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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를 거울삼아 바라본 대한민국

이강기 2017. 12. 12. 14:13

[朝鮮칼럼 The Column] 베네수엘라를 거울삼아 바라본 대한민국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

입력 : 2017.12.12 03:17

중남미 석유 富國 베네수엘라, 물가 상승률 800% 부도 위기
원유 수출로 막대한 돈 벌고도 교육·주택 무상 공급 늘리다가
국민 굶주리고 富는 해외 유출… 헛된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탓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중남미의 석유 부국(富國) 베네수엘라가 국가 부도 위기에 몰렸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고,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회 복지 시스템을 운영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지난해에만 물가 상승률이 800%에 이르렀고, 경제 규모는 30% 가까이 축소되었다. 많은 사람이 염치 불고하고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을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다 보니 국민 75%가 평균 9㎏ 가까이 체중이 줄어들어 현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의 이름을 딴 '마두로 다이어트'라는 유행어까지 나왔다. 치안 상태도 형편없어서 연평균 살인율이 10만명당 90명에 달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베네치아'라는 나라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이 나라가 나락에 빠지게 된 계기는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1954~2013)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1999년 집권한 차베스는 남아메리카의 위대한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큰 뜻을 구현한다는 의미로 '볼리바르 혁명'을 추진했다. 볼리바르는 에스파냐 식민 통치에 대항해 오늘날의 베네수엘라·볼리비아·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파나마 6개국의 독립을 이루어낸 '해방자(el Libertador)'였다. 그의 원대한 열망은 단순히 독립을 얻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안으로는 인종 문제를 해결하고, 밖으로는 남아메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합쳐서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라는 하나의 공화국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상적으로는 남아메리카 전체를 국경 없는 연맹, 즉 북아메리카의 미국과 유사한 큰 정치체로 만들겠다는 희망찬 구상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19세기에 미완성으로 끝났던 볼리바르의 꿈을 21세기에 실현하겠다고 나섰다. 그 방향은 사회주의, 포퓰리즘, 권위주의, 반미(反美)주의라 할 수 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지만 대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해 사회 자산을 확대했다. 사회적 차별을 완화하기 위해 교육·주택·의료 부문에서 무상 공급을 대폭 늘렸다. 노동 현장의 직접 참여 민주주의를 활성화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독재 권력 강화로 나아갔다. 미국을 비롯한 적대적인 세력에 대항해 자신의 혁명 구상을 지켜내기 위해 남아메리카 국가 간 동맹을 추진했다. 이런 담대한 계획은 한때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이겨내려는 개혁가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보였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11월 14일(현지시각) 채무 불이행 위기에 놓인 베네수엘라의 국가 신용등급을 '선택적 디폴트'(SD·Selective Default)로 강등했다. 선택적 디폴트는 채무 일부에서 부도가 발생했으나 다른 채권에서는 지속적 상환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며, 상황에 따라 '지급불능'을 뜻하는 D(default)로 강등될 수 있다. 사진은 이날 수도 카라카스에서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줄지어 있는 모습. /AFP 연합뉴스

이 모든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베네수엘라의 자금줄은 하나, 곧 석유 수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는 시기에는 달러가 넘쳐났다. 그런데 유가가 반 토막 나고 생산량도 급감했다. 1998년 하루 생산량 350만배럴이 작년에는 230만배럴로 줄었다. 수입이 대폭 줄어든 데다 미국의 금융 제재까지 겹치니 국가 경제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볼리바르 혁명을 추진한 차베스 대통령 자신은 호방하게 영웅의 길을 걸었을지 몰라도 후계자인 마두로 현 대통령에게는 재앙이 떨어졌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부당한 개입에 모든 책임을 돌리려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이 굶주림에 시달려 목숨이 위태롭게 될 때까지 잘못된 정책을 고집한 정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석유 수출로 얻은 막대한 재원을 무상 복지 사업에 펑펑 쏟아 부으면서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고, 이를 이용해 독재권을 강화하는 방식이 결코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공짜'에 길든 서민은 힘들여 일하려 하지 않고, 부패에 편승해 부를 쌓은 부유층은 돈 싸들고 해외로 빠져나가려 할 뿐이다. 잘못된 정치가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적실한 사례다.

21세기 볼리바르 혁명의 실패 원인은 사실 19세기에 진행된 원본 볼리바르 혁명 내에 이미 배태돼 있었다. 식민 상태에서 독립을 이루어내고 거대한 초(超)국가 연맹을 형성하는 동시에 민주화를 이룬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꿈이다. 그러니 '해방자'는 왕 아닌 왕으로서 독재자의 길을 가게 됐다. 그것이 위대한 영웅 볼리바르의 시대적 한계다. 문제는 구태의연한 19세기의 꿈을 지금 재현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에 빠진 나라를 비판하는 데 급급해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고릿적 이데올로기들이 지금도 우리의 사상과 감수성을 옭아매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불행이 남의 일 같아 보이지 않는 이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11/20171211030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