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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블랙리스트' 꺼내 들며 탄압받은 正義의 사도처럼…

이강기 2017. 9. 22. 09:41

[최보식 칼럼] 해묵은 '블랙리스트' 꺼내 들며 탄압받은 正義의 사도처럼…

조선일보

입력 : 2017.09.22 03:17

"잘나가던 정치 實勢라도 정권 바뀌면 뒷전 신세, 더 運이 나쁘면 검찰로…
'정치 연예인'도 그런 운… 명힘 뽐내고 혜택 누리는 호시절 지속될 수 없어"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여기저기 방송 인터뷰에 나오는 문성근씨를 보면 세상이 바뀌었구나를 실감한다. "경악하고 개탄스럽다"라는 그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김미화·김여진씨 등도 보수 정권 시절의 아픔을 떠들어대고, 그 대열은 꼬리를 물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배 띄운다고 했다.

MB 정권의 국정원은 정말 치졸한 짓을 했다. 음지(陰地)에서 '합성 나체사진'이나 유포하라고 국민 세금을 줬던 게 아니다. 하지만 과거 국정원의 작태를 비판하는 것과 문씨 등이 마치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다 탄압받은 인물처럼 행세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들이 "이명박을 고소하겠다" "백주대낮에 그가 거리를 활보하는 현실이 어이 상실"이라며 마구 쏟아내는 광경을 보면 자기들 세상이 도래했다고 믿는 것 같다.

권력의 속성을 알면 피아(彼我) 성향 분류의 리스트는 크게 새로운 게 아니다. 정치색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권력 한쪽에 줄을 대거나 맞서는 언론인·학자·문화예술인 등은 그 대상이 돼 왔다. 블랙리스트가 보수 정권의 '음습한 작품'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직 못 찾아냈을 뿐 진보 정권에서도 다 작성됐을 것이다.

그런 진보 정권에서는 문씨 등은 '대접'을 받았고, 그렇지 않은 연예인들은 물먹었던 것도 현실이다. 가령 문씨는 진보 정권에서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과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을 맡았다. 반면 그 시절 여배우 김지미씨는 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중도에 물러났다. 몇 년 전 본지 인터뷰에서 김지미씨는 "영화 역사(歷史)를 지켜온 사람이 누군데, 그때 명계남·문성근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혁명군처럼 '구세대는 다 물러가라'는 식으로 나왔다"라며 증언한 바 있다.

세상이 다 알다시피 문씨는 '노사모' 결성을 주도한 대표적 친노(親盧) 인사다. 보수 정권 시절 영화·드라마 출연에 제약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전부터 출연이 뜸했던 게 사실이다. 그는 정치판에 뛰어들어 당대표 대행까지 맡았다. 큰일을 하는데 한낱 영화 출연에 관심이 있었겠나 싶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배우 문성근씨가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피해 상황에 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예인도 정치적 성향과 입장이 있고, 정치판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선택에는 자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잘나가던 정치 실세(實勢)라도 정권이 바뀌면 뒷전 신세로 밀리고, 더 운이 나쁘면 검찰에 불려간다. 마찬가지로 '정치 연예인'도 힘을 뽐내고 혜택을 누리는 시절만 지속될 수 없다. 정권이 바뀌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출연 제약을 받는 영락(零落)의 세월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판에 몸을 담갔으면서 대중 연예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만인의 사랑을 받겠다는 것은 자기 착각과 탐욕이다.

가령 문성근씨는 "보수 정권 블랙리스트의 최대 피해자는 김규리씨다. 한창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활동해야 할 20대와 30대 시절에 집중적으로 배제당하고 불이익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김규리씨는 광우병 광풍이 막 불어댈 때 미니홈피에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째로 수입하다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 안에 털어 넣는 편이 낫겠다"라고 썼던 연예인이다. 당시 국민 절반이 넘는 보수층에서 그런 연예인을 그전처럼 선입견 없이 볼 수 있었을까.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보수 정권에서 김규리씨가 집중적으로 배제와 불이익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사실 그녀는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해왔다. 그 작품과 연기력이 대중에게 어필했는지는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문성근씨도 영화 출연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작품과 연기력에서 과거보다 덜 주목받았을 뿐이다. 해당 영화제작사가 투자를 받는 데 좋은 시절에 비하면 어려움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 정권에서 나서서 이런 문씨를 배려하고 혜택을 더 줬어야 했는가.

"이명박 정권이 내 밥줄을 끊었다"고 주장하는 김미화씨는 반면에 진보 정권에서는 호시절을 보냈다. 대중을 웃겨온 개그우먼이 라디오 시사프로와 'TV 책을 말하다'를 진행했다. 지적 이미지의 '개념 연예인'으로 변신을 할 수 있게 해줬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발탁됐다고 여기겠지만, 상당수 국민은 그런 김씨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방송 프로에서 퇴출된 것은 단순히 국정원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대중(大衆)의 사랑을 잃은 측면이 더 컸다고 본다.

보수 성향의 국민은 한때 명(名)연기자였던 문성근씨를 배우가 아닌 아예 '골수 정치인'으로 받아들이고, 유능한 개그우먼이었던 김미화씨를 보고는 더 이상 웃지 않게 됐 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 스스로가 자기 책임에 대해 물을 때가 됐다. 이들이 해묵은 '블랙리스트'를 꺼내 들며 박해받은 정의의 사도처럼 스스로 포장하면, 보수층은 "저 인간들 보기 싫어 애초에 정권 교체만은 막으려고 했는데…"라고 혀를 찰 것이다. 우리 곁에서 오래 사랑받는 대중연예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본업(本業)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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