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평양역서 강연했던 양복차림 젊은이… 동족상잔 비극 일으키다니

이강기 2018. 12. 23. 10:57

[아무튼, 주말]

평양역서 강연했던 양복차림 젊은이… 동족상잔 비극 일으키다니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 입력 2018.12.22 03:00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54>

    김일성(1912~1994)

    김일성
    일러스트= 이철원
    내가 김일성을 처음 본 것은 194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의 강연회가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 그가 강연을 한다기에 군중 속에 끼어서 나도 그 강연을 한참 들었다. 8·15 이후 평양에 떠돌던 소문은 그가 소련군 중위로 평양에 입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나타난 그는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고 30대 초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날씬한 젊은이였는데 목소리는 우렁차게 들렸다. 그는 처음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는데 그 사실을 우리는 이상하게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알던 독립운동의 노장 중에 동명의 김일성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정치판에 훈풍이 감돌기도 하여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고 그가 소속한 조선민주당도 김두봉의 신민당과 함께 정당 대접을 받았다. 노동당의 집권이 표면화하는 동시에 장로교 목사이던 강량욱이 인민위원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감리교 목사 홍기주가 권총 차고 집회에 나타나던 때만 해도 김일성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것 같지는 않았다. 교회에 대한 간섭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이듬해 봄 나는 월남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6월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평양역을 떠나 원산에서 하루를 묵고 철원·연천을 거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숨을 죽이고 38선을 넘었다. 평양을 떠나던 그 무렵에도 평양 시내의 모든 담벼락에는 '살인 강도단의 두목 김구,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구호가 크게 나붙어 있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50년 인민군의 돌연한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3년이나 이어졌다,

    나에게 김일성 왕국의 실상을 소상하게 알려준 사람은 해군 제독 손원일의 동생 손원태(1914~2004)와 김일성 대학 총장을 지낸 황장엽 두 사람이다. 어느 해인가 미국 시카고에서 강연이 있어 여러 해 거기서 개업하다가 오마하로 이사 가서 산다는 손원태를 만난 것이다. 그는 김일성의 어릴 적 친구인데 김일성의 초대로 평양에 다녀왔다고 하였다. 그가 나를 오마하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으므로 네브래스카로 그를 찾아 나섰다.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김일성을 잘 알 수가 있었다. 손원태는 어렸을 때부터 그를 따랐다고 하였다. 김일성이 보낸 초대장이 어떤 경로로 손원태에게 전달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가 평양에 처음 간 것이 어느 해인지도 모른다. 평양에 도착하자 그는 시설이 매우 훌륭한 숙소에서하룻밤을 지냈고 다음 날 김일성 집무실로 안내받아 수십 년 만에 그를 만났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처음에 손원태를 잘 알아보지 못하다가 "너 원태 아니야?" 하더니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고 매우 철학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원태야, 이제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자주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손원태는 그 뒤에도 여러 번 초대받아 부부 동반으로 그를 방문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그를 위해 단독주택도 하나 마련해주었고 언제라도 그 집에 와서 묵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북조선 수령은 그 내외에게 자기 사인이 들어 있는 금시계를 하나씩 선물하였는데 오마하에 있는 시계포에 가서 가격을 알아보았더니 5만달러는 줘야 살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노동당 서기로 일한 적이 있는 황장엽(1923~2010)은 천신만고 끝에 북을 탈출하여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뒤에 자기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군 기관 책임자에게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여 그 사령관 주선으로 군 막사에서 만나 장시간 대담하게 되었다. 그가 당의 요직에 있었을 때 받은 보고로만 해도 150만 이상의 북한 동포가 굶어 죽었다고 하면서 북한의 경제가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김일성의 포악한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평화통일 가능성을 비치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김일성 정권의 붕괴를 확신하는 듯하였고, 그 일의 주동 인물을 장성택이라고 점찍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집으로 여러 번 그를 초대하여 점심을 같이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는 항상 죽음을 각오한 열사 같았다. 김일성의 인민공화국을 두둔하다가 실망한 사람이 황장엽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으로 하여금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하도록 지시한 김일성을 나는 오늘도 용서할 수 없다.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은데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살아생전 통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고, 자유민주주의의 꽃동산으로 가꿀 수도 있었던 대한민국에서 좌절과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젠 나도 90 노인이 되었다. 이 불길한 터널에 갇혀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하나. 앞이 깜깜할 뿐이다. 6·25전쟁에서 김일성의 인민군이 승리해야 했다고 잘못 믿고 있는 얼간망둥이들이 백주에 종로를 활보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나더러 더 오래 살라고 축원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 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나는 이제 부르지 않는다. 2억7000만 평이나 되는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며 세계 평화의 꿈을 키웠건만 그 꿈도 이젠 다 접어야 하나? 나는 죽어도 잠들지 못할 것 같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믿었는데 솟아날 구멍이 없다면 내가 먼저 죽어야지, 죽기 전에 계란이라도 들어 저 바위를 향해 던져야 하지 않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21/20181221014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