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명장 을지문덕 장군 흉상.
남쪽 방향으로 날린 요맥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맥은 오랜 세월 아르막 너케르와 함께 초원을 누빈 동료이자 언젠가 너케르의 혼을 천신(天神) 탕게르에게 인도해줄 용감한 매였다. 바람을 등진 너케르가 머리털을 뽑아 하늘에 날리며 세 번 소리 내 울었다.
“위대한 용사 요맥이여. 발톱에 움켜쥔 적의 지혜를 내 입에 떨어뜨리길.”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쳐든 너케르가 눈을 감았다. 지혜의 맑은 기운 대신 북쪽에서 불어오는 탁하고 마른 사막 공기가 입안을 휘감았다. 애도의 예를 마치고 말에 오른 너케르는 어둠이 깔리는 초원을 새벽까지 쉬지 않고 내달려 시라무렌강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고구려군 척후병들의 이동 막사와 맞닥뜨렸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에서 내린 너케르는 바닥을 포복해 막사 주변까지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경비병이 보이지 않았다. 활에 화살을 메워 시위를 최대한 당긴 그가 산들바람 보법으로 경쾌하게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거침없이 막사 안으로 뛰어든 너케르의 눈에 고구려군 시체들이 들어왔다. 시신은 부패해 있었고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수나라 별동대 선봉의 기습 공격에 당한 게 틀림없었다.
“위대한 용사 요맥이여. 발톱에 움켜쥔 적의 지혜를 내 입에 떨어뜨리길.”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쳐든 너케르가 눈을 감았다. 지혜의 맑은 기운 대신 북쪽에서 불어오는 탁하고 마른 사막 공기가 입안을 휘감았다. 애도의 예를 마치고 말에 오른 너케르는 어둠이 깔리는 초원을 새벽까지 쉬지 않고 내달려 시라무렌강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고구려군 척후병들의 이동 막사와 맞닥뜨렸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에서 내린 너케르는 바닥을 포복해 막사 주변까지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경비병이 보이지 않았다. 활에 화살을 메워 시위를 최대한 당긴 그가 산들바람 보법으로 경쾌하게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거침없이 막사 안으로 뛰어든 너케르의 눈에 고구려군 시체들이 들어왔다. 시신은 부패해 있었고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수나라 별동대 선봉의 기습 공격에 당한 게 틀림없었다.
명예로운 선비족 전사
말린 고기 몇 점을 획득해 말 옆으로 돌아온 너케르는 풀숲에 주저앉아 잠시 졸았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 지 벌써 열흘째였다. 질주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려면 조금씩 눈을 붙여야 했다. 적의 등장을 경고해줄 요맥이 없는 상황에서 그건 자살행위였지만 그는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 너케르는 잠들었고 악몽에 시달렸다. 악몽 속에서 그를 추격하는 돌궐족 병사들을 베고 또 베었지만 적의 수효는 줄지 않았다. 부처의 가호로도 그들을 다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선비족 전사로서 명예롭게 죽기 위해 단검을 빼들어 목에 대고 힘차게 그었다.
요맥의 울음소리에 너케르는 눈을 떴다. 반나절 곯아떨어진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였다. 튕기듯 일어선 너케르는 요맥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본능이 둘을 연결해줬다. 낮게 활강한 요맥이 너케르 앞에 착지했지만 균형을 잃고 뒤뚱대다 끝내 고꾸라졌다. 요맥의 상태를 확인하던 너케르는 오른쪽 날갯죽지에서 화살이 비끼며 만든 부상 흔적을 찾아냈다. 돌궐족 사수들이 바싹 따라붙었다는 증거다.
말등에 오른 너케르는 요맥을 어깨에 얹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아침이 되도록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요맥의 무게감이 어깨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졸음에서 깨어난 너케르는 말을 멈추려 급히 고삐를 당겼다. 순간 그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들판 위로 나동그라졌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아침에 기절했던 너케르는 저녁별을 보며 깨어났다. 실은 깊은 단잠에서 깨어났다고 해야 옳았다. 그의 몸은 타박상 하나 없이 말끔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서진 화살통에서 튀어나온 화살이 흩어져 있었고 스무 걸음 남짓 거리에 말이 서 있었다.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드러누운 그는 감청색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를 응시했다. 같은 별을 보며 태어난 선비족 아이들은 하늘의 형제였고 그 인연은 피보다 진했다. 빙그레 미소 지은 너케르는 하늘의 형제들을 떠올리며 지금 자신이 사력을 다해 만나러 가고 있는 인물의 이름을 속삭였다.
“시라무렌 강가의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태어난 자, 선비족의 위대한 투사 우이치여. 우이치 모테르여. 흐르는 땀이 식기 전 그대 앞에 도달하리라.”
요맥의 울음소리에 너케르는 눈을 떴다. 반나절 곯아떨어진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였다. 튕기듯 일어선 너케르는 요맥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본능이 둘을 연결해줬다. 낮게 활강한 요맥이 너케르 앞에 착지했지만 균형을 잃고 뒤뚱대다 끝내 고꾸라졌다. 요맥의 상태를 확인하던 너케르는 오른쪽 날갯죽지에서 화살이 비끼며 만든 부상 흔적을 찾아냈다. 돌궐족 사수들이 바싹 따라붙었다는 증거다.
말등에 오른 너케르는 요맥을 어깨에 얹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아침이 되도록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요맥의 무게감이 어깨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졸음에서 깨어난 너케르는 말을 멈추려 급히 고삐를 당겼다. 순간 그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들판 위로 나동그라졌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아침에 기절했던 너케르는 저녁별을 보며 깨어났다. 실은 깊은 단잠에서 깨어났다고 해야 옳았다. 그의 몸은 타박상 하나 없이 말끔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서진 화살통에서 튀어나온 화살이 흩어져 있었고 스무 걸음 남짓 거리에 말이 서 있었다.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드러누운 그는 감청색 하늘을 수놓은 별무리를 응시했다. 같은 별을 보며 태어난 선비족 아이들은 하늘의 형제였고 그 인연은 피보다 진했다. 빙그레 미소 지은 너케르는 하늘의 형제들을 떠올리며 지금 자신이 사력을 다해 만나러 가고 있는 인물의 이름을 속삭였다.
“시라무렌 강가의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태어난 자, 선비족의 위대한 투사 우이치여. 우이치 모테르여. 흐르는 땀이 식기 전 그대 앞에 도달하리라.”
무한한 시간의 쳇바퀴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에 있는 고구려 성곽. [우리역사넷 제공]
말에 올라탄 너케르는 요맥이 사라진 뒤쪽의 어둠 저편을 잠시 응시했다. 전사의 영혼을 지닌 요맥은 홀로 맞는 죽음 따위에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너케르는 다시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초원의 나무와 풀이 정면의 소실점 속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귓가를 스치고 뒤편 암흑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너케르는 그런 똑같은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는 무한한 시간의 쳇바퀴 속에서 영겁을 달리는 전사였다.
어슴푸레 여명이 밝아올 무렵, 시라무렌강을 출발한 후 세 번째 갈아탄 말마저 기력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그가 가진 말을 모두 잃은 셈이니 이제 다른 누군가의 말을 약탈해야 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말의 목을 벤 너케르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로 가죽신발이 축축해졌고 눅눅한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마침내 목동들의 것으로 보이는 막사 하나를 발견해 접근하던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쳇! 이번엔 이런 운명이었군.”
그가 이틀 전 말린 고기를 얻었던 고구려 척후병들의 막사였다. 졸면서 고삐를 자주 놓치는 바람에 말은 초원을 둥글게 회전해 너케르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던 것이다. 막사 앞 기둥엔 말 다섯 마리가 매여 있었다. 너케르를 추격하던 돌궐족 사수들의 군마였다. 단검을 꺼내든 그는 호랑이 보법으로 민첩하게 전진해 입구 주변에 버려진 고구려군 시신들을 타고 넘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심해 경비병도 세우지 않고 잠든 돌궐족 사수 셋은 그렇게 고요히 살해됐다. 부처의 가호를 빌고 밖으로 나온 너케르는 혹시 모를 다른 추격병에 대비해 네 마리 말의 목을 찔러 쓰러뜨리고 남은 말 위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요하는 평원을 흐르며 해금 소리를 냈다. 바람은 두껍고 진했다. 수나라 군진은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해 손쉽게 우회할 수 있었다. 여러 차례 맹공에도 요동의 고구려성들을 함락하지 못한 수나라군 본진은 공격을 멈추고 회군을 준비 중이었다. 지친 고구려군도 방어 태세를 느슨하게 풀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수나라 황제는 자신에게 귀의한 날렵한 돌궐족 기병들을 앞세운 3만의 별동대를 후방에서 새로 조직해 압록수로 진격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견고한 고구려 전초기지인 험성(險城)들을 그냥 지나쳐 평양으로 직격할 예정이었다. 너케르는 수의 별동대보다 먼저 압록수를 건너 고구려군에 이 사실을 전해야 했다. 그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그의 마지막 임무였다.
요하를 통과한 너케르는 별동대의 선봉을 따라잡고자 분투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고 목이 마르면 말의 피를 빨았다. 너케르가 마침내 압록수 직전에서 별동대 선봉을 앞질렀을 때 그의 몸엔 앙상한 근육 몇 점만 남아 있었다. 그는 탈진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런 그를 먼저 발견한 건 부처님의 도움이었는지 고구려 정찰병들이었다. 강을 넘어와 수나라군 동태를 탐지하던 정찰병들은 자신들의 지휘자 이름을 절규하듯 외치는 선비족 기병을 배에 싣고 함께 복귀했다.
너케르가 눈을 뜨자 익숙한 막사 천장이 보였고 횃불 불빛으로 얼굴이 붉게 물든 고구려군 장수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너케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하늘의 형제, 너케르여. 그대 영혼이 지상을 떠나려 한다. 시라무렌 강가를 거닐던 그대는 사람의 일을 끝내고 천신 탕게르 곁으로 돌아가리라.”
입을 열려던 너케르는 문득 자신의 이빨이 모두 빠져버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말은 가쁜 호흡에 쇳소리가 돼버렸고 코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너케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구려 장수가 귀를 가까이 댔다. 너케르가 비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어슴푸레 여명이 밝아올 무렵, 시라무렌강을 출발한 후 세 번째 갈아탄 말마저 기력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그가 가진 말을 모두 잃은 셈이니 이제 다른 누군가의 말을 약탈해야 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말의 목을 벤 너케르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로 가죽신발이 축축해졌고 눅눅한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마침내 목동들의 것으로 보이는 막사 하나를 발견해 접근하던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쳇! 이번엔 이런 운명이었군.”
그가 이틀 전 말린 고기를 얻었던 고구려 척후병들의 막사였다. 졸면서 고삐를 자주 놓치는 바람에 말은 초원을 둥글게 회전해 너케르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던 것이다. 막사 앞 기둥엔 말 다섯 마리가 매여 있었다. 너케르를 추격하던 돌궐족 사수들의 군마였다. 단검을 꺼내든 그는 호랑이 보법으로 민첩하게 전진해 입구 주변에 버려진 고구려군 시신들을 타고 넘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심해 경비병도 세우지 않고 잠든 돌궐족 사수 셋은 그렇게 고요히 살해됐다. 부처의 가호를 빌고 밖으로 나온 너케르는 혹시 모를 다른 추격병에 대비해 네 마리 말의 목을 찔러 쓰러뜨리고 남은 말 위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요하는 평원을 흐르며 해금 소리를 냈다. 바람은 두껍고 진했다. 수나라 군진은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해 손쉽게 우회할 수 있었다. 여러 차례 맹공에도 요동의 고구려성들을 함락하지 못한 수나라군 본진은 공격을 멈추고 회군을 준비 중이었다. 지친 고구려군도 방어 태세를 느슨하게 풀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수나라 황제는 자신에게 귀의한 날렵한 돌궐족 기병들을 앞세운 3만의 별동대를 후방에서 새로 조직해 압록수로 진격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견고한 고구려 전초기지인 험성(險城)들을 그냥 지나쳐 평양으로 직격할 예정이었다. 너케르는 수의 별동대보다 먼저 압록수를 건너 고구려군에 이 사실을 전해야 했다. 그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그의 마지막 임무였다.
요하를 통과한 너케르는 별동대의 선봉을 따라잡고자 분투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고 목이 마르면 말의 피를 빨았다. 너케르가 마침내 압록수 직전에서 별동대 선봉을 앞질렀을 때 그의 몸엔 앙상한 근육 몇 점만 남아 있었다. 그는 탈진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런 그를 먼저 발견한 건 부처님의 도움이었는지 고구려 정찰병들이었다. 강을 넘어와 수나라군 동태를 탐지하던 정찰병들은 자신들의 지휘자 이름을 절규하듯 외치는 선비족 기병을 배에 싣고 함께 복귀했다.
너케르가 눈을 뜨자 익숙한 막사 천장이 보였고 횃불 불빛으로 얼굴이 붉게 물든 고구려군 장수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너케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하늘의 형제, 너케르여. 그대 영혼이 지상을 떠나려 한다. 시라무렌 강가를 거닐던 그대는 사람의 일을 끝내고 천신 탕게르 곁으로 돌아가리라.”
입을 열려던 너케르는 문득 자신의 이빨이 모두 빠져버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말은 가쁜 호흡에 쇳소리가 돼버렸고 코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너케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고구려 장수가 귀를 가까이 댔다. 너케르가 비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고구려 장수 우이치 모테르
612년(영양왕 23) 중국 수나라 군대를 고구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격파한 살수대첩을 그린 기록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이치 모테르, 나의 형제여. 나는 임무를 마치고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나를 기억하라. 나 아르막 너케르는 용맹한 선비족의 궁수 쿠리치로 살다 명예를 지키고 이렇게 죽는다. 나를 기억하라.”
고구려 장수 우이치 모테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 곡했다. 너케르가 다시 말했다.
“수나라 황제가 정예 돌격대 3만을 꾸려 다시 침공하고 있다. 변절한 돌궐족이 선봉이다. 그들은 빠르고 날렵해 요동을 바람처럼 스칠 것이다. 그들은 평양성으로 날아갈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우이치 모테르가 너케르의 눈을 감겼다. 너케르는 눈을 감고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숨이 오래 붙어 있었고 한마디 덧붙일 기력이 남아 있었다.
“우두머리 우이치여. 그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 수도 없이 찾아왔었다. 나는 이곳에서 사라지자마자 시라무렌 강가에서 다시 깨어난다. 나 아르막 너케르는 이 시간의 수레바퀴 안에 갇히고 말았다. 무모한 살육의 업보로 부처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말을 마친 너케르는 절명했고 고구려 장수가 된 선비족 용사 우이치 모테르는 어린 시절 수많은 전투를 함께 한 전우의 마지막 말을 조용히 되새겼다. 너케르의 영혼이 시라무렌 강가로 되돌아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전사로선 행복한 저주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너케르는 끝없이 적들과 싸울 것이며 항상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별들은 누가 만들었나? 아르막 너케르는 눈을 뜨며 기괴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곧이어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숲속 우듬지를 스치듯 날아 막사 옆 횟대에 내린 요맥이 울었고 시라무렌 강가의 선비족 정착촌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수나라군 소속 돌궐족 기마대가 들이닥칠 것이니 즉시 전투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끝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 고통스러운 전사의 삶은 우이치 모테르에게 도착하고 나서야 끝났고 어떤 짓을 해도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의 중간지역인 중유(中有)를 떠도는 영혼이라 스스로 목숨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고구려 장수 우이치 모테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 곡했다. 너케르가 다시 말했다.
“수나라 황제가 정예 돌격대 3만을 꾸려 다시 침공하고 있다. 변절한 돌궐족이 선봉이다. 그들은 빠르고 날렵해 요동을 바람처럼 스칠 것이다. 그들은 평양성으로 날아갈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우이치 모테르가 너케르의 눈을 감겼다. 너케르는 눈을 감고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숨이 오래 붙어 있었고 한마디 덧붙일 기력이 남아 있었다.
“우두머리 우이치여. 그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 수도 없이 찾아왔었다. 나는 이곳에서 사라지자마자 시라무렌 강가에서 다시 깨어난다. 나 아르막 너케르는 이 시간의 수레바퀴 안에 갇히고 말았다. 무모한 살육의 업보로 부처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말을 마친 너케르는 절명했고 고구려 장수가 된 선비족 용사 우이치 모테르는 어린 시절 수많은 전투를 함께 한 전우의 마지막 말을 조용히 되새겼다. 너케르의 영혼이 시라무렌 강가로 되돌아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전사로선 행복한 저주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너케르는 끝없이 적들과 싸울 것이며 항상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별들은 누가 만들었나? 아르막 너케르는 눈을 뜨며 기괴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곧이어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숲속 우듬지를 스치듯 날아 막사 옆 횟대에 내린 요맥이 울었고 시라무렌 강가의 선비족 정착촌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수나라군 소속 돌궐족 기마대가 들이닥칠 것이니 즉시 전투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끝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 고통스러운 전사의 삶은 우이치 모테르에게 도착하고 나서야 끝났고 어떤 짓을 해도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의 중간지역인 중유(中有)를 떠도는 영혼이라 스스로 목숨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타크바르 무사에게 닥친 괴상한 운명
모진 전투에서 너케르는 돌궐족 기마병을 평소보다 많이 죽여야 했다. 화살통 열 개가 다 비도록 적들을 사살한 그가 은신해 있던 숲 밖으로 나오자 선비족들과 돌궐족 기마병들의 뒤엉킨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에 낭자했다. 언제나처럼 전멸이었고 생존자는 그가 유일했다.
“나모관세음보살. 다시 태어나 성불하기를.”
기도를 마친 너케르는 강가에 매어둔 세 마리 말을 찾아내 요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일어날 일을 수도 없이 겪었던 터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건은 사라지거나 변형됐고 또 어떤 사건은 느닷없이 새로 생겨났지만 어차피 이 모든 일은 우이치 모테르를 만나야 끝났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까닭을 몰랐지만 너케르는 어느 순간 이 임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매번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라무렌강을 떠난 지 여드레째 밤, 그는 어김없이 수나라 별동대 예하부대와 조우했다. 수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너케르는 그들에게 수도 없이 들은 얘기를 다시 들어야 했다. 기습 공격을 준비하던 수나라 황제가 투항한 돌궐병들에게 고구려와 친한 후방의 선비족들을 먼저 몰살시키라 명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것도 그들로부터였다. 그리고 너케르는 즉시 그 자리를 떠야 했다. 시라무렌 강가의 정착촌을 습격했다 물러난 돌궐병들이 그를 추적해 올 것이었다.
세 마리 말 중 마지막 말로 갈아탄 너케르는 자신에게 닥친 괴상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의 선조는 선비족 타크바르(拓拔) 지파의 무사였다. 타크바르 씨족은 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북위(北魏)를 세운 뒤 원(元)으로 성을 바꿨다. 북위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선비족 전통은 마침내 소멸했으며 유목민 풍습을 지키려던 무리는 다시 시라무렌 강가로 되돌아가 정착해야 했다. 아르막 집안과 우이치 집안은 그때 고향인 초원으로 복귀한 정착부락민 중 하나였다.
“왜 하필 나였을까?”
너케르는 새삼 자신에게 물었다. 그건 부처가 만든 필연일 수도, 세상을 쥐고 조롱하는 악마의 우연한 농간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국교인 불교를 버리고 남조의 유학을 받아들인 북조 지배자들의 배교에 대한 부처의 응징의 화살이 잘못된 과녁을 겨눴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무한 속을 달리고 또 달려야 할 운명이었다.
“나모관세음보살. 다시 태어나 성불하기를.”
기도를 마친 너케르는 강가에 매어둔 세 마리 말을 찾아내 요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일어날 일을 수도 없이 겪었던 터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건은 사라지거나 변형됐고 또 어떤 사건은 느닷없이 새로 생겨났지만 어차피 이 모든 일은 우이치 모테르를 만나야 끝났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까닭을 몰랐지만 너케르는 어느 순간 이 임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매번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라무렌강을 떠난 지 여드레째 밤, 그는 어김없이 수나라 별동대 예하부대와 조우했다. 수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너케르는 그들에게 수도 없이 들은 얘기를 다시 들어야 했다. 기습 공격을 준비하던 수나라 황제가 투항한 돌궐병들에게 고구려와 친한 후방의 선비족들을 먼저 몰살시키라 명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것도 그들로부터였다. 그리고 너케르는 즉시 그 자리를 떠야 했다. 시라무렌 강가의 정착촌을 습격했다 물러난 돌궐병들이 그를 추적해 올 것이었다.
세 마리 말 중 마지막 말로 갈아탄 너케르는 자신에게 닥친 괴상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의 선조는 선비족 타크바르(拓拔) 지파의 무사였다. 타크바르 씨족은 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북위(北魏)를 세운 뒤 원(元)으로 성을 바꿨다. 북위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선비족 전통은 마침내 소멸했으며 유목민 풍습을 지키려던 무리는 다시 시라무렌 강가로 되돌아가 정착해야 했다. 아르막 집안과 우이치 집안은 그때 고향인 초원으로 복귀한 정착부락민 중 하나였다.
“왜 하필 나였을까?”
너케르는 새삼 자신에게 물었다. 그건 부처가 만든 필연일 수도, 세상을 쥐고 조롱하는 악마의 우연한 농간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국교인 불교를 버리고 남조의 유학을 받아들인 북조 지배자들의 배교에 대한 부처의 응징의 화살이 잘못된 과녁을 겨눴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무한 속을 달리고 또 달려야 할 운명이었다.
북방족의 평화
철갑으로 무장한 고구려 기병들이 창으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중국 지린성 지안현 삼실총 벽화. [문화콘텐츠닷컵]
이번엔 고구려 척후병들의 이동막사가 없었다. 대신 수나라 별동대의 군막이 넓은 평원을 차지하고 길을 가로막았다. 밤이 오길 기다린 너케르는 말 옆구리에 매달린 채 군막들을 최대한 우회해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민활함과 말의 조심스러운 정숙보행도 요맥의 날갯짓 소리를 막진 못했다. 주의가 흐트러진 너케르는 낯선 자의 침입 흔적을 탐지키 위해 설치한 모래 지역인 천전(天田)을 딛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수나라 보초병이 천전을 확인하기 전까지 되도록 멀리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너케르는 달리고 숨고 또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절했고 고구려군에게 구조돼 우이치 모테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깨어났다. 이번에도 너케르는 자신의 기이한 운명에 대해 말할 시간을 얻었다. 너케르의 말을 묵묵히 듣던 우이치 모테르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
“형제 아르막 너케르여. 실은 나도 그대와 같은 운명이라네. 나 역시 그대를 만나는 이 순간으로 끝없이 되돌아오고 있지. 우린 서로 다른 시간 안에 갇힌 거라네.”
놀란 너케르가 마지막 힘을 모아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에게 다음 사명을 전달하고 있는 것인가?”
우이치 모테르가 절명하는 상대의 눈을 감기며 속삭였다.
“우리 유목민족을 지킬 자라네. 나 우이치 모테르는 고구려인 을지문덕이 돼 이 전쟁을 끝낸다네. 북방족의 평화는 지켜질 걸세. 형제여. 부디 이번엔 윤회를 벗어나 영원히 이곳을 떠나길 빌겠네.”
아르막 너케르는 죽었고 우이치 모테르, 아니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없이 반복한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부장들을 소집했다.
너케르는 달리고 숨고 또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절했고 고구려군에게 구조돼 우이치 모테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깨어났다. 이번에도 너케르는 자신의 기이한 운명에 대해 말할 시간을 얻었다. 너케르의 말을 묵묵히 듣던 우이치 모테르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
“형제 아르막 너케르여. 실은 나도 그대와 같은 운명이라네. 나 역시 그대를 만나는 이 순간으로 끝없이 되돌아오고 있지. 우린 서로 다른 시간 안에 갇힌 거라네.”
놀란 너케르가 마지막 힘을 모아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에게 다음 사명을 전달하고 있는 것인가?”
우이치 모테르가 절명하는 상대의 눈을 감기며 속삭였다.
“우리 유목민족을 지킬 자라네. 나 우이치 모테르는 고구려인 을지문덕이 돼 이 전쟁을 끝낸다네. 북방족의 평화는 지켜질 걸세. 형제여. 부디 이번엔 윤회를 벗어나 영원히 이곳을 떠나길 빌겠네.”
아르막 너케르는 죽었고 우이치 모테르, 아니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없이 반복한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부장들을 소집했다.
※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은 고구려를 지킨 명장임에도 출생 배경이 미궁에 빠져 있다. 가장 합리적인 추정은 선비족 계통의 성인 을지(乙支)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을지는 북위를 세운 선비족 지배층이던 울지씨(尉遲氏)와 발음이 흡사하다. 그렇다면 을지문덕 장군은 귀화한 선비족 가문의 후예일 수 있다. 선비족과 조선족은 아주 먼 옛날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출발한 공통 조상의 후예들로도 알려져 있다. 을지를 우이치의 음역으로 가정한 것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북방 방언 ‘웃치’ 혹은 ‘윗치’에 근거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