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는 없고 ‘위아래’는 확실한 새로운 신분사회가 온다
정희진
한겨레
2019-10-23 21:12
[‘조국, 그 이후’ 연속기고]
돈과 영어, 학벌 지닌 서울 사람들
평균의 한국인과 정체성 공유 안해
국경 초월한 새로운 신분사회 형성
학벌·자산·젠더 문제
진보와 보수 엘리트 큰 차이 없어
기존의 전선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돈과 영어, 학벌 지닌 서울 사람들
평균의 한국인과 정체성 공유 안해
국경 초월한 새로운 신분사회 형성
학벌·자산·젠더 문제
진보와 보수 엘리트 큰 차이 없어
기존의 전선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정희진/여성학 연구자
유명인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 보도에서 진위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 거론되는 것만으로 ‘죗값’ 이상을 치르게 된다. 지난 2개월, 조국 교수와 그의 가족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공격 중에는 ‘린치’와 ‘테러’에 가까운 것도 분명히 있었다. 언론과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다.
독자들은 이 글에서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여성주의자의 관점을 기대할지 모른다. 기고를 제안한 <한겨레>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성주의자보다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말하고 싶다. 진보를 대표한다는 어느 방송인이 자기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조국 교수의 배우자를 두고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가 있으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 박정희 시대에도 나온 바 없는 언설이다. ‘진보’의 여성 혐오, 새삼스럽지 않다.
물론 검찰개혁은 중요하다
지금, 검찰개혁이 화두다. 대통령도 엊그제 국회 연설에서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검찰개혁과, 정의·공정·평등 이슈가 연루된 여타의 사회개혁 의제들(교육개혁도 그중 하나다) 가운데 무엇이 중요한지를 두고 논쟁하는 양상도 빚어진다. 검찰 문제와 교육을 위시한 사회 불평등 문제는 각각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과, 최근의 글로벌 자본주의화에 깊숙이 연루된 사안이다. 우선순위를 둘러싼 논의가 세대 갈등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대에 따라 원하는 바가 다를 뿐이니, 어느 하나가 국가적 대의인 양 택일을 강요해선 안 될 일이다.
지금의 검찰 조직은 검찰에 대한 문민 통제의 개념이 없었던 독재 시대의 적산(敵産)이다. 미국에서는 검사가 피의자를 기소할 때 자신을 “피플”(people)이라고 표기한다. 국민의 대표라는 뜻이다. 검사는 법치국가에서 유일하게 국가와 국민을 대표해 개인을 기소할 수 있는 주권적 자아다. 한국 검찰의 자기 정체성은 무엇일까? “피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과거 ‘언터처블’이었던 군부의 권력을 넘겨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검찰 개혁”과 “조국 지지”란 슬로건에 일정 부분 공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검찰 문제가 근대국가 건설 초기부터 내려온 ‘묵은 과제’라면, 교육·노동 문제는 비교적 근래에 제기된 ‘최신 과제’다. 금융과 유통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구조화된 사회를 빚어냈다. ‘고용 없는 성장’과 함께 계층 이동의 통로는 차단되었다. 이런 시대에 김연아 선수 같은 사례는 특출한 예외일 뿐, 성실한 금수저(모든 금수저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넘사벽’이 된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즉 구조와 공동체가 개인을 방치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개인 능력의 최고치를 발휘해야 하는 극한의 각자도생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쟁, 힐링, 우울이 순환하고, 이 악무한의 순환에 지친 이들은 분노한다.
조국 사태, 새로운 신분사회의 진통
동아시아 연구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그의 책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에서 삼국 네티즌 전쟁의 원인이 뭔가 대단한 게 아니라, ‘실업으로 인한 가처분 시간의 증가’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 역시 21세기 한국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촛불시위가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이라기보다, 더이상 병역이나 노동의 주체로서 사회적 멤버십을 획득할 수 없게 된 개인들의 자기 존재 확인에 가깝다고 진단한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개인은 계몽주의 시대의 해방된 주체가 아니다. ‘고립되고 잉여화된 개인들’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국적 불문의 공동체가 미디어를 무기 삼아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고립된 잉여들이 상대하는 경쟁자는 ‘글로벌 시티즌’이다. 새롭게 도래한 이 신분사회에서 우리에게 진정 절실한 것은 지금의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와 한국 사회가 당면한 현실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일이다.
나는 이번 조국 사태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신분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겪게 된 진통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후반 ‘20 대 80의 사회’를 경고한 <세계화의 덫>이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은 빈부격차의 고착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20 대 80’이 아닌, ‘1%와 그 나머지’의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1%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이런 사회가 혁명을 겪지 않고 버티려면, 지그문트 바우만의 진단대로 99%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다이소’(초저가 소비재 판매점)가 있어야 한다. 여기엔 보통의 사람들이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SNS), 신흥 종교에 가까운 셀럽(과 지지자) 문화도 포함된다.
우리가 조국을 욕망했다
확대되는 격차는 자산·소득의 양극화는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의 양극화, 성격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 압도적 경제력을 갖춘 오늘의 최상층은 외모, 학벌, 기호, 집안, 성격, 지성, 인맥 등 모든 것을 소유한다. 10여년 전 등장한 ‘엄친아’ 담론은 이런 현상의 전조였다.
이미 25년 전 페미니스트 도시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국제사회의 주도권은 국가가 아니라 세계 도시(global cities)로 이동 중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시티(즌)는 국경을 초월한 부자와 엘리트들의 공동체다. 돈과 영어, 학벌을 갖춘 서울 사람들은 평균 한국인들과 국민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뉴욕과 도쿄의 상층 시민들의 문화에 익숙하고 그들과 같은 시간대를 산다.
내 주변의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자녀를 외국에서 교육시키거나 고급 대안학교에 보낸다. ‘강남좌파’는 여기에 정치적 올바름과 인권 의식까지 갖춘 ‘반가운’ 존재들이다. 조국 교수는 본의든 아니든, 사실이든 아니든, 그 반가운 존재의 상징이었고 우리는 그를 대한민국의 간판으로 욕망했다. 내가 ‘조국’이 될 수는 없지만, 그가 우리를 대표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 엘리트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고, 그것이 조국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 그들은 젠더 문제, 학벌주의, 자산 증식 등에 관한 한, 의식과 삶의 양 측면에서 보수 엘리트와 큰 차이가 없다. 한국의 보수는 북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분단 체제의 부산물일 뿐 정치 세력이 아니다. 한국의 진보는 민주주의 세력을 의미한다기보다 근대사회가 형성되던 당시의 중상주의(발전주의)자들에 가깝다. 여기에 피식민 경험으로 인한 콤플렉스, 부국강병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국가주의적 경향 역시 강하다. 아이티(IT) 산업에 대한 좌우를 초월한 열광, 그에 대한 성찰의 부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좌우는 없어도, 위아래는 확실한
“남한에는 좌우는 없지만 위아래는 확실하다.” 영화 <공조>에 나오는 대사다. ‘팩트’라고 생각한다. 조국 사태를 지켜보며 고통스럽게 확인한 사실 역시 한국 사회에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보수, 좌/우가 없다는 것이다.
좌우 대립은 위아래의 격차를 줄이려는 정치적 경쟁의 산물이다. 그런 경쟁은 한국 정치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국 정치는 실체 없는 좌/우가 맞서며 갈등해온 가상현실에 가까웠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존의 진보/보수 전선은 해체, 재구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붙들고 싸워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4377.html?_fr=mt2#csidxb276458d4cae1ea980b2692d0f8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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