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터 잡은 지 반만년이 되는 동안 한반도라는 거대한 화폭(畵幅)에 굵은 흔적을 남긴 이가 다섯 명 있다. 《월간조선》 12월호에 소개한 도선(道詵)국사와 무학(無學)대사는 고려,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둘은 비록 승려였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정치인보다 외려 컸다고 하겠다.
현대에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다시 그렸다.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산업단지와 간척지와 댐은 우리가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 자산이 됐다. 조선시대의 두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한반도의 본모습을 그려낸 고산자 김정호(金正浩·1804~1866)다.
그는 발로 전국을 누비며 ‘대동여지도’를 남겼다. 30여 년 만에 완성된 ‘대동여지도’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제주도까지 22개의 첩으로 만들었다. 22개의 첩은 접으면 책이 된다. 다시 펼쳐놓으면 가로 3.8m, 세로 6.7m 크기의 한반도 지도가 된다. ‘대동여지도’는 현대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근대 지리학의 아버지’로 불러도 손색없을 김정호지만 생애는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생몰연대가 부정확하다. 어떻게 삶을 마쳤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김정호로부터 대동여지도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국가 비밀을 누설할 위험이 있다며 김정호의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끔찍한 설(說)도 있다.
도선국사, 무학대사, 박정희 전 대통령, 김정호의 생애는 잘 알려졌고 간혹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 적도 있지만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의 삶은 본격적으로 조명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가 남긴 《택리지(擇里志)》가 각급 학교의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사뭇 의아할 정도다.
이중환의 자(字)는 휘조이며 본관은 여주다. 그의 집안은 숱한 고위 공직자와 학자를 배출한 남인(南人)의 명문세족이었다. 그의 고조부가 서예로 명성을 떨친 이지정(李志定)이며 아버지 이진휴(李震休)는 도승지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李瀷)이 이중환의 집안 할아버지뻘이다.
이중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가 죽은 뒤 이익이 쓴 ‘묘갈명’과 이중환이 20대부터 30대까지 관직에서 승승장구할 때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것이 전부다. 외아들로 태어난 이중환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나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 그는 24세 때인 1713년 문과에 급제해 일찌감치 벼슬길에 나섰다.
이중환은 김천도찰방,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부사과, 병조정랑을 역임했는데 순탄하던 벼슬길이 30대 초반부터 기구하게 변했다. 이유는 그의 집안이 남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권력을 독점하던 서인들에게 남인의 이 ‘낭중지추(囊中之錐)’는 목젖에 박힌 가시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중환에게 처음 닥친 흉조는 이른바 ‘목호룡의 고변(告變)’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목호룡 사건은 다음과 같이 요약돼 있다. 목진공의 서얼 출신으로 지관(地官)이었던 목호룡이 1722년 3월 27일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면서 피로 점철된 훗날 임인사화로 불리는 피로 얼룩진 불길한 문을 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상소문의 원문(原文)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성상(聖上)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신(臣·목호룡)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虎口]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상은 경종(景宗)을 말한다. 목호룡의 고변은 간혹 ‘삼급수(三急手) 고변’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상소문에 언급된 칼, 독약, 폐출 같은 수단이 상대에게 치명적인 ‘삼급수’라 불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칼’은 자객을 보내 경종이 아버지 숙종의 상(喪)을 치르고 있을 때 암살을 꾀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소급수(小急手)는 상소문에 언급된 독약으로, 누군가 경종의 수라를 담당하는 상궁에게 은 500냥의 뇌물을 주어 음식에 독을 넣으려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평지수(平地手)는 숙종의 유조(遺詔)를 위조해 ‘세자(경종)를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만든다’는 구절을 넣었는데 이걸 자기가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다.
목호룡이 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지목한 인물들이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는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등이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은 가담자뿐 아니라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네 명의 영수(領袖)를 잃는다. 남인 출신 서얼에 의해 네 명의 영수뿐 아니라 20여 명이 사형되고 30여 명이 장살(杖殺)됐으며 10여 명이 교살되고 100여 명이 유배되는 등 쑥대밭이 됐으니 이제 남인은 노론의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경종을 시해해 이득 볼 사람이 누구일까. 그것은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였다. 과연 경종이 요절하고 1724년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자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던 영조의 반격이 시작됐다. 고변 후 동중추부사까지 승진했던 목호룡은 참수돼 머리가 사흘간 거리에 내걸렸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 당시 서인을 상대로 심문을 맡았던 남인세력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이중환은 특히 탄압당한 정도가 심했다. 친구 이희는 “청담(이중환)은 성품이 뻣뻣하고 깨끗하여 아첨과 비방을 싫어해 특히 미움을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후 이중환의 생은 옥(獄)과 유배의 반복이었다.
1713년에 벼슬에 나가 약진하던 삶이 10년 만에 끝나고 이후 죽을 때까지 고초가 이어지다 1753년에야 겨우 명예가 회복됐다. 이런 이중환이 숨 쉴 공간은 이 산하(山河)를 걸으며 글을 쓰는 길뿐이었다. 《택리지》는 비운 속에 빛을 보게 됐으니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탄생시킨 예와 같다고 하겠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한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곤륜산(崑崙山·지금의 중국 서부 칭하이성에 있으며 해발 7167m)의 한 줄기가 고비사막 남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향하여 의무려산(醫巫閭山·중국 랴오닝성에 있으며 해발 866m)이 된다. 의무려산에서 산줄기가 한바탕 크게 끊겨 요동벌판이 되고 벌판을 지난 산줄기가 다시 솟구쳐 백두산이 된다. 이 산이 곧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한 불함산(不咸山)이다.
백두산의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어가다 두 강(흑룡강과 혼동강)을 끼고 남으로 선회하여 영고탑(寧古塔·중국 헤이룽장성에 있으며 북한 쪽 회령 건너편이다. 청나라의 발상지다)이 되고 등 뒤에서 하나의 맥이 뽑혀 나와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된다.”
《택리지》는 이어 조선 팔도의 지세(地勢)와 거기 얽힌 설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이는 인용을 자제키로 한다. 해당 도에 사는 분들이 읽으면 상처가 될 부분이 상당히 많아 괜한 필화(筆禍)를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경상도에 대해 이중환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경상도는 지리가 아름답다. 풍수가가 말하는 하늘로 치솟은 수성(水星)의 형국으로 태백산 왼편에서 큰 지맥이 하나 나와 동해에 바짝 붙어 내려오다 동래 바닷가에서 멈추고 태백산 오른쪽에서 또 하나의 큰 지맥이 나와 소백산, 작성산, 주흘산, 회양산, 청화산, 속리산, 황악산, 덕유산, 지리산 등을 이루고 남해 바닷가에서 멈춘다.
… 옛날에 계림은 ‘군자국’이다 라고 말한 곳이다. 지금은 동경(東京)이라 부르는데 경주의 읍치는 태백산 왼편에서 뻗은 지맥 한가운데 있으니 풍수가가 말하는 용이 휘돌다가 머리를 돌려 처음 일어난 곳을 돌아보는 형국에 해당한다. 서북쪽이 트인 지세로 형국 안을 흐르는 물이 동쪽으로 흘러 큰 강을 이루고 바다로 들어간다.
… 위아래로 수천 년 동안 경상도는 장수와 정승, 공경대부, 문장 잘하고 덕행을 지닌 선비를 비롯하여 공훈을 세우거나 절의를 지킨 사람, 선인(仙人)과 승려, 도사 등을 많이 배출하여 인재의 창고라 일컬어졌다. 우리 조선조에서 선조 임금 이전에 국정을 담당한 사람은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고 문묘에 배향된 네 명의 현자(賢者·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말한다) 역시 경상도 사람이었다.
… 예안과 안동, 순흥, 영천, 예천 등의 고을은 태백산과 소백산 남쪽에 있는데 신령이 서린 복된 땅이다. 큰 산 아래의 평탄한 산지와 넓은 들녘은 밝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흙은 기운과 빛깔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
… 상주 남쪽은 선산(善山·지금의 구미)으로 상주보다 더욱 밝고 빼어나다. 속담에 ‘조선 인재의 절반이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는 절반이 선산에서 난다’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학문에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 술사(術士)가 우리나라에 인재가 많은 것을 꺼려서 군졸을 시켜 고을 뒤편의 산맥을 끊고 벌겋게 달아오른 숯으로 뜸질을 하게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으니 이때부터 땅이 쇠잔하여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팔도에서 가히 도읍이 될 수 있는 곳으로 한양(서울)과 송도(개성)를 최고로 치면서 고려 태조 왕건이 중국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을 편다. 먼저 한양에 대해 이중환은 “이야말로 한나라 산수(山水)의 정신이 다 모이는 곳”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에서 나온 산맥 한 줄기가 남쪽으로 500~600리를 뻗어가다가 양주에 이르러 올망졸망한 산이 된다. 이 산줄기가 동북방에서 한양 쪽으로 비스듬히 비집고 들어오다가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 만장봉 바위 봉우리가 된다. 여기에서 서남방을 향해 뻗어가며 조금 끊겼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가 되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된다.
그중에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백악(白岳)이 된다. 풍수가의 말에 따르면 하늘을 찌르는 목성으로 궁성을 주관하는 주산(主山)이다. 한양은 동쪽과 남쪽, 북쪽에 모두 큰 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바닷물이 드나든다. 여러 갈래의 물이 다 모여드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이야말로 한나라 산수의 정신이 다 모이는 곳이다.”
다음은 송도 차례다. 그의 말을 원문대로 인용해 본다.
“임진나루를 건너 장단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개성부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고려의 국도(國都)로서 송악(松岳)이 진산(鎭山)이다. 진산 아래에 만월대가 있으니 ‘송사(宋史)’에서 ‘큰 산에 의지하여 궁전을 지었다’라 한 것이다. 김관의는 《편년통록》에서 (송도를) 금 돼지가 누워 있는 곳이라 하였고 도선은 임금 심은 밭이라 하였다.”
이어 태조 왕건 설화가 등장한다.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본다. 당나라 선종(810~859)이 젊었을 적 중원을 돌며 고생하다가 바다 건너 개성으로 왔다. 보육(왕건의 3대조로 본명은 손호술·損乎述) 집에 머무는데 보육이 선종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아보고 작은딸 진의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이별을 앞두고 선종은 진의가 임신한 것을 알고 붉은 활 하나를 주며 ‘사내아이를 낳거든 이것을 가지고 중국으로 찾아오라.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이라 하라’고 했다. 작제건이 성인이 돼 장삿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배가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떨며 삿갓을 던져 길흉을 점쳤다.
그런데 작제건의 삿갓만 물에 가라앉았다. 장사꾼 일행은 식량과 함께 작은 섬에 작제건을 내려놓고 떠났다. 어느 날 동자(童子) 하나가 물속에서 솟구쳐 나와 ‘용왕님이 뵙기를 청한다’고 해 그를 따라갔다. 용궁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요사이 흰 용(龍) 하나가 내 소굴을 빼앗으려 한다’며 도움을 청했다.
작제건이 어떻게 도우면 좋겠느냐고 묻자 노인은 ‘내일 오시(午時)에 바람 불고 비가 오며 파도가 칠 텐데 등이 푸른 쪽이 나고 흰 쪽이 그놈이다’라고 했다. 다음 날 작제건은 싸우는 두 용 가운데 흰 용을 화살로 쏴 맞혔다. 푸른 용은 원래 용왕이었다. 싸움에서 이긴 용왕은 자기 딸을 작제건에게 줘 아내로 삼게 했다.
작제건이 아내와 함께 송도로 돌아가자 황해도 염주 태수와 백주의 태수가 재물을 바치고 집을 지어줬다. 작제건이 낳은 아들이 융이고 융이 다시 아들을 낳아 성명을 따로 지어 왕건이라 했으니 사실 그의(왕건)의 성씨는 왕씨가 아니라 당나라 선종 이침의 이씨인 것이다. 참으로 믿기 힘든 설화이다.
이중환은 조선 팔도에서 가장 볼 만한 명산을 여덟 개 꼽았다.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선유산, 덕유산, 지리산이다. 여기서 선유산은 충청북도 괴산에서 경상북도 문경에 걸쳐 있는데 지금은 선유구곡(仙遊九曲)으로 불리고 있다. 인적이 드물어 물이 매우 맑고 산수가 빼어나다.
이어 여덟 개 산과 더불어 은둔자들이 깃들어 수양하기 좋은 산 네 곳을 지목하고 있다. 북한 쪽의 칠보산, 묘향산과 합천 가야산, 봉화 청량산이다. 이중환은 “예부터 천하의 명산은 승려가 많이 차지했다”며 자신의 기준으로 본 명찰(名刹)을 거론하고 있다. 그가 첫손에 꼽은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다.
이어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대구의 동화사(桐華寺), 전라남도 영암의 도갑사(道岬寺), 남해 천주사, 논산 대둔사, 김제 금산사, 순천 송광사, 전남 고흥의 팔영산 능가사를 꼽고 있다. 이 중 능가사에는 옛날 유구국의 태자가 표류해 왔다가 관세음보살에게 칠 일 동안 기도해 소원을 성취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중환은 조선 팔도의 많은 산 가운데 가장 생김새가 멋진 산으로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진잠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선택했다. 이 가운데 개성의 오관산은 서쪽의 박연폭포, 동쪽의 화담을 갖추고 바다로는 교동도와 강화도가 바다를 막고 있어 천하의 명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한양의 삼각산은 천상의 수도이자 훌륭한 도읍터이긴 하나 1000리 정도 뻗은 기름진 들이 없다는 것이 결점이라고 했다. 계룡산은 웅장함으론 오관산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함으로는 삼각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서북쪽에 매우 크고 깊은 용연(龍淵)이 오관산이나 삼각산에는 없는 것이라고 지목했다.
그 외에 이중환이 꼽은 ‘잘생긴 산’은 뜻밖에도 춘천의 청평산, 원주의 치악산, 공주의 무성산, 해미의 가야산, 남포의 성주산, 변산이 있다. 그는 “이 산들은 크게는 도읍이 될 만하며 작게는 고매한 사람과 은거하려는 선비가 숨어 살 만한 땅”이라고 했다.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되고 싶다면 고려해 볼만한 말이다.
반면 사람이 살지 못하나 명승(名勝)이라 할 산으로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흥양 팔영산, 광양 백운산, 대구 비파산, 청도 운문산, 포항 내연산, 청송 주왕산이 있다고 했다. 그 산 리스트 뒤에는 “신선과 승려가 살기에 알맞고 한때 유람하기에는 좋지만 집을 지어 살 땅은 아니다”라는 부기(附記)가 있다.
건설이나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중환이 꼽은 ‘강가의 주거지’편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가 꼽은 팔도에서 으뜸가는 강가의 주거지는 평양이며, 두 번째가 강원도 춘천의 우두촌이다. 세 번째가 여주 읍치로 더 구체적으로는 신륵사 부근이다. 반면 한양의 강촌 마을은 좋지 않다고 했다.
‘시냇가 주거지’로 첫손에 꼽히는 곳은 경북 안동의 하회이며, 두 번째가 도산서당이 있는 도산이다. 그는 “시냇가의 주거지는 오직 이 두 곳이 참으로 나라 안에서 첫째간다. 땅이 명사(名士·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로 인해 귀해진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다음이 청송읍 시냇물 하류가 황수와 합류하는 곳으로 학봉 김성일의 고택이 있는 반변천, 임하천 상류, 영천 서북쪽 순흥 부근을 흐르는 죽계가 거론됐다. 이중환은 “소백산과 태백산 아래, 황수 유역은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라 했는데 이곳은 남사고(南師古)의 십승지(十勝地)와 상당 부분 겹친다.⊙
현대에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다시 그렸다.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산업단지와 간척지와 댐은 우리가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 자산이 됐다. 조선시대의 두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한반도의 본모습을 그려낸 고산자 김정호(金正浩·1804~1866)다.
그는 발로 전국을 누비며 ‘대동여지도’를 남겼다. 30여 년 만에 완성된 ‘대동여지도’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제주도까지 22개의 첩으로 만들었다. 22개의 첩은 접으면 책이 된다. 다시 펼쳐놓으면 가로 3.8m, 세로 6.7m 크기의 한반도 지도가 된다. ‘대동여지도’는 현대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근대 지리학의 아버지’로 불러도 손색없을 김정호지만 생애는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생몰연대가 부정확하다. 어떻게 삶을 마쳤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김정호로부터 대동여지도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국가 비밀을 누설할 위험이 있다며 김정호의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끔찍한 설(說)도 있다.
도선국사, 무학대사, 박정희 전 대통령, 김정호의 생애는 잘 알려졌고 간혹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 적도 있지만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의 삶은 본격적으로 조명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가 남긴 《택리지(擇里志)》가 각급 학교의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사뭇 의아할 정도다.
경주 안압지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주 전체가 용이 뒤를 돌아보는 이른바 회룡고조형의 명당이라 평했다. |
이중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가 죽은 뒤 이익이 쓴 ‘묘갈명’과 이중환이 20대부터 30대까지 관직에서 승승장구할 때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것이 전부다. 외아들로 태어난 이중환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나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 그는 24세 때인 1713년 문과에 급제해 일찌감치 벼슬길에 나섰다.
이중환은 김천도찰방,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부사과, 병조정랑을 역임했는데 순탄하던 벼슬길이 30대 초반부터 기구하게 변했다. 이유는 그의 집안이 남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권력을 독점하던 서인들에게 남인의 이 ‘낭중지추(囊中之錐)’는 목젖에 박힌 가시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봉화 춘양면은 임진왜란 때 서애 류성룡 선생의 가족이 피란했을 만큼 오지다. 남사고는 이곳을 전쟁과 질병을 피해갈 수 있는 십승지의 한 곳으로 꼽았다. |
“성상(聖上)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신(臣·목호룡)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虎口]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상은 경종(景宗)을 말한다. 목호룡의 고변은 간혹 ‘삼급수(三急手) 고변’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상소문에 언급된 칼, 독약, 폐출 같은 수단이 상대에게 치명적인 ‘삼급수’라 불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칼’은 자객을 보내 경종이 아버지 숙종의 상(喪)을 치르고 있을 때 암살을 꾀했다는 것이다.
영월에는 무릉리라는 마을이 있다. 주천강에 있는 기이한 바위들이다. |
목호룡이 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지목한 인물들이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는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등이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은 가담자뿐 아니라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네 명의 영수(領袖)를 잃는다. 남인 출신 서얼에 의해 네 명의 영수뿐 아니라 20여 명이 사형되고 30여 명이 장살(杖殺)됐으며 10여 명이 교살되고 100여 명이 유배되는 등 쑥대밭이 됐으니 이제 남인은 노론의 철천지원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경종을 시해해 이득 볼 사람이 누구일까. 그것은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였다. 과연 경종이 요절하고 1724년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자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던 영조의 반격이 시작됐다. 고변 후 동중추부사까지 승진했던 목호룡은 참수돼 머리가 사흘간 거리에 내걸렸다.
이어 목호룡의 고변 당시 서인을 상대로 심문을 맡았던 남인세력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이중환은 특히 탄압당한 정도가 심했다. 친구 이희는 “청담(이중환)은 성품이 뻣뻣하고 깨끗하여 아첨과 비방을 싫어해 특히 미움을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후 이중환의 생은 옥(獄)과 유배의 반복이었다.
예천 병암정은 호수 속에 정자가 떠 있는 듯한 모습이다. |
이중환의 《택리지》는 한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곤륜산(崑崙山·지금의 중국 서부 칭하이성에 있으며 해발 7167m)의 한 줄기가 고비사막 남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향하여 의무려산(醫巫閭山·중국 랴오닝성에 있으며 해발 866m)이 된다. 의무려산에서 산줄기가 한바탕 크게 끊겨 요동벌판이 되고 벌판을 지난 산줄기가 다시 솟구쳐 백두산이 된다. 이 산이 곧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한 불함산(不咸山)이다.
백두산의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어가다 두 강(흑룡강과 혼동강)을 끼고 남으로 선회하여 영고탑(寧古塔·중국 헤이룽장성에 있으며 북한 쪽 회령 건너편이다. 청나라의 발상지다)이 되고 등 뒤에서 하나의 맥이 뽑혀 나와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된다.”
이중환은 경상도에서 1000년간 인재가 배출됐다고 했다. 경북 상주의 정기룡 장군처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한 명장과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
“경상도는 지리가 아름답다. 풍수가가 말하는 하늘로 치솟은 수성(水星)의 형국으로 태백산 왼편에서 큰 지맥이 하나 나와 동해에 바짝 붙어 내려오다 동래 바닷가에서 멈추고 태백산 오른쪽에서 또 하나의 큰 지맥이 나와 소백산, 작성산, 주흘산, 회양산, 청화산, 속리산, 황악산, 덕유산, 지리산 등을 이루고 남해 바닷가에서 멈춘다.
… 옛날에 계림은 ‘군자국’이다 라고 말한 곳이다. 지금은 동경(東京)이라 부르는데 경주의 읍치는 태백산 왼편에서 뻗은 지맥 한가운데 있으니 풍수가가 말하는 용이 휘돌다가 머리를 돌려 처음 일어난 곳을 돌아보는 형국에 해당한다. 서북쪽이 트인 지세로 형국 안을 흐르는 물이 동쪽으로 흘러 큰 강을 이루고 바다로 들어간다.
… 위아래로 수천 년 동안 경상도는 장수와 정승, 공경대부, 문장 잘하고 덕행을 지닌 선비를 비롯하여 공훈을 세우거나 절의를 지킨 사람, 선인(仙人)과 승려, 도사 등을 많이 배출하여 인재의 창고라 일컬어졌다. 우리 조선조에서 선조 임금 이전에 국정을 담당한 사람은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고 문묘에 배향된 네 명의 현자(賢者·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말한다) 역시 경상도 사람이었다.
… 예안과 안동, 순흥, 영천, 예천 등의 고을은 태백산과 소백산 남쪽에 있는데 신령이 서린 복된 땅이다. 큰 산 아래의 평탄한 산지와 넓은 들녘은 밝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흙은 기운과 빛깔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
… 상주 남쪽은 선산(善山·지금의 구미)으로 상주보다 더욱 밝고 빼어나다. 속담에 ‘조선 인재의 절반이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는 절반이 선산에서 난다’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학문에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 술사(術士)가 우리나라에 인재가 많은 것을 꺼려서 군졸을 시켜 고을 뒤편의 산맥을 끊고 벌겋게 달아오른 숯으로 뜸질을 하게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으니 이때부터 땅이 쇠잔하여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
충북 괴산과 함께 선유동 계곡이 이어지는 경북 문경에도 절경이 많다. 이 정자는 학천정이다. 학이 마신 샘물이라는 뜻이다 |
“함경도 안변부 철령에서 나온 산맥 한 줄기가 남쪽으로 500~600리를 뻗어가다가 양주에 이르러 올망졸망한 산이 된다. 이 산줄기가 동북방에서 한양 쪽으로 비스듬히 비집고 들어오다가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 만장봉 바위 봉우리가 된다. 여기에서 서남방을 향해 뻗어가며 조금 끊겼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가 되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된다.
그중에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백악(白岳)이 된다. 풍수가의 말에 따르면 하늘을 찌르는 목성으로 궁성을 주관하는 주산(主山)이다. 한양은 동쪽과 남쪽, 북쪽에 모두 큰 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바닷물이 드나든다. 여러 갈래의 물이 다 모여드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이야말로 한나라 산수의 정신이 다 모이는 곳이다.”
다음은 송도 차례다. 그의 말을 원문대로 인용해 본다.
“임진나루를 건너 장단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개성부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고려의 국도(國都)로서 송악(松岳)이 진산(鎭山)이다. 진산 아래에 만월대가 있으니 ‘송사(宋史)’에서 ‘큰 산에 의지하여 궁전을 지었다’라 한 것이다. 김관의는 《편년통록》에서 (송도를) 금 돼지가 누워 있는 곳이라 하였고 도선은 임금 심은 밭이라 하였다.”
충북 괴산 화양동 계곡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암서재다. |
이별을 앞두고 선종은 진의가 임신한 것을 알고 붉은 활 하나를 주며 ‘사내아이를 낳거든 이것을 가지고 중국으로 찾아오라.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이라 하라’고 했다. 작제건이 성인이 돼 장삿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배가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떨며 삿갓을 던져 길흉을 점쳤다.
그런데 작제건의 삿갓만 물에 가라앉았다. 장사꾼 일행은 식량과 함께 작은 섬에 작제건을 내려놓고 떠났다. 어느 날 동자(童子) 하나가 물속에서 솟구쳐 나와 ‘용왕님이 뵙기를 청한다’고 해 그를 따라갔다. 용궁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요사이 흰 용(龍) 하나가 내 소굴을 빼앗으려 한다’며 도움을 청했다.
작제건이 어떻게 도우면 좋겠느냐고 묻자 노인은 ‘내일 오시(午時)에 바람 불고 비가 오며 파도가 칠 텐데 등이 푸른 쪽이 나고 흰 쪽이 그놈이다’라고 했다. 다음 날 작제건은 싸우는 두 용 가운데 흰 용을 화살로 쏴 맞혔다. 푸른 용은 원래 용왕이었다. 싸움에서 이긴 용왕은 자기 딸을 작제건에게 줘 아내로 삼게 했다.
작제건이 아내와 함께 송도로 돌아가자 황해도 염주 태수와 백주의 태수가 재물을 바치고 집을 지어줬다. 작제건이 낳은 아들이 융이고 융이 다시 아들을 낳아 성명을 따로 지어 왕건이라 했으니 사실 그의(왕건)의 성씨는 왕씨가 아니라 당나라 선종 이침의 이씨인 것이다. 참으로 믿기 힘든 설화이다.
문경 주암정이다. 정자를 태운 바위가 마치 배처럼 생겼다. |
이어 여덟 개 산과 더불어 은둔자들이 깃들어 수양하기 좋은 산 네 곳을 지목하고 있다. 북한 쪽의 칠보산, 묘향산과 합천 가야산, 봉화 청량산이다. 이중환은 “예부터 천하의 명산은 승려가 많이 차지했다”며 자신의 기준으로 본 명찰(名刹)을 거론하고 있다. 그가 첫손에 꼽은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이라 평한 영주 부석사다. 무량수전 앞에서 본 소백산맥의 파노라마가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
이중환은 조선 팔도의 많은 산 가운데 가장 생김새가 멋진 산으로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진잠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선택했다. 이 가운데 개성의 오관산은 서쪽의 박연폭포, 동쪽의 화담을 갖추고 바다로는 교동도와 강화도가 바다를 막고 있어 천하의 명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한양의 삼각산은 천상의 수도이자 훌륭한 도읍터이긴 하나 1000리 정도 뻗은 기름진 들이 없다는 것이 결점이라고 했다. 계룡산은 웅장함으론 오관산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함으로는 삼각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서북쪽에 매우 크고 깊은 용연(龍淵)이 오관산이나 삼각산에는 없는 것이라고 지목했다.
그 외에 이중환이 꼽은 ‘잘생긴 산’은 뜻밖에도 춘천의 청평산, 원주의 치악산, 공주의 무성산, 해미의 가야산, 남포의 성주산, 변산이 있다. 그는 “이 산들은 크게는 도읍이 될 만하며 작게는 고매한 사람과 은거하려는 선비가 숨어 살 만한 땅”이라고 했다.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되고 싶다면 고려해 볼만한 말이다.
선유동 계곡 속에 숨어 있는 작은 폭포다. 이곳은 찾는 이가 적어 자연이 잘 보존돼 있다. |
건설이나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중환이 꼽은 ‘강가의 주거지’편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가 꼽은 팔도에서 으뜸가는 강가의 주거지는 평양이며, 두 번째가 강원도 춘천의 우두촌이다. 세 번째가 여주 읍치로 더 구체적으로는 신륵사 부근이다. 반면 한양의 강촌 마을은 좋지 않다고 했다.
‘시냇가 주거지’로 첫손에 꼽히는 곳은 경북 안동의 하회이며, 두 번째가 도산서당이 있는 도산이다. 그는 “시냇가의 주거지는 오직 이 두 곳이 참으로 나라 안에서 첫째간다. 땅이 명사(名士·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로 인해 귀해진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다음이 청송읍 시냇물 하류가 황수와 합류하는 곳으로 학봉 김성일의 고택이 있는 반변천, 임하천 상류, 영천 서북쪽 순흥 부근을 흐르는 죽계가 거론됐다. 이중환은 “소백산과 태백산 아래, 황수 유역은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라 했는데 이곳은 남사고(南師古)의 십승지(十勝地)와 상당 부분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