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32> 김동진(1913~2009)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부친은 김일성 비판한 죄로 옥사
그는 6·25사변이 터진 후 겨울에 뒤늦게 월남했다고 빨갱이라고 온갖 모략당해
'목련화'의 고독한 작곡가는 말년에 베토벤처럼 귀가 안들려 무척 고생했다
해방이 되던 해 가을, 나는 시골의 한 국민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어려서부터 다니던 장대현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일요일 예배 시간에 돌연 일본 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나타나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는 서북 장로교회들의 등대로 채필근·김관식을 비롯해 당대 가장 저명한 목사들이 시무하는 교회였다. 당시 담임목사가 김화식이었고 성가대를 지휘하던 청년 지휘자가 담임목사의 아들로 그 이름이 김동진이라고 했다.
해방 직후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옷은 일본 군복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김동진이 만주국에 신설된 신경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있었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그런 특이한 인연을 가진 우리 두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만날 일이 전혀 없다가 명지재단이 '기영회'라는 지식인들의 클럽을 만들어 장안의 유명 인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점심을 같이할 기회를 마련했다. 거기서 나는 90이 넘은 노인 음악가 김동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나도 노인이 되어 그런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김동진은 1913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서양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가 시무하던 교회의 풍금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와 화성학도 익혀 작곡도 할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 학도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던 그는 숭실학교 밴드부에 들어가 다른 악기들도 연주할 수 있는 소년 음악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동진은 중학생 시절에 김동환이 쓴 시 '봄이 오면'에 곡을 붙여 장차 작곡가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으며,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 2학년 때 이은상 작시의 '가고파'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이렇게 시작하는 '가고파'는 여러 해 뒤에야 완성되지만, 그 가곡이 한국인 모두의 애창곡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나도 그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은 마산에 갈 일이 있어 그 파란 물을 바라보며 노래를 혼잣소리 높여 불러 본 적이 있다.
숭실전문을 졸업한 김동진은 동경에 있는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38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장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만주국으로 갔고 그곳에 새로 생긴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또는 작곡 담당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고 그의 아버지 김화식은 장대현의 강단을 지키면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니 독재자의 부하들이 그를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 그의 아버지는 구속되어 감방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아들이 감히 인민공화국을 배반하고 떠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6·25사변이 터지고 그 이상 버틸 수 없어서 김동진은 그해 겨울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시인 김동명은 김동진이 소학교 시절의 은사였다는 말이 있다. 김동진이 만주에서 일하던 1938년 은사의 시 2편에 곡을 붙여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수선화'이고 또 하나는 '내 마음'이다.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김동명의 '내 마음'은 오늘도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적신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진은 그 겨울에 뒤늦게 월남하였기 때문에 음악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육군정훈감실에서 '6·25의 노래'를 모집한 적이 있는데 김동진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가 작곡한 군가는 이북의 군가와 비슷하다느니 소련 군가를 닮았다느니 더 나아가 김동진은 빨갱이라느니 하는 온갖 중상모략을 참아야 했다. 가뜩이나 칼칼한 성격의 그가 사람을 멀리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공산 독재를 비판하다 옥사한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데 뜻밖의 시련이 그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던 것이다. 그러나 경희대 총장 조영식이 1963년 경희대 음대에 자리를 마련하고 정교수로 그를 초빙했을 뿐만 아니라 음대학장 자리에 임명했다. 그는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 학교에서 지독한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들었다. 학생들은 그를 따르고 존경했지만 그는 언제나 고독한 인간이었다. 경희대 창립 25주년에 조영식이 가사를 쓰고 김동진이 곡을 붙인 '목련화'는 엄정행이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고 또 불러 일종의 국민 가곡으로 승격하였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도 말년에는 베토벤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무척 고생하였다.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아마도 '가고파'의 멜로디를 혼자 읊조리며 하늘나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의 나이 백세가 가까웠다. 김일성의 횡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아버지를 거기서 틀림없이 만났을 것이다. 인생이란 괴롭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해방 직후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옷은 일본 군복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김동진이 만주국에 신설된 신경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있었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그런 특이한 인연을 가진 우리 두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만날 일이 전혀 없다가 명지재단이 '기영회'라는 지식인들의 클럽을 만들어 장안의 유명 인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점심을 같이할 기회를 마련했다. 거기서 나는 90이 넘은 노인 음악가 김동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나도 노인이 되어 그런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김동진은 1913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서양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가 시무하던 교회의 풍금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와 화성학도 익혀 작곡도 할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 학도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던 그는 숭실학교 밴드부에 들어가 다른 악기들도 연주할 수 있는 소년 음악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동진은 중학생 시절에 김동환이 쓴 시 '봄이 오면'에 곡을 붙여 장차 작곡가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으며,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 2학년 때 이은상 작시의 '가고파'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이렇게 시작하는 '가고파'는 여러 해 뒤에야 완성되지만, 그 가곡이 한국인 모두의 애창곡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나도 그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은 마산에 갈 일이 있어 그 파란 물을 바라보며 노래를 혼잣소리 높여 불러 본 적이 있다.
숭실전문을 졸업한 김동진은 동경에 있는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38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장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만주국으로 갔고 그곳에 새로 생긴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또는 작곡 담당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고 그의 아버지 김화식은 장대현의 강단을 지키면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니 독재자의 부하들이 그를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 그의 아버지는 구속되어 감방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아들이 감히 인민공화국을 배반하고 떠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6·25사변이 터지고 그 이상 버틸 수 없어서 김동진은 그해 겨울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시인 김동명은 김동진이 소학교 시절의 은사였다는 말이 있다. 김동진이 만주에서 일하던 1938년 은사의 시 2편에 곡을 붙여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수선화'이고 또 하나는 '내 마음'이다.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김동명의 '내 마음'은 오늘도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적신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진은 그 겨울에 뒤늦게 월남하였기 때문에 음악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육군정훈감실에서 '6·25의 노래'를 모집한 적이 있는데 김동진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가 작곡한 군가는 이북의 군가와 비슷하다느니 소련 군가를 닮았다느니 더 나아가 김동진은 빨갱이라느니 하는 온갖 중상모략을 참아야 했다. 가뜩이나 칼칼한 성격의 그가 사람을 멀리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공산 독재를 비판하다 옥사한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데 뜻밖의 시련이 그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던 것이다. 그러나 경희대 총장 조영식이 1963년 경희대 음대에 자리를 마련하고 정교수로 그를 초빙했을 뿐만 아니라 음대학장 자리에 임명했다. 그는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 학교에서 지독한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들었다. 학생들은 그를 따르고 존경했지만 그는 언제나 고독한 인간이었다. 경희대 창립 25주년에 조영식이 가사를 쓰고 김동진이 곡을 붙인 '목련화'는 엄정행이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고 또 불러 일종의 국민 가곡으로 승격하였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도 말년에는 베토벤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무척 고생하였다.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아마도 '가고파'의 멜로디를 혼자 읊조리며 하늘나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의 나이 백세가 가까웠다. 김일성의 횡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아버지를 거기서 틀림없이 만났을 것이다. 인생이란 괴롭지만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