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評, 社說, 談論, 主張, 인터뷰

"그래도 선한 사람"과 "냉혈한에 가까운 사람"

이강기 2019. 12. 20. 11:05

[최보식 칼럼]

'文 대통령의 예능 실력'에 환호하는 다수 국민에게

    입력 2019.12.20 03:17

나라가 허물어져도 국민의 절반은 현 정권 지지할 듯
이게 선택한 나라 운명이라면 무슨 수로 막겠나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구내식당에서 직장인들과 점심을 들며 최저임금 문제 등 고충을 들었다고 한다. 다른 언론 매체의 보도를 통해 알았다.

대통령 동정(動靜)은 그 자체로 뉴스 가치가 있다. 특히 이런 이벤트는 언론에서 알아서 잘 포장해준다. 대통령 행사는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조율되지만, 마치 대통령의 '깜짝 방문'으로 참석자들이 어리둥절해하고 그 자리에서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갔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언론 매체는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예의로 "이런 만남은 국민이 계시는 곳에 대통령이 찾아가 애로 사항 등 국민 목소리를 경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코멘트까지 넣어준다. 심지어 청와대 관계자조차 생각 못 했던 그 이상의 행사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도 한다. "다중 시설에서 이런 국민과의 대화를 한 것은 취임 후 이번이 두 번째다. 이런 행보는 국민을 직접 만나 민심을 듣겠다던 대선 후보 시절 약속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은 고용 참사나 경기 침체 같은 최악의 경제 상황을 풀려고 골머리를 썩이는 것보다 이런 식의 민심 소통을 하는 게 점수를 따는 데 훨씬 더 유리하다. 언론 환경도 우호적이고, 이런 효과에 맛 들인 청와대는 부쩍 '소통 예능'을 밀어붙이고 있다. 주인공인 문 대통령도 더욱 실감 연기를 해보려는 것 같다.

독도 구급 헬기 추락 사고 합동 영결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에 대한 방송 보도는 이러했다.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목이 메는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애통해하는 유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다독였습니다. 특히 어린 유가족에겐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잡았습니다….'

이 시점은 울산시장 선거 개입과 청와대 감찰 무마 사건에 대해 대통령의 해명이 있어야 하지 않나, 혹시 대통령도 관련됐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국민들 마음속에 막 피어오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유가족 슬픔을 자기 슬픔처럼 여기는 따뜻한 대통령에게 어떻게 그런 의혹을 제기하겠나.

바로 며칠 전 청와대 회의에서는 문 대통령이 '장발장 부자' 사연도 언급했다.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붙잡혔지만 주인이 용서하고 경찰관은 국밥을 사주고 한 독지가가 20만원을 건네준 휴먼 스토리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언론이 보도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계신다. 대통령이 이를 직접 보고 반응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면 대통령 역할의 모범 사례다.

하지만 대통령은 다른 불편한 사안들에는 이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말랑말랑한 감성적 사안만 채택하지, 국가 존립의 근본과 관련된 국민 불안에는 한 번도 제대로 응답한 적이 없다. 언론 보도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많은 국민이 정말 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이다.

문 대통령은 왜 한낱 김정은에게 꼼짝을 못 하는지, 왜 굴종하다시피 하는지, '삶은 소대가리' '뻔뻔한 사람' 같은 막말을 들어도 왜 한마디 반응도 못 하는지, 무슨 약점이 잡혀 있는지, 우리 통일부 장관이 북 미사일 시험에 대해 '북한이 억지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에 동의하는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는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이런 이슈에도 제발 속 시원하게 반응해줬으면 좋겠다.

한때 문 대통령에게는 '그래도 선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의 아픔에 둔감한 냉혈한에 가깝다고 본다. 자신의 정책적 실수와 무지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든 말든 그는 인정하지도 고치려고도 한 적이 없다. 가령 '탈원전'으로 두산중공업 직원들은 매일 평균 다섯 명꼴로 퇴사하고 있다고 한다. 남은 직원들도 순환 휴직 등으로 몰려 있는 상태다. 협력업체 직원들과 부양가족을 계산하면 2만4000가구의 생존이 위태해졌다. 국가적으로는 산업 생태계 붕괴, 원전 수출 부진 등으로 막대한 손실을 낳았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런 상황이 마치 없는 듯 외면해버린다.

한번은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행사장에서 만난 문 대통령에게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서 이미 결정된 울진의 신한울 3·4호기 건설만은 재고해달라'고 하자, 딱 한마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전기가 모자라지 않잖아요." 이런 수준을 어떻게 선하다는 말로 포장할 수 있을까.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 를 갖는다고 했다. 우리 국민이 이렇게 시대착오적 정부를 계속 용인할 리는 없다고 봤다. 이보다 훨씬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론조사로는 나라가 허물어져 가도 국민의 절반은 현 정권을 지지할 태세다. 정권 실세의 불법이 드러나도 그 합리화 논리까지 만들어주면서 옹호한다. 이게 선택한 나라의 운명이라면 무슨 수로 막겠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19/20191219038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