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힘없는 군주 바로세운 역대 최강 능참봉
동아일보
2020-11-07
1922년 12월 13일
‘나이 60(또는 70)에 능참봉’이란 말이 있습니다. 능참봉은 능(陵) 일을 맡아보던 종9품 미관말직이었으니 늘그막에야 변변치 않은 감투를 쓰게 됐다는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하지만 능참봉도 다 같은 능참봉은 아니었죠.
기울어가는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의 삶은 생전은 물론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뒤에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비록 열강의 틈에서, 또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다툼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우리는 퇴위한 ‘태황제’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 반면, 일제의 시각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한 직후 황제인 순종을 ‘창덕궁 이왕’, 태황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한 터였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고종의 장례절차를 축소·변형한 것은 물론 청량리 명성황후 홍릉을 경기 양주군 금곡리로 옮겨 고종과 합장하려는 계획에도 제동을 걸었습니다. 일본에서 능은 천황이나 황후 등에게만 허용된다는 이유였죠. 사후 한 달여 지난 3월 3일에야 고종을 홍릉에 모실 수 있었지만 이번엔 비문이 문제였습니다.
1895년 변을 당한 명성황후의 비문은 훗날 고종과 합장할 것을 감안해 사이사이 공백을 두고 이미 ‘대한/□□□□□홍릉/명성□황후□□’라고 만들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고종태황제’, ‘명성태황후’ 등을 새겨 넣으면 되는데 일제는 아직도 사라진 대한제국 황제 운운하느냐며 ‘대한’과 ‘황제’를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1920년 고종의 시호가 ‘고종태황제’로 확정된 뒤에도 일제는 여전히 비석에는 고종태황제 앞에 ‘전(前)’ 자를 붙이도록 고집을 부려 국장 후 4년이 다 되도록 비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일제의 온갖 방해에도 고종을 모신 홍릉에 ‘대한 고종태황제…’ 비석을 세운 참봉 고영근. 당시 백발이 성성한 69세였으나 곧은 기개는 젊은이 못지않았다. 고영근은 1903년 일본에 건너가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인 우범선을 처단한 행동파였다.
이런 상태에서 68세의 나이에 홍릉 참봉이 된 고영근이 큰일을 합니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청지기로 궁중에 드나들다 고종의 눈에 들어 종2품 벼슬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순종이 홍릉을 참배할 때마다 미완성인 채 비각에 누워있는 비석에 마음 아파하는 걸 지켜보다 더 참지 못하고 1923년 12월 11일 비를 바로세웁니다. 당당하게 ‘대한/고종태황제 홍릉/명성태황후 부좌’라는 비문을 새겨서 말이죠. 부좌(祔左)는 아내를 왼쪽에 합장했다는 뜻입니다.
참봉 고영근이 비석을 세우던 날 촬영한 홍릉 고종비.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 부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고종비를 직접 보려는 조선 민중들이 쇄도하자 일제는 한동안 붉은 천으로 비석을 가리기도 했다.
그러자 일제강점기 이왕가와 관련한 일을 맡았던 이왕직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자기네에 소속된 말단 참봉이 아무 보고도 없이 사고를 쳤으니 말입니다. 조선총독부에 물었지만 총독부는 “우리와는 관계없다. 본국(일본) 궁내성과 상의하라”라며 발뺌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왕직은 실세인 일본인 차관이 도쿄로 급히 출장해 일본 황실사무를 담당하는 궁내성 측의 하명을 기다리는 한편 자체회의를 통해 비석을 도로 쓰러뜨리라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고 참봉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못하겠다고 버텼죠.
조선왕조 최후의 왕가. 왼쪽부터 영친왕 이은, 순종, 고종, 순종비 순정효황후,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 홍릉은 고종, 유릉은 순종과 순종비의 능이며, 영친왕과 덕혜옹주도 주변에 모셔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일대는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가 깃든 곳이 됐다.
동아일보는 12월 13일자 3면에 ‘고종태황제의 능비 건립’ 이하 10개의 기사로 전후 사정을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이어 ‘대한 고종태황제’ 비를 보려고 인파가 몰려들자 이왕직에서 비석에 붉은 천을 씌웠다는 폭로기사, 전주이씨 문중 모임인 이화학회가 결의문을 채택하고 순종에 상소를 올리고 일본 궁내대신에게 건의서를 보내 홍릉 고종비를 인정하라고 했다는 기사 등을 게재하며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일제도 비석을 훼손할 경우 민심이 극도로 악화될 것을 우려해 추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영근은 1923년 3월 파면됐고, 이후 극도로 쇠약해져 그 해 4월 1일 천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고영근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황국협회 부회장,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냈고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인 우범선을 일본에서 처단하기도 하며 많은 족적을 남겼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조선 최강의 능참봉’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원문
高宗(고종) 太皇帝(태황제)의 陵碑(능비) 建立(건립)
敦化門(돈화문) 前(전)에 參奉(참봉) 待罪(대죄)
오래동안 문뎨 되든 홍릉의 비셕을
참봉 고영근 씨가 자의로 세운 사건
십일일 하오 두시경에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창덕궁 돈화문) 압헤는 엇더한 백발이 성성한 로인이 거적을 깔고 업드려서 통곡을 하얏다. 의외에 광경을 본 창덕궁경찰서 □관은 그 로인이 누구인지, 무슨 곡절로 그리함인지 몰나서 왼 일이냐고 사정을 뭇는 동안에 행인이 다수히 모히어 궁문 전에는 무슨 큰 사건이 생긴 것 가치 큰 소동을 일으키엇는대,
맛츰내 창덕궁경찰서의 경부 한 사람이 나와서 그 로인을 금호문(金虎門·금호문)으로 인도하야 곡절을 말하라 하얏스나 그 로인은 『나는 경찰서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오, 창덕궁에 죄를 지은 사람인 즉 경관에게 할 말은 업다』고 강경히 거절하매 마츰내 리왕직(李王職·이왕직)에서 사무관 리원승(李源昇·이원승) 씨가 나와 창덕궁경찰서 사무실로 다리고 들어가서 그 로인에게 곡절을 물엇다.
洪陵(홍릉)에 碑石(비석) 奉建(봉건)
릉참봉 자의로 비를 세우고
단독 자행을 대죄키 위하야
參奉(참봉) 高永根(고영근) 氏(씨) 待罪(대죄)
그 로인은 누구이며, 그는 무슨 곡절로 궐문대죄를 함인가. 그는 현재 금곡 홍릉 참봉(金谷 洪陵 參奉·금곡 홍릉 참봉)으로 잇는 고영근(高永根·고영근)(六七·육칠) 씨인대, 그가 궐문대죄를 한 리유를 들으면 다음과 갓다.
금곡 홍릉에는 삼작년 국장 이래로 임의 사년이 지나도록 아즉까지 비석(碑石·비석)을 세우지 못하얏는대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잇서서 오늘날까지 연타된 것이오, 장래에도 언제나 세울는지 긔약이 망연하게 되얏는대 전긔 참봉 고 씨는 작년 삼월에 봉직한 이후로 주소로 비를 세우지 못함을 한탄하든 끗헤 비밀히 비문을 색이어서 십일일 상오 구시에 홍릉 비각 안에 비를 세우고 자긔의 방자한 죄를 속하기 위하야 궐문에 대죄한 것이라는대
八字(팔자)를 加刻(가각)한
비명의 내용
비문은 이전 쳥량리 홍릉에 섯든 비석에는
大韓(대한)
洪陵(홍릉)
明成皇后(명성황후)
라고 여덜 자만 색이고 사이를 떼어두엇는 데다가
大韓(대한)
高宗(고종) 太皇帝(태황제) 洪陵(홍릉)
明成(명성) 太皇后(태황후) 祔左(부좌)
전긔 뎜을 찍은 여덜 자를 더 삭이어서 세운 것이라 하며, 동시에 고 씨는 창덕궁 왕 뎐하께 다음과 가튼 상소를 하엿더라.
上䟽(상소) (原文·원문)
臣(신) 高永根(고영근) 惶恐待罪(황공대죄) 伏以(복이)
臣(신) 猥以疎賤(외이소천) 蒙先帝殊恩(몽선제수은) 涓埃靡効(현애마효) 穹壤莫及(궁양막급)
雖不克(수불극) 一朝溘然(일조합연) 以魂魄(이혼백) 自縱於先帝(자종어선제)
而區區微衷(이구구미충) 獨欲依倚松栢(독욕의의송백) 以終餘生(이종여생)
聖明哀矜俯(성명애긍부) 遂至願(수지원) 感激恩眷(감격은권) 念之涕流(염지체류)
竊伏(절복) 見陵前碑石(견능전비석) 先帝尊號(선제존호) 尙未塡刻□構(상미전각□구)
徒設貞珉長委(도설정민장위)
臣每於陛下謁陵時(신매어폐하알릉시) 陪玉步而(배옥보이)
過碑閣(과비각) 陛下(폐하) 未嘗不歔欷(미상불허희)
臣瞻望天顔(신첨망천안) 膈臆摧裂(격억최열)
不惟痛(불유통) 先帝之陵顯刻(선제지능현각) 有闕(유궐)
竊傷(절상) 以陛下誠孝(이폐하성효) 而聖情(이성정) 猶有所未伸也(유유소미신야)
臣伏自念(신복자념) 犬馬戀主(견마연주) 惟知所事(유지소사)
苟可(구가) 以藏(이장) 先陵之役(선릉지역) 而達(이달) 陛下之情者(폐하지정자) 雖重得罪死(수중득죄사) 不恨(불한)
輒敢用(첩감용) 去年(거년) 所下御筆(소하어필) 勅臣(칙신) 揣量字大小(췌량자대소) 還進者(환진자)
鳩工摹刻(구공모각) 已於今日巽時(이어금일손시) 竪立奉安(수립봉안)
臣徒知(신도지) 非如此則(비여차즉) 藏役(장역) 如不可以期(여불가이기)
而不知(이부지) 莫重之擧(막중지거) 尤萬萬(우만만) 不容於擅行(불용어천행) 臣罪尙誅死(신죄상주사)
伏候(복후) 聖旨(성지)
李王職(이왕직) 幹部(간부)의
緊急會議(긴급회의)
비석을 뉘이라 하나
고 참봉은 절대 불응
이와 갓흔 사실을 알게 된 리왕직에서는 댱관 이하 전부가 대경실색하야 즉시 댱관실에 댱관, 차관 장시 사댱과 삼 과댱이 모히고 대죄한 참봉 고영근 씨도 청하야 비밀히 회의를 열고 선후책을 의론한 결과
홍릉에 비석을 세우랴 한 것은 임의 오래 전부터 문뎨 되든 바이라 불원간에 상림 차관(上林·상림)이 동경(東京·동경)에 가게 되면 궁내성(宮內省·궁내성)에 교섭하야 세우랴 한 것인대, 의외에 릉참봉이 자의로 이러한 일을 하엿스니 이는 책임이 참봉 한 사람에게만 잇는 것이 안이라 리왕직 전톄에 잇슨 즉 속히 비석을 다시 뉘이도록 하라
는 의견이 일치하야 고영근 씨에게 비석을 뉘이라 한 즉 씨는
내가 세우기는 격분한 마음으로 세웟스나 고종 태황뎨의 릉비를 세운 이상에 내 손으로 다시 뉘인다는 일은 도뎌히 할 수 업는 일이라
고 대답하얏슴으로 리왕직에서는 엇지 할지를 모르고 작일까지도 간부들이 모혀서 비밀회의만 하는 중이라더라.
『大韓(대한)』 二字(이자)가 問題(문제)
태만하고 셩의 업는 리왕직 원
비셕을 비밀히 세우게 된 원인
홍릉에 비석을 세운 일이 이와 가치 문뎨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릉참봉 개인이 비밀히 비를 세운 원인은 무엇인가.
원래 리 태왕 뎐하(李 太王 殿下·이 태왕 전하)끠옵서 흉거하신 후 고종 태황뎨(高宗 太皇帝·고종 태황제)라 하는 존호를 나린 이상에는 의례히 비석을 세울 것인대, 국장 후 사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비석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리왕직 원의 성의가 적고 태만한 것도 큰 원인이어니와 또 한편으로는 청량리 홍릉에 세웟든 비석에 전긔와 가치 글자만 더 삭이어 세울 터인대
전긔 비석에는 대한(大韓·대한) 두 자가 잇는 것을 끄리어서 총독부 당국에서도 비석 세우는 일을 쾌히 허락지 아니하든 것인대 임의 『고종 태황뎨』라는 존호가 잇슨 이상 『대한』 두 자를 쓰는 것이 무슨 긔피됨이 잇스리오만은 총독부 당국은 물론 리왕직에서도 이를 끄리어서 오늘날까지 등한히 지내온 것인대, 이번에 참봉 고영근 씨가 닷새 동안 비밀히 공사를 하야 십일일 상오 구시에 자의로 비석을 세운 것이라더라.
王 殿下(왕 전하)의 哀傷(애상)
차관이 동경 출장
리왕직에서는 돌연히 중대한 문뎨가 생기어 댱관 차관 이하가 전전긍긍이 지내는 모양인대 이 말삼이 내뎐 량 뎐하(兩 殿下·양 전하)께까지 아시게 되야 리왕 뎐하끠서는 다만 비창하심을 이기시지 못한다고 승문되며, 상림 차관은 문뎨가 중대함으로 일간 궁내성의 의향을 듯기 위하야 동경으로 출발할 터이라더라.
王 殿下(왕 전하)의 至孝(지효)에 感激(감격)
십월 릉행 때 비각 안 보신 일이
이번 일을 속히 하게 한 큰 원인
洪陵(홍릉) 參奉(참봉) 高永根(고영근) 氏(씨) 談(담)
자의로 홍릉에 비석을 세우고 궐 문전에 대죄한 참봉 고영근 씨는 방금 근신 중인대 방문한 긔쟈에게 말하되
이번 일은 전혀 나의 자의로 한 일이올시다. 지중 막대한 죄를 지엇슨 즉 오즉 처분만 바라는 중이오나 이번 일은 전혀 격분한 생각으로 나의 일신을 희생하야서라도 비석을 세우랴 한 것이오. 내가 작년 삼월에 봉직한 이후 이태 동안에 왕 뎐하의 릉행을 다셧 번 맛게 되얏는대 뎐하께서 번번히 릉상에 배알하신 후에는 의례히 비각(碑閣·비각) 문을 열으라 하시고 부들자리에 싸서 비각 안에 뉘인 비석을 보시고 좌우를 도라보시며 비석은 언제 세우는가 속히 세우도록 하라 하시며 옥안에 감창하신 빗을 띄우시고 탄식하시는 것을 배찰할 때마다 나의 마음에는 비상히 감동 된 일이 잇섯슴니다.
그런데 거번 십월에 왕 뎐하끠서 릉행하시엇슬 때에는 왼 일이신지 비각을 봉심(奉審·봉심)치 아니하시고 다만 한숨만 쉬이시는 것을 보앗슴니다. 이와 가튼 사정에 처하야 구신의 몸으로, 더욱히 재관의 몸으로 엇지 거저 잇슬 수가 잇슴닛가. 아모리 생각하야도 리왕직에서나 총독부의 처분을 기다리고 한만히 잇슬 수가 업기로 왕 뎐하의 지효하신 심사를 배찰하야 나의 자의로 비석을 색이어 세운 것인대, 닷새 동안 비밀히 역사를 하야 십일일 오전 아홉시에 비를 세우고 바로 서울로 들어와서 그날 오후 두시에 궐문대죄를 한 것이오』하며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 잡힌 얼골에 더운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
宮內省(궁내성) 回答(회답)을 待(대)하야
비셕을 엇더케든지 한다고
연타 원인은 압젼 자가 문뎨
李王職(이왕직) 次官(차관) 上林敬次郞(상림경차랑) 氏(씨) 談(담)
홍릉 참봉 고영근(洪陵 參奉 高永根·홍릉 참봉 고영근) 씨가 재작 십일일에 자의로 고종 태황뎨(高宗 太皇帝·고종 태황제)의 비석을 세웟다 함은 별항과 갓거니와 작일 오전에 리왕직을 방문한 즉 댱관 차관 이하 직원들은 자못 창황한 긔분이 띄어보이는대, 이에 대하야 상림 차관(上林 次官·상림 차관)은 말하되 지나간 칠일에 홍릉에 잇는 참봉이 태황뎨 비석의 글자를 색인다는 소문이 들리기에 팔일에 즉시 직원을 파견하야 조사하게 하고 그 조사원이 구일에 경성에 도라와서 자세한 사실을 밋처 조사도 할 새이 업시 재작 십일일에 비를 세웟다 함니다.
엇더한 의사로 비를 그럿케 자의로 세웟는지는 모르겟스나 그 소문을 듯고 놀내엇슴니다. 그리고 즉시 총독부(總督府·총독부)에 보고를 하얏슴니다. 당초에 비석은 다른 석물을 할 때에 함끠 세우려 하얏스나 그 비석은 오래 전부터 태황뎨끠서 친필로 쓰시고 그 비문에 대한(大韓·대한)이라는 두 자가 색이어 잇셧는대 당시 궁내성(宮內省·궁내성)에서 결뎡하기는 전 대한 (前 大韓·전 대한)이라고 압전 자를 더 너허서 비를 세우라 하얏스나 비석은 임의 대한 두 자를 색여노앗섯기 까닭에 그대로 궁내성의 량해를 엇자는 공론도 일부에 잇섯든 고로 지금까지 그 비를 못 세운 것이며, 그 까닭에 내가 작년에 동경에 갓슬 때에도 아모조록 속히 량해하야 달나고 교섭도 한 일이 잇고 항상 주선은 하는 중이엇는대, 이번에 돌연히 이와 가튼 문뎨가 이러낫슴니다. 지금까지 연긔된 것은 다만 압전 자(前 字·전 자)가 문뎨가 되야 이와 가치 연긔된 것이외다.
비는 방금 세워 잇는대 장차 엇지할 것은 정치 못하얏슴니다. 막중한 비석을 그와 가치 자의로 세운 것은 한편으로는 크게 불경이라고도 할 수 잇고 당초에 리왕직에서는 아모 것도 모르는 터인 즉 다시 뉘일 수도 업는 일이오, 또 뉘인다 하야도 글로써 책임을 면할 수는 업는 일이외다. 지금 처지로는 리왕직에서는 엇지 할 수 업슴니다. 위선 총독부에도 보고를 하얏고 또 궁내성에도 보고를 하얏슨 즉 회답이 잇기 전에는 엇지 할 수 업슴니다. 지금은 리왕직의 처지로는 참봉의 자의로 세운 것임으로 아직은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할 수밧게 업슴니다. 지금 세운 비를 다시 뉘인다 하야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업슨 즉 문뎨는 궁내셩의 회답을 기대리기까지는 그대로 둘 수밧게 업다고 말하더라.
高氏(고씨)를 取調(취조)할 듯
총독부 편의 태도
리왕직(李王職·이왕직)에서는 별항과 가치 즉시 총독부(總督府·총독부)에 보고하얏는대 총독부에서도 자의로 처리할 수가 업서 즉시 궁내성으로 교섭을 하얏스며, 참봉 고영근(高永根·고영근) 씨가 엇더한 생각으로 그와 가튼 중대한 비를 자의로 세웟는지 그 리면에는 다른 복잡한 사실이 잇지나 아니한가 하고 고영근 씨를 엄중히 취조할 터이라더라.
高氏(고씨)에게 시말서(始末書)
사무관이 출장하야
리왕직에서는 작일 하오 세 시경에 사무관 리원승(李源昇·이원승) 씨 외 일명이 방금 참봉 고영근 씨가 근신 중인 인사동 민뎡식(閔庭植·민정식) 씨 집에 와서 고씨에게 시말서(始末書)를 바더갔다더라.
현대문
고종 태황제의 능비 건립
돈화문 앞에 참봉 대죄
오랫동안 문제 되던 홍릉 비석을
참봉 고영근 씨가 자의로 세운 사건
11일 오후 2시경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어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거적을 깔고 엎드려 통곡을 했다. 의외의 광경을 본 창덕궁경찰서 경관은 그 노인이 누구인지, 무슨 곡절로 그러는지 몰라 웬 일이냐고 사정을 묻는 동안 많은 행인이 모여 궁문 앞에서는 무슨 큰 사건이라도 생긴 것처럼 큰 소동을 일으켰는데,
마침내 창덕궁경찰서의 경부 한 명이 나와 그 노인을 금호문으로 인도해 곡절을 말하라 다그쳤지만 그 노인은 “나는 경찰서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창덕궁에 죄를 지은 사람이므로 경관에게 할 말은 없다”고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내 왕실 일을 맡아보던 이왕직에서 사무관 이원승 씨가 나와 창덕궁경찰서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 그 노인에게 곡절을 물었다.
홍릉에 비석을 받들어 세워
능참봉 자의로 비를 세우고
단독 자행을 대죄하기 위해
참봉 고영근 씨 대죄
그 노인은 누구이며, 그는 무슨 곡절로 궐문에서 대죄를 했는가. 그는 현재 금곡 홍릉 참봉으로 있는 고영근 씨인데, 그가 궐문 대죄한 이유를 들으면 다음과 같다.
금곡 홍릉에는 3년 전 고종황제 국장(國葬) 이래로 이미 4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했는데, 이는 여러 사정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미뤄진 것이요, 장차 언제나 세울 수 있을지 기약 없이 아득했는데, 앞에 쓴 고 씨는 작년 3월에 참봉 직을 받든 이후 밤낮으로 비를 세우지 못함을 한탄하던 끝에 비밀리에 비문을 새겨 11일 오전 9시 홍릉 비각 안에 비를 세우고 자기의 방자함을 속죄하기 위해 궐문에 대죄한 것이라는데
8자를 덧새긴
비명의 내용
비문은 이전에 청량리 홍릉에 있던 비석에 ‘대한(大韓)/ 홍릉(洪陵)/ 명성황후(明成皇后)’라고 8자만 새기고 사이를 떼어둔 데에다 ‘대한(大韓)/ 고종(高宗) 태황제(太皇帝) 홍릉(洪陵)/ 명성(明成) 태황후(太皇后) 부좌(祔左)’
위와 같이 강조점을 찍은 8자를 더 새겨 세운 것이라 한다.
동시에 고 씨는 창덕궁왕(순종) 전하께 다음과 같은 상소를 했다 한다.
상소(원문)
신 고영근은 황공 대죄하며 엎드려 아룁니다.
신은 외람되이 성기고 천박한 몸으로 선제 고종황제의 특별한 은전을 입었으나 그에 보답함이 천지간에 티끌처럼 흩어져 목 놓아 눈물 흘립니다.
비록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죽어 혼백으로 선제를 스스로 따르지는 못했지만,
구차스럽고 변변치 못한 마음으로 홀로 지조 있는 송백을 의지하여 여생을 마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굽어 살피셔서 지극한 소원을 이루게 해주시니, 이를 생각하면 다시 눈물이 흐릅니다.
슬그머니 엎드려 능 앞 비석을 보니 아직도 선제의 존호를 새겨 넣어 빛나게 하지 못하고,
헛되이 비석만 만들어 오랫동안 내버려둔 상태 그대로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능을 배알하실 때마다 늘 폐하의 걸음을 모셨는데,
비각을 지나시는 폐하께서는 과연 한숨짓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폐하의 용안을 멀리서 우러러보며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단지 선제 능의 묘비에 (존호가) 누락되어서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요,
선제에 대한 지극한 정성으로도 폐하의 심정을 마땅히 펼 수 없음을 남몰래 마음아파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엎드려 스스로 생각건대 미천한 신하가 임금을 사모하면 섬겨야 할 바를 마땅히 아는 법입니다.
참으로 선제의 능 일을 잘 해서 폐하의 마음이 통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비록 거듭 죄를 지어 죽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득 과감하고 용기를 내 지난해 폐하께서 친히 어필을 내리시어 신에게 (묘비의) 글자 크기를 헤아려보고 다시 진행하라고 하신 명을 받잡고
장인들을 모아 비문에 새긴 글자를 베껴 이미 오늘 오전 9시경에 (완성된 비석을) 받들어 모셨습니다.
신은 단지 이 같이 하지 않으면 능 일을 기약조차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는 것만 알았지,
이 막중한 일을, 더욱이 전혀 제 마음대로 결단해 행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몰랐으니 신은 또한 베어 죽일 죄를 지었습니다.
엎드려 폐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이왕직 간부
긴급회의
비석을 다시 눕히라 하나
고 참봉은 절대 불응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이왕직에서는 장관 이하 전부가 크게 놀라 즉시 장관실에 장관, 차관, 장시사장과 세 과장이 모이고, 대죄한 참봉 고영근 씨도 청해 비밀회의를 열고 선후책을 의논한 결과
홍릉에 비석을 세우려 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 되던 바라 곧 우에바야시 차관이 도쿄에 가면 궁내성과 교섭해 세우려 한 것인데, 의외에 능참봉이 자의로 이런 일을 했으니 이는 책임이 참봉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왕직 전체에 있는 까닭에 속히 비석을 다시 눕히도록 하라는 의견이 일치해 고영근 씨에게 비석을 뉘이라 하니 그는
“내가 세우기는 격분한 마음에 세웠지만 고종 태황제의 능비를 세운 이상 내 손으로 다시 눕힌다는 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고 대답했으므로 이왕직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제까지도 간부들이 모여 비밀회의만 하는 중이라 하더라.
‘대한’ 두 글자가 문제
태만하고 성의 없는 이왕직 직원
비석을 비밀스럽게 세우게 된 원인
홍릉에 비석을 세운 일이 이 같이 문제가 되는 것을 무슨 까닭이며, 능참봉 개인이 비밀리에 비석을 세운 원인은 무엇인가.
원래 이 태왕 전하께서 훙서하신 뒤 ‘고종 태황제’라 하는 존호를 내린 이상 으레 비석을 세울 것인데, 국장 후 4년이 된 오늘날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이왕직 직원의 성의가 적고 태만한 것도 큰 원인이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청량리 홍릉에 세웠던 비석에 앞에 쓴 것과 같이 글자만 더 새겨 세울 수 있을 터인데
앞의 비석에는 ‘대한’ 두 자가 있는 것을 꺼려 총독부 당국에서도 비석 세우는 일을 흔쾌히 허락하지 않던 것인데, 이미 ‘고종 태황제’라는 존호가 있는 이상 ‘대한’ 두 자를 쓰는 것을 꺼려 피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만 총독부 당국은 물론 이왕직에서도 이를 꺼려서 오늘날까지 등한히 지낸 것인데, 이번에 참봉 고영근 씨가 닷새 동안 은밀히 공사를 해 11일 오전 9시에 자의로 비석을 세운 것이다.
왕 전하의 가슴 아픔
차관이 도쿄 출장
이왕직에서는 돌연 중대한 문제가 생겨 장관, 차관 이하가 전전긍긍하는 모양인데 이 말을 내전 두 전하까지 아시게 돼 이왕 전하께서는 비창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말이 들리며, 이왕직의 우에바야시 차관은 문제가 중대하므로 며칠 내로 궁내성의 의향을 듣기 위해 도쿄로 출발할 터라고 한다.
왕 전하의 지극한 효성에 감격
10월 능행 때 비각을 보시지 않은 일이
이번 일을 속히 하게 된 큰 원인
홍릉 참봉 고영근 씨의 이야기
자의로 홍릉에 비석을 세우고 궐 문전에 대죄한 참봉 고영근 씨는 현재 근신 중인데 그를 방문한 기자에게 말하기를
“이번 일은 모두 내 자의로 한 일이올시다. 극히 무겁고 큰 죄를 지었으니 오직 처분만 바라는 중이지만 이번 일은 오로지 내가 격분한 나머지 내 일신을 희생해서라도 비석을 세우려 한 것입니다. 내가 작년 3월에 참봉 직을 받든 이후 2년 동안 왕 전하의 능행을 5번 맡았는데 전하께서는 번번이 능을 배알하신 뒤에는 으레 비각 문을 열라 하시고 부들자리에 싸 비각 안에 뉘어놓은 비석을 보시고 좌우를 향해 ‘비석은 언제 세우는가. 속히 세우도록 하라’하시며 용안에 사무쳐 슬픈 빛을 띠며 탄식하시는 것을 살필 때마다 내 마음에는 예사롭지 않게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월에 왕 전하께서 능행하셨을 때에는 웬 일인지 비각을 보살피지 않으시고 다만 한숨만 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같은 사정에 처해 옛 신하의 몸으로, 더구나 재를 맡아보는 신하의 몸으로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왕직이나 총독부의 처분을 기다리고 느긋하게 있을 수 없어 왕 전하의 지극하신 효성을 살펴 나의 자의로 비석을 새겨 세운 것인데, 닷새 동안 은밀히 공사를 해 11일 오전 9시 비를 세우고 곧바로 서울로 들어와 그날 오후 2시에 궐문대죄를 한 것이오”하는데,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 잡힌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
궁내성의 회답을 기다려
비석을 어떻게든 한다고
늦어진 원인은 ‘앞 전’ 자가 문제
이왕직 차관 우에바야시 케이지로 씨의 이야기
홍릉 참봉 고영근 씨가 그제(11일)에 자의로 고종 태황제의 비석을 세웠다 함은 별항 보도와 같거니와 어제 오전 이왕직을 방문하니 장관, 차관 이하 직원들은 자못 놀랍고 다급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을 띠는데, 이에 대해 우에바야시 차관은 말하기를 “지난 7일 홍릉에 있는 참봉이 태황제 비석의 글자를 새긴다는 소문이 들리기에 8일 즉시 직원을 파견해 조사하게 했는데, 그 조사원이 경성에 돌아와 자세한 사실을 미쳐 조사할 새도 없이 그저께 11일에 비를 세웠다 합니다.
어떤 의도로 비를 그렇게 자의로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그 소문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즉시 총독부에 보고했습니다. 당초 비석은 다른 석물을 할 때 함께 세우려 했지만 그 비석은 오래 전 태황제께서 친필로 쓰시고, 그 비문에 ‘대한’이라는 두 자가 새겨 있었는데 당시 궁내성에서 결정하기로는 ‘전 대한’이라고 ‘앞 전’ 자를 더 넣어 비를 세우라 했으나 비석은 이미 ‘대한’ 두 자를 새겨놓았기 때문에 그대로 궁내성의 양해를 얻자는 공론도 일부 있었던 까닭에 지금까지 그 비를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작년에 도쿄에 갔을 때도 아무쪼록 속히 양해해달라고 교섭한 일도 있고 항상 주선은 하는 중이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이 같은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비를 세우는 것이 연기된 것은 다만 ‘앞 전’ 자가 문제가 돼 이렇게 늦어진 것입니다.
비는 조금 전 세워졌는데, 장차 어찌할 지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막중한 비석을 그와 같이 자의로 세운 것은 한편으로는 큰 불경이라고도 할 수 있고 당초 이왕직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이라 다시 눕힐 수도 없는 일이요, 또 눕힌다 해도 그로써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으로는 이왕직에서도 달리 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 총독부에도 보고했고, 또 궁내성에도 보고했으니 회답이 있기까지는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왕직으로선 참봉이 자의로 세운 것이므로 아직은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운 비를 다시 눕힌다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으니 문제는 궁내성의 회답을 기다리기까지는 그대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더라.
고 씨를 취조할 듯
총독부 쪽의 태도
이왕직에서는 별항 보도와 같이 즉시 총독부에 보고했는데, 총독부에서도 이를 재량으로 처리할 수 없어 즉시 궁내성에 교섭을 했으며, 참봉 고영근 씨가 어떠한 생각으로 그와 같은 중대한 비를 자의로 세웠는지 그 이면에는 다른 복잡한 사실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고영근 씨를 엄중히 취조할 터라 하더라.
고 씨에게 시말서
사무관이 출장해서
이왕직에서는 어제 오후 3시경 사무관 이원승 씨 외 1명이 현재 고영근 씨가 근신 중인 인사동 민정식 씨 집에 출장해서 고 씨에게 시말서를 받아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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