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韓日협정의 의도적 모호성… 정권·여론따라 50년 '해석 전쟁'

이강기 2019. 7. 19. 09:59

[선우정의 뉴스 저격]

韓日협정의 의도적 모호성… 정권·여론따라 50년 '해석 전쟁'

    입력 2019.07.19 03:01

한일 갈등의 역사적 뿌리… 1965년 조약과 협정 주요 쟁점을 들여다보니

한국은 세계 현대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 전후 독립국 중 세계에서 유일한 '패전국의 식민지'였다는 점이다. 이런 위치로 인해 1945년 8월 15일 2차 대전 종전과 동시에 해방을 맞는 행운을 얻었다. 다른 식민지는 종전 후 지배국과의 교섭 또는 전쟁을 거쳐 해방됐다. 인도와 인도네시아가 해방된 것은 각각 1947년과 1949년이다. 불운도 따랐다. 다른 식민지는 독립 후 전후(戰後) 청산 과정에서 지배국의 승전국(연합국) 지위를 계승했으나 한국은 얻지 못했다. 이 불운이 국교 정상화를 위한 1965년 한·일 조약과 협정은 물론 이후 양국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강제징용 판결을 둘러싼 한·일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전후 배상≠식민지 배상

아시아 지역의 2차 대전은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청산됐다. 48개 국가가 서명했다. 배상청구권은 '(일본에) 점령됐거나 손해를 입은 승전국'에 한정됐다.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다가 전쟁터가 된 아시아 국가가 권리를 얻었다. 필리핀(5억5000만달러)·인도네시아(2억2308만달러)·미얀마(2억달러)·베트남(6560만달러)이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캄보디아·라오스 등은 배상 대신 경제 협력을 택해 실리를 더 챙겼다.

중요한 것은 강화조약의 배상권이 '전쟁 배상'이지 '식민지 배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요 승전국이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전후 질서에서 식민 지배 책임론은 봉인됐다. 예컨대 필리핀은 옛 지배국인 미국, 미얀마는 영국에 배상은 물론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도 받지 못했다. 이 점에선 주요 승전국과 패전국 일본의 이해가 일치했다. 이런 논리는 한국에도 적용됐다. 승전국이 강화조약에서 한국에 부여한 권리는 재정·민사적 채권을 변제받는 재산청구권에 국한됐다. 징용 문제로 말하면 강제 노역에 대한 피해 배상이 아니라 미지급 임금을 청산하는 수준이다. 일본은 한국과의 협상 전 과정에서 자신의 의무를 여기에 한정했다.

'의도적 모호성'이 일으킨 갈등

강화조약에 따라 한국 정부는 전략을 크게 수정했다. '대일 배상 요구'를 '대일 8항목 요구'로 이름을 바꾸고 내용에서 배상 항목을 삭제했다. '전쟁에 기인한 인적·물적 피해' '저가 수탈에 의한 손해' 항목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서명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약에 구속되지 않았으나 일단 국제 정치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제 협상에서 한국은 배상 명분을 계속 주장했다. '청구권 변제는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상징(2차 회담)'이기 때문에 '피징용자 전반에 대한 보상을 요구(5차 회담)'한 것이다. 특히 징용 보상은 대일 요구 8개 항 중 5항에 적시했다. 역설적으로 이 항목('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은 훗날 한·일 역사 분쟁에서 '징용 피해 보상은 한·일 협정으로 끝났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됐다.

1965년 한, 일 조약과 협정의 쟁점 조항 정리 그래픽

일본은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합법이고 징용 역시 법률(국가총동원령)에 따른 합법 행위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주장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일본에 배상 의무는 없다. ②강화조약에 따른 재산청구권 변제 금액은 7000만달러를 넘을 수 없다. ③한국이 청구권 대신 경제원조 명목을 수용하면 상당한 금액을 제공할 수 있다.

안보적, 경제적 이유로 국교 정상화가 시급했던 양국 정부는 절충을 택했다. 협정의 문구를 중의적으로 흐리고 해석은 각자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의도적 모호성(intentional ambiguity)'은 국제 관계에서 정리되지 않은 역사를 다룰 때 흔히 적용된다. 이로 인해 두고두고 해석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의 한·일 갈등도 그 연장선에 있다.

양국 정부의 '해석론적 곡예'

과거사를 정리한 조항은 한·일 기본조약 2조다. 한국에선 '경술국치'로 부르는 병합조약과 그 이전 한·일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에 대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한국은 '이미 무효'의 의미를 '체결 당시부터 불법이고 무효'라고, 일본은 '체결 당시엔 합법이었지만 국교 정상화 시점에선 무효'라고 해석했다.

청구권 협정은 이름 자체를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정해 양국의 주장을 뒤섞었다. '일본이 무상 3억달러와 차관 2억달러를 한국에 제공한다'는 1조와 '국가와 그 국민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2조에 의도적으로 연관성을 두지 않았다. 협정 문구만 보면 일본은 이유 없이 한국에 돈을 줬고, 한국은 이유 없이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이후 양국 정부는 국민 여론에 따라 조항을 제각각 해석했다. 합법 지배를 주장하는 일본 정부는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고 했다. 이런 입장은 이후 "식민지 배상은 협정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주장에 역이용되고 있다. 한국 대법원이 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근거로 삼은 것도 일본의 이런 태도였다.

반면 불법 지배를 주장하는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배상적 성격의 자금'이라고 했다. 이런 입장은 이후 "식민지 배상은 협정으로 끝났다"는 주장에 역이용되고 있다. "징용 보상은 협정에 반영됐다"는 2005년 노무현 정권의 결정도 여기에 근거한다. 협정의 '의도적 모호성'과 여론에 휘둘린 양국 정부의 '해석론적 곡예'가 말빚으로 꼬이면서 각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한일 조약엔 일본 사과 문구 없었지만… 무라야마 등 총리들이 3차례 공식 사죄]

조약 이후에도 과거사 지속 논의
日, 원폭 피해자 위해 기금 내고 사할린 한인은 양국이 함께 지원

일본은 "협정으로 과거 문제가 일괄 해결됐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가 한국민의 감정적 반발을 일으켜 왔으나 사실 한·일 양국은 꾸준히 '1965년 체제'의 불완전성을 보완해 왔다.

1965년 조약과 협정에는 식민지 배상은 물론 사죄 문구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식민지 합법성을 주장하는 강대국 논리와 더불어 국가 간 사죄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1950년대에 이루어진 필리핀 등과의 전쟁배상 협정에도 일본의 사죄 표명은 없었다. 일본이 공식 사죄한 것은 1972년 중·일 공동성명이 처음이다. 대신 중국은 전쟁배상권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중국은 경제협력(ODA) 방식으로 방향을 틀어 이후 40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3조6500억엔(현재 환율로 330억달러)을 받아냈다. 밖으론 대인(大人) 행세하면서 안에선 챙기는 중국다운 방식이었다.

한국에 대한 사죄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총리의 담화와 선언 형식으로 보완됐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 2010년 간 나오토 담화다. 조약에 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옛 지배국에 세 차례 공식 사죄를 받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협정 이후 발화된 과거사 쟁점에 대한 지원과 논의도 이루어졌다. 일본은 1990년대 재한(在韓) 원폭 피해자 지원을 위해 40억엔 기금을 제공했다. 사할린 한인 문제에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한인의 영주 귀국을 지원하고 요양원과 아파트를 건설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선 1993년 일본 정부가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일본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갈등이 재발화했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명박 정부의 외교 갈등, 박근혜 정부의 합의, 문재인 정부의 합의 부정으로 일진일퇴하면서 한·일 관계는 물론 국내 정치에도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8/20190718034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