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채식주의자 英譯본, 완전히 다른 작품 맞아"

이강기 2018. 1. 22. 15:54

"채식주의자 英譯본, 완전히 다른 작품 맞아"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조선일보

입력 : 2018.01.22 03:04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은 없다" 英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 주장에
韓 학자들 "서툰 번역일 뿐" 비판

2016년 맨 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영역본을 둘러싼 오역 논쟁이 증폭되고 있다. 영국인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지난 20일 서울대에서 열린 평창올림픽 국제인문포럼에 참석해 "내가 번역한 '채식주의자'가 한국어 원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어떤 측면에선 전적으로 옳다"며 번역가의 창의성을 주장해 논쟁의 불씨를 키웠다. 지금껏 국내 영문학자와 번역가, 문학비평가들 사이 '채식주의자'의 오역 100여 개가 지적됐고, 원문을 자의적으로 고치고 지나치게 윤문(潤文)한 탓에 '제2의 창작'이란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채식주의자' 오역 논쟁
스미스는 발표문 '우리가 번역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것들'을 통해 "그 어떤 두 언어에서도 문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없으며, 단어 역시 각기 다르고, 심지어 구두점조차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다"며 "문자 그대로 옮긴 번역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창조적(creative)이지 않은 번역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내 번역에 유난히 오역이 많았다는 평균치를 어떻게 측정했는지 모르지만, 독자들에게 읽히고 폭넓게 사랑을 받은 것에는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계간 '문학동네' 봄호에 '채식주의자' 영역(英譯)을 비판하는 평론을 발표할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스미스를 향해 "한마디로 서툰 번역을 변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본지와 전화 통화에서 조 교수는 "번역의 '창의성'은 오히려 번역에서 '창조성'을 말살시킨 자리, 정확한 번역의 자리, 번역의 윤리의 자리를 만들어낸다"며 스미스의 '창조적 번역'론을 반박했다. 지난해 이미 '채식주의자' 영역본과 불역본을 비교해 오역 사례를 짚어낸 조 교수는 "스미스의 번역은 한국어 특성인 주어 생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자주 오역을 했거나, 원작의 인물과 텍스트의 특성을 바꿔버렸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원작에서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딸 부부를 향해 "이제 너희 걱정은 다 잊어버렸다"고 말한 것이 영역본에선 "이제 너희들은 걱정거리를 다 잊게 되었구나(Now you've forgotten all your worries)"로 번역되며 '걱정'의 주체가 바뀐다.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오역도 지적됐다. 원작에서 개를 도살하는 것과 관련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란 문장이 영역본에선 "달리다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러운 형벌로 여겨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He heard somewhere that driving a dog to keep running until the point of death is considered a milder punishment)"라고 번역됐다. 조 교수는 "번역가가 윤문할 수는 있지만, 틀리게 번역하면 안 된다"며 "데버러 스미스의 어깨에 한국 문학 세계화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식으로 찬양하기만 해선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채식주의자' 영역본을 제2의 창작이라고 주장한 정과리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어에 대한 기본 지식을 토대로 해야 창조를 운위할 자격이 있고, 번역가 스스로 '완벽한 번역은 없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한국어 원전을 영국 번역가와 편집자가 마음대로 바꿔버리고 상을 주는 것은 시혜(施惠)의 표정으로 자행하는 야만"이라고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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