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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거리에서 '자기'를 외치는 사회

이강기 2017. 9. 28. 08:24

저마다 거리에서 '자기'를 외치는 사회

  • 마이클 브린 인사이트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조선일보

입력 : 2017.09.28 03:17

서울 한복판의 주말 시위대들 "내 주장은 정의"라 외치지만 '민주주의=국민 통치' 아니야
모두가 데모하는 상황 벗어나 법의 지배 받아들이게 하려면 법, 반드시 정의롭고 공정해야

마이클 브린 인사이트커뮤니케이션즈 대표
마이클 브린 인사이트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최근 수개월간 노동운동가 한 무리가 우리 사무실 근처 건설회사 앞에서 구닥다리 운동가요를 귀청이 떨어지게 틀어놓고 농성 중이다. 소음이 어찌나 심한지, 나는 때로 종로구 직장인 수만명이 왜 아직도 '직장인 해방전선'을 조직해 데모대 스피커 전선을 끊으러 가지 않는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매주 한 번씩 그 소음을 누르는 더 큰 소리도 울려 퍼진다. 수요집회 참가자들이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외치는 구호와 노랫소리다.

토요일에 글 쓰러 사무실에 나올 때가 많은데, 그땐 더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태가 터진 이래 지금까지도 토요일 오후마다 운동가요와 설교의 굉음이 서울 시내를 채우고 있다. 누가 하는 데모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얼마 전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도 크게 한판 벌였다.


이런 데모의 겉모습만 보면 자칫 진짜 의미를 놓치기 쉽다. 농성 중인 노동운동가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서 취직을 하세요. 제 귀 좀 가만 내버려 두세요." 수요집회 참가자들을 지켜볼 때면 한국 젊은이들이 당면한 현실에서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이 국민을 노예 삼아 핵폭탄을 만드는 마당에 한국 청년들은 70년 전 2차 대전 때 일제(日帝)가 저지른 일을 성토 중이다. 끝으로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에겐 이 말을 하고 싶다. "아니에요, 이 모든 게 북한의 음모로 벌어진 건 아니라고요."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 모든 데모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좌파건 우파건 데모대는 같은 말을 외치고 있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 눈에 공평하지 못한 일, 정의롭지 못한 일, 자유를 빼앗는 일, 기업의 횡포,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이라고 비치는 무엇인가를 향해 항의 중이다.

이건 지금 한국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한국인의 덕목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사람들은 효(孝)와 정(情), 웃어른에 대한 공경, 화목, 순종, 상부상조, 가족, 민족, 개인보다 전체를 우위에 놓는 사고방식 같은 항목을 열거할 것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 하지만 그건 한국의 옛 덕목들일 뿐이다.

한국인이 지금도 정말로 민족을 최고 가치로 여긴다면 안성 공단 앞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쫓아내라는 데모가 벌어졌어야 한다. 도포 입은 사람들이 교회와 예식장에 몰려가 국제결혼 하지 말라고 데모했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아직도 옛 가치를 숭상한다면 지금쯤 삼성 하도급업자들에게 "재벌 고마운 줄 알라"고 호통치는 사람마저 나왔을지 모른다. 경찰은 부모님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가고, 거제도 사람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고향에 특혜를 베풀라고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촛불 집회를 벌였을지 모른다.


6월30일 오후 민노총 조합원 2만5000여명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6·30 사회적 총파업 연대' 집회를 마치고 행진하고 있다. 이들이 세종문화회관 쪽 도로를 메운 사이 반대 방향의 차량들은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박상훈 기자
하지만 현대의 한국인이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한국인을 진짜 화나게 하거나 반대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 다시 말해 한국인이 진짜 높게 보는 가치는 앞에 나열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지금 한국인이 원하는 건 정의, 공평, 품위(decency), 존중, 자유, 권리다. 이건 모두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가치다. 집단을 우위에 놓는 가치가 아니라 개인을 우위에 놓는 가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그만큼 한국을 깊이 바꿔놓은 것이다.

다만, 여기서 약한 고리가 사법 시스템이다. 아직도 이토록 데모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거기 있다.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는 힘 있는 사람 앞에 수그리는 해묵은 가치관이 배어 있다. 누구든 죄 없이 검경 조사를 받아본 사람에게 이 사회가 얼마나 불공평하게 움직이느냐고 물어보면 당장 수많은 예를 들려줄 것이다. 이제 검찰은 고문이야 안 할는지 몰라도 그들은 여전히 과도한 권위를 휘두르며 국민을 윽박지른다. 검사들은 공평하게 법리를 따지거나 객관적 증거를 모으기보다 이길 욕심으로 사건에 덤벼든다. 판사들은 왕왕 객관적 증거보다 자기 감정을 앞세워 판결을 내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희생자라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의 주장도 이런 면에선 일리 있을 수 있다. 변덕스러운 국민 감정이 여러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 '국민(the people)이 다스리는 게 민주주의'라는 잘못된 생각이 갈채받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런 게 아니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법에 따라 다스리는 게 민주주의다. 국민 개개인이 투표로 지도자를 바꿀 수는 있지만, 유무죄를 심판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서 그건 법의 몫이다. 법이 반드시 정의롭고 공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도 법의 기능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군중이 계속해서 거리에 나가 저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걸 목청껏 외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7/20170927031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