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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유적터의 한쪽 편에는 아르젠티나 극장이 있다. 이 극장은 오페라 공연을 위해 1732년 1월 31년에 문을 열었으니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극장은 폼페이우스 극장에 속해 있던 회랑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바로 그 회랑에서 암살당했다. 한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어식 발음은 ‘줄리어스 시저’. 고대로마 역사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후세의 통치자들이 가장 흠모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의 카이저(Kaiser)나 러시아어의 차르(Tsar)는 다름 아닌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명의 날, 기원전 4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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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신전 돌무더기 위에 놓인 꽃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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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다음 날인 3월 16일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주축으로 하는 암살 주모자들은 정적을 깨고 로마 시민들이 모여 있는 포로 로마노의 광장에 나섰다. 그들은 공화정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에 호응하는 소리는 어느 곳에도 들리지 않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카이사르파는 일단 신중하게 사태를 지켜봤다. 이때 키케로가 양측을 만족시킬 만한 절묘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즉, 원로원은 암살범들을 사면해주는 대신에 카이사르의 정책을 고수하며,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국장(國葬)을 치르고 카이사르를 신격화한다는 것이었다.
3월 20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신은 로마 시민들이 운집한 포로 로마노로 운반되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졌다.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묵묵한 군중을 향해 비통한 감정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기록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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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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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신이 올려진 장작더미는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곧 불길에 휩싸였다. 하늘로 피어오르던 연기는 봄꽃 향기 스민 로마의 언덕을 뒤덮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렇게 연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가버렸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무인이었으며, 언변이 좋고 탁월한 문장가였고, 다방면에 걸쳐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결단과 행동이 확실하고 신속했으며, 적에게는 무자비하면서도 때로는 과감하게 관용을 베풀 줄 알았으며 개방적이었던, 그야말로 로마인의 표본이었다. 한편 암살자들은 그의 호의를 받고 있던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맹목적으로 신봉한 나머지 그에게 비수를 꽂았던 것일까? 또 당시 로마가 더는 도시국가가 아니라 이탈리아와 여러 속주의 모든 계층을 책임져야 하는 거대한 열린 제국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은 외면했던 것일까? 한편 공화정 체제하에서는 왕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생전에 자신은 왕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조카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이어받도록 했으니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에 벅찬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체제를 완전히 개혁할 의도는 분명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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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