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산증인이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년 365일 중 280일을 해외 곳곳을 누비며 ‘세계경영’을 선도했다. 1990년대 중반 대우그룹의 해외 고용인력이 15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다.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지구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가 1989년 펴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경영인이 쓴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100만 부 이상 팔렸다. 동아일보DB
대우그룹 최연소 임원으로 김 전 회장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백기승 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은 1990년대 초 김 전 회장으로부터 대우의 경영철학을 표현할 문구를 찾으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1967년 대우실업을 설립한 이후 김 전 회장의 시선은 늘 해외 수출에 있었다. 당시 회의에서 ‘세계경영’이란 문구가 나왔다. 백 전 원장은 “그 얘기를 들으시곤 ‘바로 그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고 전했다. 이어 “김 전 회장을 독선적 경영인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직원들에게 늘 열려 있었다”며 “인사를 단행할 때에도 늘 대상자의 마음을 살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 전 회장과 대우는 한국의 경제성장 신화 그 자체였다. 자원도 기술도 없던 한국은 차입을 통해 중화학공업에 투자하고 수출로 급속히 성장했다. 대우도 그랬다. 김 전 회장은 서울 충무로에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직원 5명,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만들었다. 업종은 수출. 셔츠와 내의류를 동남아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김 전 회장의 타고난 영업능력으로 대우는 1년 만에 대통령표창을 받을 만큼 성장했다. 수출로 번 돈은 한국기계공업, 옥포조선, 새한자동차 등 제조업 인수합병에 쓰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른 한국은 세계무대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김 전 회장이 1989년 펴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이 같은 대한민국의 자신감을 반영했다. 1990년대 대우는 대한민국의 자신감을 자부심으로 끌어올렸다. ‘세계경영’을 앞세운 김 전 회장은 1년 365일 중 280일을 해외에 체류할 정도로 폴란드, 헝가리, 중국, 베트남 등지로 뻗어나갔다. 대우의 해외 고용인력은 1993년 2만2000명에서 1998년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 해외 도피의 나락으로
한국도 대우도 1997년 외환위기 앞에서 맥없이 당했다. 수출을 하려면 수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원-달러 환율이 두 배 가까이 오르자 빚더미에 앉은 꼴이 됐다. 게다가 대우는 차입경영에 의존했다. 금리가 30% 이상 뛰자 속수무책으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그는 1998년 초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으로 ‘500억 달러 무역흑자론’을 내걸었다. 대우그룹 출신인 심형준 김앤장 고문은 “원화가치가 절하됐다는 것은 한국에 수출경쟁력이 생겼다는 의미도 된다. 김 전 회장은 수출을 확대해 외화를 벌어들여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하지만 당시 경제관료들은 한국 기업의 부채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가이드라인에 충실해 김 전 회장과 충돌을 빚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우그룹 전 임원은 “당시 청와대에서 경제수석 등과 큰 소리로 부딪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우자동차만 매각하면 다른 계열사는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여러 차례 “내가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았더라면 경제관료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우 해체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직원들에게 말해왔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이 해체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차입을 통한 과잉 투자가 외환위기 충격을 가져온 주범이라는 시각도 여전히 맞서고 있다.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중국 옌타이에서 열린 자동차부품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종적을 감췄다. 외환위기에 대한 대우 책임론이 거세지고 검찰이 수사에 나설 기미가 보이자 잠적한 것이다. 2005년 한국에 돌아온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 청년에 대한 애정
김 전 회장은 대우 회장 시절부터 전문경영인을 자처했다. 회사를 2, 3세에게 승계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여전히 대우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사적으로 ‘오너’의 지위를 남용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1990년 당시 23세이던 장남 선재 씨는 미국에 온 어머니를 공항으로 모시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대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은 가족 일에 회사 직원을 동원하는 일을 멀리 했다. 사적인 일은 철저하게 가족들이 해결하려 했다”고 전했다.
청년들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대우는 199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취업이 어려운 이들의 고향으로 통했다. 직접 면접도 보며 이들의 진취적인 면모를 북돋워 세계경영을 이끄는 주역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2008년 사면 이후 주력한 일도 청년양성 사업이었다. 주로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며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 청년사업가)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운영하는 GYBM은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취업이나 창업을 하려는 청년들을 모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대우그룹 신입사원을 뽑듯 창업의지와 도전정신이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해 교육하는, 이른바 ‘김우중 사관학교’다. 연간 20, 30대 청년 200여 명이 새로 선발돼 동남아 현지에서 교육받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건강이 좀 나아지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았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2년간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청년 교육을 시작했고…. 내가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세상에 흔적을 잘 남긴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도전정신을 주문하기에 앞서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외국에 나가 보면 대한민국 사람처럼 똑똑한 사람이 없다. 청년들을 나무라기 전에 기성세대들이 기회를 만들어 줬는지 생각해야 한다. 교육을 하다 보면 처음에 꿈이 없던 학생들이 3개월만 지나면 스스로 변하는 걸 느낀다. 우리가 봐도 눈빛이 달라진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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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화의 주역이었지만 압축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중앙포토]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 발전을 이끈 거목이자, ‘세계 경영’을 주창했던 글로벌 경영인이었다. 다른 대기업들이 일제강점기 이후 불하(拂下) 자산으로 성장했던 것과 달리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1960년대 산업화 이후 대규모 기업집단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단돈 500만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해 대우그룹을 자산 규모 76조원, 재계 순위 2위(1998년)까지 키워냈지만 외환위기 이후 40조원 넘는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중 분해됐다. 1999년 중국으로 떠나 2005년 귀국하기까지 영국·베트남 등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의 1세대 경영인으로 극적인 성공신화와 추락까지 겪은 비운의 인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그는 경기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1967년 서울 충무로에 ‘대우실업’을 세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무역 위주의 사업 확장으로 당시 한국의 주 생산품목이던 섬유·의류 등을 수출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증권·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70년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에 발맞춰 중공업·조선·자동차 등으로 그룹의 외연을 넓혔다.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고, 10여년 만에 현대그룹·삼성그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만든 대우전자는 80년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광진전자공업 등의 인수와 함께 금성(현 LG)·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3대 가전사로 성장했다.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만든 대우자동차는 중동에서 구 소련, 아프리카까지 전세계에 팔리는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이었다.
1988년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서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80년대 후반 소련 붕괴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됐다. 한국기업으론 독보적으로 동유럽, 중동·아프리카·남미 등에 진출했다. 이즈음(89년) 펴낸 책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다. 출간 당시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려 최단기 ‘밀리언 셀러’ 기네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93년엔 ‘세계경영’을 주창하며 그룹의 모체인 무역업은 물론 자동차와 중공업 수출로 큰 성공을 거뒀다.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등 공격적인 사업 스타일로 유명했다. 고집이 셌지만 다른 재벌 창업자들과 달리 전문경영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해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사분규로 대우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1년 반 동안 옥포 조선소에 머물며 현장경영을 지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계경영을 주창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년 중 3분의2를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해외 진출에 공을 들였다. 1990년대 전용기 내에서 회의 중인 김 전 회장의 모습.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외환 위기는 이런 경영 스타일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부채 규모가 눈더미처럼 불어난 상황에서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 경영으로 맞섰지만 자금난과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99년 그룹은 해체됐다. 2000년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회생)에 들어가면서 대우그룹은 사라졌다. 해체 전까지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보유했다. 국내서 10만명, 해외서 25만명을 고용하며 21개 국가에 진출했다. 1998년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이었다.
2005년 귀국 후 검찰에 구속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중앙포토]
2005년 귀국한 뒤엔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2010년부터 글로벌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양성사업에 매진했다. 하노이에서는 전·현직 대우그룹 임직원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에서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을 운영한다. 한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동남아 현지에서 무료로 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했다. 대우그룹 전직 임직원들은 등산모임·골프모임·학술모임·경제 동향 강연을 듣는 대우포럼 등 다양한 소모임에서 교류하고 있다. 손명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이사는 “통상 소모임에 대우 출신 임직원들 60~80여명이 모인다”며 “대우라는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청년 사업가를 양성하거나 해외 진출을 추진하는 중소기업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3월 대우 창업 50주년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 전 회장이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 때가 마지막이 됐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소]
고 김 회장에겐 샐러리맨 성공신화와 한국 무역의 주춧돌이 됐다는 긍정적인 면과 산업화 시대 개발 일변도의 구태 경영이 추락을 자초했다는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일각에선 외환 위기 이후 대우그룹이 ‘희생양’이 됐다며 그를 동정하는 시선도 있지만, ‘세계 경영’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산업화 시대에나 가능했던 후진적 경영 행태였다는 비판도 많다. 문희철·임성빈 기자 report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