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評, 社說, 談論, 主張, 인터뷰

프라하의 한글, 그리고 공산주의 박물관

이강기 2019. 10. 10. 09:04

[김도연 칼럼]

프라하의 한글, 그리고 공산주의 박물관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2019-10-10 03:00수정 2019-10-10 03:00


프라하 국제공항에서 만난 반가운 한글 
동유럽 시장 개척한 기업들의 땀방울 덕분 
한국은 40여 년간 세계무대서 기적 낳아 
체코는 같은 기간 공산주의 이념에 지배 
박물관에는 꿈 현실 그리고 ‘악몽’을 기록 
한반도 절반이 아직도 낡은 이념에 묶여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어제는 한글이 태어난 지 573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국경일 또는 공휴일은 누구나 기다리는 날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글날은 각별하다.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등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름 자체에 무거운 느낌이 없다. 문자를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대단히 경이로운 것이다. 게다가 민초(民草)들의 어려움을 헤아린 최고 권력자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추진해 성사시킨 일은 인류사에서 세종대왕뿐이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ㄱ, ㄷ 같은 기본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습을 본뜬 것인데, 여기에 획을 더해 ㅋ, ㄲ 그리고 ㅌ, ㄸ으로 동일 계열 소리를 나타낸 것은 창의성의 극치다. 그리고 ㅏ, ㅑ, ㅒ 등의 모음은 특히 컴퓨터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문자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한글은 인류 문화의 보석 같은 존재다. 실제로 일본의 노마 히데키 교수는 2010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에서 한글을 ‘문자라는 기적’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한글은 갑오개혁 후 독립신문이 나오면서야 일상적인 공용문자로 쓰이게 되었으니, 이는 훈민정음 반포 450년 후의 일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스스로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종종 소홀히 하는 듯싶다. 

외국에서 한글을 만나면 당연히 가슴 뿌듯해진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1970년대 후반, 베르사유 궁전 안내판에 어느 날 추가된 ‘화장실’이란 한글에 감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40여 년 전 일이다. 그리고 최근 체코 여행에서 같은 감격을 느끼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프라하 국제공항의 입국, 출국, 그리고 수하물 찾는 곳 등 수많은 안내판들은 체코어, 영어, 러시아어, 한글 이렇게 네 나라 언어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이런 안내판이 언제부터 걸렸는지 모르지만, 이는 우리 기업인들이 동유럽 시장 개척에 힘을 쏟으며 흘렸던 수많은 땀방울 덕택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국부(國富)를 쌓고 국격(國格)을 높이는 기업인들을 좀 더 존경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지난 40여 년간 대한민국은 세계무대에서 또 다른 기적을 이루었다.



18세기 중반에 지금의 체코,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영역을 모두 통치했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스로의 제국에서 산업이 앞서 있고 땅도 비옥한 체코가 없다면 남는 것은 의미 없는 귀족들뿐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프라하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고 그 후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프라하는 동유럽의 색다른 문화와 전통을 찾아온 각국 사람들로 항상 붐비고 있다. 


관광객들은 프라하에서 1000여 년 전에 세워진 성(城)이나 중세 기술과 예술의 결정체인 시계탑 등을 찾는다. 그리고 다양한 박물관을 방문하는 일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중에서 필자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곳은 ‘공산주의 박물관’이었다. 이곳은 1948년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가 1990년 붕괴되기까지의 체코 현대사를 보여 주고 있는데, 첫 전시실에는 그 시대를 압축해 표현한 꿈, 현실 그리고 악몽의 세 단어만이 벽에 기록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공산주의의 꿈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 분야가 당연히 강제로 일관했다. 체코의 당시 현실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커뮤니즘(Homo communism)’을 지향하면서, 전국적으로 동시에 200만 명이나 동원되어 집단체조를 하곤 했다. 그리고 한 해에 수확할 농산물량만이 아니라 처형해야 할 사형수 수까지 공산당이 정하는 획일적 경제, 사회 정책이 시행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으며, 서방과의 국경에는 3000V 이상의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탈출을 막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자료들은 공산주의 40여 년이 결국 체코 국민 모두에게 더할 수 없는 악몽이었다는 메시지를 웅변으로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물관을 나서면서 다가온 안타까움은 지금도 우리 한반도의 절반이 공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울러 대한민국에 혹시 아직까지도 이런 꿈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면 프라하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는 이미 박제화돼 박물관에 전시된 낡은 이념이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