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北선 비겁자, 南선 공비 손가락질…‘꿋꿋이 살라’ 백선엽 격려 큰 힘”
[정치] M 인터뷰 |
문화일보
2020년 08월 21일(金)
▲ 김신조 목사가 이달 초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서울성락교회 크리스천세계선교센터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청와대 앞에서 쫓길 당시 총 한 발 쏘지 않고 남쪽으로 도망간 뒤 투항한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김 목사는 북한에서 ‘김신조 루트’를 거쳐 남한에 정착한 뒤, 지금은 신앙인으로서 제3의 삶을 통해 ‘천국 루트’를 안내하는 소임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안보강연서 백선엽 처음 봐
정치 기웃안대고 안보 한길
자유수호한 분 아직도 존경
푸에블로호 미군 송환위해
美서 ‘김신조와 바꾸자’ 제안
北은‘그런 사람 모른다’발뺌
발각뒤에도 난 총 한발 안쏴
교전하자 일부러 南으로 도주
당시 생포된게 아니라 투항
1968년 청와대를 기습한 1·21사태 당시 남파 무장공비 31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78) 서울성락교회 원로목사는 지난 7월 1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가 친일 인사 파묘(破墓·묘를 파헤침) 논란 속, 6·25전쟁 영웅 고 백선엽 장군을 조문하면서 우리 국민은 반세기 만에 기억 속에서 잊혀 가던 ‘무장공비’의 악몽을 떠올렸다. 김 목사는 1970년 4월 10일 서류재판이 끝나고 일반 사회로 나오기 직전 군 방첩대 관리요원과 함께 군에서 퇴역한 백 장군을 인천에서 만난 인연과 함께 “대한민국 자유수호의 뿌리로 존경하는 분”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이달 초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서울성락교회 크리스천세계선교센터 예배당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군사정권 시절 하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냈다. 김 목사는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북에 납치된 미군 송환을 위해 내 목숨이 거래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김 목사는 “경기 파주에서 우 씨 나무꾼 4형제를 살려준 결과, 청와대 진입 직전 군인들 이동을 인지하고 실패를 직감했다”며 “청와대 앞에서 쫓길 때 총 한 발 쏘지 않고 남쪽 인왕산으로 도망가 투항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백선엽 장군과의 인연은.
“1970년 4월 10일 서류재판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기 한두 달 전쯤 정보기관이 인천에서 마련한 안보강연 행사 때 백 장군이 나를 찾아와 소속 부대와 사용 무기, 북한 동향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당시 백 장군이 ‘이남 왔으니 꿋꿋하게 잘 살아라’고 격려한 게 기억에 남는다.”
―백 장군을 어떻게 기억하나.
“백 장군은 정치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오직 한길 대한민국 안보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분이다. 백 장군 같은 훌륭한 어른이 계셨기에 북한의 남침과 휴전 후 엄청난 북한 도발을 물리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안보를 튼튼히 해준 덕분에 온 국민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북한의 124군 창설 배경은.
“김일성이 1967년 8월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정찰국 직속 특수부대인 124군을 창설한 배경에 대해 백 장군에게 자세히 설명해드렸다. 당시 저는 ‘김일성이 6·25전쟁 실패를 교훈 삼아 장기전 대신 단기(속도)전을 수행하기 위해 1만 명 규모의 특수부대를 창설해 남한 전국 8도를 육·해·공으로 침투해 단기간에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얘기했다. 본부를 두고,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 8개 도에 특수요원 1000명씩을 침투시키는 계획이었다. 서울·경기도는 2000명이 서해안과 육상을 통해 바로 들어오게 돼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무기 등이 없을 때다. 나는 124군 1기생이다.”
―김일성이 1·21사태를 일으킨 배경은.
“당시 김일성은 항일투쟁 동지 김책의 아들 김정태에게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김일성은 전선 없는 전쟁 수행 계획을 수립, 육상·해상·공중으로 특수부대를 일거에 침투시켜 한 달 이내에 남조선을 정복하는 계획을 세웠다. 인민군이 대구·부산·대전 등을 동시 점령하고, 서울만 점령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당시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250달러로, 남한의 70달러보다 3배 이상으로 많았다. 북한은 AK 자동소총, 탱크까지 만들었지만 남한은 수류탄밖에 못 만들던 가난한 나라였다. 북한이 경제·군사 면에서 월등히 앞섰다. 김일성이 ‘남조선이 더 발전하기 전에 장악하라’고 지시했는데, 앞날을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남한에 정착해 살면서 보니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0년부터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21사태 당시 김 목사가 총을 한 발도 안 쏜 게 사실인가.
당시 교전으로 총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남쪽인 인왕산으로 도망갔다. 아주 영리하게 행동한 것이다. 북쪽으로 동료들과 같이 가면 총을 쏠 수도 있고, 북쪽에 작전 병력이 투입돼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생포된 게 아니고 투항했다. 나중에 방첩대와 함께 투항 장소에 내가 두고 온 체코제 ‘피피’ 기관단총과 소련제 ‘떼떼’ 권총을 조사했다. 기관단총 30발과 권총 8발이 장탄된 채 한 발도 발사되지 않은 게 확인됐다. 왜 총을 안 쏘았느냐고 묻길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러 왔지 민간인, 군인들을 죽이러 온 게 아니다’고 대답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내가 총을 쏘지 않은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언론에 내가 함께 총을 쏜 것처럼 보도되는 상황을 방치했다. 나같이 힘없는 사람은 한마디도 항의할 수 없던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서울 침투 당시 만난 우 씨 나무꾼 4형제를 살려줘 그들이 신고하면서 청와대 습격이 실패했다. 살려준 이유는.
“1968년 1월 19일 오후 1시쯤 경기 파주군 법원리 소리골 근처 산등성이에서 우 씨 4형제를 만났다. 우리 일행은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만 은밀히 행동했다. 당시는 반공이 국시로 간첩 신고를 많이 하던 때라, 누구든 조우하면 죽이도록 지시받았다. 언 땅을 파서 4구의 시체를 묻는 일도 만만찮은 터에 우 씨 4형제 중 한 명이 당돌하게 우리 일행 손목을 덥석 잡으면서 ‘아저씨들 진작 내려오시지,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우리같이 헐벗고 굶주린 인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이제 우리 인민들은 해방이 되는 겁니까’하며 아주 반가워하는 데에 속았다. 우리 일행은 순간 당황하고 어리둥절했으나 우리가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을 죽일 마음이 흔들렸다. 그들을 살려주면 훌륭한 우리 편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 뒤에 인민군 대군단이 공격하고 내려올 것인데 곧 남조선 세상이 뒤집힐 테니 잠시만 참고 있으라고 했다. 당 세포회의를 열어 투표로 생사를 결정했는데, 살리자는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그들에게 공산당 가입 서약서를 쓰게 하고 곧 공산화되면 출세시켜주겠다고 회유했는데 산에서 내려가자마자 신고했다. 우리 일행은 너무 순진했다.”
―당 세포회의서 우 씨 4형제를 살해하기로 했다면 청와대 습격은 성공했을까.
“그때 죽였으면 청와대 습격 성공 확률은 100%였다고 본다. 1월 21일은 일요일로, 군인·경찰 병력도 대부분 휴가를 가고 없어 방어 능력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우 씨 4형제가 바로 신고하지 않고, 청와대 습격이 성공했다면 대한민국은 일대 혼란과 좌절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뒤로도 ‘그 가난에 찌들어 보이던 우 씨 4형제가 어찌 우리를 신고했을까, 파주군수가 욕심나지도 않았을까’ 참으로 궁금해 어느 날 시간을 내어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반공에 대한 확실한 교육을 받았기에 우리 일행이 칼을 꺼내 들던 그 짧은 시간에 정신을 차려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그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우 씨 4형제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우 씨 4형제가 대한민국을 살린 영웅이다.”
―그 후로 우 씨 4형제를 본 적이 있나.
“강연을 다니며 사촌 형제간인 4형제를 만났다. 막내 우성재 씨는 내가 넘어올 때 21살이었는데, 파주경찰서 보안과장을 지낸 뒤 지금은 퇴임했다. 요즘도 경기 일산에서 가끔 만난다.”
―생포 후 기자회견 때 ‘나, 청와대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란 도전적 말투가 화제가 됐다.
“간첩을 대상으로 생방송 기자회견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완전한 전향을 한 것이 아닌 상태에서 효자동 방첩대(CIC) 사령부와 CIC 사령부 서빙고 분실을 거쳐 미군부대 CIC로 이첩됐다. 124군 부대가 대량 남파될 것이란 내 말을 미 CIC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군은 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21사태 이틀 뒤 첩보 활동 임무를 띤 장병 83명이 탄 푸에블로호를 보냈다가 원산 앞바다에서 통째로 납치됐다. 푸에블로호 사건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 정부는 푸에블로호 선원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김신조와 바꾸자’고 제의했더니 북측은 ‘우리는 김신조라는 인물을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하더라. 내 목숨을 건 거래 사실을 당시엔 까마득히 몰랐다.”
―1968년은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 등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죽 이어졌다. 제2의 6·25전쟁이 발발할 뻔했다.
“그해 11월 124군 부대에서 훈련받은 특수부대 요원 120명이 남파됐는데,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푸에블로호가 확인하려던 내 말의 진의가 입증된 것이다. 124군 부대가 창설됐다던 내 말을 믿지 않던 미국 정부가 이 사건이 터지자 한국에 대한 태도를 확 바꾸게 된다. 한반도 방위를 적극 지원하는 의미에서 1억 달러의 원조금을 보내, 한국군의 전방 목책을 모두 철거하고 155마일을 철책선으로 깔고 탱크 저지선을 만들고 향토예비군제도·유격훈련도 그때부터 시행됐다. 군 복무도 6개월 연장됐다.”
―전국으로 반공 강연을 다녔는데.
“간첩 출신 첫 강연자로 ‘반공 강연의 1인자’ 소리까지 들었다. 나는 미국이 준 1억 달러 중 1달러도 구경을 못 했는데, 그러잖아도 군대생활로 고달픈 남한 남자들을 더욱 못살게 구는 악법을 만들었다며, ‘너 때문에 군대 있을 때 개피 쏟았다’는 불평을 한 호텔 화장실에서 낯선 남자로부터 직접 듣기도 했다. 내가 투항해 북한 전략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다.”
―현 정부 들어 남북,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않고 있다. 북한이 핵을 내려놓을 것이라 보는가.
“한국은 대통령이 12번째 바뀌었지만 북한은 김 씨 세습 왕조 3명뿐이다. 한국은 전임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지만 북한은 김정은이 자기 아버지·할아버지를 비판할 수 있는 체제가 못 된다. 북한 체제의 목적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자기 체제와 정권을 지켜야 하고 그래서 핵무기가 필요하다. 북한도 지금은 많이 변한 건 사실인데, 주민들이 먹고사는 게 점점 힘들어져 고통스러워한다. 한국은 자유민주국가지만, 북한 땅은 ‘자유’가 없는 독재 체제다. 3대 세습하면서 계속 독재체제를 끌고 나가려는데, 북한이 주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인권 정책 등을 펴도록 우리가 더 많이 주문해 북한 정권이 압박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정충신 선임기자 csjung@munhwa.com
정리 = 김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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