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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대신 송시열 택한 조선, 亡國으로 치닫다

이강기 2020. 3. 13. 09:01

김육 대신 송시열 택한 조선, 亡國으로 치닫다


입력 2020.03.13 03:00

[김기철의 시대탐문] [9] '김육 평전' 낸 이헌창 고려대 교수

대동법 시행·동전 유통한 김육, 나라 다시 일으킨 최고 개혁가
업적보다 이념 높이 산 조선… 명분 앞세우는 현재까지 영향

역사에 관심 있다면 김육(金堉·1580~1658)이란 이름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국사 책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인물로 나온다. 이번 주 '김육 평전'(민음사)을 낸 이헌창(65)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를 '조선 최고의 개혁가'로 부른다. 그보다 훨씬 유명한 명신·재상이 수두룩한데, 최고의 개혁가라니…. 이 교수는 우리 사회의 인물 평가가 어딘가 잘못돼 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최대의 정책 업적을 거둔 이로 김육을 따라올 인물이 드문데, 그만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관은 조선을 어떻게 볼 것인지와도 이어진다.

―김육이 업적에 걸맞은 평가를 못 받았다고 했다.

"조선 시대는 실제 정책 업적을 남긴 명신보다 학자를 높게 평가했다. 유학은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는 학문을 추구한 학자를 현실 정치를 담당한 관료보다 높이 쳤다. 조광조·이이·이황·송시열…. 조선 시대 최대 영예인 문묘 종사는 정통 주자학자의 몫이었다. 김육은 효종 때 영의정으로 활약했는데 문묘는커녕 효종의 배향공신(配享功臣·종묘에 왕과 함께 모시는 공신)에도 못 올라갔다. 송시열이 이끄는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헌창 교수는 “조선 후기 주자학의 독주가 도덕 지상주의 추구와 경제 합리주의의 부족을 낳아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고 했다.
이헌창 교수는 “조선 후기 주자학의 독주가 도덕 지상주의 추구와 경제 합리주의의 부족을 낳아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왜 김육이 조선 최고 개혁가인가.

"김육의 개혁이 없었다면 조선은 재정 파탄에 몰리고 백성은 가혹한 세금 징수에 시달려 이반했을 것이다. 김육은 대동법 시행과 동전 유통으로 17~18세기 경제성장을 낳은 제도 개혁에 최대의 공헌을 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기틀을 닦았다."

―대동법 시행이 그렇게 중요한가.

"조선은 농지세 비율이 낮았다. 건국 초엔 대략 수확물의 10%였는데, 세종은 5%로 낮췄다. '민생 안정을 위해 적게 거두라'는 유학 정치의 이상 때문이다. 정부 재정의 절반 정도는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貢納)으로 충당했다. 문제는 지방관이나 중간 거래인의 농간 때문에 중간착취가 심했다는 점이다. 김육은 공납을 포함한 일체의 잡세를 토지 1결당 쌀 12말로 고정했다. 1결은 대략 논 8000평이고, 12말은 요즘 기준으론 5말 정도니까 세금 내는 입장에선 괜찮은 수준이었다. 중앙정부는 세수(稅收)가 20% 정도 늘었고, 납세자는 평균 절반, 최대 5분의 1 이하로 부담이 줄었다."

65세의 김육 초상화. 김육이 청나라 심양에 갔을 때 중국 화가 맹영광이 그렸다.
65세의 김육 초상화. 김육이 청나라 심양에 갔을 때 중국 화가 맹영광이 그렸다. /실학박물관

―무능했던 조선이 임진왜란 때 망하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시각도 있다.

"조선 시대 인구와 국내총생산은 3배 정도 증가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0.2%였다. 산업혁명 이전 세계 평균보다 낮지 않았다. 조선이 김육·유성룡의 정책 지향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게 식민지화의 길을 닦았다. 의리와 명분을 우선시한 정통 주자학자들이 권력을 잡은 게 갈림길이 됐다."

―요즘도 업적보다 도덕적 이상을 추구한 인물을 더 높게 치는 문화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만보다 김구를 더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과 같은 맥락인가.

"조선 시대 연구자로서 현대사 인물을 평가하긴 조심스럽다. 김구도 훌륭하지만 이승만이 대한민국 국가 수립의 최대 공로자였던 건 분명하다. 어느 시대든 정책을 추진하다 보면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김육도 대동법 시행과 동전 유통으로 숱한 비난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밀고 나갔다."

이 교수는 선조 이후 당쟁(黨爭) 시대에도 김육이 국정 목표를 위해 정파를 뛰어넘는 협력을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김육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파를 초월해 뜻이 같은 관료, 정치인의 협조를 구했다. 김육은 서인이었지만 남인인 조호익을 스승으로 받들고, 남인 제자를 길렀다. 김세렴·조경·허적 등 남인 명사들이 김육이 추진한 정책에 협력하고 후원했다.' 진영 갈등이 극심한 시대, 오늘의 '김육'은 어디 있을까. 조선이 송시열이 아니라 김육의 노선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3/20200313001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