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국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시대정신 2016.11/12월호 |
한국민족주의의 기원
1990년대 말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민족주의는 낡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젊은 층의 배낭여행과 해외취업이 유행처럼 번져갔고 한국 경제와 기업들은 세계 경제에 편입됐다. 한편으론 신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확대됐고 세계시민이란 인식이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민족주의는 곧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한 해 외국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이 2천만 명에 육박하고 전 세계에 한국 기업의 공장이 세워지고 있지만 국내에서의 각종 논쟁과 정치적 갈등의 이면에는 민족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는 정치적 주장의 근원에는 민족주의가 있다. 반면 민족주의 사관에 근거하지 않은 다른 주장은 아주 쉽게 매도당한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의 책임과 더불어 여기에 부역한 한국인 업자들의 책임을 함께 지적한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교수는 사법적 단죄를 받고 있다. 한국에 다양한 여론재판이 존재하지만 친일파라는 마녀사냥만큼 효과적이고 강력한 것은 없다.
앞으로 세계화가 더 진전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상당한 기간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족’ 혹은 ‘민족주의’라는 실체에 대한 비판도 상당하다. ‘민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창조된 상상의 산물이며, 과도한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의 선진화의 걸림돌이 될 것이란 지적이 그것이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민족’과 ‘민족주의’는 현재 한국인의 의식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향후 통일이 구체화된 시기에 ‘민족주의’는 절정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동아시아 연구분과 부교수인 앙드레 슈미드가 쓴 『제국 그 사이의 한국』(휴머니스트. 2007)은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어떻게 창조됐고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했는지를 청일전쟁 직후부터 한일합방까지의 자료를 토대로 담담하게 그리고 냉정하게풀어 쓴 역작이다. 국사학자가 아닌 외국인에 의해 한국민족주의의 기원에 관한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앙드레 슈미드는 특히 신문을 가장 중요한 사료로 활용했는데 신문은 당시 조선에서 지식인들과 대중이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신문에 실린 글을 통해 앙드레 슈미드는 당시 지식인들이 어떻게 ‘민족’이라는 개념을 창조하고 ‘민족주의’를 확산시켰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을 논증하였다.
문명에 대한 열정
제목 그대로 1895년 당시 조선의 상황은 일본과 청나라 두 개의 거대한 제국 사이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지 반드시 어두웠다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조선왕조와 무지한 백성에 대한 환멸에 절망하긴 했지만 일본을 통해 접한 새로운 문명은 당대 지식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엔 충분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는 당시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불과 30여 년 전 명치유신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오랜 기간 문명의 중심이었던 청나라에 승리한 것은 조선의 지식인들을 크게 각성시켰다. 이들은 일본의 승리를 두 국가의 전쟁이 아닌 낡은 문명과 새로운 문명의 대결로 보았다.
당시 독립신문의 사설이다. “한국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오직 중국을 ‘중원’으로 숭배하고 일본을 ‘왜’라 칭하며 경멸했던 것밖에 없다. (중략) 우리는 서구의 문화와 법률을 이제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나라가 문명국이며 어떤 나라가 야만적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문명과 개화, 즉 문명화와 계몽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고 지식인들은 신문을 통해 그것을 시도했다. 이것은 비단 지식인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신문은 물론 정치권과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생들까지 문명개화를 호소했다. 심지어 광고주들조차 문명개화를 광고 메시지에 적극 활용했는데 그만큼 문명개화는 시대적, 사회적 강력한 요구였다.
단발과 교육, 화폐, 여성의 권리, 관리임용체계 등 수많은 이슈들이 논쟁거리가 되었고 사회적 토론에 붙여졌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민족주의 신문들, 정확히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미국과 일본과 같은 문명국과 조선의 상황을 비교하며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신문들은 새로운 개념으로 조선사회의 문제에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생산하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독자(백성)들의 행동을 형성하고 결정했다. 비록 발행 부수는 수천 부에 불과했지만 당시 신문을 통해 창조되고 전달된 개념들과 그 영향력은 한 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추구한 것은 탈중국화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결정되자 지식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서 과거 동아시아 국가들이 한자 문화권으로서 공유하던 초국가적 문화주의에서 결별을 추진한다. 그것은 기존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해온 문화적 상징과 관습을 거부하고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는 동아시아의 지역적 질서의 경계를 넘어 조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정하는 작업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탈중국화의 과정은 민족주의적 지향성으로 나타났는데 신문들은 을지문덕과 같은 민족 영웅, 한자에 대한 반대와 한글 옹호, 국기로서의 태극기를 민족의 상징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탈중국화가 곧바로 민족이란 개념의 확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중화문명에서의 이탈은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아직 ‘민족’은 창조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지식인들은 무능한 조선왕조를 낡은 중국문명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세계 속의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인종적 개념의 동양을 중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민족주의자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의 현상이었는데 서양제국주의에 맞선 동양의 연대와 평화, 즉 범아시아주의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발휘한다. 안중근 의사가 을사조약의 책임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때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지적 경향이 배경이었다.
범아시아주의는 한편으론 문명과 개화를 위한 방편으로 인식됐다. 당시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조차 일본은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문명과 개화를 위해 따라 배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협조 혹은 활용을 통해 문명과 개화를 이룩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를 위해서 서양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명국가인 일본과의 평화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문명과 개화 자체가 일본을 통해 전해진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떠오르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한국의 민족주의 사이의 대립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면 두 나라 사이의 광범위한 지적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간과하기 쉽다.
당시 일본의 식민주의자들과 한국의 민족주의자 사이에는 많은 교류와 공통된 입장이 존재했는데 이는 두 집단 모두 ‘문명 개화’를 중심으로 정치적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족주의 언론에는 일본의 개혁, 역사적 특징에 관한 기사부터 연설문, 에세이의 번역본까지 어디서나 일본이 등장했다. 일본이 30년 만에 문명화된 강대국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비록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문명개화의 개념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일제 식민지배와 민족의 등장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빠르게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조선인들, 특히 지식인들은 일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세계 속의 동양, 그 속에서의 우리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게 된다. ‘민족’의 탄생이다. 왕조 중심의 유교적 역사관과 일본의 식민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역사관이 나타나는데 구체적으로 ‘민족’이라는 신조어와 한국인의 시조로 알려진 ‘단군’에 대한 건국신화가 그 바탕이 된다.
신문지상에 최초로 ‘민족’이란 단어가 표기된 것은 1900년 1월 황성신문이었지만 이때의 민족은 동아시아의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인종적인 단위를 의미했다. 1906년 6월 ‘민족주의’란 사설에 가서야 비로소 ‘민족’이라는 단어는 개념적인 명확성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사용되는데 이 논설에서 민족은 나라의 기초로 제시되고 모든 백성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일본의 지배가 본격화되는 현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왕조가 아닌 다른 주체가 한반도의 실체로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을사조약 이후 ‘민족’ 개념은 빠르게 조선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민족의 출현과 전파는 문필가들에게 네이션의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찰할 수 있는 강력한 개념적 도구를 제공했다. 물론 이것은 ‘문명과 개화’와 마찬가지로 조선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중국과 일본 동아시아 삼국의 모든 지식인에게 주어졌으며 이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공유하였다. 조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민족’이란 창조물에 실체를 만드는 작업에 매진하는데 그것은 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민족의 혼을 치켜세울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단군신화였다. 물론 김부식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단군신화는 역사가들에게 오랜 기간 숙제였다. 단군신화를 입증할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단군조선보다 유학자들에게 더 큰 지지를 받은 것은 중국으로부터 내려온 기자조선이었다. 이는 중국문명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신문들은 앞 다퉈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기 시작하는데 단군신화에 대한 각종 기사들과 단군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기사들이 넘쳐나게 된다. 또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2333년을 기점으로 연도를 계산하는 단기라는 표현이 지면에 대거 등장한다.단군의 지위가 격상되는 과정은 ‘민족’이라는 신조어의 사용이 늘어나는 현상과 나란히 진행되는데 특히 ‘단군’과 ‘민족’이라는 요소를 결합시켜 민족사를 확장시키는 작업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신채호였다.
1908년 연재물로 기획되어 간행된 <독사신론>에서 신채호는 민족을 정의하는 요소에 대한 개념적인 구조를 정립했다. 신채호는 민족이라는 주요 주제를 정식화했으며, 신채호 이후의 모든 역사가는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람들이 인식하든 안 하든 신채호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역사를 통해 존재해온 객관적인 실체로 믿었다. <독사신론>에서 단군은 역사 서술의 출발점이 되고 과거사의 흥망성쇠는 부여, 삼국, 통일신라, 발해를 비롯한 단군의 후예들의 운명에 대한 서술로 채워졌다. 그리고 민족사의 방향성을 분명히 하기 위한 구체적인 시도로서 신채호는 사회진화론을 도입해 민족이 끊임없이 이웃 나라와 경쟁하는 과정이 곧 역사임을 명확히 했다.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민족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 곧 역사라는 신채호의 인식은 빠르게 민족주의 지식인들을 매료시켰으며 황성신문을 비롯한 다른 신문과 지식인들도 곧 이런 역사 서술을 수용하게 된다. 이는 곧 중화주의의 완전한 해체를 가져왔고 이제 조선사는더 이상 중국을 참조하지 않고서도 독립적인 존재로 기술할 수 있게 됐다. 반면 문명과 개화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주제인 ‘진보’는 이러한 역사 서술에서 제외됐다. 신채호의 역사관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잔인한 투쟁이었던 까닭에 식민주의에 이용될 수 있는 ‘진보’적 사관은 민족주의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 서술은 한일합방 이후 금기시된다. 조선의 주요 민족주의 언론은 폐쇄되고 지식인들은 공적인 장에서 민족주의적 탐구를 할 수 없게 됐다. 그나마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열린 공간을 활용해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민족사관을 더욱 발전시킨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정통성 확립을 위해 민족사관을 적극 수용해 발전시키고 이는 지금도 한국사 서술의 핵심이 되고 있다. 특히 일제의 식민사관 극복을 최대 선결 과제로 설정한 이기백의 역사 인식은 한국사 서술의 가장 보편적인 이론적 근거로 작용한다.
민족주의 사관의 문명주의 배척
그러나 앙드레 슈미드는 과거의 식민주의적 역사 서술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민족사가 써지는 것에 대해 과연 민족사라는 것이 식민지 시기의 역사해석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오히려 한국의 민족사는 일본이라는 적대적 존재를 참고하지 않고서는 규정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됐다면서 이러한 점 때문에 오히려 서로 의존적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반식민사관은 문명과 개화로표현되는 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한 식민사관을 배척하면서 한국 자본주의 근대성과 같은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그 결과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식민지 시기는 비워둔 채 해방 후 느닷없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이션을 새로이 성찰하는 개념으로서 민족이 진정 역사적으로 실재하는가의 여부는 연구의 대상에서 제거되었다. 대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는 국사 연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적의 주제가 되었으며, 식민지시기의 사회와 의식의 변화 등에 대한 실증적주의적 연구는 국사학계의 외면 대상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앙드레 슈미드는 명확한 답을 주진 않는다. 다만 ‘민족’이란 개념과 ‘민족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왜 확산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분명히 하고 있다. 1895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이후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문명과 개화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꾸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야욕이 명확해지면서 이에 대항해 ‘민족’이란 개념을 창조하고 ‘민족주의 역사’ 글쓰기를 통해 ‘한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형성하였다.
현재는 비록 창조된 집단적 기억일지라도 지금 우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 ‘민족’은 엄연한 실체이다. 이는 상당한 기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민족’이란 집단적 기억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남과 북은 지난 70년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으며 언어와 혈연을 제외한 문화나 문명적 부분에서 다른 외국보다도 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차라리 분단 상황에서 각각 협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가능만 하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상당한 기간 민족주의 의식이 강력한 조건에서 이는 현실화되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세계사적으로 볼 때 예외적으로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이 오랜 기간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왔다. 그 과정에서 한민족만의 고유한 특성이 자리 잡은 것만은 현실이다. 문제는 이것이 역사적 배타성으로 존재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주변 나라 혹은 세계와의 교류와 협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현대사회에 와서도 우리의 정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앙드레 슈미드가 지적한 것처럼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길은 바로 반식민사관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學術, 敎育'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at Is an Elite College Really Worth? (0) | 2017.04.02 |
---|---|
Nostalgia for Now (0) | 2017.01.25 |
독일史 - 나치시대부터 통독시기까지 (0) | 2016.12.28 |
규장각 소장 세계지도 읽기 (0) | 2016.12.18 |
“국정교과서도 2, 3종으로 늘려 학교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0) | 2016.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