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복거일(卜鉅一・73) 선생은 시평(時平)이 넓다. 소설가로,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수천만 년, 수억 년에 걸쳐 진행되어온 생명의 진화(進化) 과정을 살피는 진화생물학이나 수십억 년, 수백억 년에 걸쳐 형성된 우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천체(天體)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시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복거일 선생은 눈앞의 현실에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려워도 길게 보면 결국은 잘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암(癌)까지 끌어안고 살아온 분이 말이다.
새해를 앞두고 그를 만난 것도 그래서였다. 이분이라면 나라의 정체성(正體性)도, 경제도, 안보도, 외교도, 도덕성과 예의염치(禮義廉恥)도 죄다 무너진 세상에서 그래도 새해를 맞는 독자들에게 뭔가 낙관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 이해해줬으면”
― 2019년 한 해를 어떻게 보냈습니까.
“작가의 삶은 사실 간단해요. 모든 것을 글 쓰는 데 좋도록 최적화(最適化)하기 때문에, 작가의 일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구상하고, 쓰고…. 남들이 보기에 한가해 보일 때도 늘 머릿속은 분주하죠.”
― 요새 쓰시는 작품이 뭐였지요.
“《월간중앙》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소재로 한 소설 〈물로 쓰여진 이름〉을 4년째 쓰고 있습니다.”
― 2019년 8월에 낸 시집 《그리운 해왕성》을 보니 탈북 청년들 상대로 강연도 하는 등, 간단하게 작가로 최적화해서 사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강연들은 하다 보면 잔소리가 되어버려요. 솔직히 젊은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잔소리가 되어버려요.
젊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이해해달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잖아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하는데, 나쁜 뜻에서 하는 건 아니니까 젊은 사람들이 너그러울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게 본인에게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나오는 얘기니까 그 속에 좋은 지혜의 알맹이가 들어 있거든요.”
―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나이 드신 분들의 말씀에서 들을 얘기가 있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 점점 더 없어지는 느낌입니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의 가치가 굉장히 비싸졌기 때문에 참을성이 줄어들었죠. 지금은 토막 지식과 뉴스들이 범람하니까 어텐션 스팬(attention span・개인이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이 굉장히 줄어들었어요. 예전에는 10분 정도였는데, 지금은 3분을 못 넘기는 것 같아요. 우리는 신문을 읽고, 젊은 사람들은 유튜브를 보는 그 차이라고 할까요.”
“586세대 너무 비판 말아야”
― 조국(曺國) 사태 이후 기득권 세력화한 5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부쩍 늘었는데 어떻게 봅니까.
“많은 사람이 공감하니까 그런 비판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게 586세대에게만 해당되는 걸까요? 지금 그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다 젊을 때 받은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지식의 노예, 특히 젊었을 때 받아들인 지식의 노예거든요. 이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스스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어요.
저는 586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도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고, 특히 압제가 심했던 유신 이후부터 신군부 시절(5공)에 자라났기 때문에 그 세대에게 너무 큰 비난을 퍼붓는 것은 형평(衡平)에 어긋나요.”
뜻밖이었다. 나 자신도 586세대지만 요즘 586세대에 대해 이렇게 너그럽게 이야기하는 이, 그것도 보수 우파의 원로는 처음 보는 듯했다.
― 왜 그렇게 너그러운가요.
“우리 세대는 4・19 내지 6・3세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시절에 자란 거예요. 4월 혁명이라는 밝은 시절을 맛보았잖아요. 저는 우리 세대가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밝은 전망만을 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사람들은 잘 몰라요. 밝은 전망만 보았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같은 것들에 대해 생래적(生來的)으로 친한 면이 있어요.
586세대는 그런 경험이 없잖아요. 그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제 생각과 다르고 대한민국의 구성원리와 크게 벗어난 면이 있지만, 그게 어떤 면에서 그 사람들에게 불행한 거죠. 나중에 역사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바탕을 많이 허물었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겠어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어요?”
― 정말 그렇게 선생님 세대가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세대는 경제 발전을 이룬 세대 아니에요? 제가 대학에 입학한 게 1963년이었어요. 그해부터 우리나라가 혼란을 극복하고 목표가 분명해지기 시작했어요. 가발공장을 만들기 위해 여공들을 모으고, 무역 경험 없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을 누볐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활기차고, 밝은 생각을 가졌는데, 586세대는 그런 경험을 못 했잖아요. 어떤 면에서 그게 참 안타까워요. 저는 586에 대한 비난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낡고 썩은 정치인이 하는 게 안전”
― 총선을 앞두고 ‘물갈이’ 요구가 다시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비교적 전통을 중시하고 전통의 연결을 강조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어요.
‘정치의 오락화’라는 표현이 나온 지 30년이 되어갑니다. 사람들은 정치도 재미있기를 원한다는 거죠. 그래서 정치지도자들이 연예인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연예가 어느 나라에서건 정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싫증을 잘 내요.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도 두 번 하고 나면 지겹다고 생각하잖아요. 갈수록 그게 더 짧아지겠지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오래 해야 경험이 생기고 경륜(經綸)이라는 게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데 정치는 다른 분야에 비해 사람들이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됐어요.”
― 정치가 자꾸 국민들을 실망시키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정치는 ‘더러운 마당’이니까 낡고 썩은 정치인이 하는 것이 실은 안전합니다. 정치는 결국 다른 생각과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서로 싸우고 협상하면서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잖아요? 혁명적 열정이 충만한 세력이 나오면 세상을 뒤집는다 이 말입니다. ‘탈레반’이 되는 거예요. 저는 ‘탈레반’보다는 진부(陳腐)하고 타협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사회가 안정된다고 생각합니다.”
― 문재인(文在寅) 정권 사람들을 두고 ‘탈레반’이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세상사를 낙관적으로 보고, 세상이 쉽게 안 뒤집힌다고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 정권이 들어설 때는 걱정을 하나 했어요.”
“조국 사태 보고 ‘탈레반’ 걱정 덜어”
― 어떤 걱정입니까.
“‘이 정권의 핵심 속에는 이념에 투철해서 무엇에도 타락하지 않는, 로베스피에르나 생쥐스트 같은 사람들(두 사람 모두 프랑스대혁명 당시 공포정치를 이끈 극단적 혁명주의자-기자 주)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 혁명가들처럼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더라도 혁명을 이루겠다고 나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을 위해서 적국(敵國)인 북한이나 중국과 손잡을 수도 있고, 다른 파괴적인 전법(戰法)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조국 사태를 보면서 그런 걱정은 덜었습니다.”
― 왜요.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은 못 돼요. 보니까 유행 따라 가는 좌파(左派), 강남좌파라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권력을 잡더니 썩었어요. 그래서 안심이 됩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어요. ‘혹시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노동조합의 심층부에 그런 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는 게 아닌가’ 늘 걱정했는데 조국 사태를 보니 안심이 돼요.”
― ‘타협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과거에 있었던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든지, ‘사쿠라’라든지 하는 말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치는 딜 메이킹(deal making), 거래 아닙니까.”
기자는 전에 은퇴한 정치인들의 회고담을 듣는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는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양김(兩金) 시대가 5년쯤 빨리 끝나고, 대단한 비전은 없더라도 타협과 대화를 할 줄 아는 김상현(金相賢)・이기택(李基澤) 같은 정치인들의 시대를 10년 정도 거친 후, 노무현(盧武鉉) 같은 사람들이 좀 더 숙성된 상태에서 정권을 잡았으면 우리 정치가 오늘날 이토록 각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생각을 얘기했더니, 복거일 선생도 동의했다.
“YS 정권 시기 없으면 좋았을 것”
“YS(김영삼) 시기가 없으면 좋았겠지요. 필요 없는 시기였거든요. 노태우(盧泰愚)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YS 때 모든 게 허물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YS라는 본질적으로 좌파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 주류(主流)가 되어 우파를 대변하게 됐기 때문에 보수 우파가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된 것입니다.”
― YS를 좌파로 봅니까.
“예컨대 민자당(민주자유당) 내에서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 같은 분들이 우파였다면 YS는 좌파였죠. YS가 3당 합당으로 민자당에 들어와 당을 장악하는 바람에 박태준 전 총리로 대표되는 주류 우파가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거죠.”
― 그렇다고 YS를 좌파라고 하면,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보세요! ‘노동조합의 정치화’ 같은 게 다 YS 정권 때 시작된 거 아닙니까? ‘햇볕정책’을 누가 시작했습니까? YS 아닙니까? ‘동맹보다 민족이 앞선다’고 했잖아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을 많이 했잖아요? 모든 잘못된 걸 추적하면 YS 정권에서 나와요. 이는 YS 정권이 본질적으로 좌파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책들을 집권 세력인 우파에서 했기 때문에 혼선(混線)이 생긴 겁니다.”
― YS 정권 대신 김대중 정권이 없으면 어땠을까요.
“김대중 정권은 ‘호남 문제’가 있기 때문에 통과의례 차원에서도 꼭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역사적 의미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YS 정권이 생략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거죠.
만일 노태우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직접 넘어갔으면 김대중 정권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햇볕정책 등 좌파정책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 좀 더 현실적인 좌파정책이 나올 수 있었겠죠.”
― 과거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 위원 등으로 정치를 들여다본 입장에서 지금 자유한국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만하면 자유한국당이 잘하고 있다고 봐요.”
586세대에 대한 변호도 그렇고, 이날 복거일 선생은 하는 말씀마다 사람을 놀라게 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박근혜(朴槿惠) 정권이 너무나 폭삭 망했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리모델링할 수 없는 정당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렇다고 정당을 새로 꾸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당이란 원래 힘들고 주도 세력이 있어야 성립이 가능한 건데, 그렇게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그나마 자유한국당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누가 당을 맡고, 무엇을 내놓아도 잘하기가 어려워요.”
― 실제로 자유한국당이 잘하는 게 없잖습니까.
“그렇게 비치는 것은, 언론이 모든 걸 부정적으로 묘사하는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것도 큰 스캔들로 만들어버리잖아요. 황교안(黃敎安) 대표가 뭐라고 얘기를 하면 사소한 것도 비틀어서 이상하게 만들어버리잖아요.
그동안 압도적 지지를 받아온 문재인 정권 아래서, 자유한국당이 그 모든 압제와 박해를 견디면서 이 정도 한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저는 오히려 큰 저력(底力)을 봅니다.”
― 자유한국당에 대해 그만큼이라도 얘기하는 분을 굉장히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황교안 대표도 그래요. 평생 공무원만 한 양반이 정치에 나서서 실수를 안 할 수 있겠어요? 정치가의 재능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내가 초년병이어서 때가 안 묻었다, 공직 생활 깨끗하게 했다, 그리고 과오가 별로 없다’ 이런 것들을 국민들에게 내보여주는 재능은 없어요. 그걸 잘 보여줄 수 있는 PR전문가를 빨리 구해야 할 것 같아요.”
황교안 대표의 ‘미션 임파서블’
― 황 대표 주변에 너무 법조인·관료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주위에 비례대표 초선(初選) 여성 의원들이 많이 보이던데,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아요. 그들은 정치나 국회를 잘 모르잖아요. 밖에서 보기에는 좀 그래도 ‘능구렁이’ 소리 듣는 경험 많은 정치인들의 조언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얘기하겠지만, 그걸 가려내는 능력은 결국 황 대표 본인의 문제죠.”
― 지금 여론은 그런 ‘능구렁이’들을 물갈이하라는 건데, 그들에게 의지하라는 건 시류(時流)에 역행(逆行)하는 것 아닙니까.
“자유한국당으로서는 지금 당장 급한 게 선거법 개정을 막는 것입니다. 여당은 우선 선거법을, 심지어는 헌법도 바꾸겠다고 설치고 있는데, 이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걸 막아야 할 사람들은 결국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총선에서 이기려면 그런 사람들을 물갈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잖아요. 이 두 가지 요구가 상충(相衝)됩니다. 당장 싸워야 하는데, 싸울 사람을 물갈이하자? 그러면 그 사람들이 과연 따르겠어요? 황 대표에게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 주어진 겁니다.
한국당의 모순은 이 ‘듀얼 미션(dual mission)’에서 나옵니다. 황 대표나 원내대표가 이런 사정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 하지만 국민들은 물론이고 언론들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국민여배우’ 같은 지도자를 찾는데, 그게 나오나요? 안 나와요. 이 점은 국민들이 성찰(省察)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자유한국당 탓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신인(新人)들이 나와서 선거에 나가면 국민들 보기에는 신선하겠죠.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주민들이 자기 이익을 따져서 투표하는 마당입니다. 거기는 이념이고 뭐고 없어요. 지역에서 자기 나름대로 조직 다지면서 열심히 한 사람만이 이깁니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
― 그래도 물갈이에 대한 여망은 늘 높습니다.
“물갈이해서 좋았던 적이 있었나요? 1988년 제13대 총선 때, 5공 청산한다고 무리하게 물갈이하는 바람에 민정당(민주정의당)이 압승할 수 있었는데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때 박철언씨하고 최병렬씨가 잘못해서 노태우 정권을 망친 겁니다. 그 바람에 결국 YS, JP(김종필)와 손잡아서 3당 합당(合黨)을 했잖아요. 그 혼란이 얼마나 컸어요?
정치는 길거리를 가다가 청순하고 매력 있는 여배우감을 우연히 만나 캐스팅해서 ‘국민스타’ 만드는 거하고는 달라요. 국민들이 착각하는 게 또 하나 있어요.”
― 그게 뭡니까.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천만에요! 정치도 젊을 때부터 공부하고 몸에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요.”
― 저도 못 합니다.
“그래요. 다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 간에 생존경쟁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3선, 4선 의원들 아니에요? 그 사람들을 왜 버려요? 인재를 버리는 거예요. 3선, 4선 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못나 보여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 점을 살펴야지요.”
“아직은 덜 망했다”
―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과 조국 사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자유한국당 지지율보다 두 배가량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지지율이 중요한 지표이기는 하지만, 정권이 바뀌는 건 그 지지율로 바뀌는 게 아니에요. 지지율이란 상대적으로 어느 쪽이 높고 낮은지 고르는 것 아니에요? 정권은 ‘이 정권 아래서는 안 되겠다, 못 살겠다, 뒤엎자’는 생각이 퍼졌을 때 바뀌는 겁니다. 정권이 바뀌는 것은 홍수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론조사가 그렇게 나오는 건, 아직도 덜 망했기 때문입니다.”
― 아직도 덜 망했다니…. 끔찍한 얘기입니다.
“여기저기서 어렵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아직도 웬만한 사람들은 살 수 있어요. 다들 보면 외국여행 다니고, 만나면 건강 얘기하고 그렇잖아요? 그런 얘기가 안 나오고, 절박하게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나와서 냄비 두드리면서 시위에 나설 때가 되어야 정권이 바뀌는 겁니다.
지금 정권은 사악한 정권이에요. 전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작심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은 쉽게 안 바뀝니다. 나라가 더 망해서, 모든 국민이 ‘이러다가 나까지 망하는 것 아니냐’고 할 때가 되어야 바뀌는 겁니다. 폭삭 망해야 바뀝니다.”
― 이런저런 명목으로 정부에 기대서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들이 현 정권을 강고하게 지지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베네수엘라를 본받아서 국민들을 가난하게 만들면 오히려 정부보조금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먹혀들고 있어요. 그런 걸 넘어서, ‘보조금도 필요 없다, 이놈들 하는 꼴 못 보겠으니 갈아치우자’고 국민들이 폭발할 정도가 되어야 정권이 바뀌는 겁니다. 아직은 덜 망했어요.”
― 베네수엘라 등의 경우를 보면, 한번 체제가 반(反)자유민주주의 쪽으로 변질되고 다수(多數)의 국민을 포퓰리즘으로 매수하면 이를 바로잡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 정권이 모델로 삼고 있는, 북한이나 베네수엘라 정권 같은 경우를 ‘프래즐 레짐(fragile regime)’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권은 유리처럼 단단해서 누르면 강하게 버티지만, 한번 충격이 가해지면 깨져버립니다.
현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약해요. 그런데 국민들이 나서서 뭘 하려면 공권력 가지고 방어하면서 언론기관으로 자기들을 보호하고 오도(誤導)하기 때문에 국민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 돼요. 여기에는 외부 충격이 가해져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는 외부 충격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 외부 충격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가령 이번에 지소미아로 문재인 정권이 얼마나 내상(內傷)을 입었어요? 그게 미국 작품 아니에요?”
“勞組 사회주의 못 깨면 희망 없어”
― 고꾸라지고 난 후 국민들이 정신 차리고 일어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르헨티나에서 보듯 국민들의 의식이 한 번 병들면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아르헨티나는 외부의 적은 없죠. 우리나라는 주변에 북한・중국・러시아가 있잖아요. 일단은 경제보다 안보가 시급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더라도 일단 공산화가 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우선은 안보가, 현 정권을 밀어내는 게 중요하죠.
경제문제는 경제규제, 궁극적으로 노동조합으로 귀결됩니다. 노조가 너무 강하고 불법이 허용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노동조합의 불법・폭력에 대해 지식인 계층이 용인하는 것이 ‘영국병(英國病)’의 근원이었습니다. 그걸 대처가 도전해서 깨뜨린 거예요.”
― 우리나라에서도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 문재인 정권은 노조에 의해 탄생한 정권이기 때문에 특히 어렵겠죠. 노조 사회주의의 틀을 깨뜨릴 수 있다면, 우리가 부흥(復興)할 수 있다고 봐요. 그걸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죠. 노조의 권력을 삭감하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은 일어설 길이 없습니다. 국민들이 ‘노조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얘기할 정도가 되어야 경제 재생의 바탕이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 국민들의 의식이 바뀔 수 있을까요.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젊은 세대는 바뀌는 환경에 적응해왔어요. 요새 젊은 대학생들을 보면 올바른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나이 든 사람들은 퇴장하는 마당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해야 할 지혜로운 행동은, 우리의 후손들, 손자뻘 되는 사람들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천성”
― 정권과 좌파 언론, 전교조의 선전·선동이 극심한데, 너무 낙관적인 거 아닙니까.
“국민들은 집권 세력이 선전·선동한다고 해서 잘 다스려지지 않아요. 사람들은 배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높았지만, 지금 내려갔잖아요? 그게 하나의 배우는 과정 아니에요? 지금 안 바뀌면 다음에 바뀐다고 생각하면 돼요. 우리가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잖아요. 하지만 노력하니까, 외부 환경의 변화로 일본이 망했잖아요? 다시 나라를 세웠잖아요. 역사는 똑같아요. 현 정권이 아무리 뭘 해도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요.”
― 이러다가 우리가 북한에 흡수통일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이 그렇지 북한이 우리를 접수할 능력이 있나요? 어떻게 접수해요? 이 국민들을 어떻게 통제해요?
한때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결국은 다시 자유국가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왜 자본주의가 강한가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상태예요. 인위적(人爲的)으로 사회주의로 만들지 않으면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가 번 돈은 내 거다, 내가 번 재산은 내 거다’, 이게 자본주의 원칙 아니에요? 사람 천성이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바꿔요? 공산주의가 결국 망했잖아요?
길게 보면 밝다고 봐요. 물론 지금 당장에 대해 얘기하자고 하면 별로 할 말은 없죠. 시원한 얘기는 안 나오지만, 뭐가 문제예요?”
― 당장 시원한 얘기는 아니군요.
“당장의 답답한 상황에 대해 시원한 얘기를 하면 그건 사기꾼이에요. 답답한 현실을 누가 어쩔 수 있겠어요? 그래도 황교안 대표가 그렇게 지청구를 먹었는데도, 생각도 못 한 엄동설한에 청와대 앞 단식을 해서 국면이 바뀌었잖아요?”
― 황 대표의 단식이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까.
“저 친구들(현 집권 세력-기자 주)이 얼마나 매정한 친구들인지 나왔잖아요? 그 노인네-황교안 대표도 노인네입니다-가 추운 데 가서 떠는데 천막을 거둬냈잖아요? 세상에, 정말 사악한 친구들이에요. 황 대표의 단식은 그걸 드러냈고, 분위기가 바뀌었잖아요. 사생결단(死生決斷), 황교안 대표는 목숨을 건 겁니다. 그걸 했어요.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사건이 터지고, 그런 일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면 역사가 바뀌는 겁니다.”
“다음 대선 전망은 半半”
― 아까 젊은 세대를 믿는다고 했는데, 솔직히 괜찮은 친구들보다는 안 괜찮은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선거 때에는 괜찮은 친구도 한 표, 안 괜찮은 친구도 한 표고요.
“그것도 시장경제 원리 아닙니까. 겉보기에는 저마다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나중에 사회가 조화를 이룬다는 건 진리예요.
우주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그걸 경제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이론적으로 얘기하면 ‘일반균형이론’이라고 하는 거죠. 그걸 생물학에서 받아들여서 ‘상호적 이타주의(利他主義)’로 정립했어요.
근래에는 물리학에서도 그게 통해요. 양자물리학에서는 이 세상은 얽힘(entanglement)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어떤 힘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뻗치는데, 그 힘들이 얽혀서 무한으로 반복되면 세상의 피륙을 형성한다는 거죠. 세상의 기본질서는 협력이에요. 보기에 당장은 어떤 사람이 이기주의적으로 구는 것 같아도, 그 이기주의가 실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인이 되는데, 그게 사회에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 그런가요.
“예컨대 현 정권에서 보조금을 받는 사람들이 현 정권을 지지한다고 칩시다. 그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정권은 그 사람들에게 계속 돈을 대야 할 거 아니에요?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언젠가 이 사람들이 배신할 거 아니에요. 그것이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작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인 존재들만 모여가지고서도 그냥 질서가 형성됩니다. 생각보다는 전망이 밝다고 봐요.”
― 그렇게 보는 근거는 뭡니까.
“1년 반쯤 전에 어떤 신문과 인터뷰를 했어요. 기자가 ‘다음 대선 전망을 어떻게 보느냐’고 하기에 반반(半半)이라고 했죠. 그 기자가 놀라서 묻기에 ‘아니, 경제학 교과서에서 안 된다고 하는 걸 골라서 하는 사람들인데 결과가 좋겠소? 그래서 반반인 겁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경제학 교과서에 있는 내용들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뽑아낸 진실 아니에요? 그 진실에서 다 어긋나게 하면 결과가 좋겠어요? 이 사람들이 인륜(人倫)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정권이 어떻게 오래가겠어요?”
‘문화의 힘’
― 그런데도 맹목적으로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게 다 문화의 힘이 저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게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죠. 그 후유증이 오래가고 있어요. 언젠가 신문사에서 앙케트를 하면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을 묻기에 《태백산맥》을 꼽았어요. ‘부정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여서….”
―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역대 정권이 문화의 힘을 몰랐어요. 예를 들어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의 경우 이념적으로 무임(無賃)승차자예요. 자기가 돈만 벌면 그게 전부 다인 줄 알았고 문화에 대한 걸 몰랐잖아요. 박근혜 전 대통령도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랐잖아요. 두 분 다 결말이 안 좋은 것은 많은 부분이 문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결정한다는 걸 몰랐던 데서 비롯됐다고 봐요.”
― 그걸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제라도 우리가 바로잡아야겠죠. 바로잡을 길이 없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성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탈북자나 6・25전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다루는 영화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잖아요.
사실 좌파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파이프라인은 전부 좌파들이 만들었잖아요. 뒤늦게 그걸 알고 박근혜 정권 시절 김기춘 비서실장이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든 거 아니에요? 블랙리스트가 왜 나왔는지를 성찰해서 ‘앞으로 정부예산으로 하는 한 블랙리스트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걸 국민들에게 얘기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했어요. 문화의 힘을 돌려놓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되찾더라도 늘 불안할 거예요.”
“유신은 잘못”
― 소위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도 이미 문화 쪽 헤게모니는 저쪽으로 넘어갔었죠.
“노조 출신 국회의원들이 자유한국당에 의외로 많아요. 이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해요.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이 그걸 커버하기 위해 노조에서 얘기하는 걸 다 들어줬다는 거예요. 전두환 시절, 아니 유신 시절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거예요. 거기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해요.”
복거일 선생은 희곡 〈박정희의 길〉을 쓰고, 이를 무대에 올리는 등, 박정희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지식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소 의외의 얘기가 나왔다. 복거일 선생은 유신에 대해 매섭게 비판했다.
“지금 일각에서는 유신을 찬양하는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건 우파의 편향이고, 역사의 왜곡이에요. 우리가 왜 잘못됐는지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유신을 합리화시키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유신이 중공업 발전을 시켰다? 어떻게 그런 엉터리 같은 얘기가 나올 수 있어요?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모두 유신 이전부터 시작된 겁니다. 이미 중화학공업에 대한 얼개가 짜이고 시작된 후에 유신이 나온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일종의 ‘성녀(聖女)’처럼 만들거나 ‘유신은 좋은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두 역사를 뒤틀리게 만드는 겁니다. 반성할 것을 반성하지 못하게 하고, 저쪽 사람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는 겁니다.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 권력욕에서 나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복거일 선생의 얘기 중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다. 복거일 선생도 기자의 얼굴에서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이 얘기를 꼭 쓸 필요는 없어요. 제가 바라보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한 얘기니까…”라고 말했다.
“유신, 좌파 득세 바탕 됐다”
― 아니, 하신 말씀이니까 쓰겠습니다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저는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이에요.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할 때의 충격이란… 제가 회사 내에서 야당 기질이 강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보니, 선배가 와서 저를 밀착 마크해서 투표장으로 데리고 갔어요. 선배가 기숙사에 와서 ‘복형, 내가 공장장 지시를 받았는데, 내 사정 좀 봐줄 수 있겠소?’ 그러면서 웃어요. ‘아유, 선배님, 그러면 갑시다’ 하고 함께 가서 찬성표를 찍었어요. ‘이 마당에 반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싶어서….”
복거일 선생은 1968년 공화당 내 JP 세력이 숙청된 국민복지회 사건 이야기도 꺼냈다.
“그때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던 김용태(金龍泰)씨를 비롯해 JP 측근 공화당 창당 멤버들이 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가서 고문당하고 그랬잖아요? 선친(先親)이 김용태 선거구 면책(面責)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얘기를 자세히 들었어요.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근대정당인 민주공화당이 그냥 날아가버린 겁니다. 민주공화당은 목표가 분명하고 조직이 합리적이고, 전국적 조직을 갖춘 최초의 근대정당이었어요. 그걸 유신으로 허물어버리고 유정회를 만들었잖아요. 박정희 대통령 자신의 개혁을 이어갈 정치조직이 그런 식으로 없어진 것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니 의외입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분이고, 이런 일들은 사소한 일이에요. 하지만 유신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게 10・26으로, 광주(光州)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상적 탄압이 들어가고, 그게 오늘날 좌파가 득세하는 바탕이 된 거예요. 우리가 역사를 얘기하려면 엄정한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해야 합니다.”
“3不 정책 파기해야”
― 외교도 문제입니다. 현 정권이 반일(反日)외교 드라이브를 걸면서 국제적으로 한국은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일단 현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를 끊고서 중국에 붙으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를 파기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런 의도가 좌절된 것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고비를 넘긴 거예요. 일본과의 관계가 파국이 안 난 이상, 다음 정권에서는 3불(不) 정책(▲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 체계에 들어가지 않으며 ▲한・미・일 안보협력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중(對中) 약속)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 3불 정책을 어떻게 무너뜨린다는 얘기입니까.
“3불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이 반역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문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문 대통령을 반역죄로 법정에 세운 후 3불 정책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되는 반역적 행동이라는 법원의 판단을 받아내야 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진 않지만, 전직 대통령을 또 감옥으로 보내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문 대통령을 꼭 감옥으로 보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 대통령은 법원 판결이 나오자마자 ‘전직 대통령을 또 감옥으로 보낼 수는 없다’면서 사면(赦免)하면 됩니다. 다만 그 법원 판결을 근거로 중국에 대해서 ‘3불 정책은 헌법에 반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기 때문에 파기한다’고 얘기하자는 것입니다. 한미동맹이 약해지는 게 다 3불 정책 때문이에요.”
― 3불 정책이 반역적이라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을 재판에 회부하는 순간부터 중국의 태클이 들어올 텐데요.
“물론 현실적으로 어렵겠지요. 저는 3불 정책을 깨야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반(半)독립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하나 나와서, ‘좋다. 중국의 핍박 다 받겠다. 하지만 이건 헌법에 어긋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나는 헌법을 지켜야 하니,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다. 맘대로 하라’는 결기를 보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중국에 예속됩니다. 이미 하나씩 하나씩 예속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여기서 저항하고 반격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3불 정책 파기입니다.”
― 중국에 그게 통할까요.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을 각오를 하고 두 차례 소련과 전쟁을 벌여, 소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물론 결국은 패했지만, 소련도 ‘이 사람들은 쉽게 짓밟을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에서 핀란드를 소련의 외교・안보적 영향력 아래 두는 선에서 만족했습니다(핀란드화). 결국 핀란드는 발틱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처럼 소련에 병합되거나, 동구 국가들처럼 위성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에 의하면, 1907년 군대해산 당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고 난 후 한국군이 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4시간 동안 교전을 벌이다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을 우러러봤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지렁이가 아니네’라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겁니다.”
“암 걸려도 20년 이상 생존 가능”
2014년 6월 복거일 선생의 자전적(自傳的) 소설 《한가로운 걱정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의 하루》가 나오면서, 그가 암에 걸렸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치료를 거부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났다. 복거일 선생이 여전히 건강한 것은 참 다행한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정말 복거일 선생이 암에 걸린 게 맞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 암에 걸린 지 5년이 넘도록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암에 걸린 사실이 알려진 게 5년이고, 암에 걸린 것은 8년이 지났어요.”
― 5년이라고 하더라도, 진짜 암에 걸렸다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는 게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설명이 돼요. 우리가 대개 암에 걸린 후 몇 년 산다는 것은 중위수(中位數)나 최빈수(最頻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5년 생존율’이라고 하면, 5년이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이기는 하지만, 10년, 20년, 그 이상 사는 사람도 조금은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고 5년 내에 모두 죽는다는 건 아니죠. 실제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J. 굴드도 젊어서 암에 걸렸지만, 20년 이상 더 살았다고 합니다. 저도 그 운 좋은 경우에 속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혹시 오진(誤診)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진은 아니었다고 봐요. 사진도 나왔고, 의사와 상의도 했으니까….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로 번져 있었어요. ‘3년만 더 살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어요.”
“치료 거부는 작가이기 때문에 내린 특수한 결정”
― 그냥 치료받을 걸 그랬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작가로서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 굉장히 빨리 쇠퇴해요. 그래서 한 살이라도 나이가 적을 때, 암 초기의 1년이 나중의 3년, 5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적(知的)・육체적으로 쇠퇴하면 글을 못 쓰잖아요? 그래서 수명을 더 연장하는 것보다는 지금 치료를 안 받으면서 열심히 쓰겠다는 계산을 한 거예요. 제가 작가이기 때문에 내린 특수한 결정이지 딴 게 아니에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진 모르잖아요? 지금은 하루하루가 다 소중합니다. 앞으로 더 오래 사는 것, 80세, 90세까지 사는 것보다는 지금 1년이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지금 쓰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소설 〈물로 쓰여진 이름〉을 완성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일단락 짓고 싶어요. 그것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이 소설로 《태백산맥》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100분의 1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흔들리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읽고 ‘아, 역시 우남은 위대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해를 앞두고 그를 만난 것도 그래서였다. 이분이라면 나라의 정체성(正體性)도, 경제도, 안보도, 외교도, 도덕성과 예의염치(禮義廉恥)도 죄다 무너진 세상에서 그래도 새해를 맞는 독자들에게 뭔가 낙관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 이해해줬으면”
― 2019년 한 해를 어떻게 보냈습니까.
“작가의 삶은 사실 간단해요. 모든 것을 글 쓰는 데 좋도록 최적화(最適化)하기 때문에, 작가의 일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구상하고, 쓰고…. 남들이 보기에 한가해 보일 때도 늘 머릿속은 분주하죠.”
― 요새 쓰시는 작품이 뭐였지요.
“《월간중앙》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소재로 한 소설 〈물로 쓰여진 이름〉을 4년째 쓰고 있습니다.”
― 2019년 8월에 낸 시집 《그리운 해왕성》을 보니 탈북 청년들 상대로 강연도 하는 등, 간단하게 작가로 최적화해서 사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강연들은 하다 보면 잔소리가 되어버려요. 솔직히 젊은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잔소리가 되어버려요.
젊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이해해달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잖아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하는데, 나쁜 뜻에서 하는 건 아니니까 젊은 사람들이 너그러울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게 본인에게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나오는 얘기니까 그 속에 좋은 지혜의 알맹이가 들어 있거든요.”
―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나이 드신 분들의 말씀에서 들을 얘기가 있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 점점 더 없어지는 느낌입니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의 가치가 굉장히 비싸졌기 때문에 참을성이 줄어들었죠. 지금은 토막 지식과 뉴스들이 범람하니까 어텐션 스팬(attention span・개인이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이 굉장히 줄어들었어요. 예전에는 10분 정도였는데, 지금은 3분을 못 넘기는 것 같아요. 우리는 신문을 읽고, 젊은 사람들은 유튜브를 보는 그 차이라고 할까요.”
“586세대 너무 비판 말아야”
― 조국(曺國) 사태 이후 기득권 세력화한 5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부쩍 늘었는데 어떻게 봅니까.
“많은 사람이 공감하니까 그런 비판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게 586세대에게만 해당되는 걸까요? 지금 그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다 젊을 때 받은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지식의 노예, 특히 젊었을 때 받아들인 지식의 노예거든요. 이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스스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어요.
저는 586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도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고, 특히 압제가 심했던 유신 이후부터 신군부 시절(5공)에 자라났기 때문에 그 세대에게 너무 큰 비난을 퍼붓는 것은 형평(衡平)에 어긋나요.”
뜻밖이었다. 나 자신도 586세대지만 요즘 586세대에 대해 이렇게 너그럽게 이야기하는 이, 그것도 보수 우파의 원로는 처음 보는 듯했다.
― 왜 그렇게 너그러운가요.
“우리 세대는 4・19 내지 6・3세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시절에 자란 거예요. 4월 혁명이라는 밝은 시절을 맛보았잖아요. 저는 우리 세대가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밝은 전망만을 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사람들은 잘 몰라요. 밝은 전망만 보았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같은 것들에 대해 생래적(生來的)으로 친한 면이 있어요.
586세대는 그런 경험이 없잖아요. 그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제 생각과 다르고 대한민국의 구성원리와 크게 벗어난 면이 있지만, 그게 어떤 면에서 그 사람들에게 불행한 거죠. 나중에 역사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바탕을 많이 허물었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겠어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어요?”
― 정말 그렇게 선생님 세대가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세대는 경제 발전을 이룬 세대 아니에요? 제가 대학에 입학한 게 1963년이었어요. 그해부터 우리나라가 혼란을 극복하고 목표가 분명해지기 시작했어요. 가발공장을 만들기 위해 여공들을 모으고, 무역 경험 없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을 누볐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활기차고, 밝은 생각을 가졌는데, 586세대는 그런 경험을 못 했잖아요. 어떤 면에서 그게 참 안타까워요. 저는 586에 대한 비난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낡고 썩은 정치인이 하는 게 안전”
― 총선을 앞두고 ‘물갈이’ 요구가 다시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비교적 전통을 중시하고 전통의 연결을 강조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어요.
‘정치의 오락화’라는 표현이 나온 지 30년이 되어갑니다. 사람들은 정치도 재미있기를 원한다는 거죠. 그래서 정치지도자들이 연예인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연예가 어느 나라에서건 정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싫증을 잘 내요.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도 두 번 하고 나면 지겹다고 생각하잖아요. 갈수록 그게 더 짧아지겠지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오래 해야 경험이 생기고 경륜(經綸)이라는 게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데 정치는 다른 분야에 비해 사람들이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됐어요.”
― 정치가 자꾸 국민들을 실망시키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정치는 ‘더러운 마당’이니까 낡고 썩은 정치인이 하는 것이 실은 안전합니다. 정치는 결국 다른 생각과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서로 싸우고 협상하면서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잖아요? 혁명적 열정이 충만한 세력이 나오면 세상을 뒤집는다 이 말입니다. ‘탈레반’이 되는 거예요. 저는 ‘탈레반’보다는 진부(陳腐)하고 타협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사회가 안정된다고 생각합니다.”
― 문재인(文在寅) 정권 사람들을 두고 ‘탈레반’이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세상사를 낙관적으로 보고, 세상이 쉽게 안 뒤집힌다고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 정권이 들어설 때는 걱정을 하나 했어요.”
“조국 사태 보고 ‘탈레반’ 걱정 덜어”
― 어떤 걱정입니까.
“‘이 정권의 핵심 속에는 이념에 투철해서 무엇에도 타락하지 않는, 로베스피에르나 생쥐스트 같은 사람들(두 사람 모두 프랑스대혁명 당시 공포정치를 이끈 극단적 혁명주의자-기자 주)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 혁명가들처럼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더라도 혁명을 이루겠다고 나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을 위해서 적국(敵國)인 북한이나 중국과 손잡을 수도 있고, 다른 파괴적인 전법(戰法)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조국 사태를 보면서 그런 걱정은 덜었습니다.”
― 왜요.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은 못 돼요. 보니까 유행 따라 가는 좌파(左派), 강남좌파라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권력을 잡더니 썩었어요. 그래서 안심이 됩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어요. ‘혹시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노동조합의 심층부에 그런 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는 게 아닌가’ 늘 걱정했는데 조국 사태를 보니 안심이 돼요.”
― ‘타협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과거에 있었던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든지, ‘사쿠라’라든지 하는 말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치는 딜 메이킹(deal making), 거래 아닙니까.”
기자는 전에 은퇴한 정치인들의 회고담을 듣는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는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양김(兩金) 시대가 5년쯤 빨리 끝나고, 대단한 비전은 없더라도 타협과 대화를 할 줄 아는 김상현(金相賢)・이기택(李基澤) 같은 정치인들의 시대를 10년 정도 거친 후, 노무현(盧武鉉) 같은 사람들이 좀 더 숙성된 상태에서 정권을 잡았으면 우리 정치가 오늘날 이토록 각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생각을 얘기했더니, 복거일 선생도 동의했다.
“YS 정권 시기 없으면 좋았을 것”
복거일 선생은 2014년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진=조선DB |
― YS를 좌파로 봅니까.
“예컨대 민자당(민주자유당) 내에서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 같은 분들이 우파였다면 YS는 좌파였죠. YS가 3당 합당으로 민자당에 들어와 당을 장악하는 바람에 박태준 전 총리로 대표되는 주류 우파가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거죠.”
― 그렇다고 YS를 좌파라고 하면,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보세요! ‘노동조합의 정치화’ 같은 게 다 YS 정권 때 시작된 거 아닙니까? ‘햇볕정책’을 누가 시작했습니까? YS 아닙니까? ‘동맹보다 민족이 앞선다’고 했잖아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을 많이 했잖아요? 모든 잘못된 걸 추적하면 YS 정권에서 나와요. 이는 YS 정권이 본질적으로 좌파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책들을 집권 세력인 우파에서 했기 때문에 혼선(混線)이 생긴 겁니다.”
― YS 정권 대신 김대중 정권이 없으면 어땠을까요.
“김대중 정권은 ‘호남 문제’가 있기 때문에 통과의례 차원에서도 꼭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역사적 의미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YS 정권이 생략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거죠.
만일 노태우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직접 넘어갔으면 김대중 정권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햇볕정책 등 좌파정책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 좀 더 현실적인 좌파정책이 나올 수 있었겠죠.”
― 과거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회 위원 등으로 정치를 들여다본 입장에서 지금 자유한국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만하면 자유한국당이 잘하고 있다고 봐요.”
586세대에 대한 변호도 그렇고, 이날 복거일 선생은 하는 말씀마다 사람을 놀라게 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박근혜(朴槿惠) 정권이 너무나 폭삭 망했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리모델링할 수 없는 정당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렇다고 정당을 새로 꾸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당이란 원래 힘들고 주도 세력이 있어야 성립이 가능한 건데, 그렇게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그나마 자유한국당을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누가 당을 맡고, 무엇을 내놓아도 잘하기가 어려워요.”
― 실제로 자유한국당이 잘하는 게 없잖습니까.
“그렇게 비치는 것은, 언론이 모든 걸 부정적으로 묘사하는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것도 큰 스캔들로 만들어버리잖아요. 황교안(黃敎安) 대표가 뭐라고 얘기를 하면 사소한 것도 비틀어서 이상하게 만들어버리잖아요.
그동안 압도적 지지를 받아온 문재인 정권 아래서, 자유한국당이 그 모든 압제와 박해를 견디면서 이 정도 한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저는 오히려 큰 저력(底力)을 봅니다.”
― 자유한국당에 대해 그만큼이라도 얘기하는 분을 굉장히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황교안 대표도 그래요. 평생 공무원만 한 양반이 정치에 나서서 실수를 안 할 수 있겠어요? 정치가의 재능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내가 초년병이어서 때가 안 묻었다, 공직 생활 깨끗하게 했다, 그리고 과오가 별로 없다’ 이런 것들을 국민들에게 내보여주는 재능은 없어요. 그걸 잘 보여줄 수 있는 PR전문가를 빨리 구해야 할 것 같아요.”
황교안 대표의 ‘미션 임파서블’
― 황 대표 주변에 너무 법조인·관료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주위에 비례대표 초선(初選) 여성 의원들이 많이 보이던데,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아요. 그들은 정치나 국회를 잘 모르잖아요. 밖에서 보기에는 좀 그래도 ‘능구렁이’ 소리 듣는 경험 많은 정치인들의 조언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얘기하겠지만, 그걸 가려내는 능력은 결국 황 대표 본인의 문제죠.”
― 지금 여론은 그런 ‘능구렁이’들을 물갈이하라는 건데, 그들에게 의지하라는 건 시류(時流)에 역행(逆行)하는 것 아닙니까.
“자유한국당으로서는 지금 당장 급한 게 선거법 개정을 막는 것입니다. 여당은 우선 선거법을, 심지어는 헌법도 바꾸겠다고 설치고 있는데, 이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걸 막아야 할 사람들은 결국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총선에서 이기려면 그런 사람들을 물갈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잖아요. 이 두 가지 요구가 상충(相衝)됩니다. 당장 싸워야 하는데, 싸울 사람을 물갈이하자? 그러면 그 사람들이 과연 따르겠어요? 황 대표에게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 주어진 겁니다.
한국당의 모순은 이 ‘듀얼 미션(dual mission)’에서 나옵니다. 황 대표나 원내대표가 이런 사정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 하지만 국민들은 물론이고 언론들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국민여배우’ 같은 지도자를 찾는데, 그게 나오나요? 안 나와요. 이 점은 국민들이 성찰(省察)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자유한국당 탓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신인(新人)들이 나와서 선거에 나가면 국민들 보기에는 신선하겠죠.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주민들이 자기 이익을 따져서 투표하는 마당입니다. 거기는 이념이고 뭐고 없어요. 지역에서 자기 나름대로 조직 다지면서 열심히 한 사람만이 이깁니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
― 그래도 물갈이에 대한 여망은 늘 높습니다.
“물갈이해서 좋았던 적이 있었나요? 1988년 제13대 총선 때, 5공 청산한다고 무리하게 물갈이하는 바람에 민정당(민주정의당)이 압승할 수 있었는데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때 박철언씨하고 최병렬씨가 잘못해서 노태우 정권을 망친 겁니다. 그 바람에 결국 YS, JP(김종필)와 손잡아서 3당 합당(合黨)을 했잖아요. 그 혼란이 얼마나 컸어요?
정치는 길거리를 가다가 청순하고 매력 있는 여배우감을 우연히 만나 캐스팅해서 ‘국민스타’ 만드는 거하고는 달라요. 국민들이 착각하는 게 또 하나 있어요.”
― 그게 뭡니까.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천만에요! 정치도 젊을 때부터 공부하고 몸에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요.”
― 저도 못 합니다.
“그래요. 다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 간에 생존경쟁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3선, 4선 의원들 아니에요? 그 사람들을 왜 버려요? 인재를 버리는 거예요. 3선, 4선 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못나 보여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 점을 살펴야지요.”
“아직은 덜 망했다”
―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과 조국 사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자유한국당 지지율보다 두 배가량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지지율이 중요한 지표이기는 하지만, 정권이 바뀌는 건 그 지지율로 바뀌는 게 아니에요. 지지율이란 상대적으로 어느 쪽이 높고 낮은지 고르는 것 아니에요? 정권은 ‘이 정권 아래서는 안 되겠다, 못 살겠다, 뒤엎자’는 생각이 퍼졌을 때 바뀌는 겁니다. 정권이 바뀌는 것은 홍수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론조사가 그렇게 나오는 건, 아직도 덜 망했기 때문입니다.”
― 아직도 덜 망했다니…. 끔찍한 얘기입니다.
“여기저기서 어렵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아직도 웬만한 사람들은 살 수 있어요. 다들 보면 외국여행 다니고, 만나면 건강 얘기하고 그렇잖아요? 그런 얘기가 안 나오고, 절박하게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나와서 냄비 두드리면서 시위에 나설 때가 되어야 정권이 바뀌는 겁니다.
지금 정권은 사악한 정권이에요. 전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작심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은 쉽게 안 바뀝니다. 나라가 더 망해서, 모든 국민이 ‘이러다가 나까지 망하는 것 아니냐’고 할 때가 되어야 바뀌는 겁니다. 폭삭 망해야 바뀝니다.”
― 이런저런 명목으로 정부에 기대서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들이 현 정권을 강고하게 지지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베네수엘라를 본받아서 국민들을 가난하게 만들면 오히려 정부보조금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먹혀들고 있어요. 그런 걸 넘어서, ‘보조금도 필요 없다, 이놈들 하는 꼴 못 보겠으니 갈아치우자’고 국민들이 폭발할 정도가 되어야 정권이 바뀌는 겁니다. 아직은 덜 망했어요.”
― 베네수엘라 등의 경우를 보면, 한번 체제가 반(反)자유민주주의 쪽으로 변질되고 다수(多數)의 국민을 포퓰리즘으로 매수하면 이를 바로잡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 정권이 모델로 삼고 있는, 북한이나 베네수엘라 정권 같은 경우를 ‘프래즐 레짐(fragile regime)’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권은 유리처럼 단단해서 누르면 강하게 버티지만, 한번 충격이 가해지면 깨져버립니다.
현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약해요. 그런데 국민들이 나서서 뭘 하려면 공권력 가지고 방어하면서 언론기관으로 자기들을 보호하고 오도(誤導)하기 때문에 국민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 돼요. 여기에는 외부 충격이 가해져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는 외부 충격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 외부 충격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가령 이번에 지소미아로 문재인 정권이 얼마나 내상(內傷)을 입었어요? 그게 미국 작품 아니에요?”
“勞組 사회주의 못 깨면 희망 없어”
복거일 선생은 “노조·사회주의를 극복해야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사진=조선DB |
“아르헨티나는 외부의 적은 없죠. 우리나라는 주변에 북한・중국・러시아가 있잖아요. 일단은 경제보다 안보가 시급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더라도 일단 공산화가 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우선은 안보가, 현 정권을 밀어내는 게 중요하죠.
경제문제는 경제규제, 궁극적으로 노동조합으로 귀결됩니다. 노조가 너무 강하고 불법이 허용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노동조합의 불법・폭력에 대해 지식인 계층이 용인하는 것이 ‘영국병(英國病)’의 근원이었습니다. 그걸 대처가 도전해서 깨뜨린 거예요.”
― 우리나라에서도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 문재인 정권은 노조에 의해 탄생한 정권이기 때문에 특히 어렵겠죠. 노조 사회주의의 틀을 깨뜨릴 수 있다면, 우리가 부흥(復興)할 수 있다고 봐요. 그걸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죠. 노조의 권력을 삭감하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은 일어설 길이 없습니다. 국민들이 ‘노조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얘기할 정도가 되어야 경제 재생의 바탕이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 국민들의 의식이 바뀔 수 있을까요.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젊은 세대는 바뀌는 환경에 적응해왔어요. 요새 젊은 대학생들을 보면 올바른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나이 든 사람들은 퇴장하는 마당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해야 할 지혜로운 행동은, 우리의 후손들, 손자뻘 되는 사람들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천성”
복거일 선생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단식을 높이 평가했다. 사진=조선DB |
“국민들은 집권 세력이 선전·선동한다고 해서 잘 다스려지지 않아요. 사람들은 배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높았지만, 지금 내려갔잖아요? 그게 하나의 배우는 과정 아니에요? 지금 안 바뀌면 다음에 바뀐다고 생각하면 돼요. 우리가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잖아요. 하지만 노력하니까, 외부 환경의 변화로 일본이 망했잖아요? 다시 나라를 세웠잖아요. 역사는 똑같아요. 현 정권이 아무리 뭘 해도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요.”
― 이러다가 우리가 북한에 흡수통일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이 그렇지 북한이 우리를 접수할 능력이 있나요? 어떻게 접수해요? 이 국민들을 어떻게 통제해요?
한때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결국은 다시 자유국가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왜 자본주의가 강한가요?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운 상태예요. 인위적(人爲的)으로 사회주의로 만들지 않으면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가 번 돈은 내 거다, 내가 번 재산은 내 거다’, 이게 자본주의 원칙 아니에요? 사람 천성이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바꿔요? 공산주의가 결국 망했잖아요?
길게 보면 밝다고 봐요. 물론 지금 당장에 대해 얘기하자고 하면 별로 할 말은 없죠. 시원한 얘기는 안 나오지만, 뭐가 문제예요?”
― 당장 시원한 얘기는 아니군요.
“당장의 답답한 상황에 대해 시원한 얘기를 하면 그건 사기꾼이에요. 답답한 현실을 누가 어쩔 수 있겠어요? 그래도 황교안 대표가 그렇게 지청구를 먹었는데도, 생각도 못 한 엄동설한에 청와대 앞 단식을 해서 국면이 바뀌었잖아요?”
― 황 대표의 단식이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까.
“저 친구들(현 집권 세력-기자 주)이 얼마나 매정한 친구들인지 나왔잖아요? 그 노인네-황교안 대표도 노인네입니다-가 추운 데 가서 떠는데 천막을 거둬냈잖아요? 세상에, 정말 사악한 친구들이에요. 황 대표의 단식은 그걸 드러냈고, 분위기가 바뀌었잖아요. 사생결단(死生決斷), 황교안 대표는 목숨을 건 겁니다. 그걸 했어요.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사건이 터지고, 그런 일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면 역사가 바뀌는 겁니다.”
“다음 대선 전망은 半半”
― 아까 젊은 세대를 믿는다고 했는데, 솔직히 괜찮은 친구들보다는 안 괜찮은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선거 때에는 괜찮은 친구도 한 표, 안 괜찮은 친구도 한 표고요.
“그것도 시장경제 원리 아닙니까. 겉보기에는 저마다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나중에 사회가 조화를 이룬다는 건 진리예요.
우주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그걸 경제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이론적으로 얘기하면 ‘일반균형이론’이라고 하는 거죠. 그걸 생물학에서 받아들여서 ‘상호적 이타주의(利他主義)’로 정립했어요.
근래에는 물리학에서도 그게 통해요. 양자물리학에서는 이 세상은 얽힘(entanglement)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어떤 힘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뻗치는데, 그 힘들이 얽혀서 무한으로 반복되면 세상의 피륙을 형성한다는 거죠. 세상의 기본질서는 협력이에요. 보기에 당장은 어떤 사람이 이기주의적으로 구는 것 같아도, 그 이기주의가 실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인이 되는데, 그게 사회에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 그런가요.
“예컨대 현 정권에서 보조금을 받는 사람들이 현 정권을 지지한다고 칩시다. 그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정권은 그 사람들에게 계속 돈을 대야 할 거 아니에요?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언젠가 이 사람들이 배신할 거 아니에요. 그것이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작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인 존재들만 모여가지고서도 그냥 질서가 형성됩니다. 생각보다는 전망이 밝다고 봐요.”
― 그렇게 보는 근거는 뭡니까.
“1년 반쯤 전에 어떤 신문과 인터뷰를 했어요. 기자가 ‘다음 대선 전망을 어떻게 보느냐’고 하기에 반반(半半)이라고 했죠. 그 기자가 놀라서 묻기에 ‘아니, 경제학 교과서에서 안 된다고 하는 걸 골라서 하는 사람들인데 결과가 좋겠소? 그래서 반반인 겁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경제학 교과서에 있는 내용들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뽑아낸 진실 아니에요? 그 진실에서 다 어긋나게 하면 결과가 좋겠어요? 이 사람들이 인륜(人倫)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정권이 어떻게 오래가겠어요?”
‘문화의 힘’
― 그런데도 맹목적으로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게 다 문화의 힘이 저쪽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게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죠. 그 후유증이 오래가고 있어요. 언젠가 신문사에서 앙케트를 하면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을 묻기에 《태백산맥》을 꼽았어요. ‘부정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여서….”
―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역대 정권이 문화의 힘을 몰랐어요. 예를 들어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의 경우 이념적으로 무임(無賃)승차자예요. 자기가 돈만 벌면 그게 전부 다인 줄 알았고 문화에 대한 걸 몰랐잖아요. 박근혜 전 대통령도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랐잖아요. 두 분 다 결말이 안 좋은 것은 많은 부분이 문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결정한다는 걸 몰랐던 데서 비롯됐다고 봐요.”
― 그걸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제라도 우리가 바로잡아야겠죠. 바로잡을 길이 없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성에 차지 않을지는 몰라도 탈북자나 6・25전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다루는 영화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잖아요.
사실 좌파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파이프라인은 전부 좌파들이 만들었잖아요. 뒤늦게 그걸 알고 박근혜 정권 시절 김기춘 비서실장이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든 거 아니에요? 블랙리스트가 왜 나왔는지를 성찰해서 ‘앞으로 정부예산으로 하는 한 블랙리스트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걸 국민들에게 얘기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했어요. 문화의 힘을 돌려놓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되찾더라도 늘 불안할 거예요.”
“유신은 잘못”
― 소위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도 이미 문화 쪽 헤게모니는 저쪽으로 넘어갔었죠.
“노조 출신 국회의원들이 자유한국당에 의외로 많아요. 이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해요.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이 그걸 커버하기 위해 노조에서 얘기하는 걸 다 들어줬다는 거예요. 전두환 시절, 아니 유신 시절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거예요. 거기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해요.”
복거일 선생은 희곡 〈박정희의 길〉을 쓰고, 이를 무대에 올리는 등, 박정희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지식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소 의외의 얘기가 나왔다. 복거일 선생은 유신에 대해 매섭게 비판했다.
“지금 일각에서는 유신을 찬양하는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건 우파의 편향이고, 역사의 왜곡이에요. 우리가 왜 잘못됐는지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유신을 합리화시키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유신이 중공업 발전을 시켰다? 어떻게 그런 엉터리 같은 얘기가 나올 수 있어요?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모두 유신 이전부터 시작된 겁니다. 이미 중화학공업에 대한 얼개가 짜이고 시작된 후에 유신이 나온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일종의 ‘성녀(聖女)’처럼 만들거나 ‘유신은 좋은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두 역사를 뒤틀리게 만드는 겁니다. 반성할 것을 반성하지 못하게 하고, 저쪽 사람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는 겁니다.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 권력욕에서 나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복거일 선생의 얘기 중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다. 복거일 선생도 기자의 얼굴에서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이 얘기를 꼭 쓸 필요는 없어요. 제가 바라보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한 얘기니까…”라고 말했다.
“유신, 좌파 득세 바탕 됐다”
― 아니, 하신 말씀이니까 쓰겠습니다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저는 그 시절을 겪은 사람이에요.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할 때의 충격이란… 제가 회사 내에서 야당 기질이 강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보니, 선배가 와서 저를 밀착 마크해서 투표장으로 데리고 갔어요. 선배가 기숙사에 와서 ‘복형, 내가 공장장 지시를 받았는데, 내 사정 좀 봐줄 수 있겠소?’ 그러면서 웃어요. ‘아유, 선배님, 그러면 갑시다’ 하고 함께 가서 찬성표를 찍었어요. ‘이 마당에 반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싶어서….”
복거일 선생은 1968년 공화당 내 JP 세력이 숙청된 국민복지회 사건 이야기도 꺼냈다.
“그때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던 김용태(金龍泰)씨를 비롯해 JP 측근 공화당 창당 멤버들이 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가서 고문당하고 그랬잖아요? 선친(先親)이 김용태 선거구 면책(面責)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얘기를 자세히 들었어요.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근대정당인 민주공화당이 그냥 날아가버린 겁니다. 민주공화당은 목표가 분명하고 조직이 합리적이고, 전국적 조직을 갖춘 최초의 근대정당이었어요. 그걸 유신으로 허물어버리고 유정회를 만들었잖아요. 박정희 대통령 자신의 개혁을 이어갈 정치조직이 그런 식으로 없어진 것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니 의외입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분이고, 이런 일들은 사소한 일이에요. 하지만 유신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게 10・26으로, 광주(光州)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상적 탄압이 들어가고, 그게 오늘날 좌파가 득세하는 바탕이 된 거예요. 우리가 역사를 얘기하려면 엄정한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해야 합니다.”
“3不 정책 파기해야”
2019년 6월 27일 韓中정상회담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복거일 선생은 문재인 정권의 ‘3不 정책’ 폐기를 강조했다. 사진=뉴시스 |
“저는 일단 현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를 끊고서 중국에 붙으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를 파기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런 의도가 좌절된 것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고비를 넘긴 거예요. 일본과의 관계가 파국이 안 난 이상, 다음 정권에서는 3불(不) 정책(▲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 체계에 들어가지 않으며 ▲한・미・일 안보협력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중(對中) 약속)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 3불 정책을 어떻게 무너뜨린다는 얘기입니까.
“3불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이 반역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문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문 대통령을 반역죄로 법정에 세운 후 3불 정책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되는 반역적 행동이라는 법원의 판단을 받아내야 합니다.”
―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진 않지만, 전직 대통령을 또 감옥으로 보내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문 대통령을 꼭 감옥으로 보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 대통령은 법원 판결이 나오자마자 ‘전직 대통령을 또 감옥으로 보낼 수는 없다’면서 사면(赦免)하면 됩니다. 다만 그 법원 판결을 근거로 중국에 대해서 ‘3불 정책은 헌법에 반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기 때문에 파기한다’고 얘기하자는 것입니다. 한미동맹이 약해지는 게 다 3불 정책 때문이에요.”
― 3불 정책이 반역적이라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을 재판에 회부하는 순간부터 중국의 태클이 들어올 텐데요.
“물론 현실적으로 어렵겠지요. 저는 3불 정책을 깨야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반(半)독립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하나 나와서, ‘좋다. 중국의 핍박 다 받겠다. 하지만 이건 헌법에 어긋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나는 헌법을 지켜야 하니,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다. 맘대로 하라’는 결기를 보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중국에 예속됩니다. 이미 하나씩 하나씩 예속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여기서 저항하고 반격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3불 정책 파기입니다.”
― 중국에 그게 통할까요.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을 각오를 하고 두 차례 소련과 전쟁을 벌여, 소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물론 결국은 패했지만, 소련도 ‘이 사람들은 쉽게 짓밟을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에서 핀란드를 소련의 외교・안보적 영향력 아래 두는 선에서 만족했습니다(핀란드화). 결국 핀란드는 발틱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처럼 소련에 병합되거나, 동구 국가들처럼 위성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에 의하면, 1907년 군대해산 당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고 난 후 한국군이 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4시간 동안 교전을 벌이다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을 우러러봤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지렁이가 아니네’라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겁니다.”
“암 걸려도 20년 이상 생존 가능”
2014년 6월 복거일 선생의 자전적(自傳的) 소설 《한가로운 걱정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의 하루》가 나오면서, 그가 암에 걸렸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치료를 거부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났다. 복거일 선생이 여전히 건강한 것은 참 다행한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정말 복거일 선생이 암에 걸린 게 맞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 암에 걸린 지 5년이 넘도록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암에 걸린 사실이 알려진 게 5년이고, 암에 걸린 것은 8년이 지났어요.”
― 5년이라고 하더라도, 진짜 암에 걸렸다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는 게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설명이 돼요. 우리가 대개 암에 걸린 후 몇 년 산다는 것은 중위수(中位數)나 최빈수(最頻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5년 생존율’이라고 하면, 5년이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이기는 하지만, 10년, 20년, 그 이상 사는 사람도 조금은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고 5년 내에 모두 죽는다는 건 아니죠. 실제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J. 굴드도 젊어서 암에 걸렸지만, 20년 이상 더 살았다고 합니다. 저도 그 운 좋은 경우에 속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혹시 오진(誤診)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진은 아니었다고 봐요. 사진도 나왔고, 의사와 상의도 했으니까….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로 번져 있었어요. ‘3년만 더 살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어요.”
“치료 거부는 작가이기 때문에 내린 특수한 결정”
― 그냥 치료받을 걸 그랬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작가로서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 굉장히 빨리 쇠퇴해요. 그래서 한 살이라도 나이가 적을 때, 암 초기의 1년이 나중의 3년, 5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적(知的)・육체적으로 쇠퇴하면 글을 못 쓰잖아요? 그래서 수명을 더 연장하는 것보다는 지금 치료를 안 받으면서 열심히 쓰겠다는 계산을 한 거예요. 제가 작가이기 때문에 내린 특수한 결정이지 딴 게 아니에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진 모르잖아요? 지금은 하루하루가 다 소중합니다. 앞으로 더 오래 사는 것, 80세, 90세까지 사는 것보다는 지금 1년이 제게는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지금 쓰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소설 〈물로 쓰여진 이름〉을 완성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일단락 짓고 싶어요. 그것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이 소설로 《태백산맥》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100분의 1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흔들리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읽고 ‘아, 역시 우남은 위대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