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版, 冊, 讀書

로마노프 미스터리와 러시아 혁명(책 전문)

이강기 2018. 10. 21. 18:25

로마노프 미스터리와 러시아 혁명

  (1997년에 번역된 책 전문)


-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메어리 엘렌 ‘테디’ 베어드 에반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 클라우드 포울린, 헤어 및 파리스

 에게 이 책을 바친다 -

 

감사의 글

 

이 책을 내는 데 꼭 필요했던 분들에게 드리는 나의 제일 첫 번째 감사에는 깊은 슬픔이 베어 있다. 이 책을 위해 조사연구하고 집필하는 기간에, 당초 나를 이 길로 들어서게 고집을 피우셨던 나의 어머니 테디 에반스를 잃었다. 그 후 곧 잇따라 나의 최초의 두 독자를 잃었다. 북부 러시아 연구의 권위자였던 죤 롱 박사가 암과 씩씩한 투쟁을 벌이다 돌아갔고, 그 다음으로, 나의 또 다른 독자이며 고명한 조각가인 프레데릭 하트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하트의 작품 “오뎃사의 딸들”에 나오는 짜르 딸들의 초상은 워싱턴의 베트남 기념관에 있는 그의 탁월한 조각품에 버금가는 것이다. 리크(프레데릭의 애칭)는 러시아 역사와 문화의 열렬한 애호가였으며 로마노프에 관련된 그림과 사진을 지칠 줄 모르고 모으는 수집가였다. 20세기에 가장 널리 존경받았던 러시아 역사학자들 중 한 사람인 브루스 링컨 박사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에 내게 전화로 전해 준 리크의 죽음은 곧 더욱 기막히는 소식으로 이어졌다. 역시 암과 투병하고 있었던 링컨 박사 자신이 그로부터 채 몇 달도 안돼 그 투쟁에 지고 만 것이다. 나는 이 때를 나의 가장 참담했던 시절로 떠 올린다. 농장에 있는 나의 서재에 아침이 오면, 한 잔의 커피를 들고, 서재를 압도하고 있는 각종 서류들과 나를 손짓해 부르는 텅 빈 컴퓨터 스크린을 바라보며 나는 이 쓸쓸한 여정에서 그들의 의견과 격려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그들의 기여는 나에게 도무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다호대학의 역사학과 과장이며 시드니 레일리 연구 권위자인 리챠드 스펜스가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왔고 그리고 그를 통해 재미있는 학자인 쥴리안 푸트코프스키를 알게 되었다. 푸트코프스키는 그의 라디오 및 텔레비전 논평을 통해 무수한 역사적 인물들을 우리 생활 속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이들 두 사람은 나의 공허감을 채워주고 나를 격려해줬다.

 

나는 또한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 주었던 랜덤 하우스의 케이트 파아킨과, 그리고 나와 나의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봐주었던 나의 편집인인 랜덤 하우스의 안나 델턴 놋트에게는 그들의 신념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 외 마이클 모리슨, 리사 벨트, 헨리 페리스와, 그리고 윌리엄 모로우의 클레어 왓첼에게 특별히 감사 드린다. 또한 내가 맡겼던 원고를 유능하고 솜씨 있게 다듬어 준 나의 편집자인 다이아나 질에게 각별히 감사를 전한다. 이 책에서 다룬 주제에 대한 그녀의 관용과 흥미를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처음에 저자는, 책을 출판하는 것과 같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덤불 속의 지름길을 찾는 일에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 매우 친절하고 싹싹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책을 케이트와 안나의 손에 쥐어 주도록 도와준 팀 - 게일 로스, 레슬리 브리드, 애브너 스타인, 메어리 브루톤, 나타샤 호프, 그리고 젠나 랜드 - 도 있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작업을 중지하기를 원했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의 인내와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역사가들, 연구자들, 그리고 이 책에서 거론한 일부 남녀 등장인물들의 가족들 모두가 협조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점에 대해 아주 특별히 감사한다. 그들 각자는 나의 전화문의를 받아주었고 내가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을 들어주었고, 어떤 경우엔 그들의 가정에 초대하여 환대해 주기까지 했다. 다음 분들에게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K.T.엔더스(내 원고를 최종적으로 교정해 주고 때로는 편집도 거들어 주었다), 봅 애트킨슨, 맨프레드 O. 비트카우, 죤 베스코비-챔버스, 티모시 보엣져, 스티븐 브루스, 윌리엄 클라크, 토마스 앤드 조 코빈, 토마스 크레인(차알스 크레인의 손자), 실비어 크레인(차알스 크레인의 며느리),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의 바크메테프 문서, 회귀본 및 필사본 도서관, 샘 다니엘, 조세핀 F. 데 기브(차알스 크레인의 증손녀), 닥터 마르시아 아이젠버그, 바바라 핀레이슨, (윌리엄 루틀리지 멕게리의 손녀), 브루스 C. 피셔(차알스 크레인의 손녀), 닥터 데이비드 포글송, 마이크 길리, 닥터 데이비드 헤스킨와 그레첸 헤스킨(헨리 헤스킨의 아들 및 며느리), 케더린 홀트(콜트제조회사), 톳드 후프만, 바바라 켈시, 올가 쿨리코프스키-로마노프(니콜라스 2세 여동생인 올가 대공녀의 아들인 티혼 쿨리코프스키의 미망인), 피터 N. 콜티핀-발로브스코이(러시아 해외 전문위원회의 위원), 피터 쿠르스, 레장 라프레이드, 토마스 만(미국 국회도서관의), 고 차알스 맥러로이, 앤 몰톤(허드슨 베이사 기록 보관소의), 퇴역 판사인 마크 맥게리 2세(윌리엄 루틀리지 맥게리의 손자), 로버트 모세인, 그레그 머피, 도티 네치, 로저 닉슨, 마이클과 엘리자베스 오클쇼우, 닥터 마가렛 피쳐, 닥터 리챠드 파이프스, 닥터 제인 플록크, 에드와 크리스틴 누트(블릿저), 닥터 윌리엄 쉴드스, 아나톨 스멜레프(후버 전쟁, 혁명 및 평화 연구소의), 월레스 스탈링 내외, 닥터 마크 스타인버그, 앤소니와 로빈 섬머스, 프란과 필 토마셀리, 사브리나 토마스(의회 도서관의), 닥터 아이드리스 트레일러, 엘레나 츠벳코바(블릿저), 로버트 워렌, 도우그 위크룬트(국립총기협회의), 타데우스즈 자로신스키, 닥터 디노 자로신스키 및 카롤리나 데 마레윌(카롤 야로신스키의 종손녀).

 

나의 아버지 잭 에반스와 돌아가신 어머니 테디, 그리고 나의 조부모이신 헐 에반스, 윌리엄 앤드 레베카 파리스 베어드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이 분들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지적 호기심을 끝없이 키워주셨고 성별과 인종을 차별하지 않게 해 주셨다. 나와 나의 노력을 이해해주었던 나의 딸 헤더 살롯테와 사위 진 및 손자 콜 살롯테, 또한 나의 딸 파리스 스미스에게 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보낸다.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은 동료 작가들인 나의 누이 테리 에반스와 나의 매제인 리 리슬리, 그리고 나의 동생인 프라이드 에반스와 나의 제수인 크리스티 에반스에게 감사한다. 훌륭한 교육자이며, 몬트리올 역사박물관, 샤토우 람제이의 퇴역 관장인 자크스 포울린과 그의 아내 마들렌느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고맙게도 그들의 특별한 아들인 클라우드가 진실을 추구하려는 나의 시도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용인해 줬다.

 

케시 볼드윈, 안나 디이스, 앙드레 포르넬, 케니 길버트, 린디 하트, 댄 제이콥스, 마크 랄루미에, 루스 앤 멕게히, 짐 멕도널드, 카렌 멕니유, 케시 밋저, 레디 안젤라 뉴버그, 뮤리엘과 페기 오캘러한, 마리, 미셀린과 크리스챤느 폴린, 루크 쁘레보, 스티브, 한나와 에밀리 맥마한, 다우그 피퍼, 알라 리비, 바바라 로빈슨, 버트 로우프턴과 멜린다 데니스 로우턴, 죤 스코트, 페기 샥케, 데이비드 테이트, 크레이그 윌리엄스 등 제씨에게 감사한다. 이분들은 모두 자료수집조사로부터 타이핑, 편집 혹은 아주 적절한 시기의 단순한 격려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법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워싱턴에 있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및 의회도서관, 영국 리치몬드의 공공기록보관소, 런던의 브리티시 도서관, 파리의 샤토우 데 빈센느, 국립도서관, 국립문서보관소, 독일 베를린 국립도서관, 그리고 미국, 캐나다, 영국, 유럽대륙의 무수한 대학의 직원들과 간부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날짜에 대한 주의

 

신식달력이 이미 유럽대륙과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러시아는 1918년까지 구식달력을 사용했는데, 1918년엔 13일간 차이가 났다(즉 신식 달력 2월1일이 구식달력에선 2월 14일이 되었다). 이 책에선 날짜가 원 출처에서 나타나거나 인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로 신식달력 날짜로 계산했다.

 

목차

 

제1부 세계대전의 그늘 속에서

 

서론 역사적 수수께끼

제1장 서막

제2장 이해관계에 얽힌 당사자들

제3장 비밀의 손

제4장 비밀의 손이 움직이다

제5장 사태의 외관

 

제2부 정보원들의 활약

 

제6장 토볼스크

제7장 새로운 배역의 인물들

제8장 볼셰비키들의 금품 강요

 

제3부 짜르 일가는 정말 죽었는가?

 

제9장 짜르 처형 발표

제10장 첫 조사

제11장 죽음의 사자들

제12장 유로브스키의 수정보고

제13장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짜르와 그 가족

 

제4부 진실을 찾아서

 

제14장 샌프란시스코 1920

제15장 정치, 음모 및 그 기원

제16장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에필로그

부록

인물소개

 


제1부 세계대전의 그늘 속에서

 

서론

 

역사적 수수께기

 

러시아혁명의 모든 희생자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분명 가장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 온 사람들은 짜르 니콜라스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및 그들의 다섯 자녀들일 것이다. 1918년 7월17일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그들의 죽음은 그간 몇 차례의 조사와 수많은 책들의 주제가 되어왔다. 비록 볼셰비키 처형대가 그들을 사살했다는 표준적인 설명이 아예 처음부터 의심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것이 반증된 적은 전혀 없다.

 

그들의 운명에 관한 모순되고 혼란스런 소문은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순간부터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 이후에 심지어 그들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여럿 나왔다. 그들의 실종에 대해 나돌고 있는 무수한 설(說)들은 대중소비용으로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이었다.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확인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내려졌지만, 아직도 그들의 최후의 날들에 대한 미스테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법정증거와 그리고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해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초기 원자료의 도움으로, 1918년 7월16/17일 밤에 벌어진 사건 자체는 물론, 그날 밤에 이르기까지의 몇 달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그것이 그렇게 묘사된 대로 간단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여러 나라의 수많은 문서보관소에서 5년 내내 걸린 연구 끝에, 그리고 수백 권의 책을 섭렵하고, 종전에는 전혀 서로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증거가 드러난, 알려지지 않고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다량의 서류들을 분석한 후에야 비로소 로마노프 황실의 최후의 날들에 대한 공식적인 스토리와는 크게 다른 모자이크 그림이 나타난 것이다. 1917년 2월혁명 후 짜르와 그 가족들을 러시아로부터 탈출시키려는 계획이 적어도 세 차례 내지 아마도 네 차례 정도 있었다는 것은, 모순을 내포한 것으로 보이는 전통적인 역사였을 뿐 아니라 공통점이 없는 소스로부터 주워 모은 사실들의 편집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 역시 분명해졌다. 연합국들은 최고위층간의 협조아래 로마노프 일가를 볼셰비키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내기 위해 심지어 볼셰비키와 공모까지 해가면서 비밀작업을 추진했다. 그들은 모두 세심하게 신중을 기했으며, 그리고 너무 신중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일부 활동흔적과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는 접촉들이 행방불명인 서류와 추적할 수 없는 이름들과 함께 연구자들을 애먹게 하고 미로 속을 헤매게 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사건들에 관해 역사가 우리에게 말한 것이 실제 이야기와는 크게 거리가 있으며, 그런 역사를 쓴 일부 “저자들”이 지금까지 어떤 배후와 뜻밖의 동기들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하나의 극히 중요한 부분의 증거, 즉 소위 말하는 “로마노프” 유골의 DNA검사에 대한 검토와 논박이 필요할 것 같다.

 

공식적으로 러시아 황실가족의 최후와 관련된 모든 억측들이 1995년 8월31일에 갑작스레 정지돼야 했다. 이날, 일단의 러시아 및 미국 과학자들이 짜르의 동생인 게오르그(니콜라스 미하일로비치)대공과, 그리고 짜르의 것으로 추정된 유골 표본에 대한 실험결과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발표를 한 것이다. 1991년 우랄산맥 산중에 있는 에카테린부르그(예카테린부르그 혹은 예까쩨린부르그로 표기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원문대로 에카테린부르그로 통일한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의 소련시대에는 스베르들로프스크로 불렸다. - 옮긴이) 근교에서 발굴된 유골을 짜르 니콜라스 2세, 황후 알렉산드라 및 그들의 세 딸들의 것으로 확인했다. “거의 1세기 가까이 끌어온 중요한 살인 미스테리가 풀리고 있다.”고 미국군사DNA감정실험실(AFDIL) 실장인 빅토르 W. 위든 중령은 말했다. 그는 러시아 DNA 전문가인 파벨 이바노프와 공동으로 그 조사를 지휘했다. 로마노프의 유골이라는 “명확한” 확인 발표에 따라, 러시아정부위원회 관리들은 이제 러시아 황실가족에 대한 억측은 공식적으로 마감됐다는 뜻을 은연중 비치면서 즉시 황실가족의 장례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 부수적인 사항들로 인해, 동 위원회의 조사결과 및 장례와 관련된 그들의 활동이 그렇게 명쾌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 증거라는 것이 서방의 우리들이 믿을 수 있을 만큼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일련의 과학자들, 해외 백계 러시아인 공동체 구성원들1), 러시아와 미국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신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논란은 러시아 내에서도 계속 커져, 당초 정부가 계획한 장엄한 규모의 장례식이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 크게 축소되어 치러지게 되었다. 마침내 1998년 7월 17일이 장례일로 정해졌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처음에 그 장례식에 참석치 않겠다고 발표했다가 하루 전에 태도를 바꿨다. 운명의 밤의 80주년이 되는 날, 페트로그라드에서 규모가 크게 축소된 장례식2)이 일곱 로마노프 가족들 중 다섯 사람과 그들의 종자(從者)들 중 네 사람의 유해인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상자를 마침내 편안한 안식처로 모시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석연해 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파트리크 알렉세이 2세는, 러시아 정부가 교회지도자들에게 그 유해를 진짜인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집요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장례식을 집전하게 될 신부에게 그 다섯 “로마노프의 유해”를 로마노프의 유해가 아닌 “기독교인 혁명희생자들”의 유해라고 생각하고 의식을 행하라고 지시했다. 장례식을 집전했던 보리스 글레보프 신부는 장례식이 있기 바로 수일 전에 “사실은 내가 누구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논평한 것으로 보도됐다.3) 러시아 정부가 최종분석 결과를 가지고 교회지도자들에게 그 유해를 인정하도록 요구한 압력이 실패한 것이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부는 로마노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가급적 자제했다. 하지만 신부의 이러한 태도가, 징례식에 참석한 세계 각처에서 온 신문기자들이 식전에서 9명의 “희생자들” 중 5명을 로마노프의 유해로 호명했노라고 보도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글레보프 신부는 로마노프라는 말을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고 오늘까지도 교회의 자세는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베드로 및 성 바울 성당에서 치러진 그 장례식이 러시아 정부와 언론에 의해 세상에 전달된 의미는, 러시아와 세계가 소련시대 역사의 한 더러운 장(章), 즉 로마노프 일가가 1918년 7월17일 시베리아 쪽 우랄산맥 속의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볼셰비키 처형대의 손에 학살된 사건을 마침내 종결시켰다는 점이다. 뚜껑을 닫아버린 것이다.

 

흥미롭게도, 처음에 그 유골을 찾아낸 방법, 묘지의 불명확성, 로마노프의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 이유 등에 대한 얘기가 기자회견석상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기사로도 실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DNA 분석을 통해 증명했노라고 강조한 발표가 일부 극히 중대한 사실을 흐리게 한 것이다.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복잡한 DNA 연결고리 한 점에서만 아주 빈약하게 일치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판별한다면 예컨대 로마노프 일가와 친척간인 영국 필립공의 DNA 표본을 검사해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런 빈약한 DNA 검사 결과가 언론에는 완전 일치된 것으로 전달되었으며, 특히 서방 언론들을 설득하여 이 장기간 끌어온 미스테리에 종지부를 찍도록 했다. 1993년에 그리고 다시 1995년에 행했던 DNA 실험의 정당성에 대한 언론과 세계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비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은 몇몇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그 과학적 결론에 회의를 나타낸 바 있다. 모스크바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레프 지보토브스키 박사와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이 불만스런 목소리를 냈다. 주로, DNA 검사를 한 그 유골들이 실질적으로 7명의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 중 5명이 틀림없었는가, 아니면 그 유골들이 단순히 어느 이름 없는 혁명희생자들의 것이었는가에 대해서였다.

 

전체적인 논란에서의 핵심적인 논점은 FSS(필립공의 DNA 검사를 했던 영국 내무부의 법률과학국)와 AFDIL 둘 다 러시아해외전문가위원회(RECA) 위원들에게 전체 DNA 파일을 공개하기를 거절했다는 점이다. 감시위원회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온 RECA로선 그것이 공개돼야만 누구나 독자적으로 대조해 볼 수 있게 되고 그리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주체에 의해 법적 절차상 전혀 하자 없이 발견한 것이라는 점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4)

일반적으로 수용 가능한 절차를 거친 DNA 검사라는 점을 인정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는지 래브 코퍼레이션 오프 아메리카(Lab Corporation of America)의 마르시아 아이젠버그 박사에게 물어 보았다.5) 그는 각 DNA 파일은 사례 번호가 주어지며 팀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 사례의 일생 내내 그 파일에 계속 주석을 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례 파일들과 그 후의 연구결과가 자세한 재조사 내지 필요시 법적 도전에 직면해도 능히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기본 프로토콜이다.

 

공평하게 말해 FSS도 AFDIL도 기본적인 과학 프로토콜을 면제받을 만큼 명성을 얻은 기관들은 아니었지만, 이들 기관들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점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 경우엔 이들 실험실들이 그들의 기록들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계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약 DNA 검사에서 아주 분명히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면, 왜 위원회가 RECA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거절은 어떤 합법적인 법적 처리에 있어서 모든 당사자들에게 접근을 허용해야할 발견과정의 공개 거부인 것이다. 아무튼 로마노프 사건은 추측컨대 여러 사람들을 한꺼번에 살해한 케이스였으며, 따라서 이 문제는 가장 엄격한 기율을 가진 형사법정에서 다뤘어야 했다.

 

미국 연방법원과 대부분의 주 법원에서 DNA 증거는 검사 절차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확실하고 관련 학계가 일반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수석판사가 판결할 때만이 용인된다. 관련학계가 로마노프 유골이라는 검사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당했던 것을 감안하면, 재판에 회부라도 됐다면, 틀림없이 판사가 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법원 밖으로 집어던졌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노프 유해의 경우 이 기본 특징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작업노트가 RECA에 아직 제출되지 않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러시아정부위원회 사람들과는 다른 분석결과를 내놓을지도 모르는 다른 과학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 과학자들의 발견 및 평가절차에 대한 작업노트를 의도적으로 RECA와 공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법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 둘 다를 거의 틀림없이 훼손하고 있다. 현재로선 11명의 “기독교인 혁명 희생자”의 유골이라는 분명한 평결이 내려지기는 요원한 것 같다. 이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우리는 사법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결국 진실이 승리를 보여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표본 때문에, 즉 일련의 보관 표본만으로 진짜를 증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입증이 불가능해질 지도 모르며, 아마도 전혀 법정의 문제가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른 문제는, 여러 언론들이 수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현재로선 DNA 증거만으로는 개개인을 확인하는 독점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예측 가능한 미래에도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개인마다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실제 지문과는 달리 DNA 단면은 그것이 전체 DNA “기호”의 하찮은 일부 파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사람의 지문 중 극히 일부를 가지고 그 사람을 확인하려는 것과 대체로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DNA 전문가들은 “핑거프린팅(fingerprinting)”이라는 말의 사용을 피하고 그 대신 DNA 타이핑(typing) 혹은 DNA 프로파일(profile)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실험결과 나오는 것은 글자그대로 DNA의 단면이며 그것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타입의 변이에 대한 분석이다. 그 변이가 어떤 특정한 주민들 내에서 유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계적 분석으로 신원확인에 대한 확률을 추정해 내려는 것이며, 단지 이 확률계산에 의해 DNA를 법정에서 증거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6) (DNA 부록 참조)

 

에카테린부르그의 로마노프 유해에 대한 처리방법과 DNA 검사를 검토하고 분석하기 위해 나는 시라큐스에 있는 뉴욕주립대학의 윌리엄 쉴드스 박사와 상의했다.7) 유명한 유전학 전문가인 그는 법정에서 이용되는 DNA 분석을 연구하고 미토콘드리아 DNA(mtDNA)의 법정 이용에 대해 많은 경험을 갖고 있으며 ‘포로/행방불명 병사 국민가족결연(National Alliance of Families of POWs and MIAs)’ 단체의 공식 컨설턴트이다. 쉴드스 박사는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적 윤곽에 대한 견해가 꼭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특히 로마노프 유해라고들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쉴드스 박사는 증명된 mtDNA가 필립공의 그것과 일치됐다는 것은 알렉산드라 황후와 그녀의 자녀들을 확인하는 증거로서는 채택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설사 mtDNA 배열이 필립공의 그것과 일치한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이 그의 친척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혈연이 아닌 개인들 간에도 그들의 mtDNA 배열이 일치할 수 있고 그리고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필립공의 DNA 배열이 일반 주민들과 일치하는 빈도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미토콘드리아 배열이 그의 것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인 확인 조건에 얼마만한 무게를 가지는 것인지 측정할 수 있기 이전에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8)

 

전반적인 법정분석 구성에서, DNA는 법정토론 구조에 필요한 하나의 요소로 - 하나의 부득이한 요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요소로 - 고려되어야 한다. 피고측 변호인들은 DNA 증거에 관해 용의주도하다. 배심원들은 범죄현장에서의 개개의 DNA가 범인을 확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불행히도 DNA 증거에 주어지는 대항할 수 없는 무게 때문에, 법정에서의 모든 다른 전통적인 증거 수단들이 사실상 밀려났다. 이런 변천의 형태는 DNA증거의 도입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만약 현장의 온전한 보관과 가정된 범인의 행방, 동기 등에 대한 다른 증거들이 없으면 그러했다. 단지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범행현장에 버린 사람이라도 쉽게 범죄의 누명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로마노프 유골검사에서 DNA 표본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은 이러한 한계들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다른 확실한 조사 및 법률이 요구하는 노력요인들 또한 옆으로 밀려났던 것 같다.

 

DNA라는 유리한 쪽에 편승하기 전에, 우리가 “로마노프” 유골의 표본이 사실상 표면화시킨 아주 이상한 방법을 정말로 재검토했어야한다고 쉴드스 박사는 지적했다. 사실은, 로마노프 유골의 수집을 둘러싸고 있는 전반적인 상황이 이상해 보이며 그리고 그 후 그들의 DNA 분석이 추가실험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 유골을 발견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1979년 5월30일 이른 아침에9), 그들은 어떤 한 문서가 지시하고 있는 곳에 가서 문제의 유골을 파냈다. 그 문서란 이른바 1918년 7월의 그날 밤의 그 악명 높은 처형대 지휘자였던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로브스키, 미스테리 작가이며 영화제작자인 겔리 리아보프, 그리고 지질학자인 알렉산더 아브도닌에 의해 쓰여졌다고 알려진 것을 말한다. 이들 두 사람은 그들의 아내와 두 사람의 친구들을 대동하고 전에 아브도닌과 그의 동료 지질학자인 미하일 카츄로프가 발견했던 무덤장소로 이동했다(미하일 카츄로프는 이 도굴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물에 빠져 죽었다).10) 당시 아브도닌과 카츄로프 일당은 문제의 무덤을 파 해쳐 일부 유골들을 조사한 후 그 중에서 3개의 두개골을 훔치고는 그 무덤을 도로 덮고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 왔다. 왜 그들이 두개골들을 훔쳤는지는 미스테리다. 그 때는 아직도 소련이 글라스노스트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고 일반 시민들에 의한 비밀행위가 심지어 반역으로 간주될 정도로 극히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공포가 그들의 부단한 동료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80년 여름이 되어서야 그들이 한 행동이 상당히 중대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무덤을 다시 열어 그 두개골을 도로 제자리에 묻었다. 그들이 중대한 발견을 했노라고 공개하기 거의 10년 전 일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발견지역이 오래 전에 일련의 조사자들에 의해 샅샅이 수색됐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논리적인 것처럼 들린다. 옛날의 그 조사자들은 그 무덤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히 매우 운이 나빴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1918년과 1919년에 수색을 지휘했던 이들 조사자들은 9개월이 넘는 상당한 기간과 자금을 소비했는데도 겨우 소량의 불에 탄 보석, 콜세트 지지대(支持臺), 동물 뼈와 손가락 모양의 조그만 살 조각 및 틀니 하나밖에 건지지 못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뜻밖의 인골 발견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앞서 말한 두 사람의 발견 타이밍이 다음과 같은 상황과 비교 검토할 때 특히 흥미롭다. 그 당시 서구에서 로마노프 일가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고 그에 관한 일련의 책들이 발간되었다. 1970년에 나온 죤 오코너의 소콜로프 조사(The Sokolov Investigation)는 황실가족의 죽음에 대해 널리 전해져오는 얘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광범위하게 검토한 일련의 책들 중 맨 첫 번째 것이었다. 직업이 변호사였던 오코너는, 1919년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백계(白系) 반볼셰비키 장교들에 의해 임명된 최후의 정식 조사관이었던 니콜라스 소콜로프가 작성한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에 대한 보고서(소콜로프 보고서)의 일부를 번역했다. 오코너의 책은 소콜로프가 그의 보고서에 포함시켰던 증거에 대해 상세한 법적 분석은 물론 많은 볼셰비키 증인들의 포괄적인 설명들을 추가했다. 오코너의 꼼꼼한 분석은 황실가족의 시체가 불에 태워졌다는 이론을 포함하여 소콜로프의 여러 결론들에 대한 모순점 내지 불합리한 점들을 밝혀냈다. 오코너는, 황실가족 혹은 적어도 황후와 공주들은 1918년 7월17일 밤 이전에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멀지 않은 페름으로 비밀리에 옮겨졌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했다.

 

1970년 말에 구이 리챠드스란 이름의 한 뉴욕 기자가 짜르 추적(The Hunt for the Czar)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이 처음으로, 1920년 7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짜르구출하기(Rescuing the Czar)란 제목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책이 출간됐음을 언급했다. 이 후자의 책은 황실가족의 구출을 상술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발간된 후 채 1년도 안돼 책이 회수됐는데, 그 시점은 번역자 중의 한 사람이 미국 정보부처의 전 책임자를 만난 직후였다. 리차드스의 책은 황실가족 7명 전원이 1918년 7월에 죽었다는 전통적인 해석의 토대를 뒤흔들었지만, 두 사람의 BBC 기자인 앤소니 섬머스와 톰 맹골드가 1976년에 짜르에 관한 파일(The File on the Tsar)이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그 근거에 금이 갔다. 이들의 책은 황실가족의 시체가 불에 태워졌다는 소콜로프와 볼셰비키들의 단정이 거짓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책들은 각각 더 많은 정보를 밝혔고 그리고 황실가족의 시체들을 불에 태워 “그 재를 바람에 날려버렸다”는 그 당시 거의 60세 가까운 어떤 볼셰비키의 증언에 대해 추가 의문을 제기했다. 최소한 그 책들은 그 사건에 대한 소콜로프와 볼셰비키의 사건설명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욱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소콜로프가 사실상 얼떨결에 조사 책임자가 된 사람으로서 성실하게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은폐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국제적인 주목은 다른 이상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1977년에, 짜르에 관한 파일이 출간된 지 1년도 안되어, KGB 의장인 유리 안드로포프의 선동으로 소련정부는 살인현장으로 소문나 있는 이파티에프 하우스를 없애버리도록 지시했다. 이 작업을 책임진 관리가 당시 에카테린부르그(스베르들로브스크) 지역의 공산당 책임자인 보리스 옐친이었다. 크레인 과 렉킹볼(집 등을 허무는 데 사용하는 대형 쇠뭉치)이 수 시간 이내 그 “특수목적의 저택”으로부터 추가 비밀들을 끌어낼 어떤 희망들을 제거해버렸다. 그리하여 로마노프 일가의 비밀은 1970년의 오코너의 책, 1970년의 리차드스의 책, 1976년의 섬머스와 맹골드의 책, 그리고 1977년 KGB와 공산당정치국의 종용에 의한 현장(집) 파괴라는 연표를 갖게 됐다.

 

아브도닌과 리아보프가 로마노프 유골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은 이파티에프 하우스가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로마노프 일가의 살해와 그들이 묻힌 현장 방향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는, 당시 수비대 대장이었던 유로브스키의 수기가 1979년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의 수색에 도움을 주었다(그 수기의 내용은 제11장에 전재돼 있다). 로마노프 일가 - 그 최후의 순간(The Romanovs - The Final Chapter)을 쓴 로버트 매시에 따르면, 그 수기는 유로프스키의 아들이며 소련해군 퇴역중장인 알렉산더가 그때까지 내내 보관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의 생애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기록”에 대해 회개하는 의미에서 그 수기 원고를 리아보프에게 건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RECA가 지적했듯이, 왜 그들 3명 - 즉 정부소속의 지질학자, 작가/영화제작자 그리고 은퇴한 소련 고위 해군장교를 말하는데, 특히 전자 2명의 경우 이 업무에서의 그들의 성공은 문제의 학살사건의 일부 본질을 정돈한다는 뜻을 암암리에 가졌을지도 모르는 정부의 입장과 교섭의 적지 않은 부분이 될 것이었다 - 이 유골을 찾는데 그들의 전문직업, 그들의 은퇴후의 연금, 그리고 잠재적으로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험을 무릅썼을까? 만약 그들이 그 목적을 성취한다면, 그 자체가 국가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당시의 KGB나 다른 당국의 분노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하나의 가능성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았다는 점이다.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폭로성 책들이 서방에서 발행되어 그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 직후에 그들이 갑자기 에카테린부르그 근교에서 유골을 발굴하려고 나선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1989년, 그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진술에 다시 한번 의문이 제기되었다. 영국의 전 정보원이었던 리챠드 마인너차겐의 일대기를 썼던 마크 코커는 옥스포드대학의 로도스 하우스 도서관에 있는 마인너차겐의 일기에서 러시아 황실의 한 공주가 탈출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을 인용했다. 동년 4월10일11)에는 문제의 무덤이 더 일찍 발견됐다는 기사와 함께 리아보프가 짜르의 아들 알렉세이의 두개골이라며 들고 있는 사진들이 신문에 보도됐다. 리아보프는 자신은 농부의 아들이지만 지금은 “군주제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1년에 분석검토를 위해 문제의 그 무덤을 마지막으로 다시 파헤쳐 유골을 수습했다. DNA 검사를 위한 자금이 아무래도 충분치 못한 에카테린부르그의 관리들은 미국의 법인류학자인 윌리엄 메플스 박사를 초빙했다. 매플스 박사는 알렉세이와 아나스타샤가 실종됐다고 결론지었다. 중요한 것은 메플스 역시 수습된 유골 조각들이 11명의 시체 일부라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렵고, 문제의 무덤이 시체를 대량으로 매장한 것이었다며 일부 의구심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이해할만한 일이지만 무언가를 독점하고싶어한 러시아 연방정부는 처음에 그 유골을 해외로 보내 서구 과학자들이 검사하는 것을 거절했다가 결국 영국으로 보내는 데 동의했다.

 

1993년에 영국 작가인 마이클 오클쇼우는 로마노프 음모(The Romanov Conpiracies)라는 책의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책은, 니콜라스의 딸 하나가 생존해 있었으며 그녀가 28세로 추정되었던 1926년에 죽을 때까지 영국의 보호아래 있었다고 주장했다. 동년 7월에 FSS의 피터 길 박사 팀이 그 유골에 대한 DNA 조사결과를 발표했다.12)

 

이 조사결과와 장례계획 및 문제의 학살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다른 사실들에 대한 폭로소동은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뒤엎을 지도 모르는 다른 책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로마노프 일가의 유골발견과 그에 대한 철저한 DNA 검사결과가 일단 그리고 영구히 문제의 논란을 잠재우리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DNA 분석 외에는 다른 검사들이 수행된 것 같지 않다. 예를 들면, 기본검사 중 그 유골의 연대를 밝히기 위한 어떤 검사가 행해졌다는 증거를 발표된 작업보고서의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유골들이 탄소검사를 받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에, 뼈 조각들의 물리적인 검사를 바탕으로 그들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튼 발표된 검사결과들은 아미노산 라세미화(racemization)검사를 참고했던 것 같다. 라세미화 검사라는 것은 1940년대 대기권 핵실험이 시작된 이후 살아있는 어떤 사람의 뼈에 존재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체크하는 검사를 말한다.

 

1995년에 DNA 검사결과에 대한 러시아정부위원회의 발표가 그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과학계 바깥에서 또한 그 유골의 확실성에 대해 계속 의문이 제기되었다. 러시아 상원 여당 원내총무인 안드레이 골리친은 그 유골을 로마노프의 것으로 확인한 정부위원회가 "의아심을 일으키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점들을 간과“했거나 ”공식적인 것을 부인하는 설명“을 하도록 제안했다고 비난했다.

 

RECA를 대표하는 피터 콜티핀-발로브스코이, 알렉시스 쉐르바토우공(公), 그리고 에우게네 마제로브스키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보낸 일련의 메모편지에서 그 유골에 관한 그들의 의구심을 나타냈다. RECA가 매우 노골적으로 의문을 가졌던 문제점들 가운데는 왜 DNA 검사가 황후와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네 딸 모두에게 이론적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혈우병 상태를 찾으려고 시도한 흔적이 보이지 않느냐는 것도 있었다. 편지는 또한 한 10대의 유골에서 수습한 두개의 치아가 로마노프의 것으로 추정된 유골이 발견되었던 구덩이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으며, 그리고 비아체슬라프 L. 포포프 MD 교수는 그 치아가 “거기에 묻혔던 유골들의 어떤 것에도” 속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옐친에게 보낸 편지는, “[일치하지 않는 치아에 관한] 사실은 필시 그 유골이 나온 곳이 ‘집단적인’ 대량 매장 구덩이였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지도 모르며 따라서 본의 아니게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13)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 위원회의 편지는, 그 유골을 로마노프의 것이라고 선언하기 이전에 비정치적인 독립된 주체가 유골과 모든 법적 증거들을 조사 평가하도록 호소했다. 그들의 호소는 쇠귀에 경 읽기가 되었다.

 

지보토프스키 박사는 유골의 출처가 분명하다고 증명하는 데 관여한 실험실도 러시아정부위원회도 일련의 온전한 보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발표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유골의 발견, 수송 및 보관은 수긍이 갈만하게 기록되고 서류화 된 적이 없었다. 쉴드스 박사는, 서류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유골의 출처에 관한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니콜라스나 알렉산드라의 모계 쪽 친척들의 뼈에서 표본을 채취하여 그것을 에카테린부르그의 문제의 그 무덤의 뼈에 주입시키기는 쉬울 것”이라고 지적했다.14)

 

쉴드스 박사는, 누군가가 짜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의 유골이 묻힌 곳을 실제로 알고 있었다면 그것이 이용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시 미하일 대공은 짜르 직계 가족들과는 분리되어,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멀지 않은 페름 근교에서 총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의 무덤이 서방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러시아에서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하일의 유골은 니콜라스의 유골과 꼭 같은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더욱이 쉴더스 박사는 (발굴에 관여한) 다수의 인류학자들이 9명의 피매장자들의 뼈로서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한 것이 더 이상하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척추골이 9개가 안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15) 그리고 쉴더스 박사는, 오염가능성 또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16)

 

레프 지보토브스키 박사가 인간 생태학 연보(Annals of Human Biology)에 발표한 논문이 쉴더스 박사의 의구심을 뒷받침한다.17) 지보토브스키는 유골의 출처가 확실하다고 단정한 러시아정부위원회의 태도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역시 그 유골에 대한 “보관체계”에 많은 변칙이 있었던 것 같으며 아무래도 수상쩍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유골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한 아무 적절한 조치도 강구하지 않았으며, 무덤은 계속 침해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가설들 - 그 유골이 황실의 다른 구성원들의 것일 수 있다는 사실과 같은 - 이 폐기되고 심지어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보토브스키 역시 소위 말하는 1920년의 유로브스키 수기가 서명이 없는 서류이며 “무덤의 위치에 대해 훗날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람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고위 역사가인 포크로브스키 박사가 손수 끼워 넣은 중요한 추가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게다가 지보토브스키는, 문제의 DNA 검사가 러시아인들이 아닌 미국인과 영국인들로부터 나온 데이터를 참고한 흔적에 관심을 나타낸다. 그는 황실가족의 기원을 가정하건대, 덴마크와 독일인들로부터 온 유전학적 데이터가 또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보토브스키 박사의 논문은 또한 니콜라스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뼈에 그가 23세 때에 입었던 상처의 흔적이 왜 없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1891년 일본에서 자객의 공격을 받은 니콜라스는 머리에 2.5 인치의 칼자국을 남기는 심한 타격을 입은 바 있다.18) 지보토브스키는 심지어 “그 무덤(”로마노프“의 유골이 발견된 무덤)이 1946년 국가정보기관(KGB)에 의해 파헤쳐졌다는 일부 징후 또한 있다(콜티핀-발로브스카이 등)”19)는 말까지 하고 있다. 요약하면 지보토브스키 박사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유골에 대한) 조사는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 하면 대안적인 시나리오들을 공식화하거나 혹은 상응하는 차이와 일치 확률을 추정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지식이 참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가운데는 증거를 숨기고 학살에 대한 그릇된 단서를 전개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유골이 들어 있었던 그 무덤이 손상돼 있었던 사실로 보아 일부 두개골과 다른 뼈들, 어쩌면 심지어 친척인 듯한 사람들의 뼈들을 그 무덤에 추가시켰을 지도 모른다.20)

 

현재로선 지보토브스키와 쉴더스의 탁월한 체계적 연구결과에 비추어 보아 로마노프의 유골로 알려진 것에 대한 DNA 검사결과는 요령부득인 것으로 간주된다. 무덤이 몇 번인가 파 해쳐져, 그들이 DNA 검사를 하기 이전에 유골의 신원이 손상된 것이다. DNA 검사 자체는 결정적으로 “긍정적인” 확인을 산출할 수 없는 방법론에 의거했다.

 

더욱이 유골과 관련된 모든 변칙을 감안한 RECA는, 객관적인 법원이 관선 러시아정부위원회의 그것과 꼭 같은 결론을 절대로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십중팔구, 이 문제는 신뢰할 수 없는 증거 때문에 법원에 도착하기 전에 파기돼 버릴 지도 모른다. 어떤 독립적인 위원회가 기초 데이터를 검토하기 이전에는 DNA 증거가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본래의 출발점, 즉 황실가족의 실종, 그들의 살해에 대한 설득력 없는 설명 - 그리고 아직도 대답 없는 의문을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유골, 이 시대 인간의 유골로 되돌아간다. 이 책의 향후 펼쳐질 내용들에서, 불합리가 쌓여감으로써, 우리는 로마노프 살해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목격자” 보고서들은 유골이 매장됐는지 혹은 불에 태워져 “바람에 날려버렸는지”, 살해된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증거”가 나오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의문이 꼬리를 문다. 로마노프 일가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그렇게도 많은 상호 모순되는 회답들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 세계로 하여금 로마노프 일가가 학살됐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누가 이익을 보게되었을까? 만약 로마노프 일가가 구출되어 살아있었다면 누가 이익을 보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회답들이 세계 정치무대를 지치게 했다.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및 일본 모두가 러시아 짜르와 연계돼 있었으며 황실가족이 구출되기를 원했던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이들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어떤 공공연한 행동도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은 황실가족의 실종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며 온갖 구색을 갖춘 해석의 씨앗들을 뿌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면에 엉뚱한 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낼 것이다. 즉 죠지 5세왕과 카이저 빌헤름은 몰래 그들 공동의 사촌들(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고, 연합국들은 엄청난 러시아정부의 부채를 상환 받을 수 있는 강화된 기회를 찾고 있었고, 레닌은 그의 허약해진 혁명을 위한 볼모로 황실가족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 일반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설명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모순적인 것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윤색 투성이의 것들이었다. 사실상 표준 역사에서 설명되고 있는 1918년 7월17일 밤의 사건들은 묘사된 그대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낙진(落塵)을 맞을 여러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지만 특별한 정치인 그룹,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외교관들, 정보원들, 기업가들 그리고 영국, 유럽 및 일본 황실의 몇몇 구성원들이 실제로 짜르와 그의 가족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들을 체계적으로 세웠다. 이들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이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혼동과 혼미에 일조 했다. 결국 이들은 세계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제1차대전의 그늘 속에서 1918년 7월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 그들 자신의 버전을 심는데 성공했다.

 


제1장 서막

 

혼돈과 공포

 

20세기초기에, 로마노프왕조는 300년간 러시아를 통치해 오고 있었고 짜르 니콜라스2세는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세계육지의 6분의1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당시 짜르가 벌이고 있었던 러시아대륙 횡단철도공사는 대단한 열광을 가져왔다.(시베리아 횡단철도는 1891년에 착공되었는데, 당시 23세의 황태자였던 니콜라스 2세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903년 첼리야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도가 완공되었고, 착공 25년 만인 1916년에 최종완공을 보았다. 니콜라스 2세가 짜르로 등극하기 3년 전에 착공하여 그의 재임 중에 완공된 이 시베리아횡단 철도는 그가 내세울 수 있는 최대 업적이었다. 여기서 “짜르가 벌이고 있었던 철도공사”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옮긴이) 유럽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이르게 될 이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시베리아의 거대한 지하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되어 미국서부와 유사한 경제적 팽창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1904-5년의 러일전쟁은 러시아에 막심한 피해를 안겨주며 끝났다. 국내전선에선 가두시위에 대한 난폭한 대처가 1905년 12월의 처참한 대학살로 이어져 니콜라스의 명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니콜라스 치세의 마지막 수년간 거대한 불안감을 몰고 왔으며, 심지어 지지자들마저 짜르가 과연 러시아의 정치 및 군사지도자로서 이 난국을 성공적으로 타개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게되자, 세계 여러 정부관계자들이 마치 거의 비슷한 두 해악 중에서 약간 덜한 쪽을 택하기나 하듯이, 짜르와 그의 가족을 비밀리에 구출하는 일에 몸소 나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의 일부는 충실한 한 동맹국(재정러시아)을 위한 성실성의 발로였던 반면, 다른 일부는 짜르 가족과 개인들에 대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선, 러시아의 단계적인 혁명진입, 짜르의 퇴위, 그리고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마지막 날들 동안 니콜라스와 그 가족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2월혁명이 일어나기 수년 전으로 되돌아 가 보자. 전쟁(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는 수년동안 짜르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개인생활은 물론 러시아정부도 날이 갈수록 점점 소란스럽고 이론이 분분해져갔다.

궁정관리, 친독(親獨)분자 및 볼셰비키와 같은 유의 모든 선동가들은 짜르와 황후에 대해 가차없이 비난의 포화를 퍼부어 댔다. 짜르의 권위는 대전을 치르면서부터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1914년 8월 짜르의 참전발표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던 열광과 충일감(充溢感)은 니콜라스가 지금껏 의지해왔던 지지자들 사이에서마저 절망과 혐오 및 환멸로 바뀌었다. 군주에 대한 이런 반전(反轉)현상은 당시 온 유럽 군주국들에서 일반적으로 감지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빈약한 장비에 때로는 무기가 없어 맨손으로 적과 맞서야하는 수백만 명의 장병들이 동부전선의 끔직한 참호 속에서 독일군 중포(重砲)의 대포밥이 되어가고 있었던 러시아에서 그 농도가 훨씬 짙었다. 1915년 8월, 짜르가 직접 최고사령관역할을 맡고, 전임사령관이었던 그의 숙부 니콜라스 대공을 그루지아의 티플리스로 당분간 유배키로 한 결정은 비효율성과 군사상의 대 재앙을 가져왔다.(1917년 러시아군이 기록한 병력 손실은 170만 명의 전사자, 250만 명의 포로, 그리고 500만 명에 가까운 부상자였다 - 옮긴이)

 

이와 같은 군사적인 대 실패와 적대자들의 격렬한 선동은 결국 로마노프 황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굳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지금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사람은 짜르가 아니라 농부출신의 자칭 ‘성자’인체 하는 그레고리 라스푸틴(농민출신의 수도승으로 러시아 제정말기 니콜라스2세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농단하다가 제1차 대전 중 항전파에게 암살 당했다. 마치 고려말의 신돈같은 인물이다 - 옮긴이)과 황후라고 믿었다. 볼셰비키와 친독분자들 양쪽 모두 짜르와 황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 루머를 그들의 공격재료로 삼았다. 그들의 목적은 러시아군을 전쟁에서 손을 떼게 하는 데 있었다. 짜르와 황후의 모든 적들은 이런 부정적인 인식과 은밀한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했다. 정권이 황실가족 주위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라스푸틴과의 관계를 지속시킴으로써 짜르와 황후는 그들 주위에서 점점 더 농후해지고 있는 음모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로마노프 황실이 정세에 너무나 둔감하다는 이미지가 고착되고 강화돼 갔다. 황실가족을 좌지우지하는 라스푸틴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짜르의 중신들과 심지어 일부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의 궁정음모를 그의 치세 중 어느 때보다도 더 만연시키고 악화시키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황태자 때문에 완전히 넋이 나간 황후와, 그리고 “가정적인 남자”가 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짜르는 주위의 비난 대부분에 점점 눈을 감고 귀를 막아가고 있었다.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몰랐던 일 - 그리고 짜르와 황후의 측근들만 알았던 일 - 은 황위 계승자가 혈우병으로 진단된, 분명히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짜르와 황후는 황태자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며 -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그리고 라스푸틴은 자기 혼자서 신의 도움을 받아 황태자에게 달라붙어 괴롭히고 있는 비극적인 질병을 몰아낼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시켰다. 그 “미친 수도승”이 어떻게 질병의 증상을 완화시키고 분명히 육체적인 고통에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아이에게 안정을 가져오게 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몇 년이 지나면서 이 숨겨진 관계는, 그 “성자”가 황후에 대해 굉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봐 둘 사이에 혹시 관능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루머로 이어졌다. 남녀관계와 결부시켜 이러쿵저러쿵하는 비난에 실제로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관계”가 공공연히 묵인되고 있었고 심지어 짜르도 인정하고 있다는 소문이 계속 떠돌고 있었다.

 

결국 뜬소문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점점 확산돼갔기 때문에, 궁정의 일부 중신들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의 귀공자인 펠릭스 유슈포프공은 황후와 짜르에 대해 그가 인지한 소문의 근원지를 없애기 위해 라스푸틴 암살계획을 세웠다. 짜르의 가장 가까운 친척 중 하나인 조카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공작이 여기에 가담했다. ‘라스푸틴 암살자’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블라디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퓨리스케비치와 함께 3인조를 이뤘다. 리챠드 파이프스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쓴 많은 책들 중 하나에서 언급된 서한이 유슈포프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두마(제정러시아 하원) 의원인 바실리 알렉시비치 마클라코프에게 보낸 서한은 황후에 대한 그의 추측을 얘기하고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라스푸틴에게 종속돼 있습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짜르가 일단 라스푸틴과 황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만 모든 것이 변할 것이며, 훌륭한 입헌군주가 될 것입니다.”1)

 

유슈포프는 1916년 12월16일 밤 라스푸틴에게 사형선고를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으나 그러나 간단치가 않았다. 유슈포프와 그의 공모자들은 처음엔 라스푸틴의 독살을 시도했다. 이 수도승은 좀체 빈틈을 보이지 않았으며,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사살하여 얼음 밑 강물에 처넣었다. 라스푸틴이 사라지면, 신선한 바람이 문제의 신비주의자와 황실가족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 빈정대는 소리, 과장된 소문, 노골적인 거짓말들을 모두 쓸어가 버리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라스푸틴이 살해된 직후 알렉산드라 황후는 짜르에게 “그가 살해됐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아요.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쓰고 있다.2) 그녀가 보기엔, 하나뿐인 아들 알렉세이의 생명은 라스푸틴의 ‘약손’ 안에 들어 있었다. 결국 라스푸틴의 죽음을 확인한 황후는 슬픔과 공포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유슈포프가 황후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 꾸민 이 계획은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유슈포프가 예상했던 것만큼 정신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짜르의, 그리고 황후의 가장 큰 결점 중의 하나는 둘 다 보통 인간들처럼 지나치게 나약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외동아들에 대한 과보호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알렉세이의 신체적 결함으로 일어나게 될 미래의 문제를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만약 황실 가족 중 누군가가 평범한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혹은 신체적 불구가 된다면,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로마노프 왕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왕권(황권)신수설“이 작동한 것이다. 이른바 황위계승자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됐기 때문에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것으로 인지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로마노프 황실은 궁중중신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었던 도전에 대한 대응시도에서 전술적 과오를 범했다. 그들의 통치에 대한 비판자들의 급습에 대부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짜르와 황후는 너무 고립되어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그것이 그들이 받고 있던 약간의 동정심을 더욱 감소시켰다. 살아 생전에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과오에 대한 용서를 거의 받지 못했다. 황실이 그들 후계자의 병약함을 널리 알렸더라면 아마도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분위기가 심화되었다. 아무튼 알렉세이의 병약함이 알려졌더라면 라스푸틴이 황실가족과 나아가 제국에 미친 불가사의한 위력과 감성적인 위협을 어쩌면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러시아는 그 무렵 신비주의가 충만해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가 짜르와 황후를 궁지로 몰아가는 데 기여했다.

 

라스푸틴이 죽은 후 겨우 두 달만에, 그리고 짜르가 퇴위하기 바로 2주전에, 짜르와 황후는 다시금 그들의 가족 구성원들과 갈등을 빚었다. 짜르의 누이 제니아의 남편인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산드로) 대공과의 은근한 대립이 잠재해 있던 일부 긴장을 드러냈다. 귀족가문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계급들은, 러시아를 통치하는 사람은 계몽 독재군주가 아니라 짜르와 특히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마음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라스푸틴으로 알아왔다. 이제 라스푸틴이 죽고 짜르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남으로서, 산드로는 짜르가 그의 동생인 니콜라스 미하일로비치 대공에 대한 조처에 계속 당혹해 했다. 1917년 2월14일 열차를 타고 가며 쓴 한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A(알렉산드라) 및 N(니콜라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역시 프로토포포프가 제기해 온 두 가지 문제, 즉 농민들을 위한 지주들의 토지몰수와 유대인들에 대한 평등권 부여를 화두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 알릭스는 어떤 항의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그(니콜라스)는 첫째 문제에 대해선 반대했고 둘째 번 문제에 대해 그것은 단지 유태인 정착지역을 확장해 주는 의미에서의 평등이었다고 대답하면서 곤혹해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한 양보 혹은 새로운 권리부여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으며, 러시아 인민들이 전쟁과 노골적인 반역의 편에 서고 있는 그들(유태인)의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지금 점점 더 싫어하고 있는 민족에게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알릭스는 항의는 안 했지만 분명히 항의를 하고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릭스가 옹호하고 있는 입장이 짜르와 인민들의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인민들은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며, 인민들이 시작하고 다른 계급이 끝내는 것 사이에 어떤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녀에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인민들은 선도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인민들에게 다른 재산을 조화롭게 나눠주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인민들로 하여금 황실에 저항토록 선동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누누이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인민들이 황실에 충성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언제나 처럼 쿠션에 등을 기대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습니다. 그녀와 내가 일치했던 유일한 현안은 명예훼손에 대한 가장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신문에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N을 쳐다보며 “내가 항상 그러한 법률이 필요하다고 당신에게 말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대화는 영어로 했습니다..... 한편, 나는 닉키에게 가능한 빨리 스타브카(모길레브에 있는 군사령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충고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그녀가 대화를 가로채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문제가 해결돼야 하기 때문에 지금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3)

 

산드로의 불만은 다른 회합에서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황후에게 그들의 비공식 회합이 "전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해 "몹시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산드로는 황후가 “원군”이 되어 잘못된 길을 택하고 있는 짜르를 설득하는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랬다. 그의 얘기로는, 자기가 “자포자기 상태로 내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려 했다고 말했다.

 

겉보기에, 자기의 통치에 대한 비난공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것 같은 짜르는 황후가 페트로그라드에 그냥 머물자고 한 충고를 분명히 무시하고 시위대들과 충돌이 일어난 직후 모길레브에 있는 군사령부로 돌아왔다. 2월23일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혁명이 시작됐다. 수천 명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항의에 나서자 즉각 다른 수천 명의 혁명적인 시위대들이 여기에 합류했다. 사흘 동안에 25만 명 이상의 남녀 노동자들이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메웠다. 심연으로의 긴 추락이 시위 나흘째 되는 날에 시작됐다. 이날, 지금껏 짜르에게 충성을 바쳐 온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시위자들을 억눌러 귀가시키는 대신 그들에게 합류한 것이다.4)

 

2월27일, 모길레브에 있는 짜르의 사령부에 이 소동을 상세하게 알리는 첫 번째 전보가 도착했다. 니콜라스는 황실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선로에 장애물이 놓여져 그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기차는 자정 이전까지 준비가 되지 않았고, 다시 선로를 치우느라 6시간이 더 소요됐다. 이튿날 오후에 기차는 다시 멈춰서 버렸다. 교량 하나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로를 통해 전진하려고 시도하여 그들이 페트로그라드 남서쪽에 있는 도시인 파스코프에 도착했을 때, 두마에서 파견한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고 짜르는 의심 없이 그들을 맞았다. 어떤 공식절차도 예의도 차리지 않고 그들은 즉각 짜르더러 그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양위하고 그의 동생 미하일 대공을 섭정으로 삼아 보좌토록 하라고 요구했다. 짜르는 모든 군사령관들이 그의 퇴위에 찬성했음을 거의 즉각 알아차렸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크리미아로 가겠다고 요구했지만, 그러나 그의 아들 알렉세이는 인민들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5)

 

짜르의 생애에서 가장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을 이 고통의 순간에서도 다시 한번 그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알렉세이의 행복이었다. 황실 가정교사였던 삐에르 질리아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3월2일 짜르는 황위를 알렉세이에게 양위하는 결정을 앞두고 번민하면서 페트로프 교수의 자문을 구했다.

 

“솔직히 말해 주게,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알렉세이가 앓고 있는 병이 불치병이란 말인가?”6)

 

답은 고무적이지 못했고, 질리아르에 의하면, 짜르는 고개를 떨구며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황후가 내게 말한 것과 꼭 같군. 사정이 그러하고,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만큼 알렉세이가 이 나라에 봉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곁에 둘 권리를 갖고 있네.”7)

 

즉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혁명지도자들의 요구와 군사령관들의 불신임투표에 직면한 짜르는 1917년 3월2일 오후 3시5분에 정권을 그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양위했다.8)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를 군주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마도 각도가 빗나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의 등극을 승인하는 러시아 인민들과 임시정부가 역시 태도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이틀도 채 지나지 않은 3월4일 그는 퇴위했다. 그러자 당황한 나머지 니콜라스는 알렉세에프 장군(뒷날 연합국의 금융사업계획에 휩쓸리게 될 장군들 중의 하나. 금융사업계획은 짜르와 그의 가족을 위해 무르만스크에 안전가옥을 짓기 위한 자금 통로로 사용될 것이었다.)에게 다음과 같은 4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즉 그의 수행원들과 함께 짜르스코에 셀로에 있는 그의 궁전으로 가고자 하니 방해하지 말 것, 자녀들이 홍역에서 완쾌될 때까지 그의 가족들이 짜르스코에 셀로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 것, 가족 전원이 로마노프-온-드-무르만(무르만스크)에 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이 크리미아의 리바디아 궁전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 돼 있었다.9) 그는 답을 듣지 못했다.

 

3월7일자, 임시정부일지 제10호에서 니콜라스의 요구사항이 토의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알렉세에프 장군은, 체포하여 짜르스코에 셀로로 송환하라는 선고를 받은 “퇴위 짜르를 보호하기 위한 구체안을 세우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추가 결정에는 짜르를 동행하게 되는 두마 의원들에 대한 지시가 포함돼 있었다. 그들이 임무를 완수한 후 서면으로 된 보고서를 제출하면, 두마는 ‘당면 결정을 공포’할 작정이었다.

 

이 며칠간의 긴장된 정치적 책동은 풋내기 ‘민주주의’가 통제불능으로 공전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일부 짜르의 가까운 친척들은 물론이고 친독분자들과 볼셰비키 선동가들을 포함한 각종 파벌들의 음모가 러시아제국을 붕괴시키고 그리고 이미 갈가리 찢겨진 러시아인들의 생활터전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짜르 지지자들 역시, 짜르 치세의 마지막 수일간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내부적으로 파열하고 있는 러시아의 전면적인 격돌을 명확히 파악했다면, 그들은 입헌군주가 혼란에 빠진 나라를 다시 안정시킬 것이라는 헛된 희망 속에서 니콜라스와 그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몰래 움직였을 것이다.

 

 

제2장 이해관계에 얽힌 당사자들

 

국제 투기장(鬪技場)

 

2월혁명과 짜르의 퇴위가 국제사회에 전혀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반면, 이 중대한 정치적 사건들은 모든 참여자들을 다시 정리하는 계기가 된다. 혁명이라는 말은 불가측을 암시하며 불가측은 때때로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내포한다. 러시아 혁명 역시 많은 파벌들이 기대했던 대로 풀려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입증해 주었다.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상황 외에 독일, 연합국, 일본과 몇몇 다른 국가들이 아직은 짜르와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짜르가 혁명에 대한 이들 국가들의 태도에 영향을 끼쳤고 막후의 음모를 구체화하게 했다. 추후에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사정에서 발전하게 된 교묘한 조치들이 여러 국가에서 일련의 행동으로 옮겨졌는데, 대부분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있고 현재까지 실질적으로 추적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에 대한 이들 국가 지도자들의 일부 자세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서방 정부들은 새 임시정부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것이 비틀거리고 있는 러시아의 전쟁(제1차 대전) 수행능력을 소생시켜줄 것으로 믿었다. 실제로 짜르 퇴위 후 들어선 임시정부는 대독전을 계속할 뜻을 비친 러보프 공과 같은 귀족출신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다. 연합국 측은 니콜라스가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맺어 자기들을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독일정부에게 있어서 1917년 2월혁명은 일종의 실패를 뜻했다.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계획에 새 임시정부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한동안 독일은 러시아를 동요시켜 전쟁에서 발을 빼게 하기 위하여 러시아의 여러 혁명 그룹들을 선동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독일 외교정책의 근본목적은 적(즉 영국과 프랑스)을 고립시키고, 러시아와 단독 평화조약을 맺어 대전을 단일전선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일은 비범한 친구들, 이른바 볼셰비키들과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즉 독일은, 지도층과 구성원들이 주로 공장 노동자들과 일부 농부들로 구성돼 있는 볼셰비키들이 러시아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제국(帝國)이었기 때문에 볼셰비키들에 대한 지원은 극단적인 처방일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이 모르게 은밀히 처리해야할 사항이었다.

 

사실 볼셰비키들 역시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제국독일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데 대한 어떤 양심의 가책은 접어두고 이중적인 행동과 배역(配役)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불신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917년 현재 전쟁에서 러시아를 탈락시키기 위한 그들의 목적을 달성시켜 줄 것처럼 보이는 정치단체를 볼셰비키들 외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전쟁 후 발견된 서류들은 심지어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독일의 자금지원까지 받았음을 폭로하고 있다(그들은 그 몇 개월 후인 10월에 쿠데타를 단행,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자금 지원설은 그 시절 연합국 선전에 의해 떠벌려진 주장이어서 최근까지(관련서류가 발견되기 전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돼 왔다. 아무튼 리챠드 파이프스 박사의 연구로 이 자금 수수관계가 포괄적으로 확인된 것이다.1) 볼셰비키들은 주로 독일과 협력하는 동안 그들에게 진저리를 쳐가며 비위를 맞추면서도 그들 요구사항의 대부분을 교묘하게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술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재정적인 이해관계가 첨예했을 때, 그리고 모든 것이 작전상의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닌 동의가 일반적으로 그 시절의 도리였을 때 그랬다. 독일인들은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에 있는 그들 외교공관을 통해 움직이며 장기간 혁명당원이었던 알렉산더 이스라엘 헬판트의 사무실들을 이용했다. 파르부스로 알려진 이 사람은 러시아 내의 상황들을 독일인들에게 알려주고 볼셰비키들과 연계를 갖도록 조언해 줬다.

 

파르부스의 권고에 따라 스위스 주재 독일대사관은 러시아로 되돌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는 레닌 및 그의 동료 망명객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레닌은 볼셰비키들이 독일의 도구로 비쳐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일방적으로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2) 이를테면 러시아 망명자들은 러시아에 구금돼 있는 독일시민들과 교환돼야 하고, 그들이 타고 갈 기차는 치외법권을 가지고 국경을 통과할 때 여권심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 32명이었던 레닌 일행은 1917년 3월27일 취리히 역을 떠나 30일에 발틱에 도착했다. 4월3일에 있었던 레닌의 페트로그라드 입성은 극적이었다. 그 날은 “러시아최고볼셰비키 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마르세이유”를 연주하는 악대와 지지군중들의 환영을 받았고, 투광기로 사려 깊게 조명을 비추고 있는 장갑차 몸체에 올라가 그들에게 연설했다. 바로 그 다음날 스톡홀름에 있는 독일 정보원은 본국에 “레닌 러시아 입국에 성공. 그는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움직이고 있음.” 이라고 타전했다.3)

 

레닌의 활동은 자금을 계속 필요로 했다. 볼셰비키의 선동은 돈이 드는 것이었다. 독일과의 유대와 그들의 중요성은 독일 국무장관인 폰 쿨만에 의해 간략하게 표현됐다. 그는 1917년 9월 독일육군 최고사령관에게 보낸 한 메모편지에서 이날까지의 진전상황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대규모 준비를 하여 큰 성공을 거두며 수행한 동부전선에서의 군사작전은 외무부 쪽에서 벌인 러시아 내에서의 집요한 비밀 와해공작의 힘이 컸습니다.

 

이들 활동에서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가능한 한 민족주의 및 분리주의 활동을 촉진시키고 혁명분자들에게 강력한 지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동안 이러한 활동에 개입해왔으며 참모본부 정치국(국장, 폰 헐슨)과 합의를 끝마쳤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과업은 확실한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볼셰비키 운동은 우리의 계속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로 오늘날과 같은 규모로 커질 수도, 그런 큰 영향력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4)

 

1917년 내내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 스톡홀름의 독일대사관을 통해 볼셰비키들에게 전달됐으며, 그 중 상당부분이 동 대사관의 러시아 전문가인 바바리아 출신 직업외교관 쿠르트 리슬러의 손을 거쳤다.5) 리슬러는 그 후 빌헤름 미르바하 백작이 대사로 있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표부 요원이 되었다.6) 러시아 황실가족이 사라지기 바로 수주 전, 폰 미르바하는 카이저의 요청에 따라 당시 에카텐부르그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노프 ‘황녀들’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레닌에게 압력을 넣었다.

 

전쟁에서 손을 떼도록 러시아에 압력을 넣은 실체는 비단 (독일의) 외무부와 참모본부 만이 아니었다. 그 보다 2년 전 독일 황태자는 짜르와 이 문제에 대해 담판을 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오빠인 헤세 대공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독일과 러시아가 반드시 단독 평화조약을 맺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상대방을 토막내게 되면 영국이 흑해에서 낚시질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우리 두 나라는 거기에 있는 우리 군대를 철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되면 우리는 프랑스에게 다시 재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오래 끌고 있는 고착된 전쟁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우리 두 나라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도록 대공께서 니키(짜르)를 설득하여 주실 수 없겠습니까? 평화에 대한 열망이 러시아에서 아주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우리들은 저 사생아 니콜라이 니콜레에비치(짜르의 숙부: 당시 군 총사령관이었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알렉산드라 일가에 대한 독일 대표부 요원들의 접근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었다. 독일 황태자의 발의로 1916년 헤세 대공이 비밀리에 러시아 전역을 돌아보고 그 결과를 짜르에게 보고한 것으로 또한 알려져 있다. 그 임무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지만 - 독일과 러시아는 여전히 교전 중이었다 - 비밀 황실작전은 수행될 수 있었고 수행되었으며, 그것이 독일의 대 러시아전략에서 중요한 진전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굽이마다 이판사판의 정략이 횡행하고 있었다.7)

 

독일이 미친 듯이 날뛰며 임시정부의 토대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반면, 미국과 영국정부의 많은 관리들은 새 정부수립이 러시아의 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었다. 미국인들과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정부가 처음 생각한 1917년 2월혁명은 러시아를 이상적인 위치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진보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면, 러시아는 독재국가에서 민주국가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짜르의 친척이며 가장 가까운 조언자인 로이텐버그 공작에 따르면, 2월혁명은 미국원조자금을 교묘하게 활용했다.8) 이 자금은 물론 미국 정부자금은 아니었다. 로마노프 측의 많은 사람들은 거대한 미국은행들로부터 온 자금이 짜르정부 전복에 사용됐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국제 금융기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쿤 앤드 로엡과 독일의 로스차일드 은행이 러시아 볼셰비키 운동의 중요한 자금지원기관들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재정러시아의 독재정치가 오랫동안 유태인들을 희생시켜 왔기 때문에 미국의 일부 유태인 은행가들이 러시아의 구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를 환영했을 것이다. 쿤 엔드 로엡의 미국 유태인 은행가인 제이콥 쉬프는 분명히 짜르정부 타도를 지원할만한 개인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그가 미국체재 중에 아마도 쉬프의 회사에 머물렀던 것 같으며, 그리고 일부 역사가들은 쉬프가 개인적으로 그 불같은 지도자에게 재정지원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증거는 없지만 쉬프가 1917년에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한 가지 점은 확실하다.9) 도미니크 벤너는 1997년 빠리에서 발행된 그의 책 “하얀색과 빨강색”에서 1917년 4월 쉬프가 당시 러시아 임시정부 외무장관이던 파울 밀리우코프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 전문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인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포악한 독재권력의 적입니다. 귀하와 러시아 국민들을 축하하는 나의 신의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10)

 

쉬프는 1904-5년의 러일전쟁 때 일본의 성공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자금융자에 큰 역할을 했다.11) 1915년, 뒷날 미국주재 영국대사가 된 리딩 경이 미국에서 “협상국들(대독전에 참가한 연합국들)”에 대한 차관을 조달하려고 했을 때, 쉬프는 동 차관에 대한 자신의 공여분에서 “단 1페니도 재정러시아에 흘러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 차관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역시 유태인이었던 리딩 경이 동맹국(러시아)을 제외하는 어떠한 조건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쉬프는 신문들로부터 친독주의자라는 악의에 찬 비난을 받았다.12) 아마도 쉬프는 처음에 혁명을 지지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들은 1917년 말까지 많은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볼셰비키 정부 전복을 위한 지원에 나서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13)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우드로 윌슨은,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고수할 것이며 제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는다는 정강정책을 내건 후보였다. 윌슨 정부가 대기(待機)전술을 구사하자, 윌슨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 중의 한 사람은 한 발 더 나아가 러시아 새 임시정부 지도자가 된 사람들과의 수년간의 교분을 바탕으로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수정하도록 그에게 재촉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출신 기업가이며 크레인 플러밍사의 억만장자 오너인 차알스 크레인은 러시아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미국인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는 미국의 대 러시아정책 뿐 아니라 로마노프왕조의 무용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크레인은 러시아 주재 대사직 제의를 받았으나 개인적인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윌슨의 대 러시아정책 입안자가 되었다. 대통령을 위하여 그는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 자리에 샌프란시스코의 죠지 T. 메리에, 그리고 메리에를 보좌할 사람으로 사뮤엘 하퍼 교수를 추천했다. 하퍼 교수 부친의 요청으로 크레인은 시카고 대학에 러시아 학과를 개설할 자금을 기증했다. 크레인은 윌슨의 재선기획 조력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메리에가 러시아 대사직에서 물러났을 때, 크레인은 다시 한번 세인트루이스의 데이비드 프란시스를 차기 대사로 추천했고, 대통령의 승낙을 받아냈다.14)

 

크레인이 처음 러시아를 알고 사랑하게 된 것은 1888년 그가 모스크바의 궁전 인근에 살고 있는 외삼촌 사뮤엘의 집을 방문하여 외사촌인 토마스 스미스와 함께 어울렸을 때였다. 모스크바에서 쓴 편지에서 크레인은 러시아인들의 여러 생활단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15)

 

1894년 그가 페트로그라드를 방문했을 때까지 - 그곳의 그랜드호텔 듀럽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 그는 궁정 내 짜르 및 황후 측근그룹과 편지로 긴밀한 접촉을 할 수 있었다.16) 그 곳에 머물 때 그는 황후의 개인비서이며 황실의 개인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로스토브스토프 백작과 우정을 쌓았으며,17) 이 우정은 해가 갈수록 두터워져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이 그의 러시아 쪽 최 측근이 되었다. 크레인은 자주 백작의 집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 집 드레싱 룸에 걸려있는 크레인 가족사진이 항상 그를 맞았다.18) 그의 편지 중 하나에서 크레인은 그의 아내에게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은 주위의 평가에 전혀 걸맞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를 존경하고 있고 그도 나와 나의 모든 일에 헌신하고 있다.”19)고 안심시켰다. 크레인과 로스토브스토프가 나눈 친교의 범위는 황실가족이 최후의 날들을 맞았을 때 그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궁정의 다른 중신들과도 친교를 가졌음이 그가 러시아에서 보낸 다음 편지에서 드러나고 있다.

 

어제 저녁에 다시 한번 나는 피터 시모노프씨와 식사를 했으며, 식사 후 도서실에서 단둘이 되었을 때, 그는 내게 ‘농노해방령’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 - 위대한 로스토브스토프 큰 백작(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의 조부)의 죽음의 순간(원문대로)에 대한 가장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모노프씨와 짜르 알렉산더 2세는 새벽 3시에 백작의 죽음을 지켜봤고 그는 짜르의 팔에서 죽어갔다. 죽기 전 며칠 동안 백작은 ‘농노해방령’ 시행에 대한 그의 결심을 피력했고 시모노프씨가 그것을 받아썼다. 백작이 죽자 곧 짜르는 시모노프씨에게 이튿날 오전 10시에 자기에게 오라고 말했다. 그 무렵 농노해방위원회에 대한 작업을 분쇄하기 위한 반대파들의 강력한 시도가 있었다. 짜르는 동 위원회를 즉시 소집하여 아주 간단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짜르 알렉산더 2세는 로스토브스토프 (큰)백작의 결심으로 해방령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거대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위원들에게 말했다.20)

 

크레인의 여러 편지는 계속하여 그가 갈리친 공과 같은 사람들과도 활발한 교제를 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갈리친 공을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가장 위대한 러시아 군인들 중 한 사람이며 우랄지방의 주지사였다.”고 썼다. 그는 갈리친이 “말을 타고 아시아 쪽 러시아와 서부중국 전 지역을 여행했다”는 것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크레인은 이들 매력적인 사람들과 아주 친해져 심지어 로스토브스토프 백작과 백작의 동생을 만나기 위해 투르키스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때 백작은 동생과 함께 그 곳에서 몇 년간 살고 있었다.21)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뒷장에서 밝혀지겠지만, “짜르구출하기”라는 이상한 책 - 미국에서 발간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대한 책에 대해 여기서 잠깐 언급하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다. 이 책은 황실가족이 살아남아 투르키스탄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거쳐 세일론(스리랑카)까지 전전했으며 - 황실가족이 “모살 후” 에카테린부르그를 탈출하여 투르키스탄에서 잠깐 은신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크레인의 영향력과 그리고 그의 재산은, 1891년에 착공한 짜르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 기간에 계속 증대해갔다. 그는 이 철도공사에 공기제동기를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크레인사와 웨스팅화우스사 합작으로 창설한 회사의 대 러시아 계약협상 책임자가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크레인은 웨스팅하우스사를 설득하여, 병자와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황후의 이름으로 설립한 병원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토록 했다. 황후는 그녀의 재정담당 비서이며 크레인의 막역한 친구인 로스토브스토프를 통해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22) 세월이 흘러 1917년, 아직도 황실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있던 로스토브스토프는 이번엔 볼셰비키들에게 불려가 로마노프왕가의 재정현황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23)

 

1888년부터 혁명 때까지 거의 20회에 걸친 러시아 여행기간 동안에 크레인은 또한 미래의 임시정부의 일원이 될 수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는 우드로 윌슨과 매우 같은 성질의 “기독교 진보론자”였으며, 그의 편지들은 그가 게오르그 러보프 공(임시정부 첫 총리였으며 영국에 로마노프 황실가족의 망명을 요청했던 사람이다), 알렉산더 구츠코프(두마 지도자 중 한 사람) 및 알려지지 않은 로마노프 황실의 한 사람과 1917년 여름에 키에프에서 열린 몇 차례의 회합에 참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회합들이 있기 전 그는 다음과 같은 움직임에 대해 새 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방향을 둘러싸고 구츠코프와 토론을 벌렸다.

 

“...지주들로 결성된 단체가 입헌의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들은 현재 계획되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대체로 함께 행동하고 있다.....”24)

 

1916-17년에 쓴 크레인의 편지에서는, 그가 분명히 2월혁명 지도자들을 지원했으며, 그리고 그가 윌슨 대통령의 측근이기 때문에 그 지원은 사실상 미국정부의 지원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 시절 크레인의 편지 내용을 보면, 짜르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미국정부가 부랴부랴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최초의 국가가 되게 한 사람이 바로 크레인이 지명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인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인 데이비드 프란시스였다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이 곧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그 후 1917년 여름, 크레인이 아직 러시아에 머물고 있을 때 윌슨 대통령은 그를 엘리후 루트가 이끌고 있는 루트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했으며 그는 대통령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위원회는 러보프 공이 사임한 후 정권을 물려받은 새로운 케렌스키 정부의 성격을 평가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그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은 처음에 케렌스키 정부를 열렬히 환영했지만, 크레인은 환멸을 느꼈다. 볼셰비키들이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이끌고 있는 두 번째 임시정부 내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레인이 그의 딸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지원했던 페트로그라드의 한 미술학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나는 거의 매일 슈나이더양이 학교장으로 있는 정말로 훌륭한 미술학교에 점심을 먹으려 다녔다. 학교장과 그녀의 자매는 나라 밖에 나가 그들이 감독하고 있는 병원에 있었다. 그러나 학교로부터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사회주의자 군인들이 매우 위협적이었는데, 그들은 학교로 이사를 올 것이며 모든 미술 조각 모형들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겠다고 말했다. 새 러시아는 군사에만 관심이 있지 미술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들이 이사오기로 돼 있는 바로 그날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해산돼버렸고, 한동안 학교는 무사하다. 이 학교의 모든 졸업생들은 셈스트보스(지방정부)에 가서 그들의 코우스타르니(고향) 사람들의 미술작업을 거들게 되기 때문에, 비록 그녀의 학교가 황후에 의해 설립됐고 유지돼 왔지만, 좀더 개화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선 슈나이더양의 노력에 대해 어느 정도 연민의 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혁명운동은 모든 종류의 예술에 대해 거의 적개심을 품고 있다.25)

 

루트 위원회가 러시아를 떠난 후 크레인은 뒤에 남았는데, 그의 편지는 그가 매일 목격하는 것들에 점점 불안이 커져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드로 윌슨처럼 크레인은 민족자결주의 개념에 찬동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신념은 잠재적으로 불운해 보이는 러시아의 미래와 그리고 그의 러시아 친구들과 황실가족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위험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현실화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 한계를 시험받고 있다. 그의 불안이 윌슨 대통령과 공유했던 것으로 보아, 그가, 러시아에 조용히 순향(順向)하겠다는 윌슨의 바램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새 러시아정부에 대한 크레인의 시각변화는 미국 최고위 정책입안자들의 대러시아 정책을 변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17년 말경, 러시아 사태는 이제 더 이상 1916년 말과 1917년 초처럼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임시정부의 새 지도자들 아래서 민주적인 길을 가고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을 완전히 재개할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신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처음에 아마도 짜르와 황후가 입헌군주로서 다시 등극할 것이며, 설사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이 영국으로 조용히 망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 당시에 에카테린부르그에 닥쳐올 그 비극적인 사건의 가능성을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크레인과 미국정부는 여전히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점점 더 깊은 우려를 하고 있었고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군주정체의 붕괴에 몹시 당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도시가 있다면, 런던이었을 것이다. 짜르가 독일과 대항해 싸우는 전쟁의 충실한 동맹자일 뿐 아니라 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또한 가족관계의 거미줄로 영국과 연결돼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죠지 5세 왕의 사촌형제들이었다. 죠지 5세의 모후인 알렉산드라 태후는 짜르 모후인 마리 황태후와 자매간이이니까 짜르의 이모였다. 그리고 죠지 5세의 부왕인 에드워드 7세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의 모친인, 엘리스 오프 헤세와 남매간이니까 황후의 외삼촌이었다. 또한 에드워드 7세의 누이인 빅토리아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3세와 결혼을 하였으므로 그들의 아들인 카이저 빌헤름 2세에게 알렉산드라 황후의 어머니인 엘리스는 이모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르의 어머니인 마리 황태후는 카이저 빌헤름의 외숙모인 알렉산드라 태후와 자매간이었다. 유럽과 러시아 황실의 내부 관계가 이처럼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있었지만, 그러한 인척관계는 영국이나 독일이 서로 충돌할 때 꼼꼼히 따지기를 바라는 그런 유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인척관계가 실제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온 세계에 혁명바람이 불고 군주정치를 반대하는 정서가 높아지고 있었다. 로마노프 일가를 영국으로 안전하게 모시기 위한 협상은 구식달력으로 1917년 3월8일, 신식달력으로는 3월21일에 당시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러보프 공(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 사람은 1918년 12월, 황실가족의 살해에 대해 그의 잘못된 평가를 직접 퍼뜨린 장본인이다)과 임시정부 법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케렌스키에 의해 추진됐다. 데이비드 로이드 죠지 총리가 이끄는 영국 연립정부는, 러시아 황실이 독일 카이저의 친척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 죠지5세 왕의 친척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안전한 천국을 제공하는 것을 우려해야할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전체 산업활동을 정지시킬 만한 능력을 가진 과격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이끄는 파업이 전에 없이 위협이 되고 있는 마당에, 로이드 죠지는 로마노프 일가에게 공공연하게 망명처를 제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우려를 배가시킨 것은 영국왕실 자체에 대한 불안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최근 역사에서의 사건들과 함께 거의 10년 가까이 국왕부재 사태에 이르게 했던 영국내전(1642-46, 1648-52년에 차알스 1세와 의회와의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 내전으로 비화됐다 - 옮긴이)과, 그리고 지금 니콜라스가 몰린 궁지는, 비록 상당히 장기간 계속되고 있는 왕정구조일 망정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소연한 정치정세 아래서는 왕조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왕권이 그 숭고한 대좌로부터 순식간에 쫓겨났고 그리고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죠지 5세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바람에 러시아 황실가족을 영국으로 데려오는 협상은 서서히 흐지부지 돼 버렸다. 한 국가로서의 영국에게 로마노프 황실의 망명문제는 단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로마노프 가족에 대한 영국 알렉산드라 태후의 개인적인 심려는 공식적인 기록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고 있다. 아서 발포어 외무장관은 태후의 개인 비서인 아서 데이비드슨 경에게 그 문제와 관련하여 메모편지를 써 보냈다. 즉 페트로그라드 주재 영국대사인 죠지 부케넌 경으로부터 러시아 황실의 몰락에 대한 요지를 적은 한 통의 전보를 받은 국왕가족이 - 태후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국의 알렉산드라 태후는 그녀의 자매인 러시아 짜르 모후에게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이것이 영국정부와 러시아 임시정부 양쪽 모두를 곤혹스럽게 했다. 발포어 외무장관은 “정부는 영국이 러시아 군주체제를 복원시키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매우 걱정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26) 문제는, 만약 혁명위원회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 가 외국세력이 구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영-러 동맹관계와 러시아의 계속적인 대독전(對獨戰) 참전이 분노의 홍수 속에 휩쓸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유례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 외에, 발포어 외무장관은, “러시아 황실가족 모두의 안전 또한 영국 특히 왕과 왕비 및 알렉산드라 태후가 어떤 참견이나 의견표명을 최대한 자제하고 조심스럽게 회피함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아주 간단한 격려의 메시지도 쉽게 정치적 관점이나 행동으로 왜곡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27)

 

1917년 3월19일, 러시아 임시정부의 첫 외무장관인 파울 밀루코프가 죠지 부캐넌 영국대사에게, 영국이 황실가족의 영국으로의 망명을 어떻게 추진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영국이 그런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은 없었기 때문에 난처해진 부캐넌은 밀루코프에게 런던의 외무부와 상의해 보겠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런던에서의 반응은 신속했다. 3월22일, 제국 전시내각이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소집됐고, 같은 날 로이드 죠지 총리 자신이 참석한 다른 회합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도됐다. 회합에서는 전쟁이 종결될 때쯤 짜르와 그 가족에게 영국으로의 망명을 제의하기로 결정됐다. 같은 날 이 결정이 전보로 페트로그라드의 영국대사관에 통보됐는데, 단지 러시아 임시정부의 요구표명에 의해 망명초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죠지 부캐넌 경이 강조해야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초청이 이루어짐으로써 이제 만사는 니콜라스와 그 가족이 영국으로 품위 있게 망명하는 일만 남은 것으로 보였다.

 

전 유럽을 휩쓴 전쟁으로 인해 사회에 강요되고 있는 긴장이 여러 나라에서 한계점을 드러냈다.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 수, - 잠재적인 기아로 몰고 가고 있는 - 결핍과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의미상실감이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냈다.

 

1917년 봄, 이런 사회적 불안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러시아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했으나, 유럽 전체의 통치자들과 대중들은 만약 국민이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영국은 유럽의 어느 다른 나라들보다 이런 경향에 더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영제국 합참의장인 윌리엄 로버트슨 경은 프랑스 전선에 있는 야전군 사령관이며 육군원수인 더글러스 헤이그 경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부분적으로는 러시아혁명 때문에 지금 국내정세가 다소간 불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두렵습니다.”28)

 

한편 죠지5세는 니콜라스를 영국으로 데려오려는 데 대해 반대하는 많은 편지를 받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 자신 불안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29) 결국 부캐넌 대사는 망명에 관한 일을 더 이상 추진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이유는 “국왕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포함하여 상당한 규모의 반군주제운동이 영국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국왕을 공격하는 이유의 일부는 그가 그리스의 전 황제이며 국왕인 콘스탄틴(혹은 콘스탄티노스. 재위 1913-1917,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사촌이며 영국왕 죠지5세의 사촌이기도 한 콘스탄티노스 왕은 중립을 희망했으나, 베니젤로스 총리가 연합국 편에 서야된다고 주장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압력을 가하여 왕위를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양위케 함으로써 그리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하게 되었다 - 옮긴이)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만약 짜르가 이곳에 온다면 이 반군주제운동이 위험하게 증폭될지도 모르는 일이다.”였다.39)

 

마치 그간 부캐넌이 영국으로의 망명을 추진해 왔던 것에 얼마간 오해가 있었다는 듯이, 영국은 러시아 황실가족이 영국대신 프랑스로 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4월15일, 부캐넌은 이 새로운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하지만 프랑스 당국이 그 의견을 호의로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른바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인들과 결탁해 있고 독일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해 왔다는 소문이 아직도 떠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여론은 러시아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그녀에게 있으며, 더욱이 그녀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을 쳐부수는 데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친척들 사이에서는 계속 편지가 오고갔다. 4월9일, 부캐넌 대사는 발포어 외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러시아 황실가족들이 영국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가 받는다 해도 과거처럼 왜 보내지 못하는지 아무튼 그 이유를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정부의 체면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수령인들은 그러한 편지들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에 부치도록 경고를 받을 테니까, 보내도 괜찮을 텐데 말입니다..”31)

 

감정은 고조돼 가고 있었고, 그리고 1917년, 전쟁이 최고조로 격화됨에 따라, 영국 왕은 그의 외국 친척들에 대해 뚜렷하게 매우 과민해 있었다. 1917년 7월 죠지 왕은 영국왕가의 이름을 독일식의 섹스 코우버그 고우더(Saxe-Coburg-Gotha)에서 영국식의 윈저(Windsor)로 개명한다고 선언했다. 이 개명과 그리고 로마노프 일가의 영국망명에 대한 반대는 분명히 조지 왕 쪽에서 러시아 황실과 거리를 두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모든 책략들이 러시아 황실가족에 대한 망명초청을 공개리에 진행하려는 전시내각 쪽의 일부 의향을 효과적으로 훼손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죠지 부캐넌 경은 그 자신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알았다. 결국 영국에서 로마노프 일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본질은 물론, 군주정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망명 제의 건은 취소됐다.


하지만, 은신처 제공에 대한 공식제의를 공개적으로 취소하는 것과 동맹국의 전 수반인 사촌을 개인적으로 포기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점이 있다. 가족적인 수준에서 죠지 왕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로마노프가에 대해 몹시 걱정해 왔다. 모스크바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죠지와 니콜라스 사이에 오고간 편지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32)

 

그러나 니콜라스를 영국에 데리고 오겠다고 제의했을 때부터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1918년 7월17일 밤의 그 비극이 일어날 때까지, 국왕과 그의 장관들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현존기록에서는 러시아 황실가족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가지 사례는 1917년 여름에 국왕이 외무부에, 니콜라스가 토볼스크로 압송돼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던 경우이고, 다른 한 가지는 1918년 5월 역시 외무부에, 그들이 대접은 잘 받고 있느냐고 물었던 경우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른 유사한 사태에서는 죠지 왕의 (외국군주 구조)활동이 외부에 드러난 것보다는 아마도 훨씬 더 적극적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적어도 세 번에 걸쳐 그는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보다도 더 먼 친척관계에 있던 군주들에게 보호의 손길을 뻗쳤다. 예를 들면, 그는 1917년 겨울, 승승장구하는 독일군에게 생포될 상황에 처해있는 루마니아 왕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연합군 비밀계획에 동의했다.33) 죠지 왕의 개인적 비호는 심지어 전쟁 중 그의 적국 군주였던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의 차알스 황제(독일어로는 카를1세<Karl I>, 항가리 황제로는 카롤리 4세. 재위 1916-18. 프란츠 요셉 황제에 이어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의 황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측과 화평교섭을 벌이고, 다음해인 1918년 〈국가위기의 절박〉이라는 주제의 선언을 발표하여 연방제를 반포하고 통치권을 포기하였으나, 1919년 4월 오스트리아 의회가 그를 퇴위시켰다. - 옮긴이)에까지 확대됐다. 1919년에 차알스와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황제가족들은 해산된 구 제국군대의 군인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배회하고 다니는 바람에 육체적인 위험 속에 빠져 있었다. 죠지왕은 한 장교를 보내 차알스와 그의 가족을 경호하게 했으며 차알스가 퇴위하지 않고 새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떠날 수 있게 지켜주었다. 로마노프 황실과 관련된 경우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황족 중 한 사람이 교황청의 구원을 요청했다. 죠지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한 해 전인 1918년에 죠지왕은 니콜라스의 모후이며 자신의 이모인 러시아의 마리 황태후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시도했었다. 1918년 대부분을 그녀는 크리미아에서 살고 있었는데 독일군에 의해 일차 구조된 바 있었다. 독일군은 그 해 봄에 그녀가 기거하고 있는 집이 얄타로부터 밀고 온 볼셰비키들의 공격 아래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녀를 구출했다. 1918년 11월, 그녀는 흑해연안의 케이프 아이토도르 근교에 있는 세토우 카락스라 불리는 저택에 살고 있었다. 11월1일, 영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인 켈돌프 해군중장은 런던 해군본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받았다.

 

극비. 폐하께서는 궁극적으로 독일군 수비대가 철수할 경우, 러시아 황태후와 그 가족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느냐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음. 독일군 수비대가 현재까지는(원문대로 인용)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짐.35)

 

1918년 11월21일 이른 새벽, 대담한 구출작전이 신속하게 행해졌다. 영국해군 중령인 A. 털과 러시아 해군소령인 코로스토브죠프가 영국군함 트리뷴호편으로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은 황태후를 만날 수는 있었으나, 털 중령은 “황태후께서는 크리미아 탈출을 마음내켜하지 않고 계시며 분명히 모든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보고 계심. 예컨대 황태후께서는 니콜라스 짜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으로 믿고 계심”이라고 타전했다.36)

 

마리 황태후는 자칭 구조대라며 밀어닥친 사람들과 동행하기를 거절했으며, 심지어 캐나다의 백만장자이며 모험가인 죠 보일 “대령”이 나서서 특별히 모시겠다는 제의도 거절했다. 죠 보일은 바로 그 달(11월)에 루마니아 왕실가족을 구출한 바 있으며, 탈출을 거절하고 있는 황태후를 설득하기 위해 현장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1919년 마침내 황태후가 크리미아를 떠나기로 동의했을 때, 영국 군함 말보로우 호가 그녀를 말타에 있는 영국 해군기지로 모시고 왔다. 말타로 오는 도중 그리고 그 곳에 머무는 동안에 황태후는 정신이 맑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이 모두 살아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근거를 확실히 제시하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자매 중 하나인 밀포드 헤븐 후작부인은, “황태후는, 황실가족이 여름에만 들어갈 수 있는 먼 북부 러시아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자기에게 말했다”고 쓰고 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실가족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방정교회의 한 종파인 “구 신자(Old Believers)"들이라고 했다. 이 종파는 17세기 피터 대제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개혁할 때 이에 저항했었다.37)


러시아 황태후 구출작전에 죠지 왕이 영국정부와 협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왕은 상황이 다급해지자 정부의 재가없이 작전을 명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1922년에 그의 또 다른 사촌인 그리스의 앤드류 왕자 구출작전을 역시 정부의 재가없이 지시했다. 터키의 그리스 침공이라는 위급한 순간에 로이드 죠지 내각이 지원했던 한 분파와 협력하고 있었던 앤드류 왕자는 그리스 혁명가들의 손에 넘어가 죽음 일보 직전에 있었다. 죠지왕은 영국군함 칼립소 호를 아테네에 파견하여 앤드류 왕자를 구출했다. 죠지왕이 그의 다른 친척들을 위하여 이렇게 몸소 개입한 것을 감안하면, 정치적 함의와는 상관없이 러시아의 그의 사촌들과 그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전혀 손을 쓰지 않고 포기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한편, 니콜라스와 그 가족은 임시정부가 맨 처음 그들을 구금했던 곳인 짜르스코에 셀로에 에서 계속 가택(궁전) 연금상태에 있었다. 그 궁전에서의 첫 몇 달 동안 그들의 생활이 심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그들을 가택연금 시키기로 한 결정은 다음 6개월 동안 그들의 생활을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황실가족을 감금키로 한 최초의 결정에 어떤 역할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러보프 공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그들의 안전을 걱정했다고 말했다. 케렌스키는 그의 책 ‘비극으로 가는 길’에서, 러보프의 지시는, “혁명의 첫 격동에서 있음직한 과잉행동으로부터 전 최고통치자를 보호할 필요성”에서 내린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38)

 

선동가들에 의해 짜르와 황후가 독일편이라는 소문이 널리 나 있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황실가족을 토볼스크로 이송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대신하여 이 혐의를 조사했다. 그는 가족 중 알렉산드라 황후나 혹은 누가 러시아를 독일에게 팔아 넘겼다는 얘기를 실증할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혐의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러시아 작가인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는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양쪽에게 그런 혐의를 연루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관련 서류를 태워버렸으며, 한편 알렉산드라는 그녀의 일기를 불사르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출처를 대지는 못하고 있다.39)

 

케렌스키는 영국에서의 피신처 제공 거절에 대해 누가 실질적으로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미하일 테레스첸코가 1917년 6월 말 혹은 7월 초순에 당시 주러 영국대사인 부캐넌으로부터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쓴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편지는 추측컨대 “전적으로 (영국)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러시아 황실가족에게 망명처를 제공할 수 없노라고 말한 것 같다. 게다가 케렌스키는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영국)총리는 친독주의자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자고 국왕에게 진언할 수 없었다.”40) 영국이 그들의 망명처 제공을 거절함으로써, 케렌스키는 러보프로부터 황실가족을 더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 새로운 망명처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들이 누구의 주장을 믿든 상관없이, 황실가족은 비밀엄수라는 미명아래 이른 새벽에 시베리아에 있는 토볼스크로 압송됐다. 짜르 니콜라스 2세, 알렉산드라 황후 및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및 아나스타샤 공주와 황태자 알렉세이가 적십자기를 매달고 있는 2량의 열차에 실려 갔다. 그 날은 1917년 7월31일이었다. 황실가족이 탄 이 침대차는 중국동방철도회사 소유의 차량 중에서 공급된 것이다. 모두 합쳐 2량인 이 열차에는 한 무리의 종자(從者)들은 물론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즉 황실부관인 타티스체프 장군, 발리아 돌고루코프 공,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삐에르 질리아르와 차알스 시드니 깁스, 궁정 의사인 에우게네 보트킨, 황후의 개인시녀인 아나스타샤 젠드리코바, 황후의 독서낭독자인 에카테리나 슈나이더, 또 다른 시녀 소피 북소에베덴 남작부인, 하녀인 안나 데미도바 및 엘리자베타 엘스버그, 자녀들을 시중드는 이반 세드네프, 요리사 카리토노프, 시종인 알렉산더 볼코프, 그리고 알렉세이의 친구이며 선원인 N.G. 나고르니가 그들이었다. 1918년 7월17일 밤(의 비극)으로 이끈 황실가족의 하강 소용돌이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41) 그러나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죠지 왕이 유배 이후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제반조치를 강구하였으며, 심지어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도 그런 노력은 계속됐다.

 

러시아의 저쪽 건너편에 있는 일본 또한 니콜라스 짜르의 안전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은 2월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니콜라스와 비밀협약을 맺었다.42) 양국은 특히 무역 루트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동방철도와 관련된 상호원조와 지원을 약속했다. 동 협약 및 또 다른 중요성 때문에, 이제 일본인들은 상대방 정부가 붕괴되어 협약보전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으며, 새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해야할지 어떨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또한 (러시아 황실가족에 대해) 다른 곤혹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니콜라스 2세와의 개인적인 문제가 포함돼 있다. 1891년 아직 황태자였던 니콜라스가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는 자객인 듯한 작자가 그의 얼굴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바람에 부상을 당했다.43) 부상은 중상이었으며 니콜라스의 오른 쪽 이마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일본황제는 크게 당황했다. 황실끼리의 깊은 결속감과 결합된 일본문화의 논리가 일본황제로 하여금 니콜라스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개인적 의리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들 각각의 개별적인 이유들로 인해 연합국 측의 여러 최고위층들은 러시아 황실가족의 안전을 위해 손을 써야 한다는 데 신속하게 합의했다. 영국국왕과 독일 카이저는 양국간 전쟁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러시아 황실가족과 가까운 친척관계이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친척을 먼저 생각한다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각각 비밀행동이 필요했다. 미국에선, 크레인이 러시아 당국 및 황실가족 양쪽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이들 둘 다의 보호를 바랬다. 일본황제는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개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짜르를 보호해야 할 몇 가지 피치 못할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의 관심은 긴급한 것이었다 - 그들의 러시아 차관이 그들 부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시절 프랑스 가정의 50% 이상이 재정러시아 채권을 갖고 있었다.44) 그러나 연합국 중 어떤 국가 혹은 일본이 공공연하게 지원을 제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짓이 될 것이었다. 니콜라스와 그의 가족에 대해 아주 효과적으로 고조시킨 선전이 그들에 대한 어떠한 공식 지원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설사 로마노프 일가가 그들의 시베리아 유배지로부터 운 좋게 구출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조심스럽고 계산된 행동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수단은 정보기관이 “비밀의 손”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의 개입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45)


 

제3장 비밀의 손

 

보이지 않는 외교

 

러시아의 장래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점점 높아갔고, 일부 국가에선 황실가족의 미래 또한 당면문제가 되었다. 그 무렵 러시아에서 숨가쁜 속도로 계속 터지고 있었던 사건들처럼, 1917년 가을과 겨울의 일련의 동시 발생적인 사건들 - 그리고 적절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빈정거림으로 가득 찬 비망록들 - 은, 그 계략들이 당시의 공식적인 시각과는 전혀 달리 니콜라스와 그 가족들과 관련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제적인 구출작전의 첫 징후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들의 바로 면전에서 반혁명군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연합국의 모험적인 정치공세 또한 공식화되고 있었다.

 

임시정부 아래서는 황실가족에게 위험이 없었다. 그러나 일부 연합국 지도자들이 황실가족 문제에 몰래 개입하려는 욕구를 점차 드러냄으로써 사태가 곧 복잡하게 되었다. 트로츠키가 1917년 5월5일 미국에서 귀국했다. 제1차 전(全)러시아사회주의혁명당대회가 5월25일에 열렸다. 6월16일 케렌스키는 러시아군에게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취하도록 지시했고, 연합국 측은 러시아가 이제 연합국의 일원으로 완전히 되돌아 왔다고 반겼다.1) 일반적으로 니콜라스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한 일기는, 6월 19일과 27일 양일에 그가 군의 활동을 열심히 추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월19일자 그의 일기는 졸로초브스크에서의 전투에 대한 매우 상세한 묘사로 시작하여 “하느님, 행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즐거운 소식을 들은 이후에 하느님을 전혀 다르게 느꼈습니다.”며 매우 만족한 투로 끝을 맺고 있었다.2)

 

불행히도 그의 기쁨은 짧게 끝났다. 7월 초순, 케렌스키의 명령으로 공격을 감행했던 러시아군이 무너졌고, 독일군이 타르노폴의 러시아 전선을 돌파했다. 7월 중순이 지나자 새 정부의 여러 파벌간에 쟁투가 벌어졌다. 볼셰비키들이 시도했던 쿠데타를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케렌스키는 공개적으로 레닌을 독일과 내통한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술책을 썼다. 그의 목적은 러시아의 청년들을 대독전에 동참토록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역효과를 냈다. 볼셰비키중앙위원회는 레닌에 대한 케렌스키의 비난을 “부르조아의 앙탈”로 몰아 부쳤다.3) 케렌스키는 사태를 잘못 다뤘다. 그가 국면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결과 볼셰비키들은 단지 일시적으로 중립화되었다. 곧 러보프가 사임하고 케렌스키에게 새 정부 조각을 요청했다. 크레인의 친구들이었던 러보프, 구츠코프 및 밀루코프가 사임한 이후에도, 황실가족은 케렌스키의 보호를 받았다.

 

7월 중순, 케렌스키의 보좌관이며 훗날 황실가족 구출계획에 두각을 나타낼 보리스 사빈코프가 케렌스키에게 현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인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을 해임하고 라브르 코로닐로프 장군을 임명하도록 권고했다. 코르닐로프는 일련의 요구사항들을 내걸어 수용된 후인 7월말에 취임했다.4)

 

니콜라스는 그 해 여름 내내 이러한 사건들을 접하며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관한 평가를 계속했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새 임시정부가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그가 수완을 발휘하여 이 어려운 난국을 잘 타개해 갔으면 싶다. 현재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과제는 군의 기강을 바로잡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며, 또한 러시아의 국내상황에 어떤 종류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5)

 

사태는 니콜라스의 소망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진전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렌스키의 서투른 판단이 레닌에게 권력을 안겨주는 사태가 벌어졌다. 케렌스키 정부 정책에 실망하게 된 코르닐로프 장군이 페트로그라드에 군대를 진격시켜 민.군합동 통치를 요구했다. 그는 케렌스키가 마지못해 조용히 동의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반역자로 내몰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는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가 그의 정부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볼셰비키 다수파와 소비에트가 완전히 독일 최고사령부의 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 코르닐로프는, 지난 달 볼셰비키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케렌스키가 볼셰비키와 레닌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6)

 

이에 반해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의도와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나아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처음에 그는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그의 정부에 볼셰비키들을 실제로 입각시켰다. 그는 구금돼 있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석방했는데, 그들만이 페트로그라드의 무장 노동자들을 움직여 코르닐로프에 저항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코르닐로프는 패하게 되고, 바로 3개월 후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제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케렌스키는 첫 “혁명의 격류”로부터 황실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및 그들을 따르고 있는 50명의 가신들을 더 안전한 곳인 토볼스크로 조용히 옮겼다. 짜르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질리아르는 훗날, 코르닐로프의 패배 소식을 접한 짜르가 자신의 퇴위를 후회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다.7) 통신 라인이 아직 열려 있었기 때문에 토볼스크에 있는 짜르는 정치적 군사적 사건 모두를 추적하고 있었다. 황실가족이 토볼스크로 이송되고 있을 때, 앞으로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일어날 재난의 전조가 이미 나타났다. 전보 한 통이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소비에트로부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도착했다. 이 전보는 현지 당 비서인 M. 메드베데프와 노병(勞兵)대표자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을 대리한 S 데르자빈이 서명한 것이었는데, 황실가족을 태운 기차가 토볼스크로 이동해 가는 8월4일 티우멘으로 가는 길에 에카테린부르그를 거쳐 갈 것인지 확인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 기차가 노보니콜라에브스크로 가서 하르빈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고, 그 바람에 민중들이 자극하여 흥분이 고조되고 있음.......그게 사실이라면 (이번 토볼스크 이송은) 황실가족을 ‘빼돌리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8)

 

메드베데프9)와 데르자빈은, 중앙집행위원회와 노병농(勞兵農)대표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참여했는지를 물었다. 이미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는 ‘빼돌리기 위한 조치’라고 함으로써 황실가족에 대한 위협을 암시하는 빈정거리는 어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부터 회신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9월말까지 케렌스키는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그의 마지막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황실가족에 대한 보호는 에우게네 코빌린스키 대령의 특별배려 아래 계속되었다. 코빌린스키 대령은 짜르스코에 셀로 주둔군 사령관이었으며 황실가족과 함께 토볼스크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케렌스키가 주의해서 임명한, 지질학자이며 사회주의 혁명가인 바실리 판크라토프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10) 판크라토프는 한 때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로 도피생활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10월에 케렌스키의 실각이 예정되면서 정부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혁명국방위원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했으며 볼셰비키중앙위원회는 “당면 과업으로서 무장폭동”을 일으키기로 한 레닌의 결정을 채택했다. 그 직후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소비에트와 벨루로시의 민스크 소비에트가 ‘북부지역 소비에트의회’를 구성했고, 10월19일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회가 소비에트 정권수립을 선언했다.11) 10월24일 케렌스키는 그의 마지막 연설을 해야했다. 10월혁명이 10월25일에 시작되었으며, 공화국평의회는 그 날 정오에 군대에 의해 폐쇄됐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닌이 같은 날 오후 3시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았다. 케렌스키의 각료들이 허겁지겁 모여서 협의하고 있었던 겨울궁전 각의(閣議)는 그 날 밤 9시에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다음날 새벽 2시에 붕괴됐다. 러시아최고소비에트는 평화와 국가에 대한 포고령을 통과시키고, 새 정부 - 공산당인민위원 평의회(Council of Peoples' Commissars)를 구성했다. 의회는 10월27일 오전 5시에 휴회했다.12)

 

여느 때처럼 짜르는 “혁명”에 관한 소식을 들었고 11월17일자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2주일 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보도한 신문을 읽고 혐오감이 든다.”13)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의 움직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토볼스크에서 니콜라스가 느꼈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은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입증됐다.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에서의 분위기가 점점 더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이 무렵 토볼스크는 가장 보수적인 사회민주당원들인 멘셰비키들과, 입헌민주당원들이나 카데트 당(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주창한 정당, 1905년에 창당됨 - 옮긴이)보다는 더 리버럴했지만 볼셰비키들보다는 덜 과격한 사회혁명가들의 지배아래 아직 있었다.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에카테린부르그 및 옴스크와 같은 다른 도시들은 이미 볼셰비키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토볼스크는 몇 달 동안 그들의 더 온건한 분파의 장악 아래 남아 있었다.14)

 

긴장은 계속 확산돼 갔다. 독일은 소련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핀란드의 칼 구스타프 만넬하임 남작을 돕기 위해 헬싱키에 그라프 폰 데르 골츠 휘하의 1개 사단을 파견했다. 독일군은 잠수함 기지들을 확보하기 위해 핀란드 국경을 가로질러 이동, 러시아의 북극항구들인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압력을 가했다.15) 핀란드가 12월6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연합국을 경악시켰다. 연합국은 독일이 이제 프랑스 및 영국과 싸우기 위해 그들의 군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로마노프 가족을 구출하여 영국으로 몰래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잠정적으로 방해할 수 있는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12월 하순에 연합국최고전쟁평의회(Allied Supreme War Council)가 프랑스에서 그 업무를 시작했다. 4대 강국 -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및 미국 - 이 승전전략을 협의 조정하는 책임을 가진 평의회를 구성한 것이다. 연합군의 각국 고위 장성들 가운데서 선출된 상임 대표들이 일주일에 두 차례씩 회합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이 기구는 시베리아에서 전쟁포로로 구금돼 있는 수 만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병사(1918년,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이 해체되고, 동 제국에 편입돼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이 해방됨으로써 당초 본의 아니게 독일편에 가담하여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던 체코인 병사들이 연합국측과 볼셰비키정권과의 협상으로 석방되었는데, 이들이 러시아 혁명기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 옮긴이)들을 활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연합군 평의회는 러시아와의 성공적인 협의 끝에 약 4만 명의 체코군 포로들을 석방하여 서부전선인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이 결정적인 조치는 이들 석방된 포로들이 다음 해 7월경 로마노프 가족이 유폐돼 있는 저택으로부터 겨우 몇 마일 바깥에서 (체코군의) 시베리아 개입으로 알려지게 된 (반볼셰비키) 작전을 펼침으로써 (황실가족에게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가 된다.

 

이 평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4명의 장성들은 수많은 난제들과 씨름했으며 때때로 이론이 분분하여 논쟁을 벌였다. 영국의 로이드 죠지 총리와 헨리 휴 윌슨 대장은 서부전선이 아니라 갈리폴리 혹은 다르다넬스의 어떤 지역에서 기선을 잡으면 전쟁에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문제에 개입하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했는데, 프랑스의 막시므 웨이강 대장이나 이탈리아의 루이지 콘테 카도르나 대장, 심지어 미국의 타스크 블리스 중장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영국의 의도는 이러했다.

 

영국은 지켜 내야할 보물 하나 - 인도 - 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영국본토를 지키는 것과 꼭 같이 인도를 지키기 위해선 어떤 광포한 행동도 불사할 태세였다. 영국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일이 보크하라(우즈베키스탄의 지방 도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며, 그리고 보크하라에서 일어난 일이 봄베이에 무슨 영향을 줄 것인지를 알고있었다. 그들은 온 세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선동하고 있는 볼셰비키들의 집권이 저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1917년 말에 트랜스코카시아의 코작크병들과 남부 러시아 돈 강변에서 작전을 펴고 있는 반볼셰비키군들에게 무제한의 자금과 무기공급을 시작했다.16)

 

개입에는 자금이 들어간다. 자금은 러시아에서의 반대파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어떤 것이었다. 영국과 다른 연합국들은 볼셰비키 정권의 전복을 유도하는 조건이 야기되기를 원했으며, 그렇게 할만한 강력한 재정적 이유를 분명히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해 왔다. 12월 중순경 볼셰비키들은 외국에 진 모든 부채에 대한 채무변제를 거부한다는 소리를 이미 입밖에 내고 있었다. 이것은 당연히 연합국들에게 커다란 우려를 안겨주었다. 짜르정부가 여러 국가들에게 진 전쟁부채 중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액수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케렌스키 정부가 진 부채도 상당했다. 제1차대전 도해서(Atlas of the First World War)에 따르면, 1917년 7월 현재 러시아는 영국에 27억 6천만 파운드, 프랑스에 7억 6천만 달러, 미국에 2억 8천만 달러, 이탈리아에 1억 달러, 일본에 1억 달러(당시 화폐가치)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17) 지금까지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이미 러시아 짜르정부 및 임시정부 앞으로 선적되어왔으며, 비축된 무기는 이미 쓸모 없게 된 반면 받아야할 엄청난 액수의 돈이 부채자산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곧 미국, 영국, 프랑스 및 심지어 일본의 거대기업들의 재정원장(元帳)에 곧 부채로 전환될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볼셰비키 정권의 전복을 조종하여 성공하는 날에는, 러시아를 통치하기 위해 누구를 전면에 내세우느냐가 긴급한 문제로 제기됐다.

 

이 장 뒷부분에 제시한 서류들은, 연합국 정부들의 몇몇 고위 인사들이 짜르와 그 가족들을 구출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부 러시아에서 안전하게 모시기로 결정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가능하다면, 니콜라스를 수반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그를 짜르로 재 추대하는 것도 선택사항이 될 것이었다. 이 주장은 1918년 12월 하순 차알스 크레인의 친구이며 크레인이 추천한 사람들 중의 또 다른 한 사림인 주중 미국대사 폴 라인쉬가 미 국무부에 보낸 한 장의 편지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라인쉬의 이 편지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일부 지역에서 짜르의 복위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히 국무부가 보낸 질문에 대한 답장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내용을 보자.

 

시베리아의 트랜스바이칼 및 우랄 지역에서의 군주제 환영움직임에 관한 보고.

 

이 주제에 대해 본인이 관할하고 있는 모든 영사 사무소로부터 온 보고서 개요............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은 주민의 80%가 군주제에 반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델리아빈스 지역은 일반적인 여론이 군주제를 강력히 선호하고 있는데, 특히 혼란에 지친 농민들 가운데서 그러합니다.........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군주제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델리아빈스 지역에선 겉보기엔 아무도 군주제의 부활을 원하는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확실히 현 상태의 교육과 발전으로 강력한 통합 러시아를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입헌군주제에 호의를 가진 부류들이(원문대로 옮김) 점점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옴스크 지역에선, 정부형태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충분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계층들이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선 입헌군주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이 (그 방향으로) 변해 가는 순간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노보 니콜라에브스크 지역에선, 일부 농민들이 군주제를 선호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군장교들은 군주제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계속 군주제 편입니다........이르쿠츠쿠지역은 아마도 주민들의 약 60%가 입헌군주제를 선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케렌스키와 볼셰비키들의 실패에 기인한 것입니다...........2년 전 혁명을 바랐던 자유주의적 지도자들은 더 이상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갖고있지 않으며, 볼셰비키와의 접촉이 그들로 하여금 악몽으로부터 깨어난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18)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의 미국 영사였던 어네스트 해리스가 라인쉬 대사를 위해 이런 주목할만한 평가서를 작성했다. 해리스는, 일부에서 얘기하는 입헌군주제가 러시아에 채택될 수 있으려면 6개월에서 2년이란 기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얼마나 걸릴지 전망하고싶지 않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19) 이 보고서에서 더욱 주목할만한 관점 중 하나는 옴스크에서 온 내용이다. 거기서 해리스는 로마노프 실종에 대한 최고조사책임자가 된 알렉산더 콜차크 해군대장과 바로 친구가 되었다.

 

이 흥미로운 교제가 이루어진 며칠 후인 12월29일과 30일에, “지급(至急)...(황실)가족을 일곱 번 확인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다른 일련의 전보들이 미국에서 런던과 파리에 타전됐다.20) 이 전보들은 제16장에서 상세히 검토되겠지만, 왕정복고 가능성을 묻고 있는 12월18일의 해리스의 커뮤니케이션 타이밍이, 런던에서 파리로 보낸 “(황실)가족을 일곱 번 확인함”이라는 전보를 생각할 때 굉장히 시사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한 것이다. 전보를 보낸 날짜가 12월 29일과 30일인데 이 때는 바로 윌슨 대통령 내외가 죠지 국왕과 메어리 왕비의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거의 같은 시간에 발생한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만약 (“지급.....가족을 일곱 번 확인함”이라는 전보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미 죽었던 것으로 추정된 황실가족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로마노프 왕국의 재건가능성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고 있는 시간의 틀 속에 있지 않는 한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이 그 전보들의 그럴듯한 설명이 될 수 있을 지 여부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캐나다 위니페그에 있는 허드슨즈 베이사(社)의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는 문서보관소에 있다. 허드슨즈 베이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들 중 하나로 1917년 말에도 있었고 지금도 남아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허드슨즈 베이사는, 본사를 런던의 라임가에 두었지만 프랑스, 러시아 및 루마니아에 구매대리점들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의 서류들 속에는 로마노프 일가에 관한 실마리 중 하나가 있다. 짜르를 위한 저택 하나가 지어지고 있었는데, 연합국이 구출시도를 계획했다는 증거이다.21)

 

1917년 11월 말, 차알스 크레인은 러시아에서 프랑스를 경유 영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며 미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의 보좌관이었던 리차드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영국으로 여행 중에 있으며, 영국체재 중 연락사항이 있으면 “웨스트민스트 궁전의 코트니 일버트 경(하원 담당) 앞”22)으로 편지를 보내라고 알렸다. 크레인이 런던에 머무는 동안에 북부러시아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저택건설작업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였는지 의심스럽다. 그 저택의 조립과 건설은 허드슨즈 베이사의 후원을 받았다. 아르한겔스크에서 자재를 모아 1917년 11월말 경에 무르만스크에서 착공할 예정이었는데, 자금은 영국해군본부가 부담키로 했다.23) 지금 와서 보면 그 저택은 짜르와 그 가족을 위한 안전가옥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던 것 같은데 - 토볼스크나 에카테린부르그 지역 외에서 황실가족을 머물게 하기 위한 어떤 건물이 있었다는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1918년 10월 영국해군본부가 타전하여 아르한겔스크에서 중계된 한 통의 전보에서 이 저택이 다음과 같이 언급돼 있다.

 

무르만스크 기술산업협회를 대표하고 있는 브로우드씨로부터 무르만스크의 영국 영사관 근방에 있는 드비드사(社)의 땅에 고(故) 짜르를 위해 이전에 계획했던 건물을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데 이어 지금은 푸울 장군이나 켐프 해군제독이 이 건물을 이용할 것이므로 그에 맞도록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건물은 가열등촉기구 등을 갖추게 돼 있는데, 지금 캄볼린 엔지니어사가 그 조립책임을 맡고 있음....24)

 

전보에서 “고(故) 짜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비록 이 전보 메시지는 건물이 완공되면 영국 장군과 해군제독이 사용하게 된다고 시사하고 있지만, 허드슨즈 베이사의 기록은 이 집이 1917년 11월 말 무르만스크에서 건설되고 있었을 때의 당초 기능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 건물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의 일부는 마카로프 건설회사에 지불되어야 했다. 신기하게도 브루소프 앤드 마카로프 건설회사는 황실가족의 생존을 단언한 책인 짜르구출하기에 언급돼 있다.

 

허드슨즈 베이사의 서류에 자세히 설명돼 있는 그 저택은 접시, 식당, 침대, 담요 등이 7인용으로 되어 있었다. 더욱이 집 전체의 대부분의 설비품목 역시 7인용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 허드슨즈 베이사의 기술자였던 바바라 켈시에 의하면, 일반적인 설비품목과는 전혀 다른 호화품목을 강조하고 있었다고 한다.25) 게다가, 당시 오고간 대부분의 전보들은 그 집이 허드슨즈 베이사 직원들의 숙소건물임을 시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본부가 건설공사 뿐 아니라 가구집기 및 설비품목과 관련된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고, 설비 또한 희귀한 것이었다. 영국 해군본부가 허드슨즈 베이사 종업원들의 식료품이나 생활주거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했다고 시사하는 기록은 없다. 그와 같은 재정적인 처리와 준비는 무르만스크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변경기지를 위한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짜르가 퇴위했을 때 말했던 마지막 소망 - 무르만스크에나 가 있고싶다 - 을 연합국 측이 조용히 실현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고는 해석될 수 없다는 얘기다.

 

“고(故) 짜르를 위해 지어졌다는” 이 저택에 대한 미스테리는 1975년, 로이드 죠지 총리의 전 비서가 쓴 책, 로이드 죠지와 함께 한 인생: A.J. 실베스터의 일기, 1931-45(Life with Lloyd George: The Diary of A.J. Sylvester, 1931-45)가 발간됨으로써 더욱 심화됐다.26) 그 책에서 실베스터는 죠지5세가 제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로이드 죠지가 쓴 책이 곧 발간된다는 것을 몹시 우려했다고 밝혔다. 실베스터에 의하면 실제로 죠지5세는 로이드 죠지가 쓴 책의 일부분을 검열했으며 짜르를 위한 저택건축에 대해서는 쓰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왕은 북부 러시아에서의 영국 활동에 대한 모든 내용을 삭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허드슨즈 베이사의 서류에서 언급하고 있던 그 저택은 황실가족을 시베리아 바깥으로 데려오려는 계획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이 이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윌슨 대통령의 러시아정책 조언자인 차알스 크레인 또한 볼셰비키 정부를 타도하고 황실가족을 구출하려는 종합계획에 연루돼 있다. 영국에 가기 전 크레인은 평소와 같이, 황후의 재정고문이며 대공비(大公妃)들의 신탁재산 보관인이었던, 오랜 친구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의 집에 머물렀다.27) 1917년 여름 이전의 몇 달 동안 크레인은 키에프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1918년에 일어날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그의 오랜 친구이며 곧 그의 딸의 시아버지가 될, 그리고 체코군 포로들의 석방교섭에 나섰고 장차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토마스 마사리크였으며, 다른 또 한 사람은 연합국의 큰 희망으로 점 찍혀 금융사업계획에 의해 자금지원을 받게 될 백계 러시아군 장군인 알렉시스 칼레딘이었다.

 

키에프 회합을 우리들이 알게 된 것은 마사리크 때문이다. 크레인이 남긴 서류에선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윌슨 대통령의 이 “중개인”은 그가 수행할 임무 중의 하나 때문에 영국에 간 것 같으며, 1년 후인 1918년 12월엔 다시 대통령을 위한 “비밀임무”로 중국을 여행한 것 같다.29) 계획은 착착 진행돼 갔으며, 그리고 크레인은 미국의 교섭 선발대였다. 그가 영국을 떠난 1917년 11월에 바로 문제의 그 저택공사에 박차가 가해졌으며, 칼레딘의 반 볼셰비키 군에게 조달할 자금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30) 크레인이 칼레딘을 지원하기 위해 전개한 금융사업계획을 포함한 여러 활동에 깊이 개입된 것이 사실이며, 그리고 그가 개인재산으로 칼레딘과 그의 군대에 자금지원을 했다는 알렉세에프 장군의 주장도 부분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크레인이 영국서 돌아 온 직후 그는 국무장관 랜싱을 만났다. 죠지 켄넌은 그의 책에서 크레인이 그 음모에 아주 깊이 개입돼 있음을 느꼈다고 지적하고 있다.

 

12월 11일 러시아에서 막 귀국한 크레인이 국무장관을 만나러 갔다. 그는 루트 사절단원 중 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임시정부의 전망에 대한 루트 사절단의 낙관론을 공유하지 않았던 - 그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칼레딘의 행운에 대해 꼭 비관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시 러시아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미국 관리들 사이에선 크레인 자신이 칼레딘에게 개인적인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 것에 얼마간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크레인이 잘 알고 있던 밀류코프는 혁명 후 수주 안에 칼레딘의 본부에 모습을 드러낸 보수적인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러한 타협이 그렇게 놀랄 일이 못 되었다. 어떤 경우든, 크레인 역시 밀류코프와 카데트당과 밀접하게 연계된 칼레딘-알렉세예프의 활동을 위해 국가적인 지원을 강력히 권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31)

 

크레인은 아마도 개인자금으로 그 운동을 지원했겠지만, 그 역시 영국에서 공식화되고 있던 금융사업계획을 위한 미국 측 교섭 선발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계획에는 짜르를 구출하여 전쟁 결과가 확정될 때까지 그 가족들을 안전한 장소에 모셔두려는 미발표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제출된 금융사업계획은 연합국 자금의 통로가 될 시베리아은행을 포함하여 일련의 은행들을 통제, 이용해야 했다. 허드슨즈 베이사에서 나온 새로운 증거들을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 금융사업계획의 목적이 금융하부구조를 만들어, 볼셰비키들이 타도된 후 대 러시아가 다시 세워질 때까지의 일정한 기간 동안, 시베리아를 (주로 볼셰비키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유럽 쪽 러시아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하려고 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짜르를 구출하여 어떤 방식으로 다시 권력에 복귀시키거나 혹은 준비할 시간을 벌게 하는 길이기도 했다. 재정지원이 금융사업계획을 통해 골고루 살포되는 결과를 기대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주재 미국영사인 드위트 푸울은 1월 중순에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에서 적당한 시기에 대 B(볼셰비키)공격을 위한 은밀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32)

 

이 금융사업계획과 허드슨즈 베이사 사람들이 함께 움직였다. 이 회사는 러시아 정부는 물론 프랑스군을 위한 식료품 공급회사였을 뿐 아니라, 런던에서는 북부 러시아에서의 정보활동과 무르만스크의 그 저택건설을 위한 이상적인 경리담당회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앞서 우리가 해리스 전보에서 보았듯이, 러시아 입헌군주국을 위한 계획들은, 상황이 좋아진다면, 왕정복고로 이어질 수 있는 과정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또한 그 당시 시베리아와 무르만스크에 있었던 사람들의 편지와 일기 내용으로부터, 카라해(Kara Sea)와 무르만스크가 황실가족을 감금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한 계획에 중요한 곳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17년 말 경에 절박감이 연합국을 엄습했다. 볼셰비키들이 내세우고 있는 안건들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게 됨으로써, 수많은 연합국측 기업들에 미결인 채로 남아있는 러시아의 엄청난 부채33)와, 그리고 독일편을 들며 전쟁(제1차 대전)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 볼셰비키들 때문에 위협을 느낀 연합국들은 그들의 계획을 굳히기 시작했다. 12월27일 그간 연합국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던 일이 현실화 됐다 - 볼셰비키들이 모든 “외국 부채”에 대해 공식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이다. 다행히 그 때까지 연합국들은 러시아전선의 상실에서 오는 낭패를 피하기 위한, 그리고 잠재적인 금융재앙을 피하기 위한 조치들을 이미 취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12월의 나머지 며칠간 크레인은 윌슨 대통령을 수 차례 접견했는데 분명히 미국의 러시아 전략을 다듬기 위해서였다.34) 쌍방향정책이 개발되고 있었다. 영국이 먼저 고안했지만 다른 서방정부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선 그 계획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정책은 비공식적인 대리인들을 통해, 영국이 볼셰비키 정부와 관계정상화를 원하며 영국이 그들을 타도하려했던 생각은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이었다. 이 의도적인 혼란정책은 볼셰비키정권 타도를 위해 꾀해진 쌍방향정책의 핵심이었다. 영국은 볼셰비키들이 의구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파트너인 미국의 민주적 이상주의의 외투를 정치적 자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영국은 나아가 그들이 우크라이나의 백계 러시아군 혹은 코사크군을 접촉한 것은 단순한 필요에서였다고 설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금융사업계획의 진정한 의도에는 다른 진로가 하나 있었다. 이것은 “코삭크와 코카시아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을 매수하여” 볼셰비키 정권을 전복하도록 그들에게 자금을 대어주는 것이었으며, 이 매수를 위한 자금지불에는 미국의 협조도 있었다. 나아가 영국은 러시아 임시정부와, 그리고 볼셰비키들과 싸우고 있는 그들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정보원들을 파견했다. 영국 전시내각은 “북부 러시아에서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볼셰비키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누명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윌슨 대통령은, 그것이 현명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가 “페르시아 사람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서신을 영국에 보냈다.35) 12월 11일경 윌슨은 볼셰비키들과 싸우고 있는 칼레딘과 알렉세에프 장군에게 비밀지원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러나 페르시아 사람들에 대한 자금지원에 동참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윌슨의 이런 결정의 근간은 미국영사인 마띤 섬머즈의 강렬한 보고서와 남부 러시아를 여행하고 있던 크레인의 조언이었다 - 이들 두 사람은 알렉세에프와 칼레딘이 “러시아의 구세주들”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남부 러시아 백군들의 사기가 늘 자금 및 탄약부족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로버트 랜싱 국무장관은 “오직 조건부 지원약속”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 곳 상황이 용기를 북돋아 주는 약간의 격려의 말로 호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36)

 

불간섭정책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후 러시아 문제로 고민해 왔던 윌슨 대통령은 1917년 12월 11일 밤에 또한 랜싱 국무장관을 만났다. 랜싱은 칼레딘, 알렉세에프, 브루실로프 및 코르닐로프 장군들은 물론 “칼레딘이 수행하고 있는 활동의 강성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37) 대통령의 적극적인 반응을 받아 낸 랜싱은 이튿날 재무장관과 미국 비밀정보기관 책임자인 윌리엄 G. 맥아두를 만났다. 맥아두는 윌슨의 사위였으며 어딘지 냉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 그의 딸은 러시아 임시정부의 워싱턴 주재 대사관 이등서기관과 결혼했다(미국은 1930년대까지 볼셰비키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미국주재 대사관 개설을 허용하지 않았다). 윌슨의 사위가, 볼셰비키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크레인이 지명한 사람인 “칼레딘에 대한 지원”에 동의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러시아 남부에서 칼레딘을 지원하기 위해 심사숙고하고 있는 랜싱국무장관으로부터 받은 전문에 “전적으로 이를 승인함”이라고 썼다.

 

그 전문은 이튿날 미국의 비밀의 손으로 알려진 런던주재 미국 재무부 정보원인 오스카 크로스비에게 보내졌다. 칼레딘과 코르닐로프 부대들을 칭찬하면서 랜싱은 미국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정부가 칼레딘과 그 일파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페트로그라드 당국(볼셰비키 정권)을 승인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칼레딘 일파를 사실상 실질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는, 현행법 아래서 미국정부는 그가 현재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자금지원을 해 줄 수 없다. 그런데 그 그룹은 현재로선 정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행 가능해 보이는 한 가지 방법은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필요한 만큼 칼레딘의 모험사업에 자금지원을 하고 그 돈을 미국정부가 뒷바라지 해주는 것이다.39)

 

랜싱 국무장관은 그래서 크로스비에게 지시를 내려 현지 미국대사와 연합국 당국들과 협의하여 미국의 이러한 제안을 그들이 수락할 수 있는지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랜싱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수락한다면 얼마만한 자금이 필요한지를 알아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40)

 

랜싱은, "미국이 칼레딘의 활동에 대한 지지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과 더욱이 자금지원을 한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복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41) 러시아에서의 활동은 빈틈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에 한정돼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남부 러시아에서의 반 볼셰비키군에 대한 간접적이고 은밀한 재정지원 계획은 매우 민감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윌슨과 랜싱이 국무부에 있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일부 보좌관들에게 본래 불법적이었던 그 일을 지시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정치적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필립스는, 메시지 하나가 크로스비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고는, "... 나와 폴크 둘 다 러시아 사태를 담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너무 불합리하다.”며 몹시 화를 냈다.42)

 

12월 17일,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 사태에 관한 한 사실상의 국무장관 역할을 하는 하우스 대령과 법률상의 국무장관인 로버트 랜싱을 만났다. 미국 주재 영국정보기관 책임자인 윌리엄 와이즈먼과 가까웠던 하우스 대령은 (영국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대통령은 독일과 싸우고자 하는 폴란드, 코자크 등에게 어떤 식으로든 가능한 방법으로 자금지원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음. 대통령은 그러한 비조직적인 활동에 직접 돈을 빌려줄 권한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 - 만약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 을 통해 그러기를 원하고 있음.43)

 

크로스비도, 미국대사인 월터 하인즈 페이지도 미국의 개입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엔 반 볼셰비키 운동이 권력쟁취에 성공할 것 같지 않았으며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불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 재무부 관리인 죤 메이나르드 케인즈(훗날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 된다)는, 러시아위원회 맴버인 로버트 세실 경과 영국 전시내각에 서면으로 된 미국의 지원약속을 받아내는 시도를 하도록 제의했다. 12월21일, 하우스 대령으로부터, 프랑스와 영국을 통해 자금지원을 하고싶어하는 윌슨의 의향을 확인하는 전문이 도착했다.44) 데이비드 포글송이 그의 책 미국의 대 볼세비즘 비밀전쟁(America's Secret War Against Bolshevism)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윌슨이 미국의 지원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려했던 이유는 “대통령 권한의 법적인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동맹국들을 통해 돈을 보내려한” 것이다.45)

 

얼마 후 세실 경은 러시아위원회의 다른 멤버인 알프레드 밀너 경을 동반하고 파리의 까이도르세(Quai d'Orsay)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프랑스 대표들과 함께, 미국이 추가적인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에 그리고 영국이 다른 지역들을 위해 자금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정부는 반 볼셰비키전으로 분투하고 있는 알렉세에프 장군에게 1억 프랑의 지원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후 곧 미국 영사 드위트 푸울이 “통상상황”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로스토프지역을 여행했는데, 그의 실질적인 여행목적은 칼레딘을 만나 그의 군사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역시 미국이 칼레딘 부대를 지원해야한다고 생각했다.46) 키에프와 로스토프는 크레인, 마사리크 및 드위트 푸울이 모두 방문하여 활동했던 중심지들이었다.

 

검은 구름이 지평선에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필립스, 크로스비, 페이지 및 하우스는 처음엔 쌍방향정책의 자금지원을 반대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필립스는 그해 크리스머스 이튿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에서의 미국정책은 마침내 확실하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밀리에 크로스비에게 전보를 쳐 영.불 양국 정부가 볼셰비키 정권과 싸우고 있는 남부 러시아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해 보이는 만큼의 돈을 지원할 수 있도록 미국정부가 사전에 충분한 보증을 서 줄 의향이 있음을 이들 정부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모든 연합국 정부들이 동시에 한 배에 올라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미국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 설사 남부 러시아에서의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연합국 중 하나는 나쁜 상황을 모면하는 길이 될 것이다.47)

 

분명히 모든 것이 꼭 잘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부 우려가 있었고, 그리고 만일 어떤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경우에는 미국이 높은 도덕적 기반을 가지게 될 것으로 보였다. 1918년 여름 이 모든 단편들이 합쳐지게 되었을 때, 이것은 실제로 큰 문제가 되었음이 분명했다. 역사적으로 이 때의 대 러시아정책의 실패에 대해,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이 받았던 가혹한 비난을 모면했다.

 

칼레딘과 다른 백군지도자들에 대한 지원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일을 성사시킨 사람은 차알스 크레인이었다. 그는 귀족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친구였고, 12월 회합 땐 윌슨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48) 다시금 프글송은 미국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적이고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던 반면, 은밀히 영국 및 프랑스와 함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49)

 

맥아두 장관과 윌슨 대통령이 노력한 결과, 크로스비는 1월초순경 그 계획에 협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1월 말 크로스비는 자금이전 방법 때문에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이 제공하기로 합의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러나,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차관으로 표시하지 않으려고 했던 “미국차관”을 의미하는 신용대부형태로 된 상환(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사후지불)을 추적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그 돈은 마치 1918년 5월 마이클 그루젠버그가 레닌의 요청으로 업무차 러시아에 가는 길에 미국으로부터 유럽으로 돈을 옮겨갔던 것처럼, 미국의 각종 정부기관들을 통해 흘러갔을 것이다.50) 이들 자금은 윌슨의 가까운 동료인 죠지 크릴이 책임자로 있는 정보기관을 통해 보내졌다.51) 혹시 전시무역위원회가 담당기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기관이 짜르 정부와 임시정부가 미국에 진 부채의 일부를 탕감해주기 위한 파이프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던) 재정러시아 대사관을 통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방법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커넥션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당시 미국 재무장관인 윌리엄 G. 맥아두의 사위가 미국주재 러시아 대사인 보리스 바크메티프의 2등 서기관이어서 비밀 금융거래를 취급할 이상적인 후보였던 것이다.52)

금융사업계획이 부닥치게 될 어려움에 대한 러시아위원회 멤버인 세실 경의 태도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속에 요약돼 있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남부 러시아에서 필사적인 자세를 고수할 각오가 돼 있어야한다.”53)

 

볼셰비키들은 권력과 영향력을 쟁취하고 있었으며, 영국이 신뢰할 수 있다고 유일하게 확인한 세력은 남부 러시아의 백계 이용군이었다. 일단 러시아에 들어간 돈은, 1917년 12월에 수립돼 영국인들이 조종하고 있는 금융사업계획을 통해 움직였는데, 그 책임자가 짜르와 그 가족의 절친한 친구며 황실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위험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1월 22일 경 페트로그라드의 영국 영사는 이제 금융사업계획의 형태로 남부 러시아에 자금을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무렵 칼레딘의 코사크군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체되어 극도로 절망한 칼레딘은 2월 11일 자살했다. 남부 러시아에서의 상황이 갑자기 악화되고 있었던 데다가 자신이 기만을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사업계획을 이용하는 “자금 이동방법”이 서구화폐를 루불화로 바꾸는 데서 난관에 봉착했다. 미국 영사인 드위트 푸울은 그가 개인적으로 “달러 환어음을 발행”하여 “상당한 금액의 루불화를 현지에서 살 수 있으니“ 그런 방법으로 하자고 제의했다.54)

 

금융사업계획의 관리감독을 맡게된 인도군 소속의 영국군 소령인 테렌스 키이즈(그가 대령이 된 1개월 후에 준장으로 진급했고 테렌스 키이즈 경이 되었다)의 주의 깊은 관리 아래, 연합국들은 금융하부조직을 만들고 통화를 태환하기 위해 급히 서둘렀다. 하지만 논리적인 문제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금융하부조직은 시작부터 불법이었고 그리고 일단 모든 서류들의 날짜를 적절한 시기로 소급시켰는데, 레닌은, 시베리아에 있는 은행을 포함하여 수많은 러시아 은행들의 다양한 소유권 이전을 위한 거래가 자신이 이들 은행들을 국유화시키기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55) 음모가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키이즈의 위험을 무릅쓴 노력과 계속적인 대처의 결과였는데, 그의 비밀작전에는 많은 미해결부분들이 있었다. 이들 중 하나는 레닌에 대한 엄청난 액수의 뇌물이었다.

 

적절한 불법 금융사업계획으로 연합국들은 세실 경이 언급한 얼마간의 위험을 실제로 무릅썼다. 여기에는 심지어 레닌과의 비밀협약을 맺는 일 까지도 포함돼 있었으며, 그리고 금융사업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이 감독하게 될 황실가족을 위한 안전저택 건설 착공도 포함돼 있었다. 비밀의 손들을 위한 무대가 차려졌다.

 

제 4장 비밀의 손이 움직이다

 

절망의 시대

 

1917년 12월 내내 볼셰비키들이 그들의 통제력을 급속도로 강화해감으로서, 고도의 외국 비밀활동의 발걸음 또한 빨라지고 있었다. 새로 나온 증거로 봐, 무르만스크의 저택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금융사업계획을 위한 준비 역시 마무리 돼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영국의 한 외교 전문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의 새 볼셰비키 정부를 축출하기 위한 방안들을 준비하고 있는 주류의 정치 및 군사 조직과는 별도의 외국인 그룹들 또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볼셰비키들에 의한 광범위한 권력 남용, 그리고 구정권들과 느슨하게 관련돼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 가하는 그들의 잔악한 행위를 포함하여, 민간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통치규칙을 곧잘 어기는 그들의 행위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여러 민간 및 정부 지도자들을 낙담시켰다.

 

[미국주재 영국 대사] 스프링-라이스로부터 온 전문 4006

워싱턴

전시내각 및 폐하께

극비

 

신분이 확실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극비로 나에게 알려오기를, 그들이 미 국무부와 함께 볼셰비키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정보원들을 러시아에 파견했다고 함. 그들의 일부는 뉴욕에서 온 유태 행동주의자들임. 임무는 매우 비공식적이 될 것임.1)

 

만약 이 스프링-라이스의 전문이 정확하다면, 제이콥 쉬프(미국의 유태인 은행가)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쉬프는 재정러시아에 대해 상당한 악의를 품고 있었으며, 1905년의 러일전쟁 때 주저 없이 일본 편을 든 인물이다.2) 쉬프는 러시아의 유태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분개했으며,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면 러시아에 더 자유로운 입헌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917년 말경에 그는, 비록 지금까지 트로츠키에게 재정지원을 해오긴 했지만3), 볼셰비키 정권에 대해 결정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프리실라 로버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은 [쉬프의] 의심을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욱 굳히게 했으며, 러시아에 대한 쉬프의 자세를 재빨리 그리고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4)

 

쉬프의 태도변화는 분명히 수많은 그의 동료들을 대변한 것이었다. 스프링-라이스가 보낸 전문에 나타난 정보는 서로 공통점이 없는 그룹들이 어떻게 갑자기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볼셰비키들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절대로 독재권력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시켜왔으나,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이상을 간파한 미국의 웬만한 사람들은 이제 새 정권이 강요하고 있는 자유의 결여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그 지도자들이 신을 부인하며 잔학한 행동을 벌임으로써 혁명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스프링-라이스의 전문은 또한 영국 정보원인 시드니 레일리가 어떻게 러시아로 되돌아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 날 통상 “스파이들의 에이스”로 알려져 있는 레일리는 전쟁(세계 제1차 대전)이 나기 전 뉴욕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그는 러시아인 전쟁물자 청부업자로서 수백만 달러 짜리 계약을 협상하고 있었다. 그는 1918년 이전 여러 해 동안 영국 정보기관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레일리가 영국 정보기관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17년이었다. 1874년 3월 러시아령 폴란드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살로몬(지그문트) 그리고리비치 로젠블룸이란 이름을 가졌던 그는 1899년 그가 영국 여권을 취득할 때 시드니 죠지 레일리(추측컨대 그것이 그의 첫 아내의 처녀시절 이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로 개명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레일리는 어떤 공식적인 경로를 통하지 않고 영국여권을 취득한 것 같다.5)

 

레일리는 여러 해 동안 러시아 업계 및 궁정사회 안팎에서 솜씨 좋게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의 그의 사업노력은 그를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전쟁 초기에 그는 레밍턴 암스사(社)에서 제조한 120만 정의 소총을 러시아 정부에 수출하는 계약을 성사시킨 실적을 가진 대리인이었다. 레밍턴 암스사는 우리들이 뒤에 자주 듣게될 것이다.6) 모스크바의 금융사업계획 측근그룹 초기 맴버의 한 사람인 휴 리치가 분별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자, 영국은 1918년 4월 레일리라는 인물로 대체, 그를 현지 고정 정보원으로 선정하여 러시아에 보냈다. 전 짜르 정부 관리이며 엔지니어였던 벨로이는 블라디미르 크로모프의 책 특별한 사람들의 초상(Portraits of Extraordinary People)에서 인용되고 있는 사람이다. 레일리는 전쟁 전에 벨로이를 알고 있었고 1918년 러시아에서 다시 만났다. 벨로이는 레일리와의 대화를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러시아말을 잘 하는 리치라는 영국 사람이 큰 액수의 금액이 적힌 영국은행발행 수표들을 팔고 있으며 이 돈은 데니킨 장군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나는 레일리에게 이것이 사실인지 물었는데, 그는, 그것이 사실이며, 영국정부 일각에서 리치의 활동에 불만을 갖고 그를 해고한 후 모든 업무를 자기에게 맡기기로 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에 놀랐다.7)

 

금융사업계획과, 그리고 쌍방향정책의 일부로서 볼셰비키를 타도하기 위한 계획에서의 레일리의 개입은 처칠의 비서인 아치볼드 싱클레어의 편지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그의 메모는 레일리를 금융사업계획의 러시아 쪽 책임자인 카롤 야로신스키의 “심복”으로 묘사하고 있다. 카롤 야로신스키는 또한 황실가족이 토볼스크에 유폐돼 있는 동안에 그들의 가까운 친구이며 보호자였다.

 

비밀 정보원들이 러시아에 파견되고 있었던 1917년 11월과 12월에 허드슨즈 베이사는 무르만스크에서의 저택공사를 계속하고 있었고, 비밀자금이 현지 정보원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 타이밍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 이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사실상 저택공사와 관련된 활동, 금융사업계획 및 비밀리의 정보활동 모두가 한 조그마한 집단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선수들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 알렉산드라 황후가, 무르만스크에서 신축중인 저택의 마루바닥에 대한 그녀의 계획이 포함돼 있는 짧은 편지 하나를 토볼스크 바깥으로 몰래 내보냈는데, 수신인은 영국 죠지 왕으로 했지만 주소는 그녀의 옛 가정교사인 마가렛 양 앞으로 돼 있었다. 이 편지가 영국 왕가로부터 온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는지, 아니면 황후가 처음 보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새로 드러난 증거에 비추어, 이 편지는 러시아 사촌들을 구출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고 있던 영국 죠지 왕으로부터 온 메시지에 대한 회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토볼스크에 함께 있었던, 황실가족의 영어 가정교사인 차알스 시드니 깁스가 그의 개인 서류 속에 마룻바닥 계획과 관련된 황후 편지의 복사본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복사본이 없었다면, 우리는 당초 그런 편지가 존재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9)

 

그 저택과 금융사업계획 및 로마노프 일가 사이의 또 다른 공통의 연결고리는 처칠의 비서가 언급한, 우크라이나인인 카롤 야로신스키였다. 그는 러시아에서의 금융사업계획 책임자로 선정된 사람이었다. 혁명 전에 야로신스키는 그의 보좌인인 보리스 솔로비에프와의 공동 사업에서 매우 성공하고 있었다. 젊어서부터 짜르 지지자이며 근위기병 포병여단의 일원이었던 솔로비에프는 또한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의 밀사이기도 했다.10) 그는 니콜라이 바실레비치의 아들이었는데, 바실레비치는 짜르 치하에서 주교회의의 출납책임자 및 국가 자문위원 겸 짜르정부 경제부 위원이었다. 야로신스키와 솔로비에프는 함께 몇몇 기업들을 일으켜 성공했다.

 

짜르의 묵인 아래 야로신스키는 또한 페트로그라드의 수많은 은행들을 인수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부 사람들이 그를 투기꾼으로 본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영악한 기업가로 보고 있었다. 그는 한 은행에 저당 잡힌 주식을 활용하여 다른 은행들의 주식을 매입하는 식으로 사업을 벌여, 결국 몇몇 러시아 은행들의 경영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분명히 이 사람은 러시아 은행 시스템의 내막에 밝은 약삭빠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은행 외에도 야로신스키는 시베리아 철도와 바쿠에 있는 석유회사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최초의 부는 우크라이나 키에프 부근의 농장경영에서 왔다. 거기서 그는 대규모 곡물 및 설탕 사업을 벌였다.11)

 

피아니스트인 아서 루빈스타인의 후원자이기도 한 그는 많은 희사와 부조를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몬테 카를로에 대한 그의 취미와 같은 것이었다. 현재 입수 가능한 서류는 일반적으로 카를 야로신스키가 충실히 연합국에 충성을 바쳤음을 시사하고 있다.12) 물론, 한 영국기자13)와 영국관리14)는 야로신스키가 어느 순간 연합국 금융사업계획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으며 노골적으로 불신을 당했다고 지적하고 있긴 하다. 1918년 9월25일, 미군 정보국장으로부터 나온 한 보고서는 공식적인 연합국의 시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스톡홀름에서 나온 한 미확인 보고서는 러시아 외국무역은행과 페트로그라드 국제은행이 1918년 6월 5일 현재 차알스 야로친스키 소유라고 했다. 그 보고서는 추가로, 야로친스키는 친연합국파였다고 했다.”15)

 

야로신스키의 충성과 러시아 은행 시스템에 대한 그의 지식은 두 가지 매우 강력한 이점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다른 이점 - 황실가족과의 밀접한 관계 - 도 가지고 있었다. 야로신스키는 로마노프가에 잘 알려져 있었으며16) 그 자신 귀족출신이었다.17) 그는 마리아와 아나스타샤 공주의 특별 보호아래 있었던 병원들의 가장 큰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18) 황실가족이 유폐되기 이전에 황후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 중 하나인 안나 비루보바에게 보낸 1918년 1월22일자 편지에서 황후는 안나가 황실가족에게 돈을 보내준 것에 다음과 같이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주 뜻밖에 1일자 편지와 10일자 카드를 받았습니다. 서둘러 답장을 씁니다. 당신을 통해 야로신스키씨에게 우리의 따뜻한 감사를 전합니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사업이 번창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에게 주님의 가호가 있기를.19)

 

야로신스키나 안나로부터 황후에게 전달한 편지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감정이 북받치는 황후의 답장으로 미뤄봐 그녀가 야로신스키로부터 들은 소식에 감동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쓴 편지의 어조 역시 그가 그녀에게 따뜻한 감사의 표현을 느끼게끔 하는 어떤 것을 알려주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그가 이미 금융사업계획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이 알게 되겠지만, 그가 또한 바로 이 때 무르만스크의 저택공사 책임을 맡고 있는 허드슨 베이사 소속의 헨리 아르밋스테드와 연계돼 있었기 때문에, 황후는 자신들을 구출하여 북부 러시아로 옮길 계획이 있다는 것을 통보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가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무르만스크는 멀리 떨어진, 인구가 희박한 곳이고 이미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황실가족을 보호하기에는 확실히 이상적인 장소였다. 또한 필요하다면 이곳으로부터 그들을 탈출시키기도 훨씬 수월한 곳이었다. 그리고 사실 황실가족을 무르만스크에 모시는 것은 짜르가 퇴위할 때 그의 가족을 위해 처음 요구했던 목적지기도 했다.

 

1918년의 사건(황실가족 살해사건) 후, 금융사업계획에 관여했고 무르만스크 저택공사 책임자이기도 했던20) 헨리 아르밋스테드는 물론 금융사업계획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의 활동이 때때로 서로 상충되는 일련의 서류에 나타나 있다. 사람에 따라 발생한 사건의 내막을 다르게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의 증언도 때때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쌍방향 정책을 실시하고 금융사업계획을 공식화하기로 결정한 직후, 키이즈 대령은 V.M. 본리알리알스키가 인솔하고 있는 전 짜르정부 관리들로 구성된 한 단체에 소개되었다. 본리알리알스키는 일찌기 만주에서의 모험사업 시절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 대공21)의 전 사업 파트너였다. 흥미롭게도 금융사업계획에서 야로신스키의 심복역할을 한 시드니 레일리 역시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다.22) 그 단체는 본리알리알스키, 전 외무장관인 N.N.포크로브스키, 그리고 전 농무장관인 M.크리보쉐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크리보쉐인은 입헌군주주의자이며 보수적인 중도우파당의 일원이었던 반면, 본리알리알스키는 전 두마(재정러시아 의회) 의장인 미하일 로드지안코의 사촌이었다. 로드지안코는 그가 전에 코자크와 다른 장성들을 공격했던 것을 의식했음인지 뒤편에서 관망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25)

 

이 단체의 사람들은 반 볼셰비키 활동에 자금지원을 하고 있는 연합국들을 돕기 위한 계획에 카롤 야로신스키를 끌어들이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서클의 사람들은 열렬한 짜르 충성파였다.

 

하지만, 영국 공공문서보관소에 있는 무수한 서류들을 주의 깊게 비교분석하고 연구한 후에 더욱 분명해진 것은, 금융사업계획의 공식적인 존재이유(레종다따르), 즉 남동연합(반 볼셰비키 백군연합)에 대한 자금지원의 일부 이유는 오직 그 존속을 위한 것이었다. 훗날, 금융사업계획이 끝남으로서 그간 지원한 돈, 즉 “차관(借款)”의 성격이 드러나고, 그리고 야로신스키가 런던의 고위 정치적 직위에서 해고되었을 때인 1928년에, 키이즈 대령은 한 진술서에서 그의 우려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뉘앙스가 가득한 흥미 있는 진술로 시작했다.

 

러시아 은행들에게 준 차관은 그것이 거래로 불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어왔다. 나는 소위 말하는 차관[이탤릭체는 저자가 한 것임]이 소규모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정치상황을 기록해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26)

 

야로신스키에게 건네진 “소위 말하는 차관”에 관한 그의 설명은 의미가 깊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전혀 차관으로서 건네진 것이 아니고 쌍방향정책과 관련된 연합국 정보활동에 자금을 대기 위한 한 위장사업이었던 것으로 지금껏 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사업계획과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함의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으며, 연구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 거래는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 그들이 그것을 불법이라고 선언한 이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류상의 모든 날짜를 소급해 써넣어야 했다. 그 돈이 볼셰비키나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금융사업계획의 성격을 아주 명백히 해 줄 많은 증거들이 파기되었다. 현존하는 서류에서의 결함, 날짜가 소급돼 있는 서류의 존재(그 서류를 만든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류에 날짜가 빠져있는 것은, 영국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케틀 등이 수행한 괄목할만한 작업까지도 결국 수수께끼를 풀기엔 너무나 많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 근본원인이 되었다.

 

(진실규명작업에 대한) 난관은 당시 업무가 때때로 오른손이 하는 짓을 왼손이 모르게 수행됐기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다. 혹은, 훗날 그 금융사업계획의 조사책임자로 있었던, 은행감사역인 R.H.호아르가 말한 것처럼, 추적해야할 “이중적인 실마리”가 있었다. 그가 시사한 이중적인 실마리는 쌍방향정책에 관련된 완곡한 방법이었다. 한가지 예로서 호아르는, 문제의 금융사업계획이 순수하게 경제적 관점에서 고려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 난관은 불가피했다”고 언급했다. "그들은 사실 주로 정치적 근거에서 영국외무부에 의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27) - 금융사업계획은 성격상 경제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었던 데서 온 결과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증거는 그것의 정치적 목적 중 하나가 황실가족의 구출이었다는 것을 시사하게 될 것이다. 황실가족과 북부 러시아에서의 활동에 관계된 다른 분실 내지 기밀 처리된 서류 등은 지금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템플우드 페이퍼 속에 들어 있다. 이 서류들은 M16 정보원이며 1916-17년 페트로그라드의 영국 정보기관 책임자였던 사무엘 호아르 경이 거기에 두었던 것이며, 러시아 사건들과 관련된 일부 서류들은 2005년까지 공개가 금지돼 있다.28) 만약 금융사업계획과 다른 활동들이 황실가족의 구출시도와 연계된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런 서류들의 공개가 금지되고 있겠는가?

 

오늘 날 남아있는 모든 서신들은 키이즈 대령이 처음에 첫 이니셜이 Y, X 및 Z로 확인된 세 사람과 거래를 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은행인수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50만 파운드가 필요한 것으로 언급된 야로신스키에게는 처음에 3.5%의 이자로 “차관”을 해 줬다. 언급돼 있는 대부의 목적은 러시아은행 이사회로부터 친독일파 이사들을 축출하기 위해 그들 일부를 돈을 주어 지분을 포기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런 활동방향은 1918년 2월10일 키이즈가 보낸 한 전문에 암시적으로 언급돼 있다.29)

 

하지만, 이 시점에서 논리가 개요를 저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레닌이 그 앞 달에 은행들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친 독일파 주주들을 돈을 주어 쫓아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독일파니 뭐니 하는 주주들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훗날, 그들이 서류상의 날짜를 소급하여 기재함으로써 국유화 전에 은행계약을 체결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관계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인정됐다. 더욱이 그 서류는 키이즈가 “볼셰비키들과 회합했음”을 언급하고 있다.30) 그래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금융사업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레닌을 통해 친 독일파 주주들을 돈을 주어 쫓아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만약 돈이 실제로 언급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면, 왜 연합국들이 친독일파 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가졌을까? 레닌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왜 레닌에게 비밀자금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그에 대한 어떤 종류의 지불을 위장하기 위한 방법이었을까? “친독일파 주주들”에게 돈이 정말 전달되기나 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불분명하다. 사실 진짜 “친독파 주주들”이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렇다면 레닌에게 돈을 지불한 실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제5장 사태의 외관

 

비밀계획들

 

1918년 2월 경 금융사업계획을 맡은 일부 요원들이 난관에 봉착했던 사실이 아래 전문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No.411): 10/2/1918

 

.......키이즈(참조No.369)는 금융사업계획의 중요인물들이 “Y"(야로신스키), ”X" 및 “Z"(익명의 두 사람) 폴리아코프라고 말하고 있음. 계획은 지연되었음. 그 이유는 (1) ”X"가 교도소에 있고, (2) 폴리아코프는 정치적 목적에 관해 알고 있지 못함. X를 알고 있는 P는 전심전력을 다해 왔음. Y는 은행 인수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러나 한꺼번에 50만 파운드를 필요로 하고 있음. 다음 사항에 합의하였음. 즉 우리는 런던에서 3.5% 이율의 차관으로 50만 파운드를 Y에게 지불하고, 그는 X에게 3억5천만 루불치의 주식을 양도함. 모든 은행 등을 지배하고 있는 이사회는 Y 및 X(혹은 Z)와 우리 두 사람으로 구성됨. 이율은 사업성을 보여주기 위해 3.5% 대신 5-1/4%로 함.1)

 

교도소에 있다고 키이즈가 언급한 “X"는 포크로브스키였는데, 그는 시베리아은행 회장이었다. 시베리아은행은 금융사업계획에 포함돼 있는 은행들 중 하나였으며, 포크로브스키는 키이즈와 야로신스키에게 최초로 접근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러시아 적십자 기금의 양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 무렵 볼셰비키에 의해 투옥돼 있었다. 키이즈가 전보에서 "Z"로 지칭한 크리보쉐인은 당시의 지위를 알 수가 없다.2) 키이즈는 ”계획이 지연됐다“고 외무부에 알렸다.3)

 

포크로브스키와 크리보쉐인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내무부는 시베리아은행과 관계가 있었던 폴리아코프를 이용해야한다고 제의했다. 폴리아코프와 친교를 맺고 있던, 북부 러시아의 영국군 사령관인 프레데릭 푸울 장군은 그들을 그 계획에 끌어넣을 것을 주장했으나 그 안은 테렌스 키이즈에 의해 저지됐다. 앞서 언급한 전문에서 보았듯이 키이즈는 폴리아코프가 그 계획의 정치적 목적(이탤릭체는 저자가 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키이즈가 폴리아코프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정치적 배경과 목표는 실제로는 곧 있게 될 볼셰비키 타도와 로마노프 일가 구출계획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키이즈는 가능한 한 저자세를 취하며 모든 거래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푸울이 폴리아코프를 끼워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 작전에 절충안을 채택했다. 그 무렵 푸울장군 마저 금융사업계획에 관한 영국 외무부의 확실한 정치적 목적을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폴리아코프가 금융사업계획에 포함된 직후, 그 거래가 실제로는 야로신스키에 대한 차관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고율의 이자를 적용해야한다고 강력하게 고집함으로써, 종전에 그 계획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던, 런던에서 후원하고 있는 관계자들로부터 문제의 모험사업에 대한 달갑지 않은 정밀조사를 받게 되었다.4) 그런 정밀조사는 피해가 막심한 결과를 가져왔다. 푸울 장군이 정치적 목적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면, 분명히 그는 폴리아코프를 그 계획에 참여시키자고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단언은, 그 뒤 1918년 봄에, 그 계획에 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영국 정보원인 휴 리치를 대체하기 위해 레일리가 파견됨으로써 더욱 뒷받침된다. 레일리가 4월에 현지에 도착한 직후 푸울 장군은 레일리가 비밀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는 한 통의 전문을 받았는데, 이로서 푸울 장군이 그 일에서 손을 뗐다는 것이 이제 확실해지고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다음의 두 장교들은 특별한 비밀업무에 관여하고 있으며, 만부득이 한 경우가 아닌 한 공식적인 통신에서나 혹은 다른 장교들에게 이들에 관해 언급해서는 안됨. 두 사람은 밋첼슨 중령과 레일리 중령임.5)

 

당초의 계획은 야로신스키가 러시아상업&산업은행, 러시아외국무역은행, 키에프사립은행, 유니온은행 및 국제은행을 인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주재 영국 대리대사이며, 처음부터 쌍방향정책에 관여했던 프란시스 린들리 경의 분명한 승낙을 받아, 키이즈는 런던시티&미들랜드 은행을 통해 휴 리치 앞으로 돈을 송금하기로 조정했다. 1918년 2월13일의 전문 910에 따르면 “린들리는 런던시티&미들랜드은행에서 리치 계정으로 28만 5,715 파운드 5실링 8펜스를 지불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거래가 이루어지기 꼭 1주일 전에 “키이즈가 금융사업계획에 대해 푸울 및 볼셰비키들과 잘 풀어가고 있음”이라고 쓴 전보 한 통이 영국에 도착했다.6) 비록 이 시점에서 푸울 장군 만이 금융사업계획에 대한 재정적 군사적 관점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그 계획의 정치적 목적에 대해선 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볼셰비키”와 레닌(전혀 의심할 여지없이)은 황실가족이 성공적으로 시베리아를 탈출한 후 사실상 그들 자신들을 타도하는데 사용될 작정이었던 금융구조를 새로 정립하고 있었던 셈이었다.(1918년 2월19일자 전문 522):

 

키이즈는 독일이 시베리아은행 인수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함. 그래서 Y[야로신스키]가 우리 이사회의 협조로 지배권을 장악하였음. Y는 레닌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은행의 일부 소유주식을 인수해야했음. 50만 파운드는 앙글로-러시안은행을 인수하는데 충분치 못했음. 키이즈는 만약 그가 시베리아은행을 인수한다면 추가로 50만 파운드를 주겠다고 약속했음.

 

지금 레닌이 다시금 추가로 50만 파운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친독일계 주주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이미 50만 파운드를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레닌이 그 돈을 받은 바로 며칠 후인 3월3일, 볼셰비키 정권은 러시아를 제1차 대전에서 손을 떼게 하는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을 독일과 체결했다. 얼마 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붉은군대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약 4만 명의 체코군 포로들이 러시아에 전쟁포로로 잡혀 있었는데,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전쟁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차알스 크레인의 절친한 친구인 토마스 마사리크는 볼셰비키와 협상을 벌여, 체코군 포로들을 안전하게 시베리아에서 빼 내 프랑스 전선의 연합군에 합류시킬 작정이었다. 이러한 사건전개는 곧 다가오는 7월에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로마노프 일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3월3일 이후 영국 외무부는 키이즈 대령이 런던에 돌아올 때까지 일체 추가 자금지원을 미루도록 전보를 쳤다. 5일 후 린들리는 “양도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불을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 3월6일에는 “HMG[폐하정부]가 K[키이즈]의 사업계획에 의해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상업&산업은행 인수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번호 없는 전문이 있었다.7)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자금을 투입해 왔던 금융사업계획이 이제 그 계획의 실질적인 목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키이즈 혹은 야로신스키가 정부의 돈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강도 높은 정밀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엔 금융하부구조를 갖출 필요가 있었던 시베리아은행을 포함한 러시아 은행들을 인수하기 위한 수많은 계략들이 있었다. 야로신스키도 리브와이어란 암호명으로 움직였다. 비밀엄수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왕복문서들로부터 분명해지고 있다.

 

몇 달 이내 영국 재무부를 대표한 도미니크 스피링-라이스는 양도된 자금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려고 시도하였으며8), 그리고 1918년 하반기의 한 편지에서 W.H.클라크, 레슬리 우르크할트(시베리아 광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영국 사업가)와 헨리 아르밋스테드가 제기한 다른 의문 역시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이 문제를 추진해야할 정치적 국면이 소멸돼버린(이탤릭체는 필자가 한 것임)“, “현 정세에 비추어” 왜 금융사업계획 담당 요원들이 시베리아은행 인수를 계속 추진하고 있는지를 물었다.9) 연합국의 재정지원으로 러시아 내전이 최소한 2년 이상 계속됐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은 흥미를 돋구고 있다. 확실히 이 금융사업계획을 통해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던 반 볼셰비키군은 소멸되지도 않았고 연합국들의 목적인 볼셰비키 정권을 타도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편, 이 무렵 쌍방향정책의 한 가지 요소 - 황실가족 구출 - 는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영국 당국자들은 그 거래내역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다. S.N. 차이에프라는 사람이 이들 거래에 개입했다가 잃어버린 자기 돈을 찾기 위해 정부를 고소하려고 시도했지만, 정부가 그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고 많은 관련 당사자들이 죽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10) 금융사업계획이 런던에서 재검토되고 있었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160명의 영국 해병대가 프랑스군 분견대와 함께 아마도 군수창고를 지키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상륙했다. 현지 무르만스크 지방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연합국 측과 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푸울 장군과 키이즈의 볼셰비키와의 연루는 물론, 레닌에 대한 자금지원의 관점에서 비춰봐, 레닌이 무르만스크에서의 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 와서 보면 아주 이상하다.

 

더욱이 무르만스크와 같은 중요한 항구에서, 외국인들이 어떤 저택을 짓고 있다는 것을 현지 볼셰비키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 건축공사에 대한 모스크바에의 보고서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외국인들이 실제로 무르만스크에서 건물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 허드슨즈 베이사의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영국 해군본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저택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또한 금융사업계획에 연계된 사람들과 동일인들이었다. 그래서 레닌에게 지불한 50만 파운드는 황실가족을 시베리아로부터 무르만스크로 옮기기 위한 몸값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레닌이 연합국들로부터 50만 파운드를 거의 강제로 탈취하다시피 한 후 또 다른 50만 파운드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이 돈이 볼셰비키와 연합국과의 협조를 보증하고 황실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놀랍게도 쌍방향정책은 심지어 금융사업계획이 재검토되고 있었던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아직도 오직 일부 사람들 밖엔 실제로 무엇이 계획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는 3월15일에 페트로그라드 주재 미국영사인 로저 트레드웰이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인 프란시스(크레인이 추천한 사람이다)와 당시 모스크바 북쪽 볼로그다에 머물고 있던 러글스 대령을 공동 수신인으로 하여 보낸 매우 흥미 있는 한 전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당시 볼로그다는, 진격해오고 있는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할 것이라는 루머가 떠돌고 있는 가운데 서방 외교관들이 도피처로 지정한 곳이었다. 트레드웰 영사는, 모스크바에서 “가슴붉은 방울새”(미국 적십자사의 레이몬드 로빈스, 그는 볼셰비키정권에 파견된 사실상의 미국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와의 합류를 원하고 있는 “L"(볼셰비키 정권에 파견한 영국의 특별사절인 로버트 브루스 로크하르트. 그는 프란시스 린들리가, 아마도 키이즈가 소환된 것과 같은 이유 - 금융사업계획을 규명하기 위한 - 로 런던으로 소환되었을 때 그 업무를 대신하기 위해 현지에 남아있었다)을 (페트로그라드에서) 틀림없이 만났지만, ”T"(트로츠키)가 떠나지 않고 있었고, 그리고 그와 함께 모스크바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트로그라드에 그를 잡아두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트레드웰의 말에 따르면, 로크하르트는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다.

 

“‘L'은 우리가 동쪽에서의 활동계획에 동의했다는 것을 런던으로부터 통보 받았음[이것은 미국이 일본과 함께 볼셰비키들을 쳐부수기 위해 시베리아에 개입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로크하르트가 영국으로부터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L'은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음.”

 

로크하르트는 트레드웰에게 그가 많은 양보를 해 왔다고 추가로 알려주고 있는데, 이 양보는, 지난 2주간 “페트로그라드에서 지속적으로 들린 소문들”에 대한 계획을 저쪽 편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이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고 했다. 로크하르트는, “저쪽 편에 대한 우리의 도움은 마땅히 환영받아야 하며 영국이 북쪽항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에 입각한 인용흔적이 있다.

 

“그러나 모든 심판원들(연합국)이 다음 게임은 숲 속(시베리아)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합의를 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은 너무 늦을 것 같아 보임. L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것을 예방하는데 전력을 다 하기를 바라고 있음. 우리 모두가 ‘무법자들’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며, 우리의 처지가 아주 위험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임.”

 

트레드웰은 로크하르트가 “T"를 만나서, 그에게 인터뷰의 결과를 알려 준 후에 그와 의사를 소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의 마지막 부분은 긴박감을 시사하고 있다.

 

”L은 지금 모든 상황이 10일 전 내가 프린스더러 나에게 전보를 치게 했던 문제에 달려있다고 느끼고 있음. 10일 전이라면 지사(Governer)에게 보낸 우리의 메시지가 그에게 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임. L은 가슴붉은 방울새[적십자사의 로빈스]에게 그를 기다리도록 전보를 치고 있음“11)

 

다음 날인 1918년 3월16일, 트레드웰은 또 하나의 전보를 쳤다.

 

“16일. 이 메시지는 대사에게 보내는 것임. 로크하르트가 16일 아침에 아마도 지금 전쟁장관으로 있는 트로츠키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는 것을 대사에게 알려주도록 지시 바람. 페트로그라드는 조용하지만 영국영사는 독일군이 일요일에 이곳에 도달할 것으로 본다는 일반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음”12)

 

그 전보에서 이 사람들이 아직 성실성을 갖고, 외교적 자세로 협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들 각각의 정부들이 계획했던 바로 그 쌍방향정책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쌍방향정책은 그 당시 볼셰비키들과 협상을 하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밀담을 시키고, 그리고 그들의 활동의 순도(純度)를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되었다. 분명히 쌍방향정책의 속임수는 효과적이었다. 표면적으로 미국과 영국은 볼셰비키들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로버트 브루스 로크하르트, 레이몬드 로빈스 및 로저 트레드웰 같은 정보원들은 순전히 앞잡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연합국들이 추진하고 있었던 실질적인 의제에 대해 무지했으며, 그리고 박두하고 있는 개입, 예컨대 연합국과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에 연합국들이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한 실질적인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그러한 정세는 그 후 몇 개월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가서야 로크하르트는 볼셰비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연합국들의 실질적인 목적을 알게 되었고, 개입 지지자가 되었다.

 

트레드웰 영사는 또한 그 무렵 동부 시베리아에서 볼셰비키들에게 대항하고 있던 군사지도자인 아타만 세메노프의 편을 들고 있는 일본의 개입을 미국이 지원하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었다. 로크하르트와 트레드웰 둘 다, 연합군이 독일군을 앞질러 북쪽 항구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로크하르트가 트로츠키로부터 얻어낸 양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 독일군은 북부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고 그 부근에 잠수함들을 출몰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트레드웰, 로빈스 및 로크하르트와 같은 정보원들은 이런 점에서 아직 볼셰비키들이 러시아 땅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기 위해 연합군의 개입을 요청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레드웰은, 만약 연합군(심판자)이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 게임은 숲 속(시베리아)에서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트레드웰의 전문 송부 직후,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뺀 1918년 3월 21일, 독일군 최고사령관인 에릭 루덴도르프장군은 서부전선에서 5번의 “쇠망치 치기 공격" 중 첫 번째 것을 시작했다. 이 군사작전은 연합군을 대경실색케 했다. 첫 공격만으로 영국의 제5군을 30마일이나 밀어붙이고 12만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13)

 

그러나 비록 그들이 압도적이긴 했지만, 독일군의 전승은, 볼셰비키 정권을 전복시키고 짜르를 복위시켜 러시아로 하여금 합법적으로 연합국 편에서 재참전할 수 있게 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연합국의 결의를 증진시켰다. 독일군의 강습이 있은 지 바로 며칠 후인 1918년 3월26일, 전보 한 통이 레닌 및 스탈린으로부터 무르만스크 소비에트 의장인 A.M.유리에프에게 발송됐다. 이 전보는, 영국 배 한 척이 무르만스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과 어울리고 있는 유리에프의 행동을 몹시 비난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로크하르트가 트로츠키와 나누고 있었던 대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교제의 목적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공모한 것으로 줄곧 알려져 있는 지도부의 활동을 아마도 덮어 감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레닌과 스탈린은 유리에프의 보고서들이 “완전히 공식적인 것이지만 비밀을 지켜야 하는 - 즉 발표하지 않는 조건“이라고 주장했다.14) 모스크바는 무르만스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활동들을 위한 공작을 꾸몄으며 더 상세한 정보를 들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10일자 한 전보는 모스크바가 무르만스크에 있는 연합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다시 한번 레닌의 이중거래 의지를 확인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 언급임.

 

회신접수:

 

소해정(掃海艇)들에 대해선 귀하가 언급한 기관들에 질문바람. 우리 쪽에는 지장이 없음. 그 계획은 단연코 비공식적이어야 함. 우리는 이 문제들을 군사기밀처럼 다룰 것임.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 귀하의 책임이며 아울러 우리들의 책임임. 그것이 분명해 보임. 귀하가 만족한다면, 나는 그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함.

레닌, 스탈린15)

 

무르만스크에 관한 양보를 얻어내는데 거들었던 로크하르트는 1918년 5월1일(메이데이)로 예정했던 반 볼셰비키 봉기에 대한 계획을 통보 받았을 때까지는 쌍방향정책의 실질적인 목적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16) 어쨌든, 우리가 뒷장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 날에 계획된 반혁명봉기는 실행되지 못했다. 볼셰비키들이 가까운 장래에 쿠데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았기 때문이다. 연합국들은 사회주의 혁명론자인 보리스 사빈코프와 그의 추종자들을 후원하여 볼셰비키 정권을 전복하는 계획을 세워왔다. 쿠데타는 연기되었다.

 

지금까지 이것이 봉기의 실행을 연기하게 된 데 대해 언급된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다음 장에서 이 봉기를 연기하게 된 것이, 레닌이 그 당시 금융사업계획을 통해 돈을 받았기 때문에, 연합국들에게 황실가족을 인계하기 위한 첫 시도들 중 하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황실가족을 좀 더 안전한 상태에 두기 위해 레닌이 파견한 것임이 분명한, 볼셰비키 당원인 바실리 야코블레프에 의해 수행된 “특별목적의 임무”가 봉기 계획일 4일 전인 4월 27일에 실패했다. 구출계획이 아주 비참하게 실패함으로써 황실가족이 악랄한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결과가 되었으며, 연합국들은 시도했던 쿠데타를 당분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제2부 정보원들의 활약

 

제6장 토볼스크

 

첫 번째 시도?

 

1918년 7월에 이르기까지 수개월간의 “러시아 상황”은 기만(欺瞞)이 특징이었다. 아쉽게도 당시의 기록은 너무 자주 서류들과 활동들을 “비밀”과 “비공식”으로 간주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1917년 하반기에 황실가족은 토볼스크에 유폐돼 있었지만, 그들은 에우게네 코빌린스키 대령의 관리아래 꽤 품위 있는 유폐생활을 했다. 코빌린스키 대령은 1917년 3월 짜르스코에 셀로 궁전에서부터 황실가족의 관리책임을 맡아왔다.1) 역시 황실가족과 함께 토볼스크에 감금돼 있었던 스위스인 가정교사인 삐에르 질리아르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탈출하기에 이 이상 바람직한 조건은 없다. 토볼스크엔 아직도 볼셰비키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진작 우리편이 된 코빌린스키 대령과 공모하면, 무례한 그러나 조심성이 없는 감시인들의 경계를 속이기는 쉬운 일일 것이다.”2)

 

질리아르에 따르면, 짜르는 "어떤 국면전환을 준비해야한다는“ 강력한 권유를 받곤 했으나, 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 러시아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외국에 나가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과거와의 연결을 단절시켜버릴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건 영원히 죽는 거나 다를 바 없잖아요.“3)

 

황후는 외국으로 나가고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자못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들이 러시아를 떠나게 되면 설사 상황이 좋아져도 입헌군주로서 러시아에 귀환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그들의 출국은 그녀와 니콜라스가 독일과 음모를 꾸며왔다는 소문들을 강화시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여론과는 반대로 그녀는 지금 내전으로 치닫고 있는, 그녀가 선택한 나라를 차마 두고 떠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애국심 강한 여성이었다. 황실가족을 구출하여 안전한 어떤 곳으로 옮길 목적으로 토볼스크에 구성돼 있었던 조직망 역시 황실가족이 러시아를 떠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인 토볼스크 성요한단(團)은 황실가족을 그 곳으로부터 빼내기 위해 구성된 것이며, 야로신스키의 보좌역인 보리스 솔로비에프가 그 단장으로 있었다. 솔로비에프는 니콜라스가 퇴위하기 직전에 그에게 비밀소포를 전달하는 알렉산드라의 밀사역할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금융사업계획이 공식화되고 있는 동안에 솔로비에프는 적절하게도 죽은 라스푸틴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을 했다.4) 그러므로 그의 짜르정권과의 연계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원대한 것이었다. 보리스 솔로비에프와 맹렬 볼셰비키 당원인 솔로비에프 사이에 일부 혼선이 있어온 것 같다.

 

토볼스크에서 이제 솔로비에프는 다시 한번 황실가족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밀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메시지는 성요한단의 암호 - 티베트의 행운의 상징인 거꾸로 된 만(卍)자 - 를 사용하는 친척과 친구들이 보내 온 것이다. 불가사의하게도 꼭 같은 표지가 황실가족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 후에 아파티에프 하우스에서 발견되었다.

 

황실가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온 사람들에 의하면 황후는 그 표지를 좋아하여 그것을 우편엽서나 그녀가 갖고 있는 다른 개인용품에 그려 넣었던 것 같다. 황실가족을 구출할 계획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솔로비에프의 공모자 두 사람은 마담 비루보바와 릴리 덴이었는데 이들 두 사람 모두 황후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5) 야로신스키와 황실가족 친구들의 메시지와 돈을 전달하는 다른 밀사들은 세레기에프 블라디미로비치 마르코프라는 이름의 전 짜르군 장교였다.6) 마르코프는 또한 두마 의원인 예브게니 마르코프 2세의 친구이기도 했으며, 혼란을 피하기 위해 황실에선 “리틀 마르코프”로 불렸다.

 

몇 주 전 야로신스키의 편지를 받은 황후는 안나 비루보바를 통해 그에게 감사를 전했으며, 비루보바는 리틀 마르코프를 토볼스크에 보냈다. 토볼스크에 도착한 리틀 마르코프는 즉시 솔로비에프와 그리고 유폐돼 있는 황실가족에 대한 봉사를 주선했던 성직자인 바실리에프 신부를 접촉했다. 바실리에프 신부와 헤르모겐 주교 둘 다 황실가족에게 메시지와 그리고 때로는 돈을 전달하는 일에 비슷하게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실리에프 신부가 황실가족의 명예를 손상하고 때로는 그 자신을 위해 자금을 빼돌리기도 했다는 일부 주장이 있었다.7)

 

리틀 마르코프에 따르면, 질리아르는 물론 솔로비에프도, 코빌린스키 대령이 황실가족 구출노력을 방해할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시국이 안정될 때까지 그들을 그 곳에서 기다리도록 하는 데 힘을 쓰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월과 3월 동안에 토볼스크의 지방정부가 경화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함으로써 리틀 마르코프와 솔로비에프는 간혹 황실가족 구출계획을 입밖에 내곤 했다.8)

1918년 3월경 토볼스크의 정치적 분위기가 사실상 황실가족에게 비협력적이 되어갔고, 토볼스크와 황실가족의 감독권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됐다. 황실가족에게 우호적인 쪽은 옴스크를 근거로 한 비교적 온건한 서 시베리아 소비에트였고 적대적인 쪽은 에카테린부르그를 근거로 한 우랄관구소비에트의 더 극단적인 볼셰비키들이었다. 이 모든 책동 결과는 양쪽 소비에트 모두가 토볼스크에 인민위원들을 파견하여 황실가족의 통제권을 빼앗으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는 더 투쟁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이었던 반면, 옴스크 소비에트는 좀 더 온건한 쪽이었다. 상황이 급속히 변해가고 있었다. 옴스크에서 온 두츠만이란 이름의 새 인민위원이 3월 24일 사실상 코빌린스키를 대신하여 유폐 하우스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그의 지위가 서방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두츠만은 그 통제권을 오래 갖고 있지는 못했으나, 다른 덜 알려진 인사들처럼 그 역시 훗날 짜르구출하기라는 이상한 책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소란한 시기에 또 다른 붉은군대 분견대가 도착하여 황실가족의 관리를 두고 약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파벨 호크리아코프(코크리아코프)가 카가니츠키라는 이름의 볼셰비키 당원과 함께 분견대를 지휘하고 있었다.(카가니츠키 역시 짜르구출하기란 책에서 확인되고 있으나, 그 책이 출판된 1920년에 서방세계에선 그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그들은 곧 엔신 알렉산더 니콜스키 의장을 밀어내고 토볼스크 소비에트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니콜스키는 케렌스키 정부의 대표로 파견돼 온 사람이었으며 유진 마카로프의 보좌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유진 마카로프는 발리아 돌고루코프 공과 함께 황실가족을 위한 저택을 준비하기 위해 토볼스크에 맨 처음 와서 사전답사를 했던 사람이다.9) 그는 허드슨즈 베이사 서류 속에 나오는 마카로프라는 성과 같은 성이어서 아이러니한 곡해가 일어날 수 있겠다. 허드슨즈 베이사 서류에서 마카로프 건설회사는 무르만스크에서 로마노프를 위해 짓고 있는 또 다른 저택과 관련된 기록에 나오는 회사이름이다.10) 아이러니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케렌스키의 가까운 친구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카로프 건설회사는 또한 짜르구출하기라는 책에서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훗날, 토볼스크의 마카로프는 엔신 니콜스키를 그가 만난 매우 믿음직한 사람들 중 하나로 인용했다. 그리고 그는 믿음직한 사람이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역시 니콜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새 감시원들 중 하나로 황실가족이 최후로 머물었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들어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11) 쫓겨난 엔신 니콜스키가 토볼스크에서 자신을 내팽개친 바로 그 강경파들의 호감을 사 복직하여 아파티에프 하우스와 그리고 황실가족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정황을 고려해 보건대 그 시나리오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많은 다른 세력들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1918년 초순 토볼스크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는 황실가족의 생활조건을 심각하게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저택감시원들이 봉급을 제 때에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감독권에 대한 경쟁이 황실가족을 불안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강경파들이 통제를 강화시키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온건파들이 사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때에 황실가족을 구하려는, 국제적으로 주도된 구출계획들이 또한 준비되고 있었다. 우리는 앤서니 섬머즈와 톰 맹골드가 쓴 짜르에 관한 파일(File on the Tsar)이라는 책에서 요나스 리트라는 이름의 노르웨이 사업가를 알게 된다. 시베리아에서 서유럽 및 미국으로의 새 무역항로를 개척한 공로로 짜르로부터 명예 러시아 시민권을 받은 바 있는 요나스 리트는 영국 정보원(현재 M16)에게 포섭되었다. 그리고 리트의 구출팀 합류를 검토하기 위해 그의 친구 헨리 아르밋스테드와 함께 런던 근방에서 “면밀한 심사”[원문대로]를 받았다. 그 책 저자들은 리트의 일기를 인용하고 있다.

 

“1918년 2월26일, 아르밋스테드로부터 크리아[오슬로]로 전보가 왔다. 만약 그가 비자를 받아 주면, 영국에서 시베리아로의 여행을 검토하기 위해 내게 런던으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승낙한다고 전보를 쳤다...”12)

 

섬머즈와 맹골드는, 4일 후에 리트는 북해를 가로질러 아벨딘으로 향하고 있는 기선 위에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다시 3월3일자 리트의 일기를 인용한다.

 

“런던 도착. 브라우닝 대령이 사보이에 스위트 룸을 마련해두었다. 아르밋스테드를 만나 (시베리아)여행에 대해 검토했다. 허드슨즈 베이사 회장인 소울[원문대로 인용: 세일, 아르밋스테드의 보스]13)을 만났다....”14)

 

2일 후 리이트의 일기는 다음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3월5일. 밋첼-톰프슨을 만났다. 그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외무부에서 아서 발포어 외무장관을 만났다. 내일은 로버트 세실 경을 만날 예정이다.”15)

 

그리고 3일 후에는 "3월8일. 레지날드 홀 경[해군정보대장]16)의 집에서 그의 부인 및 딸, 그리고 아르밋스테드와 저녁식사를 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일까?“라고 썼다.

 

12일 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3월20일. 빅커스 하우스에서 프란시스 바커 경과 미하일 대공[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 짜르의 사촌]17)을 만나, 토볼스크로부터 카라해(Kara Sea)를 통해 고속 모터보트로 니콜라스2세를 구출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18)

 

프란시스 경은 상대방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이는데, 그러나 그가 자기 이름을 거기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거기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19) 몇 년 후 리트의 친구이며 전 영국 외교관 겸 스칸디나비아 전문가인 랄프 헤윈스는 리트가 그에게 고백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빅커스(혹은, 좌우간 빅커스 회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요청을 받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즉 예니세이강 입구에 있는, 그의 제제소 창고에 영국 보우트를 정박시켜 놓고 그리고는 그의 화물선들 중 하나로 토볼스크 하구 쪽에서 황실가족을 수송하도록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 계획은 그럴싸했다. 어뢰정은 전시의 기뢰를 피하고 또 만약의 경우 볼셰비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노바야 젬리아를 거쳐 북극해로 들어가는 극북항로를 택하기로 되어 있었다.20)

 

전쟁 초기에 빅커스사(리트가 거기서 회합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회사다)의 대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시드니 레일리였다. 영국인인 레일리는 1918년 3월 하순인 바로 이 때는 금융사업계획을 정리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었다. 런던 근교에서 요나스 리트와 동행하고 있었던 아르밋스테드는 이 때 또한 아르한겔스크 및 무르만스크 허드슨즈 베이사의 작전 책임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며, 해군본부가 돈을 대어 무르만스크에서 짜르를 위해 짓고 있던 저택건축을 책임지고 있었다.

 

시베리아에서 카라해에 이르는 무역항로를 개척한 사람인 요나스 리트는 토볼스크에 유배돼 있는 황실가족의 구출을 도울 수 있는 세계 극소수의 사람들 중 바로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화물선들 중 하나를 이용하여 그들은 처음에 이르티쉬 강, 그리고 다음에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오브강을 통해 카라해로 나오면, 예니세이강 입구에서 대기했다가 오고 있는 영국 어뢰정과 만난다는 것이다. 계획된 구출작전에 대한 리트의 어떤 언급과 영국 정보부대와의 어떤 접촉은, 1920년 그를 불신하는 일부 영국관리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일기 외에는 그가 그 비밀작전을 위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1918년 2월로 돌아가, 당시 시베리아 무역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던 리트는 헨리 아르밋스테드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21) 그리고 요나스 리트를 런던으로 데리고 왔던 사람인 아르밋스테드는 확실히 영국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고 있었으며, 당시 MI1c(훗날 M16이 됨)의 수장이었던 맨스필드 컴밍이 1918년 5월21일 서명한 한 편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근계[허드슨 베이사 회장 세일씨 귀하]

 

귀사 러시아 지사 대표인 E.A.아르밋스테드씨가, 귀하의 친절한 허락을 얻어, 러시아를 경유하는 나의 여행에 그의 노고를 마음대로 이용하게 함으로써, 그가 런던을 떠나는 시간부터 이 도시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모든 여행비용을 내가 귀하에게 반제할 것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그의 여행의 성격 때문에 그리고 아르밋스테드씨가 귀사와 맺은 여행경비에 대한 통상적인 합의에 따라, 나는 그의 계산서가 귀하가 종전에 그로부터 받았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 문제에서의 귀하의 호의에 대해 이 기회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서명

맨스필드 컴밍 올림

맨스필드 컴밍, 케프틴 R.N.

사본을 M.죤스에게 보냄22)

 

맨스필드 컴밍이 헨리 아르밋스테드의 “임무”를 서류화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그의 유명한 초록색 잉크로 서명한 것이다. 훗날, 아르밋스테드가 일원으로 참가했던 그 “임무”는 무역사절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영국 정보기관의 수장이 단순히 무역사절을 위해 아르밋스테드에게 자금을 대는 것은 물론 그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우며, 만약 단순히 상업적 성격이었다면 제3자를 통해 돈을 지불하려고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으로선 무르만스크의 저택공사는 허드슨즈 베이사를 통해 해군본부로부터 자금지원이 된 반면, 아르밋스테드와 리트는 역시 허드슨즈 베이사를 통해 컴밍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허드슨즈 베이사의 요나스 리트와 관련된 “지불계정” 기재사항에는 “아르밋스테드라는 이름으로 확인함.....”이라는 구절이 항상 들어간다.23) 참여하고 있는 아르밋스테드에 관해 이야기되고 있었던 임무 “C"는 황실가족 구출시도와 부합한다는 것을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레닌이 단지 몇 주전에 금융사업계획을 통해 50만 파운드를 받았고, 그리고 아르밋스테드가 홀 제독과 시드니 레일리의 보스인 맨스필드 컴밍과 분명히 협의를 한 후 황실가족 구출을 위해 꾸며지고 있는 계획을 가장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에, 레일리가 러시아로 가고 있었다는 것은 이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4월5일 바로 직전에, 무르만스크를 통해 러시아 땅에 도착하여, 소브나르콤(인민위원회의)의 서기이며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사람인 블라디미르 본츠-브루에비치의 친척인 본츠-브루에비치 장군의 도움을 받아, 렐린스키라는 이름의 볼셰비키 행세를 하게 되었다.24) 레일리가 렐린스키 동지의 지위를 부여받아 다가올 작전을 위해 레닌과 영국 사이에서 연락원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중앙위원회 의장이며 레닌의 가장 까까운 동료 중 하나인 야코브 스베르들로프가 레일리의 입장과 그리고 또한 아마도 렐린스키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스베르들로프의 동생인 벤야민이 전쟁 전 뉴욕에서 레일리의 사업동료였기 때문이다.25) 4월 첫 주 어느 날 본츠 브루비에치 장군과의 첫 만남 후에, 레일리는 렐린스키 동지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곧 중앙위원회 사무실의 비서들 중 한 사람이며 스베르들로프와 나란히 일하고 있는 올가 디미트리에브나 스타르제브스카야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는 체포되어 레일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26) 올가 스타르제브스카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있지만, 그녀가 레일리와의 일에 연루된 후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일리의 중앙위원회와의 밀접한 연계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들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 무렵 토볼스크 소비에트는 격렬한 정치투쟁의 와중에 빠져 있었고,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황실가족 감시원 중 한 사람이 블라디미르 본츠-브루에비치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본츠-브루에비치가 쓴 각서 중에 다음 구절이 들어 있다.

 

소브나르콤의 서기인 블라디미르 본츠-브루에비치가 (1918년 4월1일 이전에) 니콜라스를 감시하는 분견대로부터 온 대표를 접견하고 러시아최고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사무국(VTsIK)에 보내는 각서.

 

전 짜르를 감시하고 있는 분견대의 병사동지가 토볼스크에서 왔다. 거기에는 숱한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병사들이 부대를 이탈했고, 봉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와 깊이 이야기 해 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됐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스베르들로프는 이 병사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블라드. 본츠-브루에비치28)

 

독일이 황실가족을 보호하도록 볼셰비키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츠-브루에비치는 그 병사를 스베르들로프에게 보냈다.

 

한편 우랄관구소비에트에서의 권력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데그티아레프의 지배아래 있었던 옴스크 소비에트는 세미온 자슬라브스키 지배아래 있던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로부터 도착한 분견대의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황실가족을 도왔다는 혐의로 솔로비에프와 리틀 마르코프는 둘 다 체포되어 구금됐다. 구금 중 그들은 각각 노트를 긁적거려 성요한단의 상징인 거꾸로 된 만(卍)자를 표시하여 화장실에 갈 때 서로 교환할 수 있었다.29) 새로운 정치 분위기로 짜르파들에 대한 관용이 전보다도 훨씬 더 엷어졌다.

 

토볼스크에서의 격심한 혼돈에 추가하여, 스베르들로프와 레닌이 엄선한 사람인, 바실리 야코블레프가 150명의 붉은군대 병사들과 그의 전신기사를 대동하고 모스크바로부터 도착했다. 야코블레프는 그가 “특별히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음을 시사하는 지령서를 코블린스키 대령에게 제시했다. 표면적으로 이 특별사절단은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로 데리고 가 트로츠키가 요구해 온, 여론조작을 위한 공개재판에 회부하게 돼 있었다. 코블린스키는 자기 부하들을 집합시켰고, 야코블레프는 그 불행한 수비대 병사들에게 밀린 봉급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장 연설을 했다. 야코블레프와의 첫 회합 후, 자슬라브스키는 황실가족을 빼내가기 위해 계획된 비밀터널과 파괴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경비병들을 선동하여 야코블레프 일행에게 저항하려했다(훗날, 짜르구하기라는 책은, 황실가족이 터널을 통해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자슬라브스키의 비판은 옴스크 소비에트 의장인 데그티아레프를 불신하는 것에 표적을 맞추고 있었다. 황실가족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야코블레프는 마침내 자슬라브스키에 대한 그의 명령권을 확보하고 토볼스크 유폐가옥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30)

 

4월 21일, 우랄관구소비에트의 군사담당 인민위원이며 뒤늦게 로마노프가의 운명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된 필리프 골로스체킨이 에카테린부르그 지방소비에트 사람들의 일부 행실과 그들이 야코블레프 지원을 소홀히 하고 있는 점에 대한 불만을 전보로서 토로했다.

 

코크리아코프 토볼스크 S.[소비에트] 의장 귀하. 어제 당신이 딧코브스키와 나눈 대화에 대한 진상을 알게되었음. 당신의 우유부단을 허용할 수 없음....야코블레프의 명령 2225에 조금이라도 저항하거나 순종치 않으면, 대포를 사용하여 반혁명분자들의 소굴을 사정없이 쓸어버리겠다고 시 전체에 발표하기 바람.

 

우랄관구 군사담당 인민위원

골로스체킨31)

 

골로스체킨의 지시에 이어 야코블레프는 그가 전에 알고 있었던 코크리아코프가 그의 “특별히 중요한 임무”를 그와 함께 수행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코크리아코프는 최근 토볼스크 지방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는데, 토볼스크 지방소비에트는 볼셰비키들이 그렇게 많이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옴스크나 혹은 매우 호전적인 에카테린부르그 지방소비에트보다도 온건했다. 하지만 에카테린부르그 지방소비에트는 계속 야코블레프가 황실가족을 에카테린부르그로 데려오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우랄관구 인민위원인 골로스체킨의 명령을 무시했으며, 만약 야코블레프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를 반역자로 낙인을 찍을 것이며 그와 황실가족, 그리고 그의 병사들을 즉결처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솔로비에프와 리틀 마르코프가 구스테프라 불리는 볼셰비키에게 체포되어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황실가족이 토볼스크를 떠난 후 이들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즉시 석방됐다. 적어도 리틀 마르코프는 황실가족을 토볼스크로부터 옮기는 계획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곧 있게 될 예정인 구출계획에 대해 여러 사람들에게 부주의하게 이야기함으로써 그 계획을 거의 손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그는 구스테프에 의해 체포됐다. 구스테프는 또한 박두하고 있는 황실가족 이동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은 솔로비에프도 체포해야했는데, 이는 황실가족의 성공적인 이동을 위해 필요한 합법성의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훗날 그의 책에서 리틀 마르코프는, 야코블레프가 황실가족과 함께 떠날 때, 그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가로채 구출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교도소에 있지만 않았으면 성공했을 것이라며 애석해 했다.32) 그러나 지금 모든 증거에 비쳐볼 때, 리틀 마르코프가 “특별히 중요한 임무”를 부주의하게 발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구스테프가 짐짓 그와 솔로비에프 둘 다를 교도소에 처넣은 것 같아 보인다. 그 뒤 7월8일에 “구스테프”는 구출시도 중 하나를 계산하여 일으킨 봉기에 관한 전갈을 중계하는 사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봉기가 황실가족을 수송하기 위해 마련된 기차가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33)

 

야코블레프와 그의 일행이 토볼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는 노정은 투우멘에 가장 가까운 철도역까지 시골티 나는 2륜 경마차들을 타고 가는 육로여행으로 시작됐다. 거기서 4월27일에 야코블레프는 모스크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쳤다.

 

“골로스체킨 귀하. 귀하가 파견한 사람들은 내가 운반하고 있는 수하물을 파괴하려는 오직 단순한 소망만 가지고 있음. 선동자들: 자슬라브스키, 코크리아코프, 그리고 쿠시아츠키[구시아츠키]...”34)

 

계속 전보가 오가는 동안, 야코블레프는 자슬라브스키가 2개 분견대 병사들을 선동하여 황실가족을 태워가고 있는 기차를 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야코블레프와 그의 휘하 병사들이 그들을 물리치고 자슬라브키의 계획을 실토한 포로 한 사람을 잡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야코블레프는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골로스체킨을 “조롱하고 있다”고 그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는 “나와 함께 있는 분견대 전체를 죽일” 계획을 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온 분견대가 수하물[황실가족에 대한 암호명]을 파괴하려는 “강력한 의향”을 갖고 있다고 골로스체킨에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귀하는 이 수하물의 보존을 장담하는가? 인민위원회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단언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람. 개인적으로 자세하게 얘기해 주기 바람. 나는 가장 중요한 수하물[니콜라스, 알렉산드라 및 마리아]과 함께 [티우멘] 역에 앉아 있으며, 회신을 받는 즉시 떠날 작정임. 가야할 장소를 정해 주기 바람.

 

야코블레프, 구자코프35)

 

야코블레프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아직 티우멘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그는 모스크바의 스베르들로프에게 다음 노정에 대해 묻고 있다.

 

꼭 같은 노정인지, 아니면 의장께서 변경했는지, 즉시 티우멘으로 알려주기 바람. 나는 지금 옛 노정으로 가고 있음. 즉시 회신 바람.

야코블레프36)

 

4월27에야 모스크바에서 회답을 하고 있다.

 

노정은 전에 지시한 대로임. 귀하가 수하물[니콜라스]을 옮기고 있는지 아닌지 알려 주기 바람.

 

스베르들로프[VTsIK -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 의장]37)

 

우리는, 같은 날 잇달아 도착한 전보들로부터 “옛 노정”을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

 

전신기 앞에서 스베르들로프가.

 

야코블레프, 귀하는 지금 전신기 앞에 앉아 있는가?(간격)

 

귀하가 너무 신경과민이 돼 있지 않은지 알려주기 바람. 아마도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것 같음. 옛 노정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음.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가??(간격)

 

참 그렇지, 내가 그것을 읽어보았지.(간격) 그건 아주 분명해.(약간의 간격) 옴스크로 가기 위해 거기서 추가지시를 기다리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블라디미르 코사레프 소비에트 의장을 찾아가기 바람. 모든 것을 비밀리에 운송하기 바람. 옴스크에 가면 추가 지시를 내리겠음. 계속 가기 바람. 이상. (간격) 잘 될 것임. 모든 지시가 내려질 것임. 이상.

안녕.38)

 

비록 야코블레프로부터의 다음 전보가 같은 날 타전됐다고는 해도, 그것이 앞서 보낸 전보보다 전에 혹은 후에 도착됐는지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야코블레프는 전에 골로스체킨에게 알려주었듯이, 우랄군들이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것을 스베르들로프에게 자세히 납득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막 여기에 수하물의 일부[니콜라스, 알렉산드라 및 마리아]를 운반해 왔음. 다음과 같은 극히 중요한 상황 때문에 노정을 변경시키고 싶음. 내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수하물를 파괴하기 위해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어떤 사람들이 토볼스크에 도착했음. 특별임무를 수행하는 분견대가 그들의 공격을 격퇴하여 - 겨우 유혈을 피할 수 있었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에카테린부르그 사람들은 나에게 수하물은 목적지로 운반될 필요가 없다고 넌지시 말했음.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음.

 

야코블레프는 그가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을 그들(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에게 알려, “그들이 나로부터 수하물을 잡아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계속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짜르가 살해될 지도 모르니까 그더러 여행 중에 짜르 옆 좌석에는 앉지 말라고 했다고 말한다. 야코블레프는 아무튼 그렇게 했다. 그는 그후 에카테린부르그 분견대가 토볼스크와 티우멘 사이에서 숨어서 자신들을 기다리기로 계획했다는 것을 알게된 경위와, 그리고, “수하물”을 파괴하기 위한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계획을 야코블레프에게 귀뜸 해 준 예카테린 분견대의 한 밀고자 병사를 억류하게 된 경위를 모스크바에 전하고 있다. 야코블레프는 다음과 같이 추가로 폭로하고 있다.

 

골로스체킨을 제외하고,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수하물을 처치해버리려는 한 가지 욕구를 갖고 있음. 제 4, 5, 6 붉은군대 보병중대들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음. 만약 이것이 중앙[모스크바]의 생각과 상충되는 것이라면, 에카테린부르그로 수하물을 운송하는 것은 정신나간 짓인 것 같음.39)

 

야코블레프는, “수하물을 두기에 아주 적합하고 취지에도 걸맞은 훌륭한 장소가 산 속에 있다”며 “수하물”을 심스키 고르니 지역(중앙 시베리아에 있는)에 갖다 두는 것이 어떠냐고 중앙에 묻고 있다. 분명히 야코블레프는,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로 데려가 여론조작을 위해 공개재판을 연 후 처형할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야코블레프의 임무가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있는 토볼스크로부터 황실가족을 빼내 더 안전한 곳에 두려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정말 황실가족을 죽이는 것이 스베르들로프와 모스크바의 목적이었다면 -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의 궁극적인 실천을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야코블레프는 앞서 받았던 명령 대신 분명히 똑 바로 에카테린부르그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야코블레프는 위험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음. 수하물이 만약 에카테린부르그 분견대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물론 그 최종 결과는 마찬가질 것임. 우리가 에카테린부르그로 가야할지 아니면 옴스크를 거쳐 심스키 고르니 지역으로 가야할지 회신 바람. 기다리겠음. 지금 수하물과 함께 역에 머물고 있음.

야코블레프, 구자코프40)

 

스베르들로프는 옴스크 소비에트 의장인 블라디미르 코사레프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코사레프는 4월28일, 매우 분명한 지시를 받았다.

 

블라디미르 코사레프, 옴스크 소비에트 의장에게.

 

야코블레프(그의 권한에 대해선 내가 귀하에게 알려줬음)가 수하물과 함께 옴스크에 도착할 것임. 그를 완전히 신뢰해도 좋음. 오직 우리 명령만 따르고 다른 사람의 명령은 무시바람. 귀하에게 완전한 책임을 지움. 모의가 필요함. 야코블레프는 우리의 직접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 옴스크-티우멘 열차노선에 즉각 지시를 보내기 바람. 야코블레프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협조를 해야할 것임.

스베르들로프41)

 

스베르들로프가 옴스크 소비에트에게 야코블레프에 협조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인 4월28일에 또 다른 전보가 황실가족처리에 대한 경쟁자인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로부터 모스크바에 접수됐다. 이 때 그 전문은 스베르들로프 뿐 아니라 레닌도 수신인으로 하고 있었다.

 

의장께서 보낸 인민위원 야코블레프가 로마노프를 티우멘으로 데리고 와 열차에 태워 에카테린부르그로 향했었음. 그런데 예카테린브르그에서 가장 가까운 역까지 거의 절반을 오다가 야코블레프가 방향을 변경하여 되돌아갔음. 지금 니콜라스를 실은 기차는 옴스크 근방에 있음. 우리는 그가 왜 이렇게 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으며, 그것을 반역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음. 4월9일자 의장님의 서신에 따르면, 니콜라스는 에카테린부르그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됨.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지 알려주기 바람.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소비에트와 지역 당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야코블레프와 기차를 정지시켜 그와 니콜라스를 체포하여 에카테린부르그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내렸음. 전보로 회신 바람.

벨로보로도프와 사파로프42)

 

위의 전보는 아코블레프가 실제로 에카테린부르그를 향해 출발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등불을 끈 채 열차는 티우멘까지 뒤로 슬슬 미끄러져 가서는 모스크바의 반대방향인 옴스크로 가는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이유에선지 열차는 옴스크 에 도달하기 전에 멈춰 섰다.

 

4월29일 다른 일련의 교신이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 관계자들과 야코블레프 및 모스크바 사이에서 시작됐다. 사태가 실로 심상찮았다. 야코블레프는 반역죄로 고발되었고, 함축적으로 모스크바도 그런 비난을 받았다. 우랄 소비에트가 모스크바의 권력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 때 벨로보로도프로부터 스베르들로프에게 전보가 왔다. 벨로보로도프는 야코블레프가 반역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계속 주장하며, 누가 야코블레프에게 옴스크로 가는 동쪽 노선을 택하도록 허가를 내렸는지 질문을 하고 있다. 더욱이 벨로보로도프는 4월9일 모스크바가 황실가족을 우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그 후 우랄 관구 관리들은 그 결정에 대한 어떠한 변경도 통보 받지 못했다는 것을 스베르들로프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랄관구 노농병(勞農兵) 소비에트는 만장일치 평결로 그[야코블레프]를 노골적인 반혁명분자로 보고 있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리고 소비에트최고중앙집행위원회(TsIK) 의장의 엄중한 서면지시를 어겨가며 전 짜르를 혁명적인 우랄관구 바깥으로 빼 내가려고 하고 있음.

 

황실가족수송경로 지도

 

--------

--------

-------

 

모스크바 당국과 야코블레프의 활동일지 - 1918년 4월

 

1. 모스크바

 

● 1918년 3월28일, 옴스크 소비에트가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토볼스크에 있는 니콜라스 감시체제를 바꾸어 자기들의 관할권 아래 두게 해 달라고 요청.

 

● 1918년 4월1일 이전에 블라디미르 본츠-브루에비치*는 소비에트 최고중앙집행회의 사무국(VTsIK)에 보낸 서한에서, 토볼스크에서 온 한 병사의 보고에 따르면 니콜라스를 감시하는 수비대 내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언급함 -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는 그 병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회신을 보냄.

 

● 1918년 4월1일, 모스크바는 황실가족을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정 안되면 그들을 즉각 모스크바로 수송해 오도록 명령함. 명령서는 공표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함.

 

● 1918년 4월6일, VTsIK 최고회의 간부회는 스베르들로프에게 우랄에 체포돼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동을 지시하는 권한을 부여함.

 

● 1918년 4월9일, 스베르들로프는, 바실리 야코블레프가 니콜라스를 이송하는 책임을 맡게 될 것이며 그가 니콜라스를 교도소에 집어넣거나 저택에 감금하거나 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고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에 통보함.

 

2. 토볼스크

 

● 1918년 4월22일, 야코블레프가 토볼스크에 도착함.

 

● 1918년 4월23일, 야코블레프는 알렉세이가 병중이어서 전체 가족과 함께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됨 - 파벨 마트베예프와 알렉산더 아드베예프가 야코블레프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훗날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황실가족을 관리하는 첫 인사들이 됨.

 

● 1918년 4월24일, 한편 토볼스크에선 야코블레프가 모스크바로부터 황실가족의 일부만 - 니콜라스, 알렉산드라, 마리아 및 안나 데미도바라는 시녀 한 사람 - 을 이송토록 하라는 지시를 받음. 처음에 티우멘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출발함.

 

3. 티우멘

 

● 1918년 4월27일, 티우멘 기차역에서 야코블레프는 필립프 골로스체킨***에게, 귀하가 지휘하고 있는 분견대들[코크리아코프를 포함하여]이 수하물[니콜라스]을 파괴하려고 시도했으며, 황실가족과 나[야코블레프]를 위협하는 것은 물론 귀하[골로스체킨]를 무시하고 있다고 통보함. 야코블레프는 골로스체킨에게 수하물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했으며, 필리프에게는 중앙인민위원회가 황실가족을 안전하게 지키도록 자기에게 약속했다는 것을 상기시킴. 직접 상세하게 회신하도록 요청.

 

● 1918년 4월27일(오후 8시 50분). 티우멘으로부터 야코블레프가 다시 모스크바의 스베르들로프에게 전보를 침. 노정이 변경됐는지 아니면 처음 그대로인지를 문의함 - 즉각 스베르들로프의 회신이 옴 - 노정은 처음 그대로이며, 수하물과 동행하고 있는지를 문의함.

 

● 1918년 4월27일(저녁), 스베르들로프가 야코블레프에게 전보를 쳐 야코블레프의 우려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단정하며, 처음 계획한 노정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 상황을 봐 가며 결정하라고 지시함. 야코블레프는, 수하물(니콜라스)의 생명은 물론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해 아직 염려가 되고 있기 때문에 처음 계획된 노정 대신 옴스크행을 택해도 괜찮은지 스베르들로프에게 문의함 - 그는 추가 지시를 기다릴 것이라고 했음.(간격) 스베들로프는 그에 동의하고 비밀리에 지시를 내림 - 그렇게 하기로 결론이 남.

 

● 1918년 4월27일, 야코블레프는 전보로 일부 에카테린부르그 사람들에 의해 그 자신과 수하물을 죽이려는 계획이 있었으며, 이 모든 사실을 알려준 병사 한 사람을 억류해놓았다고 모스크바에 통보함 - 그러면서 야코블레프는 골로스체킨을 제외한 에카테린부르그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하물을 파괴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말함 - 그는 종신 인민위원으로서 그 수하물을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게 지켜낼 것이지만 예카테린부그의 일부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고 말함 - 그는 수하물을 심스키 고르니로 운반할 것이며, 만약 이 수하물이 그들[에카테린부르그]의 손에 떨어지면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말함.

 

4. 옴스크

 

● 1918년 4월28일, 우랄관구 소비에트의 알렉산더 벨로보로도프와 게오르기 사파로프가 레닌과 스베르들로프에게 전보를 쳐 왜 야코블레프가 에카테린부르그 대신 옴스크로 가고 있는지 알고싶다고 문의함 - 그들은 이것을 반역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며, 레닌과 스베르들로프에게 그들이 니콜라스와 야코블레프를 체포하도록 명했다고 통보함.

 

● 1918년 4월18일, 스베르들로프는 옴스크 소비에트에 전보를 쳐 야코블레프를 신뢰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맡겨두도록 지시함. 그리고 그와 모의하여 그를 도와주라고 함.

 

● 1918년 4월29일, 벨로보로도프는 스베르들로프에게 전보를 쳐 야코블레프를 반역자라며 다시 비난함 - 그는 스베르들로프에게 모든 관련자들에게 전보를 쳐 야코블레프를 체포토록 지시하라고 요구함[벨로보로도프는 이 전보를 최우선 군사전보로 보냈음].

 

● 1918년 4월29일, 스베르들로프는 벨로보로도프를 수신인으로 하여 에카테린부르그에 전보를 치고. 그리고 이 때 골로스체킨에게도 전보를 쳐, “야코블레프가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 다시는 그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 야코블레프는 완전히 신임을 받고 있다 - 자세한 것은 특별 밀사 편으로 보낸다”고 통보.

 

● 1918년 4월29일, 스베르들로프가 야코블레프에게 - 즉시 티우멘[그리고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가라, 우랄 사람들[우랄관구 소비에트 사람들]과 양해가 이루어졌다. 나는 모든 명령이 정확하게 이행될 것으로 확신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침.

● 1918년 4월29일, 야코블레프는 스베르들로프로부터 에카테린부르그와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확약을 받은 후 조건부로 수하물을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에 인도하는 데 동의함. 그러나 그는 스베르들로프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요청함; “만약 수하물을 심스키 지역으로 보내게 되면, 귀하는 그것을 언제든지 모스크바나 귀하가 원하는 다른 어떤 곳으로 운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탤릭체와 밑줄은 저자가 한 것임). 꼭 그러시다면 수하물을 그들에게 넘겨주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수하물을 운반하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 소브나콤(인민위원회) 비서.

 

** 러시아최고소비에트집행위원회(VTsIK) 의장.

 

*** 우랄관구소비에트 군사담당 인민위원.

 

모든 기초자료는 마크 스타인버그와 블라디미르 쿠루스타이에프가 쓴 로마노프의 몰락(The Fall of Romanovs) pp.229-52에서 인용됨.

 

그리고 벨로보로드프는 황실가족 호송대의 변경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모스크바에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야코블레프가 제시하거나 인용하는 각종 서류에 유의하지 않을 작정임. 야코블레프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지시를 받아 지금까지 수행한 모든 조치들이 논란의 여지없이 범죄행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임. 공산주의 볼셰비키당 지역위원회, 좌익 SRs 및 과격주의자들은 이들 관련자들을 위한 지역 소비에트의 결의를 당연히 집행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음. 우리는 [귀하가] 즉시 에카테린부르그 지방 소비에트에 중앙에서 채택된 방안들과 [동시에] 그 시행결과에 대해 전보로서 알려줄 것을 요청함.

우랄관구 노농병(勞農兵) 대표자 소비에트의장,

알렉산더 벨로보로드로프43)

 

이 때 벨로보로도프의 서명 형태와 메시지의 어조는 불쾌하고 도전적인 것이었다. 팽팽한 대결이 계속되자, 스베르들로프는 벨로보로도프와 필리프 골로스체킨에게 직접 회신을 한다. 야코블레프는 골로스체킨을 가리켜 우랄에서 니콜라스와 그 가족의 죽음을 보고싶어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베르들로프는 사파로프를 배제한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야코블레프가 수행하고 있는 모든 일은 - 프레오브라젠스키, 디드코브스키, 사파로프는 명심하기 바람 - 본인이 직접 지시한 명령을 따른 것임. 특사 편으로 자세한 내용을 통보하겠음. 야코블레프에 관해서는 명령은 내리지 않을 것임. 그는 오늘 아침 4시에 나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것임. 우리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어떤 행동을 해서는 안됨. 야코블레프는 완전히 신임을 받고 있음.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간섭하지 말기 바람.

스베르들로프44)

 

스베르들로프의 지위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조사하여 해결해 주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심문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다음과 같은 전보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그의 명령이 의심할 바 없이 수행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야코블레프에게 방향을 바꾸어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가도록 전보를 쳤다.

 

즉시 티우멘으로 되돌아가기 바람. 우랄 사람들과 양해가 이루어졌음. 그들은 방법을 선택했고 그리고 지역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지기로 보증하였음. 티우멘에서 모든 수하물을 우랄관구위원회 의장에게 인계하기 바람. 틀림없이 그렇게 하기 바람. 귀하도 [그들과] 함께 가서 의장을 돕기 바람. 임무는 꼭 같이 지속될 것임. 귀하는 중요한 일을 완수했음. 에카테린부르그에서 귀하는 구체적인 제의를 받게될 것임. 옴스크에서 티우멘으로의 출발을 나에게 알려주고 그 사본을 우랄관구위원회의 벨로보로도프에게 보내기 바람. 필요하다면, 블라디미르 코사레프, 옴스크 소비에트 의장의 지원을 받기 바람. 본인은 모든 명령이 틀림없이 그대로 수행될 것임을 확신함.

스베르들로프45)

 

이 명령을 받은 야코블레프는 4월 29일 옴스크에서 최후의 메시지를 타전함으로써 그의 상관에게 일종의 마지막 시도를 했다.

 

몰론 본인은 중앙으로부터의 모든 명령을 따를 것임. 수하물을 의장께서 말씀하시는 곳으로 인도하겠음. 그러나 나는 (중앙)인민위원회에 충고하여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함. (에카테린부르그) 인민위원들이 아주 위험하다고 할 근거가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시기 바람. 티우멘과 옴스크 소비에트 사람들도 그것을 확인하고 있음. 한번 더 고려하시기 바람. 만약 의장께서 수하물을 심스키 지역으로 보내면, 의장께서는 그것을 모스크바나 혹은 의장께서 바라는 다른 어느 곳으로도 옮길 수 있을 것임.[이탤릭체는 저자가 한 것임]. 만약 수하물이 첫 번째 루트로[에카테린부르그로] 가게되면, 의장께서 다시 그것을 그곳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움.....그래서 나는 의장께 마지막 충고를 드리는 것임. 미래의 결과에 대한 어떤 도덕적 책임으로부터도 우리들 자신이 자유로워야 할 것임. 나는 지금 첫 번째 루트(에카테린부르그)로 가려고 함. 우리는 즉시 출발할 것임. 나는 의장께서 전신기 앞에 앉아 그들과 협상을 할 때 계속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의장께 상기시켜드리는 것임....46)

 

야코블레프의 전보는, 에카테린부르그 대표단에 대한 감독권을 되찾았다고 분명히 느끼고 있는 스베르들로프에게, 심지어 우편 및 전신 담당 인민위원들마저도 전보수신이 신뢰성이 떨어지고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전보에 의한 협의가 불허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모스크바가 해당 지역의 모든 철도 관련자들에게 전문을 보내어 (짜르를 태운) 기차가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첫 번째 루트를 통해 에카테린부르그로 돌아가 수하물을 전달할 수 있게 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통신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렇게 되면 의장께서는 언제나 그것(수하물=짜르)을 모스크바나 혹은 의장께서 원하는 어느 곳으로도 옮겨갈 수 있음(이탤릭체는 저자가 한 것임)이라는 구절이다. 야코블레프는 황실가족에 대한 “여론조작을 위한 공개재판”이 예정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분명해 보이며, 심지어 그들을 모스크바 이외의 어떤 곳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붉은군대 우랄분견대의 일원이고, 야코블레프가 그의 전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포로이며 밀고자인 알렉산더 네볼린의 진술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야코블레프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에카테린부르그 분견대와 함께 토볼스크로 왔다고 한다. 그는 야코블레프 분견대의 도착을 보았고 그리고 황실가족과 함께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가기를 기다리며 토볼스크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분견대 참모장의 측근인 구시아츠키라는 사람과 그리고 야코블레프가 골로스체킨에게 보낸 전보에서 언급한 사람은 신뢰성이 부족했는데, 그들이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코블레프 인민위원이 로마노프를 모스크바로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짜르를 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에카테린부르그로 데려 가는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47)

 

네볼린의 진술은 야코블레프가 전보로 보고한 상황과 구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는 황실가족을 언제쯤 그리고 어디에 숨겨둘지 결정한 회합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볼린 자신은 그것에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이것에 관해 말하지 말라. 만약 누가 이들이 어느 분견대냐고 묻거든, 모스크바에서 온 분견대라고 말하라. 너의 우두머리가 누군 지를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역 소비에트 그리고 일반적으로 전체 소비에트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약탈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나 자신은 당신들 계획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로마노프 일가를 죽일 필요가 있다면, 당신들은 그것을 개인적인 결정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행여 그러한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48)

 

이것은 이기적인 증언이거나 아니면 진실의 한 고리를 가지고 있거나 할 것이다. 모든 소비에트 구성원들이 짜르가 죽어 없어지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런 일에 손을 빌려주고 싶어했다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네볼린은 말하기를, 논란이 단계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그는 모스크바가 로마노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타개책을 찾고 있는 나는 결국 야코블레프의 분견대 쪽으로 도망가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49)

 

지금 이 에피소드에서 분명해 보이는 것은, 모스크바가 황실가족을 안전한 곳 - 러시아의 다른 곳에 있는 안전한 곳이거나 혹은 외국정부의 손에 맡기거나 - 으로 옮기려고 했다는 점이다. 황실가족과 야코블레프 양쪽 다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온 악당들의 표적이었다. 분명한 것은 모스크바 자체가 갑자기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를 제어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중앙위원회 명령이 무시됐을 뿐만 아니라 어떤 간섭도 반역으로 간주할 것이라는 안하무인격인 통보를 받기도 했다. 우랄 사람들은 매우 효율적으로 중앙위원회를 좌절시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닌이 수립된 지 6개월 밖에 안된 허약한 정부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카테린부르그 패거리들은 레닌의 통제권 밖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제를 갖고 있었다.

 

야코블레프 에피소드에 대한 한가지 관점 - 신속하게 추진해야할 절박한 필요성 - 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고 있다. 야코블레프는 토볼스크에서 황실가족을 빼내는 일을 급히 서둘도록 계속 재촉했다. 그가 토볼스크에 도착했을 때, 알렉세이가 혈우병으로 심하게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놀랐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태자가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알렉세이의 상태가 좋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실행하는 것은 가족들을 아연케 하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에게 알렉세이와 그리고 다른 딸들을 뒤에 남겨두도록 아무튼 설득을 시켰던 야코블레프는 시간을 거의 낭비하지 않고 니콜라스, 알렉산드라 그리고 마리아만 출발시켰다. 알렉산드라는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그냥 머무느냐 혹은 남편과 함께 따라 나서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심한 고뇌의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 때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그 후 누군가가 회상했다.

 

“내 아들이 내게 어떤 존재라는 것을 당신은 알 거예요. 내가 아들과 남편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다니! 그러나 마음을 정했어요. 내가 흔들려서는 안되거든요. 나는 내 아이들을 남겨두고 내 남편과 생사를 함께 하기 위해 떠나야 해요.”50)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스를 그런 조치에 따르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어떤 압력이 가해졌음이 틀림없다. 황후의 소동은 야코블레프가 그녀와 그녀의 남편과 공유했던 정보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녀가 아이들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그녀를 형용할 수 없이 비탄에 잠기게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결정은 갖은 수단에 의한 설득의 결과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전혀 낯선 야코블레프라는 사람의 수중에 떨어져 있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그들이 안전한 곳으로 인도될지 아니면 볼셰비키들의 손에서 죽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생소한 에피소드가 언급될 때마다, 야코블레프가 그렇게 서둔 것은, 봄이 와 해동이 되면 한동안은 길과 강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봄의 해동이 니콜라스를 모스크바로 데려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라면, 나머지 가족들을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기는 것 역시 확실히 막았을 것이며, 그리고 그들이 몇 주 후에 바로 거기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든, 니콜라스의 이송을 그토록 급히 서둔 것은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지 않고, 그것이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대비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신중한 타이밍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야코블레프와 그의 동기에 대해, 그리고 그가 영국 혹은 심지어 독일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에 대해 많은 억측이 있어 왔지만, 그러나 신뢰할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소련 서류자료들은 그가 콘스탄틴 미아친이라 불린 과격 볼셰비키였으며, 그의 혁명적인 과거는 사격술과 금괴 실은 열차 강도질에 능한 테러리스트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기록은, 황실가족을 에카테린부르그로 실어 준 후, 그가 시베리아에서 체코군 포로들과 백군에 대항해 싸운 소련 2군사령관에 임명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류자료들에 따르면, 1918년 7월 야코블레프는 변절하여 백군으로 전향하였으며, 그리고 붉은군대 병사들로 하여금 볼셰비키들에게 적대하도록 간곡히 타이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1919년 백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는 야코블레프 같아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스토야노비치라 칭하며 중국에 나타나서 중국혁명지도자인 선얏센(孫文)의 조언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또한 체카(볼셰비키정부의 최초의 비밀경찰, 후에 GPU, NKVD 및 KGB로 변화했다)를 위해 첩보원 노릇을 했다는 말도 있었다.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이 야코블레프는 1927년에 소련으로 되돌아와 체포되었고 백해-발틱 운하에서의 노역형에 처해졌다. 2년 후 그는 석방되었지만, 1938년에 다시 체포되어 처형됐다.51) 스타인버그와 크루스탈레프는 야코블레프의 그 후의 생활에 대한 그들의 보고서에서 같은 행로를 따르고 있다. 그들이 참고한 다른 문서자료들은 야코블레프가 1918년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했지만 1929년이 아닌 1933년에 석방됐다고 얘기하고 있다.52) 그래서 소련의 문서자료들은 혼란스럽다. 그들이 동일인물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 - 그 야코블레프라는 사람이 니콜라스와 그의 아내 및 딸들을 에카테린부르그로 데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니콜라스, 알렉산드라 및 마리아의 이송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든 기록들은 어느 과격 볼셰비키라도 증오했을 (구)정권의 심벌을 향해 야코블레프가 예의바른 행동과 진심 어린 염려를 해주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분명히 이런 행동은 야코블레프를 난폭한 구석이 있는 혁명당원으로 묘사하고 있는 소련의 공식기록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이상하게도 다른 야코블레프가 1920년의 미국 서류철에서 나타났다. 야코블레프란 이름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 서류철은 미하일 야코블레프라는 사람이 이집트(당시 영국 보호령)에서 영국이 관리하고 있던 러시아 피난민 수용소에 아마도 있었던 것으로, 그리고 러시아 최고훈장인 성 죠지 십자훈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0년,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영사관에서 기록한 서류에 따르면, 그는 하와이에서 그의 동생과 재결합한다는 공공연한 목적으로 미국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뉴욕으로 옮기기 위한 교섭이 대사급에서 처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아주 엄격했던 정규비자 신청이 그의 경우엔 면제됐다. 분명히 그는 중요한 어떤 사람이었는데 꼭 미국정부에 대한 것 만은 아니었다. 그는 수술합병증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즉시 죽었다.

 

야코블레프가 죽은 후 곧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 영사이며, 짜르구하기란 책의 번역자들 중 한사람이었던 게오르그 세르게이비치 로마노프스키는 야코블레프의 동생에게 미하일이 그의 조국에 기여한 “서사시적인” 봉사를 기리는 서신을 보냈다. 그가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프랑스는, 마치 특례를 베풀듯이, 그를 무료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고 하와이에서 가장 이름난 의사가 그를 치료하게 배려해 주었다. 게다가 워싱턴의 러시아 대사관은 이 “서사시적인” 병사의 관 위에서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하는 완전한 군대식 장례를 치러 주었다.53)

 

그는 참으로 파격적인 인생을 살았음에 틀림없다. 미국인들, 영국인들, 프랑스인들 그리고 러시아인들 모두가 그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일시적인 관심 이상의 것을 가졌으며, 그에게 영예로운 형식의 장례를 베풀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그러한 대접을 마땅히 받을 만한, 그리고 “서사시적인”이라는 용어로 마땅히 표현될만한 이 사람은, 단연코 비범한 어떤 일을 했음에 틀림없다. 이 사람이 바로 로마노프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음에 틀림없는, 그리고 연합국들에게 고용되어 있었던 그 야코블레프였을까?

 

소련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야코블레프의 간곡한 거동은 일반적으로 그를 표면상 소련을 다스리는 주체인 중앙위원회 의장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앞잡이로 묘사하는 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에 대한 이런 해석은, 여론조작용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니콜라스를 모스크바로 데려오려는 스베르들로프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으로 그를 묘사하는 것이며, 한편으로 우리는 스베르들로프가 처음부터 내내 니콜라스를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수중에 넘겨주려고 했던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련의 문서들은, 비록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모스크바가 사태 장악력을 거의 상실한 것 같았지만, 야코블레프가 어떤 기만행위를 했다든지 하는 얘기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야코블레프와 스베르들로프가 절친한 친구 사이이며 그리고 또한 야코블레프가 볼셰비키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괄목할만한 증거가 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앞잡이로 만들어야 했을까?

 

이것은 당시 독일을 속이기 위해 짐짓 그렇게 했던 것이란 주장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황실가족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모스크바로 데려 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현지 소비에트의 월권행위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독일을 속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모험이 모순덩어리인 소련 문서들로, 혹은 야코블레프가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나 그 외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시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온당할 것 같다. 이를테면, 모스크바는 황실가족을 “어디든지” 보낼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올 때까지 어디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자 했다. 레닌이 그들을 협상에서의 양보미끼로 이용하고 있었고 그리고 레닌이 황실가족에 대해 그가 요구하고 있는 돈과 조건을 연합국 측이 수락할 때까지는 그들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증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레닌은 처음부터 황실가족을 에카테린부르그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토볼스크에서 보았듯이 에카테린부르그의 지방 소비에트는 모스크바가 시행하려 했던 것보다 더 과격한 계획을 진전시켰던 것이다. 자신들의 계획이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에 의해 좌절된 것을 알게된 스베르들로프와 레닌은 위험을 무릅쓰고 니콜라스, 알렉산드라 및 마리아를 에카테린부르그로 데리고 가는 것을 허용했다. 자기들과 그리고 필리프 골로스체킨이 사태를 장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 후 1918년 7월, 문제의 7월17일 밤 바로 직전에, 모스크바는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심지어 현지 수비대를 이동시키기까지 했다.

 

야코블레프 에피소드 중 이 문제가 그 뒤에 나온 책들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야코블레프는 케렌스키, 영국 외무부의 자금으로 활동했던 런던 타임스 기자인 로버트 윌튼, 전에 러시아 황태후의 개인 호위대장이었던 폴 불리긴 대위, 그리고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녀였던 북소에베덴 남작부인 같은 (황실가족과 관련된) 책을 낸 저자들에 의해 최대의 찬사를 받고 있다.54) 짜르 지지자들이, 황실가족문제를 다루었던 어느 볼셰비키에 대해서도 야코블레프에게 한 것 같은 그런 부드러운 대접을 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제시된 증거는, 야코블레프가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나 “다른 어떤 곳”으로 옮겨, 연합국들이 2월에 금융사업계획을 통해 레닌에게 지불했던 돈과 교환하여 영국으로 넘겨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 같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검토되겠지만, 레닌은 여전히 이중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로마노프 일가를 넘겨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독일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야코블레프가 내밀한 전보로 모스크바와 교신하고 있었을 때, 그는 레닌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와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레닌 자신이 뒤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다른 흥미 있는 우연의 일치로서, 스베르들로프의 형제들 중 하나가 프랑스 육군에서 정보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다른 형제인 벤야민은 제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뉴욕에서 시드니 레일리와 사업을 했었다.55)

 

우리는 리이트와 아르밋스테드가 황실가족을 넘겨받아 그들을 무르만스크로 인도하는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기 때문에, 4월에 일어난 사건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이해 못할 내용들이 아니게 됐다. 그 당시 무르만스크에서는 허드슨즈 베이사가 7명이 거주할 수 있는 저택을 짓고 있었으며 그 비용은 영국 해군본부가 부담했다. 연합국의 금융사업계획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지만, 시드니 레일리가 렐린스키라는 볼셰비키 동지로 변장하여 나타나는 바람에 혼란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야코블레프가 “특별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바로 몇 주전 레닌에게의 50만 파운드 지불은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모스크바 중앙위원회에 의해 준비된 모든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이것이, 어떤 곤란도 각오하며 관철하려고 한, 그리고 레닌, 연합국 및 독일로 하여금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매달리게 한 결과이다.

 

제7장 새로운 배역의 인물들

 

황실의 또 다른 움직임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황실가족에 대한 감독권을 장악함으로서, 연합국들은 이에 대처하여 추가 활동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새로운 인물들이 출현하게 된다. 미 국무부 제3차관인 브레킨리지 롱이 워싱턴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윌슨 대통령의 막역한 동료인 게빈 맥납에게 전보를 보내어, 켈리포니아 사람인 제롬 바커 랜드필드를 국무부에서 일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1) 1918년 이전 2년 동안 랜드필드는 국무부에 러시아에 대한 자기의 전문성을 살려 일하게 해 줄 수 없느냐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냈으나, 국무부로부터 그렇게 공손치 못한 부정적인 대답만 들어왔다. 그의 봉사제의를 거절하는 성의 없게 쓴 짧은 회신이 매번 그에게 부쳐왔던 것이다.2) 하지만, 야코블레프의 일로 해서 황실가족이 강경파인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수중에 들어가 분명히 이제 위험에 처하게 된 후 한 달이 조금 못된 5월21일에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롱이 “지금 기회가 있는 것 같다”며 랜드필드를 채용하는 문제로 맥납에게 전보를 친 것이다.3)

 

랜드필드의 유용성에 대해 문의하고 있는 사람은, 윌슨 대통령에게 사실상의 국무장관 역할을 하는 하우스 대령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브레킨리지 롱은 근본적으로 오직 대통령에게만 알려진 그 자신의 국무부를 운영했다고 썼다. 그 뒤 롱이 그의 회고록을 썼을 때인 제2차 대전 중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에게 다른 중요업무와 함께 “중대한 피난민 소개(疏開)”4)업무를 맡아달라고 하자 이에 응했다. 롱은 또한 1918년에 윌슨 대통령을 위해 하우스 대령, 북미주재 영국정보 책임자인 윌리엄 와이즈먼 경, 그리고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발포어 사이의 밀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롱의 발포어와의 관계가 아주 가까워져 발포어가 미국을 방문할 때에는 거의 차관(롱) 관저에서 머물렀다. 롱이 남긴 편지 내용으로 보아, 그는 윌슨, 하우스 및 발포어로부터 대소 중요사에 대한 그의 업무능력에 신뢰를 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롱이 랜드필드의 도움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의 수신인인 켈리포니아의 게빈 맥납 또한 로마노프 모험담에서 유명한 출연자가 될 사람이다.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미국 서부지역 담당 선거조직 책임자였으며, 또한 민주당 국가위원회 위원이었고, 윌슨이 당선된 지금은 중요한 노동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5) 브레킨리지 롱은 게빈 맥납에게 보낸 편지에서 심지어 “대통령에 대한 귀하의 특별한 관계”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제롬 바커 랜드필드의 출신배경이다. 1871년 뉴욕에서 태어난 랜드필드는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페트로그라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했으며, 우랄산맥 지도를 만들면서 말을 타고 시베리아 일부를 탐사했다. 랜드필드는 또한 러시아 본토인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러시아 방언에도 능했다. 우랄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광산개발권을 신청한 그는 우랄 지역에 대한 어떤 전문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 단지 몇 안 되는 서방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우랄 지역 특히 에카테린부르그와 그 주변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연합국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산이 될 터였다. 랜드필드는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소유주며 광산 엔지니어인 이파티에프 교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6) 더욱이 그는 짜르 복권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페트로그라드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끝낸 후 랜드필드는 1907년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녀인 로우바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 공주와 결혼했다. 로우바의 언니인 올가 니콜라에브나는 1895년 에드윈 이겔턴경과 결혼했는데,7) 그는 아테네에서 영국인 장관으로 그리고 로마 주재 영국대사로 근무했다. 이겔턴의 친척 중의 한 사람은, 죠지5세왕의 요청으로 1918년 미국여행을 하게된 사람(아서왕자) - 그의 미국여행은 짜르와 알렉산드라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 의 어머니인 콘노트 공작부인의 시녀로 봉사했다. 랜드필드의 결혼은 그를 러시아 궁정뿐 아니라 죠지5세와도 연계를 갖게 했다.

 

이와 같은 정보가 시사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정부에 봉사하고싶다는 랜드필드의 청원은 죠지왕의 사촌인 아서 왕자가 브랙킨리지 롱을 경유하여 그를 활용하게 하는데 마침내 성공할 때까지는 국무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롱이 밤에 맥납에게 전보를 쳤던 날인 5월21일에 아서 왕자가 뉴욕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브레킨리지 롱이 그를 만났다.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죠지왕이 직접 전선에서 복무중인 아서 왕자를 불러들이게 하여 여정에 오르게 한 것이다. 아서 왕자는 죠지왕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죠지왕이 다른 일에 매달려야 할 땐 공식적인 행사에서 대역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물론 아서 왕자는 러시아 황실가족과도 죠지왕과 유사하게 가까운 관계였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라와는 사촌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러시아 짜르 및 황후의 곤경에 남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서 왕자는 영국 구축함 편으로 이번 여행길에 올랐으며, 공식적인 설명으로는 그가 일본천황에게 관장(官杖)을 선물하기 위해 동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8) “관장사절”로 알려지게 된 것은 표면적인 정당화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여행이 아주 특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아서는 - 역사책이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 추측컨대 윌슨 대통령이 불편해 했던 정책인,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정책을 단지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여행길에 오른 것이었을까? 아니면 랜드필드를 국무부에서 일하도록 주선하려는 소망을 포함하여, 그 당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특별한 부수적인 일들을 다룰 만한 추가 의제가 있었을까?

 

아서 왕자의 미국여행은 마치 그가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단순히 들린 것처럼 소개됐다. 하지만 그가 오직 일본에 관장을 선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떤 다른 최고훈장을 받은 군 장교가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왜 죠지5세왕의 가까운 친척이 필요했을까? 한편, 죠지5세 및 짜르와 친척간인 아서 왕자는 왕과 윌슨 대통령 사이에 완벽한 대화통로를 만들었다. 그 후 12월에 런던으로부터 “지급...가족을 일곱 번 확인함”이라는 전보를 받게 되는 바로 그 날 밤에 왕이 윌슨을 손님으로 맞고 있었던 점을 상기해 봐도 그러하다. 아서와 미국 관리들과 계속 열렸던 회합의 주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국의 관장사절 건은 검토가 되었겠지만, 금융사업계획 및 시베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체코군의 봉기와 같은 것도 이들 회합에서 검토가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 때의 관장사절은 실제로는 러시아 황실가족 구출을 위한 죠지왕, 윌슨 대통령 및 일본천황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내세운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아서의 도착과 랜드필드의 채용은, 1개월 전 야코블레프의 “특별히 중요한 임무”가 실패한 이후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들의 일부였다.

 

우리는, 아서 왕자가 미국에 도착한 지 바로 2일 만에 모스크바에서 열리고 있었던 (볼셰비키들의) 한 흥미로운 회합의 내용으로 보아 (연합국 측이) 이들 계획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겠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1960년대, 한 망명자가 소련으로부터 갖고 나와 파리에서 발표한 서류에 따르면9)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야코블레프로부터 황실가족 감독권을 억지로 빼앗은 후 겨우 몇 주 지난 5월23일에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회의가 열렸으며, 이 회의에서 로마노프 일가의 운명이 다시 한번 검토됐다.

 

이 때 중앙위원회 전체 위원들이 황실가족을 모조리 없애버리기로 합의했다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견해는, 앞으로 우리들이 알게 되겠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독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10) 황실가족 문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갈등은, 트로츠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니콜라스를 모스크바로 데리고 와 여론조작을 위한 공개재판에 회부하느냐, 아니면 그를 시베리아의 안전한 곳에 감추어두느냐로 요약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레닌은 매우 말을 아꼈지만, 그때 그는 로마노프를 계속 볼모로 이용하는 그의 이중거래 및 금품강요 정책을 공개하고싶지 않았던 것 같다. 레닌은, 독일을 설득하여 그들이 소련의 핵심지역을 점령하지 않게 하고, 그리고 지난 3월의 브레스트-리토브스크조약에 의해 부과된 3억 루불치의 금화 보상금의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한 전략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는 로마노프를 연합국의 손에 넘겨주는 대가로 연합국들로 하여금 레닌이 그들과 또한 협조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리드해 갈 작정이었다. 지난 2월에 연합국은, 레닌이 이미 국유화했던 은행들의 친독일계 주주들을 돈을 주어 몰아낸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그에게 50만 파운드를 지불한 바 있다.

 

토의의 많은 부분이 짜르 정부가 진 외국 부채에 집중되었다. 트로츠키는 이들 부채에 대한 의무를 계속 거부해야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 트로츠키는 니콜라스를 공개재판에 회부하여 단죄하고 비난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토론이 격렬해지자, 칼 라데크가 끼어 들어 레닌에게 시비를 걸었다. 칼 라데크는 지난여름에 레닌과 함께 러시아로 되돌아 온 오스트리아 시민권 소지자이며, 스톡홀름으로부터 최근에 귀환하여 현재 외무부 고위층으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스웨덴 정보원들이, 아주 최근에, 대서양 저편에서 백정 니콜라스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런던 금융가가 카잔의 지하실에 묻혀 있는 수많은 금괴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가 하면, 월스트리트는 완전히 쓸모 없게 된 인간인....로마노프에게 앞장서서 박애주의적 관심을....보여주고 있습니다. 네셔널 시티은행이 그 작전에 자금을 대고 있습니다. 브로커는 토마스 마사리크인데, 그는 프라그의 흐라드신(城)에서 스스로 해방자로 자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체코군 부대들을 원격조종해 온 사람이며,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전 짜르의 구출을 약속했던 사람입니다. “레밍톤 암즈”사와 “메탈릭 케트리지 유니온”사가 외상으로 모든 군수물자들을 백군에게 지급하고 있는데, 체코군 부대들이 에카테린부르그와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죄수들(황실가족)에게 접근하는 속도에 따라 조절되고 있습니다. 미국은행들이 제시한 일련의 비즈니스를 마사리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꼭두각시 니콜라스를 구출하는 대가로 받는 300만 달러치의 금화, 기관총 및 소총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7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 화물선 토마스호가11) 틀림없이 로마노프 가족을 승선시킨 후 1만 4천 정의 소총을 하역할 예정”12)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앞서의 자기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 장이 진행돼 가면서 우리가 알게 되겠지만, 라데크는 놀랍게도 매우 정보에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짜르를 구출하려는 미국(연합국)/체코의 음모에 대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 화물선 토마스는 실제로 5월부터 7월까지 몇 달에 걸쳐 샌프란시스코, 호놀루루, 시애틀, 워싱턴, 호노룰루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함한 순회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14일 그 여정이 라데크가 예상한 바와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새로운 순회여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나가사끼, 마닐라, 괌, 호놀루루, 그리고는 샌프란시스코까지였다. 레밍턴 암즈사에 대한 그의 설명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어떤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하며 로마노프 모험담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이 때 시드니 레일리가 볼셰비키 렐린스키로 변장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진짜 레일리는 레밍턴 암즈사의 대리인이었으며 멀지 않은 과거에 엄청난 액수의 소총 거래를 주선했었다. 사실 라데크가 들먹였던 소총은 레일리가 레밍턴사의 대리인으로 일할 때 거래를 성사시켰던 소총이었다.

 

분위기가 긴장된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로 돌아가, 라데크는 레닌이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황실가족을 독일에 넘겨주는 아이디어를 성공적으로 파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레닌은 마침내 그 생각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레닌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그는 노련한 정치지도자이며 음모자이다. 그는 이 결정을 꼭 최종적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다. 에카테린부르그의 문제의 7월17일 밤까지는 아직 2개월의 시간을 갖고 있었으며,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는 이 기간에 황실가족을 최고입찰자에게 넘겨주기 위해 엄선한 동료들과 함께 작업에 들어간다.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는, 레닌은 "볼셰비키 역사에서 항상 그랬듯이....뻔한 것을 비밀로 숨기며“, "1보 후퇴 2보 전진”을 금언으로 하는 사람의 화신임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레닌은 그가 트로츠키에게 “당신의 낭만적인 자세”라고 평한 것에 걸맞은 정치상황의 실체를 무시하려고 하였다. 성미 급한 트로츠키는 그가 브레스트-리토브스크 협상에서 했던 것처럼 정치현실을 무시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레닌은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져야만 했다.

 

레닌은 황실가족을 계속 교섭미끼로 간주했다. 같은 시기에 독일은 베를린 주재 볼셰비키 대사인 아돌프 조페로부터, 볼셰비키들은 황실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으며 모스크바로 데려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언질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독일 국무장관인 폰 쿨만이 조폐에게 이 문제를 제기한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으며, 폰 쿨만은 조페와의 회합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러시아 대사는,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신하고 있다고 대답했으며, 다수의 전문을 그 증거로 내놓았다. 그들이 짜르 가족을 보살피고 적당한 곳에 안치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하다.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로 오게 하는 결정 역시, (시베리아에 있는) 체코군 부대들의 철도교통 방해가 분명해짐으로써 근본적으로 준비되고 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현재 황실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짓을 할 수가 없다.13)

 

모스크바의 외무부 인민위원인 게오르그 치체린으로부터 다른 언질이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요청으로 황실가족을 모스크바에 데려오는 계획이 독일인들에게는 혼란, 표리부동 및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나마 어떻게든 단연코 성사될 수 있을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갔고 니콜라스도 그의 가족도 모스크바에 나타나지 않았다. 레닌은 여전히 때를 기다리며 그의 계획을 정연(精硏)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붉은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트로츠키의 잇따른 승진과 그리고 그가 모스크바 남쪽 볼가 강변에 있는 짜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로 불림)으로 떠난 것은 레닌이 교묘하게 처리한 것인데, 이는 분명히 레닌이 자기의 계획에 대한 중요 장애물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탈린도 트로츠키와 함께 그 곳으로 파견됐는데, 아마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지키는 사람”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트로츠키는 그 뒤 레닌에게, 스탈린이 우랄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자기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트로츠키가 레닌의 동의 없이 황실가족을 옮기는 계획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트로츠키가 멀리 가버린 이제 레닌은 러시아최고소비에트의장인 스베르들로프와 우랄 볼셰비키 지도자인 필리프 골로스체킨과 함께 전형적인 음모 스타일로 로마노프의 석방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스베르들로프, 골로스체킨, 그리고 스탈린 - 스탈린은 레닌의 가장 능력 있는 행정가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마사리크와의 협상으로 결정된 체코군 포로 철수작전에 가장 많이 개입한 사람이다 - 은 모두 투르크한스크에 함께 망명해 있었던 동지들이었고, 따라서 서로들 가깝게 지냈다.14) 스베르들로프와 골로스체킨 둘 다 이미 황실가족을 구출하려는 야코블레프의 초기 계획에 관여했었다. 그리고 7월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지키고 있는 동안, 그들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사건에 휩쓸리게 된다.

 

실제로 라데크가 마사리크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를 폭로하고 있었던 바로 그 때에 (시베리아에 있는) 체코군 부대들이 봉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마사리크는 차알스 크레인이 공공소비를 위해 마련하고 있었던 한 회합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이 봉기문제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사건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게 된 것은, 토마스 마사리크의 지도 아래 있는 체코군 부대들이 당시 시도되고 있었던 볼셰비키 정권타도와 황실가족 구출에, 판에 박힌 역사서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밀접하게 연루돼 있었음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체코군 부대들의 봉기가 시작된 주(週)이며, 아서 왕자가 아직 미국에 머무르고 있을 때인 1918년 5월25일, 브레킨리지 롱을 발신인으로 하는 두 번째 전보가 제롬 바커 랜드필드를 참조인으로 하여 다시 한번 개빈 맥납에게 타전됐다. 이번 전보는 “.. 우리는 지금 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며 실질적인 다급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15)

 

역시 5월 25일, 이보다 몇 시간 앞서 수천 마일 떨어진 러시아에선, 또 다른 미국인의 활동이 있었다. 최근에 나온 책 미하일과 나타샤(Michael and Natash)에서 이 책의 저자들인 로즈메리와 도널드 크로포드는, 페름에서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던 니콜라스 2세의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1918년 5월25일 뜻하지 않게도 오브리엔씨와 헤스씨라고 하는 두 미국인들의 식후방문을 받았는데, 그들 두 사람은 “미하일을 구출하려는 음모자들의 메신저일지도 모른다 싶어 체카(KGB의 전신)가 방심 않고 관찰해 온 종류의 사람들”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 두 미국인은 아서 왕자가 미국에서 결말을 짓고 있는 계획들을 미하일 대공에게 알려주기 위해 보낸 것이었을까? 설사 랜드필드를 채용하는 “기회”는 아서 왕자가 미국에 도착한 직후 롱이 맥납에게 전보로 언급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제 간청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리고 아서 왕자가 미국을 방문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것으로 보인다. 랜드필드는 즉시 켈리포니아에서의 그의 업무를 정리했고, 국무부는 재빨리 국무부의 예산을 교묘하게 전용하여 랜드필드에 대한 급료를 마련하느라 부산을 떨었다.17) 랜드필드는 5월31일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에 관한 국무부 기록들은 1919년까지의 그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그렇게 많이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랜드필드가 금융사업계획에 의해 지원을 받고 있었던 반볼셰비키군 장군들 중 하나인 알렉세예프 장군과 연루된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관심 끄는 색인카드 하나가 있다. 원본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그 개요는 알렉세예프장군이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사수해야 했다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이 “의사(doctor)"라는 언급은 그것에 대한 어떤 친밀성의 고리를 갖고 있다. 시드니 레일리의 회고록이 1933년에 발간되었을 때 그 글들 중 하나에 ”의사들이 너무 일찍 수술을 하여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다“ 고 쓰고 있다.18) 레일리가 언급하고 있는 ”의사들“ 중 하나는 그의 친구 보리스 사빈코프인데, 그는 전에 테러리스트였으며 케렌스키의 측근이었고, 이제는 연합국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사빈코프는 1918년 7월 중순에 일으키기로 한 반 볼셰비키 봉기를 따로 비밀리에 계획한 군사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밀고를 당했고 투쟁을 조급하게 서두는 바람에 실패했다. 사빈코프는 만약 그 계획이 간파되지 않았다면, 다른 ”의사들“(연합군 군사지도자들)과 합류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모스크바 주재 영사인 드위트 푸울은 그 후 1920년 의회에서 증언할 때, 그가 “소련정권[1918]에 저항하는 어떤 음모를 알고 있었거나 연루된 적이 전혀 없었다”고 줄기차게 그리고 되풀이하여 주장했다.19) 하지만 데이비드 포글송은 그의 “비밀전쟁”이란 책에서, 푸울이 실제로 워싱턴에 전보를 보내 7월 중순으로 잡혀 있는 봉기일자를 전달해 주었다고 밝혔다.20)

 

제롬 바커 랜드필드는 국무부와 함께 보리스 사빈코프의 활동과 1918년 7월의 러시아 상황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랜드필드가 1918년 6월과 7월의 이 위기의 시기에 러시아에서 여러 다른 핵심인물들과 역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심지어 토마스 마사리크까지도 랜드필드가 “모든 러시아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져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정성을 기울여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21) 그의 헌신의 깊이와 활동의 폭은 아마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1918년 여름, 특히 6월과 7월을 연속하여 다룬 모든 다른 자료들이 1929년 “행정관의 명령”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코군 부대들과 그들의 러시아 동료들을 위한 그의 은밀한 활동으로 체코군 부대들이 그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지금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사빈코프가 밀고를 당했고, 그리고 그릇된 정보에 따라 7월 첫 주말에 봉기를 시작한 것이 여러 사건들의 잘 배합된 합류를 손상시켰다. 랜드필드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알고 있었던 여러 사건들은 현재로선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사수한 알렉세예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파기된 서류에 기록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의사”인 보리스 사빈코프 역시 추측컨대 짜르의 시종이었던 파르펜 돔닌이 남긴 서류에 언급됐던 것 같다. 이 서류는 1921년 미 육군정보대의 서류철 속에 들어가 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파르펜 돔닌 서류는 1918년 7월 16/17일 밤에 짜르와 그의 가족들이 당한 사건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명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새로 나온 증거는, 1918년 봄과 여름에 볼셰비키들을 타도하기 위해, 푸울 장군의 지휘아래 북부 러시아에 진입한 영국군과, 남쪽으로부터는 체코군, 사빈코프군 및 알렉세예프군이, 그리고 동쪽에선 일본군이 밀고 옴으로서 실제로 전체를 커버하는 전략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영국군 작전에 대한 암호명들은 “사이렌”과 “도망가다(elope)"였다.22) 영국은 그들이 누구와 도망가려고 생각했던 것일까? 황실가족이 유일하게 유망한 후보자가 되고있고 그리고 모든 새로운 증거들이 분명히 그런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아서 왕자의 미국 도착과 거의 같은 시기인 5월 중순에 뉴욕에서는 차알스 크레인이 윌슨 대통령의 비서관인 투물티23)에게 슬라브 민족의 노력을 지원키로 한 대통령의 최근의 결정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크레인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논의하기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는 동안 롱이나 혹은 아서 왕자를 만났다는 흔적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크레인이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그의 우편물을 받아왔을 만큼 영국과 잘 연결돼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크레인과 브레킨리지 롱이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리고 러시아 문제로 때때로 윌슨에게 로비를 했던 것으로 보아 있음직한 일이다. 윌슨의 비서관에게 보낸 편지는, 5월 초순에 그가 윌슨을 만났으며(윌슨 내외가 흔히 크레인의 초청을 받곤 했기 때문에, 그 만남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윌슨 대통령이 5월말 러시아에 있는 체코군 부대들의 봉기 이전에 체코군 부대의 운명에 더 많이 개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크레인의 능란한 수완이 다시 한번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한 차알스 크레인의 노력은 대부분 그와 마사리크와의 돈독한 관계에서 연유한 같다. 그들 사이는 하도 막역하여 마사리크의 아들 잔은 젊을 때 미국에서 크레인의 가족과 함께 생활했으며 결국 크레인의 딸 프란시스와 결혼했다. 다시 한번 크레인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마사리크와 윌슨 대통령과의 의사교환 및 회합을 주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리고 1918년 5월 칼 라데크가 주장했듯이, 토마스 마사리크 지도하의 체코군 부대들은, 종래의 역사가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밀접하게 로마노프가의 운명에 실제로 연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마사리크가 그의 동료들에게 전 짜르를 구출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칼 라데크의 중앙위원회 정보보고와, 그리고 랜드필드, 레일리 및 무르만스크에서의 저택건축과 금융사업계획 같은 작전에 대한 모든 새로운 정보를 고려할 때, 우리는 그 시절에 대한 전통적인 기록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토마스 마사리크가 체코군 부대들로 하여금 “봉기를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그의 오랜 친구 차알스 크레인의 도움으로 연합국들과 은밀히 협력하고, 그리고 엠마뉴엘 보스카란 이름의 체코 정보원이 그 연락책을 맡았던 것이 사실이었을까? 이 새로운 통찰과 함께, 그 봉기의 우발성이 지하 정보원들 및 “보이지 않는 외교관들”의 활동과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폭동은, 레일리가 레밍턴 암즈사의 등록 대리인이었다는 사실은 물론, “꼭두각시” 니콜라스를 위한 레밍턴 소총의 거래에 관해 라데크가 5월에 스톡홀름에서 수집한 정보에 대한 비평과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거대 금융기관들의 이해관계를 포함하여, 러시아에서의 연합국들의 재정적 및 정치적 이해관계가 위기에 직면했다. 사실, 네셔널 시티은행, J.P. 모건, 쿤 앤드 로엡 및 게런티 트러스트사 역시 거대한 액수의 대러시아 차관이 채무불이행 선언을 당할 위험에 처했다. 볼셰비키들이 모든 외국부채에 대한 반제를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 온, 칼 라데크의 월스트리트와 토마스 마사리크에 대한 비판이 레닌과 트로츠키를 불화 하게 했고, 이제 그 불화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러시아를 전쟁에서 손을 떼게 만든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을 볼셰비키들이 체결한 후인 1918년 봄, 러시아로부터 체코군 포로들의 석방조건을 정하는 데 스탈린이 한 몫 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탈린은 체코군 포로들의 러시아 퇴거를 위해 연합국을 대신한 마사리크 및 에두아르 베네와의 협상에 참여했다. 스탈린이 서명한 통행증을 갖고 러시아를 가로질러 귀국 길에 오르고 있는 체코군 병사들은 대독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유럽전선으로 가 연합군에 가담할 예정이었다.

 

5월에 체코군이 볼셰비키들에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봉기를 일으키자, 서 시베리아의 첼리아빈스크에 있는 체코와 항가리군 소속 전 포로들 사이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독일의 강요로 볼셰비키들이 체코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의 시베리아 통과를 차단하려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이지만, 볼가의 펜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7천 킬로미터에 걸쳐 4만 명 이상으로 구성돼 있는 복합적인 체코 포로군 부대들의 활동을 사전조정 없이 그렇게 잘 제어하기는 역시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 대담한 군사행동은 가장 신중한 준비를 필요로 했을 것이며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검토했듯이, 러시아의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려는 연합국이나 미국을 위한 어떤 계획도, 궁극적으로 입헌군주국의 형태로의 황실부활을 목적으로 볼셰비키정권을 타도하는 것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체코군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그러므로, 마사리크가, 체코군의 봉기는 니콜라스 구출계획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단언하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1918년 가을, 표면상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와 뉴욕타임스지 특파원으로 에카테린부르그를 방문한 첫 미국 저널리스트인 칼 에커먼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체코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애커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체코스로바키아인들은 그들의 혁명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들로부터 짜르를 구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 했다. 에카테린부르그에 사업상 이해관계를 가진 무당파 러시아인 및 외국인들도 짜르가 석방되기를 원했다.”24)

 

에커먼의 시각은 칼 라데크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라데크는 5월23일의 회합에서, 짜르를 구출하는 작전에 “네셔널 시티은행이 자금을 대고 있으며” 체코군이 마사리크 지도아래 무기와 금괴로 짜르와 교환하려 하고 있다고 발표했었다. 실제로 네셔널 시티은행은 거액의 채무불이행 사태로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차알스 크레인과 제이콥 쉬프 양인을 포함한 은행이사회가 상당히 우려해 왔음에 틀림없다. 에커먼은 1918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황실가족과 파르팬 돔닌에 대해 쓴 기사에서 라데크와 일부 같은 의견을 보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와 꼭 같은 견해들이 짜르구출하기란 책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에커먼이 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아래 전문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에커먼은 지금껏 알려져 왔던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수집했던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1918년 5월9일, 베른으로부터 수신

 

워싱턴, 국무부 귀중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의 칼 W.에커먼씨 소유의 가죽 서류가방 하나를 별도로 포장하여 보냄. 이 가방에는 에커먼씨의 개인서류와 그의 저술자료들이 들어 있음. 에커먼씨가 국무부의 묵인아래 스위스를 여행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이 가방을 감히 국무부로 보내는 것이며, 반대가 없다면, 그가 워싱턴에 도착하는 대로 그에게 전달해 주시기 바람.

삼가 부탁드림,

근배(謹拜),

 

별도포장: 가죽가방25)

 

우리가 알고 있듯, 이 시기의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처럼 에커먼은 추측컨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 기자로서 취재활동을 하면서 국무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사실상 스파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빈코프의 7월 봉기 때는 러시아에 없었으나, 9월7일에 극동을 경유하여 러시아로 향했다. 국무부의 다른 전보 하나가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지금 극동을 여행하고 있는 칼 에커먼의 메시지를 전보나 파우치 편으로 국무부 혹은 국무부를 경유하여 영사관에 전달해 주시기 바람.

랜싱(미 국무부)26)

 

이 정도이니, 에커먼이야말로 당시 러시아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따라서 앞서의 그의 체코군들에 대한 언급은, 체코군 부대들이 온 시베리아에 헐거운 대포를 굴리고 다닌 것이 아니라 백계 러시아파의 재야정부와 결합하여 중요한 지역을 맡아 조직화 된 작전을 펼쳤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백계 러시아파에 “재야정부”[즉.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운영되고 있는 정부기구인데, 이 경우에는 볼셰비키 타도를 목표로 은밀히 운영된 정부를 말한다.]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전통적인 역사서는, 여러 백계 러시아 정부들이 시베리아에서 독립적으로 갑자기 생겨나곤 했지만, 단지 체코군들에 의해 이 지역이 해방된 후에야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이들 정부들은 두개의 중요 권력중심으로 나눠져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사마라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사회주의 혁명정부(Komuch)이고, 다른 하나는 옴스크에서 통치를 꾀했던 자칭 시베리아 임시정부(PSG)였다. 체코군이 중부시베리아를 해방한 후에 들어섰던 것으로 추측되는 Komuch와 PSG가 1918년에 운영되고 있었던 유일한 정부기구들이었다는 주장은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1918년 7월 24일에 보낸 한 전보에서 에카테린부르그 주재 미국 무관 호머 슬로터 소령은 이렇게 말했다.

 

......새 정부는 대부분 경험부족을 인정하며 건전한 충고를 바란다고 노골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무경험자들로 구성돼 있음. 미국은 이 정부를 관리할 수 있음. 이 정부의 모든 정책에 신속하게 손을 봐야 할 곳이 있으므로 고문관들을 보내주시기 바람. 이 정부는 스스로 임시정부임을 선언하고 있음.....이곳에서 두마(의회)가 지난 1월(1918)에 개최됐으나, 볼셰비키들에 의해 즉시 폐쇄됐음. 그들이 비밀회합을 열어 현 정부를 선택했으며, 의원들의 명단은 볼셰비키가 이 지역에서 패퇴한 후에야 알려지게 되었음....27)

 

이 교신 때문에, 이젠 이 재야정부가 1918년 5월 이전에 체코군 지도자들과 접촉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호머 슬로터가 설명하고 있는 정부가 실제로 Komuch나 PSG 중 하나였다면, 그것은 비밀리에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해 온 것 보다 더 복잡한 방법으로 관리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금 우리는 체코군 봉기의 총체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슬로터의 활동은 그가 시베리아에서 보낸 여러 가지 보고서들에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7월16일에서 7월24일까지의 기간동안 체코군들을 위한 그의 활동에 관한 것뿐 아니라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28)에 대해서까지 이렇다 할만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그는 병석에 있었던 미국 영사 레이와 함께 옴스크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설명을 실증할 기록이 없다). 이것은 이 시대에 다른 많은 서류들이 없어진 것처럼, 그에 관한 서류가 깨끗이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가 그의 활동을 기록하지 않았거나 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의 기록들 사이의 공백은, 같은 기간 시드니 레일리에 관한 기록에 비슷한 공백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독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정보원들과 관련된 기록들만의 공백은 아니다.

 

그런데, 연합국이 볼셰비키들을 타도하고 로마노프를 구하기 위해 체코군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시사케 하는 또 한 사람이 1918년 6월에 시베리아에 있었다. 전쟁 중에 엠마뉴엘 보스카는 토마스 마사리크로부터 미국주재 영국정보기관 책임자인 윌리엄 와이즈먼 경과 교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보스카는 그 때 미국주재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공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스카는 윌리엄 와이즈먼 경을 통해 영국에 아주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측으로부터 발신되는 비밀전보를 가로채고,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첩자들을 잠입시키는 방법으로 정보를 빼 내 영국에 넘겨주었다. 그는 또한 독일 대사관에 걸려오는 전화를 도청했다. 이 정보는 와이즈먼 뿐 아니라 윌슨 대통령과 하우스 대령에게도 전달됐다.

 

랄프 H. 반 더만 소장의 활동에 대해 랄프 E. 웨버가 쓴 마지막 비망록(The final Memoranda)이란 책에서 우리는 반 더만이 1918년 6월5일 유럽에 정보수집 임무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 더만은 몇 번인가 그의 “특별 임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 임무의 성격을 밝힌 적은 없다.29) 현재 우리가 알고 있기로 그는 1918년 여름에 계획된 봉기작전을 조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 같다. 그 시기엔 에카테린부르그의 보스카와 호머 슬로터 같은 여러 정보원들이 “미국 정보기관의 아버지”로 불리곤 했던 랄프 반 더만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 무렵 반 더만은, 바로 몇 주전인 5월에 아서 왕자가 일본에 사절로 갔을 때 미국측 대표로 동반했던 쿤 장군으로부터 “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을 받고 있었다.30)

 

웨버에 의하면, 반 더만은 보스카를 높이 평가했으며 전쟁기간 중 내내 그를 중용 했다.

 

보스카는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어떤 신문 편집자였는데, 정치적으로 말썽이 나 체포될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1914년에 제 1차대전이 발발하기 약 12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미국에서 결성된 ‘보헤미아 민족동맹’의 실질적인 발기인이었다. 그는 1914-16년에 미국 정보기관을 위해 일했으며 아주 유능한 정보원이었다........이들 정보원들에게 필요한 모든 비용은 연합국측에서 부담했다. 미국이 참전했을 때, 보스카는 미국에서의 연합국을 위한 활동을 중단했다. 그 이유로 그는 그런 활동이 이제 미국에 의해 주도돼야 하고 그것은 바로 군사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33)

 

1918년 미국은 반 더만의 주선으로 보스카를 정식 정보원으로 인정했다.

 

“...우리는 그 후 보스카와 6명의 다른 사람들을 임명하였으며 그와 그의 사람들 중 5명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보스카가 프랑스로 파견되었지만, 그가 또한 러시아에 있었다는 다른 보고서들이 있다. 다시 우리는 보스카가 어느 정도나 개입돼 있었는지를 반 더만의 다음 얘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보스카가 베네씨 및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토마스 마사리크씨와 항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과거에 했던 일과 같은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그와의 이번 회합에서 결정됐다....”32)

 

보스카가 마사리크의 지시 아래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의 체코군들과 접촉을 해 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체코군이 꼭 군사전술상의 이유만으로 에카테린부르그에 압박을 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이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시도에 개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부 역사기술은 대체로 체코군 부대들의 자발적인 봉기로 인해 황실가족이 살해당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체코군이 에카테린부르그로 접근하자 볼셰비키들은 체코군이 로마노프 일가를 그들의 수중에서 뺏어가기 위해 밀고 오는 것으로 지레 겁을 먹고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마사리크는 자서전에서 체코군은 전 짜르를 구출할 의향이 없었다고 주장했다.33) 비록 마사리크가 보스카, 윌리엄 와즈먼경 및 차알스 크레인과 접촉하면서 보여준 것처럼 대체적으로 비밀업무에 적극적이긴 했지만, 그는 이제 한 국가의 수반으로서 그가 개입해 온 국가기밀활동에 대해 아는 바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행해진 많은 다른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마사리크의 이런 언급은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증거는 영국, 미국, 체코 및 프랑스의 정보원들이 합심하여 볼셰비키들을 타도하고 아울러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활동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국가들의 군사 및 외교 부문이 일제히 행동에 나서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1918년 7월24일 호머 슬로터는 에카테린부르그 인근에서 이용하고 있었던 암호인 “랄라비(larrabee)"를 조회하는 상황보고를 했다. 이 특별한 암호는 1913년에 개발되었으며, 미국 육해군 장교, 외교관 및 영사관 관리들이 합동으로 어떤 임무에 개입할 때마다 그들 사이의 ”비밀“교신에 사용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 각각의 업무를 위해 만들어진 그들 자신의 암호를 사용해야했다.34) 슬로터는 이렇게 말했다.

 

타쉬켄트 주재 미국영사로부터 무선 메시지가 이곳에 수신되었으며, 아마 귀하의 메시지도 같은 방법으로 이곳에 수신된다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람. 새 랄라비 암호 말은 전보를 위한 것이 아님[그래서 지워지지 않음]----그리고----.

 

레이 영사와 슬로터 소령 서명

 

더욱이 새로 나온 증거에 비춰보아, W.H. 클라크 경이 그의 시베리아에서의 임무에 맞춰 천거했던 영국 정보원인 케넬름 딕비-죤즈(“무역사절”로 아르밋스테드와 동행했던 사람과 동일인물)가 체코군들에게 그들이 페름과 비아트카를 장악하고 가능한 빨리 볼로그다에서 연합군들과 합류할 수 있게 하라는 명령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아르한겔스크의 푸울 장군으로부터 발송된 전문이다.

 

판독. 린들리씨(아르한겔스크)[영국 대리대사 - 금융사업계획에 연관된 린들리와 동일인]. 1918년 8월 27일

 

발신일시 1918년 8월27일 오후 7시 12분

수신일시 1918년 12월 3일

No. 104(R)

 

본인의 전보 101....폴란드 관리가 에카테린부르그의 영국, 미국 및 프랑스 영사들로부터 받은 암호 메시지를 갖고 왔음. 우리에게 온 메시지를 판독할 수 없음. 그러나 미국 대사가, 추가정보가 들어있는 그가 받은 메시지의 복사본을 나에게 주었음. 7월 초순에 볼셰비키들은 에카테린부르그와 그 근방 마을에서 체포한, 여자 3명이 포함된 73명을 사살했음. 본인이 7월 10일경에 볼로그다에서 보낸 딕비-죤즈 대위는 제 때에 도착하여 체코군들에게 그들이 비아트카에서 우리 군에 합류하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통보했다고 보고해 왔음.37)

 

그러나 딕비-죤즈는 그 자신의 얘기를 다시는 할 수 없게 됐다. 비밀 표시된 한 통신에서 그가 "9월 25일 첼리아빈스크에서 뇌막염과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리고 ”모든 자세한 내용은 엘리오트가 숙지하고 있음“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시베리아의 영국 고등판무관인 차알스 엘리오트 경39)은 공식적으로 황실가족의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40)

 

또한 영국기록에 의하면,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로 전진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일단의 체코군을 지휘했던 전 짜르군 장교인 디테리크스장군이 영국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다.41) 뜻밖에 발견된 이들 추가 사실로 인해, 자발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온 체코군 봉기의 성격이 다시 검토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회답은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쌍방향정책에 대한 미국의 비밀개입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봉기이후 체코군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서쪽으로 전진하며 전투를 벌였으며, 몇 주 이내 볼셰비키들로부터 시베리아의 대부분을 빼앗았다. 이 “자발적인” 봉기가 실제로는 대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를 분리하고 황실가족을 구하려는 계획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수품과 더 실질적인 연합국의 원조 부족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일을 그르쳤는지도 모른다.

 

아서 콘노오트 왕자의 사절단 임무를 포함한 모든 갖가지 임무들은 러시아 시태에의 개입과 황실가족 구출에 관련된 계획들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아서 왕자는 당시 워싱턴 근방 포트 미드에 있는 제79사단 사단장인 쿤 소장을 대동했다. 6월 중순경 신분을 감춘 암행여행을 계속하고 있던 왕자는 일본으로 향했다. 그의 암행여행은 브레킨리지 롱이 주선했는데, 롱은 왕자의 거동을 신문에 전혀 보도되지 않게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가빈 맥납을 다시 활용했다. 쿤 장군은 워싱턴으로 귀환했지만, 쿤의 군대에서의 기록은 1918년 6월 초순부터 그가 다시 나타나 프랑스에 있는 그의 사단에 복귀했을 때인 7월28일까지의 그의 행방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외국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42)

 

비밀의 구름은 왕자가 태평양을 횡단할 때도 계속 덮여 있었으며, 그의 일본 체류기간에 더욱 짙어졌다. 아주 흥미롭게도 아서 왕자는 6월 24일 일본 황제에게 관장(官杖)을 증정하고는 여전히 일본과 그리고 그 뒤 캐나다에서 비밀의 벽에 둘러싸인 체 얼마간의 “휴일”을 가졌다. 캐나다로 갈 때 그는 일본 순양함을 이용했다. 왕자는 7월27일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때엔 심지어 일본주재 영국대사인 코닝햄 그린 경도 왕자를 둘러싸고 있는 차폐물을 통과할 수 없었으며 간단한 공식적 프로그램과 왕자의 근황에 관한 빈약한 신문보도에 의존하기 않을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린 경은 왕자와 일본총리와 회합에 참석하고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폐하께서는 아서 왕자님을 분명히 일본에 특파하셨으며, 육군원수 관장의 전달의식보다 더한 어떤 것을 마음속에 두고 계셨다고 부언하셨다.”43)

 

"더한 어떤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비밀로 남아있다. 아서 왕자가 로마노프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일본황제에게 상세한 내용을 확인해주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이든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윈저궁에 있는 그의 금번 임무에 관한 서류철 속에 7월10일자로 된 한 성명서가 임시대역인 클리브 위그람 대령의 이름으로 나왔다. 위그람은 훗날 국왕 개인비서인 스탬포드햄경의 후임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나고 있었던 사건들에 관계된 일련의 다른 중요한 서류들로부터도,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그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야코블레프의 임무가 실패로 끝난 후 연합국은 5월 한달 동안 로마노프를 시베리아에서 성공적으로 빼 내오는 추가계획을 다시 세우기 위한 신속한 작업에 들어갔다. 볼셰비키 타도와 황실가족의 해방을 위해 계획된 봉기에는 체코군 부대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영국, 프랑스 및 미국이 서부전선으로부터 그들의 군대를 빼 내올 수 없었고, 지금까지 체코군들이 시베리아에서 연합군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활동에는 역시 일본의 지원이 필요했다.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유폐되어 흉포한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감시를 받고 있는 황실가족의 탈출을 위한 병참술은 헨리 아르밋스테드, 요나스 리트 및 제롬 바커 랜드필드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식과 기술을 요구했다. 아서 왕자의 여행은 체스판 위의 다음 행마를 위한 기초를 준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제 8장 볼셰비키들의 금품 강요

 

“금”과 “백금”에 대한 입찰

 

1918년 5월 러시아, 영국, 미국 및 일본에서 있었던 긴장된 활동들은 우연의 일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 이 때는 절망의 시기였고, 로마노프 일가가 감금돼 있는 위험한 상황이 날이 갈수록 우려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죠지5세의 명령에 의한 아서 왕자의 미국 및 일본방문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제어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해가 간다. 황실가족을 북부러시아로 옮기려는 탈출계획에 대한 협의가 구체화 돼 가고 있었다. 요나스 리트는 그의 일기에서 그가 황실가족의 탈출작전 가능성을 협의하기 위해 허드슨즈 베이사의 헨리 아르밋스테드와 함께 런던에서 이 사람 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말했다.1) 실제로 헨리 아르밋스테드는 요나스 리트의 절친한 친구인 레슬리 우르크하르트2) 및 (금융사업계획의) 프란시스 린들리와 함께 1918년 6월 통상무역사절단으로 가장하여 무르만스크 이외의 지역에서 활약하며 황실가족 구출을 시도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 무역사절단은 추측컨대 영국 외무부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것이 문제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이 사절단이 표방한 목표는 무역관계에 대한 상담과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침투를 저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실질적인 활동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려진 적은 없다. 영국의 러시아 개입정책 담당자 중 한 사람인 리차드 울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경제 사절단에 관한 전말은 아직도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그것은 영국 외무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

 

1918년 6월 25일, 무르만스크에서 아르밋스테드는 그의 상사이며 허드슨즈 베이사 대표인 C.V. 세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런던에서 황실가족 구출작전에 관한 협의를 할 때 리트란 사람을 만났다고 썼다. 세일은 일본에서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었고, 시드니 레일리가 역시 대표로 있는 볼드윈 로코모티브사의 대리인으로 활약했다.4) 영국 정보기관 책임자인 맨스필드 컴밍이 세일에게 “러시아 비밀임무”에 헨리 아르밋스테드를 활용한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다는 사실이 기억돼야 할 것이다. 아르밋스테드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큰 우려와 좌절감을 드러냈다.

 

귀하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직도 무르만스크에 머물고 있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백해(White Sea)로 들어가는 입구가 근래에 보기 드물게 얼음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며, 또한 부분적으로 내가 자유롭게 편지를 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내가 판단하건대, 그리고 우르크하르트도 다소간 내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모든 임무는 상업적인 의미에서 귀하가 제시한 진로로 진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클라크[윌리엄경]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지만 전형적인 관료정치가이며, 그들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의 개인적인 경력이 그밖에 모든 것 보다 앞서가고 있습니다....(구출)계획을 위한 준비가 적정한 것과는 거리가 멀며, 우르크하르트와 나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솔직히 말해 왔습니다. 우리 사절단의 세 번째 사람인 람베르트5)는 유일하게 봉급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친 요구를 할 수가 없습니다...나는 패리스[당시 시베리아의 프랑스 군 사령관인 패리스 장군]가 처음으로 나설 때 그가 대단히 실망할까봐 두렵습니다.......그래서 우리 사절단은 그들의 여행(이탤릭체는 저자가 한 것임)을 지속시키기 위한 명령을 마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가정보가 있을 때 곧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6)

 

무르만스크 저택공사 책임자인 헨리 아르밋스테드는, 백해 입구가 “철에 걸맞지 않게” 얼음으로 뒤덮여 막혀 있는 동안 무르만스크에서 일손을 놓고 있었다. 그는 요나스 리트로 하여금 “C"로 알려져 있는 맨스필드 컴밍, 해군 정보국장인 해군제독(”버블스“) 홀 (그의 해군 작전이 황실가족 구출노력에 포함돼 있었다) 및 로마노프 일가의 대공들 중 한 사람을 만나보도록 했다. 그는 ”우리들의 여행“이 아닌 ”그들의 여행“을 계속하기 위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여행“은 황실가족의 (무르만스크) 도착소식을 듣기 위해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 에카테린부르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로마노프의 운명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얘기에 따르면, 그 날은 아르밋스테드가 황실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기 약 1주일 전인 6월19일 내지 20일이었다. 프랑스어로 된 그 편지는 황실가족에게 그들의 “친구들이 더 이상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만약 가족이 그들이 억류돼 있는 집의 도면을 보내줄 수 있다면 그들을 구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육군장교, 폐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서명돼 있었다.

 

며칠 후인 1918년 6월21일과 23일 사이에 역시 프랑스어로 된 아래 내용의 두 번째 편지가 왔다.

 

집 모퉁이에서 발코니까지 도로 쪽으로 5개, 광장 쪽으로 2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이들 모든 창문들은 아교로 접착돼 있고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습니다. 작은아이는 아직도 병으로 침대에 누워있고 전혀 걸을 수가 없습니다 -- 그의 병은 여러 정신적 충격이 원인입니다. 일주일 전 무정부주의자들 때문에, 우리가 밤에 모스크바를 향해 떠날 것 같았습니다. 위험하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절대로 어떤 결과에 구애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항상 엄밀한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8)

 

이 편지를 분석한 로마노프 역사가들과 열렬한 애호가들은 니콜라스나 그의 딸 올가 모두가 프랑스 말을 할 줄 알고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답장들을 썼을 것으로 믿고 있다. “누군가”가 6월 19일 밤 2시안으로 가족들을 구출해 내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출작전은 알렉세이의 병 때문에 다시 한번 연기됐다. 만약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됐다면, 무르만스크로의 여행은 6월25일 경에 끝났을 것이다. 계획이 연기된 이유는 알렉세이의 병과 백해 입구의 철지난 얼음판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세 번 더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서 가족들은 “의사, 시녀, 두 남자 및 어린 소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들의 염려를 비치고 있다.

 

“그들이 자진해서 우리들의 탈출에 따라나서겠다고 하는데도 그들을 내버려두고 떠나는 것은(비록 그들이 우리에게 폐를 끼치는 걸 원하지 않긴 하지만) 비겁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들은 길 건너편의 한 조그마한 집에 50명의 장정(수비대 병사들)들이 있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황실가족들보부터 온 그 편지는 또한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스가 광속에 나무상자들을 놓아두었으며 그리고 그들이 특히 AF(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No.9과 NA(니콜라스 알렉산드로비치)13으로 표시된 상자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편지의 끝줄에서 그들은, 만약 그들의 수하 사람들이 뒤에 남게 되면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을 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보트킨 박사는 당신들이 자기와 다른 수하 남자들에 대한 고려 때문에 일을 더 어렵게 하지 않도록 하게 해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축복을 내리시길. 우리가 ‘침착[괴로운 처지에서의 평온]’하다는 걸 헤아려 주십시오.”

 

6월26일자 이 쪽에서 보낸 회신은 다시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리고 그들이 로프를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장교”에게 보낸 그들의 회신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 “탈출해야”한다면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토볼스크로부터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오는데 군대가 사용되었던 것처럼, 오직 군대를 사용하여 우리를 채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한테서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황실가족이 쓴 이 답장의 표현은, 사전계획에 따라 “군대”가 그들을 토볼스크로부터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겨 온 것이며, 그리고 지금도 군대를 데리고 와 전처럼 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는, 그들이 앞으로 복위라도 되는 날 선동가들이 그들에 대한 비방재료로 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자발적으로 도망쳤다는 인상을 주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러시아에 머물기를 원하며 그래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무르만스크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라는 것을 직접 혹은 다른 방법으로 암시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그 계획이 실행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를 시사하고 있다 - 아르밋스테드가 세일에게 표현한 우려와 6월 25일 무르만스크에서 다음과 같이 썼던 편지에 대한 반향이었다.

 

“...그 계획에 대한 준비가 아주 불충분하며, 우르크하르트와 나 자신은 그 문제에 대해 매우 노골적으로 말해 왔습니다.”

 

그들(황실가족)은 감시가 심해졌다며, 즉결처분되는 위험한 지경을 자초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우려하고 있다. 이들 편지 교환이 있은 후인 6월27일, 니콜라스는 아직도 이들 자칭 구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옷을 다 껴입은 체 뜬눈으로 불안한 밤들을 보냈다. 며칠 전 우리가 잇달아 두 통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편지들은, 우리에게 충성하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구하러 갈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체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기다림만 계속되었으며 불확실성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10)

 

몇몇 보고서에 의하면, 6월25일 경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로스토브스테프라는 이름의 한 장교가 사살됐다. 볼셰비키들이 어떤 반혁명운동을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11)(이 로스토브스테프 대위와, 차알스 크레인의 친구이며 황실가족의 재정담당 비서인 로스토브스토프 백작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 황실가족을 옮기려는 다른 시도 역시 실패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한번 그들의 희망을 좌절시켰음이 틀림없다.

 

한편, 무역사절단 단원들은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황실가족의 친구이며 금융사업계획의 책임자면서 후원자인 야로신스키가, 자신이 아직 그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역사절단” 단원들을 만나려 “위험한 영역”을 통과해 가겠다고 (레닌에게) 제의한 후에야 가능했다.12) 레닌과 만난 후 사절단 단원들은 재빨리 모스크바를 떠나 당시 서방외교관들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볼로그다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황실가족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흉포한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로스토브스토프의 황제 구출시도를 좌절시킴으로서 레닌의 계획을 다시 한번 방해했던 것일까? 레닌의 영향력이 무디어졌거나 혹은 볼셰비키정부 최고위층에 다시 한번 혼란이 있었거나 하여 - 우르크하르트가 거의 체포될 뻔한 사태가 벌어졌다. 얼마가 지난 후 우르크하르트의 비서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우르크하르트 체포명령은 비밀경찰이 내렸다. 그러나 운 좋게도 우르크하르트는 이 명령이 집행되기 전에 모스크바를 떠날 수 있었다....우르크하르트 체포명령은 레닌도 모르는 사이에 내려진 것이다.”13)

 

이 조그마한 사건은 로마노프 문제에 대해 넓게 뚫려있었던 연합국과 볼셰비키들과의 공모관계를 잠재적으로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무역사절단이 그들에게 내려진 체포명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볼로그다를 거쳐 그들의 배로 귀환하게 된 사실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구출계획이 로스토브스테프 대위의 생명을 앗아간 봉기로 인해 망쳐버렸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 사절단이 모스크바에 머물며 레닌으로부터 인수하려고 했던 황실가족은 모스크바로 오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무르만스크 계획에서의 레일리의 역할에 관해서는 금융사업계획과 갖가지 지불을 위한 자금유통과정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연합국의 모든 음모의 중심에 서서 다양한 역할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볼셰비키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에게 볼셰비키 사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반면, 그의 다른 작전명(名)인 외국기업가 마씨노는 다양한 사업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의 금융사업계획 개입, 야로신스키와 솔로비에프와의 번갈은 커넥션은 엔지니어인 벨로이 뿐 아니라 윈스턴 처칠의 보좌관인 아키볼드 싱클레어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1919년 싱클레어는 레일리를 야로신스키의 심복으로 알고 있었다. 틸든-스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관찰하고 있다.

 

“야로신스키의 계획에 깊숙이 관련돼 있는 윌리엄 와이즈먼은 야로신스키의 심복인 레일리와도 관계가 있다. 와이즈먼의 제의로 레일리는 리딩경과 야로신스키 사이의 최근 토의에 참석했다.”14)

 

확실히 레일리는 1918년 4월 그가 러시아에 파견되어 금융사업계획에서 야로신스키와 함께 일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레일리가 쌍방향정책에서 어떤 비밀역할을 맡은 것 역시 이제 확실해 보인다. 쌍방향정책이란 볼셰비키 정권을 타도하고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이용된 금융사업계획의 핵심이다.

 

무르만스크로의 두 번째 구출시도를 하기 바로 한 달 전인 1918년 5월28일, 군 정보국장이 무르만스크에 있는 푸울 소장에게 레일리에 관한 일로 아래와 같은 전보를 보냈다. 당시 레일리는 이미 러시아에 들어가 볼셰비키 행세를 하고 있은 지 적어도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다음의 두 장교, 밋첼슨과 레일리 대위는 특별 비밀 임무에 종사하고 있음. 전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는 이들의 이름이 공식적인 통신이나 다른 장교들에게 언급돼서는 안 됨.”15)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레일리는 1918년 4월 초순 러시아에 도착하였으며, 볼셰비키 렐린스키라는 신원을 가진 사람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1918년 여름은 레일리의 일생에서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장으로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18년 8월의 소위 “로크하르트 음모”에서의 그의 연루관계에 대해서는 수십 년간 아주 정밀한 조사가 행해졌다. 그것의 상세한 내용은 개인적 또는 특수한 입장에서의 설명에 따라 다양해지겠지만, 추측컨대 시드니 레일리의 도움을 받아 영국공사인 로버트 브루스 로크하르트와 연합국이 획책했던 이 로크하르트 음모는 볼셰비키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쌍방향정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최종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시도를 의미했다. 5월과 7월에 도심 부근에서 일으킨 종전의 봉기들이 실패한 후, 연합국 측은 다시 봉기를 일으키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 역시 실패할 것이었다.

 

황실가족이 갑자기 사라진지 꼭 2주 후 모스크바에서 영국의 로버트 브루스 로크하르트, 프랑스 총영사인 그레나르, 미국 총영사인 드위트 푸울 및 미국 비밀정보원인 크세노폰 칼라마티아노가 모두 볼셰비키 정권 타도 계획에 개입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레일리와 그 일단이 바로 그 과업수행에 관여했던 것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레일리는 1918년 8월 이전에 로크하르트 음모보다 더한 것에 개입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실제로 금융사업계획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지금 드러나고 있다.

 

레일리에 관한 것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1918년 여름에 그가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및 볼로그다 사이에서 그의 시간을 나누어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러 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무역사절단” 단원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 린들리 경과 그리고 바로 두 달 전 요나스 리트가 런던에 있을 때 그를 면밀히 심사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과 교신을 했다. 그리고 로마노프 가족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 7월17일 밤 이후 4일 만에 레일리는 볼로그다 볼셰비키 집행위원회에 의해 페트로그라드를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가는 여행허가증을 받았다. 이 여행 허가증은 “여행 중에 조사 받지 않는다”는 특수한 표시가 돼 있었다.16) 연합국들과 볼셰비키 정부 사이에서 거래가 진행 중이었을 때, 레일리가 이따금 중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무난해 보인다.

 

흥미롭게도 이 기간 중 그의 비밀 “중개인 활동”은 비단 린들리와의 교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에 지원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처리하는 데도 활용됐다. 추측컨대 이 지원은 교회가 강력해지면 볼셰비즘을 막는 성벽구실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던 것 같다. 그를 교회에 중개한 사람은 유명한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K.M. 아기프였는데, 이 사람은 교회와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중개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기프는 또한 러시아정교회 재정부총재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추측컨대 주교회의 재무책임자였던 보리스 솔로비에프의 부친과 가까웠던 것 같다. 더욱이 아기프는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티크혼 총대주교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17)

 

결과적으로 로마노프 일가의 운명이 어찌되었건, 교회는 짜르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라는 교회의 시각에 따라 교회의 전 수장을 돕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토볼스크에서 교회는 황실가족과의 비밀 메시지 전달에 개입했으며 그리고 지금은 레일리의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표면상 선전목적으로 교회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 레일리의 활동은 황실가족이 옮겨지게 되거나 혹은 복위되기 이전 일정한 기간 그들을 숨기는 일을 도울 교회에 돈을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교회와 레일리 양쪽 모두의 노력이 공공의 시각으로부터 차단돼야 했다. 황실가족을 위한 연합국들의 모든 개입 역시 1918년의 그런 거칠고 혼란스런 여름에 은밀히 진행돼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니콜라스의 모후인 마리 황태후가, 자기 아들이 옛 추종자들에 의해 구출됐다고 말한 점을 상기할 때 - 그녀는 죽는 날까지 그런 것으로 믿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 교회와 연관된 레일리의 활동은 그 의미가 더욱 커진다. 황태후는 아직도 밝혀져야 할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앤소니 섬머즈의 소장품 중에는 윌리엄 피어 그로브즈 영국 육군소령 딸과의 인터뷰 내용이 들어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황실가족이 영국 정보원들과 충성스런 경비병들의 도움으로 지하실에서 탈출하여 일본과 캐나다로 갔다는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가 해주었다고 주장했다.18) 이것은 짜르구출하기란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시나리오와 매우 유사하다. 1919년 피어 그로브즈는, 레일리와 다른 정보장교인 죠지 힐이 오데사에 배속 받았을 때와 같은 시기에 그곳의 영국정보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의 임무는 황실 사람들을 러시아 바깥으로 호위해 나오는 것이었다.

 

이 기간 피어 그로브즈는 1919년 4월에 말타를 여행했으며, 거기서 그와 그의 아내는 영국으로 떠날 배를 기다리고 있는 짜르의 어머니 마리 황태후를 산 안톤 궁전에서 접견했다. 실제로 그 당시 황태후 방문자들이 쓴 책을 보면 피어 그로브즈는 1919년 4월23일자 궁전 방문자 명단에 올라 있다. 그가 황태후에게 당신의 아들식구들이 살아 있다고 안심시키고 이 사실을 그녀에게 확인시켜 주는 약간의 증거를 제시한 것으로 보도된 것이 이 방문기간 동안이었다.

 

피어 그로브즈의 이 방문이 있기 3개월 전인 1919년 1월에 마리 황태후는,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사이의 메신저로 있었던 솔로비에프의 친구 그라마틴과 함께 폴 불리긴 대위를 보내 당시 니콜라스 소콜로프가 수행하고 있었던 황실가족 실종사건 조사를 돕도록 했다.19) 그러나 피어 그로브즈의 방문 후 그녀는 심지어 1920년대 초 소콜로프의 조사결과를 검토하는 것조차 거절했다. 아마도 그녀의 아들식구들이 살아있다는 정보를 그녀와 공유한 것으로 알려진 피어 그로브즈와의 회합 후에, 황태후는 소콜로프 보고서를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거나, 혹은 그녀가, 그 죽음이 꾸며댄 것이었으며, 소콜로프는 그녀가 엄선한 사람인 불리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인데, 그의 노력에 대해 관심을 표함으로써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나 했던 것이다. 뒤에 우리는 불리긴이 인도를 경유하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 영국으로 가서 황태후를 만나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도에서 그는 일주일을 머문 후 바로 러시아로 들어가 짜르의 모후가 파견한 보조자로서 소콜로프와 합류했다. 그는 또한 로마노프 조사 명령을 이제 막 받았던 사람인 콜차크 제독에게 보내는 런던의 비밀 메시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연합국을 대신하여 황실가족을 구출하려던 무르만스크에서의 제2차시도의 실패는 가족들을 계속 보호하기 위해 레닌과 볼셰비키들에 대한 연합국의 압력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물론 연합국들 뿐 아니라, 독일 참모부 역시 로마노프 일가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레닌과 흥정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판돈을 올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 시도가 있기 두 달 전인 1918년 3월에 독일은 볼셰비키들과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레닌은 황실가족의 교환이 그와 러시아 양쪽 모두에 가해지고 있는 가혹한 조건의 속박을 얼마간 덜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덴마크 왕까지도 카이저가 황실가족을 구출하는 것을 돕겠다고 제의했다. 빌헤름은 회신에서 황실가족을 도우려는 수많은 시도 이면에 있는 인도주의적 동기를 강조했다.

 

“나는 러시아 황실가족에게 인간적 견지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심을 금할 수 없으며, 그리고 힘이 미치는 한 나는 기꺼이 그들이 안전하고 적절한 입장에 있도록 보증하는 나의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20)

 

시베리아에서 연합국들의 활동에 대한 비밀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으며, 레닌은 그의 이중거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꽤 많은 계략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무담당 인민위원인 게오르그 치체린이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반혁명 기도가 분쇄되었다는 것을 알고 폰 미르바하 독일대사에게 황실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던 6월27일 이후부터였다.21) 분명히 치체린(그는 뒷날 황실가족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은 실패한 무르만스크 음모에 볼셰비키가 개입한 것을 폰 미르바하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워했으며, 볼셰비키들이 이중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어떠한 인상도 그에게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예기치 않은 정치적 결과도 예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황실가족이 강제로 탈취될 뻔한 사실이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에, 무르만스크 계획의 실패는 확실히 외교적 관점에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스의 올가 왕비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6월에, 황실가족의 독일친척들이 니콜라스에게 어떤 안전책을 제시했음이 틀림없다. 올가 왕비는 독일의 세실 왕세자비에게, 니콜라스가 독일에 의한 구출은 한사코 거절했다고 말했다.22)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는, 그들의 문제 중 많은 것이 러시아의 독일 지지자들이나 혹은 더욱 악질인 독일 정보원들이 선전용으로 황후에 대한 험담을 퍼뜨렸던 것이 러시아 국민들에게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범죄에 찌든 친척이나마 그들의 구조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마음을 끄는 것이긴 하지만, 짜르는 카이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지난날 자기들에 대한 많은 헛소문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되며, 그리고 러시아가 전쟁에 이기고 있는 연합국들을 앞으로 도울 수 있는 희망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더욱이 적의 구조를 용인하는 것은 군주제를 복원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영원히 차단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이저는 니콜라스의 이런 반응에 대해 굉장히 심란해 했으며 로마노프가의 곤경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냈다.23)

 

실제로 6월말에 니콜라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는 보도들과 때 맞춰, 레닌은 개인적으로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증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에카테린부르그에 주둔하고 있는 붉은군대 제3군사령관은 레인홀트 베르진이란 이름을 가진 라트비아 출신 혁명가였다. 그는 이파티에프 하우스를 점검했으며, 황실가족을 무르만스크로 옮기려는 시도를 훼방놓은 봉기가 일어난 지 바로 2일 후인 6월27일 밤 12시5분에 모스크바의 중앙집행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황실가족 전원이 살아 있으며 건강하다고 안심시켰다. 만약 레닌의 조력이 황실가족 구출노력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면, 그는 그 구출시도를 망쳐버린 유능한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 수비대에게 간단하게 전보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니콜라스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략이었다는 주장도 간혹 있어 왔다. 로마노프 일가를 살해하려는 그들의 계획이 알려지게 될 때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도를 평가해보기 위해 그의 사망에 대한 공공의 반응을 시험해본 것이라는 주장이다. (살해)검토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3군사령관이 개인적으로 니콜라스가 살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점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이런 종류의 “연 날리기(여론 추이 알아보기)”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을 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에 이 사실을 알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1918년 6월 말, 정치적으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황실가족을 그의 정치적인 볼모로 계속 보유하려는 레닌의 욕망은 그가 직접 나서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에카테린부르그 우체국의 3명의 전신교환수들이 훗날 백계 러시아 조사관들에게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이 모스크바의 레닌과 에카테린부르그의 베르진 사이에 직접 전보가 오가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그 내용은, 레닌이 베르진에게 명령을 내려 “전체 황실가족을 보호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레진은 목숨을 걸고 폭력이 없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24)

 

레닌이 야코블레프처럼 베르진으로 하여금 황실가족의 안전에 목숨을 걸고 책임지도록 한 것은 그가 협상책략으로서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성을 두고 있는 가를 시사하는 것이다. 브레진과의 이 전보교신 후 일주일만인 7월4일, 난폭한 아브데예프 휘하의 본래의 에카테린부르그 수비대를 레닌이 보낸 야코프 유로브스키 휘하의 수비대로 교체했다는 것은 현재로선 우연의 일치 이상으로 보인다. 유로브스키는 의사였으며 또한 사진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년 전 독일에서 살았던 그는 추측컨대 비록 그가 유태인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황후의 전 신앙인 루터교로 개종했던 것 같다.

 

유로브스키가 새 수비대장으로 이파티에브 하우스에 들어갔을 때, 그의 병사들은 아주 충성심이 강하고 훈련이 잘된 “라트비아인” 정병들로 구성돼 있었다고 모든 목격자들이 증언했다. 그들은, 과도한 음주에 로마노프 식구들의 소지품에 손을 대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종전의 훈련이 덜 된 붉은 수비대들을 대체하게 되었는데, 모스크바는 직접 이들 붉은 수비대들에게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왜 아브데예프를 유로브스키로 교체했을까? 아브데예프는 헌신적인 볼셰비키로서 우랄에서 볼셰비키운동을 이끌었으며 그가 일하고 있었던 즐로카조프 공장 소유주를 살해한 사람이었다.

 

그를 교체하게된 일반적인 이유는, 아브데예프 휘하의 수비대가 그들의 죄수들에게 너무 친절해 진 것을 모스크바가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브데예프가, 앓고 있는 알렉세이를 위해 현지 수도원으로부터 우유와 달걀을 집안으로 가져올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허락해줌으로써 이런 소문이 난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냉소적이고 투박한 행동 역시 아브데예프 사령관의 품질보증서였다. 수비대 병사들 사이의 음주와 황실가족 소유물에 대한 절도가 그들의 해고 이유들이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행위들은 훗날 황실가족 살해의 공적을 인정했을 모스크바 지도부를 통탄하게 할 이유들은 못되는 것 같다. 소련의 기록들은 아브데예프가 그의 죄수들과 위험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실증할만한 단 하나의 서류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유로브스키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아데베예프의 성격과 내력은 그가 황실가족을 능멸하고 학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이 모스크바가 원하는 것이었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노프 가족이 실종되기 전 2주일도 채 안 되는 이 특별한 시기에 왜 그런 의미심장한 교체가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왜 종전의 수비대 병사들은 그 집에의 출입을 금지 당했을까? 교체가 이루어진 후 모스크바가, “불안한 요인”이 없다는 통보를 (현지로부터) 받았다는 것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레닌이 보여준 (황실가족에 대한)관심과 그리고 베르진에게 내린 그의 지시로 미루어 보아, 오직 불안한 요인은 아데베예프의 관리아래 있는 동안 황실가족의 안전에 대한 것이었을 수 있다.

 

모든 이런 움직임들이 로마노프 가족을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면, 그들은 키에프에 있는 러시아 군주제주의자들과의 거래에 연계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스 보도 폰 알벤슬레벤 백작은 명목상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주재 최고위 독일 외교관들 중 한사람이었다. 7월5일, 그는 그 자신의 요청으로 두 사람의 러시아 군주제주의자들, 즉 알렉산더 돌고루코프 공과 우크라이나 국가위원회 위원인 표돌 베자크를 만났다. 돌고루코프에 따르면, 알벤슬레벤이 이렇게 경고했다는 것이다.

 

“...7월16일에서 20일 사이에 짜르가 죽었다는 뉴스에 관한 소문이 유포될 것이며, 그리고 이 소문 내지 뉴스에 우리가 놀라서는 안됩니다. 짜르의 살해 소문과 같은 그런 것은 6월에도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소문은 거짓일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이유, 예컨대 짜르의 구출을 위해 필요할 것입니다.”25)

 

이것은 황실가족문제에 대한 연합국-볼셰비키 협상과 같은 시기에 진행되고 있었던 볼셰비키-독일협상의 또 다른 사례였을까? 이중거래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볼셰비키들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모스크바의 공모가 알려지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1918년 4월, 레닌과 스탈린이 최종적으로 영국군의 무르만스크 진입을 허용하기로 무르만스크 소비에트와 합의함으로서 연합국들과의 비밀 방식에 말려들어 있었다.26) 레닌은 절대로 한 팀과만 게임을 하지 않고 동시에 움직이는 병렬의 음모를 즐겼다. 그는 아직도 비밀리에 연합국들과 독일 둘 다를 유혹하고 있었다. 황실가족은 그의 트럼프 카드로서 남아있었다. 폰 미르바하 백작이 7월초 암살되었을 때, 레닌은 그것이 독일의 침입을 야기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독일의 침입을 막을 충분한 기회는 있다. 지금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이 베를린에 보내는 보고서 내용에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영향을 미쳐야 한다.” 수일 이내 레닌은 본보기로 그 암살사건에 책임이 있는 많은 좌익사회주의혁명당(LSR)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분명히 이 때는 카이저의 사촌들(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에게 다가오는 해악을 묵인함으로서 독일인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짓을 해서는 더욱이나 안 되는 시기였다.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화답해줘야 하는 걱정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극도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혁명 초기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민주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정치적인 눈치를 볼 것 없이 볼셰비키들은 원칙보다는 오히려 편의주의가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을 때인 그 위험한 여름에 로마노프와 관련이 있는 어떤 정부와도 비밀협상을 수행할 능력을 확실히 갖고 있었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7월까지 내내 볼셰비키들은 직무상의 부당 취득, 갈취 그리고 몸값으로 받는 돈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와인버그라는 이름의 포로(볼셰비키에게 잡힌 독일포로)와 관련된 1918년 8월에 만들어진 한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볼셰비키들이 갈취했던 추가자금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 (연합국과 독일간에 경쟁을 부치는) 일종의 입찰전쟁에 집착했던 사실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에 - 이편저편으로 왔다갔다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포로가 “독일 최고정보기관 요원”이라 불리고 있는 와인버그라는 이름의 한 남자포로에 대해 만든 것인데, 그는 이것을 영국에 보냈다. 그 포로는 와인버그의 친구가 되었는데, 매일 밤 와인버그는 끌려나가 매를 맞았다. 그가 매를 맞는 이유는, 볼셰비키 정보기관 책임자인 “드제르진스키”가 와인버그에게 1918년 1월에 독일정부 계정에서 나온 1천200만 루불을 “레닌, 트로츠키 및 드제르진스키‘에게 지불했다는 것을 표시하는 영수증들을 어떻게 했느냐고 추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인버그가 전에 베를린의 멘델스죤즈 은행 앞으로 보낸 그 지불에 대한 영수증들이 있었던 것이다. 와인버그는 (키이즈와 린들리가 친독일 주주들의 소유권을 사들이기 위한 자금을 런던에 요청했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폰 미르바하 백작 대리인으로부터 54만 루불을 받았다. 지불자의 목적은 ”와인버그가 소유하고 있는 레닌과 드제르진스키 서명의 영수증들“을 회수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볼셰비키들이 독일의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절대로 공개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드제르진스키는 그 영수증들을 회수하는 데 실패했다. 이유는 아마도 그 영수증들이 이미 베를린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와인버그는 욕설을 바가지로 들으며 발가벗겨 매질을 당했으며, 결국 끌려나가 사살됐다.“27) 분명히 레닌은 1918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에 돈을 잘 벌었다. 연합국은 그에게 적어도 50만 파운드를 지불했으며 독일은 (연합국과의) 입찰전쟁이 되다시피 한 것에 또 다른 중요한 기부금을 얹었다.

 

여러 종류의 거래가 여름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6월10일 경 에카테린부르그 주재 미국영사인 헨리 팔머가, 그 곳 영국 영사인 토마스 프레스톤이 쓴 전문을 모스크바의 미국 영사관에 있는 영국영사를 수신인으로 하여 보냈다. 그 전보는 “금”과 “백금”이 절박하게 사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런던에 경고하며 이렇게 요청했다.

 

“영국정부가 구매한 수량이 얼마나 되는 지를 전보로 통보해 주시기 바람. 그래야만 내가 여기서 광물 구매노력을 보류해야할 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임. 또한 전에 했던 것처럼 나에게 신용대부를 해 주신다면, 공개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음.”28)

 

금과 백금? 기록들은 에카테린부르그에 있었던 금과 백금이 이미 사라졌음을 보여준다.29) 그렇다면 미국영사가 그 문제에 연루돼 있었을까? 팔머의 역할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는 모든 당사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슬로트 소령이 그의 정보보고에서 팔머는 볼셰비키들이 신뢰하고 그와 거래를 할만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영사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무슨 협상을 하고 있었을까? 영국의 문서들은, 이런 형태의 금이나 은의 구매를 정규로 재가했던 군수담당 책임자가 질문을 받자, 그는 그러한 시기에 이런 품목들을 구매하기 위한 어떤 재가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으며 그리고 가격이 너무 높았다고 말했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비록 영국과 미국이 미래의 품귀에 대한 방지책으로 백금을 구매하기로 마음은 정했지만, 이 중대한 시기에 정부(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지식 없이 폭등한 가격을 지불하여 금에 투기하기로 했다는 어떤 기록도 없다.30)

 

하지만 그 무렵 에카테린부르그에 있는 정보원들이 사용하고 있던 랄라비 암호가 두개의 열쇠가 되는 낱말을 채용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오늘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흥미로워진다. 전쟁 초기에 첫 번째 낱말은 그 달의 그 날로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이때까지 프로토콜은 변하지 않았다. “금”과 “백금”은 짜르와 그의 가족에 대한 암호낱말이었을 수 있었을까? 그 낱말들은 그럴듯한 가정을 할만한 문맥에서 여러 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직후 연합국은 금과 백금 구매에 참가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근무하는 한 미국 여권담당관리를 특별임명 형식으로 에카테린부르그로 전근시키도록 요청했다.31) 왜 미국은 그들의 여권담당관리를 금과 백금 구매를 위해 그 지역으로 파견하라는 요청을 받았을까? 이러한 일들을 좀 더 분명하게 정리하기 위해 나는 1918년 7월 한달 동안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미국영사기록을 요청했지만,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 기록보관인은 그것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했다.

 

프레스톤 영사의 전보에서 중요한 것은, 연합국이 “공개시장에서 구매[최고입찰자가 된다는 의미]” 한다는 프레스톤의 암시에서 설명될 수 있듯이, 이제 황실가족에 대한 독일과의 경쟁입찰에 참가하려고 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5월23일 중앙위원회에서의 토의와 그리고 금이 어떻게 그토록 많이 토의의 중심제목이 되었는지를 감안하면, 볼셰비키들이 니콜라스의 “완전히 평가절하된 존재가치”를 협상에서 양보를 얻어내는 미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바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볼셰비키들은 7월4일 벨로보로도프가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의 개인비서인 니콜라스 고르부노프에게 타전한 아래의 다른 전보를 통해 이 계획과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수비대 교체 사이에 연계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때 모스크바에선 골로스체킨이 스베르들로프와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시로몰로토프가 중앙의 지시에 따라 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방금 떠났음. 불안한 요인은 없음. 아브데예프가 교체됐음. 그의 보좌관인 모시킨은 체포됐음. 아브데예프를 유로브스키로 교체했음.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내부 수비대 병사들이 전원 다른 사람들로 교체됐음.”32)

 

그렇다면 시로몰로토프는 무엇을 처리하려 하였을까? 이파티에프 하우스 수비대병사들의 교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그 교신의 나머지 부분이 황실가족과 관계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당시 레닌의 신뢰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벨로보로도프는 7월7일 페름에서 시로몰로토프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냄으로서 그 연계를 입증하고 있다.

 

“만약 마트베예프의 기차를 아직 보내지 않았다면, 못 가게 붙들어 두고, 이미 보냈다면, 우리가 지시한 장소에 그것이 절대로 도착되지 않도록 도중에서 붙잡아 두기 바람. 붙잡아 두는 새 장소가 위험하다 싶으면 기차를 페름으로 귀환시키기 바람. 암호 전문으로 회신 요망.”33)

 

마트베예프는 짜라스코에 솔로에서 짜르 경호대의 기수(旗手)였으며34) 그리고 야코블레프가 떠난 후 지금은 “특별 분견대” 대장이었다. 그는 전에 야코블레프를 수행했는데, 그 바람에 로마노프 가족들을 “모스크바나 다른 어느 곳”의 안전지대로 옮기기 위한 그럴싸한 계획에 그를 연결시키고 있다. 야코블레프와의 임무를 끝낸 후, 그는 페름을 근거지로 하여 황실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 예정해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열차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 아브데예프와 그의 현지 볼셰비키들의 교체는 동일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 사실은 7월8일 벨로보로도프가 시로몰로토프에게 보낸 다음의 전보에서 암시되고 있다.

 

“열차 수비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교체할 수 있다면 전원 교체하여 에카테린부르그에 반환 바람. 마트베예프는 열차 지휘관으로 존속함. 열차에 대해 트리포노프와 상의 바람.”35)

 

레닌이 최고가격을 제시하는 입찰자를 확정할 때까지 황실가족을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세력범위로부터 아주 멀리,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계속 시도했던 모든 계획들이 볼셰비키 감독권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황실가족을 연합국에 인계하려는 종전의 계획과 아주 유사한, 가장 잘 준비된 계획들이 엉망이 되고 있었다. 벨로보로도프는 그날 늦게 다른 사람과 함께 고르부노프에게 그의 마지막 전보를 쳐야 했다.

 

“야로슬라블에서 백군수비대가 봉기하고 있다고 페트로그라드의 구세프가 알려왔음. 우리는 열차를 페름으로 귀환시켰으며 골로스체킨과 향후 처리에 대해 상의하고 있음.”36)

 

페름은 리스바 읍 근방에 있다. 로마노프 가족이 사라진 후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벽에 거꾸로 휘갈겨 쓰여져 있는 리스바라는 이름을 조사관들이 찾아냈다.37) 그 낙서가 거울의 맞은편 벽에 자리잡고 있고, 마치 누가 서두른 나머지 메시지를 완성할 기회가 없었던 것처럼 “a"가 빠져 있지만, 그 낱말이 리스바(Lysva)라는 것은 매우 그럴듯한 해석이다. 수비대가 황실가족을 리스바로 옮기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리스바는 짜르 정부의 마지막 대원수인 폴 벤켄도르프 백작의 시골영지이며, 레닌이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나 혹은 ”어떤 곳“으로 데려갈 때까지 안전한 피난처로 이용할 수 있게 예비해두고 있었던 곳이다. 열차는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갔다.

 

고르부노프의 마지막 전보에서 언급된 “백군의 봉기”는 사실은 시드니 레일리의 신뢰하는 친구인 보리스 사빈코프가 지휘한 조급한 봉기였다. 그는 밀고를 당했다. 앞서 보았듯이 레일리는 그의 회고록에서 의사가 환자를 너무 일찍이 수술했다고 썼다. 황실가족은 그 시간에 그들을 다른 곳으로 싣고 갈 열차 안에 있었을 같다는 얘기가 그럴듯하지만, 야로슬라블 봉기로 인한 철로불통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황실가족을 탈취하려고 했음이 분명한 열차 관련 음모사건 직후인 1918년 7월17일 밤에 로마노프 일가가 살해됐다는 소문이 난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로부터 수일 이내 볼셰비키들은 체코군과 백군의 공격으로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쫓겨났다. 미국에서는 백악관에 배속된 비밀 정보원이며 차알스 크레인과 윌슨 대통령의 친구가 되었던 윌 스탈링이 그의 일기에서, 7월25일 밤에 대통령이 “러시아 상황”으로 인해 계획돼 있던 여행을 취소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윌슨으로선 전례 없는 조치였다. 마르네 격전(제1차 대전 초기인 1914년 9월, 영.불 연합군이 파리 동북쪽 48km 지점의 마르네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했던 작전 - 옮긴이))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그는 항상 그의 예정된 일정을 계속 지켜왔다. 도대체 러시아로부터 어떤 뉴스가 있었기에 미국 대통령이 예전에 전혀 없었던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일까?

 

체코군들은 6월 하순에 바이칼 호 근방에서 붉은군대와 교전하고 있었고, 연합국 외교단은 25일에 아르한겔스크로 퇴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그 날밤(7월17일밤)에 일어난 문제들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보교신이 빠르면 하루, 늦으면 1주일까지 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올 것으로 예상됐던 그 해 초순 러시아의 서방외교단이 피난길에 나섰을 때도 선약을 취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호기심이 강한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가 낸 책 짜르구출하기는, 죠지5세왕과 카이저 빌헤름이 독자적으로 합의에 도달한 후 황실가족이 영국 정보원에 의해 물탱크를 통해 이파티에프 하우스를 빠져 나왔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문제의 그 정보원으로 알려진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그의 일기에서, 그와 황실가족은 영국 영사관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영사관 쪽으로 향하고 있는 터널 속에서 며칠간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그는 새로 임명된 수비대 병사를 회유하여 침투시켰으며, 그렇게 하는데 볼셰비키 장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7월25일에 윌슨 대통령은 7월17일 밤에 시작된 한 특별임무의 성공확인, 그것도 오직 그의 눈으로 직접 해야 하는 확인을 걱정스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로마노프 가족들은 결국 연합국의 손에 넘어와 거기서 다른 인생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던 것일까? 혹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종래의 이야기처럼, 7월17일 밤에 11명으로 구성된 총살형집행대에 의해 사살된 것이 20세기 최대 미스테리 중 하나에 대한 회답인 것일까?


 

제3부 모순, 불합리 그리고 불신

 

 

제9장 짜르 처형

 

아니면 그는 살아있었을까?

 

로마노프 일가 일곱 식구 전체의 죽음에 대한 종래의 이야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럴싸하게 전해지고 있는 탈출 시나리오를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한 설명의 일부는, 영국의 죠지5세가 그의 친척들을 구출하려 하지 않았다고 역사가들이 주장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죠지 왕의 조언자들은 왕이 1917년 3월 니콜라스 퇴위 후 곧 로마노프에게 제시한 망명처 제의를, 당시 영국에서 일어났던 “반군주제 운동” 때문에 거두어들이도록 그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는, 7명의 황실식구들이 감금돼 있는 동안, 피를 나눈 친척들도, 연합국의 재정적 이해관계도, 단순한 인간적 동정심도 결국 그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어떤 진지한 시도의 동기가 되지 못했다고 자신 있게 믿어왔다.

이 책 첫 부분에서 우리는 죠지5세가 고난에 처해 있는 그의 친척을 돕는 것을 반대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독일의 카이저 빌헤름2세 둘 다 니콜라스는 물론 알렉산드라의 사촌들인 이상, 그들이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고는 믿기 어렵다. 게다가 재정러시아가 연합국의 은행들과 기업들에게 수 십억 달러에 상당하는 부채를 지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 은행과 기업들이 그들의 재정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1) 

 

이 모든 역학관계를 고려하면, 황실가족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무시당했을 것이라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을 구하려는 계획들은 공공연하게 효율적으로 추진될 수가 없었다. 성공적이었든 아니었든, 황실가족의 석방을 위한 (적들과의)타협에 연루된 정부들에게 낭패를 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추적을 받고 물러난 정보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작업의 모든 자취를 역사의 페이지로부터 지우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더욱이 황실가족들에 대한 것 역시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추측이나 억측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러시아가 볼셰비즘에서 벗어날 때까지 공공의 시각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숨기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며, 성공한 후라야만 그 이야기가 거론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후 수십 년 동안, 이 시기 러시아에서의 영국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들이 봉인되어 비밀에 부쳐져 왔는데, 그 이유는 관계자들이나 혹은 그들의 가족들이 추적을 받아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국자들은, 당연히 황실가족들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황실가족의 죽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설명을 들어왔다. 에카테린부르그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구금돼 있던 러시아의 황실가족들 - 짜르 니콜라스, 황후 알렉산드라 및 그들의 다섯 자녀들 - 은 1918년 7월17일 이른 새벽에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체 지하실로 불려 내려왔다.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는 최후의 짜르 식구 7명과 함께 황후의 개인 의사, 그녀의 시녀, 그들의 요리사와 한 사람의 남자하인 - 이들 모두는 자진해서 시베리아로 황실가족과 동행한 사람들이다 - 도 내려왔다. 그들은 누가 와서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고, 그들을 좀 더 잘 보호하기 위해 다른 장소로 옮길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사방 돌벽으로 된, 가로 세로 14 X 17 피트 되는 방에 그들이 도착한 직후, 2중문을 통해 11명의 총잡이들이 들이닥쳤다. 지휘자의 명령아래 그들은 빗발치듯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하여 니콜라스 가족들의 생명, 로마노프 왕조의 300년 사직, 그리고 “잔인한 니콜라스”로서 회자되고 있던 그 남자의 생애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점점 증가하고 있는 증거물들과 이 책에서 드러나고 있는 새로운 정보들은 이미 허약했던 종래의 기본 설명구조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다. 지금까지, 1917년 3월부터 1918년 중반 사이는 일반적으로 로마노프 일가가 주로 무시되고 잊혀진 사람들이었던 시기로서 묘사돼 왔다. 이 시기에 그들의 유일한 생존희망은 전 짜르군(軍)에 소속돼 있었던 불운한 어린 장교들의 들뜬 황제구출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된 조사결과는, 그와는 반대로, 황실가족의 안전한 구출을 위해 최고위 수준으로 노력했던 막강한 힘을 가진 정치가들, 외교관들, 정보원들, 종교지도자들 및 몇몇 유럽 왕가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다국적 중핵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황실가족이 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 구금돼 있었던 기간인 1917년 늦은 가을에 (무르만스크에서) 착공했던 짜르용3) 저택건설2)은, 항상 “무정한” 친척들과 연합국 인사들로 묘사돼 왔던 바로 그 사람들이 북부 러시아에서 로마노프를 위해 일종의 스테이징 하우스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917년과 1918년 말에, 차알스 크레인, 폴란드계 러시아 은행가이며 로마노프 일가와 가까웠던 카롤 야로신스키, 그리고 영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던, 이전에 러시아의 이중첩자였던 시드니 레일리와 같은 막후의 협력자들이 러시아와 황실가족 모두를 볼셰비키들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갖가지 계획의 수립과 집행에 관여했다. 공식적으로 러시아위원회로 불린 영국정부의 특별 타스크포스 그룹의 후원아래, 완만하게 움직이고 있는 여러 계획들에 연루된 인물들이 연합국에 의해 결집된 수많은 목표들을 완수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었다는 증거 역시 있다.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는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앞쪽 여러 장에서는 이 타스크포스 그룹의 실질적인 목표들이 국제적으로 두개의 명확한 진로를 따라 성안되고 수행된 정책 속에 어떻게 은폐됐는지를 보여주었다. 두개의 진로 중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이 러시아 금융사업계획의 큰 부분을 잠재적으로 장악함으로써 개괄적인 조건에서 공공의 소비와 거래를 진작시킬 작정이었다. 이것은 또한 러시아 남부지역에서 백군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 정책 진로는 전혀 다른, 그리고 비밀의 의제를 포함하고 있었다.4) 두 번째 진로의 목적은 두 가지였던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목표였던, 이른바 1918년 여름에 백군과 체코군에 의한 볼셰비키 정권의 타도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더욱 은밀하게, 발표되지 않고 있는 작전 - 지금까지 의심받지 않았던 - 인 로마노프 일가의 구출이었다.

 

로마노프 일가를 구출하기 위한 은밀한 의제는 굉장히 복잡했고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아무튼 그것의 최종결과는 윌슨 대통령과 죠지5세왕이 만나고 있었던 바로 그 때 미 국무부에 의해 성안되고 그리고 런던과 파리로 발송된 파격적인 전보들에 의해 알려진 것 같다. 1918년 12월30일, 러시아 황실가족이 실종된 후 5개원만에 “지급.....확인하라....가족 일곱 번”이라는 말이 포함돼 있는 한 통의 암호전보가 하루 전 미 국무부로부터 받은 전보에 대한 회답으로 런던의 미 대사관5)에서 발송됐다. 미 국무부는 “가족” 일곱 번이란 말을 암호로 사용했다. “기밀” 및 “지급”이라고 표시되고 그리고 표면적으로 중국동방철도회사에 대한 “녹색” 암호인, 최고수준의 암호 중 하나로 쓰여진 “가족” 일곱 번이란 언급은 문맥을 벗어나 부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특히 암호글자인 “가족”이란 말이 이미 암호화 된 서류에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처음에 그 전보들은, 그것들이 분명한 이유 없이 “지급” 그리고 “가족 일곱 번 확인하라”로 표시돼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즉 우리가 지쳐버리도록 보아 온 앞서 9개월 여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정황 속에 그들(황실가족)이 내던져지기까지, 황실가족의 운명에 대한 미국인들과 영국인들 사이의 접촉이 서로 대조적인 외관에도 불구하고 결코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16장에서 황실가족의 최후의 운명과 관련된 이 전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중요성이 검토될 것이다. 황실가족의 실종은 그들에 대한 “처형”이 발표된 첫날부터 그들이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줄줄이 낳기 시작했다. 아주 초기부터 로마노프 가족들의 운명에 대한 혼란이 사라지지 않았다. 1918년 7월18일,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VTsIK) 의장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와 야코블레프의 4월 구출계획에 포함되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공산주의 보도국을 통해 짜르 하나만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우랄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니콜라스 로마노프를 총살키로 결정하였으며, 이 결정이 7월16일에 집행됐다. 니콜라스의 아내와 자녀는 안전한 장소로 보내졌다”6)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 소비에트 신문인 이스베스챠지의 헤드라인 기사로 짜르의 죽음에 관한 보도가 나오기까지는 이틀이 걸렸다.

 

모스크바, 1918년 7월20일

 

[이스베스챠 통신에서 인용됨]

 

의장 스베르들로프는 우랄관구 소비에트로부터 전 짜르 니콜라스 로마노프의 처형에 관한 통보를 직접 전보로 받았다고 발표했다. 최근 며칠간 체코슬로바키아군 부대들의 접근위험성이 붉은 우랄의 수도인 에카테린부르그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동시에 소비에트 정권의 수중에서 황권집행자를 탈취하려는 데 목적을 둔 반혁명분자들의 새로운 음모가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우랄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니콜라스 로마노프를 처형키로 결정한 것이다. 처형은 7월16일에 집행됐다. 니콜라스의 아내와 자녀는 안전한 곳으로 보내졌다. 처형에 관련된 서류는 특사 편으로 모스크바에 송부됐다.....전 짜르가 인민들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그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제안이 최근에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 그의 재판회부를 방해했다.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우랄 소비에트가 로마노프를 처형키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들을 검토했으며, 중앙집행위원회는 최고회의 간부회의를 통해 우랄관구 소비에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혁명적인 징벌활동에 의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 황제의 복위를 꿈꾸고 있거나 혹은 심지어 감히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모든 원수들에게 준엄한 경고를 주었다.7)

 

처형이 알려진 후, 짜르만 죽고 니콜라스의 아내와 자녀는 안전하다고 시사하고 있는 첫 번째 설명이 재빨리 변경되었다. 잇따른 설명들은 신뢰할 수 없는 소스로부터 그리고 대부분 비정상적인 채널을 통해 나왔다. 로마노프 가족들 중 어떤 한사람 혹은 전부의 운명에 대해 매번 새로운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번져갔으며, 그것은 그 사건에 대한 앞서의 어떤 묘사로부터 약간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되곤 했다. 우리는 그런 다양한 소문들이, 한 사람은 죽고, 하나 혹은 두 사람은 도망쳤고, 혹은 모두가 살았다는 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볼셰비키들이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에 대해 세계에 무엇을 선전해야할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1918년 10월5일, 영국정부가 “황실가족에 대한 진상조사 특사“ 자격으로 에카테린부르그에 파견한 고등판무관 차알스 엘리오트경은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당시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발포어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8) 이 보고서는 적어도 황실가족의 일부가 살아있을 가능성을 공공연히 남기고 있었다.

 

에카테린부르그, 러시아

 

1918년 10월5일

 

그 집[이파티에프 하우스]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습니다....방문 맞은 편 벽과 그리고 마루에는 17개의 탄환자국,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벽과 마루의 일부가 총탄 구멍들을 없애기 위해 잘라낸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조사를 담당한 관리들은 다른 곳에서 검사해보기 위해 그 잘라낸 조각들을 치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브라우닝 리벌버 총탄이 발견되었으며, 그것들 중 일부는 피가 묻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외에는 핏자국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총탄의 위치는 희생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발사됐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마루바닥에 쓰러졌을 때 발사됐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깁스씨는, 종교적인 이유로 짜르와 의사 보트킨이 죽음을 맞았을 때 틀림없이 무릎을 꿇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혹은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5명, 즉 짜르, 의사 보트킨, 황후의 하녀 및 두 사람의 하인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불에 태워졌는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처분됐는지 어떤 흔적도 없지만, 의사 보트킨의 것으로 믿어지는 반지를 낀 손가락 하나가 우물에서 발견된 것으로 공식적으로 진술되었습니다. 7월17일에 창문에 차일이 쳐져 있는 열차 하나가 알려지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에카테린부르그를 떠났는데, 살아남은 황실가족들이 그 안에 타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볼셰비키들이 오직 짜르의 죽음에 대해서만 언급했다는 이유를 상기 설명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치 있고 낙천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황제폐하의 탈출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날조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황후와 그녀의 자녀들 전부가 사라졌기 때문에, 짜르도 같은 경우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짓이 아니라는 점을 사실상 인정해야할 것입니다.

 

에카테린부르그의 그 방에 있는 흔적들은 고작해야 알려지지 않은 몇 사람이 거기서 사살됐으며, 심지어 한 술주정뱅이의 악다구니의 결과로서 설명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련의 견해가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일까 두렵습니다......비행기 한 대가 그 집(이파티에프 하우스) 정원 위를 날고 있는 것에 그들[볼셰비키들]이 몹시 위기감을 느꼈다는 일부 증거가 있으며, 나는 그들이 벌컥 격노하고 공포에 질려 황제폐하를 죽인 것은 아닐까 하여 두렵습니다.

 

황후와 그녀의 아들 및 네 딸은 살해되지 않았지만 7월17일에 북쪽 혹은 서쪽으로 보내졌다는 것이 이곳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그들이 어떤 집에서 불에 태워졌다는 얘기는 이 도시 외곽의 한 숲에서 분명히 상당한 양의 옷을 태운 흔적인 한 무더기의 재가 발견된 사실에서 부풀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재 무더기의 바닥에서 다이아몬드 하나가 나왔으며, 그리고 공주 중 하나가 그녀의 외투의 안감 속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꿰매 넣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황실가족의 옷이 거기서 태워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공주들 중 하나의 것으로 확인된 머리털이 집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실가족은 그들이 떠나기 전에 변장을 하지 않았나 보입니다.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나는 그들의 운명에 대한 소문을 전혀 듣지 못했지만, 여러 대공들과 공주들의 살해에 대해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다만 불안을 고취시킬 뿐입니다.

 

존경하는 외무장관님께 이 글을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외무장관님의 가장 충실하고 부족한 부하

 

C.엘리오트 올림9)

 

차알스경의 보고서는 실제로 짜르와 4명의 종자(從者)들을 희생자들로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그들이 불에 태워졌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처치됐다”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불에 태워졌다는 얘기는 1924년에 발행된 소콜로프 보고서의 기초가 되었다. 황실가족이 죽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그날 밤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해 더욱 당황하게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은 연루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그 날밤의 살해에 대해 의심스런 어떤 것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우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 중 하나이며 황실가족의 유폐장소였던 에카테린부르그가 연합국 정보원들로 들끓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있어 왔는데, 이것은, 그간 우리가 보아온,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에서의 연합국의 활동을 감안할 때 전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차알스경의 보고서 가장자리에 “죤스”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 표시는 죤스라는 이름의 누군가가 어떤 방법으로 황실가족이나 혹은 최소한 1918년 여름의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사건들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죤스”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암호로 된 기록 하나가10) 다른 관리, 즉 에카테린부르그 주재 영국영사인 토마스 프레스톤 경이 보낸 별도 전보의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금과 백금의 구매에 관한 전보를 보냈었다. 게다가 프레스톤은 그의 회고록에서, 7월5일 밤 경,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푸울장군의 원정군 소속의 평상복을 입은 한 영국 장교가 기차 편으로 에카테린부르그에 도착했다”11)고 기록해 놓음으로서 딕비-죤스의 행방에 대해서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차알스 엘리오트 경이 방주(旁註)에서 언급했던 이 사람 즉 “죤스”는 거의 확실히 영국 장교이며 정보원인 딕비-죤스대위였다. 제7장에서 보았듯이 그는 7월 16일을 약간 전후하여 에카테린부르그에 도착, 분명히 영국 영사관에 숙소를 정했다. 영국영사관은 이파티에프 하우스로부터 돌을 던져 닿을 곳이며 어떤 총소리도 잘 들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한편 프레스톤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그의 처제는 훗날 그녀가 몇 방의 총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으며, 단호하게 약간 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최근에 비밀취급이 해제된 영국 왕실 엔지니어들 에 관한 기록들 중 딕비-죤스에 관한 기록은, 에카테린부르그가 7월 초순에 그의 여행목적지였으며, 그는 근래에 아르헨겔스크에서 떠났다고 언급하고 있다.12) 그에 관한 기록이 최근까지 내내 기밀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가 단순한 엔지니어 이상일 것이라는, 우리가 이미 보아왔던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엔지니어 딕비 죤스가 거의 확실히 영국 정보원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파티에프 하우스 건너편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대한 관찰과 관련된 그의 어떠한 보고서 하나도, 혹은 황실가족이 유폐돼 있었던 도시에서 가장 뉴스가치가 있었음에 틀림없는 짜르의 죽음 발표에 대한 그의 코멘트 하나도 연합국 정부문서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에서 보관되고 있는 일부 보고서들은 여러 페이지들이 빠져 있다. 현재 목차에 나와 있는 모든 서류가 전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1918년 7월17일 밤을 전후하여 벌어진 사건들과 관련된 더 많은 기록들이 한 때는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으며, 1929년 “북부러시아”에 관련된 수백 페이지의 서류가 “행정관의 명령에 의해” 파기될 때 에카테린부르그 관계 서류도 그 일부로서 파기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3)

 

“죤스”라는 이름이 10월에 차알스경의 통신의 중요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차알스 엘리오트 경은 러시아에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는 영국 비밀요원들의 활동에 관해 내밀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9월24일 런던의 육군성에서 녹스 영국장군에게 보낸 아래 전보는 엘리오트가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정보활동에 대해 알고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전보에서의 “C"가 맨스필드 컴밍을 지칭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사람은 무르만스크 안전가옥 건설을 이면에서 지휘한 사람이며, MI1c 또는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으로 알려진 - 뒷날 M16으로 개편 - 비밀정보기관의 책임자였다.)

 

1918년 9월24일 오후 11시 30분 발송

 

67072 암호: 9월21일자 귀하의 73

 

........C는 현재, 홍콩에서 온 쇼 지휘하에 임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기지를 둔 한 비밀단체를 갖고 있음. 쇼는 차알스 엘리오트경과 접촉중임.

 

차알스경이 진짜 영국정부를 대신한 진상조사 특사였을까? 아니면, 그 사건이 신중하게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길 모두를 터놓을 수 있는 오전(誤傳)을 주입하기 위한 역할이었을까? 경우에 따라, 장차 연합국, 특히 영국에게, 만약 황제구출 특사가 임무를 수행하여 황실가족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될 것인데, 엘리오트의 보고서는 이 만약의 경우에 대한 방비책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7월17일 밤을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는 차알스 엘리오트 경의 보고서 외에 미 육군 정보원인 호머 슬로터 대위 또한 극도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초 루마니아 주재 미국 보좌무관으로 특파됐던 슬로터는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후 중국의 티엔친을 잠깐 다녀왔고, 1918년 2월17일 역시 보좌무관으로서 러시아에 주재하게 됐다며 러시아 당국에 신고하라는 지시를 다시 받았다.14) 슬로터의 아내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낸 기이한 편지에서 호머와 다른 웨스포인트 출신이 “볼셰비키 대역을 하기 위해 간다”고 표현함으로써 슬로터가 맡게 된 일을 대충 설명하고 있다.15) 그녀의 언급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가 제7장에서 보았듯이, 7월까지 슬로터는 체코군의 미국 연락장교로 활동하면서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16) 딕비-죤스처럼 슬로터의 7월 보고서들은 이상하게도 짜르와 그의 가족들의 운명에 대해 어떤 소식도 언급하지 않는다. 태평스럽게도 호머 슬로터의 보고서들은 그가 문제의 그날 밤이 오기 단지 며칠 전에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에서 철수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그에 관한 파일은, 근처에 있던 다른 미국 외교관인 레이 영사가 병이 걸려 슬로터가 그를 데리고 떠나야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국무부는 항상 병으로 인해 빼먹은 날들에 대한 기록들을 보관하고 있다.(놀랍게도, 러시아에서 그런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병가로 기록된 매우 특정한 날들에 대한 수많은 개인적인 기록들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이 영사 개인에 대한 파일은 애매하고 날짜와 여행기록들이 빠져 있다.17)

 

기록이 제대로 돼 있지 않는 다른 개인 파일로는 시드니 레일리의 것이 그러하다. 현재까지 보존돼 온 교신 문서에서 우리는 지금 레일리가 그 무렵 모스크바 및 페트로그라드에서 에카테린부르그 북서쪽의 볼로그다를 왕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레일리의 MI1c 관련 개인 파일은 1918년 5월에서 10월까지의 일을 글자 그대로 공백으로 남겨놓고 있다.

 

어리둥절하게 하는 또 다른 불일치가 있다. 슬로터는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그 해 여름에 그는 또한 당시 투르키스탄(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 황후의 재정담당 비서이며 차알스 크레인의 친구였던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이 살고 있었던 도시 - 에 있던 로저 트레드웰 미국영사와 접촉하고 있다. 쌍방향정책의 모스크바 담당 중요 인물이었던 트레드웰은 랄라비 암호를 이용하여 슬로터와 교신하고 있다.18)

 

슬로터와 트레드웰이 다루고 있었던 업무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이 꼭 군사문제나 외교단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특별임무였음에 틀림없었다. 더욱 당황하게 하는 것은 슬로터와 트레드웰이 도대체 어떻게 교신을 하고 있었느냐는 점이다. 왜냐하면 국무부에 있는 트레드웰에 관한 파일에는 아래와 같이 그가 한 때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트레드웰이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 직전 로크하르트의 그리고 트로츠키의 협상에 관해 보고하고 있었던, 우리가 앞서 보았던 수수께끼 같은 전보가 온 후, 런던에서 작성된 아래와 같은 메시지 하나가 교신되었는데, 거기에는 그 다음 몇 달 동안의 트레드웰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국무부 발행 여권 번호 52115의 소지자이며 현재 사이프러스에 머물고 있는 앨버트 W.스틱크니 라는 사람이 전보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그가 2월에 페트로그라드를 떠날 때 로저 트레드웰이 그 도시에 있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리고 그 후 런던에서 스킨너 영사로부터 트레드웰이 1918년 3월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음....”19)

 

모스크바에 퍼진, 1918년 3월에 트레드웰이 죽었다는 소문은, 그가 특별 임무로 투르키스탄에 가는 사실을 감싸주었다. 6개월 후인 1918년 11월,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트레드웰 어머니의 편지가 오히려 더 많은 진실을 밝혀준다. 그녀는, 볼셰비키들이 타쉬켄트에서 그녀의 아들을 체포했다는 모스크바 어떤 신문의 보도(1918년 10월)에 이어, 뉴욕타임스가 그것을 다시 보도한 후 그 편지를 쓴 것이다. 그녀는, 대통령과 국가 전체가 이처럼 긴장하고 있는 순간에 대통령을 괴롭혀드리는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을 먼저 사과한 후, 그녀의 아들이 “이 번 특별임무”에 자원한 것이며 만약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국가가 그의 뒤를 돌봐 줄 것”이라는 언약이 돼 있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다.20)

 

군 정보요원으로 일하다가 첫 임지인 루마니아로부터 에카테린부르그로 전근된 슬로터와, 그리고 국가가 뒷바라지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특별사명을 수행중인 트레드웰은 확실히 어떤 종류의 임무를 조정하고 있었다. 분명 죽은 것으로 생각돼 왔던 트레드웰이 보도된 바와 같이 결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조용하게 투르키스탄으로 이동하였으며 훗날 거기서 체포됐다. 그와 슬로터의 임무가 무엇이었던 간에 비밀활동에 몰두한 것임이 틀림없다.

 

슬로터 소령 또한 프랑스 정보원인 구이네 소령21)을 포함하여, 에카테린부르그 지역에서 활동중인 다른 정보원들의 이름을 그의 보고서에서 누설했다. 그러나 슬로터와 딕비-죤스가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몇 명 안 되는 연합국 측 기간요원이었기 때문에,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영국장교인 딕비-죤스 - 아마도 토마스 프레스톤과 차알스 엘리오트의 각 보고서 방주(旁註)에 휘갈겨 쓰여져 있었던 죤스 - 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우리들이 알고 있기로 이들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체코군의 연락장교로 일하고 있었다.

 

딕비-죤스의 활동은 그 뒤 1920년 7월에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사문(査問)대상이 되었다. 1918년 봄과 여름에 있었던 연합국과 체코군의 활동에 대해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미 국무부의 반 S. 멜레-스미스가 차알스 크레인의 아들이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였던 리차드 크레인에게 보낸 한 전보에서, 체코군 부대들을 볼셰비키들과 싸움을 벌이게 만든 사건, 보다 정확히 말해 딕비-죤스의 개입에 대해 체코 문서들로부터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무부는 이 요구를 하게 된 이유를, 런던, 파리 및 프라아그에 있는 여러 미국공관들이 이 문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를 받고 있으며, 수집된 정보는 “러시아와의 외교문서에서 각서작성에 활용될” 것이라고 했다.22) 조사는 짜르구출하기란 책이 1920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후 몇 주 이내에 시작됐다. 이들 서류들은, 종래의 역사해석과는 반대로, 1918년 7월의 에카테린부르그가 호머 슬로터 소령과 프랑스의 구이네 소령과 같은 몇몇 연합국 정보원들을 포함한, 이전에 의심받지 않았던 사람들의 활동 중심지였다는 것을 확연히 입증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면, 이파티에프 하우스는 이 들 정보원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들 중 아무도 1918년 7월16/17일 밤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어떤 이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뉴욕타임스 기자인 칼 에커먼이 이 사람들에 관해 설명했던 것 같다. 에커먼은 실제로 미국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고 있었고, 훗날 이파티에프 하우스가 외국인들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쓴 사람이다. 에커먼이 두 번째로 낸 책은, 7월에 백군을 따라 에카테린부르그로 접근하고 있었던 체코군이 볼셰비키들을 쳐부수고 짜르를 탈취하기로 결심했다고 솔직히 밝혔다.23) 그래서 다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에카테린부르그 주위 지역에, 그리고 시 자체 내에 많은 수의 정보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1918년 7월16/17일 밤의 그 집(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대한 상세한 관찰 보고서 하나 남아있지 않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미국, 영국 그리고 더욱이 프랑스에서 이들 국가들의 에카테린부르그 주재 영사관 파일을 조사하고 다녔다. 토마스 프레스톤 경의 것을 포함하여 현재 약간 남아 있는 것 모두가 상당히 모호한 사후보고서들이었다. 실제로 모든 영사관 파일은 영사관 파일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16일 밤 혹은 17일 새벽 시간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연합국 정보요원들 혹은 외교관 집단으로부터 나온 기록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후보고서류 중 하나가 희귀하게 남아 있다. 슬로터 소령이 윌리엄 그레이브스 장군에게 보낸 이상한 급송 공문서이다. 그레이브스 장군은 당시 시베리아의 미 원정군 사령관이었고, 그리고 7월17일 후 5개월만에 “가족 일곱 번”이라는 전보를 보낸 바로 그 사람이다. 그 공문서는 이미 희미해진 그림에 명쾌함보다는 호기심을 더 보태고 있다. 독자들이 아래에서 읽게 될 그 공문서의 많은 부분은 1918년 12월23일자 뉴욕타임스 지 1면 기사로 이미 세계에 알려진 것들이다. 기자이며 정보원이었던 칼 에커먼은 이 기사를 위해 상당히 요약된 이야기를 그의 편집장에게 전신으로 보내는 데 6천 달러를 썼다.24) 슬로터 소령의 첩보 파일은 그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미국 영사인 팔머로부터 이 서류를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팔머는 현지 수도원에서 그것을 받았으며, 그 서류를 쓴 “파르팬 돔닌”은 짜르구출하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사람인데, 그는 이파티에프 하우스를 떠난 후 이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철자를 잘 못 쓴 곳도 있고 그리고 전체적으로 슬로터의 정보 파일에서 드러난 것과 꼭 같은 이 서류를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인 재검토를 위해서다.)

 

[1918년 12월12일]

 

전 짜르 니콜라이 로마노프의 최후의 날들25)

 

(그가 살해되기 전)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 짜르의 개인 수행원 겸 집사장. 22년간 변치 않고 전 짜르를 섬겨 왔으며, 자진해서 그의 유배에 따라 나섰던, 전 짜르의 시종 내지 집사장인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이 전 짜르의 최후의 날들의 생활에 대해 얼마간 매우 흥미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은 60세인데, 코스트로마 정부 관할지역인 돔닌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이반 수세닌의 후예들인, 이른바 농노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군이 진군하기 이전

 

7월 초순이 시작되면서 비행기들이 매일 에카테린부르그 상공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은 낮게 날다가 포격을 받곤 했지만, 항상 결과는 없었다. 이들 비행기들의 활동에 대해, 체코군들이 정찰을 하고 있는 것이며 에카테린부르그를 점령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어느 날 저녁 정원에서의 일상적인 산보에서 돌아온 전 짜르는 이상하게 흥분하여 마법사인 성 니콜라이 초상 앞에서 열정적인 기도를 드린 후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폐하, 저가 옷을 벗겨드릴 테니, 잠옷으로 갈아입고 주무시지요.” 파르팬 알렉시이비치가 짜르에게 간청했다.

 

“이보게, 귀찮게 하지 말게, 이제 내가 얼마 더 못 살 것 같은 마음이 자꾸 드네 그려. 아마도 이미 오늘 ------” 전 짜르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폐하, 당치 않는 말씀이십니다.”

 

전 짜르는 파르팬 알렉세이비치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저녁 산보를 하고 있는 중에 그는 우랄관구 노동자-코사크-붉은군대 소비에트대표자 특별위원회가 전 짜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회합을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 말로는, 전 짜르가 탈출하여 체코군 쪽으로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으며, 체코군이 에카테린부르그로 진격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체코군이 “소비에트 정권의 손아귀에서 잔 짜르를 탈취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아무 것도....[분명히 삭제한 공란] 모르고 있다네.” 라며 전 짜르는 말을 끝냈다.

 

 

전 짜르에 대한 관리방식

 

파르팬 알렉세이비치의 얘기에 따르면, 전 짜르에 대한 유폐규칙은 매우 엄격했다. 그는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을 사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주어진 일정한 시간을 초과하는 정원산보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시종들은 일거수 일투족을 내내 감시 받고 있었다. 한번은 늙은 시종인 파르팬 알렉세이비치 돔닌이 잔 짜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감추고 있다며 옷을 발가벗기는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식품이 매우 모자랐으며, 보통 청어와 감자가 주식이었고, 빵은 1인당 매일 반 파운드 분량으로 지급되었다.

 

 

황위 계승자

 

황위계승자인 알렉세이 니콜라이비치는 항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한 때 그는 각혈까지 했다. 어느 날 저녁, 알렉세이 니콜라이비치는 숨을 몹시 헐떡이고 큰 소리로 울면서 전 짜르의 방으로 달려와서는 아버지의 팔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 아빠, 그들이 아빠를 쏘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자.” 아버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정하여라, 가엾은 것, 내 아들아, 진정하여라. 엄마는 어디계시냐?”

“엄마는 울고 계셔요. 엄마에게 진정하라고 말하세요. 엄마가 울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아빠, 사랑하는 아빠." 알렉세이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아빠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그들이 아빠를 죽이려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알렉세이,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구나 --- 가서 엄마를 진정시켜라.”

 

알렉세이는 일어나 나가고 짜르는 성 니콜라이 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최후의 날들 동안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매우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악몽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더 이상 자지 않고 나머지 밤을 꼬박 기도로 보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이따금씩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를 만나러 가거나 혹은 그가 아내 엘리스를 불러서 만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그가 원하는 대로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방으로 들어와 울면서 말했다.

 

“여보, 당신의 마지막 지시사항들을 써 놓으세요. 아무튼 그것이 필요해요. 당신이 쓴 모든 종이쪽지와 서류들을 정리해 둬야 합니다. 편지도요.”

 

이 말을 들은 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밤을 새워가며 쓰고 있었다. 그는 많은 편지를 썼는데, 그 가운데는 그의 모든 딸들, 그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그의 숙부 니콜라이 니콜라이에비치, 도게르트 장군, 겐드리코프 공작, 올수피에프 백작, 올덴버그 공, 수마르코프-엘스톤 백작, 그리고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그는 편지를 봉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통신이 소비에트의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가 보낸 편지들이 ”송부불가“라는 연필표시를 하여 되돌아오곤 했다.

 

 

고뇌와 상심....

 

하루 종일 니콜라이 알레산드로비치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엎드려 기도만 드리는 날도 있었다. 관찰이라는 타고난 재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마저, 전 짜르가 굉장한 고뇌과 상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었다.

 

7월 15일

 

7월15일 저녁 늦게 갑자기 전 짜르의 방에 수비대 인민위원이 나타나 이렇게 통고했다.

 

“시민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나를 따르시오. 우랄관구 노동자-코사크-붉은군대 소비에트대표자 회의장으로 갑시다.”

 

“여보시오, 솔직히 말해 주시오. 나를 지금 총살시키려 데려가는 것이지요?” 애원 조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물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진짜 죽을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당신은 지금 회합에 참석해야하오.” 수비대 인민위원은 웃으며 말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희색 군복 윗도리를 걸치고 부츠를 신고 벨트를 졸라매고는 인민위원과 함께 나갔다.

 

문 밖에는 두 사람의 병사들이 서 있었다 --- 총을 멘 라트비아인들이었다. 세 사람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둘러 싸 어떤 이유에선지 그의 온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라트비아인 중 하나가 앞장섰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를 뒤따라 가야했고, 그 다음에 공산당 인민위원이,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꽤 오랫동안 - 약 2시간 반 동안 -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매우 창백한 얼굴로 턱을 덜덜 떨며 돌아 왔다.

 

“여보게 물 좀 주게." 나는 그에게 물을 갖다 드렸다. 그는 즉시 큰 물 컵을 다 비웠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들이 내게 3시간 이내 총살할 거라고 통보 했다네.”

 

처형 이유의 공식 통고

 

우랄관구 노동자-코사크-붉은군대 소비에트대표자 회합이 전 짜르의 출석 아래 열리고 있는 동안 전 짜르는 “조국과 자유를 수호하는 연맹”이라는 이름의 비밀조직에 의해 반혁명음모 혐의로 약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반혁명당원들은 세계대전과 대학살, 기근, 실업, 수송망의 와해, 독일군의 진격 등이 원인이 된 이 모든 어려운 상황들이 전적으로 소비에트정권 때문이라고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으며, 소비에트정권에 저항하도록 대중들을 선동하여 노동자 농민혁명의 숨통을 조이려하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의 조직은 모든 비 소비에트 정치 당파들을 참여시키려 하고 있다. 이 집단은 뚜렷하게 황제파를 자처하는 당파들은 물론 사회주의 당파들과도 결합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약식재판에 제출된 자료들은 반혁명조직의 간부들이 이들 일단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술에 대한 관점의 불일치 때문에 그(짜르)의 명령을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자료들은 이 반혁명음모의 최고 지휘자에 짜르와 개인적으로 친한 도게르트 장군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직에는 또한 크라포트킨 공작의 대리인들, 참모부 대령인 셔카르트[에카르트], 엔지니어인 린스키[렐린스키 혹은 시드니 렐리] 와 기타 여러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싸벤코프[사빈코프] 역시 이 조직과 직접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군사 독재자로서 새 정부의 수반으로 상정되고 있었다는 믿을만한 이유들이 있다. 이들 모든 지도자들은 매우 강력한 음모단을 만들어 왔다. 모스크바 투쟁 그룹에는 나중에 사마라로 이동할 약 700명의 장교들이 있다. 사마라에서 그들은 시베리아로부터 대러시아를 분리하게될 이른바 우랄전선을 결성할 목적으로 연합국으로부터 지원병들을 기다릴 것이다. 식량부족으로 기근사태가 벌어진 후에, 그들은 먼저 소비에트 정권을 전복하고 다음 독일을 향한 진격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기로 되어 있다. 이 음모에는 인민 사회주의자들, 우익사회주의 혁명당원들, 그리고 때로는 입헌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활동을 하고 있는 멘셰비키들과 같은 사회주의 정파들도 참여하고 있다는 서류상의 증거들이 있다. 이 조직의 참모장은 듀토프 장군 및 데니킨 장군과 직접 통하고 있고, 그리고 수일 전에 일으키기로 추진하고 있었던 새로운 반혁명 음모가 발각됐다. 듀토프장군의 도움을 받아 소비에트 정권의 손아귀에서 전 짜르를 탈취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그 외, 현재까지, 전 짜르 니콜라이 로마노프는 개인적으로 친구인 도게르트 장군과 비밀교신을 계속했음이 입증됐다. 도게르트는 그의 편지에서 짜르에게 풀려날 준비를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 그리고 또한 우랄관구 노동자-병사-붉은군대 소비에트 대표자들의 결정에 기인한 힘든 상황에서, 특히 전시기간이라는 관점에서, 짧은 시간에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철수하기 위해서는, 전 짜르 때문에 더 이상 수고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정당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해악이 된다. 그래서 우랄관구 소비에트는 전 짜르를 지체없이 처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시민 니콜라이 로마노프, 나는 당신이 최후를 정리하는데 3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을 통보하오.”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은 전 짜르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경비병, 니콜라이 로마노프를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해.” 하고 병사에게 명령했다.

 

마지막 작별인사

니콜라이 로마노프가 그 회합에서 돌아 온 후 곧 그의 아내가 알렉시스 알렉산드로비치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둘 다 울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는 때때로 졸도를 하곤 했으며 의사가 불려와야 했다. 그녀는 졸도에서 깨어나자, 경비병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걸했다. 병사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들의 권한이 아니라고 답했다.

 

“제발 조용히 해요, 엘리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었다. 그 후 그는 전 집사장을 불러 그에게 키스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를 떠나지 말아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그들 주위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나. 그들을 진정시킬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나는 곧 하느님이 데려갈 걸세.”

 

그 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외에 아무도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은 다른 다섯 명의 붉은군대 병사들이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과 다른 두 요원들 - 노동자 - 과 함께 다시 나타날 때까지 함께 있었다.

 

“오버코트를 걸치시오” 소비에트 의장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내와 아들 및 집사장에게 키스했다. 그는 한번 더 그들에게 성호를 긋고는, 그를 데리러 온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 당신들의 처분에 맡기겠소.”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는 발작을 일으키며 둘 다 방바닥에 고꾸라졌다. 파르팬 알렉세이비치는 모자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의장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시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되오. 우리가 떠난 후 하도록 하시오.”

 

“제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그 늙은 시종은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동행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끌려가 버렸다. 7월 15일 밤 어디서 그가 20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붉은군대 병사들에게 총살됐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처형 후

그날 날이 새기 전에 우랄관구소비에트 의장은 몇 명의 붉은군대 병사들과, 의사 한 사람 및 수비대 인민위원과 함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머물렀던 방에 다시 왔다. 의사는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 로마노프를 돌봐줬다. 그런데 소비에트 의장은 의사에게 “그들을 즉시 데려가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가능합니다.”

 

“시민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 로마노프, 준비하시오. 당신들은 이곳에서 떠나게 될 것이오. 당신들에게 꼭 긴요한 물건들만 가져가되, 30-40 파운드를 초과해서는 안 되오.”라고 의장은 말했다.

 

자신들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리저리 넘어지면서 모자는 곧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의장은 그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황후의 딸들)에게 작별인사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내내 그들을 몰아세우기만 했다.

 

“그리고 노인장, 당신도 지금 이곳으로부터 멀리 떠나시오. 당신이 섬겨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내일 당신들도 이곳을 떠나시오.” 의장은 수비대 인민위원을 처다 보며 명령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와 알렉세이 니콜라이비치는 즉시 자동차에 태워져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날이 밝자 수비대 인민위원이 다시 나타나 파르팬 이바노비치에게 즉시 짜르가 사용하던 물건들의 일부를 갖고 방을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든 편지와 서류들은 수비대 인민위원이 챙겼다. 파르팬 이바노비치는 역에서 열차표를 사는 데 곤욕을 치렀다. 역과 열차는 에카테린부르그 시의 귀중품들을 소개시키고 있었던 붉은군대 병사들이 무모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에필로그

 

첼리아빈스크 신문 7549 우트로 시베리아는 니콜라이 로마노프의 처형을 확인한 정부의 특별포고를 보도하고 있다. 짜르의 모든 서류들은 압수됐다.

 

그 신문이 언급했던 것처럼, 7월30일에 에카테린부르그에서 10 베르스타(러시아의 里程, 1베르스타는 1.067km) 떨어진 곳에 불에 탄 한 가옥의 재 무더기에서 짜르 가족 소유의 쇠붙이들과 짜르 가족에 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불에 탄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짜르의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계자들은 이 장소를 다녀갔다. 그래서 로마노프 가족들이 불에 탄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에카테린부르그 시에서 볼셰비키들이 철수할 때 인질로 잡아간 엘레나 페트로브나 대공비, 헨드리코바 백작부인 및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 3의 사람이 있었다. 인질들의 총수는 80명에 이르렀다. 그 때 볼셰비키들은 베르코트리 방향으로 달아났었다.

 

에카테린부르그 역사학협회에서 나온 추가사실

 

러시아 역사학협회 회원들이 러시아 상원의 비밀문서에서 1905년 10월17일자로 된 “정부 법령집”의 교정지 전체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발표문이 들어 있었다.

 

“우리 대 제국의 수도와 지방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요와 폭동이 나의 가슴을 고통스런 슬픔으로 채우고 있다. 러시아 황제의 행복은 국민들의 행복과 불가분으로 결합돼 있으며, 국민들의 고통이 나를 비통하게 하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소동은 주민들 사이에 극심한 무질서를 야기할지 모르며 국가의 단결과 보전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국민들 사이에 양심을 지키는 기풍을 조성하여 국가 최고의 번영을 위해 모든 계층의 국민들을 철저하게 결합시키고 단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 제국의 황위를 포기하고 거만한 권력을 내려놓기로 결정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지기를 원치 않은 우리는 나의 동생 미하일 아렉산드로비치에게 후계자리를 넘겨주었으며 우리는 그의 러시아의 황위 등극을 축복하고 있다.”

 

이 문장 뒤에 니콜라이 로마노프의 서명이 있고 그 맞은 편에 궁내부장관 프레데릭스의 서명이 있다. 일자와 장소는 1905년 10월16일, 노비 페테로호프로 되어 있다.

 

이 발표문 밑에는 붉은 연필로 “‘인쇄중지’ 발행국장 호프미스터 케드린스키”라고 쓰여 있다. 1905년에 상원 발행국장이었던 호프미스터 A.A. 케드린스키는 그 발표문의 인쇄를 늦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세한 얘기를 하고 있다.

 

“10월16일 저녁 8시에 나는 밀사로부터 프레데릭스 궁내부장관이 보낸 소포 하나를 받았다. 그 소포 속에서 나는 위에 언급된 발표문과, 나에게 다음 호 법령집에 이 발표문을 인쇄해 넣도록 요구하는 궁내부장관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발표문의 접수가 법무장관을 통한 정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발표문을 인쇄 담당자에게 보내 인쇄를 준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셔체글로비토프 법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서류의 접수를 통보했다. 처음에 법무장관은 오직 인쇄 연기를 지시했지만, 밤 11시에 나는 셔체글로비토프의 특별 위임을 받은 한 공무원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그 발표문의 원본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으며, 교정지를 상원 문서국에 보내라는 법무장관의 명령을 전달했다.”

 

 

[슬로터의] 노트

 

상기 원고는 에카테린부르그 주재 미국 영사가 그 곳 수도원에서 확보한 것이다. 그 수도원은 파르팬 이바노비치가 짜르의 시종직에서 물러난 후 며칠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 후 그는 다시 돌아와 이곳에서 몇 주간을 머물렀다. 이 수도원에는 또한 짜르가 유폐된 집에 날마다 우유를 배달했던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7월17일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 외엔 어떤 중요성이 있을 만한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실가족 누구와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결국 짜르와 그 가족의 마지막 결말 혹은 처분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내가 본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의 일부분이다. 그밖에 모든 것은 소문이고 풍문이다. 시체들, 황실가족의 5구의 시체들[황후의 여동생이며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대공비, 콘스탄틴 대공의 세 아들과 폴 대공의 한 아들]이 알로파이베스크에 있는 한 우물에서 11월 하순경에 발견되었으며, 엘레나 페트로브나 대공비는 그 때 페름에서 병으로 입원하고 있었다.

[호머 슬로터 소령의 서명]

미 육군 보병 소령

1918년 12월12일, 에카테린부르그.

 

미국 원정군 사령부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1919년 3월29일 기록

 

[전시내각 인(印) - 육군참모총장실 - MIL.INTEL.DIV. 일부인(日附印) - 1921년 3월22일]

 

파르팬 돔닌 서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애를 먹이고 있다. 첫째, 그 문서의 논조와 문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문서는 처음에 연민의 정으로 시작하더니, 볼셰비키 회합에서 악담한 것을 인용할 때는 귀에 거슬리는 혁명적인 레토릭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슬로터가 그 보고서를 계속 써 내려간 것 같다. 그가, 파르팬 돔닌의 설명에 분명히 아무 것도 보탬이 되지 않았던 그 수녀에게 질문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 그러하다.

 

슬로터가 12월에 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일주일 뒤 파르팬 돔닌 스토리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에커먼의 신문기사가 나온 후에, 파르팬 돔닌이란 이름 자체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짜르 측근들과 친했던 사람들은 재빨리 파르팬 돔닌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니콜라스 2세를 곁에서 섬긴 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진실일 수도 있지만, 그 무렵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볼셰비키 적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특수목적의 집(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관한 기록에는, 에카테린부르그 유폐기간에 체렌티 이바노비치 체모두로프라는 오직 한 사람의 남자시종과 트루프라는 (제복을 입은) 종복이 있었는데, 그들은 황실가족과 함께 총살당한 것으로 주장돼 왔다. 황후는 5월24일자 그녀의 일기에서 체모두로프가 발가벗겨 조사를 받고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기록했다.26)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 후의 경비병들의 기록에는 아직도 그가 그 집 거주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27) 그가 그 집에 있었다면, 짜르구출하기란 책은 또 하나의 진실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돔닌이 문제의 그 밤에 거기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7월 16/17일 밤이 지난 후 신경과민이 된 그 늙은 시종은 코빌린스키 대령(그는 황실가족이 짜르스코에 셀로와 토볼스크에서 유폐돼 있을 때 관리책임자로 있었다)에게 황실가족은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가엾게도 체모두로프 자신은 그 사건이 보도된 지 겨우 몇 달 후에 죽었다. 섬머즈와 맹골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파르팬이 체모두로프의 가명일 것으로 믿고 있다.28)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그런 이야기에 늘 따라다니고 있었으며, 왜 그가 그 이야기를 적어 수도원에 넘겼을까? 그리고 그 수녀는 어디에서 그것을 미국총영사인 팔머에게 주어, 팔머가 다시 그것을 슬로터에게 넘기게 했을까?

 

파르팬 돔닌 스토리를 쓴 사람이 누구이든, 그는 파르팬 돔닌이 이반 수세닌의 후예였으며 코스트로마 정부 관할지역의 돔닌 마을 주민이었다는 것을 은연중 나타내면서 그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려고 한 것 같다. 몇 백년 전 이반 수세닌은 폴란드의 침입으로 죽음의 위기에 몰린 니콜라스의 선조(제 1대 로마노프)를 코스트로마에 있는 이파티에브스키 수도원에 숨겨두고 그가 죽었다고 발표함으로써 그의 목숨을 구하고는, 그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 줄어들었을 때 그를 대중 앞에 다시 내세웠던 것이다. 수세닌의 다른 후예들이 알렉산더 2세를 암살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냈을 뿐 아니라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29)

 

니콜라스 시종의 조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실제로 그 유명한 농민영웅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만약 이런 사소한 일에 더 깊은 의미를 붙이려 했던 것이 아니고 전혀 우연의 일치였다면, 그것은 분명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런 아이러니가 없었다면, 그 메시지가 미국 전시내각에 전달되고, 전시내각 맴버들이 “이반 수세닌” 이야기에 특별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른 연합국들에게 그 정보를 전달하는, 그런 현명한 방법을 택했을까? 그리고 뉴욕타임스에 파르팬 돔닌 스토리의 축소판을 게재한 에커먼은 어떻게 그 정보에 접근했을까?

 

사실, 에커먼은 1918년 가을 그가 시베리아에 도착했을 때부터 슬로터 대령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때때로 미 국무부를 위해 정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전 몇 년간 그는 아래 전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뉴욕타임스와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포함한 여러 신문들의 엄호 아래 활동하고 있었다.

 

 

"그린 암호“

1917년 8월14(18)일

베른 미국 공사관

국무부는 귀 영사관에 잘 알려져 있는 칼 W.에커먼을 베른에 파견하여 미국 선전업무에 귀 공사관과 협조하고 독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겨볼까 고려중임. 그는 독일에 정보소스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귀 공사관에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임. 그는 표면적으로는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특파원으로 가게 될 것이지만, 귀 공사관과 밀접하게 협조하는 업무를 하게 될 것임. 이 조치가 타당한지 귀측의 견해를 전보로 통보 바람.

 

국무장관 랜싱 (서명)31)

 

과거에 에커먼은 종종 국무부를 위해 일했을 뿐 아니라 국무부에서 봉급을 받고 있었다. 뉴욕타임스 기사가 나간 후 바로 1월에 그는 일본주재 국무부 사무실을 통해 1천500 달러를 지급 받았는데, 서류 자체에는 연필로 “특별 대리인”이라고 쓰여 있었다.32) 슬로터와 에커먼 같은 책임감 있고 영리한 사람들이 왜 7월15일 밤(비록 세계 다른 나라에선 16/17일인 것으로 믿고 있지만)에 대한 돔닌 서류를 군 정보파일에 꽂히게,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신문 중 하나에 게재되게 넘겼을까?

 

슬로터가 이 소문난 수세닌의 후예에 대한 레토릭으로 완성된 서류를 받은 후 곧 그것을 미국 원정군 사령관인 그레이브스 장군 본영에 전달했다. 그날은, “가족” 일곱 번이라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전보를 그레이브스가 국무부에 보내며 파리와 런던에도 통보하라고 요청했던 1918년 12월29일 후 며칠 지나서였다. 아직도 더욱 이상한 것은, 슬로터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그 보고서를 1918년 12월12일자로 작성했으나, 그것이 1919년 3월29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본부에 도착했다는 공식적인 일부인이 찍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칼 에커먼이 12월 말경에 본부로 되돌아갔는데도 그러했다.

우리는 단지, 미국 의회가 호머 슬로터로부터 온, 러시아에 관련된 모든 서류들을 요청했기 때문에 파르팬 돔닌 서류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돔닌 스토리는 1921년 3월22일자로 전시내각, 총참모장실, 군 정보대에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 슬로터가 그의 모든 기록들을 의회에 넘기기 전에, 황실가족의 생존 - 파르팬 돔닌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찬 -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짜르구출하기란 책이 미국에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 때 파르팬은 그가 에커먼과 슬로터의 보고서에서와 같은 중심적인 역할이 아니고, 단지 간략하게 소개된다. 이 이상한 책의 증보판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1918년이 저물 때까지는 짜르와 그의 가족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반대중의 관점에서는 불분명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전쟁과 그 여파로 그 사건에 관한 모든 것이 신문에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카테린부르그는 그 도시에 대한 정보활동과 군사적 진공이 쌍방향정책의 일부로서 연합국 전략의 중심에 있었던 1918년 7월에 격렬한 공작의 무대였다.

 

제10장 첫 조사

 

황실가족 생존의 한 가닥 희망

 

파르팬 돔닌 보고는 에카테린부르그에서 1918년 7월17일 밤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견해와 상충하는 시나리오를 기록한 유일한 이설(異說)은 아니었다. 황실가족의 생사에 대해 상호 모순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볼셰비키들이 에카테린부르그를 탈출한 날부터 유포됐다. 체코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그 운명적인 밤이 지난 후 꼭 1주일 만인 7월25일에 그 도시가 점령되었을 때, 그 곳의 수많은 백군 장교들은 황실가족이 살해됐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무도 단순히 살해조사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노프 가족들이 실종됐고 - 그리고 그들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지만, 일련의 조사관들은 또한 그들이 도주했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증거도 조금씩 축적하고 있었다.

 

그 사건을 다룬 첫 조사관들은 그 신분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항상 비판을 받았으며 일부 경우에는 불가사의하게 실종돼버렸다. 처형소문이 나고 그리고 볼셰비키들이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퇴각한지 며칠 안에, 짜르 니콜라이 2세와 가까웠고 차알스 크레인과도 절친한 친구였던 갈리친 공이 현지 사령관인 리자-쿨리-미르자 공에게 로마노프 식구들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장교위원회를 구성토록 지시했다. 육군범죄수사대는 별도의 조사를 시작했다. 군부 역시 현지 사법부가 자체의 조사팀을 제공하도록 요구했다. 검찰관이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대리인이 1918년 7월30일, 알렉산더 나메트킨을 특수업무사법검시관으로 임명하여 조사를 시작하게 했다. 나메트킨과 다른 조사관들이 직면한 상황은 적절한 조사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소문들이 에케테린부르그에서 난무했으며, 믿을만한 목격자도 없었다. 내전으로 인해 이 어려운 시기에는 삶 자체가 생존투쟁이었다.

 

최초의 증언자들 중 한 사람은 피돌 니키틴 고르셔코프였다.1) 고르셔코프는 황실가족 전체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죽었다고 주장했다. 섬머즈와 맹골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고르셔코프는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증언은 검찰청에 의해 “예비조사를 위한 기초”로 나메트킨 조사관에게 제공됐다.2) 고르셔코프 스토리는 전적으로 풍문에 불과하지만, 불행히도 이 제일 첫 해석이 수년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살아 남게 되었다. 고르셔코프는 누구였으며 어떻게 그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그 끔찍했던 밤에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피돌 고르셔코프는, 어떤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게 됐는데, 그 아는 사람은 경비병 중의 한 사람인 아나톨 야키모프의 누이한테서 들은 것이고, 그 누이는 자기의 오빠인 야키모프 본인한테서 들은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고르셔코프가 갖고 있는 정보는 네 사람의 입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야키모프의 증언에 둔 무게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현장에서 목격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31세의 선반공인 야키모프는 그 날 밤에 단지 경비를 선 후 잠자리에 들었을 뿐이었다. 분명히 옥외의 “경비병 대장”이었다는 야키모프는, 그날 새벽 4시에 일어났는데, 다른 경비병들인 이반 클레스체프와 니키타 데리아빈이 그에게 황실가족총살을 목격했다는 말을 해줬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은 파벨 메드베데프와 콘스탄틴 도브리닌이 그들에게 총살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한 후에 그것을 목격하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이다.3) 확실히 이 첫 증언은 크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르셔코프도 야키모프도 죽음 그 자체를 목격한 것이 아니라, 학살자들을 목격한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것을 전달한 데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8월 2일부터 14일까지, 처음에는 나메트킨이 그리고 다음에는 이반 세르게예프가 그 집을 조사하고 수색하여 2층 각 방의 물품 재고목록을 꼼꼼하게 작성했다. 나메트킨은 말리노브스키 대위(나메트킨의 호위대장), 짜르의 시종 테렌티 체모두로프(그가 정말로 파르팬 돔닌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짜르의 혈우병 환자 아들인 알렉세이를 돌보던 내과의사였던 블라디미르 데레벤코 박사를 대동했다.

 

독자들은, 체코군이 에카테린부르그를 장악하여 세레메테브스키 중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한 인물이 불가사의하게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는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에카테린부르그 함락 며칠 후 백군과 체코군 장교들에게 전입신고를 하는 자리에서 세레메테브스키는, 그가 농부로 가장하여 콥티아키 인근 마을에 숨어 있었는데, 7월17일 아침 에카테린부르그 쪽으로 가고 있는 일부 마을 사람들이 그 마을 근방에서 볼셰비키들에 의해 쫓겨났다고 말했다. 후에 이들 마을 사람들은 세레메테브스키와 함께 볼셰비키들이 있었던, 간닌 핏트 마을로 알려진 현장으로 돌아왔다. 도굴꾼들이 이미 그 곳을 다녀간 후였다. 거기서 그들은 불에 탄 옷가지와 보석을 발견했으며, 그 일부를 중위가 수집하여 에카테린부르그로 가져왔던 것이다. 세레메테브스키는 네메트킨 등을 현장으로 안내했다. 불에 타다 남은 옷 조각들과 보석 외에 조사관들이 그곳에서 발견한 품목들 모두가 황실가족의 소유물들인 것으로 시종과 의사에 의해 즉시 확인되었다.

 

세레메테브스키는 곧 종적을 감췄다. 그가 무대에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질 때도 신속하고 수수께끼 같았다. 그는 신분이 분명하게 확인된 적이 없으며, 그가 백군 장교로 확인된 적도 없었다. 여러 작가들은 그를 단지 “불가사의한 세레메테프스키”로 그려왔다. 하지만 내가 조사한 바로는 세레메테브스키라는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다른 곳에서 나오고 있다. 즉 황후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며 토볼스크에서 황실가족과 함께 지냈던 북소에베덴 남작부인이 쓴 한 책에서, 그녀는 옛 성이 세레메테프인 마담 덴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여자는 남작부인의 소개에 의하면 “황제의 먼 친척”이며 황후의 가장 가깝고 가장 충성스런 친구들 중의 하나였다.5) 마담 덴의 남편인 D.V. 덴 대위는 짜르의 부관이었던 같다. 아내의 성을 가명으로 빌려쓰고 있는 덴 대위가 실제로, 조사관들을 “살해”의 증거가 있는 현장으로 최초로 인도했던 불가사의한 백군 장교 "세레메테프스키“였는 지는 불분명하다. 우리는 릴리 덴이, 황후의 다른 측근자인 안나 비루보바와, 야로신스키의 보좌관이며 짜르 퇴위 직전6) 황후의 메시지들을 짜르에게 전달하곤 했던 사람인 보리스 솔로비에프와 함께 1918년 봄 내지 여름에 탈출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그리고 거기에 참여키로 했다는 흔적을 보았다. 솔로비에프를 우두머리로 한 토볼스크의 ‘성요한단(團)’은, 그들이 금융사업계획의 야로신스키와 함께 일하고 있는 황제가족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포함한 여러 그룹들에게 자금은 물론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때, 거꾸로 된 티베트어 만(卍)자를 그들의 비밀스런 표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세레메테브스키란 이름은 세레메테프란 이름과 약간 다르긴 하지만, 견디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이름 끝에 “스키”라는 말을 붙여 약간 변형시키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1918년 여름에 시드니 레일리가 렐린스키라는 가명의 볼셰비키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미스테리에 가득 찬 세레메테브스키가 제일 먼저 로마노프 유골을 지적해 줬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 이상으로 보이며, 혹은 만약 그가 실제로 짜르의 친척인 세레메테프였다면 그것은 지극히 손쉬운 일인 것이다. 실마리를 찾지 못해 결국 사라져버렸을지도 몰랐던 그 유골들이 짜르의 충성스런 신하들에 의해 즉시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일부 관계자들이 로마노프 학살사건에 대해 자기들의 견해를 고취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상급 경비병이었던 이반 스타르코프는 그의 경비병 동료들인 필립 프로스쿠르야코프와 파벨 메드베데프의 아내에게 황실가족이 “이송됐다”고 말했다. 몇몇 사람들은 스타르코프가 황실가족 실종 후 곧 이파티에프 하우스 특별임무 책임자인 유로브스키의 방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거기서 그는 우랄관구 군사담당 인민위원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최고회의 간부회의 회원이며, 황실가족을 토볼스크에서 “어느 곳이든지” 데려가려던 야코블레프의 계획에 관여했던 사람인 차야(필리프) 골로스체킨과, 그리고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인 알렉산더 벨로보로도프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높은 사람들과 동석한 것으로 보아, 스타르코프가 진실에 대한 열쇠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가 “전선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통해 진실을 알 방법이 없게 되었다.7)

 

어쨌든, 군부의 조사는 어떤 최종보고서도 없이 끝나버렸다. 장교위원회 위원이며 맨 처음 황실가족의 실종을 조사했던 말리노브스키 대위는 나중에 황실가족이 살아있다고 설명하며 확신을 내보였다. 짜르에 관한 파일에서 섬머즈와 맹골드가 인용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무대에 최초로 뛰어든 사람인 말리노브스키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다루면서 나는 황실가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볼셰비키들은, 황실가족의 살해를 가장하기 위하여 그날 밤에 다른 누군가를 쏘고는, 가족들을 콥티아키 가도를 통하여 다른 장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역시 살해를 가장할 목적으로 그들에게 농부의 옷을 입히고 그들의 옷은 불태웠다. 이것이 내가 관찰하고 생각을 정리한 결과 얻은 느낌이다. 나는 독일 황실이 결코 그러한 죄악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된 이유이고, 그리고 또한 조사를 하는 중에 내가 관찰한 증거들이 모두 살해를 가장하기 위한 것들로 보였다.<일부 이상한 이유로, 소콜로프의 보고서에서 발견된 이 증언은 말리노브스키 본인이 쓴 보고서에선 삭제돼 있었다>] [앞의 꺾쇠괄호 속의 언급은 섬머즈와 맹골드의 것임].8)

 

1918년 9월에 증언대에 선 옴스크 열차 차장이었던 알렉산더 사모일로프는 이렇게 증언했다. 즉 이파티에프 하우스 경비병이며 에카테린부르그 붉은군대 중앙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노동자이기도 했던 그의 친구 알렉산더 바라쿠세프가 그에게, 필리프 골로스체킨이 황실가족이 죽었다는 얘기를 퍼뜨리고 있지만 사실은 짜르와 그의 아내 및 가족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후 바라쿠세프는 볼셰비키 인민위원인 세르게이 므라차코브스키에 의해 심한 질책을 받았다. 므라차코브스키는 그에게 “그 문제에 대해 입만 벙긋해도 엄중히 문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섬머즈와 맹골드는, 바라쿠세프가, 중앙참모부에서의 그의 위치로 보아 근거가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충실한 경비병이었으며 그의 이름이 직원명단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9)

 

마침내 에카테린부르그에 귀임한 국가검찰관 알렉산더 쿠투조프는 이 사건이 치안판사 시보가 맡기에는 너무나 중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나메트킨은 해임되었는데, 그는 사건기록은 남겨두었지만 로마노프의 운명에 대한 그 자신의 의견기록은 갖고 가버렸다. 그는 훗날 실종됐으며, 소문에 의하면 그 사건을 조사했기 때문에 볼셰비키들에 의해 사살됐다고 한다. 쿠투조프는 마침내 이반 세르게예프를 판사로 임명했다. 그는 8월7일에 조사업무를 인계 받았다.

 

대부분의 중요한 법정 수속들은 세르게예프의 재판권 아래서 이루어졌다. 그는 나메트킨이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았던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아래층을 조사하여 그 집에 대한 나메트킨의 작업을 완료했다. 특히 방 하나가 틀림없는 폭력의 흔적을 보여주었으며, 그것이 세르게예프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끌었다. 그는 이 방 하나를 분석하는 데만 5일을 소비했다. 27개의 총탄 구멍이 있었고 일부 구멍은 물론 바닥에도 사람의 피 흔적이 있었다. 세르게예프는 누가 그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타올로 북북 문질러 제거하려했다는 것을 분명히 감지했다. 결국 판사는 아마도 짜르와 그의 수행원 일부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살해됐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지만, 황후, 황태자 혹은 공주들이 함께 사살됐다고는 믿지 않았다.10)

 

세르게예프의 의심은 이해할 수 있다. 대규모 처형은 가로 세로 14x17 피트인 방의 크기로 보아 있음직 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 24명이나 되는 사람들(어떤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11 내지 12명의 희생자들과 11 내지 12명의 학살자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공간인 것이다. 공식적인 보고내용(전 가족이 이 방에서 학살됐다는 내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총살형집행대가 출입구에서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라며 이 비좁은 공간의 한계논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출입구의 이중문은 넓이가 단지 5피트였으며, 비록 일부 사람들은 총잡이들이 세 줄로 앉고 서서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12명이 그렇게 좁은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와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게 될 터이지만, 수비대 대장인 유로브스키도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방에 있었다. 그 방에 있으면서 그가 어떻게 출입구로부터 빗발치는 탄환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탄환구멍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이상한 일이 있다. 세르게예프는 27개를 헤아렸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수치는 그 뒤 그의 후임이었던 니콜라스 소콜로프에 의한 계산이었다. 1918년 10월5일,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던 영국 조사관인 차알스 엘리오트경은 세르게예프가 17개의 탄환구명을 발견했다는 말을 했다고 썼다(그리고 그는,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죽음 아니면 탈출이라는 두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7월 말 체코군과 백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 방에 들어가 봤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증인은 단지 3개의 구명만 보았다고 말했다. 솔로코프는 결국 탄환구명을 총 30개로 기록하게 되었다. 세르게예프가 그 방을 조사한 것을 감안한다면, 현재로선 1918년 7월과, 소콜로프의 조사가 시작되었던 1919년 겨울 사이에 추가 총탄이 그 벽에 발사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총탄 구멍들의 위치가 또 다른 몇 가지 의문들을 제기한다. 유로브스키는 희생자들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도록 명령했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총탄은 바닥으로부터 2피트 높이 이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총살형집행대가 가장 키가 작은 회생자라 할지라도 넓적다리보다 더 높지 않은 곳에 겨냥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모든 희생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것으로 쉽게 설명돼 왔다. 여성 희생자들을 기준으로 잡고, 그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가슴의 높이는 대략 3 내지 3.5 피트가 될 것이다. 유로브스키는 총탄이 “빗발치듯 온 방안에 튀겨 날았다”고 주장했다.11) 사람들은, 비록 희생자들이 즉시 몸을 홱 구부리거나 쓰러졌다고 할지라도, 총격이 한 벽면의 밑 쪽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온 방안을 향해 콩볶듯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탄(?彈)사격의 폭풍에서 경비병들 중 어느 누구도 중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인 것이다.

 

전 소련 문서들로부터 나온 대부분의 설명은 집행대가 미친 듯이 총탄을 퍼부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 장면에 대한 인상은 광란의 총탄소비였다. 유로브스키는 훗날 이렇게 썼다. “콜트와 모젤에 장착된 탄창에 남아 있는 탄알들은 니콜라스의 딸들을 죽이고 그리고 후계자(알렉세이)의 이상한 생명력을 끊어버리기 위해 사용되었다.”12)

 

유로브스키가 갖고 있던 총에 대해서도 몇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일고 있다.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의 최후의 짜르라는 책에 의하면, 유로브스키는 짜르를 죽이는 데 콜트45구경 권총을 사용했다. 그 총의 일련 번호는 71905였다. 그 무기를 추적하면서 나는 콜트 회사 역사가인 캐서린 홀트로부터 추가 정보를 얻었다. 만약 일련번호 71905 다음에 문자가 이어져 있다면, 그 총은 아마도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로 인도된 콜트 권총들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련 번호 뒤에 문자가 없다면 유로브스키가 갖고있던 총의 역사는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콜트 회사의 자료들은 총 모델 1911 일련번호 71905(맨 끝에 어떤 문자도 붙어있지 않고)는 1914년에 제작되었으며 미국정부에 납품된 것이다. 그것은 1914년 4월30일에 켄터키주 포르트 토마스의 포병장교들에게 지급된 150정 중 하나였다. 45구경은 장교, 헌병 및 조종사들에게만 지급됐다.13)

 

그래서 이 자칭 학살주도자는 적어도 라드진스키가 제시한 일련번호에 따른다면 미국 육군에 지급한 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918년 7월에 러시아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적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그로부터 6개월 후에 결국 윌리엄 그레이브스 장군 지휘하래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했다. 만약 라드진스키가 인용하고 있는 일련번호가 정확한 것이라면, 어떻게 켄터키에 있어야 할 콜트 45구경이 유로브스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비록 세르게예프가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조사관들은 버려진 광산까지 뒤지면서 조사를 벌였다. 물이 광갱(鑛坑)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광산 전체를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결과는 실망스런 것이었다. 특히 황실가족과 그 종복들의 시체가 그런 장소에서 처치된 것으로 사건을 만들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그러했다. 결국 유일하게 사람의 흔적으로 발견된 것은 하나의 손가락 끝마디와 두개의 피부조각 그리고 위쪽 틀니 한 세트였다.

 

1918년 11월 초순경에 독일제국이 무너졌다. 그러나 유럽전쟁이 서서히 끝나면서 러시아에서의 혼란은 더욱 가열되었다. 휴전과 거의 동시에 백계 러시아 지도부 사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알레산더 콜차크 해군제독이 옴스크에서 권좌에 올랐다. 그는 유럽 휴전 후 1주일만인 11월18일에 재빨리 전 러시아 최고통치자라고 선언했다. 콜차크 통치하에서 에카테린부르그의 조사는 큰 변화를 보였다. 연합국과 콜차크가 그 조사이면에서 사용하려고 했던 전략이 무엇이었던 간에 제 3장에서 이야기했던 입헌군주제로의 복귀에 대한 영사 해리스의 평가보고서가 그 보다 한 달 전에 바로 옴스크에서 (미국에) 보내졌던 것이다.

 

콜차크 제독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콜차크 수뇌부의 일원인 미하일 디테리크스 장군은 세르게예프 판사에게 지시를 내려 그간 발견된 황실가족에 대한 조사결과 일체를 증거물들과 함께 자기에게 넘기도록 했다. 1919년 1월23일 판사는 그 사건에 대한 자료 및 증거물들과 그가 갖고 있는 조사권한을 콜차크가 본부를 차려놓은 시베리아 옴스크의 디테리크스 장군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전임자였던 나메트킨처럼 세르게예프 판사도 황실가족이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죽었다는 명확한 의견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1919년 1월 경 학살 얘기가 갑자기 이곳 저곳에서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황실가족이 1918년 7월17일 밤에 진짜로 학살됐다는 확신을 갖게 하고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디테리크스 장군은 충성스런 조사관이 필요했다. 1919년 1월23일 그는 니콜라스 소콜로프를 조사관으로 임명했다. 이제 ‘중대사건 담당 특별조사관’인 소콜로프가 해야할 일은, 황실가족이 볼셰비키의 손에서 죽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증명하게 될 법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비록 소콜로프가 크게 숨겨져 있었던 자질은 없었지만, 그는 어쨌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목적을 달성했다. 소콜로프로 대체된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세르게예프가 그의 전임자인 나메트킨처럼 사라져버렸다. 디테리크스 장군은 세르게예프가 그 뒤 “볼셰비크들에 의해” 처형됐다고 말했다. 분명히 세르게예프는 로마노프 미스테리를 담당한 여러 조사관들에게 일어난 다소 이상한 종말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

 

제11장 죽음의 사자들

 

조작과 혼미

 

1918년 12월, 황실가족 전원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직 결론으로 채택되진 않았지만, 급속히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說)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설의 학살스토리가 볼셰비키들과 그리고 미 국무부 정보요원인 칼 에커먼에 의해 조장되고 있었다. 이들은 시종이었던 파르팬 돔닌이 말한 짜르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정설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들은 황실가족의 죽음을 필요로 했다. 그들 편에 선 대다수 하사관과 사병들이, 만약 짜르가 살아있다면 그가 모든 군주주의자들의 활력 회복점이 될 것이며, 공산당에 의한 러시아 장악을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만약 백군과 연합군이 황실가족의 죽음을 증명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볼셰비키들이 진실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그리고 그 사건이 결국 적색테러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오전(誤傳)무대의 뒤에는 게오르그 러보프 공이 있었다. 짜르가 퇴위한 후에 정권을 장악하고 임시정부의 총리가 된 사람이 러보프였다. 하지만 볼셰비키들은 그로부터 채 9개월도 되기 전인 1917년 10월에 임시정부를 무너뜨렸다. 널리 유포돼 있는 믿음들과는 반대로 임시정부가 그렇게 간단하게 사라져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임시정부 일부 각료들은 북경에 망명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거기서 그들은 일본군이 불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침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소문에 의하면, 러보프와 그의 전 정권 각료들은 시베리아로부터 볼셰비키들을 몰아내기 위해 아타만 세메노프의 코사크군 및 일본군과 연계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1)

 

1918년 10월 일본에 머물고 있었던 러보프는 윌슨 대통령에게 그가 미국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가 남기고 있는 분명한 인상은 그의 미국입국에 대한 주선이 이미 이루어졌지만 약간 지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편지는 차알스 크레인의 아들인 리차드 크레인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리차드는 미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의 보좌관으로 국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랜싱은 에커먼을 미 국무부 정보원으로 확인하는 전보에 서명한 사람이다. 윌슨에게 보낸 러보프의 편지는 1918년 2월말에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볼셰비키들에 의해 자신이 구금돼 있었던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도망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바로 가지 못하고 5주 동안을 숨어 다녔다고 언급하고 있다. 러보프는 훗날 러시아의 영국 파견군 사령관인 녹스 장군에게 황제가족이 그가 에카테린부르그에 구금돼 있었던 바로 그 다음 감방에서 살해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10월에 윌슨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는 황실가족에 대해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러보프가 밝힌 사건의 연대순 배열이다. 그것에 따르면 그는 7월 중순에 에카테린부르그 교도소에 있지 않았던 것이 된다. 2월말부터 시작하여 교도소에서 3개월,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있었던 5주를 빼면, 7월 초순경에는 그가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된다.

 

더욱이 비자 절차를 감안하면, 러보프가 황실가족이 살해되었을 때 에카테린부르그에 있었다고 윌슨 대통령에게 잘 못 얘기했거나, 그게 아니면 그가 그의 이동에 대해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윌슨에게 보낸 그 편지는 또한 이 지연이 “정규절차의 준수 때문인지” 혹은 “문제의 본질”에 있는 것인지 답해 달라는 이상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미국)비자의 지연에 대해 몹시 안달하고 있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2) 그가 황실가족의 살해에 대해 12월말 프랑스에서 했던 언급에 비춰보면,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가 지금 해야할 역할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는 일찍이 그가 페트로그라드에 있었을 때는 황실가족을 물리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면서 지금 와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러보프는 차알스 크레인의 측근 역할을 이따금씩 하곤 했던 사무엘 하퍼를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러보프는 차알스 크레인이 주선했던 윌슨 대통령과의 회합에 참석했다. 러보프는 워싱턴에서 런던으로 여행했으며, 거기서 러시아 변호사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만났다. 나보코프는 짜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을 위해 황제 퇴위사(辭)를 썼던 사람인데, 그 퇴위사는 짜르와 그의 아들 알렉세이가 미하일 대공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퇴위한 지 단지 수 시간만에 작성된 것이다.3)

 

뉴욕타임스가 파르팬 돔닌을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킨 에커먼의 기사를 게재한지 1주일이 채 안된 1918년 12월29일에 러보프는 파리에 있었다. 그 무렵 파리에서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협의하기 위한 전체 연합국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거기서 러보프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즉 그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황실가족 전원이 처형되는 것을 몸소 목격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무렵 윌슨 대통령이 조지왕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가족 일곱 번”이라는 전보가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에 접수되었으며 파리로 보내졌다. 프랑스 외무장관인 스떼팡 삐쫑이 그 전보를 내밀히 통고 받았는지 어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삐쫑은 1918년 12월29일 프랑스 하원에 통고할 때 로마노프 일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

 

러보프 공은 황실가족이 있었던 방의 옆방에 있었습니다......그들은 황실가족을 모두 한 방으로 몰아 넣어 한 줄로 앉아있게 했습니다. 가족들은 이튿날 새벽 연발권총으로 차례로 사살될 때까지 그들에게 겨누고 있는 총검 아래서 꼬박 밤을 보냈습니다. 황제, 황후, 공주들, 황태자, 황후의 여자친구 겸 시녀, 그리고 황실가족과 함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러보프 공이 내게 얘기해 준 바에 따르면 그 방은 문자 그대로 피바다였습니다.4)

 

러보프는 이 상세한 설명을 그가 10월에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포함시키는 것을 그냥 단순하게 잊어버렸던 것일까? 1918년 말 내내 수많은 조사관들이 그토록 찾으려고 애썼던 중요한 한가지 의문에 대한 회답을 그 혼자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일까? 처음에 황실가족의 영국망명을 주선하는 책임을 맡았던 러보프가 지금은 그들의 사망소식을 세계에 유포시키는 과업을 위임받은 것처럼 보였다.

 

러보프 스토리가 각 신문에 폭로되면서 그가 엉뚱한 거짓말을 조장하고 있음이 곧 분명해졌다. 그는 이파티에프 하우스가 아니라 에카테린부르그 시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는 물론 “지하감방”도 없었다.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10월의 편지에서 그가 스스로 밝힌 사건의 연대순 배열 - 그는 황실가족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날짜로부터 5주전에 그가 에카테린부르그를 떠났다고 주장했다 - 을 보고, 나는, 황실가족이 에카테린부르그에 구금돼 있는 동안 러보프가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심지어 눈 한번 마주 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보프는,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판사에게 자신이 정보를 제공한 것이라며 그가 당초 주장한 이야기를 보강하려고 애를 썼다. 러보프에 따르면, 조사관이 그에게 “황실가족이 학살되었을 가능성이 100분의 99”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 세르게예프가 아직 조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가 황실가족이 죽었다는 단호한 의견을 개진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학살 이야기들은 눈덩이처럼 계속 굴러가며 몸체를 늘렸다. 곧 다른 유명한 러시아인들이 합창을 시작했다. 톨스토이 백작 내외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다. 예를 들면 A.A. 톨스토이 백작은, 황실가족 전원이 불과 황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1919년 1월말 자신 있게 발표했다.5) 이것은 더욱 이상한 얘기다. 소콜로프 조사관이 몇 개월 후 까지도 그런 결론에 도달한 적이 없었고 그의 견해는 몇 년 후까지도 공개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9년 봄, 전 프랑스 의회의원이며 에카테린부르그 주둔 프랑스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조셉 라시이는 백군의 보고슬로브스키 장군과 함께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문서에 따르면 보고슬로브스키는, 에커먼의 동료이며 파르팬 돔닌 서류의 배달인이었던 호머 슬로터 소령6)이 대단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보고슬로브스키는 체코군의 가디아 장군 참모장으로 있었다. 가디아 체코군 장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공격하고 잇달아 탈취하는 데 앞장섰으며, 지금은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본부를 차려놓고 있었다. 글라조프에서 페름으로 가는 기차 여행 중에 라시이 사령관은 보고슬로브스키 장군이 그에게 황실가족이 살해되지 않았다는 비밀을 털어놓자 아연해 했다. 훗날 그의 책 시베리아의 비극(La Tragedie Siberienne)에서 라시이는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했다. 게다가 라시이는 그가 한 일본인 장교를 만났던 일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그 일본인 장교가 에카테린부르그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7)

 

1919년 5월에 라시이는 에카테린부르그 역 대합실에서 더 타임스지 기자인 로버트 윌턴을 우연히 만났다. 윌턴 역시 영국 외무부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그는 러시아 현지의 영국관리들이 소콜로프 조사관 및 여러 백계 러시아 관리들과 지나치게 친밀하고 타협적인 관계를 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대합실에서 라시이는 윌턴과 마주서서 그에게 불과 황산으로 어떻게 황실가족을 죽일 수 있었겠느냐고 하며 억지로 그를 설득시키려 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윌턴은 잠시 답변할 기회를 달라고 했고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라시이 사령관님, 설사 짜르와 황실가족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죽었다고 말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8)

 

“내겐 마치 영국 외교관의 환각제 같이 들리는군요.”9)

 

라고 라시이는 말했다. 윌턴은 분명히 1918년 12월 이른 초순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전후관계를 고려해 보십시오. 아직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던 세르게예프 판사가 백계 러시아군에 의해 그 직무에서 해임되었을 즈음인 1918년 말에, 누군가가 몹시 황제살해 얘기를 퍼뜨리고싶어 했습니다. 러시아 정치꾼임이 분명한 러보프가 유럽에서 황제가족의 최후의 날들에 대해 이상한 이론을 끌어대며 살해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진실을 왜곡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주장에 누가 흥미를 느꼈겠습니까?”

 

결국은, 학살전말서, 즉 황실가족을 학살했던 11명(혹은 12명)의 처형대 대장이었던 학살혐의자 야코브 유로브스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최후의 그리고 가장 저주스런 증거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유로브스키는 그 잔인했던 학살의 모든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가 고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내용은 “유로브스키 수기”에 포함돼 있다.

 

그 수기는 1989년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1920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1918년 7월16/17일 밤 에카테린부르그 사건의 전말을 포함하고 있으며, 유로브스키가 직접 쓴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그 당시 소콜로프와 다른 조사관들은 이용할 수 없었던 이 수기는 시베리아의 한 숲 속에서 유골과 함께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희생자들의 시신 부족과 고백(혹은 범죄에 실질적으로 가담한 사람의 생포까지 포함하여)의 부재가 학살사건을 선명하게 밝히려는 노력을 계속 무위로 만들어 왔으며, 그것이 러보프 공 같은 사람들에 의해 유포돼 온 더욱 황당한 이야기들의 근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로브스키는 로마노프 가족들과 그 가신들의 처형과 매장의 전말에 대한 두 개의 완벽한 이야기를 남겨놓았다. 이들 두개 중 첫째는 1920년 어떤 때로부터 시작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수기이고, 둘째는 1934년 2월1일 에카테린부르그에 노장 볼셰비키들을 모아놓고 그가 행했던 연설 원고이다.(1927년, 그가 에카테린부르그의 그 날 밤에 사용했다고 주장한 2개의 권총을 혁명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써 주었던 간단한 “고지(告知)”도 있었다.). 단순히 “수기”로서 알려져 온 1920년의 서류는 논란의 근원이 되어 왔다.

 

유로브스키에 대한 공식적인 소련시대 역사에서, 심지어 1918년에 우랄 소비에트 요원이었던 파벨 비코프는 현장을 관장했던 같은 소비에트 요원 - 야코프 유로브스키 - 의 설명과는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유로브스키의 수기는 그 당시 몇 명의 사형집행인들이 가담했는지와 같은 일부 핵심적인 요소에서 비코프의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유로브스키 자신의 두 가지 설명을 서로 밀접하게 비교해 볼 때, 역시 상당한 상호모순이 있으며, 이 상호모순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14년여 된 기억의 단순한 착오로서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1920년의 유로브스키 수기10)

 

[1918년] 7월16일, 로마노프 일가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담고있는, 사전 합의된 언어로 적힌 전보 한 통이 페름에서 날아왔다. 처음(5월)에는 니콜라스를 재판에 회부할 작정이었지만, 진격해 오고 있는 백군들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됐다. 16일 저녁 6시, 필리프 골로스체킨이 명령집행을 지시했다. 자정에 시체를 실어가기 위해 자동차 한대가 도착하게 돼 있었다. 6시에 황실가족들과 같이 있던 소년[레오니드 세드니요프]을 그들과 분리시켰는데, 이것이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과 그 가신들을 굉장히 당황하게 했다. 심지어 의사 보트킨이 와서 왜 그 아이를 불러냈느냐고 물었다. 체포됐던 그 소년의 삼촌이 도망을 쳤다가 다시 되돌아 와 조카를 보고싶다고 하기에 부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튿날 그 소년을 그의 출생지(툴라 지방으로 기억된다)로 보냈다. 자정에 오기로 한 트럭이 제 시간에 오지 않고 새벽 1시 반에야 도착했다. 이것이 명령집행을 지연시켰다. 그 때까지 모든 것이 준비돼 있었다. 명령을 집행할, 연발권총을 가진 12명(라트비아인 5명 포함)이 선발됐다. 라트비아인 2명은 소녀들(공주들)의 사살을 거부했다.

 

자동차가 도착했을 때 모두가 자고 있었다. 보트킨이 일어났고 그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깨웠다. (부하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을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옮겨야 한다. 위층에서 일을 벌이다간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깨울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시간 안에 옷을 입었다. 벽이 회반죽 바른 나무로 된 방 하나를 아래층에서 골랐다([탄환이] 튀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방안의 모든 가구들은 치웠다. 경비병들이 다음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사령관이 혼자 몸소 가서 그들을 아래층에 있는 그 방으로 데리고 왔다. 니콜라스가 알렉세이를 두 팔로 안고 옮기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조그마한 베개와 각자 소유의 작은 물건들을 들고 왔다. 빈방으로 들어가면서 알렉산드라 폐도로브나가 물었다.

 

“이런! 의자 하나도 없잖아요? 한 사람도 앉지 말라는 거예요?”

 

사령관은 의자 두개를 가져오도록 했다. 니콜라스는 알렉세이를 의자 하나에 앉히고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가 다른 의자에 앉았다. 사령관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한 줄로 서도록 명령했다.

 

그들이 제자리를 잡았을 때, 사령관은 경비병들을 불렀다. 그들이 들어왔을 때, 사령관은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에게, 유럽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공격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랄[관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그들을 처형키로 판결했다고 통고했다. 니콜라스가 그의 등을 경비병들 쪽으로 보인 체 그의 가족들을 돌아 본 후 마치 정신이 퍼뜩 돌아 온 것처럼 사령관 쪽을 향해 외쳤다. “뭐, 뭐라고 했소?” 사령관은 재빨리 앞서 그가 한 말을 반복하고는, 경비병들에게 사격준비를 명령했다. 경비병들은 사전에 각자 누구를 쏠 것인지를 지시 받고 있었으며, 그리고 피를 많이 흘리는 것을 피하고 그들을 더 빨리 해치우기 위해 각자의 심장을 겨냥토록 명령받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다시 그의 가족들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은 약간 흐트러진 자세로 절규했다. 이 모든 행동들이 몇 초 동안에 일어났다. 그 후 사격이 시작됐다. 사격은 2분에서 3분간 계속됐다. 니콜라스는 사령관의 직접적인 사격표적이 되어 죽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는 그 후 즉시 죽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총 12명이 사살됐다[실제로는 훗날 11명이 사살됐다고 공식적으로 진술됐다]. 11명이란, 니콜라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그들의 네 딸들(타티아나, 올가, 마리아 및 아나스타샤), 의사 보트킨, 시녀 트루프, 요리사 티코미로프[실제로는 카리토노프], 다른 요리사 하나와 그리고 사령관이 그녀의 성을 잊어버린 시녀 한사람[실제로는 알렉산드라의 개인시녀, 안나 데미도바]이었다. 알렉세이, 그의 네 누이들 중 세 사람, 시녀, 그리고 보트킨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받아야 했다. 이것이 사령관을 놀라게 했다. 심장이 과녁이 되었는데도 그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총탄이 어떤 것에 부딪쳐 튀겨 나오고 빗발치듯 온 방안에 튀어 오른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소녀들 중 하나를 총검으로 찔러 숨을 끊어 놓으려 했을 때, 총검이 그녀의 코르세트를 꿰뚫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 때문에 “확인”(맥박점검 등)을 포함한 전 과정을 끝내는데 약 20분이 걸렸다.

 

그 후 그들은 시체들을 옮겨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시체들 위에 두꺼운 담요를 덮어 피가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게 했다. 이 순간 병사들이 귀중품들을 훔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신뢰할만한 병사들을 뽑아 시체들을 지키도록 했지만 절도는 계속됐다(방에서 트럭까지 시체들을 한 구씩 옮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훔친 물건 모두가 처형하겠다는 위협 아래 회수됐다(금시계, 다이아몬드가 박힌 담배 케이스 등등이었다). 사령관은 사형판결을 집행하는 일만 하게 되어 있었다. 시체들을 트럭에 옮기는 등의 작업은 예르마코프[에르마코프](어퍼 이세츠크 공장에서 온 노동자이며 공산당원이고 전 포로출신이었다)동지의 책임이었다. 그는 시체를 싣고 갈 그 트럭을 타고 왔던 것으로 보였으며, 사전 합의된 암호 “굴뚝청소부”를 사용하여 검문을 통과 헸던 것 같았다. 앞서 트럭의 도착 지연으로 처형시간을 늦춰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사령관은 에르마코프의 업무능력을 의심하였고, 그 때문에 그는 모든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기로 작정했다.

 

새벽 3시경에 우리는 에르마코프가 준비해 놓기로 한 장소(어퍼 이세츠크 공장 너머)를 향해 떠났다. 우선 시체들을 일정한 지점까지 트럭으로 옮겨와, 그 이후에는 트럭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말에 실어서 최종지점까지 가기로 작정돼 있었다. 그 장소는 폐광지역이었다. 어퍼 이세츠크 공장을 지나 3마일 조금 더 차를 몰고 간 후에 우리는 한 패거리의 야영하고 있는 사람들 - 약 25명 - 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거나 말이 끄는 소형 짐마차 등에 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에르마코프가 준비해 논 노동자들(소비에트 요원, 집행위원회 요원 등등)이었다. 그들은 먼저 “왜 이들을 산 체로 데려오지 않았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자기들에게 위임돼 있는 것인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체들을 소형 짐마차에 싣기 시작했으나, 그러나 대형마차가 필요했다. 소형마차로서 운반하기가 불편했다. 그들은 즉시 시체들의 주머니를 깨끗하게 쓸어내기 시작했다 - 사살하겠다며 그들을 위협하고 동시에 보초들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 올가 및 아나스타샤(공주)가 어떤 종류의 특수한 코르세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 발견됐다. 시체들의 옷을 벗기기로 - 여기서가 아니고 매장장소에서 - 결정했다. 그러나 시체들을 매장하기로 선택한 그 폐광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점점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 장소를 찾기 위해 말 탄 사람들을 보냈으나 폐광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아무 것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장작업을 할 삽 따위도 없었다. 트럭이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쳐 박히는 바람에 그것을 포기해버렸다. 소형마차에 실린 시체를 담요로 덮은 후 일렬종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약 11마일, 콥티아키 마을에서 1마일 되는 곳에 멈췄다. 이 때가 아침 6시 내지 7시경이었다. 숲 속에서 광산투기꾼들이 파 놓은 약 8피트 깊이의 버려진 광갱(鑛坑)이 발견되었다(거기서 한 때 금이 채굴되었다). 그 광갱은 2피트 높이로 물이 차 있었다. 사령관은 시체들의 옷을 벗겨 모두 태워버리도록 명했다. 말 탄 남자들이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방을 지켰다.

 

소녀 시체들 중 하나의 옷을 벗겼을 때, 탄환들이 코르세트를 찢어 놓았고 그 구멍 속에 다이아몬들이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주위에 선 모든 사람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즉시 모든 사람들을 내쫓고 몇 명의 말 탄 사람들과 수비대 병사 5명을 보초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흩어졌다. 수비대 병사들은 시체들의 옷을 벗겨내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는 천에다 진주를 몇 줄로 박아 넣은 벨트를 차고 있었다. 소녀들이 목에 라스푸틴의 초상화와 그의 기도문을 새겨 넣은 부적을 걸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다이아몬드들은 즉시 제거됐다. 그것들(다이아몬드로 된 물건들)의 무게가 약 18파운드쯤 됐다. 이것을 알파에브스크 공장에 있는 작은 집들 중 하나의 지하에 묻었으며, 1919년에 도루 파내어 모스크바로 가져왔다.

 

우리는 시체에서 발견된 모든 귀중품들을 몇 개의 가방 속에 집어넣은 후, 나머지 것들은 불태우고 시체들은 광갱에 던져 넣었다. 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몇 개의 귀중품들(누군가의 브로치, 보트킨의 틀니)이 떨어졌다. 광갱을 함몰시키기 위해 수류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시체들이 손상을 입고 일부 부분이 떨어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 훗날 백군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잘라진 손가락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의 시체를 이곳에 영구히 묻어둘 계획은 아니었다. 그 광갱은 처음부터 오직 잠정적인 매장지점으로 계획되었을 뿐이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보초를 남겨둔 체 사령관은 오전 10시에서 11시경(이미 7월17일이 되어 있었다)에 우랄[관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보고하러 갔다. 거기서 그는 사파로프와 벨로보로도프를 만났다. 사령관은 그들에게 시체를 버린 광갱을 발견하게 된 경과를 설명하면서, 자기가 미리 적절한 장소를 물색할 수 있게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사령관은 추츠카에프(그 도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로부터, 모스크바 하이웨이를 따라 6마일쯤 되는 곳에 시체들을 묻기에 적당한 매우 깊은, 폐광 광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령관은 그 지점을 향해 떠났으나 그의 차가 고장났기 때문에 즉시 그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는 도보로 [마침내] 그 장소에 도착했으며 물이 가득 찬 매우 깊은 3개의 광갱을 발견했다. 그는 시체에 바위를 달아 물밑에 가라앉히기로 결정했다. 불편한 목격자들인 수비대 병사들이 거기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카 안전요원들이 탄 자동차를 시체 실은 트럭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체카 요원들은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사할 사항이 있다는 핑계로 체포할 예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령관은 우연히 길을 따라 다가오고 있는 말 두 마리를 징발하였다. 어쩌다가 억류된 사람들[그 지역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려보냈다. 전체적인 작업준비를 위해 다른 체카 요원과 함께 말을 타고 [도시를 향해] 출발했는데, 사령관이 말에서 떨어져 심한 상처를 입었다(그 후 체카요원도 역시 떨어졌다). 만일의 경우 그 광갱 매장을 추진할 수 없게 되면, 시체들을 불사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황산으로 시체들을 훼손한 후 물이 질펀한 진흙구덩이에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17일 저녁 8시경에 도시로 되돌아 온 후 필요한 물건들 - 등유, 황산 - 을 수집했다. 마부들은 없고 말만 딸린 마차들을 교도소에서 차출했다. 밤 11시경에 떠나기로 계획돼 있었지만, 체카 요원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지연되었다. 우리는 17일-18일 밤 12시30분이 되어서야 시체 등을 끄집어내기 위한 로프를 준비하여 광갱을 향해 떠났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광갱(처음 시체를 묻었던)을 사람들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해 콥티아키 마을 사람들에게, 체코군들이 숲 속에 숨어있어 그들을 수색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든 누구도 마을에서 나와 어디로 가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누구든 비상선을 넘어올 때에는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동안에 새벽이 왔다(벌써 3일째인 18일이었다). 당장 그 광산에 일부 시체들을 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덩이 파기를 거의 끝마칠 무렵, 에르마코프를 알고 있는 농부 하나가 갑자기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 구덩이를 알아보았음에 틀림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체들을 깊은 광갱이 있는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차들이 연약하여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에 사령관은 자동차(트럭 1대와 2 대의 승용차, 1대는 체카 요원용)를 수배하려 도시로 떠났다. 마차들이 더 일찍 고장나 있었다. 자동차로는 임시매장지역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직도 무리하게 마차를 사용해야 했다. 자동차들이 도착했을 때, 마차들은 이미 이동하고 있었다 - 자동차들이 콥티아키 마을 인근 0.25 마일 지점에서 마차행렬을 만났다. 우리는 밤 9시 이후에야 전진할 수 있었다. 철길을 넘어 0.25마일을 더 가서 트럭에다 시체들을 옮겼다. (수렁에 빠질만한) 위험한 곳에서는 철도 침목들을 깔아가며 어렵게 차를 몰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몇 번이나 곤란을 겪어야 했다. 19일 새별 4시 30분 경에 트럭이 완전히 수렁에 빠져버렸다. 광갱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길이 남았기 때문에, 시체들을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해야 했다. 동지 하나 - 사령관은 그의 성을 잊어버렸다 - 가 나서서 자기가 불에 태우겠다고 약속했지만, 뒤에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우리는 알렉세이와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의 시체를 불에 태운다는 게, 실수로 시녀[시녀 데미도바]를 알렉세이와 함께 대신 태웠다. 그 후 즉시 불에 탄 유골들을 묻고 그 위에 다시 불을 피워 구덩이를 판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한편 나머지 시체들에 대해서는 통상의 무덤처럼 구덩이를 팠다. 깊이 약 6피트 가로세로 각각 8피트의 구덩이가 아침 7시경에 완성됐다. 시체들을 구덩이에 쳐 넣고 그들의 얼굴과 시체 전체에 황산을 부어 아무도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분해되어 악취를 풍기지 않게 했다(구덩이는 깊지 않았다).흙을 채우고 표면에 관목 덤불을 덮고는 철도 침목들을 깔아 그 위로 몇 번이나 자동차를 왕복하게 했다 - 구덩이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 완전한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백군이 이 매장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콥티아키 마을은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12마일 떨어져 있다. 철길이 콥티아키와 이 도시 북서쪽 방향에 있는 어퍼 이세츠크 공장 사이의 6마일 지점에서 도로와 교차하고 있다. 매장지점은 그 교차지점에서 어퍼 이세츠크 공장으로 가는 길에 그 공장으로부터 700 피트 못 미친 곳에 있다.

 

유로브스키 수기의 존재는 오랜 세월 로마노프 연구가들에게는 일종의 성배(聖杯)처럼 감질나게 하는 소문일 뿐이었다. 1918년 7월의 그 사건들에 대해 유로브스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을 때 기록했던 이 문서는 어쩌면 그 사건들에 대한 다른 보고서들을 입증하거나 혹은 가면을 벗기거나 할 수 있을 것이며, 필경 로마노프 일가의 매장지점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작가인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는, 그가 1989년에 그 수기를 마침내 찾아냈다고 주장하며 “소련문서들이 이제 막 기밀취급에서 해제되기 시작했다.”11)고 말했다. 라드진스키는, 한 묶음의 파일 끝자락에 “제목이나 서명이 없는, 서투르게 타자한 두 개의 서류 복사본이 있었다.”고 상기했다. 그 복사본 중 하나는 육필정정을 해 놓았었다. 유로브스키의 필적을 잘 알고 있었던 라드진스키는, “맞아, 그가 바로 이 문서를 쓴 장본인이야!”하고 즉각 유로브스키를 저자로 결론지었다고 했다. 정정된 복사본 끝 부분에서 라드진스키는 “소름끼치는 주소......짜르와 그 가족들의 시체가 은밀히 묻혀 있는 묘지의 위치”를 발견했다.12)

 

라드진스키의 진실성을 의심할 이유야 없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서류발견의 구체적 내용과 타이밍이 마음에 걸린다. 1989년 4월에 겔리 리아보프는 자신과 알렉산더 아브도닌이 1979년에 로마노프의 무덤을 발굴한 적이 있다는 첫 공식 발표를 했다.13) 1989년 5월 중순 라드진스키는 그 수기를 발표했다. 그것은 아주 처음부터, 가장 필요할 때 추가적인 핵심 증거부분이 나타나곤 하는, 처형이론을 뒷받침해 온 이상한 우연의 일치들의 또 다른 사례처럼 보였다. 리아보프의 무덤발굴 발표에 때맞춰 라드진스키가 뜻밖에도 그 수기를 발견하여 발표한 것은 그 스토리를 확증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그 유골들이 진짜일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높였다. 훗날 리아보프와 아브도닌은, 그들이 1978년에 비로소 유로브스키의 아들로부터 획득한 그 수기의 육필사본이, 아브도닌이 이미 정확하게 지적한 무덤현장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드진스키는 유로브스키 아들이 갖고 있던 사본에는 “주소”가 전혀 표시돼 있지 않았다고 단언하고 있다.14)

 

더욱이 그 수기에 유로브스키가 직접 육필을 남겼다고 해서 그것의 근원과 확실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1997년 모스크바의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러시아 역사가인 비탈리 올포코프는 1919년 콜차크 제독의 백군으로부터 압수한 문서들을 검토하던 중 맨 처음 타이프라이터로 친 수기원본을 찾아냈다. 그 신문기사는 유로브스키 수기가 백군의 반볼셰비키 선전목적을 위한 콜차크 제독의 대적(對敵) 첩보활동용으로 날조된 다른 가짜 “공술서(供述書)”들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비쳤다. 그 수기는 유로브스키에서 비롯된 것 - 그가 그 조작에 참여했다는 의미 - 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혹은 대안으로, 만약 그것이 1920년에 만들어진 것이 정확하다면, 어떤 다른 사건, 예를 들어 짜르구출하기라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나온 해와 같은 해의 7월에 그것이 만들어진 것으로 봐, 그(짜르구출하기)에 대한 계산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 수기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입수 가능한 증거로부터는 최종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중요한 것은 유로브스키의 증언 내용이다. 그의 이야기들을 분석해 보면, 그 수기가 1920년에 유로브스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 사실로 생각될 것이다.

 

그 수기와, 그리고 유로브스키가 소콜로프 보고서를 입수한 후인 1934년에 행했던 연설 사이의 중대한 변화들이 마음에 걸린다. 유로브스키가 설명하고 있는 그 사건의 전말은 당연히 소름끼치고 지독하고 비극적이며, 그리고 적어도 현대의 독자들에게 그런 행위는 전혀 말도 안 되게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비치겠지만, 당시의 한 헌신적인 볼셰비키에게 그것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됐을지도 모른다. 아래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문제의 1920년 수기로부터 뽑아 낸 몇몇 핵심 사건들에 대한 선택적인 개요다.15)

 

1920년 수기를 검토할 때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 첫 번째 것은 그것이 단수 삼인칭으로 쓰여 있다는 점이다 - 말하자면, 유로브스키가 절대로 그 자신을 “나”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항상 “사령관(commandant)” - 일반적으로 줄여서 “the comm." - 혹은 ”그(he)“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른 보아도 이것은 매우 이상하다. 왜 유로브스키는 그런 별난 과정을 택해야 했을까? 라드진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유로브스키는 자랑스럽게 그 자신을 ‘사령관’이라는 3인칭으로 표현했다. 그 날 밤에 야코브 유로브스키는 없었고, 한 사람의 무시무시한 사령관 - 프롤레타리아의 복수의 흉기가 있었다. 역사의 흉기였다.“

 

그것은 부자연한 어떤 것, 적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정교한 시도이다. 이것은 주의해서 보면 볼수록 그 설명이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그 파렴치한 수기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일부에선 유로브스키가 그 수기의 내용을 구술하고 다른 사람이 받아 쓴 것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그 바람에 3인칭으로 표기됐다는 것이다.

 

또, 인간 생물학 연대기(The Annals of Human Biology)에 실린 레프 지보토브스키 박사의 논문은, 그 수기가 맨 처음 몸통부분이 쓰여진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가필됐다고 주장한다. 지보토브스키 박사는 그 수기의 작가를 역사가인 M.N.포크로브스키일 것으로 추정한다.16) 포크로브스키라는 성은 또한 로마노프가의 무용담과 우리가 앞서 보았던 금융사업계획과도 관련이 있다. 흥미롭게도 M. 포크로브스키라는 사람은17) 짜르와 그 가족의 친구인 카롤 야로신스키를 끌어들인 금융사업계획의 창시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볼셰비키들을 타도하고 짜르와 그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금융 하부구조를 만들려는 금융사업계획의 러시아인 책임자였다. 역시 인상적인 것은, 유로브스키 수기, 파르팬 돔닌 서류 및 짜르구출하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개인들 이름의 약자와 이니셜이 모두 강한 문체라는 유사성을 갖고 있는 점이다.

 

유로브스키 증언의 두 번째 놀라운 점은, 1918년 7월17일의 그 밤에 11명이 아니라 12명이 사살됐다고 1920년에 와서 언급했다는 점이다. 유로브스키는 티코미로프라는 요리사 한 사람을 희생자들 수에 추가시켰다. 그밖에 어느 곳에도, 어떤 다른 서류나 증언에서도 그런 이름에 대한 언급이 없다.18) 1918년 7월의 사건들과 관계가 있으면서 유일하게 설명이 없는 시종의 이름은 그 존재 유무를 알 수가 없는 시종 돔닌이었다.

 

이 경우 유로브스키가, 신변안전을 위해 파르팬 돔닌이라는 가명을 썼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테렌티 체모두로프를 요리사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로브스키는 13일 동안 이파테이프 하우스에서 황실가족을 감시하는 수비대 대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분명히 그는 그 때 억류된 사람들 개개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비대 사령관으로서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죄수들을 책임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자세하고 알고 있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착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또한 확실한 것은 그가 그의 상관들에게 정확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도 그의 책임 아래 있는 전체 죄수들 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불일치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숫자나 신원과 같은 중요한 사실들은 그런 범주에 들어 갈 수 없다.

 

유로브스키 수기에 따르면 시체들의 처리는, 볼셰비키 지도자이며 오랜 기간 필리프 골로스체킨의 동료인 표톨 에르마코프에게 위임돼 있었다. 시체들을 어두울 때 숲 속으로 옮겨, 폐광의 광갱 속에 던져 넣어버릴 계획이었다. 시체들을 옮기는 데 사용될 트럭이 밤중에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트럭이 새벽 1시30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에르마코프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 유로브스키는 “끝까지 모든 작업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작업을 끝내는 데 긴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숲 속에서 유로브스키 일행은 에르마코프가 시체 매장을 돕기 위해 모집한 약 25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은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 유로브스키는 그들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었으며 대형마차 대신 소형마차들만 끌고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아찔했다. 소형마차는 한꺼번에 몇 구의 시체밖에 실을 수 없었고, 작업 중에 곧잘 고장이 났다. “이것이 매우 불편했다”고 유로브스키는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아무도 삽 하나 가져올 생각을 안한 것이다. 실제로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유로브스키와 에르마코프는 일찍이 그들이 처리장소로 생각하고 있었던 깊은 광갱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트럭이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처박혀버려 시체들을 더 이상 옮길 수 없게 됐다. 결국 시베리아 여름 아침이 완전히 밝아진 “6시 내지 7시경”에 일행은 깊이가 단지 8피트밖에 되지 않는 한 오래된 광갱을 뜻밖에 발견하게 된다. 유로브스키는 시체들의 옷을 벗겨내고 그 옷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감시병들은 일부 여성 죄수들이 총탄에 잘 죽지 않게 보호해줬던 “갑옷”을 발견했다. 그들의 코르세트에 단단하게 꿰매져 있는 다이아몬드와 다른 종류의 보석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근처에 농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장 보초병들을 세운 후에 유로브스키는 옷이 벗겨진 시체들을 광갱에 던져 넣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11명의 시체들을 넣기에 구덩이가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일부 시체들은 위로 비죽이 드러나 보였다(그리고 그의 언급에 의하면 시체들이 12구일 수도 있었다). 수류탄을 사용하여 광갱을 무너뜨려 시체를 덮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그 바람에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만 끈 꼴이 되었다.

 

7월 17일 아침 늦게 에카테린부르그로 돌아온 유로브스키는 매장장소로 더욱 적당한 몇 개의 매우 깊은 광갱이 “모스크바 하이웨이” 근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한 두 사람의 체카 요원들과 함께 그 장소를 찾으려 갔지만, 자동차가 고장나 나머지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읍으로 돌아가 시체들을 옮길 사람들을 수배해야 했기 때문에, 야로브스키는 한 농부로부터 말 두 필을 징발했다. 말을 타고 가다가 떨어져 유로브스키는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체카 요원 역시 말에 떨어졌다.”.

 

유로브스키는 기본계획(“시체에 돌을 달아” 물이 가득한 광산광갱에 가라앉히는 계획) 뿐만 아니라 대체계획(“시체를 불에 태우거나 혹은 시체들에 대한 신원파악을 못하게 하기 위해 황산을 뿌려 형태를 변경시킨 후 물이 괸 진흙구덩이에 매장하는 계획”)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읍으로 돌아온 그는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 후 7월18일 낮 12시 30분 경에 다시 현장으로 떠났다.

 

맨 처음 매장한 장소에서 유로브스키는 수비대 병사들에게 주위에 비상선을 쳐 잘 지키고 그 선을 넘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이제는 처형한 지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아마도 날이 새기 전에 깊은 광갱이 있는 곳으로 시체들을 옮겨가기에는 너무 늦어졌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해졌거나 하여, 유로브스키는 바로 “그 [얕은] 광갱에 시체들의 일부를 그냥 묻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거의 마무리하고 있었다.” 고 그는 회고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에르마코프와 면식이 있는 농부 하나가 갑자기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는 그 구덩이를 알아보았음에 틀림없었다.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체들을 깊은 광갱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연약하여 거의 못 쓸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던" 마차들을 사용할 수가 없어 유로브스키는 다시 읍으로 돌아와 트럭 한대와 승용차 2대를 얻어왔다. 그러나 그 깊은 광갱까지 계속 자동차로 갈 수는 없고 결국 마차들을 사용해야만 했다. 7월18일 오후 9시에 깊은 광갱으로의 운반이 시작됐다. 트럭은 최소한 2번이나 진창 속에 빠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시체들과 다른 물자들(등유와 황산탱크를 포함하여)을 끌어내린 후, 트럭을 여럿이서 진창에서 밀어내어 다시 모든 것을 실었다.

 

결국 “19일 새벽 4시30분 경에, 트럭이 완전히 진창에 빠져버렸다. 아직 그 깊은 광갱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 시체들을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해야 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유로브스키는 알렉산드라와 알렉세이의 시체를 태우기로 결정했지만, “그러나 실수로 대신 시녀[실제로는 시녀 데미도바]를 알렉세이와 함께 태웠다.” 그들의 유골은 묻고 구덩이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 위에 다시 불을 놓았다. 한편 얕은 구덩이 하나를 팠다. 나머지 시체들을 그 구덩이에 차곡차곡 쌓아서 그 위에 황산을 끼얹은 후 묻고는 철도 침목들을 덮었다. 처형한지 50시간도 더 지난 후에야 “비밀” 매장 작업이 완료됐다. 유로브스키가, 알렉세이와 시녀를 불에 태웠다고 언급했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위원회가 왜 알렉세이와, 그리고 마리아 및 아나스타샤 중 하나가 아직도 실종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로브스키의 말에 따른다면, 모든 공주들의 뼈는 콥티아키 숲 속에서 발견된 모든 다른 유골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정확히 유로브스키의 소심한,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실질적인” 개작이다. 설사 유로브스키의 이야기가 전혀 믿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때때로 믿기 어려운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알기 쉬운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유로브스키가 7월16일 아침 6시에 일어났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7월19일 아침까지의 75시간 넘게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고 믿어야 한다. 이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험한 육체노동을 한 셈이며 또한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다리에 입은 “심각한” 부상에서 오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유로브스키가 그의 이야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그가 할 수 있었다고 보기가 어려운 이유들이다.

 

또한, 광갱을 함몰시키려 했다는 그의 말을 검토해보자. “수류탄으로 그 광갱을 함몰시키는 과정에서 시체들이 훼손되어 시체의 일부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했다 - 백군들이 이 지점에서 떨어져 나온 손가락 등을 발견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사령관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떨어져 나온 손가락과 두개의 작은 피부조각은 이 장소에서 발견된 유일한 사람잔해였다. 이들 잔해가 다수의 폭발에 의해 시체들에서 떨어져 나온 유일한 조각들이거나, 아니면 유로브스키의 다른 무능한 부하가 그 위치를 알아내어 시체를 뒤지러 와서 이것저것 여러 작은 조각들을 수집하다가 떨어뜨린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시나리오도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가 않는다.

 

결국 유로브스키는 그가 지휘한 당초의 수비대 외에 에르마코프가 모집해 데리고 온 25명을 포함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매장과정의 일부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매우 이상한 것은, 이들 목격자들 중에서 백군에게 와서 무덤의 소재지를 제보하거나 혹은 최소한 어디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소콜로프의 보고서에서 우리는 그와 많은 다른 사람들이 훗날 시체들이 발견된 바로 그 장소를 - 계획적으로 땅에 쇠꼬챙이를 찔러가며 - 여러 차례 수색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콜로프가 매장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1919년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계속된 그의 집요한 수색이 이렇다 할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최소한 수비대의 다른 요원들 중 하나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증언했다. 에카테린부르그 사건 직후 페름에서 백군에게 자수한 메드베데프의 이야기가 소콜로프 보고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메드베데프는 그 무시무시했던 밤에 일어난 사건의 목격자로 자주 인용되었다. 그가 진짜 목격자라면, 우리는 7월17일 최초의 시간에 유로브스키가 매장팀과 적어도 함께 있었다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메드베데프는, 유로브스키가 그 학살이 벌어졌던 방을 깨끗이 청소하라고 명령한 후 새벽 3시에 그의 사무실로 되돌아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메드베데프의 증언은, 그가 한 때 볼셰비키였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전 소련 공문서에 부연될 만큼 충분히 조사가 된 것으로 생각됐고, 그리고 그들 공문서를 근간으로 하여 책을 쓰고 있는 작가들이 아직도 그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연루가 진지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메드베데프가 유로브스키의 거동에 대해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소련 공문서에는 그 사건의 타이밍, 행동 및 책임에 대해 유로브스키와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이 메드베데프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그 다른 증인은 바로 어퍼 이세츠크의 인민위원이었던 표틀 에르마코프다. 황실가족 학살에 대한 그의 설명은 유로브스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에르마코프는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 유로브스키가 아니라 바로 자기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보고에서는, 에르마코프가 로마노프 식구들에게 그들의 침실을 떠나도록 이야기했으며, 희생자들은 그 방에서 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앉아 있었고, 그리고 에르마코프 자신이 짜르를 - 짜르 뿐 아니라 알렉산드라, 공주들 중 하나 및 알렉세이를 - 죽이는 영광을 갖게 됐다고 증언했다. 이들 두 보고 사이의 혼란스런 불일치를 에드바르드 라드진스키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에르마코프가 허풍쟁이일 뿐 아니라 주정뱅이기 때문에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가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불충분한 설명이다. 이 의견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에르마코프가 술을 심하게 마신다는 기록도 없다. 더욱이 다음날 그의 행동거지를 비평하고 있는 약간의 사람들도 그가 숙취로부터 고통을 받거나 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술에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고 에르마코프가 사려 깊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치 그것을 저 혼자서 다 하기나 한 것처럼 선전을 해댔다. 그러나 유로브스키는 공개적으로 그를 반박하지 않았으며 수비대의 다른 어느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잔인한 니콜라스”를 학살한 것이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시시한 에피소드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혁명가를 자부심으로 충만케 했을지도 모르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에르마코프가 떠들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유로브스키의 자존심은 어땠을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 관한 일은 아무리 조그마한 내용이라도 한 혁명가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력한 불일치가 있다. 비코프(볼셰비키 러시아 역사가)와 유로브스키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 - 몇 명의 사형집행인들이 거기에 있었는지에 대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급 경비원 중 한 사람인 스타르코프는, 유로브스키가 매장팀들과 함께 콥티아키 숲속으로 가고 있었다고 말한 바로 그 시간에 필리프 골로스체킨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스타르코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앞서 보았던 골로스체킨이 우랄 관구 공산당 간부 중에서 황실가족의 죽음을 보고싶어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며, 황실가족이 죽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린 사람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진술했다. 어떻게 이처럼 몹시 골치 아프게 하는 불일치가 항상 해명을 통해 빠져나가거나 혹은 내쫓기거나 하는 것일까? 유로브스키 이야기에 대한 의심은 그 수기가 1934년 그가 노장 볼셰비키들 앞에서 한 연설내용과 비교할 때 배로 증폭된다.19)

 

제12장 유로브스키의 수정보고

 

어느 것을 믿어야 하나?

 

노장 볼셰비키들의 회합에서 행한 유로브스키의 두 번째 보고는 그 연대를 정확히 1934년으로 잡을 수 있다. 그 해는 주목할만한 해였다. 왜냐하면 1918년 에카테린부르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포함한 “노장 볼셰비키들”의 대부분을 제거하는 계기가 된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된 해였기 때문이다. 유로브스키의 1920년 수기와 그로부터 14년 후에 발표한 다음과 같은 그의 연설 사이에는 현저한 모순이 있다.

 

.....그간 준비돼 왔던 그들(황실가족)에 대한 재판은 허용된 시간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선이 7월 들어서부터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약 25마일 바깥까지 밀고와 부득이 대단원의 막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문제였으며 중앙의 결정 없이는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선에서의 상황 역시 우랄뿐 아니라 중앙의 장래성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무렵에는 붉은군대가 점점 더 중앙집권화 되고 집중화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중앙과 계속적인 접촉과 대화가 있었습니다. 부득불 에카테린부르그를 포기하게 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는 이미 7월10일경에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에카테린부르그를 7월 25-26일에 결국 포기할 예정이었는데, 재판 없이 행할 처형이 왜 7월16일까지 연기되었는지는 오직 이것만이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에카테린부르그의 철수는 완전히, 말하자면, 알맞은 시기에 행해졌습니다. 7월10일 내지 11일경에 필리프[골로스체킨]가 내게 말하길, 니콜라스는 처형돼야 하며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처형방법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전에 그런 일에 종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경험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일을 처리하면서 급히 서두를 때가 많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전선이 가까워지는 데서 오는 여러 종류의 위험들이 문제를 격렬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필리프는 내게, 여러 동지들이 이 어려운 일을 더욱 확실하게 그리고 조용히 해내기 위해서는 밤중에 그들(황실가족)이 자고 있는 침대에서 바로 일을 벌여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로선 그런 방법이 마땅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야할지 좀 더 생각해 보고 준비하자고 그에게 말해줬습니다.

 

7월15일 아침에 필리프가 와서 그 일이 내일 마무리돼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방에서 일하는 아이인 세드뇨프(13세 소년)를 따로 떼어 그의 전 출생지나 혹은 중앙 시베리아 어느 곳으로든지 보내게 돼 있었습니다. 또한 니콜라스는 처형한 후 그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아마도 발표는 해야겠지만, 아직 어떤 방법으로 해야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극도의 주의를 요하는 것이었으며, 가능한 한 최소한의 사람들 - 더욱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일을 처리해야했습니다.

 

15일에 나는 즉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을 신속하게 처리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피처형자와 동일한 수의 사람들로 처형단을 구성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그리고 그 일을 위해 그들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과, 우리가 최종 명령을 받는 즉시 모든 일이 훌륭하게 처리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람을 쏘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줘야 했습니다. 역시 그 곳은 전선이 아니었고 “평화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들은 피에 굶주린 사람들이 아니라 혁명의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두 사람의 라트비아인이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 그들 두 사람은 제외됐습니다.

 

16일 아침에 나는 주방 소년 세드뇨프를 스베르드로브스크에 온 그의 삼촌을 만나게 해준다는 구실로 내보냈습니다. 이것이 유폐돼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안을 야기 시켰습니다. 헌신적으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보트킨과 그리고 딸(공주)들 중 하나가 와서 세드뇨프를 왜 그리고 어디로 빼돌렸으며 언제쯤 돌아 올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없어서 알렉세이가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그들은 돌아갔으며 그 후엔 침착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12정의 네이건트 연발권총을 준비하고 누가 누구를 쏠 것인지를 정했습니다. 필리프 동지는 나에게 트럭 한대가 자정에 도착할 것이라고 귀뜸 해 주었습니다. 암호를 대는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며, 그들에게 시체들을 인계하면 그들이 매장장소로 운반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일 밤 11시경에 나는 다시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연발권총을 나눠주고, 우리들이 곧 구금돼 있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일을 시작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파벨 메드베데프에게 안팎의 보초들을 철저하게 단속하도록 하고, 그와 경비 대장이 집 주위 지역과 바깥쪽 경비병들이 묶고 있는 집에서 그들 자신이 당직을 서도록, 그리고 나와 연락망을 유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단지 처형에 대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마지막 순간에 가서, 그들이 모든 보초병들은 물론 수비대의 나머지 대원들에게 주의를 주어, 설사 집안에서 총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서 숙소를 뛰쳐나오게 해서는 안되며, 만약 우려할만한 일이 발생하면 그들 둘이 구축돼 있는 채널을 통해 나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의를 줬습니다.

 

트럭은 새벽 1시30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기다리는 것에서 오는 통상적인 걱정도 걱정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름]밤이 몹시 짧다는 것에서 오는 초조감이었습니다. 트럭이 도착한 후에 - 혹은 전화 상으로 트럭이 거의 도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내가 구금돼 있는 사람들을 깨우러 가게 돼 있었습니다.

 

보트킨이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방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 도시가 불안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모두 일어나야 하며 위층은 위험하니까 내가 그들을 다른 장소로 모시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준비하는 데 약 40분이라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족들이 옷을 다 입었을 때 나는 그들을 집 하층에 미리 정해 논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우리는 니쿨린 동지와 의논하여 이 계획을 꾀했습니다. 여기서 나는, 창문이 소음을 흡수하지 못했으며, 둘째, 희생자들이 늘어서서 총탄을 받아야 할 쪽의 벽이 돌로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사격이 혼란사태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예견이 불가능했습니다. 각각 한 사람씩을 맡아서 쏘게 돼 있었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마지막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미쳐 하지 못했습니다. 혼돈 - 즉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사격 - 의 원인은 뒤에 밝혀졌습니다. 내가 보트킨을 통해 황실가족들에게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말도록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종 조그마한 물건들 - 배게, 작은 가방 등 - 과 그리고 내가 믿기로는 조그마한 개 한 마리를 갖고 왔습니다.

 

그들이 일단 방으로 들어서자(방 출입문 오른 쪽에 거의 벽 전체 크기 만한 매우 넓은 창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벽 쪽으로 서도록 했습니다. 분명히 그 순간에는 그들은 아직 그들의 운명 앞에 무엇이 닥치려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알렉산드라 페도르브나가 “여기에는 의자조차 없네.” 하고 말했습니다. 니콜라스는 알렉세이를 팔에 안아 옮겼으며, 그 방에 들어와서도 계속 그를 안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두 개의 의자를 가져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가 입구 오른쪽, 거의 창문 곁 구석에서 의자 중 하나에 앉았습니다. 그녀 다음에, 출입구의 왼쪽을 향해 그녀의 딸들과 데미도바가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렉세이가 그들 곁에서 의자에 앉았고, 그 뒤쪽으로 의사 보트킨, 요리사 및 다른 사람들이 와서 섰고, 니콜라스는 알렉세이 맞은편에 그냥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나는 그 사람들(처형대)을 내려오도록 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지시 받은 대로 제자리에 가서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알렉세이를 의자에 앉힌 후 니콜라스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알렉세이를 막고 있었습니다. 알렉세이는 입구로부터 방의 왼쪽 구석에 앉아있었습니다. 나는 즉시 니콜라스에게, 그의 제국의 국내외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 모두가 그를 구출하려고 했기 때문에 소비에트노동자위원회가 그와 그의 가족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했습니다. 니콜라스는 “뭐, 뭐라고 했소?” 하며 알렉세이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그를 쏘아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는 답을 들으려고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혼란스런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그 방이 매우 작았지만, 그럼에도 전체 처형대원들이 방안에 들어와 규정된 방법으로 처형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사람이 문지방 너머에서 쏘았으며, 벽이 돌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탄환들이 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사격은 총을 맞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서 격렬해졌습니다. 내 쪽에서 사격을 중지시키는데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내 뒤에서 사격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쏜 탄환이 내 머리 곁으로 핑 하며 소리를 내었습니다. 처형대원 중 누군가가 탄환에 맞아 관통되었는데 그것이 손바닥인지 손인지 아니면 손가락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격이 멈췄을 때, 딸들과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시녀[실제로는 개인시녀]인 데미도바가 내 생각엔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알렉세이 역시 살아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공포에 질려 혹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쓰러졌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다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나는 앞서 대원들에게 그들의 심장부위를 겨누어 쏘아야만 피를 적게 흘릴 것이라고 말해줬습니다). 알렉세이는 여전히 돌처럼 앉아 있었으며, 내가 그의 명줄을 끊어 놓았습니다. 다른 대원들이 딸들을 향해 쏘았으나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르마코프가 총검으로 찔렀으나 총검이 들어가지 않았으며, 다른 대원들이 머리에 총을 쏘아 끝을 냈습니다. 나중에 숲 속에 가서야 나는 비로소 딸들과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에 대한 사격이 무엇 때문에 방해를 받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격은 끝났고, 시체들을 옮겨야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긴 도정(道程)이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여기서 누군가가 들것을 생각해 냈습니다(그들은 사전에 미쳐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개의 썰매에서 들보들을 뽑아내 그 위에 시트를 팽팽하게 묶어서 들것을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두가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시체들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핏자국들이 여러 곳에 묻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즉시 들것에 병사들의 담요를 덮어 감싸고, 트럭에서도 담요로 덮도록 지시했습니다. 나는 미하일 메드베데프에게 시체 옮기는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는 전에 체카 요원이었으며, 지금은 GPU(보안경찰)대원이었습니다. 그와 표틀 자크하로비치 예르마코프(혹은 에르마코프)가 시체들을 수습하여 차로 운반해갈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 시체들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누군 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길, 사람들 중 하나가 몇 개의 귀중품을 몰래 챙겼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때 황실가족들이 갖고 온 물건들 중에 귀중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시 시체운반을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훔친 귀중품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얼마동안 부정한 후에, 두 남자가 그들이 훔친 귀중품들을 반납했습니다. 약탈행위를 하는 사람은 누구든 처형하겠다고 위협한 후 나는 이들 두 사람을 해고하고, 내 기억에는, 니쿨린 동지에게, 피살자들의 시체에서 귀중품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귀뜸하며, 시체운반을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본래 있었던 물건 외에 그들이 압류한 것들을 포함하여 모두 모아서 사령관 사무실로 보냈습니다. 분명히 나를 걱정하고 있는(나의 건강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필리프 동지가 날더러 “장례식”에는 가지 말도록 권고했지만, 나는 시체들이 어떻게 잘 감춰질 지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 자신도 가기로 결정했는데, 뒤에 밝혀진 바와 같이 그것이 잘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가지 않았다면, 모든 시체들이 분명히 백계 러시아인들 손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처형현장을 모두 씻어내고 청소를 하도록 지시한 후, 우리는 새벽3시경 내지 그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습니다. 감시병들 중에서 몇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디에다 시체들을 묻을 계획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리프는 분명히 이 일을 에르마코프 동지에게 할당을 했습니다. 에르마코프는 우리들을 어프 이세츠크 공장 근방의 어떤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한편, 나는 그 날 밤에 다음 얘기를 해 준 사람이 파벨 메드베데프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가 수비대로 달려 왔을 때 필리프 동지가 그 집<이파테에프 하우스> 옆을 내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일이 어떻게 진행돼 갈지 매우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지방에는 익숙한 편이 못되었으며,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어퍼 이세츠크 공장으로부터 1, 2마일 혹은 조금 더 되는 곳에서 우리는 말과 마차에 타고 있는 한 무리의 호송대를 만났습니다. 나는 에르마코프에게 이 사람들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물었고, 그는 이 사람들이 그가 준비해 온 사람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우리는 당신들이 그들(황실가족)을 산채로 넘기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모두 죽었군” 하고 고함을 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2, 3마일 더 가서 트럭이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쳐 박혀 버린 것이 기억납니다.

 

여기서 지체를 하는 동안에 에르마코프가 데리고 온 사람들 중 일부가 소녀들(공주들)의 블라우스를 잡아 찢기 시작했고, 거기서 귀중품들을 발견했습니다. 절도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초를 세워 아무도 트럭 주위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트럭은 단단히 쳐 박혀,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르마코프에게 “지정된 매장 장소가 먼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멀지 않으며 철둑 너머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트럭이 나무 사이에 쳐 박혀 있는데다가 주위는 진창이었습니다. 어디랄 것 없이 우리가 바로 진창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에르마코프가 많은 사람들과 말들을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소형마차 대신 대형짐마차를 가져왔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시체들을 내려 트럭을 가볍게 해서 빼내려고 했지만 이마져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체들을 소형마차에 싣도록 지시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먼동이 터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밝아지기 시작했을 무렵에야 겨우 우리는 잘 알려진 “처분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농부들이 매장장소로 정해진 그 광갱으로부터 20보 정도 떨어져서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가축용 건초 만들기를 한 후 거기서 밤을 샌 것 같았습니다. 멀리 길을 가는 행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일을 계속하기가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상황이 어렵게 되어가고 있었으며 모든 일이 망쳐질 수도 있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 광갱이 우리의 목적에 전혀 적절치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체들에서 나온) 귀중품에 대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귀중품들이 그렇게 많이 나올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에르마코프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결코 이런 종류의 작업에 맞지 않았으며 그리고 또한 너무 수가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곧 우리들이 콥티아키 마을 외곽에서 약 1, 2 마일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웬만한 넓이로 비상선을 쳐 사람들의 접근을 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선발하여 일정한 거리에서 작업현장을 둘러 싸 지키도록 지시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보내 마을 사람들 더러 밖에 나오면 위험하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이 근처에 있고, 그 때문에 우리 부대가 여기에 온 것이라고 설득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사람마다 마을로 되돌려 보내고, 만약 말을 듣지 않거든, 완강하게 반항하는 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에르마코프가 준비시킨 사람들을 마을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후 나는 시체들을 내려 옷을 벗긴 후 불태우도록 지시했습니다. 즉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게 모든 물건들을 없애버려, 뒤에 누가 시체들을 발견할 경우에도 황실가족이라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화톳불을 놓도록 했습니다. 시체에서 옷을 벗기기 시작했을 때, 딸들(공주들)과 알렉산드라의 옷에 어떤 물건들이 꿰매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때 발견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혹은 이미 딸들의 옷에 꿰매져 있었던 것으로 발견된(그 집에서 시체를 옮길 때) 바로 그것들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딸들은 진짜 다이아몬드와 다른 값비싼 보석들을 박아 놓은 보디스(코르셋 위에 입는 여성복)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귀중품 저장소 역할뿐만 아니라 방탄조끼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총을 쏘아도 죽지 않고 칼로 찔러도 찔리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 고통을 당한 것은 다른 아무 것도 아닌 바로 그 보디스였다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둬야겠습니다.

 

그 귀중품들은 약 18 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 그들의 탐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에게서 엄청난 양의 순금 가닥을 박아 넣은, 무게가 약 1 파운드가 되는 팔찌형상을 한 것이 나왔습니다. 이들 모든 귀중품들을 즉시 떼어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피묻은 옷들을 가지고 오래 질질 끌 필요가 없었습니다. 백군들이 시체를 찾고 있을 때 발견한 귀중품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옷에 개별적으로 꿰매져 있던 것들의 일부였으며, 옷을 태운 재 속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동지들이 거기서 발견한 몇 개의 다이아몬드를 내게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다른 귀중품들을 보고도 못 본체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시체들을 샅샅이 살펴 볼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가장 있음직한 일은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귀중품들이 토르그신 상점을 통해 우리에게 회수되고 있었습니다. 콥티아키 마을의 농부들이 우리가 떠난 후 일부 귀중품들을 주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귀중품들을 거두어들이고, 기타 소지품들은 불태워버리고, 그리고 알몸이 된 뻣뻣해진 시체들을 광갱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물 속에 처넣은 시체들이 보일락 말락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한담? 우리는 광갱을 함몰시키기 위해 폭탄을 터뜨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폭탄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가 매장에 성공하지 못했으며, 시체를 그 모양으로 둘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체들을 어디에다 묻습니까? 오후 2시경에 나는 (장비와 자재를 가지러) 도시(에카테린부르그)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분명히 시체들을 도루 끄집어내어 다른 장소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장님이라도 그 장소에 오면 그들을 찾아내어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보초병들과 수비대 병사들을 세워 지키게 하고는, 귀중품들을 갖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나는 관구[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가서 윗사람들에게 일이 고약하게 됐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사파로프 동지가 - 그밖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 내 얘기를 듣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나는 필리프를 발견했고 시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이야기 해줬습니다. 필리프는 에르마코프를 호출하여 심하게 질책하고는 시체들을 도로 파내라며 보냈습니다. 나는 그에게 빵과 식사를 준비해 가도록 당부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24시간 동안 잠도 못 자고 굶주리고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시체들을 도로 끄집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 일에 우리는 정말 큰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는 늦게 거기를 출발했는데, 온 밤을 그 일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나는 당시 [에카테린부르그] 시 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인 세르게이 예고로비치 추쯔카에프에게 가서 그가 혹시 적당한 매장 장소를 알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하이웨이 옆에 몇 개의 아주 깊은, 폐광 광갱이 있다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 지역 체카 요원 - 내 기억으로는 폴루신 같습니다 - 과 그밖에 누구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예정된 장소로부터 약 1마일 못 미치는 곳에서 자동차가 고장 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고치도록 하고 걸어가서 그 장소를 대충 훑어보았는데, 매장할만한 장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특별히 주의해야할 눈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읍으로 소개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의 작전이 끝나면 그들을 자유롭게 해 줄 예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결정사항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가보니 자동차를 아예 견인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통행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몇 사람이 두 마리의 말을 몰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을 우리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더니, 소년들이 나의 의도를 알아보고는 그들의 공장 쪽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달려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말들을 내버려둔 채였습니다.

 

우리가 말을 타고 가는 동안 다른 계획이 떠올랐습니다. 즉, 시체를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태워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폴루신이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아무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된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마음속에 모스크바 하이웨이 근방의 그 광갱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시체운반에 사용할 마차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외, 운이 나쁜 경우에는 시체들을 몇 구씩 나누어서 도로를 따라 각각 다른 장소에 묻을 가도 생각했습니다. 시체를 묻을 장소로부터 콥티아키로 가는 도로는 진흙길이어서, 시체를 아무도 모르게만 매장할 수 있다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젠 시체를 묻을 수 있겠고, 마차로 [현장에] 운반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울퉁불퉁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었으며 더 이상 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세 가지 계획이 남았습니다.

 

시체를 운반할 도구도 차도 없었습니다. 나는 자동차를 빌릴 수 있는 지를 알아보려고 군 수송대 정비공장을 찾아갔습니다. 나중에 자동차 한 대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러나 자기가 공장장이라며 나선 사람 - 그의 성을 잊어버렸습니다 - 은 불한당이었습니다. 그가 페름에서 사살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파벨 페트로비치 고르부노프 동지가 그 정비공장의 실제 공장장 혹은 부공장장이었으며 지금은 국영은행의 대리인[회장]입니다. 나는 그에게 자동차가 급히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 지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내게 공장장의 차를 내 주었습니다. 나는 휘발유나 등유, 시체의 얼굴을 지우기 위한 황산과 삽을 구하기 위해 우랄관구 조달국장인 보이코프를 찾아갔습니다. 이 물건 모두를 구했습니다. 우랄관구의 사법담당 부 인민위원인 나는 교도소에서 10대의 마부 없이 끄는 마차를 차출하여 준비했습니다. 나와 같이 왔던 사람들이 모든 물건들을 싣고 떠났습니다. 트럭도 같은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으며, 나 자신은 화장 “전문가”인 폴루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보이코프의 사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 11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뒤 사람들 얘기로는, 그가 내게로 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분질러 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 밤 12시경에 어떤 동지 하나 -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 와 말을 타고 시체들이 있는 장소를 향해 떠났습니다. 불행은 나에게도 들이닥쳤습니다. 말이 발부리가 걸려 무릎을 치켜올리며 뛰는 바람에 꼴사납게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구겨버렸습니다. 나는 한 시간 이상을 누워 있은 후에 다시 말을 타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늦게 현장에 도착하여 [시체] 회수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몇 구의 시체들을 길에 묻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새벽까지 거의 준비가 되었을 때 한 동지가 내게 와서 말하길,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르마코프와 면식이 있는 사람으로. 에르마코프는 그를 작업장소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주위에 쌓여있는 진흙더미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서 땅을 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예르마코프가, 이 사람은 어떠한 것도 볼 수 없었다고 우리를 안심시키긴 했지만, 다른 동지들은 그 사람이 어디에 서 있었든 그가 틀림없이 눈치를 챘을 것이라며 사례를 실행해가며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이 계획 역시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구덩이를 메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저녁이 되면서 마차에 모든 것을 실었습니다. 트럭은 진창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보장된 곳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운전기사는 즐로카조프 공장 노동자인 류카노프였습니다). 시베리아 하이웨이 쪽으로 갔습니다.

 

철둑을 건넌 후 우리는 시체들을 다시 트럭에 싣고 재빨리 차에 탔습니다. 두 시간동안 전력을 다했으며 어느 듯 자정이 가까워왔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나는 이 근방 어떤 곳에 시체들을 매장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을 보내 철도 침목들을 가져와 시체가 묻힌 곳에 덮기로 했습니다. 우리 쪽 사람들 중 몇 명의 사람들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 철도 야간경비원 뿐이었습니다. 나는, 만약 사람들이 이곳에서 철도 침목을 발견하면, 그들은 진창길에 트럭을 통과시키기 위해 침목을 깔았다고 추측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그 날 밤에, 우리가 두 번이나 진창길에 빠졌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린 후, 우리도 내렸으나, 그런데 우리는 두 번째로 진창에 빠져버렸고 이제는 가망이 없었습니다. 2개월 전, 콜차크[백군 사령관]가 임명한 특별사건담당 조사관인 소콜로프가 쓴 책 을 훌훌 넘기다가 이들 철도 침목들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트럭이 지나다니도록 한 장소에 침목들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특별히 언급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역을 파헤친 그들이 결국 그 침목들 밑을 파 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극도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새 구덩이를 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런 일들엔 으례 그렇듯이 두 세 사람이 그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다른 사람들도 참가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즉시 불을 놓았으며, 구덩이가 준비되는 동안 2구의 시체, 알렉세이와 그리고 우리들이 태우려고 했던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 대신 데미도바를 태웠습니다. 그들을 태운 장소에 구덩이를 파 유골을 묻고 그 위를 평평하게 만든 후 다시 불을 놓아 재로 모든 흔적들을 덮었습니다. 나머지 시체들은 황산을 끼얹은 후 묻었으며 그 위에 철도 침목들을 깔아 빈 자동차로 왔다갔다하게 하여 마치 침목들이 그 곳에 오래 전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새벽 5-6시경에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들이 수행했던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그들이 보았던 것을 잊어야 하며, 누구에게 그것을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고 주의를 준 후 에카테린부르그를 향해 떠났습니다. 우리의 행적을 놓쳐버렸던 그 지역 체카에서 온 젊은이들 - 이사이 로드긴스키, 고린 및 그 외 어떤 동지 - 은 우리가 모든 일을 끝냈을 때 도착했습니다.

 

나는 19일 밤에 모스크바에 보고를 하러 떠났습니다. 내가 그 귀중품들을 제3육군혁명위원회 위원인 트리포노프에게 준 것이 그 때였습니다. 나는 벨로보로도프 및 노보셀로프와 그 외 누군가가 그것들을 리세프에 있는 한 노동자의 집 1층 땅 밑에 묻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919년, 중앙위원회의 한 위원이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해방된 우랄지방으로 가고 있었을 때, 나 역시 임무차 그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사람과 함께 옛날의 그 노보셀로프가 그것[귀중품]들을 파냈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오고 있었던 N.N. 크레틴스키가 그것들을 가져갔습니다. 1922-1923년에 내가 그 귀중품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있는 공화국정부 공탁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의 진주 목거리 하나가 60만 금화 루불의 가치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페름에서 내가 전 황실가족에 속했던 물건들 - 한 마차분 이상 - 을 분류하고 있었을 때, 그들의 속옷에서 나온 물건들 중 숨겨져 있었던 몇 개의 귀중품들이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유로브스키의 두 가지 설명(그의 수기와 연설) 사이에는 수많은 불일치와 몇 개의 모순점들이 있다. 그는 소콜로프의 책을 그가 연설한 1934년 이전 어느 땐가 읽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의 강연에서도 그 책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수기와 강연 사이의 대부분의 불일치 부분을 검토해 보면, 거의 모든 경우, 소콜로프가 제시한 증거에 따라 유로브스키의 이야기가 수정됨으로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사례들은 당장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즉 1920년에는 “학살의 방”에 애완동물(강아지)이 있었다는 얘기가 없었다. 그러나 소콜로프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유골들이 맨 처음 부분적으로 묻혔던 광갱 바닥에서 공주 타티아나의 강아지인 제미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1934년에 유로브스키는 희생자들이 그 방으로 들어 올 때 “여러 가지 작은 물건들 - 배게, 작은 가방 등 - 과 작은 개”를 갖고 왔다고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1) 대학살의 와중이라고 해서 강아지가 짖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누가 강아지의 심장을 직통으로 맞혀 유로브스키가 최초로 그 야비한 사건의 내용을 밝힐 때 기억하지 못한 것이라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유로브스키는 분명히 소콜로프 보고서의 일부를 암송하고 있었다.

 

1920년 수기에서, 유로브스키는, 황실가족이 처형된다는 것을 7월16일 처음으로 안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소콜로프는 그보다 훨씬 전에 골로스체킨이 우랄 소비에트와 함께 황실가족의 운명을 의논했다고 증명했다. 그에 따라 1934년에 유로브스키는 “7월10일 내지 11일 경에 필리프[골로스체킨]가 내게, 니콜라스가 처형될 예정이며, 이에 대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2) 실제로 유로브스키가 이끈 팀이 문제의 그날 밤을 위해 약 1주일간 준비를 해야했다면, 왜 그렇게 일을 엉망진창으로 수행했을까? 유로브스키가 니콜라스에게 읽어(말해)줬다고 말하고 있는 처형명령 역시 자꾸 변경되고 있다. 수기에 따르면 황실가족은 “유럽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이 소련에 공격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처형한다고 했다. 연설에서 유로브스키는 “국내외의 황실의 친척과 가까운 동료들 모두가 그를 구출하려 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노동자위원회가 처형을 판결했다”고 니콜라스에게 말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다.

 

차이는 작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이다. 유로브스키는 그가 진저리를 친 정보를 다시 한번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 문제에 개입하고 있었던 수년 동안에, 로마노프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했던 복잡한 국제동맹이 있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다른 더 작은 불일치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수기에서 유로브스키는 알렉산드라가 “천에다 몇 가닥으로 된 진짜 진주가닥을 꿰매 넣은 벨트”를 메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1934년에 그는 이 벨트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소콜로프의 정보를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단순히 큰 가닥의 금줄을 구부려 무게가 1파운드 가량 나가는 팔찌 형상”을 생각해 내고 있다. 1920년에 유로브스키는 “아침 10시 내지 11시경에” 얕은 광갱을 이용하지 않고 내버려뒀다고 말하고 있다. 그 무리들이 뒤에 진창길을 지나가기 쉽게 하고 그 공동묘지를 감추기 위해 철도 침목이 필요했을 때, 그들은 쉽사리 그것들을 입수하고 있다. 1934년의 유로브스키는 연설에서는, “오후 2시경”까지 광갱을 떠나지 않고 있었으며, 그 뒤 그는 오직 매장에만 사용되는 철도 침목들을 가져오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고 있다. 1920년과 1934년의 보고 둘 다에서 시체들을 “태우기” 위해 사용될 나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콥티아키 숲은 늪이 많아 여름에 청 솔가지로 시체들을 화장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불을 놓아 시체를 태우기 위해 필요한 2000도의 화력을 재빨리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연료는 고무와 디젤유의 화합물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상용 화장장도 시체를 완전히 태울 수 없어, 마지막에 남아있는 뼈와 치아를 맷돌에 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확실히 일부 불일치는 잘 생각나지 않는 기억 때문에 악의 없이 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14년 후에 유로브스키가 그 이야기를 하나 하나 정확하게 기억해 낸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혹은, 최초의 혁명투쟁시기에 최 일선에서 있었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하자니 이야기를 미화하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드진스키와 다른 사람들은 유로브스키가 1920년에 그 수기를 만들어 그 복사본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 유로브스키의 아들이 바로 그 복사본을 뒤에 리아보프에게 준 것이다. 그가 그 연설을 준비할 때 그 복사본을 참고했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악화되고 있는 기억력이 그 차이점들에 대한 그럴싸한 핑계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유로브스키는, 1934년의 그 집회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1920년의 그 수기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수기 자체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아마도 유일한 개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청중들 중 누군가가 그에게 그 수기와 연설간의 불일치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는 걱정을 안 해도 되었다. 아직도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유로브스키는 1934년에 그 이야기의 중요한 내용을 변경해야만 했을까? 내 생각에 그 대답은 분명하다. 로마노프가의 종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백군 소식통들로부터 취한 정보를 재료로 하여 작성된 소련정부의 역사가 분명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파벨 M. 비코프의 “로마노프가의 최후의 날들”과 유로브스키의 보고를 비교할 때, 유로브스키와 비코프 둘 다 단지 소콜로프의 자료들을 재생하여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콜로프의 자료라는 것은 그루젠벌그라는 이름의 볼셰비키가 1921년 베를린에서 소콜로프의 하숙집에 난입했을 때 드러난 것을 말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규명하고, 유로브스키의 당초 수기에 묘사돼 있는 사실들과 그의 1934년의 보고에 나타난 약간의 변경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더욱 분명히 밝힐 것이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차이가 나는 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모든 모순점들을 설명할 수 있다. 소콜로프나 비코프의 보고서들이 알려지기 훨씬 전인 1920년에 출간된 짜르구출하기라는 책은, 황실가족이 갑자기 실종된 것이 분명히 알려진 후, 두 사람의 볼셰비키들이 서로 화를 내며 로마노프 가족들의 행방에 대해 묻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영국 정보원인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황실가족의 실종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들을 날조하고 있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 볼셰비키 경비병들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을 때, 영국 영사관과 연결돼 있는 이파티에프 하우스 밑의 터널에서 황실가족과 만나서 협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짜르구출하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폭스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지하실에서 영국 대사관으로 통하는 터널을 이용해 황실가족을 성공적으로 몰래 데려 나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황실가족은 탈출했을까? 아니면 소콜로프의 설명대로 그들이 모두 11 내지 12명의 자객들에게 사살되어 불과 황산에 의해 완전히 소실돼버린 것이 사실일까?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모든 파벌들이 1918년 7월 16/17일 밤에 대해 그들 자신의 설명이 옳다고 주장해야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황실가족이 사라진 후 몇 년 동안 볼셰비키들도, 연합국들도, 혹은 여러 백군 파벌들도, 로마노프 가족들이 살해됐는지 혹은 살아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들도 그리고 그들의 적들도 그 가족들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세계가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실제로 그들을 이상한 친구들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뒤얽혀 있는 이들 모든 주인공들에 대한 진실이 어떻게 입증되는 지를 보게 될 것이다.

 

제13장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짜르와 그 가족

 

왜곡되고 있는 신뢰성

 

 

1919년 2월7일, 니콜라스 소콜로프는 백군들을 위한 세르게예프의 조사업무를 인계 받았다. 비록 소콜로프의 조사결과에 대한 예비적인 내용이 짜르구출하기 발간 후 꼭 한달 만인 1920년 8월에 영국과 미국 양국에서 확인되었다고는 해도, 1924년 그의 사후에 발표된 정식 보고서인 러시아 황실가족 암살에 대한 사법조사(Judicial Enquiry into the Assassination of the Russian Imperial Family)가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야 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앞서 여러 사람들의 모호한 보고서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다.

 

니콜라스 2세의 모후인 마리 황태후의 전 경호대장이었던 폴 불리긴 대위의 보좌를 받고 있었던 소콜로프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조건 아래서 지리한 조사를 수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와 불리긴 둘 다 로마노프 일가의 일곱 식구 모두가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려고 했다. 불에 태워지고 황산을 끼얹었다는 것은 1920년대 초에 황실가족의 실종에 대해 소콜로프가 공식적으로 내린 진단이었을 것이며,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결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즉, 1998년 7월에 페트로그라드에 묻힌 황실가족 추정의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까지 그러했을 것이다.

 

소콜로프는 그의 전임자가 조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몇몇 새로운 증거 원천에 접근했다. 세르게예프 판사가 조사업무를 소콜로프에게 인계하기 직전, 그의 사무실은 볼셰비키들이 떨어뜨려 놓고 간 전보 한 뭉치를 입수했다. 그 전보 메시지의 대부분은 진부하고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특히 한 개의 전보가 전체 조사에서 가장 물의를 일으킨 증거가 되었다. 황실가족의 처형을 인정하느냐 혹은 부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그 메시지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 암호임. 메시지는 다음과 같음: “가족이 그 가장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는 것을 스베르들로프에게 보고 바람. 공식적으로 가족은 철수 중에 죽을 것임”1)

 

 

이 전보는 처형됐다는 때로부터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1918년 7월17일 오후 9시에 보낸 것인데,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인 알렉산더 벨로보르도프의 서명이 있었다. 수신인은 레닌의 비서인 니콜라스 고르부노프인데, 그는 스베르들로프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어 있었으며, 스베르돌로프는 황실가족에 대한 모든 활동을 주재했던, 정확히 말해 권력 중추부의 측근 중의 아주 몇 안 되는 측근이었다. 이 전보는 에카테린부르그 수도원의 수녀가 호머 슬로터 소령에게 전달한 파르팬 돔닌의 보고서에 포함돼 있었던 황실가족들의 생존에 관한 정보와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다. 우리는 슬로터가 어떤 조사관들과 돔닌의 보고서를 공유한 적이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설사 그가 그렇게 했다해도, 그것이 소콜로프의 공식적인 보고서에 한 조각의 증거로서도 채택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타이밍과 정보소스 때문에 소콜로프가 즉시 그 전보에 주의를 집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상하게도 19개월이나 지난 후, 그가 결국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살해가설의 근본 요소로 삼았다. 그는 그것을 허둥지둥 후퇴하는 볼셰비키들이 잘못하여 떨어뜨리고 간 것으로서, 니콜라스는 물론 그의 가족들도 처형됐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죤 오코너가 소콜로프 조사(The Sokolov Investigation)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해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메시지의 인상적이고 보기 드문 표현을 완전히 무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섬머즈와 맹골드는 그 전보가 “거의 문학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멋지게 묘사한 바 있다. 만약 볼셰비키들이 단지 그런 일을 수행했다는 것을 상부에 알려 승인 받기를 원한 것이었다면, 왜 그런 말만 했을까? 왜 “역시 처형했다”라는 말 대신에 “같은 운명을 맞았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왜 “공식적으로”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가족이 이미 처형됐다면, 왜 “죽을 것이다”는 미래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오코너는 그 비 암호 메시지는 역시 암호 말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 가장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는 말은 예컨대 전체 가족이 기차 편으로 페름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볼셰비키들이 에카테린부르그 우체국에 그 전보를 부주의하게 남겨뒀다는 소콜로프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그는 그 냉혈한적인 범죄고백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의 의미로 해석했다.

 

짜르에 관한 파일(The File on the Tsar)에서 섬머즈와 맹골드는 그 전보와 그것의 내력에 대해 굉장히 신중한 분석을 시작했다. 그들의 놀라운, 그러나 상당히 억지스런 결론은 그 전보가 결코 볼셰비키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백군 사령관이 우체국에서 조작하여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소콜로프가 비 암호의 그 전보를 최종적으로 처리한 방식을 유념하고 있는 섬머즈와 맹골드는 그 조사관(소콜로프)이 그 조작에 참여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1919년 2월에서 1920년 8월 말 사이에 소콜로프는, 백군 사령부에 있는 암호 해독자들과 외무부 전문가에게, 그리고 1919년 8월에 시베리아 주둔 프랑스군 참모장이었던 모리스 제넹 장군 사무실에 번갈아 보내어 암호를 판독하려고 3번 시도했다. 이 모두가 “결과는 형편없는 것이었다”고 소콜로프는 그 뒤에 쓰고 있다.

 

소콜로프는 결국, 그 전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를 알게 해 준 옛 지기와 우연히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내가 유럽[1919년 볼셰비키의 진공으로 옴스크에서 쫓겨나]에 도착했을 때, 나는 특별한 소임을 맡게 된 이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한 러시아인을 만날 멋진 행운을 가졌다. 혁명 전에 그는 여러 해 동안 정부 암호부서에서 근무했다. 나는 1920년 8월25일 그에게 그 전보를 주었다. 그는 9월15일에 그것을 해독하여 보내 주었다.3)

 

섬머즈와 맹골드는 이 러시아인을 런던주재 백계 러시아 대사관 해군무관보인 A.아브자 중위로 확인했다. 어떻게 아브자는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암호해독에 성공했을까? 소콜로프가 다만 우연히 아브자를 만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아브자는, 정보 부서에서 이제 타이밍이 적정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 전보의 해독에 성공하여 소콜로프를 도와주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아브자는 소콜로프가 다음과 같이 기록할 만큼 소중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전보를 .......[아브자] 에게 주면서 나는, 그 속에 ‘가족’과 ‘철수’라는 말들을 필시 발견할 것이니 그것을 더 쉬운 말로 풀어 달라고 했다. 그 업무에 특별한 재능과 상당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이 사람은 그 메시지를 해독해 냈다.”4)

 

이 “특별한 재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브자의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알렉산드르 알렉세비치 아브자 중위는 부제독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아브자의 아들이며 근위 장비연대(제국러시아 해병대)에 배속돼 있었다.5) 아브자의 아버지는 시드니 레일리와의 과거 연고 때문에 영국 정보부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레일리는 “긴즈버그 포트-아르투르스키”(포트 아서 긴스버그)7)로 알려져 있기도 한, 모이세이 아키모비치 긴스버그(긴츠버그)사에 고용돼6) 있었다. 그들은 1906년부터 1914년까지 내내 마리타임 콘스트럭션 앤드 인슈런스사에서 함께 근무했다. 긴스버그는 1915년에 미국서 레일리를 방문했다. 긴스버그사 파트너 회사들 중의 하나는 루스코에 레소프로미시레니 토바리시체스토보(러시아 목재회사) 였다.

 

“베조브라조프 재벌”은 목재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제국황실의 배경을 갖고 있는 이 목재회사는 1900년대 초 만주에 있는 목재와 다른 이권에 대한 감독권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그룹 총수인 A.M. 베조브라조프는 이 모험사업에서 그의 친사촌인 A.M. 아브자 제독과 짜르의 친사촌이며 또한 시드니 레일리의 친구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9)

 

이 재벌에 V.M. 본리알리알스키가 객원임원으로 포함돼 있는 것은 특별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1917년에 금융사업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휴 리치에게 카롤 야로신스키를 소개했다고 주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918년 초에 금융사업계획의 핵심을 이룬 것은 시드니 레일리-야로신스키-리치 휴의 관계였다.10)

 

그 후 시드니 레일리가 1925년 모스크바의 루비안카 교도소에 구금돼 있었을 때 썼던 그의 일기에서11), 아브자라는 이름이 코빌린스키와 코발스키[인용한 것임]와 함께 나타난다. 이들 세 이름들은 모두 로마노프 조사에 대한 역사 페이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즉 아브자는 문제의 그 전보를 해독한 사람이고 -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되겠지만, 만약 그 전보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꼭 같이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는 전보가 짜르구출하기에서 확인되고 있다 - 코빌린스키는 토볼스크에서 황실가족 경비 책임자였고, 그리고 코발스키는 짜르구출하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영국 첩보원인 차알스 제임스 폭스가 황실가족 탈출기간에 아마도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던 그 사람의 이름이다.

 

섬머즈와 맹골드가 지적했듯이, 그 전보 메시지의 핵심내용을 예언할 수 있는 소콜로프의 비상한 능력이 “신뢰성을 극한으로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메시지가 전달하려고 한 것은 황실가족이 죽었다는 얘기일 것이라는 것이 그의 예상이었으면서, 왜 특히 그 전보에 “철수”라는 말이 포함돼 있는 것을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헌데, 또 하나 의문이 있다. 섬머즈와 맹골드가 조심스럽게 증명하고 있듯이 그 전보 메시지에 쓰여있는 암호(“폴리알파베티컬 대용 시스템”)는 새로운 것도 아니고 특별히 정교한 것도 아니다. 섬머즈와 맹골드는 암호사학 전공자의 자문을 받았는데, 그는 그 암호문이 “1919년에 백계 러시아인들이나 프랑스인들 모두 그 전보를 해독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같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아브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특별한 재능”은 그 바람에 별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전보가 “가족”과 “철수”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를 비록 모른다고 해도, 유능한 암호해독자라면 누구든지 해독 메시지를 제공할 수 있었을 거란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전보가 소콜로프의 주장을 “거들기 위해”(그가 알고 있었든 몰랐던 상관없이) 백군들이 조작한 것이었다면, 왜 그들은 1919년 2월에 그에게 해독 된 메시지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왜 그로 하여금 19개월간이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려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약간의 행운을 주는 조치를 취했을까? 이것은 섬머즈와 맹골드가 숙고했던 의문이다.

 

그 때까지 시도된 모든 설명과는 반대로, 우리는, 소콜로프가 그 전문을 맡겼던 백계 러시아인들과 연합군 장교들이 그것을 해독할 수 있었고 해독했으며 - 그리고 소콜로프가 그 해독된 메시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모르는 체 가장하기로 결정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 전보가 백군들이나 볼셰비키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어디서 났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금 짜르구출하기란 책이 그 회답의 일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아심이 난다. 그 책은 소콜로프가 해독된 전보를 받기 거의 3개월 전에, 그리고 그 해독된 전보가 그의 보고서에 실려 최초로 공개되기 4년 전인 1920년 7월초에 발간되었다. 짜르구출하기는 어떤 일기에서 발견된 한 통의 편지에 대한 해설로 끝내고 있다. 그 해설자의 의견인즉 이러하다.

 

“비표준적인 러시아어로 쓰여져 있고, 틀린 철자가 수없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서류는 어떤 미확인 신분으로 협력하고 있는 첩자가 그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사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한 단편인 것으로 보인다.”12)

 

해설자는 그 편지의 작자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수비대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7월초에 “새로운 남자가 ..... 수비대의 지휘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사람이 유로브스키일 것이다. 7월17일 이른 아침 시간에, 그 편지의 작자는 이파티에프 하우스로부터 길 건너에 있는 그의 보초위치에 있었다. 총소리를 듣고 그는 그 집으로 달려가서 결국 현관에 도달하여 “완벽한 소동”을 알게 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가족이 사라졌다 - 정녕,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마 후에 작자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에트 대표자들이 도착했다. 그리고는 죄수들을 데리고 가서 처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들은 모스크바에 전보를 쳤다.”13)

 

이 전보가 바로 그 유명한 전보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마침내 그 메시지의 이상야릇한 어법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을 얻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죽였다”는 말을 피하기 위한 서투른 시도(소콜로프가 믿고 있는)도 아니고, “우리가 그들을 숨겼다”는 말을 피하기 위한 영리한 시도(오코너가 주장하고 있는)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극단적인 혼란, 무질서, 그리고 황실가족이 사라졌으며, 그들이 그것에 대해 설명해야한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에카테린부르그의 (소비에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던 공포를 직접 글로 표현한 것이다. 다소 이해할만한 일이지만, 그들의 첫 반작용은 어떤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즉, “가족이 그 가장과 같은 운명을 당했다”는 말은 실지로 어떤 것을 여러 가지 설명으로 보여주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들의 두 번째 반작용은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즉 “가족은 철수 도중에 죽을 것이다”는, 가족이 곧 발견될 것이며 그리고 그 미래시제의 약속이 실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보들 외에 소콜로프는 다른 일부 증거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7월 16/17일 밤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근무했으며, 백군들에게 잡혔거나 자수한 3명의 붉은군대 수비대원들의 증언이 그것이다. 필립 프로스쿠리아코프, 아나톨리 야키모프 그리고 파벨 메드베데프 3명은 모두 처형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단지 메드베데프는 그가 사격이 있은 직후 그 방에 있었으며 모든 희생자들의 시체들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들 세 사람의 증인들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많은 총소리를 들었는지, 그리고 시체들이 어떻게 그 집에서 옮겨졌는지에 대한 것과 같은 일부 중심적인 사실들에 대해선 서로 증언이 엇갈렸다.

 

“학살의 방”에서 소콜로프는 탄환구멍을 3개 더(혹은, 세르게에프의 계산에 대한 엘리오트의 설명이 정확하다면, 13개 더) 발견했으며, 추가 낙서들과 상당히 많은 핏자국을 찾아냈다. 나메트킨, 세르게예프 및 다른 사람들이 약 6개월이 넘게 그 현장을 세밀히 조사한 특별한 노력을 감안한다면 - 세르게예프는 심지어 벽과 마루의 큰 부분들을 떼어내 현미경 검사를 위해 운반해 가기도 했다 -, 소콜로프가 추가로 탄환구멍을 발견한 것이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다. 만약 세르게예프의 마지막 방문 후에 그 집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믿을만한 것이었을까?

 

처음에 소콜로프 팀은 간닌피트에서 유사한 종류의 법정마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1919년 5월23일에서 6월17일까지 한 조의 군인들과 전문가들이 계속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광산의 광갱에서 다시 물을 퍼내기도 하고, 그 지역을 부분적으로 세밀히 조사하기도 하고, 체를 이용해 표토를 걸러내기도 했다. 6월6일에서 7월10일까지 광산 주위 20 헥타르의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늪지로 된 숲 속에 사람들을 늘어 세워 천천히 움직이게 하면서 쇠막대기로 매 피트마다 땅을 쑤시며 조직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가장 인상적인 발견은 6개의 코르세트(네 사람의 로마노프 여인들과 두 사람의 시녀를 계산하여)에서 나온 완벽한 한 세트의 쇠로 된 지주(支柱)였다. 소콜로프는 코르세트가 불에 탔지만, 그밖에 어떤 다른 손상을 열거할만한 흔적은 - 예컨대 탄환 흔적이나 움푹 들어간 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이하게도 종전의 조사단들은 이들 코르세트 지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조사단은 또한 약간의 유골을 찾아냈지만, 전문가들은 “그것이 인간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만 말할 수 있었다. 소련 문서들에서 나온 자료는 현재 그 유골들이 아마도 먹기 위해 잡은 한 마리 혹은 더 많은 수의 동물 뼈였을 것이라고 확인하고 있는 것 같다.14)

 

결과는 전혀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1918년 7월 이후 수많은 조사단원들이 약 65개의 작은 품목들, 주로 단추, 허리띠, 타다 남은 옷가지 및 보석들을 찾아냈으며, 그것들의 거의 모두가 황실가족들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인간 신체 부분으로는 결국 의사 보트킨의 의치의 윗 부분, 한 조각의 피부 그리고 손가락 끝마디 하나(소콜로프는 이 손가락 마디가 황후의 것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가 전부였다. 유로브스키의 말을 믿는다면 11구 내지 12구의 시신이 묻혀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수개월간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조사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었다.

 

백군이 볼셰비키군의 재기로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쫓겨나기 직전인 1919년 6월말에 하나의 큰 진전이 있었다. 타티아나 공주의 강아지인 제미의 시체가 광갱의 밑바닥에서 발견된 것이다. 소콜로프와 백군 장교들은 이 발견을 전체 황실가족이 살해된 결정적인 증거로 삼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또한 왜 그 개가 아주 기이하게 잘 모셔졌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소콜로프의 전략은 그 개의 시체가 온전했던 것은 약 11개월 동안 광갱 바닥에서 얼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하는 것이었다. 기상기록들을 살펴보고 동물병리학자들의 의견을 들은 섬머즈와 맹골드는 1976년, 소콜로프의 가설은 틀린 것이었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개의 시체가 1918년 7월17일 이후 광갱에서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는 것은, 시베리아의 여름이 굉장히 덮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때 로마노프 일가의 명백한 살해증거가 되었던 제미의 시체가 오히려 조사관들이 수집했던 증거의 일부(많지 는 않지만)가 조작되고 일부러 갖다 놓은 억지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어딘가 그럴듯해 보인다. 어떻게 제미의 시체가 로마노프 가족 실종 후 1년 가까이 광갱 속에 있었는지, 그리고 왜 유로브스키는 1920년 수기에서 그 개를 생각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흥미를 자아내는 의문은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18년 7월 16/17일의 사건들에 대해, 볼셰비키들의 오도된 보도자료가 나온 이후, 마땅히 백군 조사관들의 최초의 진상발표가 되어야 할 소콜로프 보고서는 실질적으로 1921년에 러시아에서 파벨 비코프가 발표한 논문에 의해 앞질러 보도돼버렸다. 이들 두 기록들의 놀라운 유사성은, 뒷날, 그루젠버그라는 이름의 볼셰비키가 당시 소콜로프가 살고 있었던 베를린의 집에 난입한 사건이 알려지게 됨으로써 설명되었다.15) 폴 불리긴에 따르면, 그루젠버그는 황실가족의 죽음에 대한 예비 보고서의 기록을 갖고 자취를 감췄다. 이들 기록들은 러시아에서 비코프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불가사의하게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그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비코프가 1926년 그의 책의 개정판을 발간했을 때, 그것은 소콜로프 최종보고서의 모든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루젠버그와 그리고 소련은 소콜로프와 불리긴이 무엇을 세계에 알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는 지를 알기 위해 왜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하려고 했을까? 그루젠버그는 누구였을까? 이 주거침입에 관여했던 것으로 가장 유력시되는 사람은 시카고 사람이며 “기자”였던 마이클 그루젠버그였다.16) 1921년경 그루젠버그는 이미 아주 별난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혁명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 같다.17) 레닌의 가까운 친구였던 그는 때때로 알렉산더 굼버그로 혼돈 되기도 했다. 그는 1918년 봄에 러시아에서 미국 적십자 운동을 벌이고 있었던 레이몬드 로빈스의 비서로 근무했다. 그 때 그와 로크하르트가 트로츠키와 협상을 벌였다.18) 미국, 영국, 프랑스의 군 정보원들이19) 그루젠버그를 근접해서 따라다녔다.

 

1918년 5월에 그루젠버그는 개인 밀사를 통해 레닌으로부터 러시아로 즉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지체없이 그는 제일 빠른 배를 타고 특별대접을 받으며 러시아로 향했다.20) 그가 6월8일 미국세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관관리들은 통상적인 수속절차를 생략하고 그를 출발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21) 그 결과 우리는 당시 그의 짐 꾸러미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미국에서 출발한 후 그루젠버그가 처음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아래 내용의 전보 하나가 8월31일에 발송됐다.

 

국무부 워싱턴

 

오후 3시

 

576 팔머로부터 콤풉[미정부 선전기관]의 시쏜[에드가]에게

 

시카고의 마이클 그루젠버그가 어윈[미국 선전기관의 책임자인 죠지 크릴의 보좌관]이 서명한 그의 사진과 함께 콤풉의 편지를 제시하였음. 어윈은 러시아에의 특별사절 방문 준비를 위해 그를 보내며, 크릴과도 역시 이야기가 됐다고 말했음. 여기서 계정을 개설한 후 월요일 밤에 페트로그라드를 향해 떠났음. 당연히 세부사항을 통보하지 않고 전보 위임 없이 자금을 빌려주겠지만 그러나 대리인들이 직접 공급받도록 제의함...

 

[쉘던] 백악관22)

 

미국과 영국의 선전기관들은 때때로 비밀작전을 위한 자금지급을 처리하는 “어음” 체널로 이용되기도 했다. 1918년 8월 말, 스스로 볼셰비키임을 자처한 그루젠버그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미국자금을 전달하는 믿기 어려운 밀사로 보였을 것이다. 훗날, 소련이 독일인들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취지의 서류들을 미국이 샀던 것이 입증됐다. 이것은 시쏜 서류(Sisson Papers)로서 알려졌으나, 그 전달시기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루젠버그에 의해 전달된 자금은 그 거래와 연계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레닌과 가까운 한 정보원에 의해 처리된 1918년 8월의 금융거래는 1918년에 레닌에게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지불이 이루어진 것으로 입증됐으며, 금융사업계획 외의 이유로 지불된 최초의 자금이었다.23)

 

마이클 그루젠버그가 소콜로프의 기록들을 훔치기 위해 베를린에 특사로 파견된 것으로 보이고 있는 사실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그 서류에 애착을 가질 만큼 그것이 중요했다는 증거이다. 일단 그 기록이 러시아로 되돌아가자, 세계는 황실가족 전체가 1918년 7월17일 이른 새벽 시간에 실종됐다는 니콜라스 소콜로프와 파벨 비코프 양쪽 모두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소콜로프는 연합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백군에 고용된 사람이고, 비코프는 공식적인 소련 역사가이며 우랄 소비에트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비코프는 몇몇 그의 전임자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객들의 숫자에 대해, 소콜로프는 11명 내지 12명으로, 유로브스키는 12명으로 말하고 있는데 반해, 비코프는 4명으로 잡고 있다. 비코프와 소콜로프 두 사람 모두, 처형 후 야코프 유로브스키가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시체들을 콥티아키 숲 속으로 운반해 갔다고 말하고 있다. 소콜로프는, 시체들이 (일부는) 불태워지고 (다른 일부는)황산이 끼얹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비코프는 시체들이 불태워지고 - 흔적도 없이 파괴됐다고 말하고 있다. 훗날 몇몇 기록된 볼셰비키 증언은 시체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그들의 재를 바람에 날려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음의 글은 그 사건에 대한 비코프의 전체적인 설명이다. 이 글은 그 사건조사에서 소콜로프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폴 불리긴과, 황실가족을 시베리아로 재배치하는데 책임이 있는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낸 책에 들어 있었다. 이 요약된 글은 비코프가 소콜로프의 자료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후, 1921년에 처음으로 발표한 공식적인 소련 역사의 핵심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황실가족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소련의 설명을 대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황제의 마지막 날들24)

 

- P.M. 비코프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 의장

 

1917년,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될 무렵, 상뜨 페테르스부르그 프레스지(紙)와,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자들의 신문들에는 토볼스크에 있는 로마노프 가족의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을 둘러싼 반혁명적 요소를 가진 집회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전 짜르를 탈출시키느니 어쩌니 하는 일련의 악의적인 허위 소문들이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와 현지 소비에트들, 특히 우랄관구 소비에트로 하여금 짜르의 감시에 바짝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토볼스크로부터 오고 있는 그런 단편적인 뉴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러시아인들과 - 더욱이 - 외국의 반혁명분자들 양쪽에서 니콜라스 로마노프와 그 가족의 탈출을 꾀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외국 왕가 친척들과 국내 구정권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그의 복위를 위한 길을 닦고 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마침, 악명 높은 반동주의자인 헤르모겐 주교도 황실가족이 토볼스크로 옮겨졌을 때 이미 그들을 만나러 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짜르 개인에게 더 큰 불행을 가져올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가짜 통행증을 갖고 처신하고 있는 알쏭달쏭한 관리들이 표면적으로는 “요양하기 위해” 토볼스크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의 하나인 라베브스키는 헤르모겐 주교를 방문하여 짜르에게 마리아 황태후가 보낸 편지를 전해주었다........

 

로마노프 가족들을 토볼스크로부터 관리하기에 더 안전한 곳으로, 그리고 니콜라스 로마노프의 탈출에 즉각 손을 쓸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문제가 우랄관구 소비에트의 2월 회합 중 하나에서 제기됐다....동시에 우랄관구 소비에트는 이 문제로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와 또한 동 위원회 의장인 J.M. 스베르들로프와의 직접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우랄 소비에트는 니콜라스 로마노프를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길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토볼스크의 실제 상황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리고 전 짜르와 그 가족을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기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우랄 소비에트가 세 사람의 동지들을 토볼스크에 파견했다. 그들은 아브데예프(즐로카조브스키 공장 노동자), 호크리아코프[코크리아코프](선원) 그리고 자슬라브스키(나테즈딘스키 공장 노동자)였다. 그들의 파견은 그 곳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확인하고, 공산주의 선전을 하며, 그리고 현지 소비에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동지들은 가짜 통행증을 갖고 그들 여행의 실질적인 목적을 밝히지 않은 체 3월 초순 토볼스크를 향해 떠났다. 우리는 토볼스크 소비에트와 로마노프 가족을 감시하고 있는 군부대 양쪽 모두를 의심할만한 이유들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도 케렌스키의 수비대 병사들로 구성돼 있었으며, 케렌스키의 수비대는 원칙적인 문제에서 볼셰비키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랄소비에트 밀사들이 토볼스크에 도착하여 특별 사자의 자격으로 에카테린부르그와 접촉을 계속하면서 작업에 착수했다. 토볼스크소비에트는 멘셰비키들과 사회주의 혁명가들(S.Rs)로 구성돼 있었다. 공산당 조직은 없었다.

 

전 지사 관사에 머물고 있는 로마노프 가족은 상당한 수준의 자유가 허용돼 있었다. 그들은 바깥세계와 자유롭게 교신을 할 수 있었으며, 외부에서 음식물 등의 공급을 받고 있었다....

 

에카테린부르그에서 온 동지들은 곧 로마노프 가족들을 지키고 있었던 특별부대들을 포함한 여러 부대들의 병사들 사이에, 그리고 그 도시의 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공산주의 선전단체를 조직했다. 10일 안에 호크리아코프는 그 단체의 부의장으로 선출됐고, 그 후 곧 현지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 이것이 우랄소비에트로 하여금 토볼스크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중요한 교신 메시지들이 자주 방해를 받거나 그 뜻이 왜곡되곤 했기 때문에 정보를 충분히 이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서 시베리아에서 온 데미아노프를 대장으로 하는 독립 분견대가 옴스크로부터 토볼스크에 도착했다. 동시에 다른 기관들의 관계자들이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티우멘, 골리셔마노보 등과 같은 토볼스크 근방의 여러 지역들에 파견됐으며, 우랄 소비에트 역시 믿을만한 붉은군대 사람들을 여러 곳에서 한 사람씩 차출하여 토볼스크 자체에 보냈다. 현재 그들은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으며, 호크리아코프의 지휘아래 있다.

 

자신들의 실질적인 목적을 비밀로 하고 있는 이들 여러 기관들이 토볼스크에서 회합을 가짐으로서 로마노프 가족들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 에카테린부르그와 옴스크 분견대 각 구성원들 사이에, 그리고 특히, 당연히 토볼스크의 반혁명분자들 사이에 분명히 불안을 야기하고 있었다........

 

옴스크와 에카테린부르그 당 사이의 긴장된 관계가 결국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던 호카리아코프의 체포로 끝을 맺었다. 그가 업무에 특별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은 우랄소비에트와의 전보교신 뿐이었으며, 그것이 그를 처형에서 구해주었다.

 

이 기간 내내 에카테린부르그 당국자들은 로마노프 가족들의 이송문제를 (모스크바의)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와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관장하고 있었던 위원회는 우랄관구 군사담당 인민위원인 골로스체킨이 파견돼 옴으로서 더욱 강화되었고, 그것이 위원회로 하여금 황실가족의 이송을 주선하는데 군의 협력을 요청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침내 (서부 시베리아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우랄관구 소비에트로부터의 거듭된 제언으로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는 전 짜르와 그 가족이 우랄관구로 옮길 것이며,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앙위원회 자체를 대표하여 야코블레프가 파견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분명히 우랄소비에트와의 협력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야코블레프는 에카테린부르그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윽고 심스키 미니알스키 공장 노동자출신의 한 민병대원과 함께 찰리아빈스크와 옴스크를 거쳐 토볼스크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로들은 눈이 녹아 통행이 불가능해지고 있었고, 로마노프 가족을 옮기는 데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니콜라스 로마노프,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 그들의 딸 마리아와 의사 보트킨을 옮기기로 하고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과 시녀들 및 다른 수행원들은 첫 기선들이 들어올 때까지 남겨두기로 결정됐다. 전 왕자인 돌고루코프 역시 토볼스크를 떠나는 첫 일행에 포함됐다.

 

야코블레프가 미쳐 도착하기 전에 시작된 이송여행을 위한 예비적인 준비가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처지가 철저하게 변화될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토볼스크를 몹시 떠나기 싫어하면서 여러 번 항의를 했다.

 

토볼스크로부터 티우멘으로의 여행은 무사히 끝났다. 다만 출발 때부터 우랄 쪽 사람들이 야코블레프를 의심하기 시작한 사실을 제외한다면 그러했다. 야코블레프는 - 니콜라스에게 특별한 경의를 표하고,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등 - 그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를 호위했다. 그래서 우랄 쪽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야코블레프 쪽에 대한 반역의 첫 징후로 그 일당을 공격하고자 요브레보 마을(거기서 야코블레프 일행이 토볼강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인근에 매복하고 있었다.

 

티우멘에서 로마노프 일가는 특별열차를 타게 되었고,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가 그에게 준 특권으로 야코블레프는 몸소 전신국에 가서 모스크바와 전신을 연결, 크레믈린과 직접적인 전신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 대화의 결과는 곧 분명해졌다.

 

우랄 소비에트는, 그 기차가 에카테린부르그를 향해 출발했다는 한 통의 전보를 받았지만, 그러나 곧 이어, 로마노프 일가를 태우고 있는 공산당 인민위원인 야코블레프의 기차가 옴스크 쪽을 향해 전 속력으로 티우멘 역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보가 왔다.

 

공산당 우랄관구 협의회의 한 비밀회의(그 때 열리고 있었다)에서, 골로스체킨은 짜르와 그 가족을 토볼스크로부터 옮기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 진전사항에 대한 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동 협의회는 로마노프 일가를 혁명적인 에카테린부르그로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안은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와 당 집행위원회에 전달됐다.

 

야코블레프를 체포하여 그를 우랄관구로 데려오기 위해 특별열차 편으로 소규모 군대가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즉시 파송되었다. 그와 동시에 옴스크의 믿음직한 동지들을 전보로 접촉하여 그 기차를 시베리아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게 하고, 필요하다면 폭파해버리도록 요청했고 그쪽에서 동의했다.

 

이심(Ishim)에 접근하고 있던 야코블레프는 텅빈 들판에서 기차를 멈추게 하고 로마노프 일가에게 “햇볕 을 쐬며” 산보하도록 허용했다. 그 후 옴스크를 향한 여행이 다시 계속됐다. 하지만, 그는 옴스크에 결코 도착하지 못했고, 그를 위해 준비돼 있는 “환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갔다......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는 로마노프 일가를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하기로 결정했다. 그 저택의 주인은 내쫓겼고 그리고 이어서 그 집은 호기심 강한 시선들을 차단하기 위해 느슨한 울타리로 둘러싸여졌다.

 

이파티에프 저택은 소비에트의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에, “특수목적의 집”에 도착한 로마노프 일가는 그 집 감독관인 아브데예프 동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들의 소지품들은 체포될 때에도, 토볼스크에서도 조사를 받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그들이 가져온 작은 여행가방을 열라는 요청을 받았다.

 

니콜라스는 불평 없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그녀의 소지품을 조사 받지 않겠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감독관과 언쟁을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흥분하여 방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하며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 지독하군! 지금까지 우리는 공손한 대접을 받아 왔어, 사람들도 신사적이었고. 그런데 지금은..........”

 

로마노프는 그 즉시 그가 더 이상 짜르스코에 셀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카테린부르그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요청 받았으며, 그리고 만약 도발적인 태도의 행동을 하면, 그의 가족과 떼어놓을 것이며, 그래도 또 위반하면 - 강제노동을 시키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스 둘 다 그들이 더 이상 섣부른 짓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실감하고 저택감독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파티에프 하우스는 2층 건물이며 아래층은 베제네센스키가(街)로 통하는 가파른 경사 때문에 부분적으로 지표보다 더 낮다. 이 낮은 층은 주로 상점, 사무실 및 주방이 들어 서 있다. 로마노프 일가에게는 2층의 5개방이 배당됐는데, 거기서 그들은 반 영어의 상태로 감금돼 있었다.

 

5월에 토볼스크로부터 이곳으로 데려 온 로마노프의 아들과 그의 다른 딸들 역시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됐다.

 

비록 죄수들에게 어떤 특별한 보복을 하거나 엄격한 교도소 규칙을 적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관구소비에트가 그 집을 삼엄한 경계 하에 두었고, 죄수들은 항상 붉은 수비대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다. 붉은 수비대의 한 분견대가 이 “특수목적의 집”과 마주한 한 빌딩에 주둔하고 있었다.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체로 바보처럼 무관심함을 보이고 있는 니콜라스 로마노프는 매우 얌전하게 그 집의 규칙을 지켰다. 그는 처음에는 보초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했지만, 이것이 금지된 사항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니콜라스와는 달랐다. 그녀는 규칙이라며 그녀에게 과해지고 있는 조건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항의했으며, 관구 소비에트를 대표하고 있는 관리들은 물론 수비대 병사들을 모욕했다.

 

가족이 먹는 음식은 그 도시에서 가장 이름난 소비에트 빈민접대 무료식당에서 가져왔다. 죄수들에게는 하루에 두끼의 “정찬”이 허용됐다. 가족들은 석유난로 하나에다 음식을 데워 먹었다.

 

죄수들은 그 집에 딸린 조그마한 정원에서 하루에 한번씩 산책이 허용됐다. 정원에서 그들은 잠간씩 근육노동을 할 수 있었고, 필요한 연장은 임의로 쓸 수 있었다. 산책시간은 그들 스스로 선택했다.

 

저택감독관은 죄수들의 사생활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그들 좋을 대로 배분할 수 있었다.

 

부활절 기간에 로마노프일가는 성당에 가고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것은 거절당했지만, 성직자 한 사람이 그 집을 방문하여 성사를 보는 것은 허용됐다. 부활절 케이크, 부활절 푸딩 및 부활절 계란 역시 로마노프가를 위해 주문됐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소하물”도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근처에 있는 수도원의 수녀들에 의한 식품제공을 끈덕지게 금지했다. 수녀들은 거의 매일 로마노프 일가를 위해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요리된 음식들을 여러 바구니에 담아 가져왔다. 그럴 때마다 감독관은 이 음식들을 수비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니콜라스가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겨오자마자 모든 종류의 군주제주의자들 - 얼빠진 늙은 숙녀들, 백작 및 남작부인들, 수녀들 및 성직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외국정부 대리인에 이르기까지 - 이 그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파테이프 하우스에의 자유로운 출입은 극소수의 사람들과 우랄관구 소비에트 구성원들에게 한정돼 있었다. 니콜라스 방문 허가권은 오직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만이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니콜라스와 접촉하려는 온갖 사람들의 부단한 시도가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제주의자 식객들이 시내의 호텔이란 호텔을 모조리 예약을 하는 등 계속 법석을 떨었으며,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특히 황제의 생일이나 그와 비슷한 경우에는 부지런히 편지들을 써댔다.....

 

에카테린부르그의 군주제주의자들이 심지어 전체 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전 짜르를 구출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랄관구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비조직적이고 자발적으로 전 짜르와 그 주위에 몰려든 도당들에게 린치를 가할 가능성에 대처해야했다. 반혁명적인 행동에 대한 비장의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프롤레타리아의 의분이 하도 컸기 때문에 베르크네 이세츠키 공장의 노동자들은 린치를 위한 날짜 - 노동절 시위 - 를 확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한 비조직적인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관구 소비에트는 자체 구성원들 중의 하나를 그 문제에 매달리도록 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잇따라 국제적십자사의 일부 대리인들과 체코슬로바키아군들 사이의 커넥션이 실제로 입증되었다.

 

이름이 있는 반혁명당원들과 수상쩍은 인물들이 토볼스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에카테린부르그에 계속 몰려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계획을 세워 로마노프와 그의 모든 친척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전선이 에카테린부르그에 더 가까이 접근해 옴에 따라, 현지의 반혁명당에 “충성하고 있는” 장교들 역시 니콜라스 로마노프와 그리고 특히 더 적극적이고 비타협적인 알렉산드라에게 부지런히 편지를 보내며 짜르 가족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래 글은 죄수들과 그리고 6월에 로마노프 일가를 구출하려고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봉기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던 음모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 중 하나다.

 

가까운 장래에 자유의 시간을 가지실 것이며 복위하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슬라브(체코슬로바키아) 군대들이 에카테린부르그에 더 가까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가에서 겨우 몇 마일 바깥에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며 유혈의 위험이 있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행동에 나설 것입니다.

 

황제폐하, 황후 폐하, (다른 편지를 통해) 더 이상 주무시지 마십시오. 오래도록 기다렸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민들의 손으로 폐위된 범죄자들을 탈취하려 하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짜르 가족들을 그토록 가슴깊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외부에 있는 로마노프 추종자들이 쓴 압수된 편지들의 대부분이 “장교”라는 말로 서명돼 있었다. 어느 것은 심지어 “폐하를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 중 하나 - 러시군의 한 장교...”로 끝을 맺고 있었다.

 

니콜라스 로마노프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처형하는 문제가 7월초에 대체로 결정됐다.

 

처형에 대한 실제적인 내용은 소비에트 수석위원회 몫으로 남겨졌다. 선고는 7월 16/17일 밤에 집행되었다. 7월18일에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의 수석위원회 회합에서, 전 짜르가 처형됐음을 의장인 스베르들로프가 발표했다.

 

우랄관구소비에트가 로마노프의 처형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부추긴 현지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토의한 후 러시아최고중앙집행위원회 수석위원회는 이 결정을 승인했다.

 

우랄관구소비에트 수석위원회가 니콜라스 로마노프와 그 가족의 사형선고안에 서명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전투부대들이 이미 가까이 와 있었으며, 반혁명 도당들이 두 방향, 즉 첼리아빈스크와 그리고 서부 우랄철도를 따라 에카테린부르그로 동시에 몰려들고 있었다.

 

처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처형과 시체처리와 관련된 모든 준비가 이미 두토프(오렌스버그 코사크) 전선에서 시련을 겪은 바 있는 믿을만한 혁명가 - 베르크네-이세츠키 공장 노동자 출신인 피터 자카로비치 에르마코프 - 에게 위임됐다.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은 그들이 거처하고 있는 2층에서 지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저녁 10시경에 전체 로마노프 가족들 - 즉 전 짜르 니콜라스 알렉산드로비치,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페도로브나, 그의 아들 알렉세이, 딸들, 가족의사 보트킨, 법정상속인(알렉세이)의 부가정교사 그리고 가족으로 남아있었던 전 시녀 - 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통상적으로 매우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모두 실내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지하실 방들 중 하나에 그들은 벽을 등지고 줄을 지어 서도록 지시를 받았다. 우랄소비에트의 공식 대리인이기도 했던 저택감독관이 사형집행영장을 소리내어 읽은 후, 그들의 모든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 그들은 죽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이 뜻하지 않았던 발표는 죄수들을 기절초풍케 했다. 짜르 혼자만 미심쩍은 목소리로

 

“그래서 우리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단 말이지?” 했을 뿐이었다.

 

사형수들은 곧 연발권총으로 처형되었다.......

 

오직 네 사람이 처형에 참가했으며 그들은 사격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밤 1시경에 처형된 사람들의 시체가 베르크네-이세츠키 공장과 팔키노 마을 가까운 숲 속으로 옮겨 다음날 불태워졌다.

 

총살형이 거의 도시의 중심지역에서 집행됐는데도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는 동안 집 밖에 세워둔 트럭의 시동소리 때문에 총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바깥에서 그 집을 지키고 있었던 보초병들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2일간이나 더 그들의 통상적인 임무를 계속했다.

 

사형을 집행했다는 발표가 7월23일자 현지 신문에 실렸다.....

 

1918년 여름에 백군이 에카테린부르그를 장악하고 있었을 때 백군 장군들이 처음 시작한 일은 로마노프 가족의 시체를 찾는 것이었다.

 

이 특별중대사건에 대한 정식 조사관에 옴스크관구 법원의 소콜로프가 임명되었으며 그에게 조사수행지시가 떨어졌다. 그의 노고의 결과는 “퇴위한 군주, 니콜라스 알렉산드로비치 황제와 그의 가족의 살해에 관한” 일건 서류였다.

 

그는 약 200명의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이 “범죄”에 연루돼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대부분은 로마노프 일가의 살해에 결코 관련돼 있지 않았으며, 오직 그것을 근사하고 긴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조사관이 억지로 끌어넣은 것이다.

 

백군 수비대 신문들과 모든 종류의 수전노들은 대중들을 골려 주려는 듯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로마노프 일가의 생활과 그들의 처형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장 환상적으로 써댔다.

 

심지어 니콜라스를 비롯한 가족 전부가 에카테린부르그를 몰래 빠져나갔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설득시키려하고 있었던 소설 같은 책들도 몇 권 있었다.

 

군 당국자들에 의해 수행된, 시체들이 파괴된 장소 근방에 대한 조사는 약간의 값비싼 보석과 금 장신구를 발견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로마노프 일가는 평상복을 입은 체 처형됐다. 시체들을 태우기로 결정하고, 우선 옷부터 벗겼다. 몇 점의 옷에서 꿰매 논 보석이 발견되었다(옷은 불살라졌다). 이들 귀중품의 일부를 떨어뜨렸거나 혹은 옷과 함께 불 속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백군 수비대 조사관들이 붉은군대 포로들과 콥티아키 마을 농부들을 징발하여 수색작업에 협조토록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찾은 것이라곤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심지어 “의심이 가는” 폐광의 물을 퍼내기 위해 베르크네 이세츠키 공장에서 증기발동기를 가져오기조차 했다.

 

콜차크 제독이 그 조사를 감독하도록 임명한 디테리크스 장군은 결국, 로마노프 가족은 살해됐으며 그 시체들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고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랄 관구에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은 짜르와 그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로마노프의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 1917년 2월에 자본주의자들이 그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 그의 도움으로 군주제를 존속시키려 시도했다 - 는 7월 중순경에 페름에서 처형됐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알라파예브스크에선 세르기우스 미하일로비치, 이고르 콘스탄티노비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그리고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대공들이 처형됐다. 이들의 시체들은 백군 비밀기관에 의해 발견되어 알라파예브스크 성당의 납골당에 정장을 입은 체 묻혀졌다.

 

당시 소비에트의 공식적인 발표가 로마노프 가족들의 처형에 관한 전체 내용의 해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전 짜르의 처형만 발표됐고, 반면 우리 보도기관에 따르면, 대공들은 도주했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유괴 - 납치 - 됐거나 한 것으로 생각됐다. 니콜라스의 아내, 아들 및 딸들에 대해서도 대공들과 유사한 발표를 했다. 그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됐다.

 

이것은 현지 소비에트 쪽에서의 어떤 동요 때문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역사적 사실은 우리 소비에트들 - 관구 소비에트와 페름 및 알라파예브스크 소비에트 - 이 한 때 황제 주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절멸시키려고 결정하면서 용기와 결단을 갖고 행동했다는 증거이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이 사건들이 단순히 노동자들의 혁명 전개에서의 역사적 사실로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짜르를 처형한 것에서, 그리고 다른 로마노프 일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노동자들) 자신의 주도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위험부담으로 행동한 것에서, 우랄 소비에트가 황실가족과 대공들의 처형을 숨기려고 한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군주제주의자들이 황실가족 일부의 탈출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우랄관구소비에트가 미하일 로마노프의 처형을 공식 발표함으로써 이들 의구심들을 불식시켰던 것은 1918년 겨울 이후였다.

 

비코프 보고서의 여러 주장 가운데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 하나는, “사형이 집행되는 동안 집 밖에 세워둔 트럭의 시동소리 때문에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언급이다. 그는 말하기를, “바깥에서 그 집을 지키고 있었던 보초들마저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다. 지하방에서의 콩볶듯하는 발포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고, 희생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소음(消音)하기가 불가능했을 터인데, 집 바깥의 수비대가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즉 그가 고백하고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그리고 황실가족이 다른 방법으로 그 집을 떠나 그래서 다른 운명을 맞은 것이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비록 소콜로프와 비코프의 보고서가, 소콜로프 조사란 책을 낸 죤 오코너25)와 짜르에 관한 파일을 저술한 섬머즈 및 맹골드가 행한 탁월한 법률적 분석에 의해 논박을 당했다고는 하더라도, 비코프와 소콜로프의 설명의 일부는 70년간 - 즉 “기독교인 혁명희생자들”의 유골이 그 숲 속에서 발견되었을 때까지 -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던 것이다. 마침내 DNA 검사가 실시되고 “장례”가 행해졌을 때, 일반적으로 세계는 결국 소콜로프와 소련의 “공식적인 역사가”인 비코프가 제기한 주장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논박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이 나고 있는 것이다. 불에 태워지고.......단지 4명의 자객, 12명의 자객 등등. 비코프는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가 즉시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을 변명하고 있다. 그는 그 당시 에카테린부르그 소비에트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내부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격으로 직접 얻은 지식 및 짜르와 그 가족의 계획적인 처형에 대한 내용, 특히 몇 명의 집행자가 참여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의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실들을 기억해 내는 데는 불일치가 생기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자랑스런 혁명을 위해, 그러한 중대한 사건에 참가했노라고 주장했을 사람들의 숫자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착오인가, 아니면 대등한 실수인가?

 

로마노프 일가가 사라진 후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로마노프의 이름이 일부 집단에서 거론될 때마다, 사건 참가자들은 이면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여러 해 동안 장황하게 이야기 돼 왔던 설명들 중의 하나를 성실하게 되풀이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진실에 대한 조사연구가, 헤아릴 수 없는 혼미와 종종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는 절반의 진리 때문에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법률적인 시각에서의 입증이라는 부담은 분명히 직면한 적이 없었으며 그리고 불행히도 역사적인 도덕규범을 위한 심판수위가 낮추어졌다. 일부 학도들은 “로마노프 사건”에 대한 연구가 그들의 동료들 가운데서 일종의 “전문적인 살인자”에 대한 연구로 파악돼 왔다는 것을 은밀히 공유하고 있다.

 

제4부 진실을 찾아서

 

제14장 1920년 샌프란시스코

 

“국가에 굉장히 중요한 일”

 

1920년은 거의 1918년만큼이나 로마노프 무용담으로 호기심이 자극된 해였던 것 같다. 구이 리챠드스의 책 짜르 찾기(Hunt for the Czar)를 읽은 후 나는 짜르구출하기란 다른 책에 정통하게 된 반면, 막상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에는 그렇게 탐탁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무기 및 금의 수송과 관련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 영사인 로마노브스키1)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나를 이 책에 푹 빠지게 했고, 그리고 라데크가 암시했던 것과 같은, 한편에서의 무기 및 금의 이동과 다른 한편에서의 황실가족 구출시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만들었다.

 

사실 앞장에서 보아 왔던 미국인들, 영국인들, 체코인들, 프랑스인들, 독일인들, 일본인들 그리고 볼셰비키들 사이의 복잡한 고리는 확실히 1920년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사람들 및 사건들과 관계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분명 1918년의 러시아 사태에 연루돼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러시아 이주자들의 승선 및 출국항구였으며, 동시에 남 러시아에서 백군의 랑겔 장군이 계속 수행하고 있었던 전쟁에 필요한 탄약과 자금의 선적항이기도 했다.

 

내가 러시아 영사관 파일을 연구하고 있던 기간에 어떤 책 한 권이 나의 주의를 끌었는데, 당시 미국으로부터의 무기인도를 훌륭하게 연구한 책인 윌리엄 클라크의 짜르의 잃어버린 행운(The Lost Fortune of the Tsars)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토마스, 쉐라톤 및 셔먼호2)를 위시한 선박으로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로 수많은 무기들을 선적한 흔적을 추적하려고 시도했다. 1918년 5월23일의 한 회합 - 이 회합에서 라데크는, 토마스라 불리는 배가 마사리크의 체코군들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무기를 싣고 오는 일에 관여할 것이라고 레닌에게 알려주었다 - 을 상기할 때,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과 등장인물들이 더 한층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 흥미를 자아내는 무기거래는 추적하기가 매우 복잡하고, 모호하고 그리고 어렵다. 이들 무기와 자금거래에는 네셔널 시티은행, 하우스 오프 모건, 쿤 & 뤱 등의 금융회사들이 개입됐다. 이들 회사들이 러시아에 빌려준 전쟁부채로 휘청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역시 흥미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리고 라데크가 주장했듯이 네셔널 시티은행이 니콜라스를 위해 체코군에 대한 무기공급에 연루돼 있었다는 것이 특히 주목할만하다.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영사관 기록들에 대한 추가 조사에서, 나는 짜르구출하기의 영문 “번역자들” 중의 한 사람인 게오르그 로마노브스키가, 클라크의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이 이들 무기선적에 연루돼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해주는 서류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는 또한 상당한 수량의 짜르 금괴를 미국으로 가져오려는 계획에 연루돼 있었는지도 모른다.3) 이 새로 발견된 정보는 또한 1918년의 미국정부 고위관리들과 로마노프의 운명 사이에 현재 상당히 선명한 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조사토록 해줬다.

 

클라크의 책은 그레첸 하스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녀는 남편 데이비드와 함께 구이 리차드스가 그의 첫 번째 책 짜르 찾기를 쓰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이비드의 아버지 헨리 하스킨은 1920년 봄과 여름에 짜르구출하기를 출간하는 중책을 맡았었다. 그레첸과 데이비드의 기여는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내가 그 책(짜르 찾기)과, 그리고 다른 이상한 책인 짜르구출하기를 구성하고 있는 일기들을 “번역하고 편집하기로” 합의했던 인사들에 대한 완벽하고 철저한 분석을 할 수 있게 해 준 추가 서류들을 그들이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짜르구출하기란 책은 짜르와 그 가족이 탈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책의 저자로 이름이 나와 있는 제임스 P. 스미드는 실제로 영국 전쟁영화회사의 해설자인 윌리엄 루트리지 맥게리와 게오르그 S. 로마노브스키의 필명이었다.4) 1920년 3월10일에 체결한 계약에서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는 짜르구출하기의 본래 이름인 “토볼스크의 죄수들이란 제목으로 된 책의 원고를 발간하기 위한 정리와 준비를 하기로” 합의했다.5) 3월18일, 샌프란시스코의 페어몬트 호텔에서 로마노브스키는 맥게리에게 “친애하는 맥게리씨에게 나의 안부를 전한다”면서 서명된 합의서를 반환했다. 그것은 아무도 그 책을 쓰지 않았다는 합의, 즉 그들이 오직 원고를 “정리하고 준비하는 것”에 대한 합의였음이 분명하다.6) 켈리포니아 프린팅사에서 인쇄 및 제본이 되어 나온 그 책은 1920년 7월21일 “번역자들”에게 인도됐다.

 

짜르구출하기는 대부분 두 사람의 일기로 구성돼 있다. 한 사람은 영국정보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볼셰비키로 행세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이다. 황실일가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이 책의 서술은 짜르구출하기가 나오기 이전에 세상에서 입수 가능했던 어느 다른 발표 내용들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 책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즉 영국 정보원인 차알스 제임스 폭스 - 그는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출생지는 파리”라고 말하고 있다 - 가 황실일가를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구출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책의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폭스의 일기는 또한 1918년 7월의 여름밤 그 사건이 일어나기 1주일 전에 그가 에카테린부르그의 볼셰비키 수비대에 잠입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짜르구출하기에서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황실가족은 영국인에 의해 지하터널로부터 구출되어 영국 영사관으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러시아 내의 비밀장소로 옮겨 숨어 있다가 투르키스탄으로 빠져나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 최종 목적지로 생각하고 있었던 인도에서 문제가 생겨 그들은 티베트로 가 전전했으며, 거기서 달라이라마의 명령에 따른 라마승들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중킹에서 탈출여행을 끝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중킹에 도착한 즉시 그들을 영국 포함 사령관에게 인계했으며, 그들은 영국포함을 타고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 상하이에서 12 마일 떨어진 우숭에 도착했다.

 

일기는 축제 깃발들로 단장을 한 선박들에 대해 언급하고 그 때 - 1918년 12월 - 가 휴가철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이날은 “가족 일곱 번”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1918년 12월의 전보 날짜와 일치한다. 폭스의 마지막 원고는 그 포함 사령관과의 대면을 밝히고 있다.

 

 

베를린에 있는 한 사람, 영국에 있는 다른 사람, 일본에 있는 다른 사람,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어떤 고위인사에게 그가 반복하여 보내는 암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 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내가 맡았던 임무가 역사와 그리고 국가정책에 관한 한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온 것 같았다......7)

 

 

짜르구출하기라는 책은 황실가족의 최종 목적지가 세일론(스리랑카)이었다고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한 부유한 차(茶) 상인과 함께 어떤 이름 없는 군함을 타고 그 곳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짜르구출하기에 포함돼 있는 두 번째 일기는 볼셰비키로 가장한 군주제주의자인 알렉세이 시보롯카라는 한 알려지지 않은 귀족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전에 짜르의 측근그룹과 페트로그라드 사교계의 일원이었던 그는 돈이 너무 없어서, 아니면 그의 미래의 행복을 영위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아내를 안전하다 싶은 먼 곳으로 피난을 시켰는데, 곧 그녀가 볼셰비키들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포자기 끝에 그는 결국 로마노프 구출음모에 참가한다. 볼셰비키로 신분을 가장하여 그는 토볼스크로 가서 로마노프 일가 주위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그의 눈을 통해 우리는 짜르 일가를 지키고 있었던 수비대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게 되며, 또한 황실가족 구출계획에 비밀리에 참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다.

 

이따금씩 그는 그의 여자친구인 “남작부인 B"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녀 역시 페트로그라드 사교계의 일원으로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시보롯카의 일기는 볼셰비키로서의 그의 생활을 묘사하고, 그리고 그와 남작부인이 황실가족 구출을 위해 영국 정보팀과 협력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짜르구출하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보롯카는 부상을 당하는데,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로마노프 일가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비정통적인 기술(記述) 때문에 역사가들과 정치학자들은 과거에 이 책을 터무니없는 얘기로 치부했으며, 실제로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책이 완전히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 혹은 소련인들이 주입한 그릇된 정보의 산물이었던 것일까? 이 책의 출판으로 어떤 정부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이었을까? 실제로 우리가 제15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많은 정부들이 짜르구출하기의 출판에 관심을 보였다. 더더욱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짜르와 그 가족을 구출한 것으로 쓰고있는 이 책이 왜 1921년 이후에 거의 절판이 돼 버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책의 소위 “번역자”들이라는 두 사람의 상당히 매혹적인 배경을 검토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낼만한 가치가 있다. 이들은 추측컨대 이 이야기를 (번역한 게 아니라) 엮어낸 것 같다. 이 책의 내용이 사실상 상당한 고위층이며 정보에 밝은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 이들 “번역자”들의 경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맥게리는 전에 영국 전쟁영화의 해설자로 있었다.8) 1917년 한 해 동안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전쟁영화들에 대한 그의 통찰로 채워져 있다. 그는 티볼리 오페라 하우스, 호텔 세인트 제임스 그리고 펠리스 호텔에서 메소포타미아 회전(會戰)에 대해 강연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헤랄드지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대서특필되었다.9) 미국에서의 영국 전쟁(제1차대전)에 대한 멕게리의 선전노력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사실상의 국무장관인 하우스 대령의 친구인 윌리엄 와이즈먼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미국이 대전에 참전했을 무렵, 우리는 와이즈먼이 뉴욕의 SIS/MI1c(영국정보국) 책임자로 있었다는 것을 앞서 보았다. 멕게리의 활동은 결국 그를 그의 아내의 친척이며 윌슨 대통령과 가까운 죤 템플 그레이브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자리에 앉게 했다.10) 1926-7년의 목록인 미국 명사록(Who's Who in America)에서 그는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짜르구출하기의 출판과 연계돼 있는 인사로 나왔으며, 또한 카이저(독일황제)의 철도에 관한 이야기인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Berlin to Bagdad)를 쓴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 명사록에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멕게리의 전시중의 활동이나 그가 미 국무부를 위해 일했던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그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편지의 도움을 받아 그의 자녀들이 조사한 맥게리의 그 후의 약전(略傳)은, 그가 한 때 페트로그라드, 파리 및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관에 소속돼 있었다는 것을 추가로 밝히고 있었다. 이들 마지막 내용은 맥게리 인생 스토리에서의 흥미 있는 변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에 관해 일부 연구가 1960년대 말 구이 리챠드스의 책 짜르 찾기가 준비되고 있는 동안 리챠드스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진행됐다.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는 1969년 8월21일자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무부 여권국에 의하면, 맥게리는 1923년 6월에 처음으로 여권을 신청했다. 그 때 그는, 그가 전문 저널리스이며 가능한 한 2년 동안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진술하고, 전에 여권을 신청했거나 발급 받았거나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서약했다. 이 신청서의 부본과 첨부된 서약서(파일 번호 306531, 1923년 6월11일)는 워싱턴 DC .20520의 국무부 여권국의 요청에 따라 제공될 수 있다.11)

 

 

1923년에 맥게리와 그의 아내 에밀리 그레이브스 맥게리 양인의 여권을 신청하는 여권신청서 번호 306531의 복사본은 맥게리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려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나이 51세였던 맥게리는 그와 그의 아내가 “연구와 휴식” 목적으로 해외로 가려한다고 신청서에 썼다. 언뜻 보기에 이 모든 것은, 1919년 4월29일자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에 보도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도외시한다면, 마치 사실처럼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작가, 비밀리에 미망인과 결혼

 

1년 전 호주에서 시작된 로맨스가, 금요일 밤에 뉴욕의 한 부유한 변호사 미망인인 에밀리 그레이브스 스트롱 부인과 샌프란시스코 출신 작가이며 여행가인 윌리엄 루트릿지 맥게리의 결혼으로 귀착됐다. 결혼은 이곳에서 비밀리에 치러졌으며 이들 커플은 맥게리의 친구들이 결혼사실을 알기 전에 자동차로 산타크루즈 산맥을 거치는 1개월간의 신혼여행길에 오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이들 둘은 켈리포니아에 잘 알려져 있다. 맥게리 부인은 전에 로스엔절러스에서 살았으며 로스엔절러스 은행가인 W.L. 그레이브스의 딸이다. 맥게리는 1년 전 오리엔트에서 돌아온 즉시 팬 퍼시픽 매거진의 창립발기인들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지금 이 잡지의 고문편집장이다.12)

 

 

여권국의 누군가가 맥게리의 경력에 대해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다. 실제로 그는 1923년 이전에 오랜 기간 사업상 늘 세계각지를 여행하는 사람이었으며, 분명히 극동에서 이미 고위층들과 친교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의 개인 편지는 1917년 말에 그가 일본의 사업가인 주쥬 G. 카사이와 멕시코산 강철선적에 대해 상담(商談)을 벌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13) 흥미롭게도 그의 편지는 1918년 5월7일 이전과 그 해 11월 이후에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많으며, 5월부터 11월까지는 그 수가 비교적 적다. 그러나 11월에 J.G. 카사이는 맥게리에게 미국주재 일본대사인 이시 자작의 소개장을 주선해 주었다.14) 마지막으로 카사이는 맥게리를 “나의 사랑하는 장군”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19년 1월29일에 맥게리 내외에게 “신혼”여행을 일본에서 보내도록 초청장을 써 주었다.15)

 

1919년 6월20일 그는 물경 3억 1천500만 달러 치의 금괴를 미국으로 가져와 달라는 게오르그 로마노브스키의 요청에 응한 것으로 보아, 맥게리의 무역사업은 강철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 거래에 대해 맥게리는 “그 금괴는 곧바로 가져와서는 안되며, 러시아 정부 구매위원회의 후원아래 현지(미국) 은행에서 개설한 신용장에 대해 러시아정부가 공탁권을 가지고 금괴를 전달하는 식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후 9월20일에 다시 그는 뉴욕의 네셔널 시티은행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극동의 금괴”와 그에 대한 신용장 개설 건에 관한 것이었다.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가 콜차크 정부(백계러시아 정부)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현재로선 분명해 보인다. 당시 콜차크정부는 짜르 금괴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음은 물론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짜르와 그 가족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짜르와 그 가족이 살아있다고 주장한 책을 번역하고 편집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 두 사람이 또한 콜차크 정부가 볼셰비키들과의 전쟁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무기들을 구매하기 위해 개설하는 신용장의 보증인들로 변했다는 것은 뭔지 이상하다.

 

무기와 금괴는 물론, 짜르구출하기와 관련이 있는 또 한 사람인 게오르그 로마노브스키는 1920년 7월에 러시아 임시정부(미국이 승인한 유일한 러시아 정부 - 볼셰비키 정부는 1933년까지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의 총영사 대리로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근무했다. 그는 시카고에서도 같은 직위에 있었는데,16) 거기서 그는 시카고의 이름난 집안 출신인 골디 비얀키니와 결혼했다. 시카고의 내과의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슬라브 자유공제회17) 회장이면서 동시에 미국 유고슬라브 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골디 비얀키니가 토마스 마사리크의 질녀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마사리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며 또한 차알스 크레인과 막역한 사이였고, 1918년 시베리아에서의 체코군 활동과도 관계가 있었던 사람이다. 마사리크가 로마노브스키 총영사와 가까운 사이였든, 아니었든, 로마노브스키가 그 시절의 많은 다른 명망가들과 교류했다는 것이 서류 상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의 개인 편지에서도 그가 짜르의 궁정은 물론 1918년 임시정부 전 구성원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 중 두드러진 인물은 로마노브스키를 방문했던 블라디미르 바라노프스키 부부였다. 바라노브스키 부부가 1918년 봄 켈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 큰 소동이 일어났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너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몇 주간 한 사나토륨(요양소)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바라노프스키 부인이 퇴원하였으며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남편인 바라노프스키씨는 전 러시아 총리인 케렌스키의 처남이다.18) 바라노프스키 부인은 아주 매력적인 젊은 여성인데, 전 러시아 황제의 딸들 중 하나와 놀랍도록 닮은 바람에 타티아나 공주로 오해를 받았다. 바로노프스키 부부는 함께 태평양을 건너 온 보쎄 제독과 함께 이따금씩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제독은 러시아 해군의 수장으로 있었고, 여러 해 동안 짜르의 친구 겸 조언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그 매혹적인 젊은 부인의 정체에 대한 루머를 확대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견해(타티아나공주를 닮았다는)에 그냥 웃으며,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짜르의 그 젊은 딸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19)

 

 

아이러니컬하게도 황실가족이 살아있다고 공언하고 있는 책의 공동 “저자”인 사람이 지금 케렌스키의 처남을 초청하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황실가족을 영국으로 옮기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그 대신 그들을 시베리아로 부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바람에, 1918년. 본의 아니게 그들을 죽음(아직 추정일 뿐이지만)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바라노프스키 부부의 방문 직후 로마노브스키는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배려로 승진했다. 그는 국무부로부터 러시아대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의해 공식적으로 총영사로 인정받았다.20)

 

바라노프스키 부부의 도착과 거의 동시에 멕게리와 로마노브스키는, 로마노브스키가 주선했던 켈리포니아 프린팅사가 보내온 짜르구출하기의 초판본을 받았다. 영화제작 거래가능성을 포함하여 그 책의 출현을 둘러싸고 돌풍처럼 번진 일련의 법석들은 황실가족이 죽지 않았다는 그 책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어안이 벙벙한 일은, 맥게리가 샌프란시스코의 전시담당국 법무관 사무실의 사무엘 화이트 소령에게 자신을 윌리엄 G. 맥아두에게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 일이었다. 전 재무장관(1918년에 미국정보기관은 재무부에 보고했다)이며 윌슨 대통령의 사위인 맥아두는 화이트로부터 국가에 굉장히 중요한 일21)로 맥게리를 좀 만나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8월20일자로 화이트가 맥게리와의 회합을 요청하는 편지를 맥아두에게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은 8월25일에, 맥게리는 번갈아 로마노브스키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9월15일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모든 추가 비용을 제외한, 나의 반쪽 몫, 다시 말해 2천 달라를 뉴욕시 120 브로드웨이, 윌리엄 G. 맥아두 앞이라고 봉투에 써서 나에게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9월13일 맥아두는 화이트에게 답장을 보내, 맥게리가 “이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그를 “기꺼이” 만나보겠다고 했다. 맥게리로 하여금 갑자기 켈리포니아를 떠나 미국 동부해안지역을 장기간 여행하게 한 “국가에 굉장히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국가에 굉장히 중요한 일”에 관한 화이트의 편지 내용은 맥아두 관련 서류에는 남아있지 않고, 단지 화이트의 첫 요청 편지에 대한 회신만 기록돼 있다. 맥게리와 맥아두 사이의 회합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회합은 확실히 맥게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직후 맥게리는, 평소에 연속방송과 영화제작용으로 그 책(짜르구출하기)의 판권을 팔도록 종용해 온 어떤 친구에게 다시 전보를 보내 “판권 판매에 대한 모든 제의를 취소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24)

 

제15장 정치, 음모 그리고 그 기원

 

샌프란시스코 1920년

 

무언지 불타오르는 듯한 내용 속에 담겨져 있는 (황실가족의) 생존에 대한 묘사를 사실상 없던 일로 만드는, 짜르구출하기의 회수에는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을까? 그 책의 실질적인 출처뿐 아니라 그 책의 출현과 그리고 급격한 소멸에 책임이 있는 개인 혹은 조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에 나오는 두 해설자가 늘어놓는 이야기 속에 가득한 우연의 일치와 상호연결성이 있어 보이는 것부터 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몇몇 이름들과 부수적인 사건들이 짜르구출하기와 호머 슬로터의 “파르팬 돔닌” 보고서 두 곳에만 나타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하겠다. 이런 우연의 일치에 대한 의구심은 파르팬 돔닌에 대한 언급도 포함돼 있는 슬로터의 군사정보 보고서가 짜르구출하기가 발행되고 9개월 이후에 나온 기록이라는 사실로 인해 더욱 커진다.

 

맥게리는 그 뒤, 그와 로마노브스키가, 그 책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벌터 중위로부터가 아니라 루마니아 마리 왕비의 한 친구로부터 그 책(짜르구출하기의 원본)을 받았다고 말했다.1) 마리 왕비는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친척간이다. 캐나다 사람인 조 보일이 그 책의 전달통로가 될 수 있었다. 조 보일은 독일군에 의해 위기에 처한 루마니아 왕실가족의 구출임무에 나선 바 있다. 우리가 기억하기로, 보일은 니콜라스의 모후를 크리미아에서 모셔가기 위해 설득을 시도했던 사람이다.2) 조 보일은 또한 루마니아를 위해 볼셰비키들과의 협약에도 나섰으며, 루마니아의 보석과 문서들을 모스크바와 유리시켜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흥미롭게도 보일은 또한 미국 무관인 윌리엄 스미드 대위를 데리고 임무를 수행했다.4)

 

보일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니콜라스가 살아 있는 것을 본 최후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소문나 있다.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는, 1918년 말에 보일이 심장발작을 일으킨 후 그녀와 그녀의 딸이 그를 간호하였는데, 미처 건강을 되찾기 전에 그가 제1차대전의 가장 비밀스럽고 위험한 임무에 참가했다고 밝혔다.5) 보일의 수행원이었던 스미드가 맥거리와 로마노브스키에게 그 책을 주었을까? 그래서 그 책의 필명이 제임스 P. 스미드가 되었다는 말일까? 그러나 그 책이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다른 실질적인 가능성은 개빈 맥납을 통해서였다. 그는 루마니아의 왕자를 포함하여 루마니아 왕실가족을 1919년 샌프란시스코로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차알스 크레인의 편지에서, 그가 1920년 5월에 중국대사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아 임지로 가는 길에 그 역시 개빈 맥납을 만나기 위해 도중에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들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이 맥납은 1918년 특수임무를 띄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던 아서 왕자를 모시기도 했던 바로 그 맥납이다. 크레인은 배를 타고 가며 약간 암호를 사용하여 편지를 썼다. 다가오는 선거(1920년 가을)를 걱정하며, 그들(민주당)은 “공화당이 베팅을 할 수 있거나 혹은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카드들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다.6) 헨리 헤스킨이 게오르그 로마노브스키에 대한 증거서류들을 조사하고 있었을 때인 5월말에 크레인이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크레인이나 개빈 맥납이 바로 헤스킨이 전혀 본적 없다고 말한, 그 책을 첨삭하고 있는 로마노브스키와 합숙한 그 불가사의한 사람들이었을까?

 

맥게리가 워싱턴에서 맥아두와 만난 후 그는 로마노브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에게 보내는 나머지 책들을 그의 실제 이름 앞으로 인도한 “맥납&스미스”선적회사에 화가 났었다고 썼다. 다른 편지에서 그는 짜르구출하기의 판매를 중단한 것에 대해 “그 회사”7)를 꾸짖고 싶었다고 말했다. 확실히 일개 선적회사가 짜르구출하기의 판매를 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수수께끼의 그 “회사”라는 것이 불가해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또 다른 신비적인 단어로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증거들로 미루어 보아,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는 “회사”라고 불린 어떤 것의 간판 인사들에 불과했으며, 그 책의 운명을 지배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막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분명히 맥게리는 찌르구출하기가 전달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철석같이 사실로 믿고 있었으며, 그래서 죽는 날까지 계속 로마노프 일가가 구출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나의 사랑하는 폭스”의 편지라고 불렀던, 그가 갖고 있었던 2통의 편지를 그의 가족에게 보여주었다. 추측컨대 그 편지들은 짜르 니콜라스와 카이저 빌헤름이 신비의 인물인 폭스에게 보낸 편지들이었으며, 황실가족 구출작전에 참여해 주고 그리고 나아가 “국가의 기밀”을 지켜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맥게리의 가족들은 감사를 표시한 그 두통의 편지가 적출(摘出)한 것인 줄로 믿었다. 이 편지의 복사본이 아직도 그의 손녀인 바버라 핀레슨의 수중에 남아 있다.8)

 

그 책의 발간 이면에 숨어 있는 복잡한 음모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몇몇 국가들의 문서보관소에서 추가연구가 진행돼 왔으며, 그 결과 나는 짜르구출하기에서 언급된 수많은 인물들을 찾아내고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 인물들은 1920년 그 책이 발간되기 이전에는 서방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며, 그리고 소련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이후 최근에야 드러나게 된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짜르구출하기에서만 묘사돼 있고,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몰랐을 사건들 역시 결국 입증되었으며, 그 때문에 그 책의 적출성에 보탬이 되었다.

 

그 책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호크리아코프(코크리아코프), 카가니츠키, 두츠만 등과 같은 여러 미천한 볼셰비키들의 이름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1920년 봄과 초여름에는 전혀 서방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18년 봄과 그리고 7월로 접어들기까지의 다음 몇 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놀랄만한 세부내용은 오직 짜르 구출하기가 출판된 이후에야 일반인들이 알게 되었다. 1920년 7월31일에 콜차크 정부의 전직 장관이었던 G.G. 텔베르그가 쓴 논문 하나가 “공식적인 문서에서 언급된, 러시아 황제 및 그 가족의 최후의 날들과 죽음(Last Days and Death of the Russian Emperor and His Family, Told in Official Documents)”이라는 제목으로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에 실렸다. 콜차크 정부는 에카테린부르그가 백군의 손에 함락된 후 시베리아에서 최초로 통치기구를 갖추게 된 군벌이었다. 비교컨대, 짜르구출하기가 텔베르그의 논문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과 미천한 인물들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아무튼 흥미롭게도, 짜르구출하기가 포스트지에 실린 논문보다도 이미 일주일 전에 “번역, 정리되고” 인쇄되고 제본되고 그리고 인도되었던 것이다. 또한 짜르구출하기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러나 1920년에 그 사건들은 그 시간에 현장에 있었던 일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만약 현장 사람들이 아니라면, 결국 1920년 5월이나 6월에 서방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실제 세부사항에 대해 철저하게 보고를 받은 몇몇 사람들만이 그 책을 엮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짜르구출하기에서 인용문 하나가 짜르의 시종들 중의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파라핀 도미노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좀 더 고찰해 보자.9) 이것은 확실히 1918년 12월에 군 정보부에 보낸 호머 슬로터의 보고서에 언급된 파르팬 돔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슬로터는 돔닌으로부터 육필원고 한 뭉치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황실가족에게 계란과 우유를 배달하고 있었던 수녀원의 한 수녀를 거쳐 미국 영사 팔머가 그에게 전달한 것이다. 칼 에커먼이 1918년 12월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오직 니콜라스만 죽었다는 취지의 기사도 바로 파르팬 돔닌의 설명과 같은 것이다. 그후 엑커먼은 1919년에 출판한 그의 책에서 파르팬 돔닌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그 책에서 체코군들이 전력을 다해 짜르를 구출하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짜르구출하기에서 폭스는 “나는 이 늙은 시종, 파르팬 돔닌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는 매일처럼 나의 죄수들 주위를 배회하며 폐를 끼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언급이 에커먼의 기사와 책으로부터 이것저것 빼내 꿰매 맞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있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파라핀 도미노에 대한 언급은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로터와 에커먼 둘 다 슬로터가 팔머 영사를 통해 수녀로부터 받았던 돔닌의 보고서에 대해 신뢰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마침내 그것을 워싱턴에 보냈다는 사실은 - 워싱턴에서는 그것이 아직 정부문서에 철해져 있다 - 에커먼과 슬로터가 정보요원이었다는 것을 알고있는 우리로서는 호기심을 돋우는 일이 아닐 수 없다.11) 그들은 실제로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지도 모르는 파르팬 돔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왜 믿었을까?

 

더욱이 에커먼의 편지에서 하나의 이상한 서류가 나의 주의를 끌었다. 그 서류는 슬로터와 에커먼 둘 다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황실가족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파르팬의 설명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서명이 안된 보고서이며, 아마도 에커먼이 그의 상사에게 쓴 것 같은데, 에카테린부르그 수도원에서 수녀들 중 한 사람과 가졌던 회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의 황실가족의 마지막 날들에 대해 아느냐고 수녀에게 물었을 때, 수녀는, 그 가족이 사라지기 전날 밤에 계란 50개와 잉크 및 종이를 가져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노라 했다고 적고 있다.

 

종이와 잉크에 관한 이 코멘트는 우리가 짜르구출하기의 마지막 내용들을 연구할 때 특히 소중해질 것이다. “P.D", 아마도 파르팬 돔닌이, 짜르가 죽었다는 것을 세상이 수긍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종이와 다른 잉크로“ 조작된 서류를 새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어떤 알려지지 않은 정보원이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카테린부르그 수도원의 한 수녀가 에커먼에게 그녀가 7월15일에 종이와 잉크를 가져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을, 짜르구출하기를 썼던 누군가가 알았다는 것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수녀의 개입을 가정하여, 더욱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무렵 시드니 레일리가 교회 뿐 아니라 슬로터에게 전달된 파르팬 증언에 언급돼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접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의 노력은, 우리가 “특별한 비밀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 시드니 레일리의 노력과 결정적으로 연계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연합국들의 금융사업계획을 통한 쌍방향정책에 의해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 레일리는 자주 볼셰비키 렐린스키로 변장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엔지니어”로 그의 직업을 기재했을 것이다. 파르팬 돔닌의 보고는 “엔지니어 일린스키, 그리고 에칼트의 터널”을 언급하고 있다. 역시 사빈코프의 봉기에 가담한 것으로 추측되는 발틱 백군 참모총장이 오토 에켈트였는데, 그는 돔닌 원고가 “에칼트의 터널”이라고 언급했을 때 인용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르며, 그리고 엔지니어 일린스키는 렐린스키의 철자 착오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실제로 단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돔닌의 보고서는 1918년의 실제 사건들과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결론적으로, 파르팬 돔닌 보고서는 9장으로 되어 있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그것이 1918년 여름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복잡한 정치에 대해 알고 있었던 누군가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체코군들이 짜르를 구출하기 위해 에카테린부르그로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 이제는 있음직 했던 일로 보이고 있으며, 돔닌 서류가 그 국면을 입증하고 있다. 보복을 선동하고 볼셰비키들을 타도하려는 연합국 조직의 일부인 수많은 러시아 장군들과 사빈코프에 대한 언급은 지금 명백한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6월에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짜르와 충성스런 병사들 사이에 오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출처가 분명한 편지들은 지금 추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비록 고약한 문법과 수준이 아주 낮은 철자로 구성돼 있긴 하지만, 파르팬 돔닌의 보고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즉 1918년 여름에 먼 시베리아 지역에서 공공의 견해와는 동떨어진, 무질서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치게 하고 있었던 정치적 군사적 현실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그림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짜르구출하기는 다른 사람들이 몰랐던 어떤 것을 비유적인 방법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일까? 에커먼과 슬로터의 도움을 받아, 짜르는 죽었다는 이야기에 불을 지피는 것이 돔닌의 역할이었을까? 그러나, 정세가 허용된다면 볼셰비키 타도 후에, 300년 이전의 다른 로마노프 황제의 경우처럼 짜르가 살기 위해 죽었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발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희망에서 황후와 아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300년 전 제1대 로마노프가 위기에 몰렸을 때 수세닌이 그를 교회에 숨겨두고 죽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왕조창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비교한 것이다 - 옮긴이). 만약 그렇다면,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그 날밤 이후에 황실가족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황실가족이 투르키스탄을 거쳐 러시아를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를 짜르구출하기가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그 무렵 슬로터가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이었는지 어떤지를 규명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투르키스탄의 타쉬켄트는 1918년 7월24일 경에 만든 슬로터의 정보 보고서에 언급되고 있으며, 그 보고서에서 그는 “타쉬켄트의 우리(미국) 영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서 흥미 있는 점은 1918년 7월에 타쉬켄트는 미국의 정규 영사가 주재하는 도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12) 하지만, 이미 제9장에서 보았듯이 미국은 분명히 로저 트레드웰을 타쉬켄트로 부임시켰다. 그가, 연합국들이 쌍방향정책을 실행하고 있는 기간인 1918년 3월에 로버트 브루스 로카르트 및 볼쉐비키들과 복잡하게 얽혔던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에 왜 그가 타쉬켄트에 주재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 영국 장교는 트레드웰이 이상하게 타쉬켄트를 향해 떠났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가 죽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를 위해선 유감스럽게도 아주 분명히 살아 있는 트레드웰이 인도 주재 영국 정보원인 프레데릭 베일리 대령과 함께 1918년 10월에 볼셰비키들에게 체포됐다. 프랑스인 한 사람과 러시아어 통역 한 사람도 그들과 같이 체포됐다. 그들의 체포는 상당한 중대사건이 될 수 있었다.13) 트레드웰과 베일리가 짜르와 그 가족의 탈출을 위한, 그리고 그들이 티베트를 거쳐 궁극적으로 중국으로 가는 여행에 필요한 병참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것일까? 짜르구출하기에서는 인도장교를 기다리고 있다는 언급이 있다. 금융사업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던 키이즈 대령은 인도 육군 소속이었지만, 베일리 역시 그랬는데, 후자에 대해서는 알아둘 가치가 있는 몇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실들이 있다.

 

베일리는 다수의 티베트 방언을 알고 있었으며 혼자서 두 번이나 티베트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1924년에 그는 타쉬켄트 밀사(Mission to Tashkent)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은 영국정부에 의해 몇 차례 검열을 당했으며, 10년이 지난 후에야 발행이 가능했다.14) 몇 번의 검열로 인해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나온 그 책은, 1918년에 타쉬켄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난처하게 만들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접적으로 이 책은 짜르구출하기에게 더 많은 신뢰성을 갖게 만들고 있다. 베일리는 황실가족이 시베리아로부터의 탈출에 이용했던 루트, 즉 짜르구출하기가 지적했던 루트를 실제로 답습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망명자들을 데려오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짜르구출하기의 주장, 특히 영국군함을 타고 세일론으로 황실가족을 호위했던 인도 장교들과 차(茶) 상인에 대한 주장의 신빙성을 추가로 확인하기 위해, 나는 1918년 세일론에서의 차 재배자 명단을 입수했다. 그런데 그것은 1918년 러시아에서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물론, 1918년 러시아에서 어떤 자격으로 직분을 다 했을 수 있는 어떤 개인들과의 상호참조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조사결과는 결론이 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세일론-키이즈-웹스터에 뿌리를 갖고 있는 북부 러시아 사람들의 성(姓)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적어도 두 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성이 있었다. 세일론에서 키이즈 성을 가진 가문을 조사하면서, 나는 1918년에 세일론 수비대의 일원으로 있었던 A.J.H. 키이즈대위를 발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무렵에 테렌스 키이즈 대령과 A.J.H. 키이즈 대위가 서로 관계가 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러시아에서는 웹스터라는 성을 가진 두 사람의 주목할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발렌타인 웹스터 대위가 그 중 한 사람인데, 그는 매우 부유했으며, 요나스 리이트의 친구였다. 요나스 리이트는 영국 정보부로부터 짜르 구출작전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일기에서 털어놓았고, 무르만스크에서 저택신축을 감독하고 있었던, 헨리 아르밋스테드로부터 허드슨즈 베이사를 통해 자금을 지급 받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나스 리이트가 그의 책에서, 전쟁이 나기 이전에 시베리아에서 함께 사업을 했던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는 발렌타인 웹스터는 1918년경에 죽었다.15)

 

발렌타인 웹스터가, 짜르구출하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 웹스터가 아닌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웹스터가 1918년의 몹시 유동적인 사건들에 연루돼 있었다. 시드니 레일리는, 그가 수행하고 있었던 각종 정보임무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분실할 우려 때문에 빠른 속도로 자금을 회전할 필요가 있었을 때, 영국 여권담당 장교인 로렌스 웹스터 중위를 미국 대사관에 보내, 아마도 드위트 풀(훗날 소위 말하는 로카르트 음모에 휩쓸린 사람)의 이름으로 예치돼 있는 돈을 찾도록 했다. 영국 여권담당 장교로서 그의 파일이 아직 공개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로렌스 웹스터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해 줄 만한 것들이 거의 없다.

 

하지만, 죠지 힐 대위에 따르면, 1918년 러시아에서 맨스필드 커밍스의 비밀 정보원 중의 한 사람인 로렌스 웹스터가 시드니 레일리의 업무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웹스터는 여권담당 장교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는 또한 해군 정보부 요원이었으며, 그리고 금융사업계획 실행 직전에 키에프에서 야로신스키, 크레인 및 마사리크가 머물기도 했던 곳의 한 우크라이나 사람과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권담당 장교로서, 그리고 해군 정보요원으로서 웹스터는 아마도 로카르트 음모시기에 살해된 영국 밀사인 크로미 대위와 연결된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볼셰비키가 8월5일에 웹스터를 체포했다. 9월에 그는 한 공갈배를 돈을 주어 해고시키는 일에 가담했다. 그 공갈배는 웹스터가 수많은 MI1c(영국 정보기관) 작전에 개입돼 있다는 것을 알려지게 했던 자다. 로렌스 웹스터 중위가 차(茶) 상인의 일원이었는지, 발렌타인 웹스터의 가족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짜르구출하기에서 약술하고 있는 황실가족의 여행은 누가 주선했을까? 그 책의 다른 이상한 내용, 즉 거기서 또 다른 일기기록자이며, 아마 황실가족 탈출시 병참관계를 다루었던 사람으로 보이는 귀족 알렉세이의 그럴듯한 신원에 대해서는 현재 분명히 확인이 가능하다. 알렉세이는 그의 일기에서 간혹 그의 아내 마로우씨아를 언급했다. 그는 그의 아내가 어떤 부인, 즉 그가 “남작부인 B"라고 부른 여인과의 우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썼다. 두 사람의 남작부인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부드버그 남작부인인데 그녀는 브루스 로카르르트의 연인이었으며 동시에 소설가 막심 고리키의 연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그럴듯한 후보는 북소에베덴 남작부인인 것 같은데, 그녀는 황실가족의 탈출에 자원해서 동행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사“ - 황실가족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 의 발병으로 인해 뒤에 남아 있다가 결국 3개월 후에 토볼스크에서 합류했다.16) 하지만 그녀가 에카테린부르그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황실가족과 함께 지내려고 시도했을 때 그녀의 요구는 현지 당국에 의해 거절당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녀는 결국 다시는 그들의 거처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시베리아에서의 이 남작부인의 생애에 대한 어떤 수수께끼 같은 모습이 밝혀진 것이 없다. 왜 그녀는 황실가족의 측근으로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체포되지 않았을까? 마침내 미국당국이 그녀의 러시아 출국을 도왔다. 워싱턴의 문서보관소에 그녀에 대한 비자신청 목록 카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된다. 유감스럽게도 통신관계 파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17)

 

1920년대에 남작부인은 영국왕실의 귀빈으로 윈저에서 지나고 있을 동안에 - 그녀는 여생을 거기서 보냈다 - 몇 권의 문학적인 책들을 저술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서류들을 찾으려는 연구자들의 시도는 성과가 없는 것으로 증명됐다. 하지만 그녀의 책들은 러시아 궁전에서의 그녀의 경험은 물론 시베리아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알렉산드라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데, 남작부인은 황후를 중상모략을 받았던 따뜻하고 사랑스런 여인상으로 그리고 있다.

 

짜르구출하기 역시 그 남작부인이 마담 비루보바와 가까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비루보바는 황실가족 구출작전에서 야로신스키와 솔로비에프와 결탁했던 부인이다.18) 알렉세이 시보롯카는 그의 일기에서 그의 아내 마로우씨아가 처형됐다고 들었으며, 더 이상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음모단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비록 남작부인 B가 전에 알렉세이를 여러 번 부추겼으나, 그는 항상 음모단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남작부인의 바실리치코프와의 이상한 거동, 그리고 마담 비루보바와 다른 패거리들에 대한 그녀의 변치 않는 속삭임 이후 하느님은 그녀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분명히 남작부인 B는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알렉세이는 그의 아내가 처형된 후, 알렉세이 시보롯카라는 이름을 쓰며 황실가족을 살려내기 위해 짜르구출하기에서 약술한 음모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짜르구출하기를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마침내 알렉세이 역시 볼셰비키행세를 아주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장에 참석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시보롯카”가 하는 것만큼 설득력 있게 볼셰비키로서의 그의 경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거의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볼셰비키를 가장하여, 코크리아코프와 카가니츠키가 황실가족의 운명을 토의하고 있었던 회합에 잠입했던 내용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꼭 같은 내용이 1920년이 훨씬 지난 후 발행된 수많은 책에서 뒤늦게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알렉세이”는 실제로 누구였을까? 이상하게도 차알스의 친구인 로스토브스토프 역시 아내 이름이 마로우씨아였다. 그녀는 실제로 마담 비루보바와 북소에베덴 남작부인을 알고 있었다.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은 1909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만들어진 에어로 클럽의 부회장이었다.19) 그 직후 시드니 레일리가 참가 초청을 받았으며 곧 그 “클럽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20) 로스토브스토프의 한 친구가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로우씨아가 처형됐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21)

 

또한 크레인은 1917년 12월에 그의 친구이며 알렉산드라의 전 비서인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편지에서 로스토브스토프는 크레인이 몇 주전 페트로그라드에서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당부한 지시를 이행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그 편지는 로스토브스토프가 크레인의 요청에 따라 보낸 몇 통의 전보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크레인의 지시로 네셔널 시티은행에 견실한 은행구좌를 개설하였으며, 크레인이 그 구좌에 넣어 준 이상하리만큼 큰 금액의 돈을 한 보석상에게 지불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항목의 사업 가운데서 그는 부리아트(동부 시베리아의 몽고족) 국가위원회의 데시-샘피톤에게 또한 돈을 보냈는데, 데시-샘피톤은 그 돈으로 달라이라마에게 예물을 보낼 것이었다.22) 부리아트 국가위원회는 두 파벌로 구성돼 있었는데, 샘피톤의 지도 아래 있는 한 파벌은 반볼셰비키적일 뿐 아니라 친군주제주의적이며 아타만 세메노프와 결속돼 있었던 반면, 다른 파벌 하나는 친볼셰비키적이었다.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크레인이 멀리 떨어진 시베리아의 부리아트들을 지원하려 했던 것은,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실가족이 탈출해 가야할 행로를 안내해야할 길잡이를 분명히 당황하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샘피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왜 크레인이 달라이라마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라마승들”이 황실가족을 티베트로 안내했다고 짜르구출하기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짜르구출하기의 주장으로 미루어 보아, 크레인의 비밀편지가 시베리아의 부리아트 영토를 통해, 그리고 필요할 땐 대부분 중국을 통하여 티베트로, 미지의 사람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을 약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후의 재정비서인 로스토브스토프로부터의 비밀편지 역시 “순례자들”, “미스 슈나이더” 그리고 “연료용으로 엘라에게 주는 돈”을 언급하고 있다. 황실가족의 측근자들 중에 미스 슈나이더라는 여자가 있었으며, 그 시기에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대공녀 - “엘라” - 는 실질적으로 연료를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었다.23) 현재로선 황실가족의 탈출을 위한 재정문제 대표 교섭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로스토브스토프가 역시 짜르구출하기에서 시보롯카로 언급된 그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적어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짜르구출하기가 말하고 있듯이 그가 라마승들에 의한 황실가족의 피난에 도움을 주고 있는 달라이라마에게 돈을 보냈다고 고려해 볼 수 있다.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북부 투르키스탄까지의 지방은 그 당시 우호적인 정권의 수중에 있었다. 중킹으로의 지루하고 고된 여행 후에, 짜르구출하기가 언급하고 있듯이, 황실가족은 영국 포함에 승선할 수 있었으며, 당시 중국이 12월이었기 때문에 강을 따라 우숭으로 향했으며, 거기서 폭스는 가족들이 일본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실제로 짜르구출하기가 실제 사건들의 비유적인 기술(記述)이 아니었다면,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의 편지는 그것이 비유적인 기술이라고 전혀 시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편지에서 이 둘은 “아일랜드문제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로이드 죠지 총리를 난처하게 하기 위해 그 책을 출판한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얘기했다. 그리고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노브스키는, 마치 아일랜드가 이 비(非)볼셰비키 경향의 러시아인의 이번 귀환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이기나 한 것처럼, “우리의 날이 오면 나는 아일랜드에 가서 그 경의로운 푸른 대지에 입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노브스키와 그의 친구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의 논조가 사람들로 하여금, 아일랜드가 어떤 식으로든지 러시아의 왕정복고에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했다. 그 뒤 짜르구출하기의 일부 책들이 맥게리가 아닌 루트릿지의 이름으로 인도되었을 때, 맥게리는 로마노브스키에게 보낸 비밀편지에서 “귀하는 R.R이 만든 황소(Bull)가 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나에게가 아니라 한 사람의 Wm(윌리엄) 루트맂지에게 통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황소는 내게 돈을 잃게 했으며 귀하에게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이에 불구하고 나는 우리 때문에 판매를 중단시킨 그 회사에 항의했고 다시 항의하고자 합니다.”24)고 쓰고 있다.

 

바로 2개월 전, 그리고 짜르구출하기가 나온 지 단지 5개월 만인 1920년 11월22일에 맥거리는 로마노브스키에게 아래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영국은 니콜라스를 인도에 두고 있으며 -

 

- 웰스는 모스크바에 -

 

- 그리고 볼셰비키는 조약(條約)에 얽매여 있습니다 -

 

- 그녀가 토볼스크의 죄수들에 대해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

 

나는 그 책들이 로스엔절러스를 거쳐 다른 곳으로 갔는지 아니면 아직 모나드노크[그 책을 쌓아 놓은 빌딩]에 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이 편지는 확실히 재미있다. 이 편지의 함의(含意)는 영국(그녀)은 처음에 그 책의 이름을 토볼스크의 죄수들로 불려지기를 원했지만, 짜르구출하기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리챠드 디콘은 그의 책 “영국 커넥션, 영국사람들과 기관들에 대한 러시아의 속임수(The British Connection, Russia's Manipulation of British Individuals and Institutions)”에서 시드니 레일리와 맥게리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또한 짜르구출하기가 소비에트의 그릇된 정보였는지 모르지만, 로마노브스키와 맥게리에 대한 철저한 조사 이후, 볼셰비키 음모단에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고의로 연결돼 있는 흔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책이 영국정부의 특정한 관리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맥게리가 수수께끼 같이 “황소(Bull)“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윌리엄 불(Bull)경을 암시적으로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 불경은 레일리를 처칠에게 처음 소개했던 유명한 통일당원(아일랜드 자치안에 반대한 보수당원 - 옮긴이)이었다. 맥게리는 또한 뉴욕의 유니온 리그에 소속돼 있었으며 시드니 레일리와 통상적인 사업관계를 갖고 있었다.

 

최근에 데이비드 스태포드가 쓴 처칠과 비밀정보국(Churchill and the Secret Service)이 얼스터 출신의 제국육군 참모총장이었던 헨리 윌슨 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 영국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게 된 그는 때때로 로이드 죠지(총리)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공상을 하곤 했다. 카르신[런던에서 무역협정 협상을 벌인 소련 대표단 단장]에 대한 죠지의 관용과 그의 비행들이 오직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달 어느 날 처칠은 윌슨을 몇 차례 만났다.25)

 

 

처칠은 볼셰비키들의 팬이 아니었으며, 헨리 윌슨은 로이드 죠지를 반역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26) 1920년 7월 직전에 극동에 있다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귀국 길에 올랐던 레일리는 영국 비밀정보국을 위하여 다시 한번 적극성을 보인 것이었을까? 그리고 짜르구출하기의 출판이 아일랜드의 분할에 반대하고 있었던 로이드 죠지와 같은 특정한 정부관리들을 당혹케 하고 압력을 가하려고 기도했던 것일까? 노동계급에게 과민한 정부의 수반이 국왕의 친척(짜르)을 - 그리고 다름 아닌 노동자들에게 냉담한 것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실제로 움직였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로이드 죠지와 그의 정당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일랜드 분할문제가 어떻게 하여 러시아 거미줄에 걸리게 되었을까? 이상하게도 1920년, 로마노프 모험담에 깊숙이 개입했던 미 국무부 “특별 정보원”인 칼 에커먼이 다시금 밀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번에는 아일랜드의 분리에 관련된 협상에서 로이드 죠지와 이몽 데 발레라(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1932-48, 1951-54, 1957-59년에 아일랜드 총리, 1959-73년에 대통령을 역임하였음 - 옮긴이)사이의 밀사였다.27) 우리는, 파르팬 돔닌에 대해 호머 슬로터로부터 받은 보고를 최초로 정리한 사람이 에커먼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누가 짜르구출하기의 발간을 주도했는지 혹은 무엇이 그 동기였는지는 상관없이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우리들이 보아온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마지막 밤에 대한 설명에 보강증거가 되는 억지스런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짜르구출하기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기괴해서인지 깨끗이 잊혀졌다.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멕게리와 로마노브스키의 돈벌이 음모였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 책의 출간 후 영화계약을 기대했던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흑색선전이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누가 이면에서 이 책의 출간을 주도했는지를 우리가 영영 모르게 될 수도 있지만, 혹시 그것이 로마노프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들 중 하나를 갖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던져버리는 것이 현재로선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제16장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허구적인 사실과 사실적인 허구

 

 

새로운 사실인 것처럼 강요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은 콥티아키 근방의 숲 속에서 발견된 유골들의 DNA 검사에 관한 러시아위원회의 봉인된 결과를 로마노프 일가의 운명에 대한 마지막 소식으로 기꺼이 받아드리고 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서류들은 1918년에 로마노프 일가를 구출하기 위해 착수한 몇몇 복잡한 작전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아마도 그 중 하나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성공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유적 작품인 짜르구출하기에서 폭스는, 그와 황실가족들이 아직 터널 속에 있을 때, 짜르 일행이 사라진 것을 안 수비대 병사들이 당황해 하는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때 나의 “죄수들”은 (터널 속의) 출입구 언저리로 되돌아 왔다. 거기서 우리는 위에서 끔찍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다..........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화난 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 죄수들의 행방에 대해 설명해보란 말이야......시체들을 어떻게 했다고?...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태웠다니!1)

 

 

온 세계에 소문이 났던 날조된 이야기란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설사 짜르구출하기가 어떤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상이한 공작들이 다시 한번 서로 상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일 참모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던 공작이 하나 있고, 그리고 우리가 “차알스 제임스 폭스”로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이파티에프 하우스 수비대원으로 잠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한 고독한 영국 비밀정보원이 개입하고 있는 다른 것 하나가 있다. 짜르구출하기의 에필로그 부분이다.

 

 

저자후기

 

55개 단락으로 시보롯카[러시아 귀족]의 일기는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그의 서류들 중에서 다음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특징을 나타내는 육필원고가 아니고 어떤 다른 사람의 것이며, 일기작가(시보롯카)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내용을 곧장 받아 쓴 것이다. 러시아어로 쓰였으나 문법이 틀린 곳이 많으며, 철자도 엉망인 이 서류는 내통하고 있는 어떤 미확인 정보원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는 그의 상사에게 보낸 보고서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Al. 시보롯카의 유고원고들 가운데서 그것을 찾아냈기 때문에 이 서류를 추가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신이 떠난 후 4, 5일쯤 되어 나는 P.D.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E****에게 전달했고, E****는 그 내용의 일부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P.D.는 그것을 당신이 지시한 대로, 다른 잉크로 다른 종이에 써서 부본을 만들었습니다.2)

 

 

짜르구출하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P.D.라는 인물을 확인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P.D.는 또 다른 책인 칼 에커먼의 볼셰비키 추적하기(Trailing the Bolsheviki)에서 파르팬 돔닌으로 나타난 것이 고작인데, 이 파르팬 돔닌은 또한 호머 슬로터 소령의 정보보고서와 에커먼이 쓴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알려진 시종의 이름이다. E****는 황제(Emperor)를 지칭하고 있다. 이 인용 구절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황제가 파르팬 돔닌이 전해 준 한 육필원고에서 그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고 “일부를 정정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맥게리와 로마노브스키에게 전달된 그 이상한 일기/육필원고의 “작자들”이, 호머 슬로터의 보고서에 의해 처음으로 미군 정보부가 주목하게 된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작자들”이 슬로터의 보고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 이 정보는 오직 그레이브스 장군의 수중에 있었으며 그리고 짜르구출하기가 출간될 때까지는 아직 기록으로 만들어져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일기 작자들“이 파르팬 돔닌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유일한 다른 분명한 이유는 칼 에커먼의 뉴욕타임스 기사와 그 다음에 나온 책 볼셰비키 추적하기를 통해서였을 것 같다.

 

그러나, 잇달아 “그는 그것을 E****에게 전달했고, E****는 그 내용의 일부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P.D.는 그것을 당신이 지시한 대로, 다른 잉크로 다른 종이에 써서 부본을 만들었습니다.”라는 섬직한 코멘트가 있다. 제15장에서 언급했듯이, 보고서 하나가 아직도 에커먼 서류철에 남아있는데, 수도원에서 음식을 날랐던 수녀와의 조우를 상기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음과 같은 설명에 비춰봐 그것은 그 수녀가 수녀로 가장한 어떤 귀족부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상좌수녀의 방에 안내되어 한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중년을 훨씬 넘긴 나이 같았는데도 아직도 매우 건장했으며 짜르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얘기할 각오가 돼 있는 것 같았다.”

 

훗날 호머 슬로터는 그의 정식 보고서에서 수도원의 그 수녀는 파르팬 돔닌의 보고서에 더 이상 말을 덧붙이려 하지 않았다고 썼다. 슬로터에게 그것은 그녀가 밝힐 것이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비쳤던 것 같다. 그 수녀와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추가된 것 - 에커먼 서류에서 발견된, 발표되지 않은 그 보고서에 언급돼 있다 - 을 제외하곤 그러하다.

 

 

1918년 11월21일

 

......구력 7월2일(신력 7월15일)에 그 수녀는 종이와 잉크를 갖다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그것들을 3일(구력 7월16일)에 전달했다. 2일(7월15일)에 그녀는 그 이튿날 우유 외에 계란 50개를 요청 받고 갖다주었다......

 

 

이 구절이 흥미를 끄는 것은, 뉴욕타임스의 에커먼 기사에서도 슬로터의 정보보고서에서도, 수녀가 그들(에커먼과 슬로터)에게 식품공급 외에 종이와 잉크를 요청한 사실을 얘기했다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소콜로프의 보고서에 포함돼 있는 증언에서도, 그리고 죤 오코너의 책에서도, 그 수녀가 황실가족들이 사라지기 며칠 전에 그 집에 종이와 잉크를 가져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계란 50개에 대한 언급은 있다. 황실가족 실종 직전에 종이와 잉크를 요청한 것에 대한 언급은 오직 짜르구출하기와 그리고 그 수녀의 발표되지 않은 인터뷰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기괴해 보인다. 이것은 믿기 어려운 또 다른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그 알려지지 않은 정보원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14일째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새로 수비대 대장으로 부임한 사람과 그의 보좌관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회합을 가졌다. 시보롯카가 참석했다. 일부 사람들은 “숨겨진 보물”에 대해 얘기했다. 일부는 그 사람들(황실가족)의 “재판”에 대해 얘기했다. 일부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 짜르 충성파들(백군)과 체코군들이 급속하게 (에카테린부르그로) 밀어닥치고 있으며 이곳 저곳에서 소요가 일어날 것이란 소문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침내 황실가족을 즉시 처형하기로 결정이 났다.3)

 

 

이 구절에서 우리는 황실가족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주목하게 된다. 7월16일 오후 5시에 스베르들로프에게 보낸 한 전보 - 사본이 레닌에게 전달됐다 - 에는 재판에 대한 논의가 있다.

 

 

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필리프(골로스체킨)와 합의한 재판은 연기될 수 없음. 우리는 기다릴 수 없음. 다른 의견이 있으면 지체 없이 통보바람.

 

골로스체킨과 사파로프

 

 

이 전보는 모스크바에서 오후 9시 22분에 접수된 것으로 생각된다. 짜르구출하기에서의 해설자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다음 날 우리는 트럭들과 씨름을 했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No. 74-M을 포함하여 그들 모두는 귀하가 지시한데로 마그네토 형태로 변경되었으며, 그들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하도 알다시피 - 우리는 귀하가 지시한데로 했으며, 그리고 설사 우리가 예견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나의 잘못도, 시보롯카의 잘못도, 필립의 잘못도 아닐 것입니다.

 

16일 하루종일 조사가 계속됐으며, 그리고 인민위원들이 두 번 E****에 대해 물었습니다. 한꺼번에 네 사람이 이파티에프에 갔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난폭했습니다. 저녁 8시에 나는 붉은 집의 내 경비위치에 있었습니다. 전화가 잘 작동되었으며 필립이 대답했습니다. 넥커먼이 있는 곳에서도 역시 답을 했습니다.4)

 

 

해설자가 언급한 네크먼이라는 것은 네크먼 스타인버그일 수 있다. 그는 7월 초 10일간 좌익사회주의 혁명당원들(LSR)과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을 때, 볼셰비키들의 LSR 진압을 보고했던 사람이다. 네크먼 스타인버그는, 1918년 7월6일 레닌정부 주재 독일 대사인 폰 미르바하 백작을 저격하기에까지 이른, 극에 달한 그 폭동 가담자 모두를 체포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레닌은 독일의 복수를 두려워했다. 이 사건에 대한 네크먼 스타인버그의 개인적 평가는 1918년 7월에 레닌이 독일에 대해 가졌던 실질적인 두려움을 추가로 조명하고 있다.5) 스타인버그는 우파(Ufa) 출신인데, 우파는 공모자들의 일부가 황실가족을 구하려던 그들의 노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몰려갔던 장소라고 짜르구출하기가 말하고 있는 곳이다. 스타인버그는 또한 사빈코프와 그리고 볼셰비키들을 타도하려했던 사회주의 혁명당 지도자들과 가까웠다. 스타인버그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그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 중 누구도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음모에 즐겨 가담할 이상적인 후보자였을 것이다.

 

짜르구출하기에 나타난 네크먼이라는 사람이 바로 이 네크먼일까? 게다가 트로츠키와 유대인들이란 책에서 네크먼 스타인버그는 변화무쌍한 혁명가로 묘사되고 있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트로츠키와 스타인버그는 테러 활용에 대한 중요한 문제로 충돌했다. 스타인버그의 ‘자유주의적 나약함’이 트로츠키의 성격에 전혀 맞지 않았다.”6)

 

훗날 레닌에 대해 쓴 트로츠키의 책에서 그는 스타인버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좌익사회주의 혁명가인 스타인버그, 그는 이상한 바람을 혁명에, 그리고 심지어 중앙 인민위원회의에 불어넣은 사람이다.”7)

 

트로츠키가 스타인버그를 이렇게 평가하는 바람에, 로마노프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진 레닌은, 마침 황실가족 석방문제를 다룰만한 적당한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자, 스타인버그에게 그 일을 맡도록 요청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스타인버그가 아주 냉혹하고 피에 굶주린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짜르구출하기의 에필로그는 7월 그날 밤의 사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시에 나는 이파티에프의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공주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손을 흔들었으나 감시병 한 명이 창 앞으로 와서 총검으로 창문을 닫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계속하지 못했다[원문대로].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나는 필립과 시보롯카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물었다. 나는 그들이 이파티에프 하우스로부터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티크빈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수녀가 당초 있기로 한 곳에 있는지 물었다. 그래야만 내가 가서 왜 S-y가 출발하지 않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10시에 전화가 걸려왔으나 곧 끊어졌다. 내가 그 집에 대한 어떤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필립이 직접 와서 S-y가 그에게 트럭들을 시 바깥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필립은 그러기를 거절하고 내게 전화를 하려고 했으나 전화가 되지 않아 시보롯카에게 일을 맡겨놓고 개인적으로 나와 상의하려고 온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되는지를 요약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 집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시작됐다. 각 창문에서 불빛이 명멸하고 그리고 조금 후에 우리는 권총 한발이 발사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이것은 뭐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우리 둘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붉은군대 경비병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미 약 15명의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울타리 안쪽에 있는 경비병들이 저항을 했고 몇 발의 총격이 오갔다. 공격자들은 ”보물“을 찾고 있는 붉은군대들이었다. 그들 중의 일부는 황실가족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며 그 가족들을 찾고 있었다.8)

 

 

여기서 우리는 “필립”과 그의 알려지지 않은 동료가 차고에서 트럭들의 이동에 대한 전화통보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들 트럭들이 시 바깥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필립”은 그 지시를 거절했다.

 

에커먼과 슬로터가 인터뷰했던 그 수녀 역시 트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짜르나 그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다고 믿지 않으며, 내가 3일(신력으로 7월16일), 뜰에 서서 본 트럭을 타고 그들이 시 외곽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로브스키가 1920년과 1934년에 한 증언에서 그 날밤의 사건에 대한 그의 기억을 자세히 이야기했을 때, 그는 트럭들의 도착이 늦었고 그리고 야코블레프가 말했던 사람인 필리프 골로스체킨이 황실가족의 죽음을 보고싶어하지 않았던 우랄의 유일한 공산당간부였으며 이파티에프 하우스 바깥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얘기했다.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S-Y는 뒷날 “유골” 조사단을 이끌었던 백군 장교인 세레메테브스키였을까? 우리의 알려지지 않은 해설자의 눈을 통해 계속 알아보자.

 

 

이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집 뒤쪽으로 돌아가서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있었던 Ch.가 날더러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안에서 총소리가 들렸으며 모든 게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한 레인스트와 다른 세 사람이 시보롯카의 집을 수색하려 갔다고 말했다 - 그들은 분명히 어제 그 집에서 모두를 탈출시켰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9)

 

 

볼셰비키로 가장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인 시보롯카 혹은 알렉세이는 그의 일기에서, 안나 비루보바의 친구이며 황후와 내밀한 얘기를 나누는 친구인 남작부인 B에 의해 황실가족을 구출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게됐다고 말했다. 리틀 마르코프는 그의 책에서 그 자신 보리스 솔로비에프와 결속돼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솔로비에프는 앞서 보았듯이 시드니 레일리와 함께 카롤 야로신스키의 보좌관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더욱이 솔로비에프는 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결성된 토볼스크의 성요한단(團) 단장이었다. 연합국들의 금융사업계획에 깊이 관여했던 카롤 야로신스키가 동시에 황실가족의 재정후원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솔로비에프와 레일리를 통해 토볼스크 성요한단의 단원으로 가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기록으로는, 솔로비에프가 그 무렵 때때로 안나 비루보바와 교신을 하고 있었다. 짜르구출하기에 의하면, 남작부인 B와 다른 두 사람, 즉 스탠리란 이름의 영국정보국 요원과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온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이 시보롯카의 집에 전신기기를 설치했다.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된 “Ch."는 에카테린부르그 시 집행위원회 의장인 세르게이 예고르비치 추쯔카에프일 것이다. 1920년과 1934년 보고에서 유로브스키는 추쯔카에프를 모스크바 하이웨이 근방에 있는 몇 개의 매우 깊은 광갱을 시체처리장소로 사용하도록 추천한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다. 유로브스키에 의한 이 짧은 언급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1934년 ”노장 볼셰비키들“이 모인 자리에서의 연설에서, 그는 황실가족의 처형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도록 7월10일에 지시를 받았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처형을 끝낸 것으로 돼 있는 그날에 추쯔카에프로부터 시체처리에 대한 귀뜸을 받았을까? 우리의 (짜르구출하기의) 해설자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 집에서 나는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황실가족이 사라져버렸고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피트칸은 배와 목에 총을 맞았다. 나는 그가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코크리아코프와 그의 부하들은 그를 흔들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E(황제)와 보석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피트킨이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곤 “그들은 가버렸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그를 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황실가족)이 이른 저녁에 트럭을 타고 달아났다고 말했다. 소비에트가 파견한 한 분견대가 그 사람들을 비밀리에 불러내었다. 몇 사람은 (트럭이 아니라) 비행기라고 말했다. 모두 틀린 말이었다. 필립이 즉시 되돌아왔고 트럭들도 제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초를 서고 있으면서 보았지만, 아무도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들어오지 않았다. 6시 이후에 비행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피트킨은, 코크리아코프가 마지막으로 그로부터 황실가족이 총을 맞고 실려나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 곧 숨을 거두었다. 그 후 그 독일인이 나타나 우리 모두를 쫓아내 버렸다 - 그는 그의 보좌관을 데리러 사람들을 보냈지만,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10)

 

 

아마 우리는 오랫동안 극도로 논란을 빚어 온 파벨 메드베데프의 증언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추측컨대 로마노프 일가의 죽음에 대해 유일한 목격자 증언을 한 직후 이상하게 종적을 감춰버렸는데, 그 후 사상전향을 하여 백군 쪽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는 발진티프스에 걸려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를 살리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소콜로프가 그를 재심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백군들이 실지로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를 병원에 옮긴 것이다. 문제의 그날 밤에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당번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던 메드베데프의 말에 의하면, 1918년 7월10일에 수비대 교체 이후, 유로브스키는 메드베데프가 전에 본 적이 없는 26-27세 되는 블론드 머리칼의 어떤 청년을 보좌관으로 데리고 있었다.11) 게다가, (짜르구출하기에서) 미지의 해설자가 행한 다른 언급과 유사하게, 메드베데프 역시 그가 학살이 있었다고 말했던 그날 밤에 약 15명의 남자들이 그 집으로 달려들어갔다고 얘기하고 있다. 메드베데프의 증언은 소콜로프에 의해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 증언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로마노프 일가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그 운명적인 여름밤에 죽었다는 것을 일찍이 그리고 항상 확인해 줬던 범죄의 결정적 증거로서 채택되었다.

 

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새 보좌관이 - 아무도 모르는 사람으로 난데없이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나타난 - 차알스 제임스 폭스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아심 외에, 짜르구출하기의 마지막 장면들에 나타나는 미지의 음모자가 바로 메드베데프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아심 역시 가질 만 하다. 이들 두 사람과 연결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메드베데프와 짜르구출하기의 해설자로 나오는 사람 둘 다 시세르트 지역에 매우 친숙해 보인다는 점이다. 시세르트는 실제로 메드베데프의 고향이며 짜르구출하기의 해설자는 그 곳이 황실가족의 보호관리를 위한 병참업무를 하기가 알맞은 곳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있었던 핵심 목격자의 황실가족의 죽음에 대한 증언과, 그리고 짜르구출하기의 전편에서 해설자로 나오고 있는 사람의 보고 사이의 유사성이, 사실상 어떤 근거를 가지고 추정하는 허구의 또 다른 귀착인 것처럼 보인다.

 

코크리아코프라는 이름 역시 짜르구출하기의 빛 바랜 내용에 포함돼 있으며 추가로 유념해 볼 가치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코크리아코프는 그 책이 나올 당시 서방 세계에선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었다. 우리가 야코블레프 사건 기간 동안에 처음 접했던 파벨 다닐로비치 코크리아코프는 발틱 함대의 수병이었다. 그는 또한 잠시 토볼스크의 소비에트 의장으로 있었는데, 그 무렵에 니콜라스, 알렉산드라 및 마리아가 나머지 가족과 떨어져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겨졌다. 야코블레프가 황실가족을 “모스크바나 다른 어떤 곳”으로 옮기려고 시도한 후에 나머지 가족들과 로마노프 일행을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기도록 (모스크바로부터) 지시를 받은 사람이 코크리아코프였다. 그는 황실가족이 실종된 후 한 달 만인 1918년 8월17일에 내전의 희생자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짜르구출하기는 또한 코크리아코프의 동료인 카가니츠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카가니츠키를 시보롯카는 “내 짐작으로는 그가 우랄에서” 온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3) 단지 최근에 널리 알려지기로는, 황실가족을 감시하기 위해 모스크바 당 위원회가 역시 우랄의 토볼스크 출신인 이삭 야코블레비치 코가니츠키를 에카테린부르그에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14)

그렇다면, 192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 최근까지도 서방에 실질적으로 알려진 적이 없는, 그리고 1920년 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더구나 알 수 없었던, 그렇게 중요치 않은 소련 관리들의 정확한 이름들을 어떻게 들먹일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짜르구출하기 속의 일기들이 근거가 확실한 것이 아니거나 혹은 적어도 내구성이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적당히 만들어 내기 위해 황실가족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해 매우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짜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이다. 짧은 기간에 반짝하다가 사라진 짜르구출하기라는 책이 - 맥게리의 맥아두 방문 후 그것이 회수되기 전에 - 몇몇 영국, 미국 및 다른 연합국 정보원들의 생명을 잃게 하는 대가를 치렀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황실가족 사건 후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각종 정보기관 요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주장들이 한번도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윌리엄 맥아두와 연결돼 있었을까?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우드로 윌슨 대통령 아래서 내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바로 윌슨의 사위였다. 1919년에 윌슨은 그 해에 발작한 뇌졸증 때문에 1918년만큼 적극적이지 못했으며, 이 때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과 그의 국제연맹에 대한 비전을 이해시키기 위해 미국 국내를 순회하고 있었다.

 

짜르구출하기의 해설자는 이렇게 계속하고 있다.

 

 

황실가족이 사라졌다 - 정녕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실가족과 같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라고 지시를 받은 소비에트 대표자들이 도착하여 시체를 찾기 시작했을 때까지 여러 곳을 계속 찾았다. 모든 곳이 붉은 군대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전 병력을 출동시켰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죄수들이 멀리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들은 모스크바에 전보를 쳤다.15)

 

 

앞의 인용문을 보니 모스크바에 보낸 그 악명 높은 전보 생각이 난다. 1924년, 니콜라스 소콜로프의 공식 조사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세계는 처음으로 짜르와 그 가족의 처형에 관한 소식을 전한 것으로 추측되는 - 아브자(레일리의 동료)가 암호해독을 한 - 전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전보의 내용은 이랬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는 것을 스베르들로프에게 얘기하기 바람. 공식적으로 가족은 철수 중에 죽을 것임.16)

 

 

이 전보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에 대해선 아미 이 책의 앞장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 하지만, 짜르구출하기에서 인용된 전보에 관심이 가는 것은, 그것이, 황실가족 문제와 관련하여 보낸 위의 전보는 별문제로 하고, 유일하게 알려진 전보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짜르구출하기에서 나타난, “모스크바에 전보를 쳤다”는 문장은 단지 또 다른 우연의 일치로만 해석되어야 할까? 아니면, 짜르구출하기와 소콜로프 보고서 양쪽에서 인용한 그 전보들이 실제로는 한 개이며 꼭 같은 것이었는데, 1920년 말 소콜로프를 위해 아브자가 암호를 해독할 때까지 추측컨대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전보가 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아직도 더욱 이상한 것은, 이파티에프 하우스에서 발견된 붉은군대 지도자인 트로츠키의 “머리 솔”에 대해, 소콜로프의 보좌관인 불리긴이 그의 비망록 - 후버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 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언급을 하고 있는 점이다.17) 황실가족 문제로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서 또 다른 갈등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래서 차알스 제임스 폭스 - 만약 그가 실존인물이라면 - 가 황실가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때 맞춰 도착한 것이었을까?

 

확실히 로마노프 일가의 마지막 날들은 거짓과 진실 속에 은폐돼 온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까지도 종잡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 모순 중의 한 사례는 트로츠키가 훗날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1918년 7월 초순부터 에카테린부르그가 체코군과 백군에게 떨어진 후 얼마쯤까지의 기간에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주장한 점이다. 그러나 문제의 그날 밤 그의 행동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행방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과는 반대로, 최근에 공개된 소련문서보관소 기록들에서는 그가 1918년 7월18일에 모스크바에서 소브나르콤(인민위원회의) 회합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짜르구출하기의 에필로그로 되돌아가 보자.

 

 

내가 오직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 집안에서 두 사람을 죽였고 그밖에 다른 사람은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트칸과 크레머가 죽었다. 크레머는 아마도 멀리서 총을 맞은 것 같았다 - 머리에 탄환을 맞았다. 이들 두 사람 외에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귀하가 만약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오래 전에 - 아마 그 날 낮이나 이른 저녁에 - 스토브에 물건들을 태웠음에 틀림없다. 스토브는 거의 식어 있었으며, - 붉은군대들이 스토브에서 어떤 것을 끄집어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다. 내가, 황실가족 전체가 어디로 옮겨져 죽었거나, 살았거나 혹은 어떻게 사라졌거나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필립을 데리고 시보롯카가 있는 곳으로 단걸음에 달려갔다. 트럭들도 운전기사들도 가버리고 없었다. 차고에서 우리는 시보롯카가 포승줄에 묶여 척추에 총을 맞아 그 구명과 다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18)

 

 

유로브스키가 노장 볼셰비키들에게 했던 1934년의 연설에서 그가 황실가족의 시체를 매장하려고 시도했던 장소로부터 에카테린부르그로 되돌아와 차고에 가서 승용차나 트럭을 찾았으나 둘 다 없었다고 말했던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유로브스키는 결국 다른 승용차를 수배했는데, 그는 또한 그 차고 책임자가 그를 안달하게 했던 악당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차를 한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악당이 그 뒤 페름에서 사살됐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다시 우리의 해설자가 말하고 있는 것 속에서 진실의 고리, 아니면 적어도 불가사의한 우연의 일치가 있는가를 찾아보자.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차고의 상황을 보고 우리는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그(시보로톳카)는 전혀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곤 “반역죄”, “달아났다”, “여기서 죽게 내버려둬라” 등등, 신음소리와 함께 섞여 나오는 개개의 낱말뿐이었다, - 그는 분명히 헛소리를 하고 있었고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간호해줬고 아침 5시경에 시내로 돌아왔다. 필립이 네크먼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둘 다, 2시가 막 지나서 3대의 트럭이 시세르츠키 공장으로 가는 하이웨이를 지나갔다고 보고했다. 몇 사람이 그 트럭들에 타고 있었는데, 네크먼은 우리가 그 트럭들을 타고 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황실가족이 종적을 감췄거나 처형됐거나 했다는 소문들이 이미 그들에게까지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세르츠키 방향이 아마도 틀림없는 것 같다. 군수품들이 최근에 계속 투비우크로 보내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보롯카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길은 또한 시보롯카가 아는 부인이 갔던 길이다.

 

S-y와 모두가 떠났다 - 일부는 저녁에, 또 다른 일부는 17일 아침에 떠나겠다고 한다.

 

시보롯카가 부상에서 소생하면 아마도 어떤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붉은군대들이 그를 찾아내게 되면 그를 죽이고 갈 것이다. 그가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열이 나고 있다. 필립과 나는 우리 조직이 모두 성과를 거두지 못했거나, 우리가 모두 배신을 당해 탄로가 났거나, 그게 아니면, 귀하가 의도적으로 진실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린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 밤 우파(Ufa)로 갈 예정인 네커먼 부인이 당신에게 편지를 줄 것이다. 붉은군대들이 에카테린부르그를 떠나는 즉시 우리 둘은 따라 갈 것이며, - 우리는 지금 숨어 있다 - 그리고 우리가 본 것, 우리가 들은 소문을 보고할 것이다.

 

 

“시세르츠키 방향”은 메드베데프의 고향이 있는 곳일 뿐 아니라 남작부인 B와, 그리고 그녀의 동료들이 가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언급된 S-y라는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세레메테브스키일 수 있다. 그는 짜르의 부관이었으며 릴리 덴의 친척의 한 사람인 덴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릴리 덴은 또한 안나 비루보바와 솔로비에프가 이끌고 있었던 단체의 중요 일원이었다. 앞서 얘기했듯이, 세레메테브스키가 적당히 콥티아키 마을에 숨어 있다가, 황실가족이 살해됐다는 증거로서 숲 속에 있는 가족 유해에 체코군의 주의를 기울이게끔 했다는 것은 내겐 항상 의아스러웠다.

 

우발적으로 혁명가가 된 스타인버그에 관한 보고서를 입수하여 “밤에 우파(메크먼 스타인버그의 고향)로 가고 있었던” 사람이 네크먼 부인이었을까? 스타인버그를 에카테린부르그로 보내, 황실가족을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던 우랄의 유일한 볼셰비키였던 필리프 골로스체킨과 함께 일하게 한 것은 아마도 레닌일 것이다. 그들은 황실가족을 탈출시켜 연합국이나 독일에 넘기려는 음모를 도울 작정이었을까? 그리고 황실가족이 실종된 것을 알고 다른 사람들처럼 결국 당황하게 된 것일까?

 

의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감시를 받고 있는 집에서, 어떻게 볼셰비키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총을 쏘아 사람들을 죽이고 적어도 11명이나 되는 시체들을 옮기는 소동을 벌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짜르구출하기에는 분명히 그렇게 그려져 있고 - 물론 죽은 사람의 수는 훨씬 적다(2명) - 황실가족들이 터널을 통해 영국 영사관으로 탈출한 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모든 증거 - 연합국의 금융사업계획을 통한 뇌물과 자금지원 - 는 레닌이 그의 혁명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받을 목적으로 황실가족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의 사촌들인 죠지5세 왕과 카이저 빌헤름이 - 그 무렵 그들은 러시아 황실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때때로 그들의 참모부와 의견이 엇갈렸다 - 돈을 주고 그들(황실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끝없는 협상을 벌였고 그리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몰래 한번쯤 레닌이 흥정하고 있는 인질들을 빼내기 위해 그의 제의에 동의했는지도 모른다. 몇몇 정부 고위관계자들과 교회간부들의 도움을 받아, 차알스 제임스 폭스의 구출시도에 맞춰 그들(죠지5세와 빌헤름)이 레닌과 협상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적어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해 아마도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터널을 통한 황실가족의 탈출이 과거에는 억지로 꿰매 맞춘 이야기로 들렸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더 조사를 진행시켜 볼만한 시나리오인 것 같다. 나는 바로 그것을 해 보기로 했다.

 

나는 내 연구에 의해 드러난 음모의 배경을 검토한 후에 미 국무부의 기록으로 눈을 돌렸다. 처음에 관계가 없어 보였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지금은 갑자기 의외의 방식으로 연계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래된 파일과 약간 현대의 파일 모두에 대한 추가 분석에서, 1918년 6월부터 그해 말까지 미국 및 영국 외교관들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국에서의 그들의 활동이 강화되었는데, 여기에는 러시아의 백금(황실가족)에 대한 협상도 포함돼 있었다. 정확히 이와 꼭 같은 시기에, 영국 영사 토마스 프레스톤과 미국 영사 헨리 팔머 뿐 아니라 알렉산더 벨로보로도프와 차야(필리프) 골로스체킨까지 그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이 에카테린부르그로부터 금과 백금을 옮기고 있다고 프레스톤이 전보를 쳤던 날인 6월12일에, 러시아 산 백금 판매에 대한 협상이 일시적으로 지연됐다는 취지의 다른 전보가 상하이에서 미 국무부로 타전됐다.20) 탈출 중인 로마노프 일가의 목적지가 우숭이었다는 짜르구출하기의 설명을 고려할 때, 금과 백금에 관해 상하이 쪽에서 이런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만약 금과 백금이 실제로 짜르와 그 가족에 대한 암호였다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가족의 목적지인 우숭이 상하이에서 겨우 12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산 금과 백금 사정에 대한 정보가 호머 슬로터 소령의 웨스트포인트 동료인 커터 대위에 의해 처리되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욱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커터대위는 오직 최근에 상하이로 전근됐기 때문이다. 커터는 한때 슬로터와 함께 시베리아에 갔으며, 슬로터의 부인이 슬로터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볼셰비키 “대역을 하고 있는” 동안 호머와 동행하려 하고 있다고 수수께끼처럼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중국에는 또한 국무부의 특별 정보원인 차알스 덴비가 있었다. 그는 적어도 6월13일 이후에 선임되었다. 덴비는 미국 해군 정보부와도 교신을 하고 있었는데, 7월16일에 거기에 비밀전보를 한 통 보냈다. 덴비는 윌슨 대통령과 가까웠으며, 차알스 크레인의 추천으로 부임한 중국주재 미 대사인 폴 레인쉬와 접촉하고 있었다.21) 1918년 여름에 갑자기 귀국한 폴 레인쉬는 9월에 크레인과 함께 중국으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그 후 9월 말 둘 다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요코하마 여행을 했다.22)

 

그들은 거기서 황실가족 구출임무와 관련된 최종순간의 걸림돌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일까? 왜 크레인은, 영국 하원의원인 존 조던 경이 그를 위해 길을 닦아 논 것으로 보이는 중국여행을 계속했을까? 크레인은 1918년 크리스머스 직전까지 상하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토마스 마사리크의 개인비서로 근무하고 있었던 크레인의 아들인 죤 크레인은 발표되지 않은 어떤 육필원고에서, 그의 아버지가 1918년 가을과 겨울, 윌슨대통령을 위한 “비밀임무”를 띄고 중국을 여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23) 짜르구출하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로마노프 일가의 지루하고 고된 여행과 결부시키지 않고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것 같다. 그 책에서 로마노프 일가를 위한 자유에의 노정으로 묘사됐던 바로 그 시간에, 양자강을 따라 우숭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크레인을 갖다 놓는 것이다. 크레인이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을 통해 달라이라마에게 선물을 보낸 것, 그리고 크레인이 솔로비에프 역시 와 있었던 중국에서 부리아트 아타만 세메노프 군대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우리는 전반적인 로마노프 문제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좀 더 주의 깊게 고려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대사로서 신임장을 받지도 않은 나라에서(이 무렵 그는 주중대사로 임명됐다), 짜르구출하기가 약술하고 있는 여정보다 꼭 한 걸음 앞서 이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1918년 12월29일, 윌리엄 그레이브스 장군이 시베리아로부터 보낸 전보로부터 시작되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련의 전보들이 있다.

 

 

플레인(PLAIN) 암호로 전보 접수

 

국무부

 

1918년 12월 29일

 

국무장관

 

워싱턴

 

 

러시아인들이 황실가족을 바이칼 호 동쪽에 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로마노브스키 장군이 방금 내게 통보했음. 지금 여기(시베리아)서는 러시아인들이 황제가족의 권능에 반하는 어떤 짓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데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음. 황실가족은 그들이 세메노프에 대해 어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동시에 세메노프로 하여금 국영열차 종업원들을 체포하고 모든 그들의 계획에 간섭하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함. 러시아는 미국이 나서서 황실가족들로 하여금 그들의 합의사항들을 정직하게 이행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으로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함. 그렇지 않으면, 이 문제는 러시아가 안정된 정부를 가질 때 해결돼야 할 것이라고 함. 러시아인들이 황실가족에게 이야기를 해 봤자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하다 함. 동부의 또 다른 영향력 있는 러시아인인 호르바스 장군이 동요하고 있으며 황실가족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 함. 다음은 오늘 정보장교인 베르크뉴딘스크에게서 온 것임. “대표자 세메노프가 지난 밤 기관총을 가진 병사들을 데리고 이 곳에 도착하여 모든 관리들을 체포하고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혔음. 황실가족은 데리고 왔던 경비병들을 철수시켰음.” 이것은 세메노프가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좋을 데로 할 수 있게 됐다는 로마노브스키의 언급을 뒷받침하고 있음.24)

 

 

그리고 이에 대한 “지급”회신이 왔다.

 

 

런던으로부터 그린(GREEN) 암호로 접수

 

1918년 12월30일

 

접수, 1919년 1월3일, 오후 4시16분

 

국무장관

 

워싱턴

 

지급

 

국무부 12월30일 오후 6시. 파리 경유. 거의 마지막에 “가족”이 가족권능, 가족, 가족을 강제하는 것, 등을 일곱 번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함. 즉시 회신바람. 데이비스.25)

 

무엇이 거미줄을 엉키게 했을까. 29일에 타전된 전보는 “플레인(Plain) 암호”를 사용했다. 플레인 암호라는 것은 암호 안에 암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30일에 사용된 암호는 “특수 그린(Special Green)”이었는데, 이것은 가장 비밀스런 업무에만 사용된 최상급 미국 암호였다. "특수“라는 말 역시 메시지의 암호가 해독되었을 때, 해독된 원문이 아직도 타전된 메시지의 진짜 의미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전보 시리즈 중 다음 전보는 몇 주 후에 타전됐다.

 

 

전보 송부

 

 

국무부

 

워싱턴

 

“특수”

 

암호

 

1919년 1월20일

 

미국대사관

 

파리-런던

 

귀하의/No.없음/12월/30일/전문/괄호열고/

 

가족/괄호닫고/이/그레이브스/장군/으로부터/온/최초(비밀)/전문에서/분명히/일본이라는/언급으로/커버하여/사용되고/있음./

 

대리서명: 폴크26)

 

 

액면대로 믿는다 해도, 그리고 폴크가 제의했던 대로 12월29일 전보에서 “가족” 대신에 “일본”이란 말을 사용한다 해도 특히 “가족에 대항하여 버티고 있다”로 끝맺고 있는 문장에서는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설사 암호 해독된 메시지가 표면적으로 일본으로 돼 있다 하더라도, 숨은 메시지는 단연코 일본이 아니다. 다른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발간된 어떤 암호책에서도 나는 일본이란 말을 “가족”에 적용시킨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메시지의 문맥에서, “가족”은 일본과 일본인 둘 다를 의미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 암호들은 변함없이 주어와 형용사에 다른 암호낱말들을 사용했으며, 그리고 그 암호낱말들을 같은 뿌리에서 끌어냈다. 그리하여 “일본(Japan)”으로 사용된 것의 뿌리가 “가족(family)”이라면, “일본인(Japanese)”으로 사용된 것의 뿌리는 “가족의(familial)"와 같은 어떤 것이거나 혹은 심지어 ”친한(familiar)"이거나 할 것이다. 동일한 낱말이 다른 파생어에 절대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원문이 “가족”이란 낱말의 빈번한 그리고 별난 사용 때문에 부자연스럽다. 이 메시지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쓰여졌다면, 대명사 “그들의(their)”와 “그들이(they)”는 더 많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폴크는 그 전보가 함축하고 있는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리고 12월29일자 전보의 “가족”이란 낱말의 의미를 추정하는 데 거의 3주가 걸렸다는 사실은, 러시아 문제를 맡고 있는 그의 자리가 견문이 넓은 사람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할 만 하다. 러시아에 대한 쌍방향정책과 금융사업계획의 전개 기간에 그의 동료였던 국무부의 윌리엄 필립스는 그와 폴크 두 사람 모두 가장 중요한 정책결정에서 제외돼 있었던 데 대해 몹시 좌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폴크도 나도 그것[1918년 전반기에 남러시아에 적용된 정책에 대해]을 알지 못했다. 우리 둘 모두가 러시아 사태를 다루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너무 불합리한 일이다.27)

 

 

우리가 보았듯이 런던에 보낸 전보의 타이밍이 12월30일 저녁 우드로 윌슨이 그 곳에 있었던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중요성을 갖는다. 미국 비밀정보원인 윌 스탈링의 일기에 의하면 바로 그날 밤 윌슨 대통령 내외가 영국국왕내외와 함께 버킹검궁에서 만찬을 들고 있었다.28)

 

황실가족의 운명과 관련된 움직임들은 이들 두 정상에게 최대의 관심사였다. 반대로, 아득히 먼 시베리아에서 일본인들과 아타만 세메노프가, 대통령과 죠지왕이 시간을 연장해가면서까지 함께 있었던 바로 그 때에 극비 및 지급이 표시된 전보를 보내 그들의 만찬을 방해해야 할만한 이유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들은 러시아 황실가족 모두가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를 알고싶어했을 것이며, 그리고 로마노프 가족이 7명 - 니콜라스, 아렉산드라,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및 알렉세이 - 이기 때문에 “지급, 가족 일곱 번 확인함”이라는 언급이 더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조사연구를 하면서 나는 자주 동일한 포맷 즉, 서로가 확연히 알고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조그마한 연고 서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기록들 그리고 공식적인 채널을 거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흔적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거의 믿을 수 없는 활동들과 마주쳤다.

 

일부 사람들은 짜르구출하기를 돈벌이를 위해 꾸민 "허구"라며 무시해 왔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실들이 이 “허구”와 상충하고 있는 것 같다. 짜르구출하기에 의해 그려진 (탈출)루트는 투르키스탄으로, 그리고 달라이라마 대리인들의 안내에 따라 티베트로 연결되어, 결국 중국의 중킹에서 끝나며, 거기서 폭스가 황실가족을 영국해군에 인계했다는 이치에 맞는 여정이 제시되고 있다.

 

사실, 기묘하게도 1918년 극동에서 홀 대위라는 사람이 선장으로 있는 영국 해군포함 하나가 이 기간 동안 있어야 할 항해일지를 분실하고 있다.29) 이 분실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그 시기에 전쟁은 끝났었고, 침몰된 포함도 없었으며, 중국기지는 아주 평온한 곳이었다. 이것은, 양자강을 따라가며 있을 법한 비밀 임무에 대한 윌슨의 교섭 대표자인 차알스 크레인의 중국 주재와 함께 아주 심상치 않아 보인다.

 

홀이란 사람이 포함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나의 호기심을 돋군다. 제6장에서, 요나스 리이트가 황실가족 구출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홀 제독의 집에 초청을 받았으며, 홀의 딸이 참석했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짜르구출하기에서 함장은 차알스 제임스 폭스에게 그의 여동생을 만나고싶으냐고 물었다. 그 여동생은 그 직후 포함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이 홀(대위)은 홀 제독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오늘날까지 그 관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들 두 인물에 대한 독자적인 설명의 유사성은 또 하나의 인상적인 우연의 일치다.

 

내가 중국전역(戰域)에서의 다른 해군 기록들을 계속 추적하다가, 영국 군함 켄트호의 항해일지에 나의 주의가 쏠렸다. 이 배는 윌리엄 클라크가 그의 책에서 나중에 황실가족의 소유물들을 운반하는 데 사용된 배들 중의 하나라고 확인했다. 1918년의 대부분을 인도양에 머물렀던 켄트호는 1918년 8월31일 중국에서의 임무수행에 동원됐다.

 

짜루 구출하기에서 연표(年表)를 추적해 보면, 카스피해를 가로질러 봄베이까지, 그리고 인도반도를 가로지르는 (세일론 - 오늘날의 스리랑카까지의) 여행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이루어져야 했다는 것을 제임스 폭스가 그의 일기에서 이야기했던 시기와 켄트호가 동원됐던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 이렇게 서두른 것은, (인도에서의) 시민불복종 운동이 소동으로 번져, 황실가족의 봄베이로의 여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세계의 절반”을 가야만 했다. 군함 켄트호는 1918년 9월21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월5일에 싱가포르를 떠나 10월10일에 홍콩에 도착했고, 거기서 1918년 12월20일까지 장비점검을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2월21일에 켄트호는 닻을 올려 상하이로 떠났으며 1918년 크리스머스 날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4일 후, “가족” 일곱 번이라는 암호말을 사용한 그레이브스 장군으로부터의 전보가 미국, 영국, 프랑스 및 로마에 타전됐던 바로 그 날에, 군함 켄트호는 상하이로부터 단지 12마일 떨어져 있는 우숭 연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거기서 하루동안 정박했다. 이상하게도 짜르구출하기가 추정하고 있는 황실가족의 우숭 도착이 켄트호의 우숭 정박과 거의 꼭 같은 시간대로 맞춰져 있다.30) 켄트호는 그 후 나카사키로 갔으며, 거기서 1919년 1월1일31) 최종적으로 불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떠났다. 황실가족이 중국의 중킹에 도착하여 영국 포함함장에게 인계됐을 때가 중국의 휴일 시즌이었다고 차알스 제임스 폭스가 특별히 언급했던 것이 그저 또 다른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여러 가지 계산에 따르면, 황실가족이 중킹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가 크리스머스 가까이 되어 우숭에 도착하는 데는 약 7일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군함 켄트에 대한 기록들은, 그 배가 1919년 3월15일 이전 어느 때 29 상자의 황실가족 개인물품들을 적재했을 때, 다시 한번 특별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임무는 다음의 전보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극도로 조용히 수행되었다.

 

 

전보: 블레어, 불라디보스토크에서 우(WO)로 송부: 1919년 2월9일 14:45 접수: 1919년 2월10일 16:00 NR1042: 2월9일

 

2월5일자로 된 다음 것을 녹스 장군으로부터 인수하였믐. 약 8톤의 황실가족 개인소유물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운송되고 있음. 이들 물건들의 일부는 국보급의 가치가 있는 것들임......K[콜차크]제독은, 가능하다면, 그가 그 물건들을 켄트호에 더 안전하게 적재되도록 하고싶다고 말하였음.12)

 

 

여백에 굵은 푸른 연필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써 놓았다.

 

 

이것을 발표해서는 안됨. C. [C는 커밍을 말함. MI1c<영국비밀정보국>국장이며 약 8개월 전에 북부러시아에서의 작업에 대해 허드슨즈 베이사를 통해 아르밋스테드와 리이트에게 자금지원을 한 사람과 동일인이다.]33)

 

 

그 후 죠지왕의 비서인 스탬포드햄으로부터 다음 전보가 이어진다.

 

 

발신: 버킹검 궁전, 1919년 3월8일[육필기록]

 

국왕은 군함 켄트호에 실린 물건들이 러시아 황실가족의 가장 귀중한 자산을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배를 지휘하는 장교가 이들 상자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라는 지시를 받기를 희망하고 있음.34)

 

 

얼마 후 켄트호 함장은 런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

 

 

발신: 런던[아마도 해군본부]

 

수신: 영국군함, 블라디보스토크

 

일자: 1919년 3월15일

 

귀하는 전 러시아 황실가족의 개인자산을 포함하여 20개의 상자를 선적한 것으로 사료됨. 이들 상자들은 추가지시가 있을 때까지 귀하의 책임아래 안전하게 관리돼야 할 것임.35)

 

곧 다음과 같은 답신이 이어졌다.

 

 

발신: 영국군함 “켄트” 함장, 블라디보스토크

 

수신: 해군본부를 대변하고 있는 홍콩 기함 제독

 

일자: 1919년 3월21일

 

31. 해군본부 대리. 다음 전보를 3월15에 런던[아마도 해군본부]으로부터 수신하였믐: - (전문시작)귀하는 전 러시아 황실가족의 개인자산을 포함하여 20개의 상자를 선적한 것으로 사료됨. 이들 상자들은 추가지시가 있을 때까지 귀하의 책임아래 안전하게 관리되어야 할 것임.1746(전문 끝). 이들 상자 29개[원문대로?] 접수하였음.36)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이 발신되었다.

 

 

발신: 영국군함 켄트호, 불라디보스토크에서 1919년 3월31일

 

........디트리크스 장군과 고등판무관[아마도 영국 판무관인 마일스 램프슨 같음]의 요청에 따라 본인은 전 러시아 황제의 개인자산을 포함하여 29개 상자를 받아 안전하게 선적키로 동의하였음. 이들 상자들은 최종적으로 런던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에 당연히 맡겨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콜차크 제독은 그 물건들의 최종 목적지를 지정하는 정식 의뢰서를 요구하면 보내주기로 동의하였음. 이 의뢰서는 아직 보내주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런던으로부터 추가지시를 받을 때까지 그 상자들을 보관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넘겨주었음.(동봉물 1 참조).37)

 

 

동봉물 1은 선적한 물건이 20상자가 아닌 29상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종전에 보낸 확인서였다. 3월22일자 군함 켄트호의 항해일지에 의하면, 그 배는 8명의 수병들을 하선시켜 홍콩으로 가는 기선 펜자호로 보냈다. 그리고 29상자의 황실가족 소유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떤 언급이 없다. 윌리엄 클라크의 책은 이들 29개 상자가 상당한 기일이 흐른 후 영국으로 인계됐다고 말하고 있다.

 

영국 외무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그리고 러시아 황실가족의 운명에 대해 조셉 래시즈와 파렴치한 대화를 나눴던 로버트 윌턴은 그 상자들엔 오래된 낙화(烙畵)도구와 고물들이 들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윌턴은 그 후 그 상자들엔 먼지투성이의 되지 못한 쓰레기들만 가득 차 있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아무튼 클라크는 이들 29개의 상자들과 그 후 크리미아에서 선적된 니콜라스의 어머니인 마리 황태후와 그녀의 측근 소유물들인 백여 개의 상자들을 혼동하고 있었다.38)

 

볼셰비키들이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황실가족 소유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최소한 7일이 걸렸다는데, 그들이 물러난 후 역시 그 곳에서, 허접 쓰레기든 아니든, 어떻게 8톤이나 되는 황실가족 소유물들이 또 나올 수 있었는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챙길 당시는 반격해 오는 볼셰비키들의 포위 속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뒷날 런던에 도착되어서야 알게된 그 쓰레기들을 상자에 채워 넣는 작업을 별 시간도 끌지 않고 얼렁뚱땅 해 치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현지 주민들이 이파티에프 하우스 뒤쪽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실제로 약탈했지만, 29개 상자의 총 무게가 8톤이라는 것은 상자 당 무게가 평균 500 파운드가 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둘러 옮기기에는 너무 무겁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백군들이 모든 황실가족 소유물들을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볼셰비키 고위층의 누군가가 그 물건들의 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그 어수선했던 시기에 어떻게 그것들을 사려 깊게 러시아 바깥으로 빼내올 수 있었겠는가?

 

군함 켄트호가 전보를 치고 1주일이 지난 후, “콜차크 제독이 디터리크스 중장에게” 보낸 1919년 4월10일자 전보 111은 장군에게 아래 사항을 이행하도록 지시했다.

 

 

........전 황실가족이 남긴 물건들과 서류들에 대한 추가 조사는 현재 전혀 문제없이 진행중임.......본인은 귀하의 지휘하에 그리고 감시할 보초를 세워, 승객 - 그리고 선적품 - 식기대 및 승무원 주방 등 여러 항목들을 관장할 권한을 위임함. 그러나 단지 전쟁지역 내에서 임. 그 관장과 그리고 그 물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비용이 발생하면, 계산서를 본인에게 보내주기 바람.

 

 

이 서류는 “비밀”이라는 표시가 돼 있다. 켄트호가 8톤의 황실가족 소유물들을 싣고 약 3주 가까이 전에 이미 비밀리에 러시아를 빠져 나왔다면 왜 이런 노력이 필요했을까? 왜 콜차크는 3월에 비밀리에 수송 중에 있었던 최초의 29 상자의 선적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황실가족이 1월에 켄트호를 타고 탈출하지 않았고, 그리고 그 배가 그들의 개인 소유물들을 가지러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황실가족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 같은 사람은 브레킨리지 롱이었다. 12월30일의 그 “가족” 전보("Family" seven times라는 전보)의 왼쪽 아래에 롱의 이니셜이 있다. 그가 어떻게 매우 초기부터 황실가족 구출작전에 참여하게 됐는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오직 대통령에게만 알려진”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제롬 바커 렌드필드를 선발했고, 영국 외무장관과 아서 오브 콘노트 왕자를 보좌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의 존재에 대해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그는 영국 정보부의 윌리엄 와이스먼경과 부단하게 접촉하고 있었고, 중국에 대한 차관과 중국동방철도회사에 대한 정치적 국면의 협상에 개입했다. 그는 직접 윌슨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민감하게 다루어야 할 어떤 일이 생길 때에는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심지어 제 2차 대전 중 프랑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를 불러, “영향력 있는 망명자들의 안전을 위한 업무”를 다시 맡길 정도였다.

 

이 전보가 그에게 전달됐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황실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었던 미국의 제일 첫 번째 사람이었을 것이다. 롱은 그가 처음부터 개입해 왔던 구출임무가 성공했다는 것을 또한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그는 1919년 1월 17일과 18일에 이 확인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7일 저녁 롱은 일본 대사관의 한 대리인인 데부아비씨를 만났다. 데부아비는 이튿날 롱을 다시 만나 편지 하나를 직접 전해 줬는데, 그 편지는 도쿄주재 미국 대사가 1월9일 우찌다 자작에게 건넨 메모에 열거돼 있는 “7가지 요점”을 “우찌다 자작이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39)

 

1919년 1월18일자의 그 편지는 워싱턴 주재 일본제국 대사관 전용 편지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롱의 육필원고에서 그는 “일본 대사관의 데부아비씨가 그것을 내게 전달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1919년 2월13일 이후의 접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1921년 4월13일에 최종적으로 서류철에 보관됐다.40) 왜 그것이 2년 2개월 후에야 서류철에 철해졌을까? 그 무렵 롱이 사직했기 때문에, 그 편지의 중요성이 그의 후임자에게는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편지는 중국동방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관리계획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브레킨리지 롱은 1918년과 1919년에 중국동방철도에 대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통신수단을 로마노프 일가 일곱 식구들과 관련된 전언의 완전한 전달수단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 “가족”이라고 쓴 전보는 구출작전이 계획된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졌으며 황실가족이 일본인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브레킨리지 롱에게 통보해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가족"이 일본을 의미했다는 1919년 1월20일의 폴크의 언급은 지금 한 가닥 새로운 빛으로 보일 수 있다.

 

다시 짜르구출하기에서의 비유적인 설명으로 되돌아가, 폭스는 그가 황실가족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영국, 독일, 일본 및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전달될 암호말을 속삭여야 했다고 말했다. 로마노프 일가의 석방을 위해 독일과 연합국에 의해 꾸며진 그 구출계획과 분명히 관련이 없었던 많은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황실가족의 안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짜르의 잃어버린 행운(The Lost Fortune of the Tsar)에서 윌리엄 클라크는, 스페인의 알폰소 8세가 교황을 통해 황실가족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고 전했다. 알폰소왕은 알렉산드라의 친사촌이었던 밧텐버그 공주와 결혼한 사람이다. 영국 죠지왕의 아내인 메어리 왕후가 알폰소에게 러시아 황실가족을 도와주도록 요청했을 때, 그는 죠지왕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메어리는 “죠지가 멀리 있기 때문에 외무부에게 알리고 전보를 보냈다.”고 답했다. 8월6일 알폰소왕은 알렉산드라의 자매중 하나인 빅토리아공주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황태자는 죽은 것으로 생각되므로 황후와 공주들”을 구출하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알폰소는 독일 카이저와 교신을 가졌으며, 1918년 8월 말경 그는 베를린으로부터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교황 베네딕트 15세와 덴마크 왕이 모두 알폰소의 노력을 지원했다. 교황청 국무장관인 가스파리 추기경은 바티칸이 “필요하다면 알렉산드라 황후의 생계와 품위유지를 위한 재정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41) 마지막으로 받았던 보고는 1918년 10월28일경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에는 황실가족의 생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했던 것 같다.42)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 때, 윌리엄 G. 맥아두가 런던의 사보이 호텔에 머물고 있었던 백군의 체레프 스피리도비치 장군으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게 되었다. 그 장군의 전보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맥아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국가기밀을 말할 것이 있으니, 워싱턴으로의 여행허가 조치 바람.43)

 

 

그 뒤 그 장군이 병이 들어 1921년 뉴욕의 벨레부에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었을 때, 그는 맥아두를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 꼽았다. 그는 어떤 국가기밀을 가지고 있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짜르와 그의 가족을 구출하고 보호하는 것을 죽음으로 서약했던 러시아 장교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가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맥아두가 그 “국가기밀”에 대한 것 역시 가장 알고싶어했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스피리도비치의 정보는 일부 사람들이 그를 하찮은 인간으로 약간 무시했기 때문인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짜르구출하기에서 말하고 있는 국가기밀과 같은 것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는 1920년대에 뉴욕의 그의 아파트에서 추측컨대 오븐에서 새어나온 가스에 질식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야로신스키는 파리 오페라좌에서 독침에 찔렸고, 사빈코프는 루비안카 교도소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 교도소에서 시드니 레일리 역시 그 직후 사라져버렸다.

 

12월6일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다른 보고서가 짜르구출하기에 나와 있는 사건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 보고서는 로마 주재 미국대사이며 차알스 트레인의 친구였던 넬슨 페이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페이지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전보를 쳤다.

 

 

비밀정보임. 본인은 이곳 최고위층들 사이에서 짜르와 그 가족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것을 알았음.

 

 

그 타이밍이 이탈리아에 수신된 어떤 메시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왜냐하면,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황실가족이 어떤 방식, 혹은 짜루구출하기가 묘사하고 있는 다른 방식으로 구출됐다면, 그 암호말이 “베를린에 있는 어떤 사람, 영국에 있는 다른 사람, 일본에 있는 다른 사람, 그리고 ‘이탈리아의 고위인사’에게 반복하여 전해졌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며 벌인 차알스 크레인의 비밀활동들을 감안하면, 황실가족이 영국포함에 승선하게 되어 있었던 중킹 근방에 도착했던 12월 초순에 그 가족들에 대한 첫 메시지를 보내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국 군함 켄트호 - 이 배는 12월 29일 하루 동안만 우숭에서 정박했다 - 를 만나 강을 따라 내려간 후에야, “가족 일곱 번”을 확인하는 전보 - “지급, 가족 일곱 번 확인함...” - 가 그들의 안전한 도착을 알리기 위해 불라디보스토크로, 워싱턴으로 그리고 런던으로 타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실가족은 짜르구출하기가 말하고 있듯이 진짜로 우숭에 도착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그 책이 주장하고 있듯이 상당히 안전한 환경에서 먼 여행을 했으며, 그리고 영국포함이 그들을 무사히 세일론으로 모신 후 거기서 새 가정을 꾸민 것일까? 전쟁 중에 영국 포함인 켄트호가 인도양에서 불려나온 이유는, 오직 하루동안만 우숭에 정박하고 일본을 향해 연안을 빠져 나오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홍콩 외항에서 시험항해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에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국제적으로 조직된 한 조그마한 팀이 황실가족을 안전하게 러시아 바깥으로 탈출하게 할 수 있었다고 짜르구출하기가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여줄 증거가 있는가? 확실히 그것을 뒷받침하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증거가 있다. 비록 짜르구출하기가 모든 답을 갖고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1918년 7월17일 밤의 그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의 완전한 수용을 거부하는 장애물로 버티고 있다.

 

설사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짜르구출하기는 우리에게 정보활동의 세계를 일별(一瞥)하게 해 준, 그리고 때때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비밀 외교술을 보여준 로제타석(石)일 수도 있겠다. 이번 경우에, 이 활동이 러시아에 미친 충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십 년 후 각각 자기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된 세 사람 - 군수국장인 처칠, 레닌의 가장 유능한 행정관인 스탈린, 그리고 미국 해군차관인 프랑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 이 1918년에 그들 의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면 흥미로워진다. 이들 각자는 그 기간동안 모두 러시아 사건들에 연루돼 있었다.

 

짜르에 관한 파일의 문고판에서, 섬머즈와 맹골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상원에서 그 문제(로마노프 일가의 운명에 관한 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고로뉘-로버츠 경은 두 가지 기이한 말을 했다. 짜르의 세 딸이 지금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단연코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 나는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한 이 책 “짜르에 관한 파일”을 공공문서보관소에 그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로 비치해 두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국 의회의 다른 의원들이 그의 의견에 얼마나 많이 동조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역시 그들이 죽었다고는 확신하지 않는다고 시사한 사람이 한 분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에 그의 보좌관에게, 그가 풀 수 없고, 수년동안 그것에 대해 쓰고싶지만 그 작업을 수행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끝나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하나 갖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을 내가 알았을 때, 나의 호기심이 발동됐다. 그의 보좌관은, 만약 대통령께서 그 문제에 대해 자기와 같은 구상을 하고 계신다면, 자기가 대통령을 위해 6명의 작가들을 고용하여 그 결말을 내 드리겠다고 대답했다. 그 보좌관은 그 후 미국에서 가장 이름난 미스테리 작가들을 초빙, 그들에게 분담을 시켜 “대통령의 미스테리 이야기(The President's Mystery Story)"라 불리는 책을 쓰도록 주문했다. 루즈벨트는 그들에게 한 러시아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내용의 출발점으로 제공했다.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이었던 그 러시아 남자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행운만 가지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그런 점이 알려지게 된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 특성이 짜르의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그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계속 살아 있다는 생각에 진정으로 호기심이 자극되는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은 작가들에게 그 사람의 죽음을 왜곡했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도록 했다. 왜 루즈벨트는 약간 황당한 그런 긴 이야기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얼마간의 직접체험에 의해 그 사람에 대한 지식은 갖고 있지만 그것을 규명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당황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 황실가족들이 실종됐으며 그리고 그들의 실종에 누가 책임이 있는 것일까? 현재로선 최근의 DNA 분석을 포함하여 이 책에서 검토하여 나온 설명 중 어느 하나가 로마노프의 실종에 대한 아주 결정적인 기술(記述)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도 완전히 확립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연합국들이 볼셰비키 정부를 무너뜨리고 잠재적으로 입헌군주국을 재건할 목적으로, 시베리아에서 테렌스 키이즈 소령의 지휘아래 수립된 비밀 금융사업계획으로 반볼셰비키파들에 대한 자금지원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런 수고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 카롤 야로신스키, 보리스 솔로비에프 및 시드니 레일리 - 은 토볼스크와 에카테린부르그에서의 황실가족의 마지막 날들 동안 야로신스키가 그들의 재정 후원자 역할을 했을 때 이들 모두가 거기에 연루돼 있었다. 이 사람들은 또한 헨리 아르밋스테드와 요나스 리이트와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아르밋스테드와 리이트는 짜르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이는, 일곱 식구가 살아갈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저택건설을 포함하여 북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영국 정보기관을 통해 자금지원을 받았다. 황실가족의 석방을 위한 몸값으로 보이는 돈을 레닌에게 지불한 후 4월과 6월에 있었던 석방시도 또한 무위로 끝났다. 동시에 독일 역시 로마노프 일가에 대한 입찰전쟁에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볼셰비키들의 계획된 황실일가 타도와 체코군의 에카테린부르그 진군에 대해 이야기 한 파르팬 돔닌의 보고서류 역시 진실의 고리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황실가족은 생존해 있었을까? 정치파벌들 중의 하나가 구금돼 있는 황실가족에 대한 감독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황실가족이, 이파티에프 하우스의 벽에서 발견된 토볼스크의 성요한단(團)의 기호(거꾸로 된 卍자) 외에 다른 기호(Lysba)가 암시하듯이 리스바로 탈출한 것일까? 그들은 그 후 페르마/리스바 지역에서 최후의 운명을 맞았던 것일까?(1919년 그 지역에서 몇몇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볼셰비키들이 황실가족 살해혐의로 즉결 처형됐다.) 우리는 실제로 이 사건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그리고 그 사건이 재빨리 그리고 거의 조사도 이루지지 않은 체 역사의 페이지로부터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검토할 수도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럼 황실가족이 실제로 그 터널을 통해 도피하여 짜르구출하기란 책에서 말하는 노정을 따라 탈출한 것일까?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한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즉 1930년대까지 (소련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관찰된 사람들은 모조리 제거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공산주의 적화 테러의 긴 팔은, 만약 적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면 그 적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추적하여 파괴해 버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 정보기관은 러시아에서 활동한 정보원들의 신원을 여러 해 동안 비밀에 붙였다. 그들의 신원이 알려지면 잔인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당국자들이 로마노프에 대한 큰 관심 못지 않게 자기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지 않았겠는가?

 

이 연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죠지5세 왕과 그의 가까운 친척들이 짜르와 그 가족을 구출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개념에 대한 해체구축(deconstruction)이다. 지금 분명해 보이는 것은, 그들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볼셰비키들을 타도하고 러시아에 숨쉴 공간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입헌군주제의 형태로 제국의 복고를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행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로마노프가의 운명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는, 시베리아의 1918년 그 여름밤의 사건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왔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상황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는 음모에 포장된 체 남아있다. 작은 조각들을 결합시켜 더 많은 실질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으며, 그리고 나의 희망은 이 책을 발간한 후 더 많은 정보가 나와 이 불가사의한 20세기 역사의 장을 명백히 규명해 내는 작업을 계속하는 일이다. 각국 정부와 그리고 교회들이 그 그림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바라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지 모르겠다. 물론 그들 국가나 교회의 현 지도자들이 앞장서는 일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이 로마노프의 국가적 비밀에 대해 실제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사건의 참된 내막을 알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전임자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필로그

 

차알스 크레인은 계속 민주당을 위해 일했으며 우드로 윌슨의 막역한 친구로 남아있었다. 그의 박애주의적인 노력은 굉장한 것이었다. 1928년에 러시아사(A History of Russia)를 쓴, 가장 존경받는 영국 역사가인 버나드 페어스는 그의 이 작품을 “영광스런 차알스 크레인”에게 헌정하였으며 크레인을 “러시아의 충실한 친구”라고 불렀다. 그러나 크레인은 그가 마땅히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공로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할 운명이었으며, 그는 단지 역사의 각주(脚註) 밖에 되지 못했다.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은 한동안을 볼셰비키 교도소에서 보냈다. 차알스 크레인이 마침내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의 아내인 마로우씨아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차알스 크레인과 그의 아들 존은 크레인이 중국대사로서의 근무기간을 막 끝냈을 때인 1921년에 마지막으로 백작을 방문했다. 크레인이 러시아를 떠난 직후, 그가 방문했던 인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은 크레인의 방문 후에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크레인처럼 그도 명성이 가려져 버렸다. 그는 북소에베덴 남작부인이 알렉산드라 황후의 인생과 세월에 대해 쓴 책들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가 황후의 재정비서였으며 분명히 그녀(북소에베덴 남작부인)와 황실가족과 절친했었는데도 그러하다. 하지만 남작부인은 “로스토브스토프가 죽다”라고 쓴 1936년의 한 편지에서 그를 언급했다.

 

 

파벨 불리긴, 마리 황태후의 지시에 따라, 황실가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는 니콜라스 소콜로프를 도운 적이 있는 불리긴은 그의 에카테린부르그 경험을 책으로 내려고 시도했다. 스탠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의 신카렌코 콜랙션에 있는 그의 원고는, 케렌스키와 밀루코프(차알스 크레인의 가까운 친구)가 20세기초에 “그 책의 발행을 중지시키려고 했다”며 그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1935년에 그는 결국 케렌스키와 협력하여 책을 냈다. 물론 그의 초기 원고에서 언급됐던 많은 흥미를 자아내는 내용들이 그의 마지막 원고에선 사라져버렸다. 불리긴은 그의 원고에서 바로노브스키(1920년 샌프란시스코의 로마노브스키의 집 식객으로 있었던 사람)와 크리보쉐인(유로신스키를 연합국의 금융사업계획에 끌어들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 두 사람은 그 뒤에 나온 그의 책 어느 쪽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보리스 솔로비에프를 황실가족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했다며 비난하려 시도하다가, 세메노프로부터 솔로비에프는 죄가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 불리긴은 그의 책에서, 솔로비에프가 상하이로 떠났으며 거기서 황실가족의 공주들을 위한 탑승권을 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솔로비에프는 추측컨대 루소-아시아틱은행 발행의 현금수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소-아시아틱은행은 훗날 금융사업계획 맴버들과 중국동방철도회사 및 몇몇 미국 정부관리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은행이다.

 

 

토볼스크 성요한단(團)이 조직된 것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작가이며 데니킨 장군(후에 앤턴 데니킨 경이 됨, 로마노프 처형에 관한 조사를 총 지휘했다)의 딸인 마리나 그레이는 솔로비에프(성요한단 단장)가 소콜로프와 불리긴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불신을 당한 것으로 믿는다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

 

 

호머 슬로터는 미국으로 돌아와 참모부 근무로 영전했다. 훗날 그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아들에 따르면, 그는 니콜라스 소콜로프의 이름이 나오면 눈에 보이게 심란해했다고 한다.

 

 

칼 에커먼은 1919년 1월 둘째 주에 인도행 승선권을 예약했다. 브레킨리지 롱이, 7개의 대상물이 일본대사에게로 인계됐지만, 3월까지 승선권을 구매할 수가 없었다고 지적했던 바로 그 시기였다. 우리는 그가 인도에 가려고 한 이유를 모른다. 3장의 편지 중 첫째와 둘째 장이 그의 서류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아일랜드 분할과 관련된 협상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마지막 준정치적 임무인 듯한 것으로서 그가 로이드 죠지와 이몽 데 발레라 사이의 중재자로 활동했을 때였다. “로이드 죠지의 아일랜드 교육”이라는 그에 관한 신문기사에서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가 이름을 댈 수 없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물의 조언을 찾고 있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그 후 콜럼비아 대학 언론대학원장이 되었다.

 

 

랄프 반 더만 대령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빌려간 “펀잡어 문법”에 대한 책 한 권을 기간 내 반납하지 않았던 관계로 과태료를 물었다. 그는 그 책을 유럽에서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이전인 1918년 4월에 빌려왔었다. 훗날 그는 장군으로 진급하였고 “미국 정보기관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1920년대 초에 그와 위그햄 대령(1918년 7월과 관련된 아서 오프 콘노트 왕자의 파일을 제거했던 사람임)과 함께 인도를 여행했다.

 

 

카롤 야로신스키는 폴란드에서 가장 큰 제수잇 대학인 루블린 대학을 창립하는 그의 행운의 잔여분을 남에게 넘긴 후인 1928년에 거의 빈 털털이로 죽었다. 그의 만년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시드니 레일리가 소련에서 실종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파리의 오페라좌에서 독침에 찔린 후부터였다. 그의 체면을 손상시키려는 시도 또한 있었지만, 그의 장례식장에는 마치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처럼 거의 1천 여명의 사람들이 그를 기리려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의 미망인은 없었다 - 그는 결혼 한 적이 없었다. 그의 가족들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 전에 그는 짜르의 딸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데, 짝사랑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가족 유폐기간 중 마지막 몇 달간의 그의 역할은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었다.1)

 

 

시드니 레일리는 1925년에 모스크바의 루비안카 교도소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교도소에서 썼던 일기가 공개되었을 때, 로마노프 일가의 마지막 날들과 관계가 있었던 수많은 이름들이, 마치 그가 같이 활동한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는 심문이나 당한 것처럼, 무더기로 나왔다. 흥미롭게도 콜발스키라는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은 짜르구출하기의 차알스 제임스 폭스가 특수임무 수행 중에 자신의 활동을 일러바치고 있었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나는 로스토브스토프 백작의 동료였던 것으로 증명된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콜발스키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는 로스토브스토프와 함께 국가 고문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2) 레일리 역시 보이코프와 코빌린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들 두 사람은 토볼스크에서 황실가족과 함께 있었다. 추가로 그는 아브자에 대해 말했다.

 

이 아브자는 “공식적으로 가족은 철수하는 동안에 죽을 것임”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그 유명한 소콜로프 전보를 최종적으로 해독한 바로 그 사람임에 거의 틀림없었다. 레일리는 그의 업무동료이며 친구인 “의사” 사빈코프를 찾으려 러시아에 갔었다. 사빈코프는, 재정러시아시대 지도자들을 꾀어들여 “전향”시키거나 죽이거나 하는 “신뢰(The Trust)”라고 불리는 일종의 볼셰비키 책략에 빠져 소련으로 돌아갔던 사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빈코프는 1918년 여름에 레일리와 결속돼 있었고 그 해 7월의 봉기를 계획하고 선동하는 것에 일조했다. 사빈코프는 추측컨대 볼셰비키 지도층에 의해 복권되었지만, 그 후 우울증에 빠져 자살했다. 그로부터 30년 후 공산주의자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켰을 때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알스 크레인의 전 사위인 잔 마사리크와 매우 유사한 경우였다.

 

 

“차알스 폭스”는 1919년 조사국 명단에 올라 있는 암호명으로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군정보부 파일에는 미국주재 영국 정보기관 책임자 암호명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대용으로 C.M. 제임스 혹은 A.W. 제임스 대위로 불리고 있었다.3) 이 사람이 미국주재 영국 정보기관의 장이며 그가 차알스 폭스라는 가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여러 요원들로부터의 보고를 뉴욕시 시티홀 스테이션 사서함 번호 1232에서 받고 있다는 것을 조사국은 알고 있었다.

 

그가 특수임무를 끝낸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주재 영국 정보기관의 장이 되는 것이 가능했을까? 제임스 대위가 영국 여권국 관리였다는 지적이 있으며,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당시 영국 여권국 관리들에 대한 파일이 오늘날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언젠가 이들의 기록이 공개되면, 우리는 그가 실제로 차알스 제임스 폭스였는지, 그리고 짜르구출하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실제로 로마노프 일가의 생명에 어떤 역할을 한 사람이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의 어떤 신문 기자였던 다른 차알스 제임스 폭스는 1918년에 중국 티엔친에서 살았으며, 칼 에커먼과 친했지만, 그는 1918년 7월에 시베리아에 있지도 않았고 러시아어를 할 줄도 몰랐다.

 

 

안나 비루보바는 수녀가 되었으며 황실가족과의 추억에 대해 글을 썼다. 그녀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날 어떤 부인으로부터 카드를 받았는데, 그 부인은 그것을 그녀의 손에 몰래 쥐어주었다고 한다. 안나는, 그 카드는 그녀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이 보낸 것이며 그녀에게 그들 모두가 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보낸 것임을 그 부인이 이야기하더라고 했다. 안나는 그 카드가 알렉산드라 황후의 아주 오래된 사진 같아 보였지만, 보복이 두려워 아는 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무렵 안나는 아직 소련에 있었다.

 

 

북소에베덴 남작부인은 1919년 결국 러시아를 떠났다. 미국에서는 811.111 파일 목록에 그녀에 대한 비자발급이 기재돼 있지만,4)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남작부인은 에카테린부르그 드라마에 유일하게 참가한 중요인물이었지만, 그녀는 황실가족의 실종과 관련하여 물어보고 싶다는 니콜라스 소콜로프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녀는 여생을 영국황실과 함께 보냈다. 그녀는 자원하여 황실가족을 따라다녔으나, 마지막 이파티에프 하우스로 옮길 때 동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의 그녀의 러시아에서의 활동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러시아 황후,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의 인생과 비극, 그 일대기(The Life and Tragedy of Alexandra Feodorovna, Empress of Russia, A Biography)라는 제목으로 된,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에 관한 심금을 울리는 책을 썼다. 그 책은 황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좋지 않은 소문과 빈정거림을 불식하려 시도했다. 북소에베덴 남작부인은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 황후의 마지막 일기의 서두를 옮겨놓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 커튼이 한 위대하고 고귀한 인간 -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조국을 사랑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했던 한 여인 - 의 생명 위에 드리워지고 있다.”

 

그 다음에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추가하고 있다. “3시간 후 에카테린부르그의 그 흉악했던 비극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이탤릭체는 저자가 한 것임).

 

 

부록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생각되는 DNA 테스트는 실제로 상당한 약점이 될 수 있다. DNA 테스트가 로마노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유해의 신원을 밝혀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DNA 테스트가 왜 한계점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유전적 특질의 원리와 그리고 DNA 단면으로 어떤 특정한 인간을 “확인하는” 복잡하고 무언지 알쏭달쏭한 기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1)

DNA 분석과정은 핵 DNA나 미토콘드리아 DNA를 사용하여 진행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핵 DNA 테스트는 더 잘 구별이 되지만 시간이 더 걸린다. 그것은 그들의 사이즈, 배열, 혹은 이 둘 다에 의해 DNA 단편의 특성을 나타낸다. 핵 DNA 테스트는 또한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DNA를 추출하기 위한 더 크고 더 선명한 증거 표본을 요구한다. 미트콘드리아 DNA(mtDNA)는 보다 소수의 유전자 자리(loci)를 나타내며, 그리고 mtDNA 테스트는 핵 DNA 테스트보다 본래 변별력이 떨어진다.2) 하지만 이것은 모계(母系) 관계라 불리는 것을 조사하는 데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핵 DNA와는 달리, 모계 쪽이 모든 미트콘드리아 DNA에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개인은 그의/그녀의 어머니와, 그/그녀의 모든 자매, 그/그녀의 외할머니 등 모계를 통해 내려오는 모든 배경과 꼭 같은 mtDNA를 가지고 있다. 미토콘드리아의 본성은 역시 유력한 “방계”이다. 이모와 그들의 자녀들은 물론 어머니 쪽의 모든 조상들과 후손들이 동일한 mtDNA를 가지게 된다.

 

로마노프 DNA 테스트 작업과 관련된 첫 번째 문제를 소개하는 데는 이와 같은 매우 기초적인 개관으로 충분하다. 로마노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은 mtDNA 테스트를 필요로 했다. 뉴욕주립대학의 유전학 전문가인 윌리엄 쉴드스 박사는,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DNA를 사용하는 데 대해 회의를 나타내며, DNA의 한 쪽 짝을 기초로 하여 대상물의 신원을 추단하는 데는 극도로 주의하지 않으면 무작위 일치(random matches)의 발생률이 높을 수 있다고 줄곧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mtDNA 타이핑이 어떤 개인의 DNA의 매우 작은 단편을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작은 단편 안에서도 각 개인들 사이에 매우 작은 양의 변이가 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mtDNA 표본에서 600개가 넘는 염기쌍 중 약 100개만이 어떤 변이를 나타낸다. 그 사이트 중 100개만이 변이 한다면, 그리고 그들 각각(C, T, A, G)에 대해 오직 4개의 가능성만 있다면, 여러분은 한정된 수의 가능성 있는 결합을 가진다고 보기 쉽다. 여러분이 소수의 기존 데이터 베이스를 고찰할 때(나는 인종 그룹 사이에 약 1천300개의 유전적 개체가 있으며, 거기서 염기서열이 데이터베이스에 이용될 수 있는 수준으로 생성돼 왔다고 생각한다), 가능성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한정돼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오리지널 FSS(영국 엘드머스톤에 있는 법정과학기관) 데이터베이스에서 100개의 유전자 개체 중 4개가 서로간에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없으며, 적어도 어떤 직접적인 의미에서 관계가 없다. 더욱이 혈연이 아닌 2개의 다른 유전자 개체가 일치하는 두 번의 추가적인 사례가 있다. 내가 현존하는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함으로써 발견한 것은 전체적으로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유전자 개체의 약 30%가 테스트 된 염기서열의 모든 기부(基部)에서 적어도 서로 다른 사람과 배합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3)

 

쉴드스 박사의 조사결과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이 정확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한 범위의 무작위 일치를 입증하기 위해 어떤 현지 개체군의 것을 황후의 것에 대조해야만 이상적인 것이 될 지 전적으로 불분명하다. 이미 1993년에 윌리엄 매플스 박사는, 알렉산드라와 필립공(영국)의 조상들이 모두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관련 개체군이 독일인이어야 한다고 특별히 언급한 바 있다. 더욱이 제1차 대전 이전에 유럽왕실들 사이에 근친결혼 비율이 높았다는 점이 추가적인 불확실성과 편차를 분명히 가져올 수 있다. 쉴드스 박사는 영국 엘드머스톤에 있는 FSS 실험실이 알렉산드라와 필립공 사이의 DNA 일치를 이중으로 체크하지 않은 기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라 “딸들”의 DNA도 역시 필립의 DNA에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mtDNA가 그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다).

 

미군DNA확인실험실(AFDIL)은 실제로 1993년에 영국 내무부 소속 FSS 실험실에서 행했던 테스트들을 보충 실험하는 도급을 맡았다. 러시아 DNA 전문가인 파벨 이바노프와 함께 일했던 피터 길 박사와 FSS 팀은 유해들 중에서 가족관계를 찾기 위해 우선 핵 DNA 테스트 방법을 이용했다(그래서 1918년 황실가족과 함께 사살되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 의사와 다른 사람들의 유해를 골라내었다.)

 

그들은 그 후 알렉산드라 황후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그녀의 모계 쪽으로 살아있는 친척인 필립공의 DNA와 일치시켰다. 그러나 짜르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의 DNA를 그의 모계 쪽 두 친척들의 그것에 일치시키려는 유사한 시도는 혼합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의 유전적 상태에서 짜르의 DNA가 혼란스런 결과를 드러냈다. 즉 그것이 티민(Thymine: DNA를 구성하는 염기의 하나, 기호 T)와 시토신(cytosine: 핵산<DNA, RNA>의 주요성분, 기호 C) 기부 둘 다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단 하나의 기부는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 나타난다. 유명한 미국의 법인류학자인 윌리엄 매플스 박사를 포함한 일부 과학자들은, 이 결과가 나오는 것은 테스트 표본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길 박사 팀은, 짜르는 한 개 이상의 미토콘드리아 DNA 배열을 간직할 수 있는 소위 “헤테로플라스미(heteloplasmy)"라 불리는 희귀한 조건의 사람으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그 유골들의 확실성에 대한 끊이지 않는 논란을 가라앉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는 1994년에 짜르의 동생인 게오르그 대공의 시체발굴을 정식으로 허가했다. 빅토르 위든 중령과 이바노프가 이끈 미국 AFDIL 팀은 게오르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표본이 같은 위치에서 헤테로플라스믹한 조건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 결과는 두 배의 축하를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즉 그것이 헤테로플라스미를 일반적으로 법적 DNA 분석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의무라는 이점으로 변화시켜, 신원확인을 돕기 위해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친척관계를 뒷받침했던 초기의 결과 때문에, AFDIL 테스트는 다섯 구의 로마노프 유해들에 대해 더 이상의 의아심을 잠재운 것으로 보였다.(짜르의 네 번째 딸<아나스타샤>과 황태자 알렉세이의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1918년에 그들의 시체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바노프는 1995년 기자회견에서, “전혀 의심할 바 없이 그 유해들은 짜르 니콜라스와 그 가족들의 것이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mtDNA 만이 모계 쪽 고리를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에 논거를 둔다면, 그 헤테로플라스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많은 개체군, 특히 로마노프의 모계 쪽 친척들이 공유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모계 쪽 고리만을 증명한 데 불과한 것이다.

 

쉴드스 박사는 더 나아가, 한 세트의 형제 쪽으로 추정되는 유해에선 T(티민)보다 시토신(C)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다른 유해 세트에선 C보다 T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난 그 헤테로플라스미는 그 유해 표본이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며, “니콜라스”로부터 나온 양쪽 표본 혹은 게오르그로부터 나온 양쪽 표본 어느 쪽이나 결합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일부에선 로마노프 유해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에리카 헤겔버그 박사가 수행한 추가 테스트를 사실상 받았다고 추정했다. 그것은 FSS에 의해 발견된 헤테로플라스믹 이형(異形)을 단지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남는다. 여러 해 동안 수행된 다른 여러 테스트에서 나온 기초 데이터는 러시아해외전문가위원회에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 계속 요구해 왔는데도 그러하다. 러시아해외전문가위원회는 진정으로 독립적인 위원회임을 자부하고 있는 자기들이 이미 나와 있는 그 결과물을 정밀조사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때까지 DNA 테스트 결과는 미해결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주요 단체, 사건 포함) - 가나다순

 

골로스체킨, 필리프(필립) - 우랄관구 군사담당 인민위원

 

그로브스, 윌리엄 피어 소령 - 영국 정보장교, 공군장교다. 그는 황실가족이 일본으로 탈출했다고 그의 자녀들에게 말했던 사람이다

 

그레브스, 윌리엄 장군 - 미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

 

그린, 코닝햄 경 - 일본주재 영국대사

 

니콜라스 2세 -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달라이라마 - 티베트 국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대시-심프턴 - 부리아트(시베리아 소수민족) 국가위원회 지도자들 중 하나

 

데이비스, 존 - 영국 주재 미국대사

 

데미도바, 안나 - 황실가족과 함께 갇혔던 황실가족 시녀

 

돌고루코프 공, 알렉산더 - 황실가족과 가까웠던 러시아 군주제주의자, 황실가족과 함께 감금돼 있었다

 

돔닌, 파르팬 - 짜르의 시종으로 추정되는 사람, 짜르의 시종으로 알려진 체렌티 체모두로프일 가능성이 높음

디터리크스 장군 - 블라디보스트크로부터 진군하고 있었던 체코군의 러시아인 사령관

 

라데크, 칼 - 레닌과 함께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볼셰비키 지도자, 소련의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스푸틴 - 러시아 제국 법적상속인(알렉세이)의 병을 치유하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능력 때문에 황실가족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농부출신 승려

 

레일리, 시드니 - 때때로 “스파이들의 에이스”로 불리는 사람이다 - 러시아에서 태어난 영국정보요원

 

랜드필드, 제롬 바커 -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 공주와 결혼한 미국인,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대학원 졸업, 우랄지역에서 광산소유권을 가진 최초의 미국인, 산악지도를 그리기 위해 말을 타고 처음에 전 우랄지역 답사, 다음에 시베리아 탐험, 1918년 5월 아서 오프 콘노트 왕자의 미국 도착에 맞춰 브레킨리지 롱 미 국무부 제3차관이 급히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랜싱, 로버트 - 미국 국무장관

 

레시, 죠세프 - 프랑스 관리, 의원 및 여행가, 1919년 초 에카테린부르그 방문, 그는 “황실가족이 당시 ”이야기되고 있었던 방법“으로 살해됐다고 믿지 않았다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 볼셰비키정권을 탄생시킨 10월혁명 지도자, 소련의 첫 최고 통치자

 

로빈스, 레이몬드 - 미국 적십자사 관리, “레드브레스트”로도 알려져 있다

 

로마노브스키, 게오르그 세르게예비치 - 샌프란시스코 주재 러시아 영사이며 짜르구출하기의 “편찬자 겸 번역자” 중의 하나

 

로스토브스토프, 제임스 백작 - 알렉산드라 황후의 개인비서, 황실가족의 재정담당자, 차알스 크레인의 친구

 

로이드 죠지, 데이비드 - 영국총리, 연립정부 총리였다

 

롱, 브레킨리지 - 미국무부 제3차관, 하우스 대령은 브레킨리지 롱이 대통령에게만 알려진 그 자신의 국무부를 통괄했다고 말했다, 롱은 하우스 대령과 윌슨대통령 사이의 밀사역할도 했다

 

루크텐버그 공작 - 황실가족이 살았다고 주장했다(한 때 짜르의 무관)

 

리이치, 휴 - 금융사업계획을 다룬 첫 요원중 하나

 

리딩 경 - 미국주재 영국대사

 

리이트, 요나스 - 황실가족 구출음모를 벌이기 위해 영국정보기관이 접근했던 시베리아의 노르웨이 사업가, 허드슨즈 베이사를 통해 핸리 아르밋스테드가 자금지원을 했다

 

린들리, 프란시스 경 - 러시아주재 영국 대리대사, 금융사업계획의 첫 요원

 

마리 황태후 - 짜르의 모후

 

마리아 공주 - 짜르의 딸

 

마사리크, 잔 - 토마스 마사리크의 아들,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마사리크, 토마스 -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으로부터 옛 보헤미아 왕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국민운동 지도자, 차알스 크레인의 친구이며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맥아두, 윌리엄 G - 우드로 윌슨의 사위, 제1차 대전 중 미국 재무장관, 미국 정보기관이 그에게 보고했다

 

맥게리, 윌리엄 루트리지 - 전쟁선전영화 제작건으로 영국정부에도 고용되었던 미국 정보원,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의 저자, 짜르구출하기의 편찬자 중 한 사람

 

맥납, 게빈 - 미 서부지역에서 윌슨 대통령 재선책임을 맡았던 샌프란시스코의 변호사, 아서 왕자와 루마니아 황실가족의 호스트 역할도 했다

 

메드베데프, 파벨 스피리도노비치 - 이파티에프 하우스 수비대원

 

밀루코프, 파울 - 러시아 임시정부 외무장관

 

무르만스크 - 북극권에 가까운 북 러시아 도시, 니콜라스가 퇴위 후 그 곳에 가서 만년을 보내겠다고 소망했던 도시다

 

미카엘 대공 - 짜르의 남동생

 

발포어, 아서 - 영국 외무장관

 

백게이지 - 로마노프 일가에 대한 암호명

 

벨로보로도프, 알렉산더 - 우랄관구 소비에트 의장

 

보스카, 엠마누엘 - 미국, 러시 및 유럽에서 활동한 복잡한 스파이 조직을 결성한 체코 정보원

 

보트킨, 유게네 - 황실가족과 함께 잡혀 있었던 짜르의 내과의사

 

보일, 죠 - 루마니아 황실가족을 독일군 점령지역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는 데 이용된 위생열차를 몰았던 캐나다인

 

볼셰비키 - 처음에 레닌이 이끈 과격 좌파 당원들, 또한 빨갱이들로, 후에는 공산주의자들로 알려졌음.

 

부케넌, 죠지 경 - 러시아(페트로그라드) 주재 영국 대사

 

불리긴, 파벨 대위 - 전 궁정 수비대 장교, 마리 황태후가 그를 에카테린부르그의 황실가족 실종 조사관들을 돕도록 파견했다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 - 1918년 3일3일 독일과 볼셰비키 정부간에 맺은, 상호 적대행위를 끝내기로 한 조약

 

브루실로프, 알렉세이 - 임시정부 때의 러시아군 총 사령관, 케렌스키에 의해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코르닐로프가 총 사령관직을 맡았다

 

비루보바, 안나 - 토볼스크의 성요한단과 함께 활동했던 황실가족의 가까운 친구

 

비코프, 파벨 M - 볼셰비키 러시아 역사가, 로마노프의 최후의 날들 저자

 

사빈코프, 보리스 - 사회혁명당 지도자, 7월 봉기를 획책했으나 실패함, “의사”이며 시드니 레일리의 막역한 친구

 

사이렌(SYREN) - 북러시아에 주둔한 영국군

 

세르게예프, 이반 판사 - 황실가족 실종 조사관 중 한 사람

 

슬로터, 호머 소령 - 루마니아 주재 미대사관 무관, 1918년에 에카테린부르그로 발령남, 후에 파르팬 돔닌에 관한 정보보고서 작성

 

쉬프, 제이콥 - 하우스 오프 쿤과 로엡 뱅킹 인스티튜션의 자본 파트너

 

소콜로프, N.A. 판사 - 백계러시아군이 지명한 황실가족 살해 정식 조사관

 

솔로비에프, 보리스 - 토볼스크의 성요한단 단장이며 야로신스키의 보좌관

 

수세닌, 이반 - 300년 전 로마노프 왕조의 제 1대 로마노프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내어 그를 구한 사람

 

스미드, 제임스 P - 짜르구출하기의 “저자”의 필명

 

스베르들로프, 야코프 -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이며 에카테린부르그에 있는 황실가족에 대한 중앙 최고책임자였다

 

아나스타샤 공주 - 짜르의 딸

 

아르밋스테드, 헨리 - 무르만스크의 짜르용 저택 건설 책임자인 허드슨즈 베이사 직원, 6월의 무역사절단 단원.

 

알렉산드라 - 황후, 니콜라스2세의 아내

 

알렉시이프 - 백계 러시아군의 장군

 

알렉세이 - 러시아 황위의 법적 상속인, 황태자

 

야로신스키, 카롤 - 금융사업계획의 러시아쪽 일선 책임자, 황실가족의 친구이며 재정후원자

 

야코블레프, 바실리 바실리에비치 - 황실가족을 토볼스크에서 “모스크바나 혹은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우랄 지역에 파견된 레닌 정부 특사

 

에카테린부르그 - 시베리아의 우랄 산중 도시, 황실가족이 최후로 유폐돼 있다가 학살된 곳

 

엘로프(ELOPE) - 북부러시아에 파견된 영국군

 

엘리오트, 차알스 경 - 시베리아의 영국 고등판무관

 

에르마코프, 페테르 - 에카테린부르그 근방의 어퍼-이세츠크 주둔군 사령관

 

에커먼, 칼 - 미국의 뉴욕타임스 및 세터데이 이브닝지 기자, 비밀 밀사

 

올가 공주 - 짜르의 딸

 

와이즈먼, 욀리엄 경 - 미국주재 영국 정보기관인 MI1c 책임자

 

우르크하르트, 레슬리 - 헨리 아르밋스테드와 함께 6월 무역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시베리아의 사업가

 

윌턴, 로버트 - 런던 타임스지 기자이며 정보원

 

유로브스키 - 황실가족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팀의 책임자, 1920년에 저 악명 높은 “유로브스키 수기”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유수포프, 펠릭스 - 라스푸틴 살해 음모 책임자

 

2월혁명 - 1917년 2월에 일어난 혁명으로 이로 인해 짜르가 퇴위했다

 

이파티에프 하우스 - 황실가족이 최후로 유폐돼 있다 학살된 집, 특수목적 하우스라 불리기도 했다

 

임시정부 - 1917년 2월혁명으로 짜르 퇴위 후 구성된 첫 정부

 

죠지5세 왕 - 영국국왕,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의 사촌

 

짜라스코에 셀로 - 황실가족이 맨 처음 가택연금 당했던 궁전

 

짜르구출하기 - 황실가족의 생존을 그리고 있는 1920년 7월에 나온 책

 

체카 - 볼셰비키정부의 비밀경찰, KGB의 전신

 

체모두로프, 트렌티 - 짜르의 시종이며 아마도 파르팬 돔닌이었을 가능성 있음

 

카이저, 빌헤름2세 - 독일황제,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의 사촌

 

케렌스키, 알렉산더 - 임시정부 법무장관, 후에 임시정부수반

 

코르닐로프, 라브르 장군 - 캐랜스키가 임명한 러시아군 총 사령관. 나중에 케렌스키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볼셰비키 집권 계기를 만든다. 자살함

 

코빌린스키, 유게네 콜로니얼 - 짜라스코에 셀로와 훗날 토볼스크에서 황실가족 경비 및 감시담당 책임자

 

콜차크, 알렉산더 제독 - 백계러시아군 사령관, 1920년 1월, 볼셰비키들이 장악하여 통치하고 있는 지역을 포함한 전 러시아의 최고통치자라고 자칭했다

 

콥티아키 - 에카테린부르그 근방 숲속 마을, 거기서 로마노프 일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됐다

 

콘노트, 아서 왕자 - 죠지5세, 니콜라스2세 및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외)사촌, 죠지5세의 지시로 1918년 5월 일본에 특별사절로 감

 

크레인, 차알스 - 억만장자 사업가, 크레인 플러밍사 사장, 윌슨 대통령의 친구이며 러시아문제 어드바이서

 

크레인, 프란세스 리델비 - 차알스 크레인의 딸,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인 토마스 마사리크의 아들, 잰 마사리크와 결혼

 

크레인, 죤 - 차알스 크레인의 아들, 토마스 마사리크의 개인비서

 

크레인, 리차드 텔러 - 차알스 크레인의 아들, 미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의 비서, 후에 새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주재 미국 초대 대사 역임

 

키이즈, 테렌스 대령 - 금융사업계획을 수행한 첫 요원중 하나

 

타티아나 - 짜르와 황후의 딸들

 

토볼스크 - 시베리아에 있는 황실가족의 두 번째 유폐지

 

트레드웰, 로저 -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및 타쉬켄트에서 활약한 미국영사

 

트로츠키,레온 - 볼셰비키 정부 전쟁담당장관, 붉은군대 창설자

 

폭스, 차알스 제임스 - 미국인이라고 주장한 비밀정보원이며 짜르구출하기에 포함돼 있는 두 일기 중 하나를 쓴 것으로 추정됨

 

폰 미르바하, 빌헤름 백작 -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 1918년 7월초에 살해됐다

 

폴크, 윌리엄 - 미 국무차관

 

플 소령-장군 - 나중에 프레데릭 경이 됨, 북러시아 연합군의 영국인 사령관

 

프란시스, 데이비드 - 차알스 크레인이 추천한 러시아주재 미국대사

 

프레스톤, 토마스 - 에카테린부르그의 영국영사

 

프린스 러보프 - 러시아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가 이어받았다

 

하우스, 에드워드 대령 - 윌슨대통령 특별보좌관, 사실상의 국무장관

 

헤세 대공 - 알렉산드라 황후의 남동생

 

화이트, 사무엘 - “국가를 위한 굉장히 중요한 일”로 윌리엄 루트리지 멕게리와 맥아두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