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2)
근정전 마당은 조정(朝廷)이라 부른다. 조정에는 거칠게 떼어낸 돌 박석(薄石)이 바닥 포장재로 깔려있다. 근정전의 마당에 깔린 박석은 투박하게 다듬어서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울퉁불퉁하고 거친 느낌이다. 제대로 마무리를 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이 거친 마감마저도 의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끄럽게 다듬질한 석재 표면은 보기에는 깔끔해 보일 지라도 장시간 야외에서 진행하는 행사의 경우 사람들은 햇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으로 몹시 지치게 된다. 박석의 거친 마감은 이런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배려로 빛의 되쏘임 현상을 차단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표면이 거칠어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관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지표면의 경사를 두고 포장되었다.
비오는 날 근정전 마당 박석 위로 쏟아지는 물길을 보면 일제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양 끝의 수구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냥 근정전 마당에 들어섰을 때는 지면의 경사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 동서 양 행각의 기단을 살펴보았을 때 차이가 확실 해 진다. 박석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여러 기능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어울리는 훌륭한 부재였다. 자연석(화강암)을 거칠게 떠내어 깔아놓은 박석이 지니는 자연스러운 돌 맛이 얼마나 장중하고 아름다운지는 근정전 조정에서만 느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 공사 때 사용된 석재는 돌의 중량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채석하려 했다. 궁궐 공사 때 사용한 다양한 용도의 석재들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얻었지만, 바닥에 깔리는 박석은 강화 석모도와 해주에서 채석한 것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강화 석모도 박석은 그 절리가 고르고 반듯해서 많이 사용하였다. 1647년(인조 25) 창덕궁 공사 때 사용된 박석은 모두 강화도에서 채석되었고, 18세기 궁궐 공사 때는 창의문 밖이나 남산 아래 인근에서 채석했다고 한다. 1906년 경운궁 중건을 비롯해 대한제국 시절에 진행된 궁궐 공사에도 석모도에서 채석한 박석을 사용하였다. 박석은 돌의 절리(節理)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형태와 바닥재로서의 여러 기능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잘 어울리는 훌륭한 부재였다.
옛 사람들이 선택했던 궁궐의 박석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이고 아름다운지를 확인하려면 남아있는 본래의 박석과 새로 복구한다고 깔아놓은 현대 박석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해 진다. 일제강점기에 궁궐 마당의 박석을 들어내고 잔디를 심었다가 해방 후 다시 복원한 창덕궁이나 창경궁 덕수궁의 기계로 다듬은 박석을 보면 기계의 맛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당장에 비교가 된다. 화강암이 지닌 거친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사람의 손맛에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 조선 궁궐의 박석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박석에 꽂힌 무쇠고리이다. 박석에 박혀 있는 쇠고리는 무엇에 쓰였던 것일까. 옛 그림이나 궁중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儀軌)를 보면 고리는 행사 때 해 가리개용 차일을 칠 때 그 끈을 고정시켰던 것으로 마당에만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근정전의 기둥이나 창방에도 여럿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박석 고리라는 물건이 설치된 자리를 살펴보면 죄다 3품까지의 고위관리들이 서는 위치이다. 고위직 공무원은 햇볕이 따가워지면 해 그늘이라도 얹을 수 있는데 아랫사람들은 그냥 참아야하는 고된 일상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출세는 해야겠구나. 아니면 아예 신선처럼 자연에 은둔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