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당·송시(唐·宋詩)

이강기 2020. 9. 15. 13:45

당·송시(唐·宋詩)

 

 

대학지성 In & Out 기자

대학지성

2020.08.16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1강>_ 김준연 고려대학교 교수의 「당·송시(唐·宋詩)」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1강 김준연 교수(고려대 중어중문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준연 교수는 “중국 고전 문학의 일부에 그치지 않고 현대를 사는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존재”로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당시(唐詩)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즉 “그야말로 천 년이 넘도록 ‘글로벌 브랜드’의 위상과 의미를 잃지” 않은 당시가 어떻게 “정전(正典)의 지위에 올라 오랜 세월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전해주는”지 ‘탄생’과 ‘혁신’, 네 대가들—이백, 두보, 백거이, 이상은—의 작품 세계와 ‘명편의 정전화’를 키워드 삼아 들여다본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과 함께 전통 시대 중국 시의 “성장 과정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송시(宋詩)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정점의 한시에 대한 탐색을 마무리 짓는다.

▲ 지난 7월 18일, 김준연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 1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당시(唐詩)는 어떻게 정전이 되었나?

 

1. 들어가는 말

 

당시(唐詩)는 중국 전통 시대 여러 왕조 가운데 하나인 당나라의 시라는 뜻이다. 당나라는 서기 618년부터 907년까지 약 300년 가까이 존속한 왕조로서, 이때 창작된 시는 최소한 천 년 이상의 세월을 지난 셈이다. 그러나 당시는 중국 고전 문학의 일부에 그치지 않고 현대를 사는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낯설지 않은 존재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야말로 천 년이 넘도록 ‘글로벌 브랜드’의 위상과 의미를 잃지 않았다는 뜻인데, 당시가 정전(正典)의 지위에 올라 오랜 세월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전해주는 것일까?

 

 

2. 당시의 탄생

 

당나라에서 크게 발달한 문학 장르는 시였다. 청나라 때 그때까지 전해지던 당시를 모아 펴낸 『전당시(全唐詩)』에 3276명의 시 5만 3035수가 수록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면 3000명이 넘는 이들 당나라 시인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정답부터 알아보면 ‘전현직 지방 공무원’이다. 『전당시』 작가의 58%가 이에 해당한다. 『전당시』 900권 가운데 한 권 이상의 분량을 차지한 전문 시인으로 범위를 좁히면 ‘전현직 지방 공무원’의 비율은 70%까지 증가한다. 당시 선집인 『당시삼백수』에서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인 67명 가운데 ‘전현직 지방 공무원’을 찾아보면 무려 55명(82%)에 이른다. 이런 결과에 필시 어떤 내막이 있으리라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일 것이다.

 

이것은 앞의 질문에 비하면 답을 찾기가 쉬울 듯한데 바로 ‘공무원 임용 제도’가 그것이다. 당나라는 수나라에서 개발한 ‘과거(科擧) 제도’를 이어받았다. 그 여러 가지 과거의 종류 가운데 응시생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진사과(進士科)였다. 인기만큼 경쟁이 치열해 경쟁률이 100대 1을 넘나들었고, 응시자 중에는 20수, 30수씩 도전하는 이가 수두룩했다.

 

진사과는 3교시로 나뉘어 1교시 유학 경전 괄호 채우기, 2교시 시와 부(賦) 한 수씩 짓기, 3교시 시사 논술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 시 창작 연습이 시인을 대량 배출한 데는 당나라 진사과 특유의 제도가 일조했다. 그것은 통방(通牓)이라 불리는 방식이었는데, 시험 감독관이 사전에 ‘합격 예정자 명단’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응시생이 ‘합격 예정자’에 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가장 중요한 준비 사항은 시험 감독관이 급제자를 추리는 과정에서 참작할 만한 추천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응시생은 시험 답안 작성과 별도로 몇 명의 추천자 명단을 제출해야 했기에 시험 감독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찾아다녔다. 이때 빈손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권(行卷)’이라 하여 평소에 지은 시 몇 수를 지참해 평가를 받는 식이었다. 응시생들은 시험에 합격하고 중앙 공무원이 되어 장안의 대궐에서 근무하는 꿈을 꾸며 매일 시를 짓고 품평을 받았다.

 

과거 시험의 답안으로 작성된 시를 시첩시(試帖詩)라 한다. 시를 짓는 시험의 시제(詩題)는 대개 고전에서 제시된다. 진사시의 시험 과목인 시 창작은 고전이라는 문화적 유산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개인의 소회를 담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唐詩)의 문화 유전자(Cultural Gene)가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당나라 290년의 역사에서 이처럼 진사과에 합격한 사람이 6603명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가 시인으로서 『전당시』에 이름을 올렸음은 물론이다.

 

 

3. 당시의 혁신

 

1) 치열한 창작 태도

 

중국 현대 시인이면서 당시 연구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문일다(聞一多)는 ‘당시’의 글자 순서를 뒤집어 ‘시당(詩唐)’, 즉 ‘시의 당나라’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그 의미는 당나라 사람의 생활이 시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시가 생활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일부 응시생이 진사과를 위한 수험 준비로 시 창작을 연마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시를 짓는 시인은 치열한 창작 태도로 작시에 임했고, 감상하는 독자는 그들의 시에 열광했다.

 

두보(杜甫)를 예로 들면 그는 한 편의 시에서 “말이 남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았다[語不驚人死不休]”고 술회했다. 달리 말하면 “목숨을 걸고 짓는다”는 것이다. 몸이 상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시 창작에 몰두했던 두보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이렇게 시를 짓는 데 갖은 정성을 쏟는 태도를 ‘고음(苦吟)’이라 부른다.

 

2) 혁신적인 형식과 내용

 

중국은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민가를 수집하고 정리한 결과를 『시경(詩經)』이라는 유가의 경전으로 전하고 있을 만큼 ‘시의 나라’라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 당시(唐詩)가 이러한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하여 당시가 예로부터 전해진 시의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의 성공 비결은 오히려 ‘혁신’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근체시(近體詩)의 발명’과 ‘새로운 소재의 개발’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근체시’는 ‘고체시(古體詩)’, 즉 옛날 형식의 시에 상대되는 개념이니 ‘현대적 형식의 시’라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들은 시 형식의 현대화를 압운(押韻), 평측(平仄), 구식(句式), 대장(對仗) 등 크게 네 분야에서 추진했다. 압운은 운자를 쓰는 방식으로, 이를 두 구에 한 번씩 평성운(平聲韻)만 쓰는 것으로 통일했다. 평측에서는 이른바 점대(粘對)의 규칙을 정해 음운상의 조화를 꾀했다. 구식은 한 행에 쓰는 글자 수를 다섯 자(오언)와 일곱 자(칠언)로 이원화하고, 행의 숫자는 4행(절구), 8행(율시). 12행 이상(배율)의 세 가지로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대장은 율시와 배율에서 첫 연과 마지막 연을 제외한 중간 연에 대구를 쓰는 것이다. 표준적인 오언율시(五言律詩)를 통해 이상에서 설명한 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김소월이 「봄」이라는 시로 번역했던 두보의 「봄에 바라보다[春望]」를 예로 든다.

 

國破山河在, ××○○× 나라는 깨어지고 산하만 남아
城春草木深. ○○××● 봄이 온 성에는 초목이 짙구나
感時花濺淚, ×○○×× 시절을 생각하여 꽃에도 눈물 뿌리고
恨別鳥驚心. ×××○●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가슴 놀래누나
烽火連三月, ○×○○× 봉화는 삼월을 연이어
家書抵萬金. ○○××● 집 편지는 만금에 달하는데
白頭搔更短, ×○○×× 희어진 머리 긁을수록 더욱 짧아져
渾欲不勝簪. ○××○● 거의 비녀를 지탱할 수 없겠구나
(●: 평성운, ○: 평성, ×: 측성, 3~6행: 대장)

 

압운은 변화가 많은 음(측성)과 변화가 적은 음(평성)을 교대로 쓰되 평성자를 운자로 하여 안정감을 도모했다. 위 시에서는 ‘深(심)’, ‘心(심)’, ‘金(금)’, ‘簪(잠)’이 압운자다. 평측과 대장은 ‘ABBA’ 형식이다. 각 행의 둘째 글자를 예로 들면 평측이 ‘측평평측, 측평평측’이어서 ‘ABBA’ 형식이고, 네 연의 대장에서 산구(散句)와 대구의 분포를 살피면 ‘산구-대구-대구-산구’로서 역시 ‘ABBA’ 형식이다. 이러한 ‘ABBA’ 형식은 페트라르카 식 소네트의 전반 8행 압운에도 쓰이는 방식으로, 변화와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미학적 장치이다. 요컨대 당대에 개발된 근체시의 지향점은 『중용(中庸)』의 가르침인 ‘화위귀(和爲貴: 조화를 귀하게 여기다)’의 정신을 자유와 절제가 조화된 형식으로 구체화했다는 면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은 새로운 소재의 개발을 통한 시의 일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나라 이전 육조(六朝) 시대(229~589) 수백 년 동안의 시는 대체로 문벌귀족의 경험과 사유로 제한되어 있었다. 당시는 육조의 시와 달리 진사과라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 공무에 참여하고자 하는 개인이 자신의 주변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시에 담고자 노력한 결과 시의 세계를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당나라 시인들은 저마다 유가의 경전인 『대학(大學)』에서 제시하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이념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당나라 시인의 심리는 ‘문학적 재능’(사령운, 사마상여, 양웅), ‘나라에 공헌’(사안, 공자, 제갈량), ‘회재불우(懷才不遇)’(가의, 완적), ‘초야에 은둔’(도연명, 엄광), ‘풍류’(산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사과에 급제해 나라에 이바지한 후 아름답게 초야에 묻히는 ‘공성신퇴(攻成身退)’를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학업을 연마해 진사시에 급제할 문학적 재능을 갖추고 나라에 크게 공헌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당나라 시인들은 시야를 크게 넓혀 자신과 주변의 인간사로부터 국가와 사회, 자연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이 영회시(詠懷詩), 애정시, 가족시, 산수전원시, 변새시, 사회시, 회고시, 영사시(詠史詩) 등 다양하게 확장된 소재로 나타났던 것이다. 시는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나 유희가 아니라 사회에 진출하려는 젊은이의 일상이 되었다.

 

3) 사회 연결망의 형성

 

과거의 진사과는 시인과 시인 사이의 사회 연결망(social network) 형성에 촉진제가 되었다. 진사과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습작을 준비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추천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응시생이 추천을 받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을 ‘간알(干謁)’이라 불렀다.

 

사회 연결망이 이러한 ‘간알’의 관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평적 관계의 시인들끼리도 수시로 시를 주고받으며 사회 연결망을 구축했다. 이때 연결 역할을 맡는 시를 이른바 사교시(social poems)라 부른다.

사교시는 헤어지는 상황에서 쓰는 이별시, 안부를 묻는 기증시(寄贈詩), 시를 보내고 그것에 답하는 창화시(唱和詩) 등이 주류를 이룬다. 사교시는 자연스럽게 ‘미러링(mirroring) 효과’를 동반하는데, 이것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과 수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나라 시인은 조밀하게 얽힌 사회 연결망 속에서 시를 창작하고 서로 공유했다. 그 결과 당시(唐詩)의 혁신적 성과는 더 빠르고 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 산수전원시파, 변새시파, 통속시파, 기험시파(奇險詩派)와 같은 유파와 문장사우(文章四友),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등의 시인 집단이 사회 연결망을 통해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4. 당시 대가들의 작품 세계

 

공전의 치세와 멸망 직전의 난세가 겹친 당나라의 시대적 환경, 진사과라는 공무원 임용 제도에 힘입은 시 창작 열풍, 사교시로 형성된 사회 연결망의 구축 등으로 당시(唐詩)는 번영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개별 시인들의 개성적 작품 세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번영의 성과가 구체화되지 못할 것이다. 『전당시』에 이름을 올린 3276명의 시인은 저마다 자신의 재능을 뽐냈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 네 사람을 선정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각각 이백, 두보, 백거이, 이상은이다. 이백에게는 신선 같은 시인이라는 뜻의 ‘시선(詩仙)’, 두보에게는 성인 같은 시인이라는 뜻의 ‘시성(詩聖)’이라는 별칭이 있다. 나는 백거이와 이상은에게도 각각 ‘통속[俗]’과 ‘감정[情]’이라는 별칭을 붙여 균형을 맞춰주고자 한다.

 

1) 이백의 ‘선(仙)’

 

당나라 시인 가운데 이백만큼 파격적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진사과에 몰두할 때 그는 응시조차 하지 않았지만 당당히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에 입성했고, 지방 공무원을 지내는 대신 정식으로 도록(道籙)을 받아 도사(道士) 자격을 취득했다. 남들이 다 짓는다는 칠언율시를 외면하며 규율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개성을 뚜렷이 드러냈다. ‘술과 달의 시인’이라는 애칭이 있을 만큼 그의 시에는 ‘술’과 ‘달’이 자주 소재로 등장한다. 「달 아래에서 홀로 마시다[月下獨酌]」를 예로 든다.

 

꽃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花間一壺酒,
홀로 마시며 벗하는 이 없다 獨酌無相親.
술잔 들어 밝은 달을 초대하고 擧杯邀明月,
그림자 마주하여 세 사람이 되었다 對影成三人.
달이야 술을 마실 줄 모르고 月旣不解飮,
그림자는 그저 내 몸을 따라다닐 뿐 影徒隨我身.
잠시 달과 그림자나마 짝하는 것은 暫伴月將影,
즐겁게 노는 일에 봄을 놓쳐서는 안 돼서이지 行樂須及春.
내가 노래하면 달이 배회하고 我歌月徘徊,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가 흔들린다 我舞影零亂.
깨어 있을 때는 함께 즐거움 나누다가 醒時同交歡,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醉後各分散.
영원히 감정이 없는 교유를 맺어 永結無情遊,
서로 먼 은하수를 기약하노라 相期邈雲漢.

 

이 시는 44세 때 장안에서 쓴 것으로 보이며, 달밤에 홀로 술을 마시며 느낀 감회를 나타냈다. 이백은 ‘평범함’과 ‘속박’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남다른 개성과 자유를 한껏 추구했는데, 그런 기질이 그의 시적 상상력의 출발점이었다. 이백에게 ‘달’과 ‘술’이라는 소재는 모두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理想) 또는 환상(幻想)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하면서도 온전히 묻히지 않고 존재감과 기백을 드러내는 매력이 이백 시의 흡인력이 아닌가 한다.

 

2) 두보의 ‘성(聖)’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일컬어진다. 이때의 ‘성(聖)’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성인군자’의 개념이며, 다른 하나는 시 창작의 높은 성취를 기리는 뜻이다. 두보는 당나라 이전의 시를 집대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혁신가로서의 면모도 보여 이후 수많은 추종자들이 두보를 전범(典範)으로 삼아 시를 배우고자 했다. 영화 「호우시절」의 주제로 쓰인 「봄밤에 기쁘게 내리는 비[春夜喜雨]」를 감상해보자.

 

좋은 비가 시절을 알아 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만물을 싹 틔우는구나 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隨風潛入夜,
만물을 적시는데 가늘어 소리조차 없구나 潤物細無聲.
들길엔 구름이 온통 어두운데 野徑雲俱黑,
강 배엔 불빛만이 홀로 밝구나 江船火獨明.
새벽에 붉게 젖은 곳 바라보면 曉看紅濕處,
금관성에 꽃이 무겁겠지 花重錦官城.

 

이 시는 두보가 50세 때, 성도(成都)에 정착한 이듬해 지은 것이다. 화주(華州)에서 ‘지방 공무원’으로 있던 두보는 자진해서 벼슬을 버리고 전란을 피해 진주(秦州)로 이주했다가 죽을 고생을 했다. 그 후에 성도로 내려와 초당(草堂)을 마련하면서 다소 안정을 찾아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일반 백성들의 삶과 더욱 가까워진 두보는 봄날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비를 바라보며 느끼는 농심(農心)을 더욱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진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는 인자(仁者)의 견지에서 남몰래 선행을 베푸는 듯한 비를 의인화했다.

 

3) 백거이의 ‘속(俗)’

 

백거이는 3000수에 가까운 시를 남겨 당나라 시인으로는 가장 많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시를 짓는 목적을 ‘세상 구제’에 두고 ‘신악부(新樂府)’와 같은 풍유시(諷諭詩)를 개척했고, 시를 일반 대중과 더 가깝게 하고자 노력했다. 백거이의 시 가운데 「비파의 노래[琵琶行]」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편은 88구 616자에 이르는 장편이라 마지막 대목의 10구만 인용하겠다.

 

(전략)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今夜聞君琵琶語,
신선의 음악을 들은 듯 귀가 잠시 밝아졌네 如聽仙樂耳暫明.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타준다면 莫辭更坐彈一曲,
그대를 위해 비파의 노래를 지어보겠네 爲君翻作琵琶行.
나의 이 말에 감동하여 한참 서 있더니 感我此言良久立,
도로 앉아 줄을 조이니 줄 더욱 급해진다 卻坐促弦弦轉急.
처량하여 이전의 소리와는 같지 않으니 凄凄不似向前聲,
좌중의 모두가 다시 듣고 얼굴 가린 채 운다 滿座重聞皆掩泣.
좌중에서 흘린 눈물 누가 가장 많았던가? 座中泣下誰最多,
강주사마 푸른 적삼이 흠뻑 젖었더라 江州司馬靑衫濕.

 

이 시는 백거이가 45세 때 강주사마(江州司馬)라는 ‘지방 공무원’으로 부임한 이듬해 지은 것이다. 그는 강주사마 부임 전 5품관 ‘중앙 공무원’인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로 근무하고 있다가 재상인 무원형(武元衡) 피살 사건에 상소문을 올린 것이 잘못되어 6품관으로 강등된 채 지방에 내려와 있었다. 강주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백거이는 송별연에 참석차 강가에 나갔다가 비파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남다른 사연이 있는 듯하여 연주자를 불러 물어보니 본래 장안 교방(敎坊)의 연주자로 있다가 나이가 들어 장사꾼에게 시집와 쓸쓸히 지내고 있다고 했다. 백거이는 이 전직 비파 연주자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며 눈물을 쏟았다. 이 시는 마치 단편 ‘통속 소설’을 읽는 듯한 감을 준다. ‘장사꾼에게 시집 온 전직 교방 단원’이라는 소재가 통속적이고 그것을 시로 옮긴 백거이의 표현도 통속적이다.

 

4) 이상은의 ‘정(情)’

 

이상은은 진사과에 합격한 시인치고 대부분의 시간을 막부(幕府), 즉 군사령부에서 보낸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진사과 급제 후 경원(涇原) 절도사 왕무원(王茂元)의 딸과 결혼한 것까지는 무난했으나, 일생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영호초와 당파를 달리하는 왕무원의 사위가 된 일이 배은망덕으로 지목되어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어렵게 얻은 아내마저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본래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했던 이상은은 인생의 희로애락에서 느낀 소회를 섬세하게 표현해 시에 담았다. ‘무제(無題)’라고 표제를 붙인 애정시가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미묘한 ‘정(情)’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의 시 가운데 「밤비 내릴 때 북쪽에 부치다[夜雨寄北]」라는 시를 감상해보자.

 

그대 돌아올 기약 묻지만 아직 기약이 없고 君問歸期未有期,
파산의 밤비에 가을 연못이 넘친다오 巴山夜雨漲秋池.
언제나 함께 서창의 촛불 심지 자르며 何當共剪西窗燭,
파산에 밤비 내리던 때를 이야기할까? 卻話巴山夜雨時.

 

이 시는 이상은이 42세 때 지금의 스촨성에 있던 동천(東川) 절도사 군사령부에 근무할 때 지은 것이다. 이상은의 지인으로 보이는 ‘그대’가 언제 장안으로 돌아올 것인지 물었는데, 시인은 파산의 밤비가 주룩주룩 쏟아져 가을 연못의 물이 불었다는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생계를 위해 파산에 주둔한 군사령부에 머물며 하염없이 빗소리를 듣는 처량함이 절로 묻어난다. ‘그대’와 장안에서 다시 만나 파산에 밤비 내리던 이때를 추억 삼아 이야기하는 날을 꿈꿔보지만, ‘언제나’라는 불길한 시어가 그 희망을 짓누른다. 이상은의 시 「낙유원에 오르다」가 이태준의 소설 「석양」으로 변형되었듯이, 이 시도 중국에서 「파산의 밤비[巴山夜雨]」라는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는 ‘정’을 심도 있게 그려낸 이상은 시의 전형성과 확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5. 당시 명편의 정전화

 

정전(正典, canon)은 고대 그리스어 ‘Kanon’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는 측정의 도구로써 사용된 ‘갈대’나 ‘장대’를 뜻했다. 이후 ‘훌륭하다고 간주되는 작품들의 총합’을 가리키는 쪽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정전에 대한 이론은 텍스트에 불변의 절대적 가치가 내재한다는 본질주의적 입장과 텍스트는 시대적 특징이나 집단의 이익을 반영한다는 구성주의적 입장으로 나뉜다. 두 입장을 절충하자면 정전화(canonization)는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전이 생산되는 과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1) 정전화 과정에서의 ‘발견자들’

 

정전화의 과정은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명편의 발견과 이의 확산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발견자’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로 세 부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당시 선집의 편찬자이다. 특히 당나라 사람의 당시 선집, 이른바 ‘당인선당시(唐人選唐詩)’는 당시 명편 정전화의 첫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발견자’는 ‘유명 문인’이다. 이와 더불어 스토리텔링을 담당하는 이야기꾼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2) 『당시삼백수』의 의의와 한계

 

정전화 과정에서의 ‘발견자들’ 가운데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역시 당시 선집이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초정전화(hyper-canonization)의 수준에 이른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의 영향이 지대하다. 청나라 때 손수(孫洙)가 펴낸 이 당시 선집이 정전화된 데는 ‘삼백수’라는 이름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삼백’은 본래 『시경(詩經)』의 별칭이다. 여기에 앞뒤로 각각 ‘당(唐)’과 ‘수(首)’를 붙여 만들어진 책이 바로 『당시삼백수』이다. 손수가 5만여 수 가운데 310수를 선록한 것도 ‘삼백’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동등한 권위를 부여받은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러나 『당시삼백수』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진 그림자도 무시하면 안 될 듯하다. 따라서 『당시삼백수』를 통해 정전화된 당시 명편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의 정서와 맥락에 부합하는 선집을 마련해 당시를 폭넓게 감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 의도적 개입에 대한 우려

 

당시 명편의 정전화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의도적 개입이다. 교육 과정으로의 편입, 일부 현대판 당시 선집, 문화 콘텐츠 개발 등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명편의 정전화를 도모하는 까닭에 이들이 내세우는 명편에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6. 송시의 도전

 

송나라 주희(朱熹)는 중국의 시에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고시(古詩), 당시(唐詩), 송시(宋詩)가 그것이다. 송나라 이후로도 원(元), 명(明), 청(淸)의 세 왕조가 더 명멸했으나 원시(元詩), 명시(明詩), 청시(淸詩)는 존재감이 미미하다. 따라서 전통 시대의 중국 시는 송시에서 거의 성장 과정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송시의 탄생

 

송나라(960~1279)는 숭문억무(崇文抑武)와 중앙 집권을 대표적 정책으로 내세웠다. 목판 인쇄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필사(筆寫)에 의존하던 정보의 교류와 전파 방식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과거 제도의 개혁이다. 송나라는 잡다했던 당나라 과거 과목을 진사과로 통일했다. 또한 시와 부를 한 수씩 테스트했던 시부(詩賦) 과목을 없애는 한편 답안지의 이름을 가리는 호명(糊名)과 전문 필사자가 답안지를 옮겨 적는 등록(謄錄)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당나라의 응시생들이 유력자의 추천을 받기 위해 시를 지어 올렸던 ‘행권’의 문화를 일소하였다. 1년에 한 차례 30명 내외를 선발하던 당나라와 달리 송나라에서는 3년에 한 차례 400명을 선발해 송나라 310년 동안 배출된 진사가 당나라의 여섯 배인 4만 3000명에 달하였다. 게다가 2차 시험이라 할 이부시(吏部試)를 폐지하여 진사과에 급제하면 바로 관직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문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나아지다 보니 진사과에서 시부가 폐지되었는데도 시의 창작은 당나라에 비해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전송시(全宋詩)』를 기준으로 할 때 시인의 수는 1만 1000여 명, 시편 수는 20여 만 수에 이른다. 이는 시인 수나 시편 수나 공히 3배 이상 증가한 규모다. 당나라 시인으로는 백거이가 2800여 수로 가장 많은 시를 남겼는데, 송나라 때는 소식(蘇軾)이 2700여 수, 양만리(楊萬里)가 4000여 수, 육유(陸游)가 9100여 수를 남겨 큰 폭의 증가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청조(李淸照)를 비롯한 여류 시인도 100여 명 등장해 창작 계층도 확대되었다.

 

2) 송시의 혁신

 

송나라 왕조가 개창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날부터 새로운 풍격의 송시가 창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송 초기의 시인들은 ‘백체(白體)’, ‘만당체(晩唐體)’, ‘서곤체(西崑體)’ 등으로 나뉘어 각기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 가도(賈島)ㆍ요합(姚合),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11세기에 접어들어 구양수(歐陽修), 매요신(梅堯臣) 등이 등장하면서 당시와 구별되는 송시의 특징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김학주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첫째, 아름다운 형식보다도 그 속에 담는 내용의 표현을 더 중시한다.
둘째, 화려한 수사보다도 문장의 기세와 풍격을 더 존중한다.
셋째, 이론의 전개도 피하지 않는다.
넷째, 어떤 일의 서술도 피하지 않는다.

 

구양수ㆍ매요신의 뒤를 이어 송시다운 맛을 더욱 확고히 다진 시인으로는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송시는 사색적, 산문적, 통속적, 일상적이라는 맛을 느끼게 한다. 소식의 「자유의 ‘면지회구’에 화답하다[和子由澠池懷舊]」라는 시를 예로 든다.

 

정처 없는 우리 인생 무엇 같을까? 人生到處知何似,
기러기가 눈밭 위를 배회하는 것 같으리 應似飛鴻踏雪泥.
진흙 위에 어쩌다가 발자국을 남기지만 泥上偶然留指爪,
날아가 버린 뒤엔 간 곳을 어찌 알랴? 鴻飛那復計東西.
노스님은 이미 돌아가 사리탑이 새로 서고 老僧已死成新塔,
낡은 벽은 허물어져 글씨가 간 데 없네 壞壁無由見舊題.
기구했던 지난날 아직 기억하는지? 往日崎嶇還記否,
길에서 사람은 지치고 나귀는 절뚝대며 울었지. 路上人困蹇驢嘶.

 

이 시는 소식이 30세 때 봉상부첨판(鳳翔府簽判)으로 부임해 가는 길에 면지(澠池)라는 곳에서 동생 소철(蘇轍)이 보낸 시를 받고 그에 화답한 것이다. 5년 전 이들 형제는 과거에 참여하기 위해 면지에 함께 유숙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사람과 사물이 모두 바뀐 데서 느끼는 감회를 담았다. 형제 두 사람의 추억이라는 일상성, 가운데 두 연에 대구를 쓰지 않은 산문성,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사색적 경향에 송시가 일관되게 추구한 풍격인 ‘평담(平淡)’까지 갖춘 대표적인 송시라 여겨진다.

 

송시가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자웅을 겨룰 만하게 되자 당시와 송시를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시작되었다. 당시가 낫다는 사람도 있고 송시가 낫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절충론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당시를 배우기 바빴던 송나라 초기의 모습과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고, 당시의 병폐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논조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이라 할 이백, 백거이, 한유, 맹교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소철은 도학자(道學者)에 가까운 입장에서 이들 시인에게 유가(儒家)가 내세우는 미덕인 ‘온유돈후(溫柔敦厚)’함이 부족하다고 날을 세웠다. 여기에서 두보가 제외된 데서 감지할 수 있듯이 두보는 송나라 시인들에게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아마도 그의 경우 사상적으로 유가에 가깝고 송시가 지향하는 풍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함께 각광을 받은 이는 남조(南朝)의 도연명(陶淵明)이다. 송나라의 한 시인은 “두보에게는 한결같이 나라를 걱정한 구절이 있고, 도연명에게는 귀향을 말하지 않은 시가 없다”라고 했다. 이것은 송나라 때 도연명과 두보가 정전화된 사실을 간명하게 요약해주는데, 도연명의 초탈함과 두보의 도덕성을 아울러 추구하겠다는 것이 송나라 시인들의 마음가짐이었음을 보여준다.

 

3) 당시와 송시 비교

 

당시와 송시의 우열을 가려보자는 것이 이 단락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 송시가 어떤 모습으로 당시의 아성에 도전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와 대비되는 당시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과 송나라 시인 증공(曾鞏)이 「버드나무를 노래하다[詠柳]」라는 시제를 두고 어떤 시를 짓는지 비교해보자.

 

푸른 옥으로 단장한 듯한 나무가 훤칠하고 碧玉妝成一樹高,
만 가닥 가지 아래로 늘어져 푸른 실타래 같네 萬條垂下綠絲絛.
가느다란 잎은 누가 마름질한 것일까? 不知細葉誰裁出,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와 같은 게지 二月春風似剪刀.
* 당나라 하지장의 시

 

어지러운 가지 아직 연노랑색이 변하지 않은 채 亂條猶未變初黃,
동풍에 의지해 기세가 더욱 광포해지네 倚得東風勢更狂.
날리는 버들솜으로 해와 달을 가릴 줄은 알아도 解把飛花蒙日月,
천지에 찬 서리 있다는 것은 모르는구나 不知天地有淸霜.
* 송나라 증공의 시

 

위의 두 시는 모두 봄바람에 가지가 한들거리는 버드나무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두 시는 표현 방법이나 주제 면에서 판이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장의 시는 ‘푸른 옥’, ‘실타래’ 등 다른 사물을 빌려 버드나무를 묘사했지만 증공의 시는 직설적으로 버드나무의 모습을 서술했다. 주제를 보더라도 하지장의 시는 봄바람을 가위에 빗대 버드나무의 잎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솜씨에 대한 감탄을 드러낸 반면, 증공의 시는 배후 세력만 믿고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악행을 일삼는 무리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다.

 

이 두 수만 비교해보더라도 당시가 ‘감정’이나 ‘형상’을 중시하고 송시가 ‘논리’나 ‘사실성’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당나라 시인들은 호방함이든 우울함이든 그것을 격정적으로 드러낸 데 비해 송나라 시인들은 감정 표현에 신중한 편이었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들이 즐겨 노래했던 변새, 규원(閨怨), 애정과 같은 소재는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사대부의 일상생활이 차지했다. 송시의 가치는 당시와는 또 다른 취향의 시를 제시해 독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당시와 송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당시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첫째는 당나라 시인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풍기는 개성미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이백은 이백대로 두보는 두보대로 인생 역정이 다양하고 취향도 제각각인데다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래서 『당시삼백수』에 실린 70여 명의 시인을 하나씩 떠올려도 각각의 개성이 눈에 선하다. 이에 비해 송나라 시인들은 다소 개성이 부족해 보인다. 4대가라 할 만한 왕안석, 소식, 황정견, 육유를 제외하면 그 외 시인들의 시 세계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둘째는 당나라 시인들에게서 특정 소재를 다루는 장인(匠人) 정신이 더 느껴지기 때문이다. 송나라 시인들도 여러 소재를 두루 다루었지만 당나라 시인들이 어떤 특정 소재를 다룰 때 보여주었던 흥분과 열정을 느끼기는 어렵다. 과일에 비유하면 당시는 ‘제철 과일’이고 송시는 ‘하우스 과일’이라는 말이 적합하겠다. “당시는 시인의 시이고, 송시는 학자의 시”라는 말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7. 나가는 말

 

당시(唐詩)는 중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당나라에서 만들어낸 최고의 브랜드 가운데 하나였다. 시 창작 능력을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하던 진사과라는 제도적 뒷받침 속에 문벌귀족 중심의 순혈주의가 얼마간 완화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시를 애호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당시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 현대의 문호 루쉰(魯迅)도 “내 생각에 모든 좋은 시는 당나라 때 이미 다 지어졌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의 정전화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치열한 창작 정신이다. 당나라 시인에게 시 창작은 공무원에 임용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뛰어넘는, 단지 수험생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진지함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두보가 아들인 종무(宗武)의 생일에 “시는 우리 집안의 가업”이라고 다시금 일깨워준 것도 시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의 표현이리라.

 

둘째는 당나라 시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중국 문화의 정수와 미적 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언어와 문자는 기본적으로 성조가 포함된 단음절어를 한자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그래서 억양의 변화가 뚜렷하고 리듬감이 있어 격률시의 발전을 촉진했다. 당나라 때 개발된 근체시는 이러한 중국어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압운, 평측, 대장 등의 이항 대립 구조는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미학과도 일맥상통한다. 근체시 한 행의 글자 수가 홀수이고 전체 행수는 짝수로 이루어지는 것 역시 이를 반영한 것이다. 여기에 경물과 감정을 엇섞어 함축적인 의경(意境)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당시가 보여준 미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도 문화적으로 이러한 당시의 심미 세계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기에 당시의 매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셋째는 당시가 지식인층의 시험 답안, 음풍농월, 또는 문자 유희에 머물지 않고 일반 대중과 호흡을 함께했다는 점이다. 명청대 과거 시험에 쓰였던 팔고문(八股文)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온갖 힘을 쏟았지만 일반 대중과 유리된 채 그들만의 세계에 머물렀다. 당시는 이와 달리 지식인이 지은 것이라도 고답적인 경지만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는 쉽게 노래로 불리고 소설이나 영화의 모티브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정전화 과정의 부작용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하리라고 본다. 5만 수가 넘는 당시의 방대함은 필연적으로 독자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기에, 여러 사람들이 ‘정수 중의 정수’를 선별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나 정전화는 ‘선택’의 과정이자 ‘배제’의 과정이기에 여기에 작동한 기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과만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 불충분할 수 있다. 우리가 미적으로 향유하고 인간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당시 작품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아울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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