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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으로 망친 나라 베네수엘라 국가마비 현장 -변호사·교사 출신 여성들 몸 팔고, 주부들은 모유·머리카락을 팔았다

이강기 2019. 3. 11. 08:33

병원까지 대정전 나흘… 환자들이 죽고 있다

조선일보
  • 안상현 특파원
    • 입력 2019.03.11 03:00

    [베네수엘라 국가마비 현장]
    수도 포함 25개주 중 24개주 정전 탓에 병원 환자 최소 15명 사망
    지하철 멈추고 공장·학교 문 닫아… 냉장고에 아껴둔 식량도 썩어

    안상현 특파원
    안상현 특파원
    지난 8일 오전 11시(이하 현지 시각) 콜롬비아의 국경 도시 쿠쿠타의 에라스모 메오스 대학병원 1층 응급실. 100여명의 환자 사이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베네수엘라인 브라얀 헤수스 삼브라노 모레노(28)씨는 절단된 두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었다. 그는 정전(停電)으로 두 손을 잃었다고 했다. 모레노씨는 "전기가 나가서 전선을 쥐고 살펴보던 도중 갑자기 전류가 다시 흘러 팔꿈치 아래쪽으로 두 손이 다 탔다"고 했다. 베네수엘라의 병원에서 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진통제와 항생제가 없었다. 결국 두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나흘 전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이 병원 응급실에 있는 환자 100여명 중 절반가량이 모레노씨처럼 국경을 넘어온 베네수엘라인이었다.

    2층 산부인과 분만실로 올라가니 대기 중인 만삭의 여성 수십 명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직원이 "베네수엘라에서 건너온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절반이 손을 들었다. 임신부 중에는 영양실조에 걸려 온 사람도 있었다. 한 임신부는 "국공립 병원에서도 돈을 내지 않으면 진료는커녕 약도 주지 않는다"면서 "지금은 정전 때문에 병원이 아예 문을 닫아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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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비아 산부인과 "베네수엘라서 온 사람 손들어보세요" - 8일(현지 시각) 베네수엘라에 인접한 콜롬비아 국경 도시 쿠쿠타 시내 에라스모 메오스 대학병원 2층 분만실 앞 복도에서 병원 직원(오른쪽 가운데 빨간색 옷)이 "베네수엘라에서 온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여성 상당수가 손을 들고 있다. 베네수엘라 여성들은 "약도 없는 데다 정전으로 병원이 문을 닫아 콜롬비아로 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안상현 특파원
    10일 베네수엘라는 나라 전체가 나흘째 '블랙 아웃(Blackout)'에 빠져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 7일 오후부터 수도 카라카스를 비롯해 총 25개 주 중 24개 주에서 정전이 발생해 아직도 복구되지 않고 있다. 전기와 통신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기본 인프라다. 이것이 모두 작동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베네수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전"이라며 "정치적 혼란과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3000만명의 베네수엘라 국민이 이제는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정전으로 인해 수도 카라카스에선 지하철이 운행을 멈췄고, 신호등 불조차 들어오지 않는 도로에는 차들이 뒤엉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교통이 막힌 시민들은 몇 시간씩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기업과 관공서, 공장, 학교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인터넷 관련 비정부 기구 넷블록스에 따르면 정전으로 베네수엘라 내 무선통신 네트워크 96%가 먹통이 된 것으로 추산됐다. 정전 발생 이틀째부터는 보관하던 식량이 냉장고에서 썩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식량을 꺼내 먹고 있다.

    베네수엘라 난민 현황
    베네수엘라 병원에선 중환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의사들이 수술은커녕 출근조차 제대로 할 수 없고, 의료 장비들이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일 현재까지 최소 15명의 환자가 정전 여파로 목숨을 잃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확인된 사망자 중 13명은 신장병을 앓던 사람들이다. 정전으로 투석기가 멈추면서 투석을 받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베네수엘라는 풍부한 수자원과 석유 매장량을 갖추고 있는 나라이다. 이처럼 대규모 정전이 장기간 지속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 수 있다. 외신들은 "정부·공기업이 전력 시스템을 제대로 유지·관리하지 않은 탓"이라고 했다. 이번 대정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베네수엘라 전체 전력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엘 구리' 수력발전소의 고장이다. 관리·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가 누적돼 오다 통째로 고장이 났다. 전력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화력발전소도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세계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 화력 발전에 필요한 경유조차 없다는 얘기"라고 했다.

    대(代)를 이어 집권한 차베스와 마두로 좌파 정권은 국영 석유기업에서 전문가들을 내쫓고 측근과 군부 인사들을 요직에 앉혔다. 비전문가들이 장기간 운영을 맡은 국영 석유기업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원유 생산량이 크게 떨어졌고, 그나마 생산한 원유조차 제대로 정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두로 정권은 이번 정전 사태를 "미국의 사이버 공격과 야권의 사보타주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국가 기능은 무너졌지만 마두로 정권은 해외의 식량·의약품 원조를 틀어막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정부 전복 음모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베네수엘라 국민은 국경을 넘어 콜롬비아와 페루·칠레·에콰도르 등으로 탈출하고 있다. 최근 5년새 베네수엘라 국민의 11%인 340만명이 이미 나라를 탈출했다.

    9일(현지 시각) 대규모 정전으로 나라 전체가 사실상 '블랙 아웃' 상태에 빠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시내가 어둠으로 뒤덮인 가운데 도로 위의 차량만 불빛을 밝히고 있다.
    베네수엘라 수도, 불빛은 車 라이트뿐 - 9일(현지 시각) 대규모 정전으로 나라 전체가 사실상 '블랙 아웃' 상태에 빠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시내가 어둠으로 뒤덮인 가운데 도로 위의 차량만 불빛을 밝히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8일 카라카스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서는 정전 때문에 입·출국 수속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람들이 공항 바닥에 앉아 수속을 기다리고 있다.
    공항선 수동으로 입출국 체크인 - 8일 카라카스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서는 정전 때문에 입·출국 수속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람들이 공항 바닥에 앉아 수속을 기다리고 있다. 공항뿐 아니라 기업과 관공서, 공장, 학교, 병원 등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콜롬비아는 그중 가장 많은 110만명의 베네수엘라 난민이 몰려든 나라이다. 접경 도시 쿠쿠타는 매일 3만~4만명의 베네수엘라인들이 생필품 구입 등을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난민 피난소에서 만난 세사르 니에포(32)씨는 수도 카라카스에서부터 다섯 아이를 데리고 15시간 걸려 지난 5일 도착했다고 했다. 광고기획자로 일했다는 그는 "넷째 호세에게 길거리에서 파는 우유를 사먹였는데 석회를 섞은 우유였다"며 "10㎏이던 아이 몸무게가 3개월 만에 3㎏이 됐는데도 치료할 곳이 없어서 탈출해왔다"고 말했다.

    국경 다리 '시몬 볼리바르' 주변에는 1~2㎞에 이르는 수백 개의 불법 노점에서 베네수엘라인들이 온갖 잡동사니들을 팔고 있었다. 국경의 타치라강을 막 건너온 한 30대 베네수엘라 부부가 메고 온 자루 안을 들여다보니 냉장고 모터에서 떼온 철제 부품 등이 담겨 있었다. 남편 카를(35)씨는 "원래 제빵사인데 밀가루를 구할 수 없어 고물 장사를 시작했다"며 "고철 판 돈으로 음식을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변호사·교사 출신 여성들 몸 팔고, 주부들은 모유·머리카락을 팔았다

      입력 2019.03.11 03:00

    콜롬비아서 일자리 구하러 가면 물 끼얹으며 "얼씬대지 마라"

    경제가 파탄 난 베네수엘라에서 탈출해 온 사람들은 외국 땅에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그야말로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고 있었다. 내다 팔 물건조차 없는 이들이 이국 땅에서 팔고 있는 것은 휴지 조각이 된 자국 지폐로 만든 공예품과 몸(性), 머리카락이었다.

    지난 7일 베네수엘라와의 접경 도시 콜롬비아 쿠쿠타 시청 인근에서 만난 베네수엘라 소년 프란시스코(12)는 노점을 차려놓고 베네수엘라 화폐를 직접 접어 만든 바구니와 핸드백, 지갑 등을 팔고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지폐 공예품' 만드는 법을 배웠다"면서 "100볼리바르(과거 1만원) 구화폐 650장으로 만든 핸드백은 3만5000콜롬비아페소(1만2000원)"라고 했다. 재료인 지폐는 1㎏(약 1000장)에 1만페소(3500원)를 주고 산다고 했다. 연(年) 170만%에 달하는 초(超)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종잇장만도 못해진 것이다.

    유흥가인 셉티마 거리에선 몸을 팔려는 베네수엘라 여성 수백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본지 인터뷰에 응한 안드레냐(20)씨는 "베네수엘라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다 두 달 전 넘어왔다"며 "고향에선 어떤 직업이든 월급으로 소고기 500g밖에 못 사지만, 이 일은 한 번에 3만~4만페소를 받으니 숙식은 해결된다"고 했다. 베네수엘라에선 변호사나 경찰, 교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까지 자녀 등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미는 물론 미국, 스페인까지 성매매를 하러 떠나고 있다.

    또 다른 베네수엘라 여성 웬디(27)씨는 "청소부나 가게 점원 같은 일을 하려 해도 콜롬비아 사람들이 받아주질 않았다"며 "'베네코(베네수엘라인을 낮춰 부르는 말)'라며 물을 끼얹기도 했다"고 울먹였다. 콜롬비아 가게 주인들은 마치 짐승을 쫓아내듯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가게 앞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길거리에 "카베요(머리카락)!"를 외치는 베네수엘라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가발의 원료로 머리카락을 파는 것이다. 길이와 상태에 따라 3만~10만페소까지 받는다고 했다.

    주부들은 결혼반지, 은수저 같은 가보를 다 내다 팔다 못해 모유를 짜서 외국 산모들에게 팔고 있다. 일부 베네수엘라인은 고철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이웃이나 점포에서 훔쳐 장물을 내다 팔면서 범죄율이 치솟고 있다. 심지어 일부 베네수엘라 부모들은 절망 속에서 어린 자녀 중 일부를 콜롬비아인 등에게 팔아넘기기도 한다고 최근 BBC는 보도했다.


    똑같이 자원으로 먹고 사는데… 리더십이 뒤바꾼 '콜롬비아·베네수엘라의 운명'

    조선일보
  • 배준용 기자
    • 입력 2019.03.11 03:00

    콜롬비아 피란민 받던 베네수엘라… 이젠 콜롬비아 향해 난민 행렬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GDP 성장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는 모두 과거 스페인 식민지이자 산유국으로 광물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체제였다. 10여년 전만 해도 콜롬비아가 베네수엘라에 손을 벌리던 처지였다. 지금은 정반대다. 강폭 100m도 안 되는 '타치라' 강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현재는, 국가가 리더십과 체제를 잘못 선택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난민들은 쿠쿠타시와 같은 콜롬비아 국경 사회가 책임지고 있다. 지난 7일 오전 8시 국경 인근 이주민 피난소 '카사 데 파소 디비나 프로비덴시아'에선 약 2000명의 베네수엘라인이 초코라테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이곳에선 매일 6000 ~8000명의 아침·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자원봉사를 하는 콜롬비아인 파비올라(45)씨는 "아침밥을 먹으려 2~3시간 걸려 국경을 오가는 베네수엘라인도 많다"고 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콜롬비아 사람들이 타치라 강을 건넜다. 반세기나 이어진 내전으로 26만명이 사망하고 690만명이 국외로 피란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다. 콜롬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탈출했던 곳이 남미 최대의 부국(富國)인 베네수엘라였다. 세사르 오마르 로하스 알라자(61) 쿠쿠타 시장은 "불과 10년 새 처지가 뒤바뀌었다"며 "과거 베네수엘라로 건너갔다가 최근 다시 쿠쿠타로 돌아온 콜롬비아인만 7만명"이라고 말했다.

    콜롬비아는 좌파 정권이 득세한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우파 정권이 계속 집권하며 복지 포퓰리즘을 거부하고 친시장 개방 정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이 경제난을 겪을 때 콜롬비아는 2.8% 성장했 고, 남미에선 칠레에 이어 두 번째로 OECD에 가입했다.

    베네수엘라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지난 20년간 반미(反美) 좌파 포퓰리스트인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가 연이어 집권했다. 석유 수출만 믿고 국민에게 현금 복지를 남발하다 국가 경제가 완전히 파탄 났다. 차베스 집권 초기인 2004년 18.3%였던 성장률은 지난해 -18% 성장률로 곤두박질쳤다.
       

    Venezuela hit by major blackout

    Pictures | Sat Mar 9, 2019 | 11:30am EST Reuters

    A general view of a neighborhood during a blackout in Caracas, Venezuela, March 8. REUTERS/Manaure Quintero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11/20190311001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