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계몽군주,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 일으키다
18세기 계몽절대주의
조선일보
2020.10.06 03:00
체코 동부의 브르노(Brno) 시에 있는 스필베르크(Špilberk)성은 과거 감옥으로 쓴 적이 있다. 18세기 유럽의 대표적 계몽전제군주로 알려진 요제프 2세는 이 성에서 사형제를 대체하는 자비로운 처벌 방식을 시행했다. 흉악범을 체인으로 묶은 다음 나무 상자에 넣어 어두운 방에 가두는 것이다. 간수가 빵과 음료를 틈새로 집어넣어 줄 때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죄수는 완벽한 어둠과 침묵 속에서 지내야 한다. 이 상태로 몇 주가 지나면 죄수는 대부분 미치든지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스필베르크성의 ‘어둠의 방(Dark Cell)’은 빛을 비추어 몽매한 상태를 깨운다는 계몽(啓蒙)의 정치가 실제 어떠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체코 동부 브르노시에 있는 스필베르크성 내부. 18세기 유럽의 계몽전제군주 요제프 2세는 당시 감옥으로 쓰던 이 성에서 사형제를 대체하는 처벌 방식을 시행했다. /브르노 박물관 홈페이지
재앙에 가까운 결과 초래한 계몽전제주의
계몽절대주의(Enlightened Absolutism) 혹은 계몽전제주의(Enlightened Despotism)는 과거 역사 서술에는 자주 사용했지만 이제는 퇴출 위기에 놓인 용어다. 원래 이 말은 계몽주의 사조에 영향을 받은 전제군주가 위부터 개혁해 근대화를 도모한다는 의미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중동부 유럽 국가, 예컨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을 대표 사례로 거론한다. 그렇지만 이 군주들이 수행했던 정책은 거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든지, 혼란만 가중했든지, 혹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18세기 후반 유럽 각국에서 국정 개선 정책을 시도한 건 분명하다. 면세 특권을 줄이고 단일 토지세를 만들려는 조세 정책, 번잡한 제약을 없애서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상공업 정책, 고문과 가혹한 처벌을 완화하고 사형제를 폐지하고자 하는 사법 정책, 국교(國敎)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유대인까지 수용하고자 하는 종교 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비슷한 정책이 나온 이유는 모두 같은 철학자들의 교리를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각국이 처한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고 난 후 국고가 텅 비었으니 효율적으로 세금을 거두어야 했고, 경제 회복에 방해가 되는 기존 관행이나 악습을 정리해야 했으며,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종교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정책은 계몽주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계몽과는 아예 거리가 먼 완고한 성격의 마리아 테레지아, 계몽철학자들을 누구보다 혐오했던 루이 15세 같은 인물도 그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 쉽게 말해 계몽전제주의라고 따로 이름 붙일 만한 체제가 없었다.
말과 실제 간 괴리가 컸던 프리드리히 2세
철학을 사랑한 군주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만 한 인물이 없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묻히기를 원한다”고 유서에서 밝힐 정도다. 저서를 30권 썼으며, 시와 음악에 정통했고, 볼테르를 베를린으로 초빙하여 고상한 대화를 나누었던 터라 그의 언행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국왕이 ‘국가의 제1 공복’이라는 멋진 표현도 그의 작품이다. 군주는 오직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며, 그러기 위해 ‘이성과 철학이 명령하는 변화와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과 실제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예컨대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해 “세상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위험한 책 중 하나”라고 비난했고, 인간의 피를 흘리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며 전쟁을 혐오하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그렇지만 그가 왕으로 등극한 첫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법과 도덕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쟁을 건 일이다. 곧이어 작센을 기습 공격하여 7년전쟁(1756~1763)을 촉발했다. 유럽의 강국들뿐 아니라 식민지까지 휘말리게 된 이 전쟁은 사실상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힘을 회복한 후에는 이전의 적국인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1차 폴란드 분할을 기도하여 상당한 영토를 늘렸다. 그는 반(反)마키아벨리 철학을 견지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확실한 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대표적인 계몽전제군주인 그는 사실상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7년전쟁을 일으켰다. /위키피디아
그는 또 출생에 따른 특권을 경멸한다고 했다. “만일 출생이 공적을 능가한다면 국가의 모든 일이 망가질 것”이라고 염려했고, 농노제를 ‘혐오스러운 제도’라고 불렀다. 이 또한 말뿐이었다. 실제로는 군대의 계급제도에 귀족제를 연동했고, 융커(Junker·독일 귀족)의 경제·사회적 지배를 강화했다. 그는 조국의 문화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빛나는 프랑스 문명에만 감탄했을 뿐, 괴테, 레싱, 빙켈만 같은 당시 독일의 기라성 같은 대가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기 국민을 외국인 대하듯 하고 프랑스 지식인들을 자기 국민 대하듯 했다”는 스탈 부인의 평가 그대로다.
아름다운 가식을 제공한 계몽철학
사실 프리드리히 대왕이 평소 했던 말을 그대로 실천했더라면 곤란한 사태에 직면했을 것 같다. 국민에게 언론의 자유를 허락해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와 억압적 정책을 마음대로 비판하게 했다면 자칫 봉기나 혁명 상황으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라리 해오던 대로 국민을 냉혹하게 억압하는 게 통치에 훨씬 유리했을 터이다. 프리드리히는 성향으로는 철학자지만 직업으로는 통치자라고 스스로 말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는 본성은 프로이센인이지만 교육을 통해 마치 프랑스인처럼
2016년 10월 독일 베를린의 전시회에서 히틀러가 최후를 마친 지하 벙커가 그대로 재현됐다. 지하 벙커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던 히틀러의 서재에는 그가 존경했던 프로이센 프레데리크 국왕의 초상화가 걸려있다./AFP
살았고, 군인과 철학자라는 모순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모순적 군주에게 계몽철학은 아름다운 가식,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제공했다.
46년의 통치 끝에 그가 죽었을 때 국민 대부분의 반응은 차라리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철학자 에른스트 아른트는 “그 어떤 군주도 그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혹평했다. 프리드리히의 통치가 장기적으로 볼 때 나치 체제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 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인물, 자기 벙커에 유일하게 걸어놓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프리드리히였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몽’과 ‘(전제)군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이 두 개념을 붙여놓은 계몽전제군주는 ‘비 오는 달밤’이나 ‘부드러운 폭력’ ‘민주 파쇼’처럼 모순어법(oxymoron·형용모순)이라 할 수 있다. 계몽전제군주는 별다른 군주가 아니라 그냥 전제군주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쓴 우화 소설 '캉디드’(1759년) 책 표지. 순진한 청년 캉디드의 스승 팡글로스(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 박사를 통해 당시 유럽의 낙천적 세계관을 비판했다.
대표적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135권이나 되는 저서를 냈지만, 그중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책은 철학적 우화 소설 ‘캉디드(Candide)’다.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 캉디드는 스승 팡글로스(Pangloss·‘모든 혀’, 즉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 박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형이상학적·신학적 우주론자 팡글로스의 철학은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며,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내용이다.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존재하고, 돼지는 우리에게 고기를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식이다. 이 목적론적 우주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불행과 악(惡)도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팡글로스 박사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이렇게 설명할 것 같다. 북으로 넘어간 사람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운명인데 그쪽에서 적절하게 잘 처리했으니 최선의 결과다. 총살 사건은 위대한 지도자가 몸소 사과하여 남북 관계를 개선하도록 만든 축복이다….
캉디드는 세상의 온갖 불행과 고통을 겪은 후 스승의 가르침이 잘못임을 깨닫는다. 그가 아직도 당신의 철학을 믿느냐고 묻자 팡글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이제는 전혀 믿지 않지만, 기왕에 그렇게 주장했으니 계속 그렇게 말해야겠지.”
우리 사회에는 팡글로스 같은 분이 차고 넘친다. 이분들도 속으로는 자신들의 말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여태 그렇게 말해 왔는데 지금 와서 새삼 말을 바꿀 수는 없으니 혀가 좀 꼬이는 듯해도 더 큰 목소리로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밖에.
주경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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