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記事를 읽는 재미

줄을 제일 잘못 선 나라는? 헝가리!

이강기 2017. 1. 29. 10:56

(아래 글은 2011년 11월 5일, 조갑제 닷컴에서 퍼 온 글임)

 

 

줄을 제일 잘못 선 나라는? 헝가리!

 

1, 2차 大戰 때 敗戰國 편에 서더니 공산권으로 편입되어 또 고생!
趙甲濟   
  유럽을 여행할 때 한국인들이 가장 마음 편해하는 나라는 아마도 헝가리일 것이다. 헝가리 사람들의 조상이 한민족의 뿌리인 몽골-투르크族과 친연성이 있고, 지금도 태어나는 아기의 등과 엉덩이에는 우리처럼 몽골반점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헝가리는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국가에 갈 때의 긴장이나 러시아에 갈 때의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이 필요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순하고 생각이 깊고 조용하다.
 
  다뉴브 강의 양쪽으로 발달한 수도 부다페스트(부다와 페스트의 두 구역으로 구성)는 인구가 약200만, 헝가리 전체 인구(약1000만 명)의 약20%가 몰려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부다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다뉴브 강변의 夜景이 기 막히다.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의 분위기는 悲感과 哀愁를 띤다. 그 哀愁도 다분히 동양적이다. 헝가리는 자살률이 세계에서 최고인 나라이다.
 
  헝가리에서 느끼는 '슬픈 아름다움'은 다분히 역사적 産物이다. 헝가리는 유럽에서 '줄을 가장 잘못 선 나라'로 꼽힌다. 오늘의 헝가리는 서기 896년을 건국 元年으로 삼는다. 볼가강 남쪽의 草原에 살던 유목민 출신의 마자르族이 헝가리로 이동해 와서 정착, 국가의 형태를 취했다. 헝가리(Hungary)라는 나라 이름은 영어표기이고 헝가리 사람들은 國名을 '마자르'라고 부른다. 헝가리라는 말은 '오노굴'(열개의 부족 연합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자르족은 기마민족이었으므로 전투를 잘했다. 9, 10세기 헝가리 기마군단은 西유럽을 휩쓸었다. 스페인까지 쳐들어갔다. 마자르 왕은 서기 1000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마자르족은 기독교화된다. 서기 1241년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골 원정군이 헝가리로 쳐들어와 그해 4월11일 사조강 가 무히에서 헝가리 군대를 전멸시킨다. 몽골 군대의 약탈, 학살로 200만 명이던 헝가리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죽었다. 나는 1996년에 무히에 가보았다. 떼죽음을 당한 헝가리 군인들을 추모하는 동산에 십자가들이 꽂혀 있었다. 몽골 황제 오고데이가 급사하는 바람에 몽골군대는 돌아갔다.
 
  1526년 또 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헝가리 군대는 모하크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에 大敗했다. 그 후 약150년간 헝가리(부다페스트)는 투르크 지배하에 들어갔다. 17세기말에 해방되자 말자 이번엔 오스트리아에 본부를 둔 합스부르그 제국 지배하로 넘어갔다. 19세기에 헝가리는 독립운동을 벌인 끝에 독자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제국으로 승격했으나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서 싸우는 바람에 패전국이 되었다.
  1920년 트리아논 조약에 의해서 헝가리는 영토의 3분의 2을 잃게 되고 헝가리 인구의 약3분의 1이 외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지금도 약500만 명의 헝가리인들이 이웃한 7개국, 즉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다. 헝가리는 이들 나라에 대해서는 아직 영향력이 좀 있다. 東歐와 中歐에선 한때 강력했던 헝가리의 권위가 살아 있어 중간 보스 같은 나라이다.
 
  헝가리는 2차 대전 때도 줄을 잘못 섰다. 독일 편에서 對蘇戰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되고 공산화되어 서구와 단절되었다. 헝가리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6년 헝가리 사람들은 反共 봉기를 일으켰다가 소련군의 침공으로 진압당했다. 2만 명 이상이 죽고 20만 명 이상이 해외탈출했다. 1989년 여름 헝가리는 그동안 당했던 소련의 압제에 대해서 일거에 복수를 한다. 민주화를 결심한 헝가리 정부가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한 것이다. 東獨사람들이 이 국경을 통하여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도록 방치함으로써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구 공산국가의 붕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1989년 한국과 맨첨 수교한 동구국가도 헝가리였다.
 
  1996년 6월25일에 필자는 아라파드 괸츠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하여 페스트쪽의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1904년에 완공된 이 고딕식 건물은 헝가리에서 가장 큰 건물이고 유럽의 의사당 건물로는 두번째로 크다. 길이 268m, 너비 123m, 높이 90m에 방이 691개이다. 부다쪽은 언덕인데 길다란 궁정건물이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궁전과 의사당이 마주보고 있다. 두 건물 모두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의사당에 있는데 엘리베이터쪽으로 갔더니 한 노인이 배가 불룩한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노인은 단추를 누르곤 필자 일행을 향해서 먼저 타라고 했다. 그가 바로 괸츠 대통령이었다. 그는 작가이기도 했는데 헝가리 봉기에 가담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6년 옥살이를 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흘린 피가 있었기에 평화적인 체제전환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공산당 세력을 몰아낸 민주투사들도 보복을 일체 하지 않았다. 고생을 많이 하여 성숙해진 사람들이다.
  헝가리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草原지대를 갖고 있다. 훈족, 아바르족, 몽골족, 투르크족이 늘 헝가리를 탐냈던 1차적 목표물도 말을 기르는 데 필요한 草地였다. 지금도 말을 이용한 쇼가 볼거리이고 흥겨운 음악이 음식점마다 흘러 넘친다. 부다페스트의 고급 음식점에선 종업원들이 총출동하여 노래를 불러주는데 프로급이다. 安益泰 선생도 부다페스트에서 공부했고, 그가 작곡한 애국가에도 헝가리적인 정서가 들어 있다고 한다.
  2004년 가을 尙美會 여행단은 부다의 성안에 있는 호텔에 들었었다. 저녁을 먹고 성벽을 산책하는데 달이 훤했다. 달빛에 젖은 다뉴브강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합창했던 기억이 새롭다. 헝가리의 슬픈 아름다움에는 月光에 물든 강물과 한국인의 노래, 리스트의 피아노, 브람스의 랩소디가 제 격일 것이다.
 
  이 헝가리가 민주화 이후 급성장을 하고 있다. EU, NATO, OECD에도 가입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구매력 기준으로 2만 달러에 달해 한국을 바짝 쫓아오고 있다. 수입 면에서 세계 15대 관광大國이기도 하다. 헝가리의 憂愁(우수)도 옛말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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