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개벽 신간 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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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1935년 03월01일 |
기사제목 | 女記者 群像 |
기사형태 |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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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記者 群像
녯날 신문은 그만두고 己未 이후 새로 생긴 민간 3신문만 하야도 연령이 벌서 14,5세가 되였으니 그 안에 들낙날낙한 기자 수도 무려 수 백명은 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 본위로 조직된 이 사회는 신문사도 역시 남성 본위로 되엿기 때문에 기자도 殆히 전부가 남자요 혹 여기자가 잇다고 해도 그야말로 萬綠叢中一點紅 격으로 한 社에서 花草記者로 한 사람 박게 더 두지 안코 또 여기자 자신도 환경관계로 1년 이상을 續勤한 사람이 별로 없으며 따러서 그 활동 성적도 이렇다할 사람이 또한 별로 없다. 그러나 이번 호가 신문특집호이니 신문사에서 생색으로 여기자 채용하는 것같이 여긔에도 생색으로 여기자 군상을 쓰기로 한다. 그러나 재료가 너무 빈약하니 생색이 날지 의문이다.
許貞琡
이는 東亞日報社의 제1세 여기자이다. 己未후 일반 신문 잡지계를 통처서 여기자를 처음으로 채용하기는 開闢社엿지만은 (최초 여기자 金慶淑) 신문으로서의 여기자는 東亞日報의 이 許씨가 처음이다. 이는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와 같이 許憲씨의 愛孃으로 당시 許憲씨가 普專校長으로 또 東亞社의 중역을 겸한이 만치 그 社와 관계가 깊엇던 까닭에 당시 許貞琡씨의 부군 林元根군이 입사하게 되고 뒤를 따러 許貞琡씨가 또한 입사하게 되였다. 그때만 하여도 여자의 취직이 퍽 듬을던 때 그 중에도 신문기자라면 무관 제왕의 대우를 바들 그때에 그들 젊은 부부가 鴛鴦記者란 雅號를 들으며 억개를 가지런이 하고 발을 맛추어 花洞 골목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면 가두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같은 社의 사람들도 퍽이나 欽羨하고 그들의 행복을 찬미하였다. 그가 지면으로 얼마마한 활동을 하엿던지 그것은 지금에 잘 기억이 나지 안치만은 그의 지식으로나 수완으로나 결코 남성기자에 一頭를 讓치 안이하엿다. 그것은 그 뒤에 그가 開闢社로 전근하야 신여성 편집책임을 맡어 볼 때에 자기의 손으로 논문을 쓰고 편집을 하고 인쇄 교정까지 하야서 잡지를 상당하게 내 노흔 것으로 보와 그 실력을 족히 짐작하겟고 新女性에 斷髮號를 내여 일반 여성의 단발을 주창하는 동시 자기가 솔선하야 女性同友會의 朱世竹 外 某某<70> 여성과 같이 용감하게 단발한 것을 보면 그의 主義 또는 실행력이 상당히 강한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자라는 이보다 여류 투사란 것이 올켓다. 그리하야 東亞나 開闢에 있을 때에도 그 기자의 직무보다도 女性同友會와 槿劏�會에 더 충실하였다. 월급은 자기 사생활에 쓰는 것이 적고 동지 또는 단체활동에 만히 充用하얏다. 그 뒤 허다한 풍문의 주인공이 되고 만흔 고초를 맛본 그는 기자생활 또는 여성 운동의 선을 떠나서 자기로나 또는 남으로나 꿈도 꾸지 못하던 태양광선 치료소를 내고 현재에는 宋奉瑀군과 같이 달큼한 생활 안이 태양광선하에서 땃뜻한 생활을 한다. 풍문에 드르면 그의 父君 許憲씨의 금광업이 매우 유망하다니 그가 方應模씨와 같은 成金家되여 宿年의 포부인 咸慶道人의 大新聞을 경영하게 된다면 貞琡씨는 다시 신문계에 出脚하야 老여기자가 될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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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英肅
이는 성명으로 보와 잘못 아는 사람은 許貞琡씨와 자매 관계가 잇는 줄로 알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피차 不知許人之許엿다.(知面이야 물론 잇지만) 그는 許貞琡씨의 뒤를 니여 부군 李光洙씨와 같이 제 2鴛鴦記者로 東亞社에 드러 갓섯다. 그도 실력으로나 활동으로도 다른 여기자에 지지 안켓지만은 원래 春園의 지위가 잇고 성가가 먼저 놉하서 편집국에서도 마음대로 부리지 안엇고 자기 亦 그러케 활동을 하지 안엇기 때문에 그가 某여기자에게 하너란 말과 같이 여기자다운 여기자 노릇을 못하엿다. 그리고 간혹 조흔 기사와 名文을 써도 같은 사원 중에도 그가 쓴 것이 안이고 春園이 借作하야 준 것으로 의심하는 이가 만엇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 잘못이다. 그도 쓰면 잘쓰는 분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기자 생활 중 平壤에 가서 명물의 기생을 불너 大洞江 船遊를 하였다는 것은 매우 용감한 노름이엿고 春園이 병으로 각금 결석을 하면 宋社長이 농담 겸 『여보 許英肅씨- 春園이 오늘도 병이요. 암만해도 두 분을 격리식혀야 社일이 잘되겟소... 』한 말은 지금까지 그 사원간에 한 이야기 거리가 되여 잇다. 그러* 그도 未久 사임하였다.<71>
李賢卿
후리한 키와 반짝반짝하는 白金齒에 영리하고도 이해 잘 따지기로 유명한 水原人의 특징을 소유한 그는 기자로서 남을 방문하거나 또는 무슨 기사를 취급할 때에 상대자에게 호감을 주고도 민첩하게 잘하였다. 그러나 그는 安光泉군의 애인이요 女性同友會의 간부이니 만치 기자 직업은 역시 부업으로 하고 사회 운동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엇기 때문에 기자로서 기자다운 성적을 내지 못하고 그날 그날을 지나다가 安군의 뒤를 따라 국경을 탈출하였다. 그는 기자시대에는 아모러한 이약이거리가 없지만은 東京 유학시대에 작고한 여의사 李德耀씨와 열렬한 동성연애를 하야 일시 자살미수 소동을 이르키던 일과 水原行 차 중에서 어떤 異服 입은 남자가 촌여자에게 모욕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분개하야 용감스럽게 달려드러 뺨을 친 일은 지금까지 그의 동지 여성계에서 이약이 거리가 되여 있다.
*義順
이는 원래 開闢社에 잇다가 東亞로 옴겨간 분이다. 머리가 곱습곱슬하기로도 유명하거니와 체격이 앙증스럽고 얌전하고 교제성이 잇고 말소리가 고와서 상대하는 사람에게 만흔 호감을 준다. 동성연애 잘하기로 유명한 女醫 李德耀씨는 그의 전화하는 목소리에 엇지나 반하얏던지 그리 친치도 못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를 듯고 십혀서 일도 없는 전화를 하루에 10여차 식을 하고 방문을 오면 일부러 몃 시간을 붓잡어 두엇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秦金星씨와 부부생활을 할 때에 다가티 體小하고 얌전하엿기 때문에 동모들 새이에 병아리 부부라는 칭호를 드럿다. 그의 號를 白月이라 한 것도 秦군의 金星이란 號와 상응하야 지은 것이라 한다. 그는 동화를 쓰고 소설을 쓰고 혹은 시도 썻기 때문에 어떤 잡지에서는 각금 여류 문인이라고 선전도 하엿다. 그러나 그는 번역기자요 창작의 기자는 안이며 卓上記者요 다리기자는 안이였다. 그럿치만 원래 다재다능한 까닭에 결코 남에게 손색 잇는 여기자 노릇은 하지 안는다. 佳人薄命(?)이라 할가. 그의 號가 白月이 되야 一滿一戱라 할가 秦군과 그 자미잇던 생활에 파탄이 생기고 몸도 또한 항상 不健하야 기자의 생활도 또한 계속지 못하얏다. 그의 근래 생활 이면이? 궁금.<72>
金彈實
彈實 金明淳씨는 여기자보다 여류 시인으로 이름이 난 분이다. 그는 시인이니만치 신경질의 여자이여서 每申에 있을 때에 사회부에 잇는 사람들이 여간 골치를 알치 안엇섯다. 기사를 고치면 당장에 원고를 박박 찟고 울며 심한 때에는 漢江에 투신 자살한다고 야단까지 첫다 한다. 그 중에 제일 무서운 이약이 거리는 한번 급사가 커피를 갓다 주엇더니 그는 怒氣를 내고 退却하여 왈 『이 상식이 없는 놈이지 월중 행사가 있을 때에 커피를 먹으면 해로운 줄도 모르느냐?』 하던 것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다가 책장을 찌저 뒤지를 하고 간수인에게 톡톡한 꾸지람을 드른 것이엿다. 기타는 略.
崔恩喜
이는 朝鮮日報 최초 여기자로 各社 역대 여기자중 제일 활동을 만히 하고 제일 성적을 만히 내인 분이다. 그가 기자 생활중 어떠한 행동을 하였던 것은 그 자서전이라고도 할만한 그의 회상기가 본지 이번 호에 발표 되였은즉 여긔에 새삼스럽게 말치 안커니와 그의 才筆과 活腕, 健脚은 여간한 남기자로는 仰望도 못할 것이다. 그는 春園 부부와 연고가 많엇더니 만치 글시도 春園 필법이 많고 春園 부인이 春溪의 號를 가진 對로 秋溪라 號를 지엿다. 가을 개울은 쌀쌀하고도 깨끗하지만은 이는 號와는 딴판으로 그러케 쌀쌀하고 깨끗한 생활만은 하랴고 하지 안는다. 秋溪 중에도 낙엽이 만히 모이고 금붕어가 금실금실 춤을 추고 노는 웅덩이 진 秋溪가 되랴고 한다. 그가 남녀간 친구가 만코 독신생활을 하면서도 愛女愛子가 잇고 근본 資力이 없으면서도 그리 곤란한 생활을 하지 안코 남이 못하는 우표장사까지 하는 것을 보와도 대강 짐작할 수 잇다. 다른 말은 略하고 끝으로 그의 장래를 위하야 축복한다.
尹聖相
이는 朝鮮, 中央 兩社의 기자를 역임한 분이다. 이름이 남성의 이름보다 더 점잔케 그 중에도 音이 승상이여서 사원간에 『승상폐하」라는 별명을 드른 그는 퍽 점잔코도 침묵한 까닭에 말성만코 찟코 까불기 잘하는 젊은 남기자들도 그에 대하야는 농담 한 번을 잘 못하였다 한다. 그가 中央에 있을 때에 말성쟁이 心薰군이 尹씨와 마주 안저서 일부러 급사를 부르며 얘 신문 가저 오너라 報知, 萬朝報 왓니 하고 음이 괴상스러운 신문을 차저서 압헤 잇는 남자들도 얼골이 붉어젓지만은 尹씨는 聽而不聞한 척하고 시침을 딱떼고 잇섯고 공장에를 드러가면 직공들이<73> 의례 여기자를 놀리너라 가진 흉악한 『변』 말을 써도 역시 모른 척하고 또 자기의 主見이 상당이 있어서 安夕影과 무슨 불합한 일이 있으면 咸鏡道 사투리로 의례 『선생(先生) 엇지 그러우 좀 봅세』하고 응접실로 끌고 가서 논난을 한다. 그는 성격도 그러하거니와 학력, 필력이 다 상당하다. 그 중에 체격이 조와 거리에 나서면 누구나 한 번식 치여다 보고 또는 뒤를 다른다. 어떤 짓구진 청년은 그의 거러 가는 背線美를 구경하기 위하야 그가 퇴사할 시간이 되면 일부러 堅志洞 네거리에 가서 섯다가 뒤를 따르기도 하고 그가 齋洞 巴湯 뒷골목에 살 때에는 『네마기』만 입고 湯이나 大東商會에 다니는 일이 잇섯기 때문에 그 광경을 보기 위하야 일부러 齋洞 뒷골목을 직히고 있던 사람도 있엇다고 한다. 그가 통안 전차정류장에서 어떤 색정광에게 도중 결혼 청구를 밧고 東署에 가서 문제를 이르키고 자기 다니던 신문 꼬십에 一躍 귀부인 소리를 듯게 된 것도 그 조흔 그 체격의 恩澤이였다. 그러나 그는 생활을 위하야 기자 노릇을 하였지 결코 취미에 마자서 한 것은 안이엿기 때문에 그 남편 全군이 부모의 유산을 바드며부터 社를 그만두고 나아가서 社稷洞에 문화주택을 짓고 전과 다른 생활을 하며 누가 여기자 노릇을 다시 하라면 실타고 머리를 홰홰 내두른다고 한다.
黃信德
이는 尹씨보다 훨신 선진의 기자로 時代日報 中外日報를 계속 근무하였다. 그는 대학 출신이요 여류주의자이엿더니 만치 학식과 이론이 다른 여기자 안이 보통의 남기자보다 우월한 점이 만타. 그러나 그는 탁상에서 이론을 캐고 번역을 하는 기자로는 한 목을 크게 보겟지만은 崔恩喜씨 모양으로 실제 活記事를 끄집어내고 숨은 기사를 들추어내지는 못하얏다. 자기의 말과 같이 『빵』을 위하야 직업을 억지로 다닌 기자요 흥미를 부처 다닌 기자는 안이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던 중에는 자기로나 남으로나 무슨 기억될 만한 일을 남겨 노지 못하얏다. 그 중에 말하자면 기자 생활을 하던 관계로 자기보다 年少의 任鳳淳군과 佳緣을 맷게된 것이 그 중 큰 기억되는 일일 것이다. 당시에 그는 자기의 親知孃을 보고 『얘- 나는 신문사 다니다가 큰 일을 만낫다 비관뿐이다. ...』라고 하야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얏더니 야종에 알고 보니<74> 노처녀로서 任鳳淳군의 愛兒를 배엿던 까닭이였다. 그때는 비관이엿는지 모르나 지금은 낙관일 듯 그는 노숙하니 만치 任군을 남편 엇지 보면 동생같이 사랑하고 얼우만지고 하야 有子生女에 자미잇는 생활을 계속하고 근래에는 살림도 바시락 소리가 나서 歲前에는 상당한 농토까지 삿다는 풍문이 잇다. 黃씨로 엇지 황금이 없을 수 잇나!.
金末峰
이도 中外日報의 기자엿다. 다른 여기자들은 대개 모양을 보지만은 그는 산골에서 나물캐는 여자나 남의 행낭사리하는 여자 모양으로 머리가 흐덥은 하고 의복도 허름하게 차리고 다닌 것이 그 특색이다. 中外日報에서 월급을 잘 타지 못하야 곤란한 생활을 할 때에 푼거리 나무와 봉지 쌀을 사 가지고 맨발로 자기 잇던 諫洞 골목으로 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 中外의 여기자로는 생각지 못하얏슬 것이다. 그는 다른 이약이 거리는 없지만은 歐米留學을 한다고 일반에게 선전하고 퇴사 귀향한 후 李某씨와 결혼하고 추후 그 친지에게 결혼 통고만을 한 것이 한때 이약이 거리가 되얏다. 지금은 부산에서 부군과 같이 상업을 한다고.
金源珠
이도 開闢社에 출신하야 每申으로 간 분이다. 사람이 복스럽게 생기고 침묵한 까닭에 남에게 호감을 만히 준다. 방문기사도 상당히 쓰려니와 수필 같은 것도 상당히 썻기 때문에 각 신문 잡지에서 여류 문인 이약이를 쓰게 되면 의례로 그도 한 목을 주고 사진으로 각금 활동을 한다. 그는 每申을 나온 후 부군과 같이 巴里를 가너니 上海를 가너니 하고 한참 소문이 만터니 東京에 가서 옥동자를 나 가지고 도라와 桂洞에서 풍족하고 자미잇는 생활을 하고 잇다. 여기자로서 개인 성공한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고 어떤 여성은 말하는 것을 드럿다. 그가 과연 성공일지 모르나 아즉까지 잘 살고 벌서 第2子를 편집하야 미구에 발행한다고 某 號外記者는 전언.
此外에 東亞 朴承浩, 中央 盧天命, 전날 朝鮮의 金午男씨 등이 잇으나, 시일이 모다 여터서 쓸 재료가 없기로 後기회로 밀고 각필한다.<75>
<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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