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독일 나치시대
(1) 프로이센 예술원장 리카르다 후흐(Ricarda Huch)의 서신교환(19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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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1933년 집권을 하기 시작하면서 작가 조직에 대한 통제를 취한다. 1933년 3월 14일, 당시 프로이센 예술원장이었던 막스 폰 쉴링스(Max v. Schillings)는 예술원 문학부 회원들에게 쓴 편지를 통해, 다음의 충성문서에 서명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이 문서에 서명하고 충성선언을 하는 자만이 문학부의 회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서명을 하지 않은 자나, 서명의 대상이 되지 않은 유대인 작가는 강제적으로 축출 당하였다. 당시 예술원 문학부 회원이었던 토마스 만(Thomas Mann)과 리카르다 후흐(Ricarda Huch)는 예술원에서의 탈퇴를 선언하였는데, 특히 후흐는 이 충성문서에 서명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예술원을 자발적으로 탈퇴하였다. 다음은 이에 관련하여 후흐와 예술원장 간에 교환된 편지들이다. | 당신은 변화된 역사적 국면을 인정하고 프로이센 예술원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긍정은 당신이 반정부적인 공적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변화된 역사적 국면이라는 의미에서, 법령에 따라 예술원에 주어진 민족주의적이고 문화적인 과제에 대해 충실히 공동작업을 할 의무를 당신에게 부여합니다.
예-아니오 (해당되지 않는 것을 줄을 그어 주십시오) 성명: 장소와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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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날짜 없음, 1933년 3월 18일 쓴 것으로 추측됨)
베를린의 예술원장님께
3월 14일의 원장님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면서 저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원장님의 권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따라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합니다. 정관에 의하면 예술원 회원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의 고백을 요구받음 없이, 업적에 대한 인정과 이에 대한 경의의 표명으로써 임명된 것입니다. 저는 예술원 회원이 된 이후로, 회원의 선임에 있어서 예술분야에서의 업적과 개인의 인격의 중요성외의 그 어떤 것도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여 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저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리카르다 후흐 -------------------------------------------------------------
예술원장
베를린, 1933년 3월 22일 매우 존경하는 부인,
지금까지 유효한 예술원의 정관에 의하면 제가 회원들에게 제기했던 질문은 저의 권한 밖이라는 당신의 편지는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공통적으로 정치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변혁의 상황에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는 그 상황에서 정관규약만을 더 이상 연관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문학부와의 합의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회원들에게 이 정관 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편지 내용에서 저는 당신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기를 원치는 않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아주 의미가 있고 심오하고 보수적 생활 감정을 가진 회원으로서 국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큰 창조력을 지닌 예술가인 부인을 우리가 계속 문학부 회원으로 삼으려는 데에 이견이 없으실 것으로 감히 추론해 보았습니다.
매우 존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올립니다.
막스 폰 쉴링스 -------------------------------------------------------------
하이델베르크, 1933년 3월 24일 존경하는 원장님, 원장님께서 3월 22일 쓰신 편지를 보니, 제게 주신 문서에의 서명 거부가 마치 제가 긍정의 답변을 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새 정부가 그 사이에 행했던 일들을 아주 강하게 부인하는 만큼 이에 대한 긍정의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편지에서 원장님은 제가 진심으로 국가의 발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사표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충성문서에의 서명을 요구받았을 때의 저의 행동에 대한 해명에서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진술들에 의해 자동적으로 예술원에서 탈퇴되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
리카르다 후흐 -------------------------------------------------------------
프로이센 예술원
베를린, 1933년 4월 6일 매우 존경하는 부인,
최근의 과다한 업무와 아카데미 음악분과의 100주년 기념 행사 개최로 인해서 당신의 고귀한 3월 24일자 편지에 대한 대답을 오늘에서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국가의 발전에 진심으로 동참함을 제가 의심치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강조하신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 회원들의 입장표명을 적절하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긍정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결과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언의 내용은 회원들이 국가 발전의 의미에서 아카데미의 과제를 계속해서 협력한다는 것과 그리고 이 민족운동의 추진자인 정부와는 견해 차이를 공개적으로는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의 제시에는 하인리히 만씨의 행동이 그 계기가 되었는데, 그는 공공연하게 포스터로 알리고 호소하면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연합시켰고, 지난 선거에서는 민족주의적 정당에 반대하는 공동의 행동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신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인리히 만씨는 그의 행동에서 생긴 유일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예술원에서 탈퇴하였습니다. 당신이 내게 설명한 "자동적으로 아카데미에서 탈퇴"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문학부에 있는 제 동료와 합의를 했습니다. 당신의 문학부에서의 탈퇴는 하인리히 만씨의 경우와 유사하나 기이하고, 비논리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당신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하인리히 만과 되블린 박사 (그 사이에 만씨와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에서 탈퇴한)와는 달리 결정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문학부의 동료도 확신하였고, 일찍이 정치적 분야나 세계관에 대해 협의하던 회의에서도 충분하게 드러났습니다. 당신이 하인리히 만, 되블린 박사와 마찬가지로 아카데미를 탈퇴하려 한다면 여론에서는 오해할 것입니다. 그러한 조처를 당신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겐 명백합니다. 당신의 독일에 대한 신조와 민족적 견해는 높이 평가된 인격과 예술적 창작에서 옴을 우리는 가장 장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에 의해서 우리는 선언을 위해 형식적인 서명을 할 필요는 없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신뢰하며 머물겠다는 확실한 말씀을 해주시기를 열망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의 대민족운동이 승리하는 데에 도움을 준 신조를 이미 가지고 있던 분과 같은 분과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독일 민족 예술을 의미하는 문학부가 어떻게 강화되고 확장될 수 있겠습니까? 자유로운 의견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모두에게 있습니다: 문학부는 선언문의 발송을 통해 단지 부적절하고 민족운동과 일치하지 않는 공적 정치활동의 방지와 동시에 국가적 의미에서의 예술원의 과제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고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저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매우 존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올립니다.
막스 폰 쉴링스 (예술원장) -------------------------------------------------------------
하이델베르크. 1933년 4월 9일
존경하는 원장님, 제가 예술원 회원으로 계속 남을 것인지에 대한 원장님의 따뜻한 관심에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왜 제가 원장님이 바람에 따를 수 없는 지에 대해 이해하시도록 하는 것은 저에게 달려 있는 일일 것입니다. 독일인이 독일인이라고 느끼는 것은 거의 당연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독일적인 것인지와 독일 정신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지금의 정부가 국가적 신조라고 규정하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독일 정신이 아닙니다. 중앙집권, 억압, 잔인한 방법들, 비동조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자만에 찬 자화자찬을 저는 비독일적이고 불길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정한 이러한 정신으로부터 너무 동떨어진 견해를 가지고 제가 국립예술원에 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장님은 예술원이 제게 제시한 충성문서에의 서명이 제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변화된 역사적 국면이라는 의미에서, 법령에 따라 예술원에 주어진 민족주의적이고 문화적인 과제에 대해 충실히 공동작업"을 할 때, 저의 경우와는 달리, 정부의 정책과 일치하는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정부와 반대되는 의견을 담은 신문이나 잡지를 저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의사표현의 자유는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장님께서는 하인리히 만 선생님과 되블린 박사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제가 하인리히 만 선생님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되블린 박사님과는 의견이 항상 일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 모두가 양심적으로 올바른 것을 인식하고 행하려고 하기를 바라며, 전에 항상 그랬듯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단정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되블린 박사님이 유대인 박해에 대해서 행한 것 외에 달리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되블린 박사님을 특별히 존경하고 그 분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와 예술원에서의 탈퇴가 이미 언급한 분들에 대한 동정에서 오는 선언이 아니라는 것은 저와 개인적으로나 책을 통해 친하게 된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는 예술원에서의 탈퇴를 선언합니다.
리카르다 후흐
(2)유대인계 영화감독 막스 노이펠트(Max Neufeld)의 특별허가(1936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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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영화협회장이 오스트리아의 영화 관련 기관인 무역통상부에 보낸 다음의 편지는 유대인계인 막스 노이펠트의 특별허가에 관한 편지로 나치 치하 유대인의 운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이펠트는 오스트리아 영화계의 선구자였으나 나치 집권 후 영화인으로서의 활동을 금지당했다. 이에 대하여 그는 계속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관련기관에 특별허가를 청원한다. | 영화감독 노이펠트씨에 대한 특별허가를 허용해 달라는 제국영화협회와 제국민족계몽과 선전을 위한 제국행정부에 보낸 위의 편지에 대해서 제국선전부장관에게 다시 문의한 후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막스 노이펠트씨는 1933년까지 독일영화감독으로 활동했었습니다. 노이펠트씨는 아버지쪽이 유대인 혈통이기 때문에 영화협회의 회원이 될 수 없었고, 독일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영화교환협정에 의해 독일로 가야했던 오스트리아 영화를 위해서 노이펠트씨에게 특별허가를 받도록 허락해 달라는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허가를 주는 것은 이미 1933년에 거부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제작된 독일어 영화의 반입도 금지되었습니다. 그 영화는 막스 노이펠트가 함께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가 함께 참여했기 때문에 반입이 금지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허가의 불승인은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 막스 노이펠트를 영화감독으로 하여 독일어 영화를 제작할 경우에는, 외국영화를 구매할 때 독일인 구매자가 할당소와 영화검열소에서 증명해야 하는 준수사항이 규정에 맞지 않는 영화는 독일에 보급되지 못함을 제작자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작자가 신중한 상인이라면 그 필름이 독일에 판매 불가함을 계산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재차 거부된 결정을 다시 변경할 이유는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있을 유사한 형태의 신청서를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특별허가는 내줄 수 없다는 점과, 그리고 확고하게 규정된 영화에 대해서만 오히려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
(3) 하이데거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취임 연설문(1933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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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1927)의 저자인 철학자 하이데거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학장으로 취임했고 1945년까지 나치당에 참여하였다. 그의 나치 가담은 종전 후에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독일대학의 자기주장”이라는 제목의 프라이부르크대학총장 취임 연설문은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그 연설문의 일부분이다. | (…) 독일 학생의 자유 개념은 진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로부터 발전된 것이 독일학생 전체의 결합과 봉사인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결합은 민족 공동체의 결합입니다. 민족 공동체는 각각의 지위에 있는 민족 구성원들의 노력과 능력의 일부가 되는 협동적인 참여의 의무를 지닙니다. 이러한 결합은 지속적으로 확고히 되며 학생의 존재 속으로 근로봉사를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결합은 다른 민족들 내부에서 국가의 명예와 운명으로의 결합입니다. 이 결합은 학문과 능력에서 보장되고 훈육을 통해 긴장된, 최후까지의 투입준비자세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결합은 미래에는 군복무로서 전 학생존재를 포함하고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전 학생의 세 번째 결합은 독일 민족의 정신적 임무로의 결합입니다. 독일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든 세계적인 권력에 대한 초 권력의 분명함과 관련을 맺게 만들고, 내부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적 세계를 항상 새롭게 만듭니다. 이로써 독일민족은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존재를 극도로 의문시하게끔 함으로써 정신적 민족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3개의 결합들은 (…) 독일이라는 존재에 있어 모두 똑같이 근원이 됩니다. 이로부터 생기는 세가지 직무, 즉, 근로와 병역, 그리고 학문의 3가지 결합은 곧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 독일 대학의 존재는 상급 학교로 정해져 있으며 (…) 학문을 통해 독일민족의 지도자와 보호자를 위해 교육과 훈육을 하는 곳입니다.
(4)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사 요한 크레머의 일기문(1942년 8월 31일-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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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박사 요한 크레머(Johann Kremer)는 필(Phil)박사는 1883년에 태어났고, 뮌휀대학 강사였다. 그는 1935년에 SS에 가입하였다. SS의사로 그는 9월 30일부터 1942년 11월 17일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크레머는 일기를 이 당시에만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일기장을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썼다. 전쟁 후 그의 메모는 압류되었고 그의 재판과정에서 증거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1947년 폴란드의 국가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의 나이로 인해서 사면되어 10년 후에 석방되었다. 1960년 뮌스터에서 다시 재판을 받고 - 폴란드에서 복역한 형벌이 참작된 하에 - 10년 복역을 선고받았다. | 1942년 8월 31일 28도 열대기후에 그늘에 먼지와 셀 수 없이 많은 파리. 지도자 숙소 (Führerheim)으로 표시된 급식. 오늘 저녁은 0.4RM(제국마르크)짜리 신맛이 나는 오리간, 거기에 덧붙여서 가득 담은 토마토, 토마토 샐러드 등. 물은 오염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료로 받는 젤터수를 마신다. Mattoni 반점 유형을 예방하기 위한 첫 번째 예방주사. 증명서을 위한 사진촬영.
1942년 9월 1일 베를린으로부터 문서로 총통의 모자, 띠, 바지멜빵이 요구되었다. 오후에 이를 없애기 위해 Zyclon·B로 구역 가스소독.
1942년 9월 2일 첫번째로 밖에서 3시 일찍 특별활동이 있었다. 여기와 비교해서 내게는 거의 코미디 같은 단테풍의 지옥으로 보였다. 이유 없이 아우슈비츠는 말살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
1942년 9월 4일 설사퇴치: 1루 죽과 페퍼민트티, 그리고나서 1주일 식이요법(건강식). 중간 중간에 양배추요리와 타날빈(설사약). 벌써 회복이 두드러짐.
1942년 9월 5일 오늘 오후 수용소 수감자의 특별활동에서: 놀라운 것들 중 가장 놀라움. (…) 저녁 8시경마다 홀란드 출신의 특별활동 때. 동시에 특별식이, 현재 1/5소주. 5가치 담배. 100그램 소시지와 빵이 줄어들자, (…) 오늘과 내일(일요일) 복무.
1942년 9월 6일 오늘 일요일 돋보이는 중식: 토마토스프, 당근과 붉은 양배추 요리를 곁들인 닭 반마리(20그램 지망), 단 후식과 훌륭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식사 후 새로운 소재지의 의사인 발트브뢰벨(Waldbröbel)태생인 전투 지휘관 비르투스(Wirthus)의 인사. 대대지휘관 핏취(Fietsch)는 프라하에서 이전에 그의 지도의사였다. - 지금 난 수용소에 있지만, 난 살충제 등으로 모든 새로운 대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히 다시 힘을 잃은 벼룩이다.(…)
삶에서 1000번의 득점을 한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지나간다. 하지만 가장 작고 짓는 새를 결코 잊지 마라, 유일하게 한번 너는 잘못 쏘는구나!
저녁마다 8시에 다시 특별활동을 밖에서.
1942년 9월 7일 얼룩반점을 예방하기 위한 2번째 예방접종. 오늘은 비가 오고 찬 날씨.
1942년 9월 9일 (…) 후에 의사로서 8명의 수감자들을 태형하고 소총으로 총살하는 데에 참석했다. 비누가루와 비누 2조각을 얻다. 정오에 SS구역 앞에서 한 민간인이 내 자전거에 암살범처럼 달려들어서 내 옆에 달려오더니 주정부위원 호이너(Heuner)가 브레슬라우(Breslau)로부터 온 것인지를 얘기해달라고 했다. 나와 호이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 보인다. 그는 호이너씨와 1차세계대전에서 싸움터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닮았는가?! 저녁에 특별활동이 있었다.(4번째)
1942년 9월 10일 아침에 특별활동이 있었음.(5번째)
1942년 9월 11일 오늘 수용소에서 돌격대대지휘관인 롤링(Lolling), 그가 자기 소개를 할 때 내가 지금 휴가로 짤쯔부르크 북부쪽에 머무르고 있는 본부대지휘관 키트(Kitt)를 처음으로 대신하는 것임을 알았다.
1942년 9월 14일 2번째. 아우슈비츠 질병; 체온 37.8도. 오늘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반점열을 예방하기 위한 주사를 맞음.
1942년 9월 17일 베를린에 있는 옷가게에서 제단 후 전천후외투를 주문했다: 허리까지 48, 총길이 133. 반바지 22, 팔꿈치까지 51, 총 팔길이 81, 가슴둘레 107. 허리둘레 100, 힙 124. 그것에 대해 유니폼 구입권을 덧붙임, 즉 비바람을 막는 유니폼 외투에 대해. 오늘 마이어(Meyer)박사와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를 방문하였음.
1942년 9월 20일 오늘 일요일 오후 3-6시에 수감자 악대 연주를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경청했음; 바르샤바시 오페라의 지휘자. 80명의 음악가. 오후에 돼지고기를 구웠음. 저녁에 구운 (잉어과의)민물고기.
1942년 9월 23일 오늘밤 7시와 7시 무렵 특별활동. 아침에 상부그룹지휘관 포올(Pohl)은 수행원들과 함께 무기-SS가 있는 집에 도착했다. 문 앞에 한 보초병이 서 있었고 (…) 저녁 20시에 지도자숙소에서 상부지휘관과 함께 저녁식사, 진짜 잔치식사를 했다. 곤들매기속과 모두가 원할 정도로 순수한 원두커피, 탁월한 맥주와 햄·치즈 따위를 끼워 넣은 빵들이 있었다.
1942년 9월 25일 의무실과 수용소의 그룹지휘관 그라비츠(Grawitz).그가 회진할 때 나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의사는 전염병이 돌 때 맨 처음으로 처방한다는 것을. 그것에 대해 나는 그에게 정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의미상 일반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은 놀랍게도 하제(설사약)였다. (…) 그렇게 지금 약들을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젊고 경험 없는 의무실 의사가 단지 며칠동안 구석에 있는 아주까리를 통찰력 없는 처방으로 새로운 구멍이 뚫린 위궤양을 발생시키지 않게 하는 경우는 예외이지만.
1942년 9월 27일 오늘 일요일 오후 16-20시, 공공회관에서 동료의 밤 때 저녁식사와 함께 무료맥주, 그리고 담배. 사령관 Höß의 연설과 음악공연 및 연극.
1942년 9월 30일 오늘 밤 8시에 특별활동 있었음. 총돌격지도자 아우마이너(Aumeier)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길이 12㎞이고, 넓이 8㎞, 그리고 22000모르겐(면적단위)이냐고 질문했다. (…)
1942년 10월 3일 오늘 인간의 간과 비장 및 췌장에 대한 생생한 자료를 고정시켰고, 거기에 또 순수 알코올에 고정되어 있는 발진티푸스 병에 걸린 이들에 대해서도. 아우슈비츠에는 모든 길에 티푸스가 널려있다. 그 때문에 나는 오늘 일찍 복부티푸스를 예방하기 위해 혈청주사를 처음 놓도록 시켰다. 돌격지도자 쉬바르츠는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1942년 10월 10일 (…) 처음으로 난방을 하였다. 여전히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에 의해 쓰러짐. 수용소를 계속해서 봉쇄하였다.
1942년 10월 12일 티푸스 예방접종; 그 후 저녁에 강한 집단반응(열).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홀란드 출신1600명 특별활동이 있었음. 마지막 감옥 앞에서의 끔찍한 광경. 그것은 10번째 특별활동이었다.
1942년 10월 13일 (…) 형 집행과 그 이후 7명의 폴란드의 민간인을 처형했다.
1942년 10월 14일 전천후외투(치수52)를 베를린으로부터 받음: 가격은 50,000RM. 겨울이 시작된 뮌스터에 총장에게 위생기관 활성화에 대해 물었다.
1942년 10월 16일 (…) 수용소에서 합지증(손가락 유착)이 있는 유대인들을 사진 찍도록 했다. (아버지와 삼촌과 같은 고통)
(…) 1942년 10월 18일 축축하고 싸늘한 날씨에 오늘 일요일 아침 11시에 특별활동(홀란드인)이 있었다. 나체로 목숨을 애원하는 여자 세 명의 소름끼치는 광경.
(…) 1942년 10월 31일 약 14일 동안 계속해서 아름다운 가을 날씨, 그 날씨는 날이면 날마다 무기담당친위대의 집정원에서 일광욕을 하게끔 한다. 틸로(Thilo)와 마이어(Meyer)는 고향에서 휴가 중이어서 내가 부대의사 임무를 맡았다. 내 관활 관청에 불가피하게 가야하기 때문에 SS군인병원 프라하에서 5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1942년 11월 1일 오늘. 일요일. 병실근무 후, 주로 페뉠렌(Venülen)에서 피를 뽑았다; 13시 1분에 프라하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아우슈비츠를 떠났다. (…)
1942년 11월 8일 오늘 밤 비가 오는 우중충한 가을 날씨에 2개의 특별활동에 참가했다.(12번째와 13번째). 오전에 본부대지휘관 키트(Kitt)는 식사 후 내 제자에게 병실에서 인사했다. 오후에 또 특별활동, 내가 지금까지 함께 해온 14번째 특별활동이다. 저녁에 지휘관 집에 함께 즐겁게 머무름. (…)
(…) 1942년 11월 13일 전에 사진을 찍은, 심한 위축증이 있는 18살의 유대인 몸속의 살아있는 신선한 기관 (간, 비장과 췌장)을 꺼냈다. (…) (Häftl. №68030)
(…) 1942년 11월 15일 오전에 형 집행이 있었다.
(5)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아우슈비츠에 대한 진술(1946-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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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회스(Rudolf Höß)(1900-47)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아우슈비츠의 지휘관이었었고, 그 이후에 경제행정관청(WVHA)의 공직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한번 더 아우슈비츠로 돌아갔다. 1944년 그는 “회스 사건(Aktion Höß)”, 즉, 헝가리 유대인들의 대량학살을 주도하였다. 전쟁 후, 숨어서 지냈으며, Frank Lang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1946년 3월 11일 그는 플렌스부르크 근처에서 체포되었으며 폴란드로 넘겨졌다. 크라쿠프에 구류되었을 때, 그는 아우슈비츠에 관해 대단히 많은 것을 보고했다. 1947년 4월 2일 폴란드의 국가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 나는 유대인 말살이 시작되었던 그 시대에 대해 더 이상 진술할 수가 없다. 아마 1941년 12월, 혹은 1942년 1월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오버쉴레지엔(Oberschlesen)에서 온 유대인들이 중요하다. 이 유대인들은 경찰 카토비츠(kattowitz)에 의해 체포되었고, 기차에서 아우슈비츠 근처 선로구간의 서쪽 편의 대피선으로 수송되어졌고, 거기에 내려졌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1000명 이상의 사람을 수송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기차화물전용플랫폼에서 비상대기조 지역의 유대인들은 국가경찰에게 넘겨졌으며, 수감 지역 지휘관에 의해 두 개조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옷을 벗어야했으며, 이를 구제(Entlausung)하기 위해서 이 구제라는 이름의 방으로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모든 방들 - 5개 방이 문제가 되었다 - 이 동시에 다 채워지고, 가스가 새지 않게 만들어진 문들을 나사로 죄고, 가스통의 내용물을 특별 입구를 통해 방에 부었다. 30분이 지난 후 문들이 다시 열리고 - 모든 방에는 2개의 문이 있었다. 시체들이 밖으로 꺼내졌으며 철도레일 위에 있는 작은 수레로 구덩이를 향해 운반되었다. 옷 조각들은 화물운반용 차로 분류 장소로 보내졌다. 옷을 벗기는 일을 돕고, 창고를 채우고 비우고, 시체를 제거하고 집단 묘지를 파고 메우는 모든 일은 유대인에 대한 특별 명령에 의해 수행되어졌다, 유대인들은 분리된 채로 숙소에서 묵었고, 더 큰 모든 행위에 관한 아이히만(Eichmann)의 명령에 따라 마찬가지로 말살되어야 했다. (…) 처음으로 수송하는 동안, 아이히만은 시체의 금니를 빼고 여자들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RFSS(친위대 중앙지도자)의 명령을 받았다. 이 일은 마찬가지로 특공대에 의해 수행되었다. 말살을 할 때 수감원 지도자나 혹은 보고 담당 지도자들이 그때그때마다 자리에 있었다. 가스실에 데려갈 수 없었던 병든 사람들은 소구경총으로 목덜미가 관통되어 살해되었다. 가스를 투입하는 일은 훈련받은 소독 전문가를 통해 행해졌다. 1942년 초 여전히 작은 행동들이 문제가 되는 반면에, 여름 동안에는 운송이 자주 되었고, 우리는 더 넓은 말살 시설을 만들라는 강요를 받았다. 서쪽 지역에서는 후에 만들어질 시체소각장 Ⅲ과 Ⅳ를 위한 농장이 선별되고 정비되었다. 탈의를 위한 장소로서 수용소 Ⅰ2와 수용소 Ⅱ3 옆에 임시 수용소가 생겼다. 수용소 Ⅱ는 약 1200명을 수용할 정도보다 더 컸다. 1942년 여름에도 집단묘지에 시체들을 가져왔다. 여름 후반 초에 우리는 시체들을 소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장작더미 위에 약 2000명의 시체를 놓고, 나중에 먼저 묻은 시체들을 다시 발굴하여 그 무덤 속에 함께 묻었다. 그 시체들은 우선 기름 찌꺼기와 함께 넣고 나중에 메타놀을 넘치게 부었다. 그 무덤 속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태워졌다. 대량 무덤 속에 묻혀진 시체의 숫자는 107,000개에 달했다. 이 숫자에는 시작부터 소각 초까지 독가스실로 수송되어 죽임당한 유대인뿐만 아니라, 수용소 옆 그 시체 소각장 사용이 오랜 기간동안 중단되었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941/1942년 겨울에 죽은 수감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숫자에는 비르케나우(Birkenau)수용소에서 죽은 전체 수감자들도 포함된다. 나치당의 친위대 중앙지도자는 1942년 여름에 방문할 때, 말살의 모든 과정, 즉 하역에서부터 수용소 벙커 Ⅱ의 철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정확히 지켜 보았다. 그 때에는 아직 시체가 소각되지는 않았다. (…) 대관구지휘관 브라흐트(Bracht)와 상부그룹지휘관 쉬마우저(Schmauser)가 그곳에 있었다. 중앙지휘관의 방문 후 곧 슈탄다르테 지휘관인 블로벨(Blobel)이 아이히만(Eichmann) 사무실에서 왔고 모든 집단묘지에서 시체들을 꺼내 태우라는 RFSS의 명령을 전했다. 사람들이 나중에 태워진 숫자에 대해 어떠한 귀납적 추론도 할 수 없도록 재를 제거해야 했다. 슈탄다르테 지휘관인 블로벨은 동쪽 방에 있는 모든 집단묘지를 찾아 내서 없애라고 이미 명령을 받았다. 그의 참모부는 특수명령 “1005”을 수행할 것을 명령 받았다. (…) 쿠름호프(Kulmhof)를 방문할 때 나는 엔진폐기 가스로 살해하기 위해 설치된, 화물차 딸린 말살 시설들을 보았고, 거기에서 근무하는 사령부 지휘관은 그 방식을 매우 불확실한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가스가 불규칙적으로 나오고 종종 죽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쿠름호프(Kulmhof)에서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집단으로 무덤에 묻혔고, 혹은 이미 태워졌는지에 관해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슈탄다르트 지휘관인 블로벨은 동쪽 방에 있는 집단묘지의 수를 충분히 알았지만, 그것에 대해 절대로 침묵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원래 RFSS명령은 모두 아이히만을 통해서 아우슈비츠로 수송된 유대인들 모두를 예외 없이 말살시키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오버슈레지엔 지역 출신 유대인들에 대한 말살이 행해졌으나, 독일 유대인을 처음으로 수송할 때에는 일할 수 있는 모든 유대인들-남자들과 여자들-을 골라내서 군비계획을 위한 수용소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것은 여자 수용소를 설치하기 전에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 명령에 의해 아우슈비츠에서 여자 수용소를 지어야 하는 필요성이 처음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독일 제국에 있는 오래된 수용소에 있는 수용소 지휘관들이 모든 수감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자주 일을 찾아야 했던 반면에 강제수용소에서 계속 이루어지는, 규모가 큰 군비작업에 의해, 그리고 수용소 밖에서 군비작업을 하도록 수감자를 투입하기 시작함으로써 갑자기 수감자들이 현저히 감소하게 되였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만 수용되어져야만 하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순수한 유대인 수용소가 되어야만 하며, 모든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로 급송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결코 전부 수행되지는 않았다. 또한 후에 유대인들은 다른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해 수용소 밖 군비작업에 투입되었다. 일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SS(나치친위대) 의사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수용소의 지휘관들 또는 노동에 투입시키는 지휘관들 또한 이 일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혹은 나의 동의도 전혀 없이 수행하였다. 그렇게 하여 끊임없이 SS-의사들과 노동에 투입시키는 지휘관들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아우슈비츠 지휘관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생겼고 베를린의 가장 높은 직위에서 RFSS 명령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가 계속해서 커지게 되었다. (…) 아이히만, 뮐러(Müller)등의 친위대 중앙지도자는 비밀경찰을 기반으로 하여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들을 말살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었다. 나치 친위대 소속 의사는 (…) 약하고 늙고, 쓸모가 제한되어 있는 사람은 단기간에 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또한 이미 과부하된 그들의 건강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을 것이며, 불필요하게 병실을 늘리는 것으로 인해 더 많은 의료계 종사자들과 약제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죽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정말로 일에 투입할 만한, 일할 가능성이 있는 유대인들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행정관청의 포올(Pohl)과 마우어(Maurer)는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나중에 일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많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무장에 투입하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심은 군수관련부처에서 일할 수 있는 수감자들을 엄청나게 요구하면서 더 커지게 되었다. 이 둘은 결코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숫자를 RFSS에게 계속해서 약속하였다. 슈탄다르테 지휘관 마우어(Maurer)는 어려운 숙제를 그 때 안고 있었고, 상관의 끊임없는 압박이 따랐으며, 그래서 일에 투입시키는 지휘관은 압박으로 인해 가능한 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많이 얻도록 선동되었다. RFSS의 정확한 결정을 끌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내 자신의 견해는 일에 투입시키기 위해서는 정말로 건강하고 힘 있는 유대인들을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별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차량 적재 화물은 차례차례 짐이 내려졌다. 짐을 내려놓은 후에 유대인들은 SS의사에게 한명씩 지나가야 했다. 의사들은 그들이 행진하면서 지나갈 때 쓸모가 있는지를 결정하였다. 일에 투입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져 즉시 수용소에 연행되었다. 유용한 사람은 모든 수송된 사람들 중 총 평균 25-50%였지만 항상 일정치는 않았다. 예를 들어 일할 수 있는 그리스 유대인의 평균 퍼센트가 단지 15%이고 슬로베키아에서 수송된 사람들은 100% 일할 수 있었다. 유대인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예외없이 수용소로 수송되어졌다. 야외에서 처음으로 시체가 소각되었을 때 이미 소각이 계속해서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예측할 수 있었다. 날씨가 나쁘거나 바람이 강할 때 소각 냄새가 몇 킬로미터로 멀리 퍼졌고, 행정당국과 정당을 지지하는 편에서의 반선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시체 소각에 대해 부근의 주민들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말살과 관련된 모든 SS구성원들은 그 모든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SS 심리는 관계자측이 침묵하지만은 않을 것을 비추었다. 상당한 처벌들도 그것에 대해 지껄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공중에서 야간에 적들에 대항하여 계속 공중방어가 있었다. 수송차의 도착을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밤마다 시체를 소각해야만 했다. 제국교통부 기차계획표 회의에서 결정한 기차시간프로그램에 따라 철도구간의 막힘과 혼란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일들이 행해져야 했다. 특히 군사적인 이유에서 그러했다. 앞에서 말한 근거들이 모든 수단을 통해 계획을 고무시켰고 결국 두 개의 큰 시체소각장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두 개 더 작은 시설이 건축되었다.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짓고 있었던 시설은 건립되지 않았다. 이후 1944년 가을 RFSS에 유대인 말살을 즉시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 두 개의 큰 시체 소각장 Ⅰ,Ⅱ는 1942/43년 겨울에 지어졌으며 1943년 초에 가동되었다. 그 시체 소각장들 3개의 방에 화덕 5개가 있었고, 24시간 안에 대략 2000명을 태웠다. 소각 용량을 증가시키기에는 가열 기술이 충분치 않았다. 소각용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시도로 심각한 손상이 있게 되었고 이것은 여러 번 가동이 완전히 중단되게 하였다. 두 시체 소각장 Ⅰ과Ⅱ는 지하에 통풍과 환기가 될 수 있는 탈의실과 가스실이 있었다. 시체들은 승강기로 화덕 위에 실려졌다. 가스실은 약 3000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숫자들이 결코 다 채워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운송된 유대인들이 결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두 작은 시체 소각장 Ⅲ과 Ⅳ는 토프 에어푸르트(Topf Erfurt) 회사의 계산에 따르면 24시간 안에 1500명을 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조건으로 인한 자원부족으로 Ⅲ과 Ⅳ은 자원을 절약하여 건축되도록 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탈의실과 가스 살해실은 지상에 지어졌고 화덕은 간단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 Ⅲ은 곧 완전히 중지되었고 후에 더 이상 이용되지 않았다. Ⅳ에서는 소각이 중단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거기에서는 4-6주 동안의 짧은 소각기간 후에, 화덕이나 연통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시체소각장 Ⅳ 뒤 구덩이 속에서는 가스실에서 죽은 이들의 시체가 주로 불에 소각되었다. 일시적으로 건설한 건물 Ⅰ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제3 공사분기 초기에 철거되었다. 건축 Ⅱ는-후에 자유건물 혹은 벙커Ⅴ로 지칭되었다-마지막까지 운영되었고, 실제로 수용소 Ⅰ과 Ⅳ까지 모두 고장이 나는 경우에 도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존재했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서는 낮에는 가스살해가 Ⅴ에서 행해지고, 밤에는Ⅰ에서 Ⅳ까지 사람들이 운송되어 도착한다. Ⅴ에서는 실제적으로 거의 제한이 없이 소각할 수 있었고, 낮과 밤에도 여전히 소각할 수 있었다. 1944년부터 적들의 공중전으로 인해 밤에는 소각해서는 안 되었다. 24시간 안에 가스 살해실과 소각장에서 살해한 최고치는 1944년 여름에 Ⅲ을 제외한 모든 수용소에서 약 9000명 이상이었다 (…). 그 때 연착으로 인해 준비된 3대의 기차 대신 5대의 기차들이 24시간 안에 들어왔고 그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시체소각장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두 개의 큰 축 끝에서 세워졌다. 1.수용소를 더 이상 확장시키지 않기 위해서 2. 수용소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말살작업의 중지 후에 가스실과 탈의실이 목욕 시설로 이용되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그 시설은 벽이나 덤불로 보호 되어져야만 했다. 원료의 부족함으로 인해 이것이 행해지지는 않았다. 말살이 일어나는 모든 곳은 임시적으로 위장 울타리로 보호했다.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공사구간 I과 II 사이에 있는 3개의 철도레일은 역으로 개조되고 지붕이 얹어지고 시체소각장 Ⅲ과 Ⅳ까지로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했다. 그러면 검사 대상에서 예외로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원 부족으로 인하여 그 계획은 시행되지 못했다. 식량은 아주 불충분했고 달마다 식량관리부에 의해 계속해서 감소되었다. 중앙지도자들은 수감자들을 군수산업에 투입하도록 더욱 강요했고 이를 통해 상위그룹지휘관 포올(Pohl)은 일할 수 없게 된 유대인들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6주간에 다시 건강하게 되어 일에 투입될 수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특히 잘 돌보고 먹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 그 때까지 일을 할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운송되어 가스살해 되거나, 만일 그 구역에서 병들게 되면 주사로 죽임을 당했다 - 그 명령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 정말 비웃음거리였다.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의약품들은 정말로 제로상태이고 숙소도 그러해서 심하게 아픈 사람들은 거의 수용소에 없었다. 어떠한 항의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항의를 해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수용소에는 아직 살해되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이 숙박할 장소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반적인 건강상태는 악화되었고 전염병이 날뛰게 되었다. 그 명령은 사망수를 급격히 증가시켰으며, 전체적 상태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다-나는 단지 한 명의 일할 수 없게 된 유대인도 다시 또 무장을 위해 수송되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Ⅱ. 연합국 점령시기 나치청산
(6) 국제군사법정(뉘른베르크 재판)의 헌장(1945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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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재판이 성립되게 된 경위는 순탄치 않았다. 연합국이 전쟁의 와중에서 전범을 처벌해야 한다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합의하고, 유엔 산하에 전범위원회 (United Nations War Crimes Commission)를 런던에 설치하여 전쟁범죄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42년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후 연합국 사이에서, 그리고 미국무성과 국방성 사이에서 전범들을 처리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상당한 마찰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은 바로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이 1945년 8월 8일에 맺은 <유럽 추축국의 주요전범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헌장>이었다. 이 소위 <국제군사법정 헌장>에는 처벌되어야 할 범죄에 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데, 먼저 이전에 헤이그 조약에서 규정된 통상적인 '전쟁범죄' 이외에도, 침략전쟁의 기도, 준비, 개시, 그리고 수행에 따르는 범죄인 '평화에 반하는 죄', 그리고 전쟁 전에 혹은 전쟁 중에 일반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하는 비인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인류에 반하는 죄'가 제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러한 범죄의 책임자는 그 신분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형사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 헌장의 기초 작업에서 연합국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조직범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9조와 제10조였다. 이들 규정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끝난 다음에도 다른 전범들을 법정에 세우기 쉽게 되었던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 추가재판이 가능했던 것처럼 논의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규정은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서, 아니 그 이전부터 그 법적인 정당성에 대해 의문점이 크게 제기되었던 사항이다. | 제1부. 국제군사법정의 구성
제1조 - 미국정부, 프랑스 임시정부, 대(大) 브리튼 및 아일랜드의 대영제국 정부, 그리고 소련사회주의정부는 1945년 8월 8일 조인한 협정에 의거하여, 유럽 추축국의 주요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과 처벌을 위해 국제군사법정(이하 '법정'으로 축약)을 설치한다.
제2조 - 본 법정은 4명의 위원으로 구성되고, 위원은 각자 대리인을 한 명씩 둔다. 조인국은 위원과 대리인을 각각 한 명씩 지명한다. 대리인은 가능한 한 본 법정의 모든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이 법정의 위원이 병이나 혹은 다른 사유로 인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리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제3조 - 본 법정, 위원 또는 대리인은 검사나 피의자 혹은 변호인에 의해 침해받지 아니한다. 조인국은 건강상의 이유 혹은 다른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재판기간 중이 아니면, 자국의 위원이나 대리인을 그 대리인 아닌 다른 사람으로도 교체할 수 있다.
제4조 (a) 본 법정의 정족수는 위원 4명이 전원 출석하거나, 어느 위원이 궐석할 경우 그 대리인이 참석한 경우에만 충족된다. (b) 본 법정의 위원들은 재판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을 의장으로 선출하도록 하며, 그 의장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재판정의 질서를 유지한다. 누가 3표 이상을 획득하면 선출된 것으로 본다. 이후 속개될 법정의 재판장은 호선을 원칙으로 하기로 합의한다. 그렇지만 법정의 개정이 조인국 네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의 영토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그 조인국의 대표가 본 법정을 지휘한다. (c) 전술한 것을 제외한 다른 문제에 대해서 본 법정은 다수결로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 투표결과가 동수로 맞설 경우에는 의장의 투표가 이를 결정한다. 선고와 판결은 최소한 재판정 위원 가운데 3명이 동의했을 때에만 내려질 수 있다.
제5조 - 처리해야할 재판의 내용이 많고 필요할 경우, 다른 재판정을 세울 수 있다. 각 재판정의 설치, 기능, 그리고 절차는 동일해야 하며, 또 이 헌장에 의거해야 한다.
제2부. 재판권 및 일반원칙
제6조 - 본 법정은 유럽 추축국의 주요 전범에 대한 재판 및 처벌에 관한 이 헌장 제1조의 런던협정에 의거해서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행동했건 혹은 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행동했건 간에, 유럽 추축국에 이로운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들을 재판하고 처벌할 권리를 갖는다.
다음과 같은 행위가 모두 본 법정의 재판권에 속하는 것들이며, 이에 대해서는 각자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a) 평화에 반하는 죄: 곧 침략전쟁이거나, 국제법, 국제협약 혹은 국제협정을 어기는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하며, 주도하거나 시행한 행위, 혹은 그와 같은 것을 이루기 위한 함께 계획하거나 음모에 가담한 행위를 말한다. (b) 전쟁범죄: 곧 전쟁에 관한 법률이나 관습을 어긴 죄. 그러한 범죄에는 노예노동이나 다른 목적을 위해 점령당한 국가의 주민 혹은 그곳에 사는 민간인을 살인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징용한 사실, 또는 전쟁포로 및 외국인을 살해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인질로 살해하거나, 공공 혹은 사적 재산을 강탈하고, 도시, 읍, 마을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거나 군사적 필요성으로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약탈을 저지른 사실도 포함된다. (c) 인류에 반하는 죄: 곧, 전쟁 이전 혹은 전쟁 기간 중에 그 어떤 민간인에게 가해진 살인, 멸종, 노예화, 추방 그리고 기타 다른 비인간적인 행위들, 혹은 그 범죄가 행해진 나라의 국내법에 저촉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본 법정의 재판권 내에 있는 범죄의 시행이나 혹은 그와 관련되어 이루어진 정치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인 원인에 의한 박해를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공동계획이나 음모를 수립하거나 혹은 실행하는 데 참여한 지도자, 조직가, 선동가 혹은 공범들은 그 계획을 수행한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제7조 - 피고인의 공식적인 지위가 국가수반이건 혹은 정부 고위관리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면하거나 그 처벌을 경감시키는 사유로 간주할 수 없다.
제8조 - 피고인이 정부나 혹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 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본 법정이 정의(正義)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그것을 처벌을 경감시키는 요인으로는 간주할 수 있다.
제9조 - 본 법정은 집단이나 조직의 구성원들에 대한 재판에서, 기소사유로 판단될 수 있는 그 개인의 행적에 의거하여,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조직을 범죄조직으로 판결할 수 있다. 기소장이 접수되면 본 법정은 검사 측이 법정에 그러한 판결을 요청한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견해를 밝혀야 하며, 그 조직 구성원이 본 법정에서 그 조직의 범죄성격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싶은 경우 그에 대한 신청서를 낼 수 있다. 본 법정은 그러한 신청을 허락하거나 기각할 수 있다. 만약 그 신청이 허락될 경우, 본 법정은 그 신청자가 어떻게 출두하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지시할 수 있다.
제10조 - 본 법정이 한 집단이나 조직을 범죄조직으로 판결될 경우, 이 조약 당사국의 해당 기관에서는 바로 그러한 조직에 소속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해당자들을 자국의 군사 혹은 점령국 법정에 회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그럴 경우 그 집단과 조직의 범죄적 성격은 이미 입증되었으며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제11조 - 본 법정에 의해 기소된 사람은, 이 헌장 제10조에 의거하여, 범죄 단체 및 조직의 구성원이었다는 것 이외의 다른 범죄행위로 인해 자국의 군사 혹은 점령국 법정에 소추될 수 있고, 그 법정은 그를 기소하여, 본 법정이 그가 소속했던 집단 혹은 조직의 범죄행위에 가담했던 점에 대해 처벌한 것과는 별도로, 혹은 그에 추가하여 처벌할 수 있다.
제12조 - 본 법정은 이 헌장 제6조에 규정된 범죄에 혐의가 있는 사람의 경우, 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거나 혹은 본 법정이 어떤 사유에서 정의를 위해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심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를 출석시키지 않은 채 재판을 진행시킬 권한을 갖는다.
제13조 - 본 법정은 그 재판절차에 대한 규칙을 제정한다. 이 규칙은 본 헌장의 취지에 위배되어서는 아니 된다. (…)
(7)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Gesetz Nr. 104 zur Befreiung von Nationalsozialismus und Militarismus)(1946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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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에 관한 법은 미군정이 1946년 3월 미점령지역에 공포한 것으로, 탈나치화의 주도권을 사실상 독일인들에게 넘겨준 것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미군정당국은 1945년 5월 독일에 주둔하면서부터 강력한 탈나치화 작업을 수행했다. 종전 후 약 1년 동안 미군정지역에서만 약 10만 명 정도가 나치전력으로 인해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1945년 말까지 공직이나 기업 등에서 해직된 사람의 수만 해도 1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될 정도이다. 이처럼 강력하게 추진되던 탈나치화 작업은 이후 독일인들의 반발에 부딪쳤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 대규모 공직추방으로 인해 행정기능 등이 마비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나치즘 및 군국주의 청산법이다.이 법으로 인해 18세 이상의 독일인인 모두 신원명세서를 작성해야 했으며, 심사청은 그 신원명세서를 토대로 나치에 협력한 정도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판정했다. 이 법의 시행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단순가담자의 양성'(Niethammer)이라고 할 수 있다. 곧 탈나치화의 감독권은 여전히 미군정당국이 쥐고 있었지만, 탈나치화 시행이 독일인들의 수중에 넘겨지고 난 후, 탈나치화의 강도는 점차 약해져서, 제4등급인 단순가담자로 판정을 받는 사람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나치전력에 대한 엄격한 평가는 사라지고, 그들에게 오히려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 기본강령
제1조 1. 우리 민족이 나치즘과 군국주의로부터 벗어나 독일의 민주적 국가활동이 영원히 전 세계와 평화롭게 영위될 수 있는 토대를 쌓기 위해서는, 나치즘의 폭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거나 혹은 정의와 인류애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나 그 상황을 이용하여 자기이익을 챙김으로써 나치즘과 군국주의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공업무와 경제 및 문화 활동에서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서 배제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보상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2. 죄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사람은 그로부터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다.
제2조 1. 개개인에 대한 판결은 개인적 책임에 대한 정당한 검증과 실제의 태도를 전체적으로 참작하여 내려진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부과될 처벌내용, 그리고 공공업무와 경제 및 문화 활동에서 배제되는 정도를 신중하게 단계별로 나누어 판결하는데, 그러한 조치는 나치즘과 군국주의적 행위 및 이념의 영향력을 영원히 제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이 법률에 의해, 나치당과 그 산하 단체 및 여타 조직에 소속된 경력과 같은 형식적인 근거는 그 자체로 책임의 정도를 정하는 데는 결정적이지 않다. 이러한 근거는 비록 전체적인 태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증거일 수 있지만, 반증이 있으면 그 증거력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상쇄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그 어느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자체로 이에 대한 책임이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신원명세서
제3조 1. 책임 있는 자를 모두 색출하고 이 법의 시행을 위해 신원파악의 절차를 마련한다. 2. 18세 이상의 모든 독일인은 신원명세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 3. 신원명세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청산 관할 장관에게 위임한다.
제4조
처벌대상자 구분
죄과를 공정하게 판단하여 그에 해당하는 처벌을 내리기 위해서는 처벌자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주요책임자 2. 적극지지자(지지자, 행동대원, 향유자) 3. 나치수혜자(집행유예집단) 4. 단순가담자 5. 무혐의자
주요책임자
제5조 - 주요책임자란 다음과 같다. 1. 나치즘 희생자나 반대자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자 2. 독일 내 혹은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서 외국 시민이나 전쟁포로에게 인권에 저촉되는 부당한 행위를 한 사람 3. 비록 그것이 저항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도, 난동, 약탈, 징용 및 기타 범죄행위에 책임이 있는 사람 4. 나치당 및 그 지구당, 그리고 나치당의 산하단체나 기타 다른 나치 및 군국주의적인 조직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 (…)
제6조 - 반대증거가 있을 때까지 주요책임자로 간주되는 사람은 이 법조문 부록에 달려 있는 표의 제1등급 난에 제시되어 있다.
적극지지자
제7조 - I. 지지자란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지위 및 업무를 통해 나치의 폭력정권을 기본적으로 후원했던 사람 2. 자신의 지위, 자신의 영향력 혹은 자신의 관계를 이용하여 강제 및 협박, 폭력, 억압 혹은 다른 부당한 조치를 행사한 사람 3. 나치 폭력정권, 특히 나치 인종차별강령의 확고한 신봉자로 입증된 사람 (…)
주요책임자
제15조 - 주요책임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처벌이 부과된다. 1. 이들은 최소 2년 최대 10년 간의 노동수용소 수감에 처함으로써 배상과 반성의 노동을 하도록 한다. 1945년 5월 8일 이후에 부과된 정치적 수감기간은 그 기간에 합산한다. 신체부자유자는 그 정도에 따라 특별노동이 부과된다. 2. 이들의 재산은 보상을 위한 재원으로 몰수한다. 가족관계 및 필수적인 생업에 불가피한 금액만은 여기에서 제외한다. (…)
적극지지자
제16조 - 적극지지자에 대한 처벌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들은 5년 이하의 노동수용소 수감에 처해, 배상과 반성의 노동을 하도록 한다. 1945년 5월 이후에 부과된 정치적인 수감 기간은 그 기간에 합산한다. 2. 이들이 노동수용소에 수감될 수 없는 처지일 경우, 일반인을 위한 특별노동을 부과한다. 3. 이들의 재산은 보상의 재원으로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재산을 전부 몰수할 경우에는 제15조 4항 2호에 의거하여 시행한다. 만약 부분적으로 몰수할 경우에는 특히 현시세가로 평가해 시행한다. 그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물건은 여기에서 제외한다. (…)
나치수혜자(집행유예집단)
제17조 - 나치수혜자에 대한 처벌내용은 다음과 같다. I. 집행유예기간 동안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일이 금지된다. 가. 소유자, 동업자, 이사 혹은 지배인으로서 한 사업체를 경영, 관리 혹은 통제하거나, 혹은 어떤 사업을 행하거나 어떤 사업에 일부 또는 전부를 출자하는 것, 나. 고용된 신분으로 간단한 업무 이상을 수행하는 직원으로 근무하는 것, 다. 선생, 종교인, 출판인, 작가, 혹은 라디오 해설가로 일하는 것, II. 단순지지자가 집행유예집단으로 판결될 당시, 한 기업의 소유자나 혹은 동업자일 경우, 집행유예기간 동안에는 그러한 기업참여가 금지되고 대신 다른 위임자를 내세워야 한다. (…)
일과 고용에 대한 법적 금지
제58조 1. 이 법이 효력을 발생하면, 이 법의 부록에 나와 있는 표의 제1급 및 제2급 판정자들이거나 혹은 나치당 및 그 산하 단체(히틀러 청소년단체(HJ) 및 여학생단체(BDM)는 제외)의 소속되었던 사람들은 공무원으로나, 사기업, 공공 단체 및 사회단체에 근무할 수 없으며 간단한 업무를 관장하지 않은 자유직업도 가질 수 없다. 이들이 만약 간단한 업무 이상을 수행하고 있을 경우에는, 이 법이 효력을 발생함과 동시에 그들은 그 직책이나 업무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들은 그와 비슷한 관청이나 업체에서도 더 이상 근무할 수 없다. 다른 직책에서도 이들은 단지 단순 업무만을 볼 수 있다. 2. 이러한 면직 및 업무중단은 고용관계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업가, 기업체 소유자, 공동출자자 등도 이에 해당된다. 3. 이 규정은 최소한 10명 이상의 고용자를 갖고 있는 소기업, 특히 수공업자, 상점, 농가 등등의 소유자나 고용자에게도 적용된다. (…)
(8) 뉘른베르크 재판 판결문(1946년 9월 30일-10월 1일) 판결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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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0일에 시작한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6년 8월 31일 피고인들의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그 심리절차를 마쳤고, 9월 30일에 시작된 판결문 낭독이 10월 1일까지 이어져 비로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재판부는 영국인 판사 로렌스를 재판장으로 하는 4명의 재판관(미국의 비돌, 프랑스의 드파브르, 소련의 니키첸코)으로 구성되었고, 총 218일의 재판과정에서 모두 360명이 증언했다. 피고는 도합 24명이었다. 그 가운데 라이(Ley)는 구금 중에 자살했고, 기업가인 크룹(Krupp)은 병으로 판결이 연기(후에 사망)되었기 때문에, 판결은 22명에게만 내려졌다. 그 결과는 교수형 12명, 종신형 3명, 10년 징역 1명, 15년 징역 1명, 20년 징역 2명, 무죄 3명이었다. 또 기소된 나치조직 여섯 개 가운데 세 조직(나치당, SS, 그리고 게슈타포 및 안전기획부)이 범죄집단으로 인정되었다. 10월 15일 괴링은 자살했고, 나머지 사형수들에 대한 교수형이 바로 그 다음날 집행되었다. 이들의 시체는 화장되어 강가에 뿌려졌다. 원래 계획했던 추가 국제군사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뉘른베르크에서는 미군정의 후속재판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열려서, 정치가, 군부, 경제지도자, 의사, 법률가, 외무성 관리 등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와 비슷한 재판이 프랑스 점령지역, 영국 점령지역, 소련 점령지역에서도 있었다. 아래 내용은 유대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 (…) 독일 나치정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일은 이 법정에서 아주 자세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이 법정은 이 비인간적인 행위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 전쟁 이전에도 나치는 유대인을 가혹하고 심하게 박해한 사실이 있지만, 이는 전쟁 중에 독일점령지에서 시행된 정책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이것은 이전 독일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과 유사했습니다. 곧 유대인들은 따로 등록해야 했으며, 게토에 살도록 강요당했고, 노란색의 별 표식을 달아야만 했고, 노예노동에 혹사당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풀어줄 정책으로 마련된 소위 '최종해결'은 달랐습니다. 곧 '최종해결'이란 1939년 히틀러가 이미 위협한 바 있던 유대인의 멸종을 의미한 것이었으며, 전쟁발발의 결과 이 정책은 게슈타포 특수부대가 제B4국의 책임자인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중심으로 수행했습니다. 유대인을 멸종시키려는 이 계획은 소련을 침공한 후 곧바로 가시화되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은 자신들 후미에 있던 지역에 치안경찰 및 안전부의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그곳 주민들이 독일군에 저항하는 것을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이 부대는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멸종시키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 유대인 수감자들이 살해되는 과정에서 이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는 명확한 증거로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여성 희생자들은 죽음을 당하기 전에 머리카락이 모두 잘려졌으며, 그 잘려진 머리카락은 독일에 보내져 매트리스를 만드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의 의복이나 금전, 그리고 귀중품은 따로 수거되어 적당한 중계업자에 보내져 처분되었습니다. 이들이 살해되고 난 후, 금으로 된 치아 등 그들 시신에 있던 금붙이는 제국은행에 보내졌습니다. 화장되어 재로 된 시신은 거름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희생자의 시체에서 기름을 빼내 판매용 비누를 만드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어느 집단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대인을 찾아내어 '최종해결'을 하고자 했습니다. 독일인들은 헝가리와 불가리아 등과 같은 위성 국가에게까지 손을 뻗쳐 유대인을 말살하는 수용소를 건립했으며, 1944년 말까지 헝가리로부터 유배된 40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증거에 의하면, 루마니아에서는 유대인 '청소'를 위해 약 11만 명이 추방되었습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이 계획을 시행하고 감독한 아이히만은, 이 정책으로 약 6백만 명이 살해되었고, 그 중 4백만 명이 바로 이 말살정책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
판결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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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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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n Göring |
제1항 |
제2항 |
제3항 |
제4항 |
형량 |
Joachim von Ribbentrop |
유죄 |
유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Wilhelm Keitel |
유죄 |
유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Alfred Jodl |
유죄 |
유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Alfred Rosenberg |
유죄 |
유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Wilhelm Frick |
무죄 |
유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Arthur Seyss-Inqart |
무죄 |
유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Fritz Sauckel |
무죄 |
무죄 |
유죄 |
유죄 |
교수형 |
Martin Bormann(궐석) |
무죄 |
- |
유죄 |
유죄 |
교수형 |
Einst Kaltenbrunner |
무죄 |
- |
유죄 |
유죄 |
교수형 |
Hans Frank |
무죄 |
- |
유죄 |
유죄 |
교수형 |
Julius Streicher |
무죄 |
- |
- |
유죄 |
교수형 |
Erich Raeder |
유죄 |
유죄 |
유죄 |
- |
종신형 |
alter Funk |
무죄 |
유죄 |
유죄 |
유죄 |
종신형 |
Rudolf Hess |
유죄 |
유죄 |
무죄 |
무죄 |
종신형 |
Albert Speer |
무죄 |
무죄 |
유죄 |
유죄 |
20년 징역 |
Baldur von Schirach |
무죄 |
- |
- |
유죄 |
20년 징역 |
Constantin von Neurath |
유죄 |
유죄 |
유죄 |
유죄 |
15년 징역 |
Karl Dönitz |
무죄 |
유죄 |
유죄 |
- |
10년 징역 |
Hans Fritzsche |
무죄 |
- |
무죄 |
무죄 |
무죄 |
Franz von Papen |
무죄 |
무죄 |
- |
- |
무죄 |
Hjalmar Schacht |
무죄 |
무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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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죄 | 제1항: 세계평화에 대한 음모 제2항: 침략전쟁의 기도, 수립 그리고 수행 제3항: 전쟁범죄 제4항: 반인도적인 범죄
(9) 토마스 만(Thomas Mann)이 발터 폰 몰로(Walter von Molo)에게 쓴 공개서한(194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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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과 프랑크 티쓰(Frank Thieß), 발터 폰 몰로(Walter von Molo) 사이에 벌어진 1945년의 국내, 국외 망명(innere-äußere Emigration) 논쟁은 나치 범죄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인의 집단 책임문제 등을 배경으로 발생한다. 이 논쟁은 종전 후에 자신들을 독일전통의 적법자로 보는 국외망명작가들과 독일 내에 머문 작가들 사이에 대화가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논쟁의 계기가 된 것은 토마스 만의 귀국문제였다. 만은 급히 독일로 돌아와 줄 것을 호소하는 발터 폰 몰로의 공개서한에 대한 답장의 형식을 취한「제가 독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Warum ich nicht nach Deutschland zurückgehe)」라는 글에서 나치 치하 독일에서 인쇄되었던 책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 때문에 독일내의, 특히 국내망명작가들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다음은 그 편지의 일부분이다. | 제가 독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
(…) 저는 제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외국에 나와 있는 우리 망명객들은 품행을 바르게 했었고 히틀러에게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누구를 향해서도 돌을 들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단지 수줍어하고 "낯을 가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독일은 근간의 몇 년간에 제게 아주 낯설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두려움을 주는 나라입니다. 이 점은 당신도 인정하셔야 합니다. 저는 폐허가 된 독일이 두렵습니다. (…) 잘못된 믿음일지 모르지만, 저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출판된 책들이 정말로 가치 없고 이것을 갖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책들에서는 피와 치욕의 냄새가 납니다. 그것들은 모두 폐기처분되어야 합니다 (…) 최근에 저는 미국 측으로부터 일종의 전리품인 오래 된 독일잡지 한 권을 소포로 받았습니다: 고위층의 나치스트 교수에 의해 발행된 「발전하는 민족」1937년 3월호(함부르크 한자 출판사)이었습니다. 교수의 이름은 정확하게 크릭 Krieg(역주: 독일어로 전쟁을 의미함)은 아니었지만 ck로 끝나는 Krieck이었습니다. 그것은 불안감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이런 약물이 투입된 사람들과는 잘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독일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착하고 믿을 수 있는 많은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적들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패배한 적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가장 나쁘고 악의에 찬 사람들입니다. (…) 몇 주전에 저는 워싱턴의 국회도서관에서 '독일과 독일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 독일의 '내면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한 독일이라고 하는 두 개의 독일에 관한 이론을 저는 거부했습니다. 악한 독일은, 그것은 실패한 선한 독일이라고 말입니다. 불행과 죄, 몰락 속의 선한 독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나쁜 관습에 따라 선하고 고귀하고 정의로운 백의의 독일을 제 주위의 세계에 소개하고자 여기 서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제가 독일에 관해 청중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낯설고 냉정하고 객관적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제 안에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독일역사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독일은 히틀러라는 이름을 가진 짧고 희미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 세계경제, 정치적 경계의 중요성 감소, 실용적 통일의 자각을 통한 인간성의 각성, 세계가 하나의 국가 됨을 처음으로 주시하는 것 - 시민 민주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대연합체에서 중요시되는 이 모든 사회적 휴머니즘이 어찌 독일의 본질에 반하는 낯선 것일 수가 있겠습니까?
(10)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탈민족주의(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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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에 1919년 이후로 스위스에 거주했던 작가 헤르만 헤세의『리기-일기 (Rigi-Tagebuch)』가 출간된다. 이 책의 발췌문들은 그 이후에 여러 일간지에 실렸다. 이 발췌문 중 슈바벤 지방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취한 부분은 독일인의 민족주의에 관한 헤세의 부정적 견해로 인해 많은 독일인의 반발을 사게 된다. 여기서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경험하였던 '탈민족주의'에 관련하여 독일인에게 조언하고 있다. | 나는 그대들에게 진정 소리 높여 외치고 싶네: 멸망이 그대들에게 제공한 얼마 안 되는 좋은 점들을 다시 놓치지 말라고! 1918년 당시는 군주국 대신 형편없는 헌법을 가진 공화국이었지. 그리고 이제 그대들은 불행의 한가운데서 다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승리자와 중립자 보다 뛰어나게 새로운 발전과 그리스도의 강생을 경험할 수 있을 테지: 그대들은 그대들이 근본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워했던 온갖 민족주의의 광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일세. 그대들은 그 일을 이미 계속해왔네. 그러나 충분할 만큼 계속해서 철저히 한 것은 아니었네. 왜냐하면 그대들이 이러한 발전을 완전하게 했다면 그대들은 독일 민족에 대해서 그리고 집단책임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말을 읽거나 들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온 민족들이 주는 온갖 모욕과 도발을 최소한 상심하지 않고서 읽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지.
(11) 리카르다 후흐(Ricarda Huch)의 민족주의(1946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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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신문에 실린 독일인의 민족주의에 관한 헤세의 글을 읽은 작가 리카르다 후흐는 1946년 4월 12일자의 한 신문에서 이와 관련하여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민족적 감정은 타고나는 것이나 독일민족은 이러한 민족감정을 다른 민족에 대한 존중의식과 함께 갖는 것에 있어 항상 어려움을 느껴왔다고 설명하면서, 독일인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과도한 민족감정임을 말하고 있다. | 민족감정의 시기에 들어서면, 우리는 쉽게 너무 날카롭고, 너무 격하고, 또한 너무 호전적으로 된다. 우리가 예전에 다른 민족을 우리와 비교해서 과대평가했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민족을 다른 민족의 희생을 통해서 상승시켰다. 이는 우리가 나치즘을 통해 공포를 느끼며 경험하였다. 독일인의 민족의식을 강화시키려는 나치의 노력은 다른 민족 모두에 대한 과소평가, 경멸과 모욕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이러한 격심하게 상승된 민족감정에 대해서 헤르만 헤세는 경고하려고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사용한 민족주의라는 단어 또한 그러한 민족감정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 민족 감정에서의 실제적 분리가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우리 독일인에게 민족주의의 극복과 너무 뜨겁게 가열된 민족감정의 극복을 권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 것이다.
(12)리카르다 후흐(Ricarda Huch)의 호소문(1946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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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직후에 작가 리카르다 후흐는 1944년 7월의 히틀러 암살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암살이 실패로 끝나자 사형당했던 저항 인사들에 대한 회고록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그 자료를 구하는 호소문을『헤센 주 소식(Hessische Nachrichten)』이라는 신문에 낸다. 다음은 그 중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 나치즘이 인위적으로 독일인들의 분리를 야기하여, 모든 이가 우리의 순교자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고 있다고 해도 이름 밖에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의 전기를 써 한 회고록에 모음으로써, 독일 민족이 비참함 속에서도 풍요로움을 주는 하나의 보물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저의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제가 부탁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선 저는 사형된 분들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요청하여 그들에 관해 알고자 합니다. 가능한 한 그들 자신의 의견이나 편지와 일기를 구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전기를 만드는데 유용한 모든 정보를 담아 간단히 서술한 것도 좋습니다. (…) 히틀러에 저항하여 모반을 꾀했던 분들이 모두 싸우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 몇 분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운이 더 좋았기 때문에 중요시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분들도 세상을 떠난 이들과 똑같이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우선 무덤 위에 화환을 놓는 것이 예의일 것 같습니다.
(13) 칼 야스퍼스, <죄의 문제>(Die Schuldfrage)(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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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통해 야스퍼스는 나치시기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책무를 방기한 책임을 구별하였고, 이는 당시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야스퍼스는 기본적으로 다음 네 가지 죄를 구별하였다. 첫째,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범법행위인 형사상의 죄, 둘째,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참여한 정치에 대해 공동으로 져야 하는 정치적인 죄, 셋째, 명령을 받아서 범죄를 저지른 도덕적인 죄, 넷째 이 세상 모든 불의와 불법에 대한 책임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죄(내가 능히 막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공동의 책임). 그에 따르면, 이에 대응하여 그 죄를 심사하는 기관도 달랐다. 예컨대, 첫 번째는 법정, 두 번째는 무력 혹은 전쟁의 승리자, 세 번째는 양심, 네 번째는 신(神)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특히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나치범죄를 독일인들의 집단범죄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 탈나치화 심판소에서
독일제국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는 독일인들 그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으로 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어떠한 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한 국가에 소속된 구성원은 모두 그 국가가 행한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도덕적인 의미에서, 곧 그러한 범죄를 알면서 그리고 실제 거기에 참여했다는 측면에서는, 모두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우리 독일인들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범죄를 저질렀으며 혹은 그것을 기적처럼 모면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러한 정권이 창출되도록 용인했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는 이러한 모든 불의의 반대자였고 또 공범으로 도덕적인 죄악까지를 저질렀다고 볼 만한 행위나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죄가 없다. 공동으로 책임을 느낀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다는 뜻은 아니다. 요컨대 공동범죄란 개념은 비록 국가구성원으로서 정치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에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는 점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또 형사상 책임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 근대국가에서는 누구나 최소한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기권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정치적 책임의 의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Ⅲ. 서독의 나치청산
(14) 사면법(Gesetz über die Gewährung von Straffreiheit)(1949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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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독연방정부는 그 초창기에 '과거청산'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제 막 출범한 서독정부에게는 그 동안 연합국 측에서 주도했던 전범재판, 탈나치화 등 일련의 과거청산정책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일반 독일인들이 이러한 조치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한 독일 정치가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의 불만을 해소할 해법을 찾고 있었다. 소위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탈나치화와 전범재판 과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사면해주는 일이었다. 곧 과거 나치들을 복권시키는 이 조치는 이후 1950년 초까지 계속됨으로써, 아데나워 시대 초기의 서독정치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에 고급 공무원이나 법조계 인사들의 경우, 다수가 과거 나치당원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이 법안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제 9조와 10조이다. 이 두 조항이 바로 나치 때 행적으로 인해 판결 받은 사람들을 사면해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조항에 의거하여 직접적으로 사면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음성적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의 수가 많다는 주장도 있거니와, 그 수치에 관계없이 나치청산에 대한 초기 서독정부의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법률은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물론 과거청산에서 단죄와 보상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통합이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법은 달리 읽힐 수도 있겠다. | 독일연방의회는 다음과 같은 법을 제정하기로 결의했다.
제1조 - 1949년 9월 15일 이전에 행해진 범법행위와 불법행위 가운데 다음과 같은 조항에 해당될 경우 그 형을 면제하도록 한다.
제2조
제1항: 형이 징역 6개월 이하 그리고 벌금 5천 마르크 이하이거나, 6개월 이하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벌금형은, 그 형기가 아직 다 집행되지 않았거나 벌금형이 아직 다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 그 형은 면제된다. 제2항: 아직 형기를 마치지 못한 1년 이하의 징역, 그리고 판결을 받았지만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는 5천 마르크 이하의 벌금형은, 그것이 법적으로 효력을 갖고 있고 앞으로 효력을 발생할 것이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1949년 9월 15일부터 3년 이내에 범법행위나 추가의 불법행위를 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 그 형을 면제한다. 그 수형자가 악질적이거나 파렴치범 혹은 사기성 범죄자일 경우 거기에서 제외된다.
제3조 - 만약 청소년 보호구금에 해당할 경우, 아직 형기를 다 마치지 못한 경우, 그 형은 면제된다.
제4조 - 이 법은 아직 집행되지 않은 부가형(附加刑)일 경우나 국고에 들어갈 체납된 벌금 및 비용 그리고 법률상 부수적인 제재조치에도 해당된다. (…)
제9조
제1항: 그리고 1945년 5월 8일 이후에 발생했고, 특히 최근 정치적인 상황에서 나온 정치적 태도에 관련된 범죄의 경우, 그 형은 양과 종류에 관계없이 면제된다. 제2항: 이와 같은 범위 내에서 현재 계류 중이고 장래 계류될 재판은 중단한다. 제3항: 형법 제168조, 제211조부터 213조까지, 제234조, 제249조부터 제252조까지, 제306조, 제307조 등에 해당하는 범죄, 1884년 6월 9일의 폭파물법, 그리고 악질적이고 파렴치한 범죄 및 사기성 범죄는 여기에서 제외한다.
제10조
제1항: 1945년 5월 10일부터 이 법의 효력이 발생할 시점까지, 정치적인 이유에서 개인신분을 위장할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1950년 3월 31일까지 관할 경찰서나 동사무소에 자수하여 자신의 가짜신분을 통지하고 합법적으로 새로운 신분을 취득할 경우, 그 예상되는 형량에 관계없이 그 형을 유예한다. 제2항: 형법 제211조부터 제213조까지에 해당하는 범죄, 악질적이고 파렴치한 범죄, 그리고 사기성 범죄는 여기에서 제외한다.
(15) 서독지역의 탈나치화 작업 결과(1949년/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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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지역의 탈나치화 작업은 형식적으로 이후 1952년까지 계속 진행되지만, 1948년 말에 이미 사실상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소련점령지역인 구 동독에서는 1948년 2월에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탈나치화 작업이 종결되게 된 배경에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체제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내부적으로도 그 작업을 계속 진행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곧 심각한 인력부족 현상과 서독인의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서독인들의 탈나치화에 대한 태도는 날이 갈수록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아래 도표에서도 나타나듯이 각 점령지역 사이의 기준차이도 그들의 불만을 사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46년 초 이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연합국 공동지침이 발표되었긴 했지만, 그 문제점은 이후에도 여전했다. | 이 표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1947년을 기점으로 사면이나 탈나치화 비대상자로 분류되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는 것이다. 각 점령지역마다 탈나치화 대상자들이 청소년 사면이나 성탄절 특사로 심사에서 누락되기도 했으며, 러시아 등지에서 귀환하는 포로들의 경우에는 탈나치화로 인해 생업에 지장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 어느 지역에서는 아예 탈나치화 대상자에서 제외시키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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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점령지역 |
영국점령지역 |
프랑스
점령지역 |
총계 |
대상 총건수 |
950126 |
2041454 |
669068 |
36660648 |
제1등급: 주요책임자 |
1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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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667 |
제2등급: 적극지지자 |
2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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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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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등급: 나치수혜자 |
106422 |
27177 |
16826 |
150425 |
제4등급: 단순가담자 |
485057 |
222038 |
298789 |
1005874 |
제5등급: 무혐의자 |
18454 |
1191930 |
3489 |
1213873 |
심사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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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면대상자 |
89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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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99 |
161671 |
포로 귀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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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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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특사 |
194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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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46 |
해당법률 제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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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651 |
270152 |
782803 |
기타사유 |
31907 |
87668 |
5054 |
124629 |
(16)탈나치화 작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1953년) - 알렌스바하 여론기관(Allensbaches Instituts für Demosko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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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나치화에 대한 여론조사는 이미 미군정이 당시 탈나치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조사한 바가 있었다. 이때 실시된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1945년 11월과 1946년 3월에는 답변자 가운데 50% 내지 57%가 탈나치화의 시행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1946년 12월에 그 수치가 34%로 크게 하락했고, 1947년 9월에는 32%, 그리고 1949년 5월에는 급기야 17%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경향은 아래 표에서 나타나듯이 1953년 탈나치화가 완료된 시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탈나치화로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의 분포도를 보면, 학력과 수입이 높을수록 그 해당자 수도 더 많은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는 나치의 지지자들이었던 그들이 전후에 어떠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 질문: "당신 자신이나 당신 가족 가운데 누가 탈나치화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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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자신) |
그렇다(가족) |
그렇지 않다 |
총계 |
8% |
15% |
77% |
남자 |
13% |
11% |
76% |
여자 |
3% |
18% |
79% |
연령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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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세 |
1% |
17% |
82% |
30-44세 |
8% |
16% |
76% |
45-59세 |
12% |
13% |
75% |
60세 이상 |
11% |
12% |
77%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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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 |
6% |
13% |
81% |
중등학교 |
10% |
21% |
69% |
대학입학 이상 |
23% |
18% |
59% |
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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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
13% |
20% |
67% |
공무원 |
13% |
19% |
68% |
사무직 |
10% |
19% |
71% |
농업 |
7% |
17% |
76% |
노동자 |
5% |
11% |
84% |
농업노동자 |
2% |
11% |
87% |
수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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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마르크 이하 |
6% |
13% |
81% |
250-399마르크 |
6% |
14% |
80% |
400마르크 이상 |
14% |
21% |
65% |
질문: "이제는 탈나치화가 시행된 지 몇 년이 지났고, 그것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다음 일람표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을 고르시오."
1) 자신이나 가족 가운데 누가 탈나치화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 경우(총 248명)
2) 탈나치화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은 경우(총 817명)
■ 탈나치화 작업은 |
1) |
2) |
1) 필요했고 그 목표를 달성했다 |
1% |
6% |
2) 문제가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
8% |
14% |
3) 필요했지만 잘못 시행되었다 |
22% |
24% |
4) 필요하지 않았고 이익보다는 해가 더 많았다 |
46% |
20% |
5) 점령군의 전횡에 불과했다 |
16% |
13% |
무응답 |
7% |
23% |
(17) 서독연방정부보상법(Bundesentschädigungsgesetz)(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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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직전에 이미 연합군은 패전국이 될 독일에게 소위 보상금 지불을 요구했다. 이 보상권은 재산권 침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신적 침해에 따른 보상을 규정한 것으로 1946년 미군정은 이에 관한 법률을 각 주 차원에서 공포했고 이어 1949년 4월에는 미군정지역 전체에 통용되는 법률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서독정부 수립 후 이 법은 서독 기본법(헌법) 제125조에 따라 연방정부의 법으로 인정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연방의회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이어 1951년 이스라엘과의 협상이 시작되고, 게다가 이스라엘 외의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유대인 대표단이 구성되어 협상창구로 떠오르면서 그 보상법의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 서독 주민들의 미온적인 태도와 여러 정치적 논란 끝에 1953년에 제정된 연방차원의 보상법은 113개조로 구성되었으며, 보상대상자, 보상청구권, 담당기관 그리고 그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이어 3년 후에 다시 제정된 1956년 위의 연방보상법은 그 대상범위를 법인과 예술가 및 학자, 그리고 희생된 피해자의 가족, 그리고 피해자를 도운 사람이나 잘못 오인되어 피해 받은 사람들에까지 확대했다. 또한 서독에 주소를 두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1937년 12월 31일까지 독일제국에 속했던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 그리고 포로 및 피난민도 이 법으로 인해 보상 청구권자가 될 수 있었다. 아래의 법은 1972년과 이후 약간 개정된 것이다.
제1조
제1항: 나치탄압의 피해자란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치즘에 반대했던 사람, 인종, 신앙 혹은 세계관의 이유에서 나치의 폭력적인 조치에 박해를 당한 사람, 그리고 이로 인해 생명, 신체, 건강, 자유, 소유권, 재산, 직업상 승진이나 경제적 성공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을 가리킨다(이하 피해자란 칭한다) 제2항: 위의 제1항에 규정된 피해자에는 다음과 같은 사유로 나치의 폭력적 조치에 박해받은 사람도 포함된다. 첫째, 인간존엄성을 해치는 행위 혹은 도덕이나 전쟁으로는 도저히 합리화할 수 없는 인간말살행위에 대해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투쟁한 사람. 둘째, 나치즘에 반대하는 예술적 혹은 학문적 경향을 지켜낸 사람, 셋째, 위의 피해자를 도와준 사람. 제3항: 위의 제1항에 규정된 피해자란 다음의 사람도 포함된다. 첫째, 피해자가 살해되었거나 신체 혹은 건강의 피해로 인해 사망에 이른 경우, 그의 유가족, 둘째, 나치즘의 폭력정권에 맞서 투쟁하거나 그로부터 탄압을 피하기 위해 피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그러한 행동의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은 피해자, 셋째, 위의 제1항 및 제2항에 규정된 원인으로 인해 나치의 탄압을 받는 집단 구성원으로 잘못 오인되어 나치의 폭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사람, 넷째, 나치즘의 폭력조치에 탄압을 받는 피해자의 가까운 친척, 또는 1974년 12월 31일까지 통용되는 공무원법 규정에 의거하여 그러한 피해자의 배우자나 자식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가족구성원.
제2조
제1항: 나치즘의 폭력조치란 위의 제1항에 규정된 탄압의 원인으로 독일제국, 주(州), 기타 공적인 성격의 기관, 관청, 재단, 나치당, 그 산하단체 및 조직들의 관료 및 직원들이 주도하여 혹은 그들의 동의 하에 피해자에 가해진 조치를 말한다. 제2항: 어떠한 것이 나치의 폭력조치로 인정하는 데에는 그것이 피해자에게 가해질 때 법적인 규정에 기반한 것이었는가 혹은 법적인 규정의 오용으로 그러했는가 하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
제43조
제1항: 1933년 1월 30일부터 1945년 5월 8일 사이에 자유를 침해당한 피해자는 그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여기에는 타국이 법치국가의 기본을 무시하고 자유를 침해한 경우도 포함되고, 또 첫째, 해당 피해자가 독일국적이나 독일제국의 보호를 박탈당한 결과로 생긴 경우나 둘째, 나치 독일정부의 요청으로 타국 정부가 자유를 침해한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둘째의 경우에서 독일정부가 요청한 시기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정부가 인종적인 이유로 자유를 침해한 시기인 1941년 4월 6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제2항: 자유침해란 특히 경찰 혹은 군대에 의한 감금, 나치당의 체포, 구류, 구금, 강제수용소 수용 그리고 게토에서의 강제체류를 말한다. 제3항: 강제구금의 상황에서 생활했거나 강제로 노동한 경우, 혹은 독일정규군대에서 징역 및 징역유예대상자로 선고받은 경우도 이 자유침해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
제47조
제1항: 피해자가 1933년 1월 30일부터 1945년 5월 8일 사이에 유대인 배지를 착용했거나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불법적으로 살아온 경우에도 이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제2항: 만약 피해자가 가명을 사용했을 경우에는, 그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불법적인 상황에서 살아온 것으로 간주한다.
(18)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의 연설문(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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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의 연설문인「현충일(Heldengedenktag)」의 일부분이다. 뵐은 독일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 연설문에서는 전쟁과 죽음, 고통으로 얽힌 과거사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뉘우침과 후회가 없는 태도는 과거의 반복을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후에 미첼리히(Mitscherlich) 부부의 저서『슬픔에 대한 무능력(Die Unfähigkeit zu trauern)』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들은 당시 독일인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고, 독일인의 애도하고 후회할 줄 모름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단 한번뿐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쓰라림, 그들이 내뱉는 신음소리 비해, 무관심의 정도가 이렇게 큰 적은 아마도 한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이처럼 가볍게 여긴 적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벼운 태도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살인을 방관할 것이며, 내일의 죽음을 어깨나 한번 으쓱하고 지나칠 것이고, 또 지금 이미 그 죽음을 용인하고 있습니다. 슬픔은 별로 고귀한 것이 아니며, 고통도 무가치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지겨운 표정으로 일상으로 돌아가고, 그 죄악을 저지른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곧 그러한 세력은 국가의 형태가 달라지면 수그러질 것이고, 위원회 등에 의해 통제될 것으로 믿습니다. 언젠가는 그 뿌리가 뽑혀질 날이 오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착각입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그러한 것처럼, 만약 개개인의 죽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 죄악의 원흉들이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슬픔은 고귀한 것이고, 고통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9) 아우슈비츠 부인(否認)에 관한 처벌법(소위 Auschwitz-Lüge)(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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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서독에서 반유대주의가 다시 준동하는 기색을 보이자 1959년에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률안이 마련되었다. 소위 ‘국민사주’(Volksverhetzung)를 처벌하는 법안으로서 소수집단에 대해 동등권을 부여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을 법으로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논의와 혼란을 거듭한 끝에 1960년 여름 통과된 이 법안(형법 제130조)은 이후 몇 차례 개정되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1982년에 도입된 아우슈비츠 부인(否認)에 관한 처벌법(소위 Auschwitz-Lüge)이었다. 이는 아래에 나오는 형법 제130조 제3항과 제4항에 명기되었다. | 형법 제130조
제1항: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공공의 평화를 문란케 하는 자들은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1. 주민 일부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거나 그들을 해치는 폭력 및 자의적 조치를 요구하는 행위, 혹은 2. 주민 일부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나쁜 의도로 경멸하거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인간존엄성을 해치는 행위 제2항: 다음과 같은 자들은 3년 이하의 징역 혹은 벌금형에 처한다. 1. 주민 일부 혹은 국가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 혹은 민족특성상 특정집단에 증오심을 조장하거나 그들을 해치는 폭력 및 자의적 조치를 요구하거나 혹은 또 일부 주민 혹은 전술한 집단들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나쁜 의도로 경멸하거나 혹은 명예를 훼손하는 문건(제11조 제3항)을 가) 유포하는 자 나) 공공에 전시하거나 공연하거나 혹은 달리 알도록 하는 자, 다) 18세기 이하의 사람에게 제공하거나 넘기거나 알게 하는 자, 라) 제작하거나 구독하거나 분배하거나 소장하거나 제공하거나 공포하거나 선전하거나 소개하는 자, 혹은 이것들과 이로부터 간추린 문건을 위의 가)부터 다)까지의 의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 이를 수입 혹은 수출하려고 하는 자, 2. 위의 1에 나타난 내용을 라디오를 통해서 유포하는 자 제3항: 제220a조 제1항에 명시된 나치정권 하에서 자행된 행위들을, 공공의 평화를 문란케 할 목적으로 공적으로 혹은 집회에서 옹호하거나 부정하거나 혹은 경시하는 자는 최고 징역 5년 혹은 벌금형에 처한다. 제4항: 제2항의 내용은 제3항에 명시된 내용이 들어 있는 문건에도 적용된다. (…)
(20) 과거사의 정리(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란 무슨 뜻인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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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철학자 아도르노는 나치를 피해 망명했다가 나치패망 후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는 1960년대 초 독일에서 나치청산의 논의가 중단되었던 때에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그가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독일 시민문화 내면에 나치를 용인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래의 글은 특히 나치즘의 위험성을 간과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이었으며 서독에서 나치청산의 문제를 새롭게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킨 것이었다. | <과거사의 정리란 무슨 뜻인가>라는 물음부터 밝혀져야 한다. 이 질문은 최근 가장 수상쩍은 구호처럼 들리는 하나의 표현에서 온 것이다. 최근에 쓰이고 있는 과거사의 정리라는 말은 사람이 지나간 심각한 일을 극복하고 거기에 옥죄었던 것을 떨쳐버리고 밝은 마음을 갖자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덮어두고 가능하면 기억에서 그것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 곧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했으면 좋겠다는 태도를 가해자 쪽에서 먼저 불의(不義)의 희생자들에게 구하고 있다. 예전에 필자는 어느 학문적인 논쟁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형집행인의 집에서는 밧줄을 입에 올리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적개심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사를 정리한다는 개념에도 무의식적으로 또는 그렇게 무의식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책임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어쩔 수 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그러한 참혹한 일과 오늘날까지도 연관되어 있는 관계들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 과거사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한다. 마냥 그 과거의 그늘에서 살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어서, 또 만약 죄와 폭력이 똑같이 죄와 폭력으로 앙갚음되어야 한다면 끔찍한 일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사람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 과거가 여전히 아주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나치즘은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그 유령이 나치즘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 있거나 결코 사라지지 않은 아주 무서운 괴물은 아닌지 현재 우리는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사람들을 묶고 있는 관계 속에서 여전히 아주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필자는 여기서 신나치조직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싶지 않다. 필자에게는 민주주의 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나치의 생명력이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파시즘 경향의 존속보다 더 잠재적으로는 위험해 보인다. (…) 우리 모두는 또한 오늘날 그 일어난 일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스로 사망한 유대인 희생자 수가 최대한으로 잡아도 5백만 명 정도이지 6백만 명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드레스덴 폭격으로 아우슈비츠가 상쇄되었다는 식의 채무변제 논리를 떠드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한 계산법, 그리고 반(反)비판으로 자성에 대한 의무감에서 탈피하려는 조급증에는 무엇보다도 비인간적인 것이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카번터리(Coventary)와 로테르담의 이름 하에서 전투로 무고한 수백만 명을 기계적으로 대량 학살한 것을 서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무책임성, 곧 가장 간단하고 가장 현실과 가까운 이 사실은 언어도단이다. 가해정도가 이를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침체된 기분을 위로하려는 이 같은 태도는 피해자가 그 어떤 화해의 손짓을 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애매한 ‘그 어떤’ 손짓도 제멋대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가장 엄한 책임이 논의되지만 현실적인 처벌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괴리감에서 환상이 시작된다. 패전국이 아직 온전한 상태에서 저질렀던 행위들에 대한 책임이 종종 승전국에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죄악에 대한 책임도 그에 열광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가 권력을 쥐도록 용인했던 사람들이 져야한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일은 모두 사실상 정신적으로 아직 극복되지 못한 상처의 증표이다. 오히려 피해자의 상처에 대해 더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다. (…) 주관적 측면, 곧 인간의 심리에서 나치즘은 집단적인 자기도취를 고무시켰다. 곧 간단히 말해서 민족적 허영심이 무한정 증대되었던 것이다. 각 개인들의 자기도취적이고 상승한 욕구가 각박해진 세계에서 잘 충족되지 않고 문명이 그 욕구충족을 방해하는 한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들은 전체와 동일시함으로써 대리충족을 꾀했다. 이 집단적인 자기도취는 히틀러 정권의 붕괴로 인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한 타격이 실질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각 개인들은 이를 의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극복되지 못한 과거라는 논의가 사회 심리적으로 뜻하는 의미이다. (…) 시간만 충분하고 다른 것들이 문제되지 않으면, 독일의 민주주의 그리고 그와 함께 과거사에 대해 실질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주장은 분명 너무나 낙관적이다. 시간만 가지면 된다는 생각에는 무엇인가 안이한 것이 숨어 있으며 동시에 잘못된 관념이다. 우리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거대한 무대를 중심으로 움직일 세계사의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다. 또한 발걸음이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사 자체도 그 주체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스스로 나아질 그러한 시대를 보장하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이로써 지적하려는 것은 바로 민주적 교육이다. 무엇보다도 일어난 일이 망각되지 않도록 하는 계몽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망각은 잊혀진 것을 합리화하려는 움직임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자식들로부터 히틀러에 대한 난처한 질문을 들을 수밖에 없는 부모들은 좋은 측면이나 혹은 그 시절이 원래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등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21) 나치범죄의 시효소멸에 관한 논쟁(Verjährungsdebatte)(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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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다시 나치범죄를 단죄하려는 서독정부의 의지에 문제점이 생겼다. 그것은 당시 현행법상 범죄에 대한 기소시한이 20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1965년 5월 8일이면 그 시효가 소멸될 것이었다. 여론에서는 이 시효를 없애든가 연장하라는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서독의회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론에 찬성하는 쪽만 아니라 헌법에 규정된 소급법 원칙을 무시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겨우 시효소멸을 한 달 남겨둔 시점에 합의가 이루어져서 연합국 점령기간인 1945부터 1949년까지의 기간을 시효에 가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해서 1969년 의회에서는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되었고, 여기에서 대량학살에 관해서는 아예 시효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 에른스트 벤다(Ernst Benda 기민당):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이 문제를 아무런 고통 없이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금방 말한 고통이라는 단어는 말 그 자체의 뜻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이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와 함께 전 독일인이 이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안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법치국가는 정의를 세워야만 합니다만 또한 당연하게도 안보의 정당성을 잊거나 안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곧 이것은 우리 민족의 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독일 민족은 결코 학살자 집단이 아니며 우리 독일인은 학살자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학살자들과 구별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명확하고 더 나은 표현을 쓰자면, 독일인들은 이들 학살자들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 델러(Thomas Dehler, 자유당): “우리는 이러한 여론, 곧 세계의 의지와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들에 화를 내며 그것을 증오하고, 책임감과 속죄를 계속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에 정의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간단하고 확실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죄, 모든 죄에는 시효가 있다는 것이 법이고 우리의 법입니다. (…) 법치국가의 동일원칙의 헌법과 자의해석의 금지에 관한 조항에서 볼 때, 예외조항이나, 일정한 집단에 불리하거나 이미 완료된 사실관계의 법적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조항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소급법 형식으로 나치학살자들, 살인교사 공범자에 대한 시효를 연장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헌법조항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 시효는 기본적인 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범죄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효는 법적 안정성과 법적 평화 때문에 그 최후의 정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 시효보다는 신과 양심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그 광란의 시대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오늘날 뉘우치지 않는 그러한 가해자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 몇십년이 지남으로써 특히 그 아주 이상한 시기로부터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사람도 바뀌기 때문에 시효는 올바른 것입니다. 그리고 시효는 국가이성의 발로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사형제도의 폐지와 다를 바 없이―더 보편적인 인류 양심의 발로입니다. 법적 안정과 정의 사이에 있는 모순은 바로 이 시효에 대한 법적 규정에 의해서 균형이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법치국가를 포기’하려는 사람은 법치국가의 이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돌프 아른트(Adolf Arndt, 사민당): “나는 나에게도 죄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유대인들이 우리 주위에서 트럭 채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거리로 나가지도 않았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충분하게 행동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이것이 하나의 유산입니다.(…) 제가 여기서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에나 혹은 일반적인 법치국가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기본법 일반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에는 유감스럽고 고통스럽고 아주 인기도 없으며 막중하기만 한 책무와 짐을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책임과 불행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의 미래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이루는 수고, 곧 작고 겸손한 수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리하르트 예거(Richard Jaeger, 기사당): “그러나 만약 정의와 법치국가가 서로 모순이 된다면, 저는 그래서 정의를 먼저 앞세우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사 숙녀 여러분, 만약 정의가 법치국가의 이상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차라리 법치국가를 포기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르하르트 얀(Gerhard Jahn 사민당): “우리는 형법상의 범죄자가 된 사람들을 구애받지 않고 처리하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아마도 그 이상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중요한 일부―이것이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가 불의를 행했던 사람들과 싸웠던 것처럼, 우리는 나중에 이 참혹한 시대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문제로 평가될 것입니다.”
(22) <애도하지 않은 독일인>(Die Unfähigkeit zu trauern) (미철리히 부부[Alexander und Margarete Mitscherlich],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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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철리히 부부의 이 저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응용하여 60년대 말 독일인들의 도덕적 무감각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이 상태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직시하지 못한 결과였다. 독일인들은 애도하고 죄를 시인하려 들지 않았다. 원래 정신분석학에서 애도의 작업이란 자신이 사랑하던 대상을 잃었을 때 상실의 현실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심리적 과정을 말한다. 독일인들이 사랑했던 대상이란 히틀러이다. 그는 독일인들에게 집단적 이상의 대변자였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맹목적인 숭배를 부인하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도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다. | (…) 수백만 명을 죽인 대량학살을 사람들이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 때문에 가해자들에 대한 법정소송이 무력했던 점은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법률적인 해석은 극복되지 못한 과거라는 표현이 갖는 원래의 의미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극복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인식단계의 결과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기억하고, 반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라고 명명했다. 이전 기억의 내용은 그것이 격렬한 감정을 동반된다고 하더라도 이내 곧 사라진다. (…) 따라서 우리는 이제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지도자 히틀러의 상실이라는 고통에 대해 애도하지 못하는 것은 죄, 부끄러움, 그리고 공포에 대한 강렬한 반발심의 결과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강력하고 본능적인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루어진다. 나치과거는 현실에서, 그리고 실제에서 도피하게 되었었다. 게다가 애도의 계기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실제 한 개인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로 대표되던 집단적인 자아-이상의 소멸로도 제기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의지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대상, 곧 내면적인 대상이었다. (…) 이러한 애도의 기피는 현실화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로도 볼 수 있다. 우선 다음으로서는 히틀러 정권의 횡포―우리는 우리 자신과 히틀러를 동일시하고 그에 기꺼이 그리고 거의 저항하지 않고 참여했다―로 고통을 겪은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 문제는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 곧―나치시대가 현실에서 사라진 결과―이후에도 역시 우리의 행위로 대량으로 학살된 같은 이웃(Mitmenschen)에 대한 적절한 애도의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되살려놓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생존자를 마주 대하면서도 우리 역사―제3제국은 단지 최근의 한 시대에 불과하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회심리적인 태만이나 심각한 마비증상이라는 병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시대의 조류에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져야 하는 책임은 추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따라서 무의미한 것에 가까울 정도이다. 그러나 히틀러 시대와 같은 시기는 그 시대를 지배했고 그 움직임과 방향, 그리고 형태를 결정했던 지성(知性)과 도덕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극복되어야만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처리되고 해결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다른 민족―이 거꾸로 애도할 수 있는, 곧 과거를 진정으로 지나간 것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토대란 바로 의식 속에 확연히 자리 잡은 인식, 곧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바로 그러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일어났던 일은 바로 그 의식이 타락하면서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의식 속에서 2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검열 하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자리 잡았던 것도 원치 않아도 그냥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복된’ 과거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과거는 되지 못한다. 애도작업은 우리가 무엇을 버려야만 하는지를 알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대상―인간 혹은 이상(理想)―과의 관계로부터 점차 벗어남으로써 현실과의 관계가 과거와의 관계처럼 의미 있게 정립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작업이 없이는 이것이 성사될 수 없을 것이며, 그것 없이는 나치즘에서 독일역사의 파국적 방향을 이끌었던 바로 그 과거의 이상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 우리가 제3제국에서 행한 행위들과 대면하고, 자기도취적인 사랑행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똑같은 권리를 가진 생명체로 인정하는 것으로 승화하는 일은,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잘못되고 협소한 우리의 의식을 교정하면, 곧 지금까지 우리가 지녔던 생각에서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발견하면, 우리도 애도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23) 바이체커 대통령 연설문(1985년 5월 8일)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Richard von Weizsäcker) 서독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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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당시 서독의 대통령이었던 바이체커가 종전 40주년을 맞이하여 서독 연방의회 본회의장에서 행한 연설이다. 이 연설문의 내용은 그 해 나카소네 일본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과 아주 대조를 이루어, 독일과 일본에서 과거청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유감 없이 보여준 사례로서 인구에 회자되었으며 지금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이체커 대통령은 전쟁종결을 나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규정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대한 추도와 기억을 역설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독일인들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일인들이 전체가 집단적으로 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이와 관련해서 부기(附記)해둘 사항이 있다. 바이체커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히틀러 치하에서 외무부차관을 지냈던 자신의 아버지가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서 유죄판결 받는 것을 변호사 시보로서 지켜보았다. | 많은 나라에서 오늘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종결된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들은 자신들이 처했던 운명에 따라 각자 다른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승리나 패배, 불의와 이민족 지배로부터 해방, 혹은 새로운 종속관계로의 전환, 분단, 새로운 동맹관계, 엄청난 권력이동 등, 1945년 5월 8일은 유럽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우리 독일인들도 이날을 기념하고 있으며, 이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치를지 그 기준을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우리 스스로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관대하게 받아주는 것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진실을 가능한 한 미화나 편견 없이 직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고, 우리는 또 그러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5월 8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당해야만 했던 고통을 기억해야 하는 날입니다. 또한 이날은 우리 역사가 지나온 과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솔직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그 결과의 책임으로부터 더욱더 자유로워집니다. 5월 8일이 우리 독일인들에게 경축의 날은 아닙니다. 이날이 어떤 날인지를 알면서 지내는 사람은 아주 개인적인 것, 따라서 아주 다양한 경험을 회고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날 귀향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날 고향을 등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찾았고, 또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날 폭격의 밤과 공포가 끝나 드디어 살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기도 했었습니다만, 또 어떤 사람들은 조국(祖國)의 완전한 패배에 대해 고통을 느꼈습니다. 무너진 환상에 대해 허탈감을 느낀 독일인도 있었고, 새로운 시작이 주어졌음에 감사해하는 독일인도 있었습니다. (…) 그렇지만 점차 분명해졌던 것은 이제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5월 8일은 해방의 날입니다. 이날 우리 모두는 인간을 멸시하는 나치의 권력체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러한 해방의 기분에 젖어서, 이 5월 8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기 시작했고, 또 이것이 그 뒤까지 지속되었는지를 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쟁의 종결에서 피난, 추방, 그리고 비자유의 원인을 찾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원인은 오히려 전쟁의 시작에 그리고 그 전쟁을 획책한 정권의 시작에 있습니다. 우리는 1945년 5월 8일을 1933년 1월 30일과 분리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오늘 승자의 축제에 동참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1945년 5월 8일을 잘못되었던 독일역사의 과정이 종결되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이 보존된 날로 인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 양심을 꺼리고 책임을 외면하며 회피하고 침묵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쟁이 종결되어 홀로코스트라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진실이 모두 밝혀졌을 때, 우리 가운데 아주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고 혹은 단지 짐작만 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민족 전체의 유죄 혹은 무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다면 무죄와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 가운데는 밝혀진 것도 있고 여전히 숨겨진 것도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백한 죄도 있고 부인한 죄도 있습니다. 그 시기를 온전한 의식을 갖고 지낸 사람이라면 오늘날 조용히 스스로 자신의 혐의에 대해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그 당시 어린이였거나 혹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자행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죄를 뒤집어씌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선조(先祖)들은 이들에게 심각한 유산을 남겨놓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가 있건 없건 간에, 또한 젊으나 늙으나, 이 과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 과거의 결과를 넘겨받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청년층과 노년층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깨닫는 데 서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또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없습니다. 과거는 나중에 바뀌어지는 것도 아니요, 또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를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비인간적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성에 감염될 소지가 많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억하고 있고 계속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수백만 명 씩 죽어간 그 경험이 이 세상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내면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처참함을 인간이 도저히 잊을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억은 유대인의 믿음에 속하기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망각(忘却)은 유랑(流浪)을 연장시키고, 구원(救援)의 비밀(秘密)은 기억이다. 자주 인용되는 이 유대교 가르침은 아마도 신을 믿는 것은 역사(歷史)에서 신이 역사(役事)하심을 믿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정치적 책임을 떠맡아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역사에 작용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독일의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 대해 지녀야 할 책임이란 꿈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자라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 이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공상적인 구원론(救援論)에 빠지지 않고 또한 도덕적 과장됨이 없이 역사적 진실을 냉정하고 편견 없이 대하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
(24) <나치의 역사화를 옹호함> Plädoyer für eine Historisierung des nationalsozialismus(마틴 브로샤트[Martin Brotzat],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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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샤트의 이 논지, 곧 나치의 역사화라는 테제는 나치에 대한 논쟁에서 아주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오랫동안 뮌헨의 <현대사연구소>(Institut für Zeitgeschichte)의 소장으로서 주도적으로 나치에 대한 역사연구를 이끌었던 그는 나치시대의 역사상이 단지 독재자의 범죄로만 채워지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제반 사건들을 면밀하게 검토할 것을 주장했다. 소위 홀로코스트 해석의 대표적인 기능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이 시대를 연구함에 있어서 맥락, 사회구조 그리고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는 역사적 시각을 제시했다. 그의 테제는 이후 많은 찬반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의 반대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의도주의적 해석을 앞세우는 프리들랜더(Friedländer)였다. 그는 브로샤트의 논지가 가져올 위험성, 곧 나치시대를 그러면 1933년부터 1945년이라고 정확하기 구분하기 어렵고 또 그 시대에 일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경향성이 나타날 것에 대해 경고했다. | 제3제국의 항복이 있은 지 이미 40년인데 나치즘은 얼마나 역사적인가. 그런데 히틀러는 아직도 여전히 독일역사에 접근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지나간 역사란 무슨 뜻인가? 계속 꼬리를 무는 이러한 질문들은 비단 역사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 역사기억, 과거평가에 대한 법률적 조항, 정치교육, 당대의 미디어 언론인들에게도 그 나름대로 일정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면 대체로 무엇인가 정치적인 속셈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나치시대가 현대를 이해하고 그의 방향을 정하는 데 정치교육의 부정적 대표자로서, 곧 다시 말해 법, 자유, 그리고 평화질서의 반면(反面)교사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나치과거를 통한 도덕성의 제고는 그동안 크게 위축되었다. 이것은 세계사적인 새로운 폭력 및 파국의 경험을 통해 그 유일성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그동안 도덕적 힘을 갖추지 못한 채 위험하지 않은 모호한 일종의 사상고백이 되어 갔다. 이처럼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띠게 된 ‘나치 폭력정권’에서 교훈을 새로 도덕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오로지 아주 다양화된 역사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나치즘의 역사는 더 이상 기피당하지 않지만, 하나의 의무적 교육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지난 20년 동안 각 개별연구의 결과에서는 전체상과 역사서술에서 아직도 ‘새로운 사실관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는 전체역사서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치독재에 대한 역사서술로부터 나치시대의 역사서술로 발전되지 못했다. 역사학에서는 여전히 파국적인 종말과 그 상황에 압도된 인상이 지배적이다. 이 인상은 이후에도 나치즘, 그 발전 및 지배체제의 동기, 도구 그리고 단계를 설명하는 데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 히틀러 시대를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것 대신에 우리에게 익숙해져버린 개념들과 용어들을 다시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폭력정권이라는 개념으로 견강부회하기보다는 많은 사건사(事件史) 및 개인사 관점을 그로부터 역사적으로 해방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치란 근대 독일역사의 무대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한 시대를 초월해서 근대 독일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이 발전되어야 한다. 그처럼 넓혀진 관점에서는 나치시기가 여러 면에서 독일 역사에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오래 시간을 두고 일어났으며 문제가 많았던 근대화 경향과 사회병리학적 현상 등이 나치즘에서 정당화와 통합 그리고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음이 뚜렷해질 것이다. 나치가 서독의 사회적 혹은 법률적 구조에 역사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항이 많았지만, 그것들이 지금까지는 금기시되었다. 그렇지만 바로 새로운 관점에서는 이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일괄적인 혐의를 두고 몰아가지 않은 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즘에 의해 독일의 역사의식이 방해되었다고 유감스러워하고 또 그로 인해 역사적 이해가 억제되었다고만 고집할 수 없다. 우리 역사의식의 ‘정상화’는 항상 나치시대를 제외시킬 수 없으며, 그것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치과거와 일률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도 일종의 억압적 형태이자 금기시하는 형태이다.
(25) 역사가논쟁(Historikerstr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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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논쟁은 1980년대에 나치청산의 문제를 다시 사회적 문제로 이끌어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나치에 대한 새로운 역사인식이라기보다는 역사학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에 놓여 있었다. 한쪽 진영(민족보수주의자)에서는 홀로코스트의 유일무이함의 특징을 문제 삼고 그것을 스탈린의 학살과 기꺼이 비교하려고 한다. 다른 쪽 진영(사회자유주의자)에서는 홀로코스트의 유일함을 주장한다. 전자의 대표 주자는 아래에 나오는 글을 쓴 역사학자 놀테이다. 그는『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실린 글에서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는 스탈린이 저지른 대량학살과 내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홀로코스트의 상대화를 꾀했다. 그에 반해 하버마스는 나치시대의 기억과 반성이 전후 서독사회의 구심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 흘러가지 않는 과거(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 1986년)
<흘러가지 않는 과거>란 독일인 혹은 독일의 나치 과거를 말한다. 이 주제는 다음과 같은 논지를 함축한다. 일반적으로 과거란 모두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처럼 흘러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아주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과거의 정상적인 흘러감도 단지 사라지는 것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예컨대 나폴레옹 1세의 시대는 역사서에서 항상 다시 등장하며 고대 아우구스투스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에는 당시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중압감은 분명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시대는 역사가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나치의 과거는―최근 헤르만 륍베(Hermann Lübbe)가 다시 강조한 것처럼―사라지거나 추동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점차 더욱더 생생하고 강력한 것으로, 그러나 모범으로서가 아니라 끔찍한 모습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과거는 바로 현재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혹은 현재를 심판하는 교수대의 칼과 같다. (…) 그러나 바로 이러한 법칙이 제3제국에 적용되면 ‘국민교육상 위험스러운’ 것으로 비쳐진다. 이것이 히틀러를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독일인의 변명>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이로 인해 독일인들이 마치 1935년에서 39년까지 당시 독일인 대다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제3제국과 동일시하는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을까, 혹은 이들이 그러한 역사로부터 배워야할 교훈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그 어느 독일인들도 히틀러를 정당화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1945년 5월에 독일인들을 전멸시키도록 한 명령만으로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독일인들이 이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은 역사가들이나 언론인들이 아니라, 권력의 완전한 전환과 두 번에 걸친 대패배가 야기한 전반적인 결과이다. (…) 이러한[나치테러에 관한] 보고서의 태반은 아마도 과장되어 있다. 이 ‘백색 테러’가 비록 전반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근절’과는 비교해 유사성이 거의 없을 수도 있지만, 또한 끔찍한 것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확실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인 혹은 실질적인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종의 ‘아시아적’ 행위로서 선수를 친 것은 아닐까? ‘소련의 강제수용소’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원조가 아닐까? 볼셰비키의 ‘계급학살’은 나치 ‘인종학살’의 논리적이며 실질적인 선구가 아닐까? 의혹으로 가득 찬 히틀러의 행동은 바로 그가 이 ‘쥐덫’을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될 수는 없을까? 아우슈비츠는 원래 흘러가려고 하지 않았던 바로 이 과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일종의 손비처리: 독일 현대사 서술의 변명적 경향(Eine Art Schadensabwicklung: Die apologetischen Tendenzen in der deutschen Zeitgeschichtsschreibung)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86년)
놀테는 정체성 주입과 학문 사이의 딜렘마에 빠진 슈튀르머(Stürmer)를 구하기 위해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테러를 비교대상으로 삼아서 서술했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굴락’, 스탈린의 부유층 추방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을 거쳐서 바뵈프, 초기사회주의들 그리고 19세기 초 영국농업개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사(前史)를 재구성했다. (…) 이 참혹한 사건을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유대인 말살을 단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대응책의 유감스러운 사건쯤으로 처리했다. 곧 히틀러가 스스로 전멸될 위협을 느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제3제국 시기에 있었던 소위 유대인의 전멸이란 일종의 대응책이거나 왜곡된 모방이었지, 유일한 사건이거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 이러한 조작에 놀테의 이론이 크게 이바지한다. 그는 일석이조를 꾀하고 있다. 곧 그는 나치범죄를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 볼셰비키의 전몰위협에 대한 하나의 대응책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의 유일성을 부정한다. 아우슈비츠는 기술적 혁신의 형태로 귀착되고, 이것은 여전히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적대자들의 ‘아시아적’ 위협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수정주의자들이 현재를 제멋대로 재구성한 전사(前史)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러한 내용에서 특히 적당한 역사상(歷史像)을 선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해석학적인 통찰의 오류이다. 강렬하고 체계적인 의식이란 오히려 관변 역사가들이 제정한 닫힌 역사상(歷史像) 모두의 종말을 뜻한다. 불가피하고 결코 통제되지 않으며 투명하게 이루어진 다양한 판본은 개방된 사회의 구조에서 이루어진다. 다양한 형태의 역사상으로 인해 비로소 개개인의 정체성에 도움에 되는 애매했던 부분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26) 포그롬 50주년 기념연설(국회의장 예닝어[Phillip Jenninger],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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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9일 독일 연방의회 의장이었던 예닝어는 50년 전에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포그롬(원래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용어는 나치가 자신들의 악행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재에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을 의회 내에서 최초로 기념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거기에서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파국으로 끝났고, 이로 인해 그는 이틀 후 국회의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많은 의원들이 그가 연설을 끝내기도 전에 의사당을 떠났다. 그의 연설내용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의 연설은 나치범죄를 정당화거나 과거청산을 거부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연설을 듣는 의원들은 그의 연설에 거부감을 느꼈다. 우선, 나치청산에 대한 관한 그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날 기념식에서 유대인 대표가 연설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제안이 거부당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그는 희생자가 아니라 주로 가해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셋째, 그는 그날 추모식을 역사수업으로 착각했다고 할 정도로 장황한 연설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 필요했던 것은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애도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던 이 사건을 당시 나치청산에 독일인들이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어제 독일유대인중앙협회(Zentralrat der Juden in Deutschland)의 초청으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시나고그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제 독일연방의회에 모여서 이곳 의회에서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벌어졌던 포그롬을 추도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억하고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희생자가 아닌 우리, 곧 그 범죄를 일으킨 우리이기 때문이며, 우리 독일인은 분명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우리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 모습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 50년 전 오늘 독일에서 벌어진 일은 중세시대 이래 그 어느 문명국가에서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지 않았던 점은 바로 그 난동이란 언제고 순간적으로 자극받아 일어날 수 있는 군중심리가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국가가 면밀하게 계획하고 사주하고 지원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 ‘제국 수정의 밤(Reichskristallnacht)’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적당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고 이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상당히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 신사 숙녀 여러분 독일에는 반유대주의가―다른 많은 나라들처럼―히틀러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유대인들은 교회와 국가가 저지른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신학상의 선입견으로 가득 찬 교회의 반유대주의는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자들과 유대인들이 전쟁의 종결 이후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서로 격의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데에 대해 더욱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 유대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주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들이 이제는 드디어 제한조치를 받아들여야만 되지 않겠나? 이들은 아마도 그 한계선 안에 머물러 있도록 지정받는 것은 당연한 자업자득이 아닐까? 나치선전―진지하지 않는 지나친 과장을 제외하면―은 그래도 기본적인 사항에서는 자신의 추측과 신념과 일치하지 않았던가? 1938년 11월처럼 너무 상황이 나쁘면 이웃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저것이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냐!” 끔찍하면 그냥 외면하라.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야!
Ⅳ. 동독에 대한 나치청산
1961년 장벽건설을 통해 서독과의 국경을 차단한 뒤 동독국가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위해 노력함에 따라 사통당은 이미 1963년부터 50년대처럼 사법적 수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을 포기했다. 사통당은 이제 국가안전부의 드러나지 않는 공작을 통해서 모든 반대세력을 와해시키는 방식으로 점점 더 전술을 바꾸어 나갔다. 반체제인사들을 관리하는 중심부처가 사법기관으로부터 국가안전부로(MfS) 이동하게 된 배경은 1986년 MfS의 한 직원이 MfS법대에 제출한 석사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서방언론들이 동독에서의 정치적 형법소송에 대한 보고를 통해 "현실사회주의를 음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건수는 가능한 한 줄여야 하며 반대파는 국가안전부의 은밀한 "와해수단"을 통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 “적대적-부정적 집단의 와해(Zersetzung) 조치를 통한 공작(OV: Operativer Vorgang)의 성공적인 종결”이라는 주제로 1986년 작성된 포츠담 소재 국가안전부(MfS) 법대에 제출한 MfS 대위의 석사 논문: "와해 조치의 적용은 특수한 방식으로 당과 국가 지도부의 정책을 뒷받침한다. 지하 정치 활동에 대한 투쟁은 국제적인 계급 투쟁 상황이라는 현재의 조건 하에서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시 더 우선적으로 정치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지도되어야 한다. 적대적-부정적 집단과 세력이 행하는 행위의 합목적성에 대한 의구심을 유발시키고 불안을 불러일으켜서 궁극적으로 적대적-부정적 계획, 의도, 조치들을 포기하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적대적-부정적 집단과 세력의 와해를 통하여 법률정치적 및 정치적인 이유로 형법상의 처벌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로써 특히 적대국이 추구하여 현실 사회주의의 국제적 비방에 이용하는 국내의 부정적-적대적 세력과 사회주의 국가간의 공개적인 대립은 배제되며 그들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선전 활동, 예를 들면 지속적인 인권 침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한다. 마찬가지로 적대적인 부서와 세력이 추구하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영역에서 반체제 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적대적-부정적인 반대 세력이 기도하는 최초의 결사 시도를 적시에 와해시킴으로써, 그 싹부터 차단하며 그 토대를 제거한다."
1957년 12월 11일의 여권법과 함께 공화국 탈출은 제8항을 통해 처벌받도록 규정되었다. 공화국 탈출 음모를 위해 사람들을 모집하거나(Abwerbung) 유혹할 경우엔 더욱 큰 처벌을 받을 것이었다. 1968년 7월 1일 효력을 발생한 형법전 105조 "반국가적인 인신매매" 조항은 이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213조 "불법적인 국경 통과" 조항 역시 공화국 탈출을 막기 위한 법규이다. 1961년 8월 구동독 지도부는 탈출운동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웠다. 한편으로 이 장벽은 그 속에 갇혀 있는 주민으로 하여금 그 체제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없는 한 그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국경시설은 동독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거부하게 만드는 끊임없는 원천이었으며 동독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원천이기도 했다. | 1983년까지 동독인들의 출국신청에 대한 처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원칙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모든 이주 신청은 기본적으로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결정과정은 당사자에게 전혀 투명하지가 않았다. 노동력의 가치를 상실한 사람들만(부상자와 노령연금 수취자) 동독을 떠날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19일의 "유엔 시민권과 정치권에 대한 국제적인 조약"이 1976년 3월 23일에 국제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유럽안보협력회의(KSZE)가 이주의 권리를 불가양도의 인권으로서 선포함으로써 구동독 지도부를 내정적으로나 외정적으로 압박하였다. 이로써 동독인들에게 출국규정들을 포함하고 동독정부에 의해 조인된 국제적 법조약에 근거할 가능성이 열림으로써 동독 내부가 술렁이게 되었다. 동독 정부는 1983년 9월 15일 "가족결합 및 동독 시민과 외국인 사이의 결혼 문제 처리에 관한 규정"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규정에 의거하여 출국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국가안전부의 박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다.
출국신청을 막기 위한 "안전기관 및 사법기관을 통한 형법적 수단의 적용 원칙"에 관한 국가안전부의 한 업무지시 문서에서는 출국신청자의 계획을 철회시키기 위한 다른 조치들이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경우 형법 99조, 100조, 106조, 214조, 217조, 219조, 220조, 249조를 이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1961년 8월 13일 장벽 건설 이후 1989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구동독을 떠나려는 모든 시도들을 형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치적 형법 소송 분야에서 양적으로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출국신청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가안전부는 별도로 중앙조정그룹(ZKG)과 지방조정그룹들(BKG)을 설치했다. 여기서 출국신청을 막는 일에만 전문적으로 종사했던 직원의 수는 1976년 104명이었는데 1989년 10월에는 446명으로 4배 이상 증가하였다. 급증하는 출국신청자를 처리하는 문제는 동독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1989년 가을의 "발을 통한 표결"(Abstimmung mit den Füßen)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제97조 첩보 행위 (1) 비밀을 유지해야 할 정보나 물건을 외국이나 그 관청이나 대표자, 정보 기관, 또는 외국 단체 및 그 지지자를 위하여 수집하거나 그들에게 발설하거나 인도하거나 그 외의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2) 위의 행위를 모의하고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3) 특히 무거운 죄인 경우 무기징역형이나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제99조 국가 반역적인 기밀 전달 (1) 제97조에서 언급한 부서나 사람에게 기밀을 넘겨주거나 이들을 위해 수집하거나 이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자는 2년에서 1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2) 위의 행위를 모의하고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제100조 국가 반역적인 첩자행위 (1)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해칠 목적으로 제97조에서 언급한 부서나 사람과 접선하거나 협력을 자청하거나 이 부서나 사람을 그 외의 방식으로 후원하는 자는 1년에서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2) 위의 행위를 모의하고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제105조 반국가적인 인신매매 (1) 1. 독일민주공화국을 해칠 목적으로, 2. 제97조에서 언급한 부서나 사람과 연계하여 독일민주공화국의 시민을 외국으로 빼돌리거나 강제로 끌고 가거나 탈출시키거나 독일민주공화국으로의 귀환을 방해하거나 그 외의 방식으로 범죄 행위에 협력하는 자는 2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2) 위의 행위를 모의하고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3) 특히 무거운 죄인 경우 무기 징역형이나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제106조 반국가적인 선동 (1) 독일민주공화국의 헌법에 의거한 사회주의적 국가 및 사회 질서의 토대를 비방하거나 이에 반대하여 선동하는 자 1. 국가적 또는 사회적 활동을 이유로 독일민주공화국의 사회 상황이나 대표자 또는 다른 시민을 헐뜯는 자 2. 사회 상황이나 대표자 또는 다른 시민을 비방하기 위하여 문서, 물건, 또는 상징물을 제작하거나 반입하거나 유포하거나 소지하는 자 3. 독일민주공화국의 우호 관계와 동맹 관계를 비방하는 자 4. 국가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위협하거나 독일민주공화국의 사회주의적 국가 및 사회 질서에 저항하라고 촉구하는 자 5. 파시즘이나 군국주의를 찬미하거나 인종 차별 선동을 행하는 자는 1년에서 8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2) 그들의 활동이 독일민주공화국에 반대하는 경향을 띠거나 계획적으로 범죄 행위를 실행하는 단체나 기관이나 사람들과 함께 범죄 행위에 가담하는 자는 2년에서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3) 위의 행위를 모의하거나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제107조 반체제적인 결사 (1) 반체제 활동을 목적으로 삼는 협회나 단체나 그 외의 결사에 가입한 자는 2년에서 8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2) 반체제적인 결사를 만들거나 그 활동을 조직하는 자는 3년에서 1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3) 반체제적인 결사를 지원하거나 그 외의 방식으로 지지하는 자는 1년에서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4) 위의 행위를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제110조 특별 중죄 이 장에서 언급한 범죄 중 중죄는 특히 다음의 경우 발생한다. 그 범죄가 1. 독일민주공화국의 평화나 사회주의적 국가 및 사회 질서, 국민 경제, 또는 방위를 대단히 위태롭게 하는 경우 2. 경계 강화 상태에서 저질러지는 경우 3. 인명의 사망을 초래하거나 많은 인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 4. 무기를 사용하거나 무기 사용을 위협하여 저질러지는 경우
제213조 불법적인 국경 통과 (1)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경을 불법적으로 통과하거나 독일민주공화국에서의 일시적인 체류 규정이나 독일민주공화국을 거쳐가는 통과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집행 유예 판결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2) 독일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불법적으로 또는 기한 내에 독일민주공화국으로 귀환하지 않거나 외국 체류에 관한 국가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위와 동일한 처벌을 받는다. (3) 특히 무거운 죄인 경우 그 범죄자는 1년에서 8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특히 무거운 죄는 다음과 같이 별도로 제시된다. 1. 그 범죄가 인간의 생명이나 건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 2. 그 범죄가 무기를 소지하거나 위협적인 도구나 방법을 사용하여 저질러진 경우 3. 그 범죄가 특히 강력하게 행해진 경우 4. 그 범죄가 문서 위조(제240조), 허위 기록(제242조), 또는 문서 오용이나 은신처의 이용을 통하여 일어난 경우 5. 그 범죄가 다른 범죄와 함께 저질러진 경우 6. 그 범죄자가 불법적인 국경 통과로 이미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경우 (4) 위의 행위를 모의하거나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참조: 출입국이나 체류에 관한 법 규정이나 부과된 제한 규정을 위반한 경우 가벼운 죄는 법규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214조 국가 또는 사회 활동의 방해 (1) 폭력이나 위협을 통하여 국가 기관의 활동을 방해하거나 공공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법률에 대한 무시를 드러내거나 법률에 대한 무시를 촉구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집행 유예 판결, 구류, 벌금형, 또는 공개 비판에 처한다. (2) 그의 국가 또는 사회 활동과 관련하여 또는 공안질서에 대한 그의 참여와 관련하여 시민에 해가 되는 조치를 취하거나 그와 같이 위협하는 자는 위와 동일한 처벌을 받는다. (3) 제1절과 2절에 의거하여 어떤 범죄를 다른 범죄와 함께 저지르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4) 범행에의 관여가 무겁지 않은 경우에 그 범죄자는 집행유예 판결,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5) 위의 행위를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제217조 대중집회 (1) 공안질서를 침해하는 군중에 가담하고 보안 기관이나 다른 국가 기관의 권고에 따라 즉시 해산하지 않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집행 유예 판결, 구류, 벌금형에 처한다. (2) 반란을 조직하거나 주도한 자(반란 주모자)는 1년에서 8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3) 위의 행위를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제218조 불법적인 목적 추구를 위한 결사 (1) 불법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협회 또는 단체를 만들거나 창설하거나 그 외의 결사를 인도하거나 부추기거나 그 외의 방식으로 후원하거나 그 안에서 활동하는 자는 다른 규정에 따라 무거운 형벌이 마련되어 있지 않는 한 5년 이내의 징역형, 집행 유예 판결,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2) 주모자는 1년에서 8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3) 위의 행위를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참조: 불법적인 목적 설정은 없이 불법적으로 협회를 창설하거나 협회 활동을 촉구하는 경우 법규 위반으로 조치를 받을 수 있다.
제219조 불법적인 접선 (1)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가 질서에 반하는 활동을 목적으로 설정한 단체나 기관, 사람에 이러한 목적이나 활동을 인지하고도 가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형, 집행유예 판결,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2) 다음의 경우 동일한 처벌을 받는다. 1. 독일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해치기에 적합한 정보를 외국에 유포하거나 유포하도록 사주하는 자, 또는 이러한 목표에 맞도록 제작하거나 제작하도록 사주하는 자 2. 법규를 무시한 채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해치기에 적합한 문서, 원고, 또는 다른 자료를 외국의 단체나 기관이나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전달하도록 사주하는 자 (3) 제2조 제2항에 규정된 행위를 기도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
1958년부터 1970년까지 "공화국(동독) 탈주"에 대한 형사 처벌과 탈주 시도 중 사망
연도 |
발견된 "범인" 수 |
금고형 판결을 받은 사람 |
국경선에서
사망한 사람 |
1958 |
9,997 |
|
1 |
1959 |
3,791 |
|
6 |
1960 |
7,798 |
|
1 |
1961 |
9,941 |
|
26 |
1962 |
11,780 |
|
50 |
1963 |
8,197 |
|
36 |
1964 |
7,814 |
2,373 |
27 |
1965 |
7,669 |
3,656 |
24 |
1966 |
6,903 |
3,598 |
28 |
1967 |
- |
3,219 |
8 |
1968 |
- |
2,978 |
10 |
1969 |
- |
2,572 |
18 |
1970 |
- |
2,424 |
11 | 국경선에서 사망한 사람: 최소치, 베를린 주위와 독일 국경선 내에서 사망한 경우(탈주를 시도하다가 총살, 지뢰 및 자동 발사총 시설로 사망, 익사, 사고사(발트 해상, 동구권 쪽 동독 국경선, 동구권 국가에서 서구권 국가로 가는 국경선에서 사망한 경우는 제외)
국경에서 사망한 사람과 구동독형법 제213조(불법적인 국경 통과)에 의한 금고형 1971-1989
연도 |
발견된 "범인" 수 |
금고형 판결을 받은 사람 |
국경에서 사망한 사람 |
1971 |
4,495 |
|
21 |
1972 |
2,887 |
|
7 |
1973 |
3,468 |
|
9 |
1974 |
3,141 |
|
4 |
1975 |
3,282 |
|
3 |
1976 |
2,798 |
|
7 |
1977 |
3,371 |
|
4 |
1978 |
3,092 |
|
6 |
1979 |
2,817 |
1,781 |
2 |
1980 |
3,274 |
2,067 |
2 |
1981 |
2,898 |
1,865 |
4 |
1982 |
2,778 |
1,847 |
3 |
1983 |
2,910 |
1,800 |
2 |
1984 |
2,868 |
1,800 |
6 |
1985 |
2,324 |
1,329 |
1 |
1986 |
2,822 |
1,213 |
5 |
1987 |
5,696 |
1,763 |
7 |
1988 |
9,169 |
2,337 |
1 |
1989 |
- |
2,569 |
3 | 국경에서 사망한 사람: 최소치, 베를린 주위와 독일 국경 내에서 사망한 경우(탈주를 시도하다가 총살; 지뢰 및 자동 발사총 시설로 사망; 익사; 사고사)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죄수 석방
연도 |
석방 |
연도 |
석방 |
연도 |
석방 |
1963 |
8 |
1972 |
731 |
1981 |
1,584 |
1964 |
888 |
1973 |
631 |
1982 |
1,491 |
1965 |
1,541 |
1974 |
1,053 |
1983 |
1,105 |
1966 |
424 |
1975 |
1,158 |
1984 |
2,236 |
1967 |
531 |
1976 |
1,439 |
1985 |
2,669 |
1968 |
696 |
1977 |
1,475 |
1986 |
1,450 |
1969 |
927 |
1978 |
1,452 |
1987 |
1,209 |
1970 |
888 |
1979 |
890 |
1988 |
1,048 |
1971 |
1,375 |
1980 |
1,036 |
1989/III |
1,840* | *1989년 3/4분기까지
(30) 구동독 국가안전부 문서관리법(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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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독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핵심 권력기관은 국가안전부였다. 1989년 가을 구동독의 평화적 혁명이 전개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국가안전부의 당시 최고책임자인 슈바니츠는 주요 문서들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지방 도시들에서는 성난 시민들이 이미 89년 12월 초에 국가안전부 지국을 점령하고 문서들을 보전했던 반면 베를린의 시민들은 국가안전부 중앙청사를 90년 1월 중순에야 점령했다. 국가안전부가 남겨 놓은 문서들은 지방도시들에서는 총 80Km에 달하였고, 베를린의 중앙청사에서는 약 100Km에 달하였다. 여기서 1m의 서류는 약 10,000장으로서 약 30Kg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구동독의 국가안전부가 얼마나 엄청난 문서들을 관리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청사에 보관된 문서들 중에는 한 번이나 여러 번 찢어서 부분적으로 파괴한 자료만 936 자루나 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중요한 문서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사통당 정권이 붕괴한 후 이 엄청난 국가안전부 문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동독의 일부 저명한 인사들뿐만 아니라 서독의 정치인들까지 사회적 평화를 위해 이 문서들을 봉인하고 과거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것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독의 평화적 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시민운동가들은 개별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고 누가 책임을 져야하고 누가 희생자며 어떻게 그가 희생자가 되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문서들을 공개해야 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 동독의 인민회의(Volkskammer)는 1990년 8월 24일 <구동독 국가안전부 문서 보전과 활용을 위한 입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통일조약에서 국가안전부 문서 관리에 대한 동서독간의 별도의 합의를 거쳐 1991년 말의 <구동독 국가안전부 문서관리법>(이른바 Stasi-Unterlagen- Gesetz)으로 발전하였다.
제1장 총칙
제1조 이 법의 목적과 적용 범위
(1) 이 법은 구 독일민주공화국(DDR) 국가안전부(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와 그 전신 및 후신 기관과 관련된 자료의 파악, 발굴, 관리, 이용에 관해 규정한다. 그럼으로써 다음 목적에 봉사하고자 한다. 1. 국가안전부가 자신의 개인적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밝힐 수 있도록 국가안전부에 보관된 자기 신상에 관한 정보들에 접근할 권리를 특정 개인들에게 허용한다. 2. 각 개인이 국가안전부에 보관된 자기 신상에 관한 정보의 공개로 인해서 그의 인격권이 침해받는 일이 없도록 특정 개인들을 보호한다. 3. 국가안전부의 활동에 관한 역사적, 정치적, 사법적 성찰을 보장하고 후원한다. 4. 공공 및 비공공 기관이 이 법에 명시된 목적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2) 이 법은 연방이나 주의 공공 기관, 개인 또는 비공공 기관이 보관중인 국가안전부의 자료에 적용된다. (…)
제3조 개인의 권리
(1) 각 개인은 발굴된 자료에 자기 신상에 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에 관한 정보 (안내)를 구동독국가안전부문서관리청(Bundesbeauftragte für die Unterlagen des Staatssicherheitsdienstes der ehemaligen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이하 안전부문서관리청이라 표기)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그럴 경우 각 개인은 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자료에 대한 안내, 열람, 대출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2) 각 개인은 일반 법률의 테두리 내에서 안전부문서관리청으로부터 넘겨받은 정보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3) 안내나 자료 열람의 허용 또는 자료의 대출로 말미암아 무엇보다도 보호할 가치가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제4조 공공 및 비공공 기관을 통한 국가안전부 자료 이용의 허용
(1) 공공 및 비공공 기관들은 자료에 대한 접근권만을 지니며, 이 법이 허용하거나 규정한 경우에 한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당사자, 제3자, 실종자나 사망자의 가까운 친척(가족), 국가안전부의 직원이나 협력자들이 그들의 신상에 관한 정보가 담긴 자료를 스스로 공개하면, 이것들도 역시 공개된 목적에 맞게 이용될 수 있다. (2) 안전부문서관리청이 자료에 담긴 개인 신상과 관련된 정보가 틀리다는 것을 확인하거나 그런 보고를 받을 경우, 혹은 관련된 인물의 정확성에 이의가 제기되면 이를 별도의 종이에 기입해서 자료에 첨부해야 한다. (3) 개인 신상과 관련된 정보가 제22조에서 제25조까지 규정된 청원 절차에 따라 심사를 거쳐 청원관련 인물이 맞지 않다는 것이 입증될 경우, 이것이 사실을 판단하는 데 의미가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신자에게 올바로 고쳐 주어야 한다. (4) 자료 이용으로 말미암아 무엇보다도 보호할 가치가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제5조 특별한 이용금지
(1) 주도면밀한 정보조사 혹은 비밀리의 정보조사를 포함하여 당사자의 탐색을 통해서 획득한, 당사자나 제3자에 대한 신상 정보들을 이 인물들에게 불리하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는 당사자나 제3자의 진술이 정보를 근거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입증된다면 제21조 제1절 제1항과 제2항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2) 당해 검찰이나 법원이 안전부문서관리청에 일정한 시기 동안 자료 이용이 형사 소송 절차의 실행을 침해한다고 천명하면 자료 이용은 제한된 시기 동안 금지된다. 이를 통하여 사람들의 권리 대변이 부당한 방식으로 제한 받는 경우에 이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검찰 또는 법원과의 합의를 통해 자료 이용이 이루어진다.
(31) 마르틴 발저의 독일서적협회 평화상 수상 답례 연설(1998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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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발저(1927-)는 1998년 소설『솟구치는 샘(Ein springender Brunnen)』으로 독일서적협회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그 답례연설에서 나치과거와 관련하여 “홀로코스트를 목적에 이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며 소위 발저-부비스 논쟁을 일으켰다. 이 논쟁은 한동안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다음은 발저의 답례연설의 일부분이다. | 나는 내가 협력하여 없애버릴 수 없는 악(惡)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돌리는 법을 배우야만 했다. 텔레비전 화면이 내가 참을 수 없는 세계를 비출 때면 나는 즉시 시선을 피할 은신처가 있다. 나는 나의 반응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나 또한 모든 죄를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모든 죄를 속죄해야 하는 세계가 있다면 나는 그런 세계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 나에게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예감이 떠오른다. 그런 글들로 활개치고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자 한다는 것. 그들은 우리가 그런 상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우리 모두는 우리를 매일같이 비난하는 영원한 수치인 역사적인 짐을 알고 있다. 지식인들은 그 수치에 대해 우리들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잔인한 기억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변명으로 행위자라기 보단 희생자에 가깝다는 착각에 한순간 빠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행위자와 희생자의 냉혹한 상반됨에 대한 한순간의 완화인 것이다. 나는 결코 피의자의 측면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비난을 받지 않고는 어디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을 때면 언론의 지루한 되풀이로 인해책임을 씌우는 일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담을 덜어야만 한다. 집단수용소에 대한 고약한 필름의 연속 상연에서 나는 정확히 이미 20번이나 시선을 돌렸다.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아우슈비츠를 부정하지 않는다; 판단력이 있는 사람은 아우슈비츠의 끔찍함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매일 언론에서 이 과거에 대해 나를 비난한다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우리의 수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대해 저항함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의 수치에 대해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에 감사하는 대신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내가 무엇인가에 저항하는 것을 깨달을 때면 나는 우리 수치에 대한 비난의 동기를 엿듣는 것을 시도한다. 그리고 나서 그 동기가 더 이상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을 위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위해 수치를 도구화함에 있는 일이 더 빈번하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믿게 될 때에는 매우 기쁘다. 명예롭고 좋은 목적을 위해서 수치를 도구화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독일 분단의 결과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 방식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아우슈비츠를 실현시키자고 말한다. 이미 분단은 그 자체로 그것이 지속됐던 동안 아우슈비츠에 대한 암시와 함께 중요한 지식인들에 정당화되었다. (…) 총명한 지식인 하나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가 어떤 작가의 작품에 아우슈비쯔가 나오지 않는 것이 그 작가의 커다란 실수임을 세상에 알릴 때, 이 심각한 표정은 그의 얼굴에 마치 외국어 같은 효과를 낸다. 이 세련된 지식인은 서술의 기본법칙인 시점에 대해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들어봤다고 하더라도 시대정신이 미학을 앞서간다는 것이다. (…) 아우슈비츠는 위협의 지루한 되풀이, 어느 때나 끼워 넣을 수 있는 위협수단 또는 도덕적인 몽둥이 또는 단순히 규정종목이 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의식화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입술기도라는 특성뿐입니다. 그러나 독일인이 이제 아주 보통의 민족이라고, 아주 평범한 사회라고 말한다면 어떤 의혹이 생기겠는가? (…)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대한 토론에서 후손들은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이 야기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읽어볼 것이다. 수도 중심부에 축구장만한 크기로 악몽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수치를 기념화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뵝클러는 그것을 “부정적인 민족주의”라고 하였다. 만약 민족주의가 천 번이라도 좋게 생겨난다 할지라도 그 반대보다는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감히 추측해본다. 아마 선(das Guten)에도 진부함이 있는 것 같다. (…) 선한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양심에 관한 한 누구나 혼자이다. 그 때문에 공적인 양심행위는 상징화할 위험이 있다.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갖는다 할지라도 상징보다 더 양심에 낯선 것은 없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향하여 물러나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대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고독”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가 갖고자 하는 것, 그러나 상대방은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 독일 철학만이 아니다. 문학에서 하나의 예를 실제로 들어보자. 바로 클라이스트이다. (…) 클라이스트가 보여주는 훌륭한 행위들. 군사령관 홈부르크 왕자는 전투에서 명령 불복종죄를 범한다. 선제후는 사형선고에 이어 갑자기 “왕자는 사면되었다!”고 선언한다. 나탈리에는 그것을 거의 믿을 수 없다: (…). 선제후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도 잘 알겠지만 내가 가장 존중하는 것은 왕자의 내면의 느낌이지. 만약 왕자가 나의 판결을 조금이라도 부당하다고 느끼면 그 조항을 무효로 하겠네. 그러면 왕자는 자유의 몸이네!” 말하자면 사형선고가 집행되느냐 안 되느냐는 오로지 피고의 느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피고가 판결을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자유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32) 독일 유대인 협회 회장 이그나츠 부비스의 연설(1998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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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대인 최고위원회장은 1998년 11월 9일 베를린에 유대교당 리커(Ryker)거리에서 발저의 연설에 대해 “이 희생자들을 잊는 사람들은 그들을 한 번 더 죽이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연설로 답하였다. 다음은 그 연설문의 일부분이다. | 우리는 1938년 11월 9일 오늘을 기억합니다. 그 날, 당시의 유대교당과 기도의 집들이 방화와 모독을 당했습니다. 독일 전체에서 그 당시의 용어로 “제국의 크리스탈 밤”이라고 부른 섬뜩한 박해가 있던 그 밤에 유대인의 상점들과 집들이 약탈당하고 아울러 거의 100명의 희생자들이 체포당했습니다. 그 밤에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야만적 행위 중에서 최고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 나는 반유대교가 나치에 의해서 처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역사책으로부터 1000년 이상동안 기독교에서 유대교를 반대했던 것을 압니다. 반유대교는 십자가 원정 참가자들을 통해 학살로 이어졌고 또 스페인의 종교재판을 이끌었습니다 . 나는 세계 전환기 즈음에 프랑스에 있는 현대 반유대교를 알고 있으며 제정 러시아에서 반유대인의 폭력행위에 대해 아버지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나는 1935년에서 1939년까지 폴란드에서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와 현대 반유대교가 화합을 하고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반유대교인들이 반시온주의 마스크를 쓴 것에 대해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1945년 전쟁 종결 후 곧 다시 어떻게 반유대교 박해가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해야 한다고 하며, 다른 반유대교 난동으로는 부분적으로 국가적 관용이 있었을 때, 몇몇 그룹들이 개별적으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고 적극적 도움과 지지로 수행된 반유대인 테러가 1933년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도와준 사람들은 나치가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빼앗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의 관련법은 이미 1933년 1월 30일 권력이양 이후 시작되었고, 1933년 3월 24일 이후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민족과 왕국의 곤궁을 극복하기 위한 법). 이 법으로 모든 국가권력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금지된 반면, 다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 당시 그것에 반대했을 뿐입니다. (…) 1938년 11월 9일. 1300개 이상의 유대교당과 신전이 잿더미가 되고 10000명이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거의 100명의 유대인이 죽는 것과 더불어 그 사이사이에는 모든 유럽의 유대인을 거의 말살시킨 더 많은 사건들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 제국 화폐로 10억을 내야 했으며 국가 권력에 기여하는 것으로써 지급했고, 그것과 더불어 1938년 11월 9,10일에는 스스로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써도 지불하였습니다. 대체로 독일 역사에서 11월 9일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날입니다. 1938년 11월 9일 근처에 1918년 11월 9일이 있습니다. 그 날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립되었고, 1923년 11월 9일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기 위한 행군이 뮌헨 최고 지휘관 홀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그것으로 “베를린 공화국”의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수정된 “반제회의”가 열린 1942년 1월 20일은 1938년 11월 9일의 사건을 다루었고, “유대인 문제의 말살계획”이라고 불렸던 그 문제를 종결지었습니다. 조비브(Sobib),마이다네크(Maydanek),플라쇼우(Plaschow), 켈름노(Chelmno), 트레블링카(Treblinka)와 아우슈비츠(Auschwitz)는 6개의 말살지역이라고 불리는 결과로 역사에 남겨졌습니다. 동시에 아우슈비츠는 관용어로 말살의 동의어로 되었습니다. 1944년 독일 제국에서는 대략 68000여 곳의 강제 노동지역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600만명 이상이 강제 혹은 노예 일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 약 4,5백만명의 동유럽인들만이 지금까지 미비하게 혹은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충격적인 시대에 대한 책이 많이 쓰였고, 또 읽혀졌지만, 때때로 그 책들이 이해되는지를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많은 부분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어제는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잡아 뜯는 야수로 변하고 죄 없는 사람들, 여자들, 아이들을 그들이 단지 유대인이고 혹은 우대인의 후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쉽게 학살하는 사실을 우리는 생존자와 시간의 증거들, 우리의 후손들은 얼마나 얘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혹은 국가제도가 관료제를 만들어내고, 그것의 유일한 목표가 한 민족을 말살하는 것이며 또 100,000명의 사람들을 양심의 가책 없이 말살을 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의 아이들과 유대인의 후손들에게 얼마나 설명하고 싶어합니까? 대부분이 이해가 됩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정말 모두에게 가르쳤습니까? 오늘날 서로에게 관대히 대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정말 뒤에 남은 자들의 슬픔과 희생자들의 감정을 이해했습니까? 또 생존자들의 근심을 존중하기 위해 이해합니까? 우리는, 유대인 공동체는 국가사회주의 시대의 범죄 행위에 대해 한탄하는 유일한 민족일 수 없습니다. 대략 6천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5천만명 이상의 전쟁 희생자들이 있으며, 이 모든 희생자들을 국가사회주의 시스템(NS 시스템)의 책임으로 반송되었습니다. 왜냐하면 NS시스템의 목표는 1933년 이래 전쟁과 유대인 말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인종 차별과 반유대교 및 외국에게 배타적인 것을 퇴치하는 것이 유대인의 일로 여겨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회의 일부분이 부담을 느끼더라도 말입니다. (…) 나는 유대인과 진티(Sinti)와 로마(Roma), 동성애자,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받던 자들의 말살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아우슈비츠를 부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마틴 발저는 이번 해 10월 11일에 독일 서적 판매업의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감사의 말로 역사를 밀어내고 내지는 기억을 지워버리는 가장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였습니다. 다음은 그가 말한 부분의 인용문들입니다. (…) 나는 주목할 만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뭔가가 주목할 만합니다. 발저는 수치에 대해서 네 번 말했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발저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존경하는 연방 대통령 각하, 연방의회 하원, 연방수상각하, 제가 지금 말한 것은 나 혼자에게 책임이 있으며 “모든 유대인”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발저씨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발저에게 책임이 있고 “모든 독일인”에게는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발저에 관한 연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발저는 독일 역사가의 날을 계기로 그의 연설 근거로 역사가 프리드(Fried)의 문장을 이야기했습니다: “역사를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영원히 파멸하여야 한다.” 발저에 대한 내 비판은 과장된 것이고 그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비판을 받았습니다. 마틴 발저는 전후 공화국을 움직이는 작가들 중 한 명이며, 언어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나처럼 평범한 인간의 말과 필적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말과 필적에 더 관심을 보내는 것을 그는 감수해야 합니다. 그의 문장에서 그는 외면하기를 배워야 한다거나, 내지는 없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연습해야 한다고 하고 잊으려고 애쓰는 것을 실격 판정으로 하는 데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가 그 문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발저는 외면하기와 어떤 것에 대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에 대해 분명히 얘기합니다. 그것들은 나치시대에 매우 흔한 일이었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오늘날 또 다시 익숙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하고 괴테나 비스마르크에 관한 영화들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주의 시대에 대한 것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30년 전쟁과 1948. 3월 혁명의 역사들에 대해서도 몰두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기쁘게 괴테, 쉴러, 베토벤, 또는 비스마르크를 다룹니다. 그 모든 것들은 독일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히틀러와 힘러(Himmler)도 당연히 그 역사에 속합니다. 사람들은 역사의 아름다운 면만을 밖으로 드러내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감출 수 없습니다. 역사의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역사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각오해야 합니다. 수치는 그 때 한번만 있었고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에 의해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가 그것이 현재의 목적을 위한 아우슈비츠의 도구화라고 볼 때, 그것은 “정신적 방화”입니다. 그것은 보통 극우파 “정당 우두머리”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회는 극우파주의적 측면에서 보는 문장들과 주장들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물론 공화국에서 정신적 엘리트에 속하는 누군가가 무엇을 주장했을 때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 확실하게 극우파주의는 지금 발저를 끌어내게 되었습니다. (…) 나는 발저가 나처럼 집단적 죄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는 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왜 발저가 영화를 볼 때 피의자로서 공격을 받았다고 느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의 개념은 협박하는 연습이나 위협의 수단, 혹은 규정종목(Pflichtübung)도 아닙니다. 발저가 그것으로 도덕적 잣대를 볼 때 그는 아마 오른쪽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로부터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합니다. 아우슈비츠를 물론 잣대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때때로 아마 배우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발저가 아마도 도덕을 잣대로써 사용하는 데에는 큰 목적이 있다고 추측됩니다. 사람들은 홀로코스트 기념비에 대해 이런 저런 모양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에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 설계를 악몽으로써, 심지어는 수치의 기념화로써도 감히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 수치는 불멸이며 기념비를 통해 처음으로 기념화되지 않습니다. 그의 연설의 이러한 부분들은 평화상 수상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 연설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나는 이미 표현하였습니다. 발저 연설의 이러한 경향은 요즈음 분명히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지적 국가주의가 고취되고 잠재의식적으로 반유대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발저를 그렇게 비판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나타내는 편지들이 줄을 서있는 것을 보면 불쾌합니다. 왜냐하면 발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을 사실 그대로 표명했기 때문입니다. 발저와 많은 이들은 “정상상태(Nomalität)"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습니다. 나는 그들이 그것에 대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정상상태(Nomalität)는 예를 들어 유대인이 독일 땅에서 다시 살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공화국의 정치적 삶처럼 유대인들이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상상태”는 기억을 밀어내고 새로운 반유대교와 인종차별로 그것이 극단적 우익정당에서 통용이 되듯이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토마스 아쓰호이어(Thomas Assheuer)는 “차이트(ZEIT)" 신문 레첸(Letzenn)판의 논설에서 이것과 관련해서 글을 썼습니다: “발저는 프랑크푸르트로 여행을 하고 정의와 기억을 요구한다: 희생자를 위해? 아니, 국가를 위해, 국가의 정상상태에 그는 사로 잡혀 있다.” 우리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어린시절부터 배우기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는 기억입니다. 이미 탈무드에서 얘기했습니다. “구원(속죄)의 비밀은 기억이다.” (…) 우리는 쇼아(Shoah)의 희생자들을 잊어버리는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누가 이 희생자들을 잊어버려 그들을 또 한번 죽이고 있습니까!!
(33) 마르틴 발저와 이그나츠 부비스의 논쟁에 대한 볼프람 슈테의 비평(1998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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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람 슈테는 1998년 12월 9일자『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신문에 발저와 부비스의 논쟁에 대해 “논쟁의 끝인가 아니면 시작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싣는다. 다음은 이 글의 일부분이다. | 이그나즈 부비스가 발저의 “일요연설”을 “정신적 방화”라고 부르지 않고 발저가 소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건넸던 독일사회가 갖게 된 분노를 감수해야 하지 않았다면, “독일 사회가 아직 정상이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발저가 그 사이 이미 너무 잘 알려진 “도덕의 몽둥이, 도구화, 시선돌리기, (…) 우리 수치의 도구화”등과 같은 언어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더 이상 악의 구덩이이고자 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가? 그에게 정신적으로 친숙한 “역사가들의 논쟁”보다도 더욱 공공연하게, 더 개인적으로 그리고 또한 더 많은 상처를 가져다주면서 끝을 맺게 되는 한 역사적 논쟁에 도달한 이후,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해도 될 것이다. 부비스의 거친 이의 제기가 없어도, 발저의 섬세하고도 포괄적인 변호, 즉 미래에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억을 단지 개인적인 양심사의 결정 문제라고 하는 변호가 없어도 공적인 “기억의 딜레마”로부터의 작별이 상파울 교회에서 만장일치로 수용되었으면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양심적인 독일인들이 오늘날 독일인이라는 어려운 숙명에 대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불평에 대해 하는 정당한 반박이 이런 점에서 단지 부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 독일 유대인 협회 회장만이 격렬하게 반박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것은 나타난 것이었다. 왜 단지 그인가? 독일인의 역사적 범죄를 현재와 미래에 공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단지 독일의 유대인에만 관계되는 일인가? 즉, (…) 그것이 단지 “직접적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양심의 문제, 단지 중년세대의 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인가? 그러면 미래에는 어떤 독일인은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다른 독일인은 수치의 문제를 다룰 것인가? - 또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각자 자기의 양심의 문제로 삼을 것인가? 비록 발저가 이 문제를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발언으로 그 문제는 제기되었다. (…) 발저는 작가의 양심적 특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베를린 공화국”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목표로, “우리 수치의 도구화‘에서 출발하여, ”축구장만한 크기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대해서, ”맹목성에 전율하는”에 대해서, 그리고 독일인의“정상적 민족”에까지 언급하였다. 발저의 말에 언급된 계산적으로 희미하게 남아있고 다수의 해석여지를 가져온 부분은 (…) 결국 클라우스 폰 도나히가 옹호자로서 알렸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서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모 또는 집시에 대한 공범으로 강요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유대인에게서 용감성 증명을 동시에 요구했다. 지금 부비스와 도나히가 그들의 논쟁을 덧붙였다면, 끝없이 개인적인 것으로의, 항로에서 벗어난 논쟁이 끝이 났거나, 그 논쟁의 생산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마틴 발저는 이스라엘의 대사에게 쓴 한 편지에서 “두 명의 유대인 지식인이 그 사이에 제가 말했다고 생각했던 것을 말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단지 “경악의 은어를 극복하기 위해 그의 경험을 묘사하였고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자리에 양심을 놓으려고 했다."고 자기의 연설을 해석하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비스가 그를 정신적인 방화자로 부르는 한, 그는 함께 “교양이 있는 연설의 영역”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유대인의 최고위원회 의장이 결국엔 희생양이 될 것인가? 그의 단지 그의 과격한 경보주의만이 공개적 논쟁으로 이끌었는가? 이 논쟁은 비도덕적 결과를 가져오는 정신적 방화로 발전하였다. (…) 부비스와 발저 사이에 공개적인 대담이 이루어지게 될지는 쇼-전쟁(Show-Kampf)에 대한 미디어의 흥미를 제외한다면 결정되지 않았다. (…) 독일 역사의 중심을 이루는 이 질문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젊은 사람들의 공개적 침묵이 만일 사람들이 “두 노인의 싸움“과 관련을 맺지 않거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호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일 것이다. 아마도 이제야 비로소 결정적인 논쟁이 시작될지 모른다.
(34) 귄터 그라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식 강연문(1999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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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1927-)는 그의 대표작『양철북』(1959)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소시민의 의식을 해부하고 그들이 갖는 도덕적 타락과 도피성, 이기심등에서 나치과거의 원인을 찾고 아울러 과거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다음호에서 계속...”이라는 제목의 노벨문학상 수상식 강연문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파력하고 있다. | (…) 내가 예술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확실했을 때, 내 나이는 대략 12살이었다. 나의 집이 교외인 단찌히-랑푸어(Danzig-Langfuhr) 근처에 있었을 때,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히틀러 청소년단 정기간행물인『협력하라(Hilf mit!)』에서 나를 유혹하는 제의 - 이야기 시합 경기가 적혀있었다 - 가 있었을 때, 전쟁이 일어난 후에야 작가 방향으로 전문적으로 교육받았다. 상이 약속되었다. 그리고 곧 나의 첫 번째 소설을 공책에 쓰기 시작했다. 나의 어머니 가족 배경의 영향을 받은 그 소설 제목은『카슈브 사람들(Die Kaschben)』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마을에서 사라져가는 작은 카슈벤 민족이 다시 한번 느끼는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노상강도들이 다리와 길거리를 차지하고, 농민들 자신의 법이나 비밀 재판을 통해서만 농부를 돕는 법을 알았던, 황제가 없던 끔찍스런 13세기 임시정부 시대에 대해 보여주었다. 카슈브의 후방 지역에서의 경제적 상황에 관해 간단하게 묘사가 된 후, 곧 약탈 행위와 구타와 칼부림이 시작되었던 것을 나는 매우 많이 기억한다. 첫 번째 장의 마지막 부분에 모든 주연배우와 상당수의 조연 배우들이 죽고 암매장 당하거나 또는 까마귀의 먹이로 던져질 정도로 빈번히 목이 졸리게 되고 단두로 찍혀 죽으며 찔리게 된다. 그리고 비밀 재판을 통해서 교수대나 칼로 재판받게 된다. 나의 표현 감각은 내가 쌓은 시체를 영혼으로써 다루고 그 소설을 소름끼치는 것으로까지 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시도는 실패된 것으로써 여겨져야 하며, “다음호에서 계속”으로 성급하게 결말이 지어진다: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 시도하는 사람은 다음 이야기에서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소설의 인물을 다루라는 분명한 경고를 받게 된다. (…) 나의 어머니의 사랑스런 사촌도 카슈브 출신이며 자유도시인 단찌히에서 폴란드 우체국 공무원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 들렀으며,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그 우체국 건물이 헤벨리우스(Hevelius) 광장에서 나치친위대 국가방위군의 습격으로부터 잠시 보호받았을 때, 나의 삼촌은 항복하는 사람에 속하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계엄령에 따라 형을 선고 받거나 총살당했다. 갑자기 이 삼촌은 거기에서 빠졌다. 갑작스럽게 더 이상 아무도 그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를 제쳐놓았다. 그가 사라져 있던 수년 동안 그는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완전히 자리잡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난 15살에 군인이 되었고, 16살에 두려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7살에 미군의 포로 신분이 되었고, 18살에 수용소에서 출감 되어 암거래상으로 일을 하였으며, 마침내 석공과 조각장이 일을 배웠다. 또한 예술 대학에서 연습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볍게 쓴 시들과 이상야릇한 단막극을 작필 하였다. 그것은 미학을 즐기는 것을 타고난 나에게 이야기 소재의 부피가 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른 이름과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형식을 통해 다시 소생하기 위해서 내가 - 그 밖에 누가 있겠는가? - 나의 예술적 작업의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줄 것을 기다리면서, 나의 어머니의 사랑하는 사촌, 참살당한 폴란드의 우체국 공무원은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설에서, 소설의 주요 인물과 주변 인물들은 삶에 대해 욕망을 가지고 매우 의욕 있게 여러 장에서 살아남고, 심지어 몇몇은 결말에까지 견뎌내서 작가의 계속되는 약속 즉, “다음 호에서 계속...”을 이행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생태학적으로 근거 있는 항변이 세계적으로 유력한 대석유회사인 Shell을 방해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나는 책을 태워버리는 나라 출신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혐오스러운 책을 없애버리는 즐거움이 계속해서 혹은 이미 시대정신에 상응한다는 것을 안다, (…) 하지만 훨씬 심각했던 것은 작가에 대한 박해가 세계 전역에서 학살로 협박하거나 집행되는 것까지로 더해졌고, 전 세계는 이러한 계속되는 테러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자유롭다고 자처하는 세계 저편은, 나이지리아에서 1995년에 일어난 것처럼 고향의 오염을 고발하는 작가 켄 자로-비바(Ken Saro-Wiwa)가 그의 전우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이런 판결이 집행되면, 소리치며 분개는 하지만 곧 의사일정에 들어간다. 도시와 교회, 그리고 공산당 정치국이 새로운 조처를 강요당하는 것처럼 무엇이 책과 그 책의 작가들을 위험하게 하는가? 침묵을 요구하고 나쁜 행위가 수반되는, 그때그때마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위반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종종 문학적 입증은 진실이 복수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나의 사실뿐만이 아니라 다수의 사실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그것은 그런 하나의 이야기를 위험한 것으로 판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각 감독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유일한 진실은 치명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이다. (…) 작가들은 과거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빨리 아문 상처들을 다시 들추어내고, 잠긴 지하실에 있는 시체를 꺼내고 출입 금지된 방에 들어가고, 신성한 암소들을 다 먹어치우거나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처럼 아일랜드 아이들을 권위 있는 영국 요리의 로스구이로써 추천한다 (…) 이 모든 것이 작가를 악명 높고 비난할 만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작가들의 가장 나쁜 범행은 그들의 책 속에서 역사적 흐름의 승자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 과정에서의 패배자들이 가장자리에 서 있는 곳에서 즐겁게 방랑한다, 그들은 얘기할 것이 많을지 모르지만 발언할 기회는 갖지 않는다. 그들에게 발언권을 준 사람은 승리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이다. 패배자에 둘러싸는 자가 그들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다음호에서 계속”은 더 이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글을 썼다. 1951년 아도르노가 그의 책에 “최소한의 도덕. 상처받은 삶으로부터의 반영”에서 말했듯이 아우슈비츠는 중간 휴지와 치료할 수 없는 문명사의 단절로써 물론 이해되어져야 한다. 단지 이 금지 표시판만이 우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믿었던 재앙의 징후는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남아 있다. 나의 세대 작가들은 그에게 단호히 저항하였다. 어떤 작가도 침묵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독일어를 발맞추어 걷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또한 목가적 생활과 어슴푸레한 내면성을 밖으로 유인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들과 같은 불에 타버린 아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흑백에 따라 좌우되었다. (,..) 그것이 시이건 산문이건, 단지 그렇게 해서만이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쓸 수 있었다. 지금 그것을 기념하고 과거를 끝나게 하지 않게 함으로써, 독일전후 문학은 보편타당한 규칙인 “다음호에서 계속...”을 다음 세대를 위해 정당화시킬 수 있다. (…) 이런 저런 관심으로 인해 얼마나 자주 종지선이 요구되고, 얼마나 자주 정상의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요청이 있었고, 얼마나 자주 수치스러운 과거가 역사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었던가. 그러나 문학은 이런 어리석은 요구에 반항하였다. 그것은 옳은 일이었다! 독일에서 0이라는 시간을 알릴 때마다 전후 시대의 종결을 외쳤기 때문에 - 최근에는 10년 전에 장벽이 허물어지고 독일 통일이 서면에 쓰였을 때 - 우리는 과거를 다시 끌어들였다. 1990년 2월 그 당시에 나는 마인 강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우슈비츠에 대해 쓰기”라는 주제로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총괄을 하고 책에서 변명들을 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 “달팽이의 일기”를 출판하였고, 그 책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서로 교차시켰지만 서로 평행하게 뻗어있거나 때때로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나의 직업에 대한 정의를 아들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 그 대답이 있다: “작가는 아이들이고 또한 경과하는 시간에 거슬려서 쓰는 사람이다.” 나는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란 분리되거나 시간을 초월해서 혼자 틀어박혀 있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동시대 사람으로서 오히려 변화하고 경과하는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고, 참여하며 정당에 가담하는 것이 바람직한 쓰기 자세라고 본다. 그렇게 참여하고 정당에 가담하는 것은 알다시피 위험하다: 작가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작가의 언어는 하루 살이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궁지에 몰려 있는 현재 상황은 작가와 자유회전장치로 훈련된 작가의 표상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천식상태에 빠지게 되는 위험에 처한다. (…) 이러한 강박관념이 나를 자극시켰다. 나는 자유로워지지 않을 것이며, 그 상실이 망각 속에서 흔적 없이 가라앉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문학 예술을 통해 다시 형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나와 나의 독자들에게 불어넣기를 원한다. 모든 형상의 위대한 것과 초라하고 하찮은 것들에서, 교회와 공동묘지와 더불어 조선소의 잡음과 지친 발트해의 향기, 가장 오랫동안 쇠퇴한 언어와 더불어 따뜻한 외양간의 투덜거림, 고백해야 하는 죄악, 그리고 용서받고 책임있는 죄 (…).
(35) 재단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의 설립(2000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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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서독정부는 나치청산의 일환으로 나치정권 피해자들을 보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경주해왔다. 곧 독일정부는 나치정권의 피해자에게 약 84조원(일부 강제노역 노동자에 대한 보상금 포함)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의 보상금을 제공해왔다. 그렇지만 유독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에서만큼은 몇 년 전까지도 이렇다할 성의를 보이지 않은 채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해왔다. 서독 정부, 법원, 그리고 이들 노동자들을 고용했던 기업은, 강제노역에 종사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체불임금과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자, 그 법적 근거가 부재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계속 거부해왔다. 그러나 최근 강제노동자를 보상하는 법안이 2000년에 통과됨으로써 드디어 반세기를 넘기는 기나긴 투쟁 끝에 나치정권 하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린 외국인 노동자들이 독일로부터 보상받게 되는 길이 열렸다. 이들을 보상하기 위한 재단, 곧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이 총 100억 마르크의 출연금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 독일의회는 다음을 결의하고자 한다.
독일의회는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이라는 재단을 설립하는 법안을 통해, 그 동안 방기해오던 독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이제나마 다하게 되었다. 곧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한 부분인 노예 및 강제 노동자에 대한 불법행위, 징용, 학대 그리고 착취를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 법으로 인해 뒤늦게나마 그 희생자들에게 인간적이고 경제적인 의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독일의회는 독일인이 노예 및 강제 노동자들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 그들의 용서를 구한다. 독일의회와 독일연방정부는 올해 이 재단에 5십억 마르크를 출연(出捐)할 것이다. 우리는 독일기업들이 이 재단의 설립과정에서 약속했던 출연금 5십억 마르크 역시 곧바로 기부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특히 노예 및 강제 노동자를 고용했던 기업이나 그 기업의 법적 상속자들은 그러한 기부금 모금에 곧바로 빠짐없이 동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밝혀둔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회는 이 보상금이 아직 생존하고 있는 희생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분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독일의회가 또한 필수적인 일로 간주하고 있는 바는, 보상금 수혜자는 이 법에 따라, 그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한 금액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의회는 이 법에 규정된 여섯 번째 협력단체, 곧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희생자들을 돌보는 협력단체에 밀려 각 개인들에게 분배되는 보상금액이 적어질 경우를 우려하고 있다. 이로 인해 비용이 얼마나 더 필요하게 될 것인가는 희생자들로부터 신청을 받고 난 후에서나 비로소 최종적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여섯 번째 협력단체의 업무를 위한 비용이 부족할 경우, 독일의회와 이에 참여한 당국이 그 부족분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독일의회는 나치시대 노예 및 강제 노동자들을 고용한 적이 있는 기업들이나 그 기업의 법적 상속자들은 그 해당 기업의 문서고를 개방하여 희생자들의 보상청구권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관한 서류들은, 과거의 강제노동자에게 보상액이 지불된 적이 있으면 그 내용과 함께, 복사하여 위의 법에 적시된 협력단체에 보내져야 한다. 독일의회는 독일연방정부가 조직적, 재정적, 혹은 인적인 조치를 추가로 강구하여 아롤젠(Arolsen)에 있는 국제검색문서고(Archiv des Internationalen Suchdienstes)의 기능을 강화하여 각 희생자들과 협력단체가 보상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 독일의회는 또한 동법 제18조(정보문의)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 지방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들이 그 산하의 문서고를 개방하고, 질의응답 시스템을 향상시켜 희생자 및 협력단체가 보상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 독일의회는 이 재단 금액 가운데 일부가 미래기금으로 조성됨으로써, 국가, 사회 그리고 사기업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여긴다. 이를 통해 다음 세대도 계속해서 나치범죄를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 미래기금의 재원은 향후 몇 년간 반드시 일차적으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프로젝트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당대의 증언을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젊은이들의 교환, 화해, 민족 간의 이해, 인권존중,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한 프로그램에 중점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 이 미래기금의 재원은 연방정부와 독일기업이 출연하는 비용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이들 공공기관이 지원한 조치들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재단이사회는 미래기금의 사업을 위해 독자적인 위원회의 구성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검토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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