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動亂史

함안 남강변의 전투 경찰 혈투사

이강기 2017. 7. 5. 14:34


   

     



함안 남강변의 전투 경찰 혈투사



  

             침공 초일 비장한 각오로 포천 방면으로 출동하는 서울 시경  경찰들



1950년 6월 25일.북한군은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개시했으며
제일 서쪽 전선에서 움직인 북한군 6사단은 대담한 기동을 시작했다.

북한군 6사단은 그 전신이 중국 팔로군의 166사단인데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풍부히 쌓은 조선족 부대로 사단장은 그 능력을 이미 인정받고 있던 방 호산이었다.



                                 6사단장 방 호산- 본명은 이 천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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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호산은 인천 상륙 작전 뒤 6사단 병력을 온전히 인솔하고 북으로 도주해서 김 일성으로 부터 이중 영웅 칭호를  받았다.

6사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흩어져 달아난 전 북한군 사단중 유일하게 사단 편제를 유지하고 북으로 도주한 사단이었다.

그는 군단장까지 진급했으나 전쟁이 끝난 1954년
광산의 부지배인으로 쫓겨 난 후에 소식이 없다.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중국 동포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그런 정보는 전혀 없다고 했다.]

중국 전사를 보니 그를 한국전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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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 기차를 타고 역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기습으로 개성을 점령했던 6사단은 미약한 국군이 미처 손쓰지 못하고 있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현재의 서해안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루트를 타고 남한 영토의 서쪽 측면을 빠르게 파고 들어 오기 시작했다.

6 사단은 포병 트럭조차 피스톤 수송(왕복 수송)에 동원해서
충청도를 관통하고 호남지방으로 남하했는데 호남 지방에는 이들을 막을 군대가 없었고, 단지 전북 도경[道警]에서 파견한 경찰 기동대 200명이 금강 이남, 충남과 전북의 도 경계선에서 이들을 막아섰다가 단 한 번의 격돌에 산산이 흩어져서 패주했다.

전투도 자동화기나 지원 포 화력 같은 맞설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막강한 무장의 북한군을 6사단을 저지해 보겠다고 막아선 도경 기동대 소속 경찰들은 99식 소총 한 정과 실탄 열 발을 지급받았을 따름이었다.



                                                                      전북 도경의 토벌대


방 호산의 6사단은 전북을 가로 지르고 전남도 장악하여 침공한 북한 군 중에서 최초로 남해안에 도달한 부대가 되었는데, 이 6사단이 낙동강 전선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 국군과 미군의 측면에 도깨비 같이 갑자기 나타났다.

호남으로 우회하고 있는 부대를 단지 1 개 연대 병력 정도로
잘못 판단했던 미군은 기겁을 하고 미군 25사단 29연대를 텅 비어있던 측면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미 29연대의 1개 대대는 하동 부근 쇠고개라는 곳에서
잠복했던 방 호산의 부대에게 기습을 당해 미군 313 명이 전사하고 미군 부대에 협력 동행하고 있던 채 병덕 전 참모총장도 전사했다.

김 일성은 6사단의 예상외 쾌속 진격에 신바람이 나서 이 측면에 북
한군 4사단 등을 이곳으로 이동시켜 전과를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모두 중국의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했던 정예 부대들이었다.

낙동강 전선 서쪽 측면 전선에는 미약한 미군만 있을 뿐
전투력을 유지한 한국군 부대는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국 전사에서는 낙동강 전선 측면 방어는 한국 해병대의 1
개 부대만 제외하고 모두 미군들이 전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측면 전선인 경상남도 서쪽에서 한국 경찰 6,800 명이 빈약한 무장으로 북한군을 힘겹게 막아서고 있었다. 이들은 방 호산이 진격할 때 전북과 전남에서 경남으로 철수한 각 지역 경찰서의 직원들이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 북방 경북 지방에는 북쪽, 즉 서울, 경기와 강원도에서
피난 온 경찰들이 대구 방어를 비롯한 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들 상당수 경찰들은 나이도 있고 결혼도 한 처지였는데 대다수가 행정요원들로서 총은 들었지만 실전 경험은 전혀 없었다.

경찰 최고 사령부격인 치안국은 보급은커녕 의식주도 해결해주지
못할 정도로 힘든 지경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식량 확보라는 기본적인 문제 해결에 적지 않은 신경을 쏟아야 했고 그 결과 경찰들은 낙동강 방어 지역의 미군들과 상부상조하며 여러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도 경찰들은 기회가 있으면 적과 전투를 벌였다.
경남 지방에서 경찰관들의 전투는 아래와 같다.


1950년 8월 8일.
함안 법수 지역에서 전남 경찰 김 용래 경감의 부대가 북한군 6사단과 대결하여 적 30 명을 사살했다. 

1950년 8월 9일.
함안 필봉에서 전남 김 동진 경감의 부대는 북한군 6사단과 교전, 북한군 5연대장 이 동빈 중좌 등 30 여 명을 사살했다.

1950년 8 30일.
함안 내서 감천 지역에서 경남 산청 경찰서 천 경도의 부대는 북한군 4사단과 교전 끝에 적 사살 160 여 명의 전과를 올렸다.


 

                                                                 전투 경찰 토벌대.


그러나 가장 큰 전과는 1950년 8월 31일 산청 경찰서
정 원갑 경위의 부대 58 명과 미군 30 여 명이 합동 작전으로 벌인 함안군 남강변 전투에서 거두어 졌다.


타향을 떠돌던 경찰 중에 경남 산청 경찰서
직원들이 있었다. 아래에 산청 경찰서 소속 순경으로 이 격전에 참전했었던 6.25 참전 경찰 유공자회 사무총장 김 을로씨의 전투 회상을 소개한다.



산청 경찰서 경찰들도 밀려오는 북한군의 진격에
고향을 버리고 진주로 가는 피난 길에 올랐다. 그러나 북한 6사단이 더 빨랐다. 앞서서 진주를 점령했던 것이다.

진주로 가는 철수로가 막힌 산청 경찰서 직원들은
다시 함안으로 이동하여 미 25사단과 협력했다.

산청 경찰서의 무장 상황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반자동 M1은 분대마다 단 두 정만 보유했고 나머지 분대원들은 일제 99식 소총을 지급 받았었다. 그런가 하면 이들 경찰들이 받았었던 군사훈련은 거의 없었다.

[김
 을로씨만 해도 자신이 받은 군사 훈련이란 일제 때 학창 시절 받았던 제식 훈련과 총검술이 전부였다.]

1950년 8월말 북한은 거의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고 있었다.

한 달 전 김 일성이 충북 수안보까지 내려와서 북한군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8월15일 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었는데 8월 15일이 지나고 나서도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의 군사력과 전황에 위기감을 느낀 북한군 지휘관들은 예하 부대들에게 빨리 부산을 점령하라고 무섭게 몰아 부치고 있었다.

함안군의 남강은 북한군의 측면 공격을 막고 있는
천연의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격렬한 방어에 여기저기에서 좌절당한 북한군은 치밀한 정찰 결과 남강의 천연 장애물을 과신한 국군과 미군들이 이곳의 방어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방어 병력이라고 해봐야 한 줌도 안 되는 경찰들이라는 정찰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쯤이야 그저 밟아 버리고 진격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다.

1950년 8월 31일 밤 9시 30분, 북한군은 12사단 6,000 여 명의
병력과 중포를 동원해서 대규모의 남강 도하 작전을 시도했다.

12사단은 중국 내전에서 실력을 닦은 조선족 부대로서
1950년 6월 28일 춘천을 점령했던 정예 사단으로 이 사단은 원래는 7사단이었으나 안동 점령 후에 12사단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남강에는 절벽이 콧등처럼 튀에 나와 있는 요지에
정 원조 경위 지휘 하의 산청 경찰서 직원 58 명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도강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곳의 행정 지명은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咸安郡 代山面 九惠里]다.]

이 방면에 적의 움직임이 활발한 것을 공중 정찰로 미리 탐지한
미 육군 25사단은 미군 30 여 명을 급히 증파하고 도강 지점 중심으로 포병의 화력 계획을 수립했다.

[30 여 명의 미군 중에 포병 FO((Forward Observer, 포의 화력을 유도하는 전방관측팀)가 있었다.
바야흐로 미군의 포 화력이 그 진가를 최대한  발휘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미군들은 절벽 위에서 진지를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경찰 부대의
무장이 빈약한 것을 알고 기관총 다섯 정과 수류탄 1,000 발을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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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량의 수류탄을 지급한 것을 보면 이들이 한국형 고지전에 경험을 쌓은 부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수류탄은 고지전에서 최대로 유효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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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뿐만 아니라 방어 기자재도 가져와 진지 주변을 철조망과 지뢰로 둘러 쌀 수 있었으며 미군과 경찰들은 합동 방어선을 구성하고 대기하였다.

1950년 8월 31일 밤 9시 준비 사격 뒤에 북한군은
남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미군이 발사한 조명탄 아래 남강을 까맣게 무리지어
건너오는 북한군들이 보였고 후방의 미군 포병대가 발사하는 포탄들이 연달아 도하하는 북한군에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고지의 경찰과 미군들의 기관총들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북한 군은 불비가 쏟아지는 강물을 마치 무생물처럼 터벅터벅 걸어 진격해 나왔다.
북한군이 죽고 죽어서 남강의 강물이 벌겋게 되고 물에 떠내려가는 북한군 사체와 부상병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수의 북한군이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독전대(전투시 자기쪽의 군사를 감시, 감독, 격려하는 부대)의 위협에 그대로 강을 도강했고, 북한군은 작심하고 종심 돌파를 결심한 듯 중포들까지도 도하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다.

북한군은 강에 절벽처럼 수직으로 서있는 산청 경찰서 직원들의
진지를 정면 공격하지 않고 도강 후 후방으로 우회해서 소등처럼 완만한 후방 능선을 타고 뒷쪽에서 경찰 진지를 공격해왔다.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 국군의 공격장면



전투는 무려 9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경찰들이 던진 수류탄들이 수없이 날아가 터지고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밤이 깊어지자 적의 공격은 점점 엷어졌으나 북한군의 포 사격은 이들을 여지없이 두들겼다.

하지만 날이 새기 전 북한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날이 새자 적들은 강 건너로 모두 도주해서 격전장은 조용해졌다.

진지 주변 아래 쪽에는 북한군들의 시체가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야심차게 강 건너까지 끌고 온 야포들만 여지저기 흩어진 것이 그들이 경찰대를 얕보고 무리한 작전을 세운 사실을 말해 줄 따름이었다.

여명이 오자 후방에서 미군 전차 세 대가 지원을 나왔는데
경찰과 미군들은 이들 전차와 합동으로 전장 정리에 나섰다. 김 을로 순경도 전차 뒤를 따라 수색을 하다가 휘발유가 채워진 드럼통 사이에 부상을 입고 숨어 있는 북한군 한 명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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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은 적 접근로에 연료 드럼을 설치해두고 적이 공격해 오면 예광탄을 쏘아서 폭발 시켜 주변을 환하게 밝히곤 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목적으로 설치한 연료 드럼인 듯하다.

대개 짚단이나 나무로 휘발유 드럼을 뒤 덮어서
조명 효과를 극대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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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스럽게 노려보던 그 북한군 병사는
갑자기 숨겨 둔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 중상을 입고 있던 그가 던진 수류탄은 멀리 가지 못하고 그의 무릎 앞에 떨어져 폭발했다.

결국 북한군 병사는 죽었지만 수류탄 폭발은 연료가 채워진
드럼통들을 폭파시켰고, 휘발유의 불길이 사방에 튀면서 김 을로 순경의 하반신에도 불이 붙었다. 불길을 겨우 끈 김 을로 순경은 중화상을 입었고 후방 미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한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았다.


  

                                     북 105 전차 여단의 모터 싸이클 연대[83 기계화 연대]
모두 중국에서 전투 경력을 쌓은 조선족 들이다.
이 모터 싸이클 연대는  1950년 8월 11일 경남 고성에서 미  해병대 콜세어 항공대에게 걸려 전멸당했다. 


이날 경찰대가 진지 주변에서 확인한 북한군 시체만도
200 구가 넘었다. 생포한 북한군은 20 명이었다.

기관총을 포함한 무기류 370정과 적의 대구경 122mm 포 등 중포도 무려 22문이나 노획하였고 남한 돈도 40만환을 압수했다.

이와 달리 개인호에 잘 엄폐한 경찰들의 피해는 아주 경미해서
단 2 명만이[김 순복, 김 창수]전사했을 따름이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경찰 부대가 이런 대승을
거둔 사례는 세계사에서 없었다고 극찬을 하였으며 경남 도경 최 천 국장은 전투 참가자 58명을 전원 표창하였다.

(조선일보, 2012-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