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5일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진행한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탁자에는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서류 뭉치가 여러 개 있었다. 그런데도 기존 검정 역사 교과서 8종을 모두 가져와 일일이 펼쳐가며 어떤 편향성 문제가 있는지 보여주고, 집필진 약력을 전부 분석한 자료를 내밀며 얘기를 이어갔다.
○ “청소년에게 자학사관 심을 수 없어”
김 위원장은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 275쪽을 펴 보였다. ‘(북한의 경제·역사학자) 백남운은 마르크스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아 사회 경제 사학을 내세웠다….’ 김 위원장은 “공산주의 발전 단계를 써놨는데 고등학생에게 왜 마르크스주의를 써야 하느냐, 기본이 거기(운동권 양성)에 가 있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 위원장은 “검정 교과서의 이념 편향이 심해 국정 교과서로 갔다. 그건 국편에서 더 깐깐하게 심의한다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 1월까지 진행됐던 검정 교과서 6종의 수정명령 취소소송 과정을 정리한 서류를 보여줬다.
김 위원장은 “젊은 교수 시절 나만큼 국정 교과서 반대 목소리를 낸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교과서가 나와야 하는데 당시는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하나의 교과서를 반대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했는데도 교과서의 물줄기가 이상하게 편향되게 가서 검정 교과서를 반대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싫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배제하면 대한민국을 설명할 길이 없다”며 “역사는 연속선상에서 평가하고 장단점을 이야기해야지 기억하고 싶은 사람만 기억할 순 없다”고도 했다.
이승만 서술이 미화됐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든 건 이승만의 공이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 중 이승만처럼 외교력과 지도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없었다”며 “뒷날 이승만이 독재를 했지만 공과는 똑바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병철 정주영 회장 등 기업인을 기술해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미화했다는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이 현대차 타고 삼성 휴대전화를 쓰면 자랑스럽게 우리도 이런 역사가 있다고 써야 한다”고 했다. 또 “눈부신 성장으로 10대 교역국이 된 과정을 설명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SK, LG 같은 기업도 넣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못 했다. 기업을 빼면 우리 현대사에서 경제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다시 검정으로 돌아갈지는 정치권서 해결할 일”
김 위원장은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수립’ 표현이 맞다는 근거를 다수 제시했다. “1948년 8월 15일 미국이 축전을 보내왔는데 ‘Korea Independence Day’라며 독립을 축하한다고 했다” “1941년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을 발표했는데 강령은 건국이 아직 안 됐다는 뜻”이라는 것. 김 위원장은 “논란거리가 안 되는 걸로 떠드는 건 시간 낭비”라고 했다.
국정 교과서는 검정 교과서와 달리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이었다는 사실을 바로잡고, 북한의 여러 군사 도발을 서술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일부에서 통일을 앞두고 역사를 써야 하는데 왜 대결 구도로 가느냐고 한다”며 “역사는 앞으로 올 걸 쓰는 게 아닌데 무슨 통일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잘못하면 소설이 된다”고 했다.
일각에선 국정 교과서 현대사 집필진에 역사학자가 한 명도 없다고 전문성을 지적한다. 이에 김 위원장은 “집필진을 공모했는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며 “초빙할 만한 분은 이미 검정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해서 결국 싸움을 붙이는 것 같아 초빙을 못했다”고 했다. 또 “검정 교과서도 모두 역사학자가 쓴 게 아니다”며 “대개 교사와 교수 한두 명이 썼고, 교수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현대사는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썼는데,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를 각각 섭렵한 사람이 써야 한다고 보고 분류사 체계로 갔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을 알려면 법을 알아야 하는데 헌법학자만큼 법을 아는 역사학자가 누가 있고, 현대 경제사 이야기하는데 경제학자만큼 경제와 통계에 밝은 역사학자가 있느냐”는 취지였다.
현장 검토본을 공개할 때까지 집필진을 밝히지 않은 건 신변 보호가 아니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총리도 교육부 장차관도 집필진이 누군지 몰랐다. 어느 기관에서 알려 달라고 해도 딱 잘랐다”고 말했다. 집필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다 보니 많은 사람이 안 가고 불편해서 잘 찾지 않는 곳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김 위원장은 “용산역 회의실, 일산, 용인 곳곳을 다니며 회의했다”고 했다.
집필과 심의 과정에서 수십 차례 격론이 벌어졌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고쳐야 할 때도 김 위원장이 직접 집필진을 찾아가 두세 시간씩 설명했다. 집필진은 “논쟁으로 고생했지만 분야가 다른 사람끼리 모여 이렇게 발전시켜 본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검정 교과서의 편향성 문제가 어느 정도 바로잡혔다고 보기 때문에 떳떳하게 어떤 비판도 수용하겠다는 것”이라며 “시간이 좀 부족해 일부 잘못된 기술이 있는데 그건 즉각 고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검정 교과서는 기존 자료를 짜깁기하는 식으로 엉망으로 쓰인 게 많다”며 “국정 교과서가 생명력이 얼마 가든 간에 나중에 누가 보든 참고할 수 있게 제대로 만들자는 각오로 집필했다”고도 했다.
그는 “국정 교과서는 계획대로 내년 3월에 현장에 도입해야 한다”며 “정부가 국정화를 공표해서 여기까지 온 만큼 검정으로 돌아가려면 법적 절차를 거쳐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여러 가지 보완책도 내놨다. 김 위원장은 “양심껏 제대로 써서 누가 봐도 맞다 싶으면 검정이든 국정이든 무슨 상관이겠느냐”며 “다시 검정으로 돌아갈지는 내 소임이 아니고 정치권에서 해결할 일”이라고 했다.
과천=최예나 yena@donga.com ·이동영 기자
○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1940년 서울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고려대 사학과 교수 △고려대 총장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