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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간 유럽 호령한 절대군주 루이 14세 , 그러나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이강기 2020. 11. 17. 10:46

72년간 유럽 호령한 절대군주 루이 14세 , 그러나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8] 루이 14세의 건강

 

 

주경철 교수

조선일보

2020.11.17 03:00

 

 

 

국왕이나 대통령처럼 국정을 책임지는 통치자의 건강은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안이다. 78세 고령에 미국 대통령직에 취임하는 바이든 당선인이나 고도비만임이 뚜렷한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의 건강 문제에 대해 우리가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 그는 왕권 강화에 총력을 기울여 프랑스를 유럽 제일의 국가로 떠오르게 했고 베르사유 궁을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걸어 다니는 종합 병동'이라 할정도로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위키피디아

 

루이 14세는 ‘걸어 다니는 종합 병동’

 

과거 국왕의 몸 상태에 대해 역사가들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 프랑스 국왕들의 경우는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루이 14세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많은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수십 년 동안 궁정 수석의가 국왕을 매일 진찰하고 결과를 기록한 ‘건강일지(Le Journal de santé)’가 대표적이다. 1647년부터 1712년까지 포괄하는 이 기록은 국왕의 몸에 대한 결정적 증거들을 제공한다(1712년부터 국왕이 사망하는 1715년까지의 기록은 어떤 이유에선지 사라졌다). 국왕이 아침 8시에 기상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 두 의사였다. 이들은 국왕의 몸 상태를 살피고, 병세가 발견된 때에는 적절한 치료를 한 후, 이 사실들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몸 상태에 대해 기록한 이 일지는 리얼리즘의 극치라 할 만하다. 이런 식이다. “국왕은 식탁에서 일어나서 변기로 달려가 구토하려 했는데, 식은땀이 나고 맥박이 약해졌으며 호흡곤란을 동반했다. 끝내 엄청난 양을 게워냈는데, 썩은 음식과 비슷한 지독한 냄새가 났다.”(1711년 8월 9일)

 

루이 14세를 보살피는 궁정 수석의는 두 명이었다. 특히 다캥(Antoine d’Aquin)과 파공(Guy-Crescent Fagon)이 오랜 기간 함께 복무했다. 문제는 두 의사가 자주 충돌했다는 것이다. 원래 다른 학파 출신이어서 의학적 기반이 다른 데다가, 개인적인 알력도 컸다. 다캥이 오랫동안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파공이 국왕의 정부(情婦)인 맹트농 부인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한 사람은 국왕이 다혈질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사람은 담즙질이라는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고,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리곤 했다. 그렇지만 당시 의사들이 내놓을 수 있는 처치 방식은 대개 체액의 균형을 맞추려고 사혈이나 관장을 하는 수준이었다.

 

‘건강 일지’를 보면 루이 14세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종합 병동’에 가까웠다. 우선 1647년 아홉 살 나이에 천연두(두창)에 걸렸다. 후일 루이 14세는 아들과 손자들도 이 병으로 많이 잃게 된다. 국왕 자신도 천연두로 얼굴에 얽은 흔적이 생겼는데, 이게 평생 콤플렉스로 남았다. 왕의 초상화나 조각상을 제작할 때 작가들은 알아서 얽은 자국을 지운 상태로 표현했다(다만 이탈리아의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제작한 루이 14세의 상반신 조각상에서만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했다). 1658년 스무 살에는 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소화 불량으로 이어진 치아 부실

 

국왕은 치아가 안 좋아서 고생했을 뿐 아니라, 잘못된 치료의 부작용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1685년, 치근을 잘라내는 처치를 할 때 잘못 절삭하여 농양이 생기고 골염이 심해졌다. 결국 좌측 상부 치아들을 전부 발치하게 되었다. 마취제가 없던 시절 이를 여럿 뽑을 때 극심한 통증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발치를 담당한 사람이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입천장 절반이 뜯겨 나가고 종양이 생긴 것이다. 천공이 생긴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은 벌겋게 가열한 쇠막대로 지지는 수밖에 없다. 14차례나 입안을 지졌으나 구멍이 완전히 막히지 않았다. 그 결과 비강(鼻腔)을 통해 입과 코가 연결되었다. 수석의 다캥은 이 문제에 대해 인상적인 기술을 남겼다. “국왕이 음료수를 마시거나 목을 헹굴 때 물이 입에서 코로 올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루이 14세의 코에서 빨간 포도주가 흘러나오는 일이 자주 목격되었다.

 

치아 부실은 소화 불량으로 이어졌다. 루이 14세는 대식가로 알려져 있는데, 씹는 게 부실하니 소화에 문제가 생겼고 고질적인 장염으로 발전했다. 그 때문에 관장을 자주 해야 했다. 다캥은 가재 껍데기 가루, 독사 말린 것, 탄닌, 위성류(능수버들 종류), 말똥을 가지고 특별히 개발한 자신의 관장약이 탁월한 약재라고 자부했다. 안전성이 심히 의심스럽기는 하나 분명 효과는 확실했던 것 같다. 국왕은 18번이나 변기로 달려갔고, “변기가 피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루이 14세가 겪은 일 중 특히 잘 알려진 사례가 치루 치료다. 1686년 의사들이 모여 국왕의 치루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논했고, 다양한 치료책이 제시되었다. 이 중 어떤 방법을 택할지 의견이 분분하자 국방성 장관 루부아가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 전국의 치루 환자들을 모아 모든 방법을 다 실험해 보자는 것이다. 아랫부분에 문제가 있는 수많은 자원자가 몰려들었다. 이 충성스러운 피실험자들에게 진정제, 연고, 습포, 찜질, 사혈, 치료제 등을 실험했고, 온천의 효과를 확인해 보려고 4명씩 두 조로 나누어 온천 두 곳에 보내서 관찰하기도 했다. 이 모든 방법이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결국 수술로 문제 부위를 직접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8일이 거사일로 잡혔다. 루이 14세에게는 정말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메스로 두 번, 가위로 8번 생살을 잘라낸 것이다. 국정을 책임진 통치자가 몸이 힘들다고 오랫동안 쉴 수는 없는 법, 바로 다음 날 내각회의를 주재했고, 대사들 접견도 해야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게 꽤나 힘들었던지 “국왕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고 기록은 전한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만족스러웠던지 두 궁정의와 집도의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의 땅을 하사했다.

 

 

과중한 통치 부담에서 오는 중압감

 

그 외에도 국왕은 많은 병을 앓았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처럼 육류를 많이 먹고 운동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잘 걸리는 병이 통풍이었다. 루이 14세도 왼발에 발작을 일으킨 통증 때문에 밤에 자다가 깨어났다. 원래 프랑스 국왕은 전시에는 전선으로 달려가 지휘 캠프에서 장군들과 작전을 논의하는 게 관례다. 루이 14세 역시 통치 전반기에는 그렇게 했으나, 중년에 이르러서는 베르사유에 전쟁실(War Room)을 차리고 이곳에서 작전 지시를 하는 방식으로 바꿨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통풍이었다. 결석 증세도 심해서 크고 작은 돌들이 오줌에 섞여 나왔다. 만성 두통과 복통도 심했고, 말년에는 당뇨병도 앓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건강 일지’에는 국왕의 수면 상태도 기록되어 있다. “국왕께서는 나쁜 꿈에 시달리는지, 자는 도중 말하고 소리 지르고, 때로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분명 과중한 통치 부담에서 오는 중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온종일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면서 찬란한 외양을 두르고 있지만, 밤에는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루이 14세가 77세 생일 4일 전인 1715년 9월 1일 베르사유 궁에서 사망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 1643년 다섯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긴 통치 기간인 72년 동안 재위했다. 프랑스 생캉탱의 앙투안 레퀴에 미술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국왕의 죽음]

 

국왕의 사후 처리 과정은 국왕의 몸에 대해 잘 알 중요한 기회다. 동양권에서는 국왕의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죽은 왕의 몸을 해부하고 미라로 만들었다. 국왕이 서거하면 혹시 다시 깨어날지도 모르므로 24시간 정도 기다린다. 그 후 주요 궁정 인사들이 참관한 가운데 의사들이 복부와 두부를 해부하며, 이 모든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루이 14세의 경우 장기들의 괴저(gangrene, 신체 조직 일부가 썩는 현상) 상태가 심했고, “잉크처럼 검은빛이었다.” 선왕 루이 13세의 경우에는 온갖 장기에 구멍이 뚫려있고, 종양들이 발견되었으며, 일부 기관에서 기생충들이 발견되었다. 해부 과정에서 위⋅간⋅뇌⋅신장 등 주요 장기들을 적출하여 통에 집어넣은 다음 밀봉했다. 남은 육신과 심장은 여러 약재와 향신료들을 이용해 방부 처리하여 미라를 만들었다. 그 후 육신은 납과 참나무로 만든 이중 관에 넣어 파리 북쪽에 위치한 생드니 성당 지하 왕실 묘로 운구했고, 장기들은 파리 노트르담 성당 지하에, 심장은 예수회 성당에 모셨다. 죽은 후에도 국왕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기념물(monument)로 화하여 여러 곳에 분산 안치되어 왕실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기능을 했다.

 

주경철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