력의 정치 형태는 불안정성의 증거다.


또한 내부 소식통을 통해 듣는 정보도 평양 사람들의 경우 처음 1년째는 기대를 했지만 장성택 사건 이후에는 제각기 살길만 찾는다고 한다. 의견 제기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좋은 정책이 나 올 턱이 없다. 결정적인 것은 왜 저렇게 최고 존엄을 떠드느냐이다. 김정일 때도 그런 말은 자주 하지 않았다. 바로 김정은의 권위가 안 서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우상화가 잘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집권 4년차가 되는데 김정은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디서 자라났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김정은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른다. 고영희의 경력이 김정은 권위를 결정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영희는 재일교포에다 정실도 아니다. 게다가 고영희의 아버지가 재일교포 애국자도 아니고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이후 제주도 밀항선을 타며 돈벌이를 하다 적발돼 강제추방 될 위기에 처했고, 한국과 북한 중 북한으로 가는 걸 택한 사람이다. 고영희의 가계가 이러니 위대성을 선전할 때 결정적인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고영희 묘가 혁명열사릉 뒤쪽에 있다고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접근하지 못한다.


김정일 경우는 거짓말을 해도 외국에 자료가 없으니까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고영희 자료는 일본에 남아있기 때문에 감출 수가 없다. 김정은의 경우도 스위스에 자료가 있다. 거짓말이 드러나면 더 큰 수치가 될 수 있다. 김정은 위대성 강연도 그 내용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최고 존엄만 계속 떠드는 것이다. 수령 독재체제에서는 수령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통치가 안정화 될 수 없다. 공포정치로 유지는 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은 체제 붕괴와도 연관이 있을 텐데 정책만 봐도 일관성이 없다. 이번에도 대북방송을 하면 공격 하겠다고 했으면서도 결국 못했다. 한미의 군사력과 중국 압력에 못 이긴 것이다. 그 정도로 허약해지고 있다. 국내에서 우상화도 안 되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되고 있다. 안정될 리 만무한 상황이다. 북한은 1995년 대기근 때 붕괴 1단계가 시작됐고, 후계 준비가 안 된 시점에서 김정일이 사망한 것이 2단계, 장성택 숙청으로 3단계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북한이 언제 붕괴되느냐 자꾸 물으며 붕괴가 안 되니까 안정적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몇 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미신의 영역이다. 북한은 지금 붕괴되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아랍이나 루마니아처럼 폭발하는 것도 붕괴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붕괴다. 철저한 중앙집권 통치체제에서는 폭발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허약해지면서 서서히 붕괴되어 간다.조선왕조도 허약과 붕괴 과정이 100년이나 걸렸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 들어서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95년을 기점으로 보면 20년째 붕괴 과정을 겪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김정은 다음에 4대 세습이 가능한가의 문제가 있다. 4대 세습이 가능하지 않으면 이 정권은 유지될 수 없다. 이설주가 아직 딸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금 아들을 낳는다 해도 다음 후계자가 나올 때까지 20년 이상은 필요하다. 20년이나 이 체제를 견딜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면 불안한 요소가 많지 안정적 요소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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