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
조선일보
입력 : 2016.06.17 03:09 | 수정 : 2016.06.17 10:57
심일 소대장 선두로 5인의 특공대가 북한군 탱크에 뛰어올라
포탑의 뚜껑을 열어 수류탄을 던지고 뛰어내리자, 불길이…
![최보식 선임기자 사진](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6/16/2016061603327_0.jpg)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육탄 돌격으로 북한군 탱크를 부순' 고(故) 심일 소령은 6·25 호국 영웅 중 맨 첫 줄에 있다. 태릉 육사 교정과 원주 현충공원 등에 그의 동상(銅像)이 서 있다. 육군에서는 매년 가장 우수한 전투중대장을 선발해 '심일상(賞)'을 수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2011년 '이달의 6·25전쟁 영웅'을 제정했을 때도 첫 번째로 심일 소령이 뽑혔다. 선정 사유는 이렇게 돼 있다.
'1950. 6. 25 춘천 전투에서 6사단 7연대 대전차 포대 2소대장으로 북한군의 탱크형 자주포에 맞서 특공대 5명을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육탄 돌격, 3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순식간에 전파돼 모든 전선에서 육탄 공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간에는 이보다 훨씬 극적이고 생동감 있게 전해왔다. '심일 소대장을 선두로 5인의 특공대가 북한군 탱크에 뛰어올라 포탑의 뚜껑을 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지고 뛰어내리자 불길이 치솟으면서….'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도 이 영웅담이 실렸던 걸로 기억된다.
![6·25 전쟁영웅인 심일(沈鎰·1923~1951) 소령의 흉상.](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6/16/2016061603327_1.jpg)
그런데 춘천 전투 당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전 주월(駐越) 공사가 교전 나흘간 상황과 군 배치도 등을 꼼꼼히 기록한 자료를 건네줬다. 이런 의견이 첨부돼 있었다. '우리 군은 과거에 저지른 허위 날조의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아 정도(正道)를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 예비역 육군 준장 이대용.'
놀랍게도 91세 노병(老兵)이 바로잡으려는 것이 바로 심일 소령의 영웅담이었다.
"이렇게 거짓 신화가 만들어질 줄은 그때는 누구도 몰랐다. 춘천 전투에서 심일 소대장은 육탄 돌격이 아니라 도망을 갔다. 나는 바로 위 고지에서 그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중과부적이었다. 하지만 대전차포 1문을 적(敵)에게 넘겨주고 달아난 것은 문제가 됐다. 그의 중대장은 격노해 '총살감'이라며 상부에 보고했다."
심일은 보직 해임됐고, 뒤에 한직(閑職)인 포병 연락장교를 맡았다. 국군이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할 때는 그 속에 있었다. 1951년 1월 26일 그는 다른 장교 1명, 사병 3명과 함께 묘향산 화전민 움막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중공군에게 바로 포위됐다. 그는 사병 한 명과 함께 뒷문으로 뛰어나가다 총에 맞아 숨졌다. 그때 28세였다. 다른 세 명은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며칠 뒤 이들 중 장교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다. 그 장교를 통해 심일의 전사(戰死) 사실이 확인됐다.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6/16/2016061603327_2.jpg)
심일 부모는 7연대로 찾아와 "학병으로 나간 셋째도 생사불명이다. 공비 토벌을 했던 경찰인 둘째는 죽을 병에 걸렸다. 큰아들(심일)마저 죽었으니, 이제 막둥이 하나만 남았다"며 울었다. 이에 후임 연대장이 "훈장을 하나 받아주겠다"고 약속한 뒤 돌려보냈다.
부관이 "심일은 춘천 전투에서 달아났고 훈장을 줄 만한 전공이 없다"고 보고하자, 연대장이 "야 인마, '노몬한 전투(1939년)'식으로 하면 되잖아. 만주에서 일본군이 육탄 돌격해 소련군의 탱크 뚜껑을 열고 수류탄 까 넣었던 거 말이야. 아들을 이렇게 많이 나라에 바쳤는데 훈장을 만들어 줘야지"라고 호통쳤다.
비록 조작이지만 선의(善意)가 바탕이 됐던 것이다. 1951년 10월 심일에게 태극무공훈장이 나왔다. 그 부모에게 훈장을 전달해준 뒤 끝난 걸로 여겼다.
그런데 국방부 정훈국 장교가 우연히 훈장 상신서를 보고 '대단한 영웅을 발견했다'며 국방 잡지에 소개했다. 이를 심일의 육사 시절 교관이었던 대령이 보고는 "교관 시절 생도들에게 '노몬한 전투'로 정신교육을 했는데 심일이 그대로 실천했다"고 퍼뜨렸다. 군 수뇌부와 친했던 그는 스토리를 하나 더 지어냈다. "중공군에게 포위됐다가 탈출한 심일이 나를 찾아왔기에 수색중대장 보직을 줘 영월 전투에 내보냈는데 적탄에 숨졌다." 그렇게 해서 영월에 심일의 위령비가 세워졌다.
거짓 신화가 만들어지는 걸 왜 그때 바로잡지 못했을까. 이대용 전 공사는 이렇게 술회했다.
![지난 2006년 6월 6일 원주시 태장동 현충탑 내 소공원에 세워진 심일 소령의 동상.](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6/16/2016061603327_3.jpg)
"1970년대 무렵 춘천 전투 당시 연대장과 만나 '심일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바로잡자'고 논의했다. 그런데 심일의 모친은 만 100세까지 살고 2005년 별세했다. 그 전에 연대장이 먼저 숨졌고, 전우들도 저세상 사람이 됐다. 결국 살아있는 내 게 책임이 남게 됐다."
그는 그동안 국방부와 6·25 전사편찬위원회에 이런 증언을 전했다. 하지만 '신화'로 굳어진 것을 이제 와서 바로잡기를 부담스러워했다. 언론에 몸담아 보면,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는 때로 용기가 필요하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바로잡으려 할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다.
[최보식 칼럼] 北 탱크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 그 뒤
조선일보
입력 : 2016.12.02 03:15 | 수정 : 2016.12.02 08:24
진실이 불편해도 진실을 덮을 수 없다
결코 심일 소령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조국 위해 싸웠고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
![최보식 선임기자](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12/01/2016120103080_0.jpg)
'6·25 당일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육탄 돌격으로 북한군 탱크를 부순' 고(故) 심일 소령의 무용담이 허구(虛構)라고 썼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심일 소령은 '6·25전쟁 영웅'의 첫 줄에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릉 육사 교정과 원주 현충공원 등에 동상(銅像)이 서 있고, 육군에서는 매년 가장 우수한 전투중대장을 선발해 '심일상(賞)'을 수여해왔다. 이런 신화가 무너지는 걸 우선 군(軍)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과연 칼럼이 나간 뒤 국방부에서는 반박 보도자료를 준비했다. 어떤 부담을 느꼈던지 육군군사연구소에 대신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육군 측이 지시대로 발표했다면 해당 칼럼은 논쟁적 주장으로 그쳤을 것이다. '군(軍)은 과거에 저지른 허위 날조의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아 정도(正道)를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라며 사실을 증언했던 이대용 장군도 우습게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의식 있는 개인의 존재는 상황을 반전시킨다. 육군군사연구소장(한설 준장)은 "사실 관계를 조사해본 뒤 발표하겠다"고 답변했다. 6·25전쟁의 영웅이고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로서 목숨을 초개같이 던졌던 이대용 장군의 문제 제기를 묵살하는 것은 후배 군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육군군사연구소는 당시 전투와 관련된 생존자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살아있어도 90세 이상이었다.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찾았다고 한다. 13명이었다. 이들을 면담하거나 통화했다. 놀랍게도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그날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국방부에서 '상반된 증언도 있다'며 인용해온 생존자 S씨(캐나다 거주)는 이제 답변을 회피했고 방문도 거부했다. 한때 그는 "심일이 그렇게 한 게 맞는다. 그의 중대장인 나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아야 하지 않나"라고 했던 인물이다.
심일 소령 무용담의 출처로 삼는 기존 증언들을 검증해봐도, 대부분 견강부회했거나 어떤 대목을 삭제해 왜곡해놓았다. 또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 '그랬다더라'는 전문(傳聞) 수준이었다. 군사연구소는 전투 상보, 작전 일지, 한국전쟁사, 개인회고록 등 40여 권을 검토했다. 북한 측 자료도 찾아봤다.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어디에도 그의 전공 기록이 없었다. 심지어 그가 소속된 7연대 약사(略史·1955년 간행)에도 나오지 않다가, 1978년 판부터 들어가 있었다.
옛날 교과서에는 '심일 소대장을 선두로 5인의 특공대가 북한군 탱크에 뛰어올라 포탑의 뚜껑을 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지고 뛰어내리자 불길이 치솟으면서…'라고 실렸지만, 당시 북한군 자주포(탱크)의 포탑은 뚜껑을 여닫는 구조가 아니었고 개방돼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또 5인의 특공대는 병적기록부와 상훈, 전사기록 등이 없었다.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한 달 반에 걸친 육군군사연구소 측의 조사 결과가 보고됐을 때 사실이 바로잡힐 것으로 알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국방부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육군의 조사 결과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나왔다. 국방부가 육군에 대해 감사하는 모양새가 됐다. 이들 중에는 심일 동상 건립에 관계된 이해당사자도 있었다.
국방부 측은 제6사단 미 고문관이 작성한 '심일의 은성훈장 추천서'(1950년 9월 1일)를 제시했다. 그의 전공(戰功)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라고 했다. "아들 셋을 잃은 심일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 훈장을 만들어줬다"는 이대용 장군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증거라고 했다. 개인의 증언보다 당시 문서가 더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태극무공훈장을 못 받은 이대용 장군의 개인감정이 작용했다" "군인의 모델인 심일 소령을 지금 와서 뒤엎는 이대용은 좌파다"라는 치졸한 말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은성훈장 추천서'의 공적에 나오는 날짜와 장소에서는 그런 전투가 없었다. 전투 당시 함께 있었다는 인물은 군적(軍籍)에 없었다. 증언 참관자의 명단도 없었다. 통상 훈장 상신은 소속 연대에서 하는데, 미 고문관 개인의 추천이었다. 추천한 고문관은 직접 전투를 목격하지 않았다고 했다. 심일 신화의 검증은 '공적(功績) 내용이 사실이 아니다'에서 출발했는데, 과거의 공적 기록을 갖고 '사실'이 라고 입증하려는 환원적 오류에 빠진 것이다. 국방부는 '심일 신화'를 지키려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진실이 불편해도 진실을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결코 심일 소령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조국을 위해 싸웠고 소중한 목숨을 바친 사실은 부정돼선 안 된다.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 과정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졌을 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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