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만물상] '문화 권력'의 더러운 욕망

이강기 2018. 2. 20. 07:38


[만물상] '문화 권력'의 더러운 욕망

  • 조선일보

입력 : 2018.02.20 03:16

20년 전쯤 서울 정동극장에서 본 연극 '오구'는 충격적이었다.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굿판을 벌이고 있는데 실제로 노모(老母)가 쓰러져 초상집이 되고 만 소동을 그린 작품이었다. 무속음악과 춤, 전래민요가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만담식 사설과 우스갯소리로 줄거리를 이어 갔다. '문화게릴라' 이윤택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윤택은 이듬해 올린 신작 '느낌, 극락 같은'으로 서울연극제 작품상, 연출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는 극작가 이강백의 철학적 메시지 가득한 이 작품을 불상(佛像) 역 코러스 12명의 절도 있는 연기로 풀어냈다. 배우들의 동작은 일사불란했고 에너지가 넘쳤다. 연습량과 규율이 만만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배우들 연기가 강렬했다. 단원들은 집단합숙까지 하며 연극에 몰두한다고 했다.

▶"그 친구, 요즘은 단원들 안 때리나 몰라?" 그즈음 한 중견 연출가가 넌지시 말했다. 뺨을 맞아 고막이 터진 단원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참이었다. '난닝구' 차림으로 양말을 벗은 채 연습하면서 피곤하면 단원에게 '안마'를 시킨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땐 그저 군기(軍紀)가 세긴 센 극단인가보다 했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연출가 이윤택이 어제 "제 죄에 대해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사과했다. 그는 "단원들이 항의할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더러운 욕망을 억제 못 해 생긴 일"이라고 했다. 이윤택이 이끌어온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이날 "오늘부로 극단을 해체한다"고 밝혔다. 서른넷 이윤택이 '서구 일변도 모더니즘극 지양' '전통문화의 재창조'를 내걸고 1986년 부산에서 만든 연희단거리패는 이날로 문을 닫았다.

▶원로 시인에 뒤이은 유명 연출가의 성추행 파문으로 예술계 안팎이 뒤숭숭하다. 이윤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 여러 여성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점에서 '미투'(Me too)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 드 영화제작자 와인스틴의 경우에 가장 근접하다. 성추행을 목격한 단원들이 많았지만 "최고의 연극 집단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 모른 체하며 지냈다"는 피해자 폭로는 음습한 '문화 권력'의 악마성을 짐작하게 한다. 몹쓸 짓을 당하며 "무섭고 떨려 온몸이 굳었다"면서도 보복이나 불이익이 두려워 입을 못 연 사람들이 이 경우뿐일까.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9/20180219028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