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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의 兩黨 政治

이강기 2021. 2. 16. 16:35

英國의 兩黨 政治

 

3C 정신의 政治風土 英國政黨政治의 社會的 背景

 

김성식 교수

사상계 1964. 10월호

 

영국의 정권은 국민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문제되느니보다는 그렇게 세워진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계속해서 그대로 받고 있느냐 없느냐를 제1의 문제로 삼고 있다. 이른바 형식상 합법적으로 세워진 정권이라고 해서 어떠한 비정(秕政)을 하더라도 그 임기 동안 바둥바둥 버티려는 열등인간의 정신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하겠다.

 

종교가 제일이오

 

몽테스키외는 영국에서 자유와 상업과 종교를 보았다고 했으며 정치학자 파커는 종교적 기조가 영국인의 생활의 기조라고 했다. 여기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를 가리키고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영국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나라가 기독교 국가인데 그리고 기독교 문화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 영국에서 유달리 국민 생활의 기조로서 기독교를 운운하게 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영국인은 제국주의자, 물질 추구자, 그리고 철저한 개인주의자요, 이기주의자인데 그것은 일견 기독교의 근본 생활 이념과는 정반대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어떠한 관계로 그들과 맺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기독교가 제일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유럽 모든 나라가 하나의 기독교 사회로 발전하여 갔다고 하나 기독교는 영국 사회의 실생활에 더 깊은 뿌리를 박고 오늘날까지 생장하여 왔다. 영국 사회의 내적 발전에 있어서 기독교의 힘이 지금도 각 부문에서 움직이고 있다. 산업의 발달이나 사회의 분해 과정 또는 정당 정치의 발전에 있어서 그리고 국민 도덕에 있어서 기독교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같은 기독교이나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그것이 단일적으로 의식화되고 형식화되어서 국민생활의 발랄한 정신을 둔화시키고 심지어 마비 또는 억압했다고 볼 수 있고, 독일에서는 너무나 교리화되고 관념화되어서 개방된 시민 사회를 촉진시키는데 기독교가 실패하고 오랫동안 봉건사회를 지속시키는 데 이바지했으나 영국에서는 기독교가 생활화되어 모든 생활의 산 요인’(living factor)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를 들 수 있다.

 

(1) 우선 영국의 역대 종교회의와 교회 입법 또는 교구 제도는 영국의 정치적 통일과 헌법 그리고 행정 구역에 절대적인 기초가 되었고 주교나 그 밖의 고위 성직자들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 군주나 제후들의 횡포를 막았던 것을 말할 수 있다.

 

(2)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 400년 동안의 영국의 정치사는 기독교의 강력한 영향 하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영국의 정당 정치도 종교상 의견을 달리하는 그룹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휘그당과 토리당은 구교 군주(찰스 2)에 대한 배척안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의 찬반에서 생겨났는데 그때 가톨릭이란 이유에서 휘그당은 배척안에 찬동했고 토리당은 이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 뒤에 토리당은 앵그리카니즘(국교)을 배경으로 하고 휘그당은 퓨리타니즘(비 국교)을 배경으로 해서, 발전했다. 오늘에 보는 보수당이나 자유당 또는 현재의 노동당도 모두 종교적 분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지도자 중에는 종교적 인물이 많이 있다.

 

(3)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 대륙이 프랑스혁명에 휩쓸려 있을 때 영국은 웨슬리교에 의해서 풍미되고 있었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만은 이 웨슬리교에 의해서 위로를 받았고, 따라서 혁명의 와중에서 영국은 면제되었던 것이다.

 

(4) 대륙에서는 국가의 권력이 사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국에서는 실패했다. 영국에는 국가의 힘이 사회를 억압하기에는 자유교회, 비국교도의 사회가 너무나 강했다. 자유교회는 자유사회를 건설했고 그것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앵그리카니즘이 국가 권력과 결부될 때에 비국교는 사회적 세력으로서 자유의 투사가 되었다. 영국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비국교도(청교의 각파)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다.

 

(5) 영국의 사회 계급도 4성제도(caste system)가 되지 않고 계급(class)으로 된 것도 종교상 이유에서 이해된다. 즉 귀족 상류계급은 국교를 신봉하고 중산 하류계급은 대개 비국교 각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종파적 관념에서 생겨나는 대립이 계급적 대립에 대치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편이나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니만큼 가톨릭이나(프랑스) 루터파(독일) 하나의 종교를 가진 대륙에서와 같이 무신론적 사회개혁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의 사회주의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6) 영국 사회는 16세기부터 분해되기 시작하여 다원적인 시민 사회로 착실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영국의 기독교도 가톨릭교로부터 이탈하여 앵그리카니즘이 성립되고 앵그리카니즘에 대해서 침례교, 성결교, 장로교, 회중교(會衆敎), 퀘이커교 등등의 퓨리터니즘의 각파가 생겨나서 종교의 다원화는 사회의 다원화와 일치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시민계급은 비국교인 퓨리터니즘을 신봉하고 새로운 희망에서 활동하여 오늘의 영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실로 영국 사회의 발전은 종교의 발전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7) 아메리카 식민지가 퓨리턴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그 밖의 식민지도 대개 비국교도인 시민 계급에 의해서 개척되었으니 대영제국의 발전과 종교적 발전도 서로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8) 영국의 보통 교육이 일요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국교도와 비국교도가 열성적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교육 사업에 노력했다. 지금도 종교 단체의 학교가 교육의 국민적 제도의 기초가 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이후 교육의 속화(俗化)가 강행되어 속인의 학교가 우세하다.

 

(9) 사회도덕 생활에 종교(퓨리터니즘)가 커다란 비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17세기의 퓨리턴 혁명을 생각하면 곧 이해될 수 있으리라. 이전 반세기 동안 영국의 경제적 번영과 아울러 사회적 사치 풍조는 연극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오락 시설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퓨리턴의 혁명으로 금욕 생활이 강조되고 번연의 [천로역정]이나 밀턴의 [실락원] 등등의 퓨리턴적 작품이 나왔던 것이고, 극장이 폐쇄되고 모든 화려하고 부화(浮華)한 생활이 일소되었던 것은 그만치 영국인의 자제력을 길러 주었다고 하겠다. 만일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화려한 문화가 그대로 계속되었던들 제2의 베르사유 궁전이 건설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금욕적 퓨리터니즘의 세례를 받고 영국인은 화려와 검소의 균형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인의 중용의 생활은 물질과 종교의 균형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 사회개혁 운동이나 정치적 개혁 운동에 종교인이 앞장섰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느 나라보다도 영국이 앞설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국의 교회는 그 파를 막론하고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탓으로 사회도 항상 청신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교회 자체도 부패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기울어지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종교(기독교)가 제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 가지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영국의 종교.교회는 어떠하였기에 영국사에 그렇게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었던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국의 기독교는 대륙과는 달리 독특하게 발전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지배하에 있기는 하였으나 영국의 교회로 발전하였고 영국적. 국민적 성격을 가지고 발전하여 교황청도 항상 영국 교회에 대해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군주나 백성들은 대개가 반교황적인 태도를 가지고 영국 교회의 독립을 항상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14세기의 위클리프의 개혁운동도 반교황적 국민적 교회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가톨리시즘의 구심적인 경향을 시인하면서 영국적 교회의 원심적인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대륙 교회에는 미미하였고 다만 군주들의 반교황 정책이 있을 때 갈리카니즘 (gallicanism) 같은 것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대륙에서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이 두 차례나 일어났다. 한번은 헨리8세의 로마 교회로부터의 이탈과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앵크리카니즘의 성립이고 또 한번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앵그리카니즘에 대항해서 일어난 퓨리터니즘의 각파를 생각할 수 있다. 사실은 후자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왜 두 차례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인가? 대륙에서는 독일은 루터파로, 프랑스는 가톨릭교로 있었는데 영국에서는 왜 앵그리카니즘과 퓨리터니즘 두 종파가 생겨났던 것인가? 그것은 종교상의 이중주의라고 하겠는데, 전자는 국교로서 구심적인 종파요, 후자는 비국교로서 원심적인 종파다. 즉 앵그리카니즘은 국가의 종교요, 퓨리터니즘은 사회의 종교다. 전자는 통일과 전통과 권위를 숭상하는 통일교요, 후자는 다원과 진보와 자유를 높이는 다원적 종파다. 국가는 연면한 역사적 전통 위에 있는 것이고 사회는 다원적으로 분해하여 가는 것을 그것의 본능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다원적으로 분해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발전한 것이 퓨리터니즘의 각파라고 하겠다. 대륙에서는 가톨릭 아니면 루터파 양자택일을 하게 되었는데 가톨릭이나 루터파는 모두 통일적 종교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국에서는 다원적인 퓨리터니즘이 있기 때문에 변하는 시세에 언제나 종교상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대륙의 종교는 대개 구심적이었으나 영국에는 구심적인 종교와 원심적인 종교 두 개가 있어서 종교상 독단주의는 발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정신상 자유는 항상 보장될 수가 있었다. 또 앵그리카니즘과 퓨리터니즘이 서로 선()한 사업에서 경쟁하게 되었으므로 어느 종파나 부패하지 않았고 나라와 사회도 종교가 있으므로 해서 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영국사에는 종교적 요인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종교가 제일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는 국가보다 중요하다

 

개인은 사회보다 중요하고 사회는 국가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을 영국인은 자주 말하고 있다. 이제 개인이 중요하다는 이유에 대해서는 고사하고 사회는 어떠한 의미에서 국가보다 중요하다는 말인가?

 

사회가 국가보다 중요하다는 데 대해서는 지리적 또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으리라. 첫째는 영국이란 나라는 원래가 섬나라인 관계로 외국의 침해를 쉽게 받지 않았고, 따라서 국민은 그들의 생업의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국가의 권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요, 둘째는 영국 교회(사회의 기본형태다)는 역사적으로 보아 항상 국가의 권력에서 독립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지방 사회의 기간이 되는 젠트리(중산 계급)는 지방의 자치 행정의 주체가 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에 도시에서는 상공업 시민계급이 자치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찰할 수가 있다. J.S. 밀도 그의 자서전에서 “9/10에 해당되는 국내 문제가 외국의 경우에는 그 나라 정부에 위탁되어 있을 것이나 영국에서는 정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에 의해서 처리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국 사회는 완전한 자치제로 발전하고 있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역사적으로 사회의 힘이 어떻게 생장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사회의 세력이 증대되는 데는 그런 사회는 무엇보다도 폐쇄된 사회가 아니라 개방된 사회가 되어야 한다. 만일에 신분 제도로 인도의 4성제도와 같이 서로 봉쇄된 사회로 되어 있다면 사회 계급의 알력은 더욱 커가고 따라서 국가의 증대되는 권력을 막을 길이 없게 된다. 독일이나 프랑스가 오랫동안 전제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분 제도에 의한 폐쇄된 사회를 그대로 오랫동안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개방된 사회는 국가 권력의 횡포를 막을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 사회를 남보다 앞서 건설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영국 사회는 대륙의 그것과는 달리 일찍부터 개방된 사회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는 상당한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 대륙에는 귀족의 자제는 상속적으로 귀족이 되어 사회적. 정치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평민과의 관계는 마치 외인을 대하듯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노르만 정복(11세기) 이후 장자 상속법이 제정되어 귀족은 장자에게만 한하고 차자들은 성장하면 장원을 떠나서 다른 곳 농촌, 도시 으로 가서 스스로 생계를 도모해야 되었다. 이러한 차자. 차손들이 뒤에 지방의 중산 계급인 젠트리가 되고 도시의 부르주아가 되어 부유한 계급을 형성하였고 그들의 후손 중에는 몰락한 장자. 장손의 장원을 매입하여 귀족적 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그 반면에 몰락한 귀족은 다시 항간(巷間)으로 나가 자수성가하여 부르주아가 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영국 사회는 계급의 상하 교류가 부단히 진행되어서 시민계급에도 양반의 피가 섞여 있고 양반에도 시민적 정신이 농후하게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사회 계급의 구별은 지극히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애매하다는 것이 개방 사회를 이룩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영국 사회는 상하 계급의 대립이 지극히 완만하였고 국가 권력(왕권)에 대해서 같은 보조로 대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 계급의식을 중화시킨 것은 언어에도 있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귀족(노르만인)은 프랑스 말, 성직자는 라틴어 그리고 일반 농민(앵글로색슨)은 독일어를 사용하였으므로 상하의 계급의식은 언어의 차이로 메꾸어졌던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계급의 차이가 종교의 차이로 전환되어서 종교 의식이 계급의식에 대치되기도 했다.

 

계급의 교류와 계급의식의 결여는 사회를 개방 사회로 만들었고 이러한 개방 사회 안에서 중산 계급이 생장하게 되고 이 계급은 상하 계급을 점진적으로 흡수하여 지배적인 사회가 되고 그 사회가 국민을 대표하게 되었다. 즉 농촌에는 귀족적 젠트리 계급이 중산 계급으로 발전하다가 다음에는 요먼(소지주 자유농민)계급이 생장하여 영국 농촌의 건실한 중산계급 사회를 이룩하였고 도시에는 대 부르주아지에 뒤를 이어 중.소 부르주아지 사회가 발전하여 영국은 점차로 중산 계급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이러한 신흥 중산 계급은 신교 중에도 퓨리터니즘의 제 교파에 소속되어 군주나 대귀족의 특권 또는 국교의 불 관용주의에 항거도 하였다 . 그리고 퓨리터니즘의 확대는 중산 계급 중 시민 계급의 발전을 촉진시켜서 이 계급으로 하여금 상업. 산업혁명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또 시민 계급은 이 두 경제 혁명을 통하여 확고한 시민 사회를 건설하여 다른 모든 사회에 대해서 지도적 지위에 서게 되었다. 즉 시민 사회는 그 부력(富力)과 지력(知力)으로써 실력있는 사회가 되고, 시민 사회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퍼짐과 아울러 시민 사회도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모든 개혁은 시민 사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20세기에는 일반 대중 사회가 대두하여 시민 사회와 서로 흡수되어서 영국은 거의 완성된 중산 계급의 사회를 완성했다. 이렇게 사회가 변천하는 동안에 보수당(지주. 귀족), 자유당(시민 계급), 노동당(노동자, 일반 대중) 등의 정당도 발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 계급 보다 이념의 차이로 정당이 갈리어 있다.)

 

그런데 영국 사회의 특색은 그 다원성에 있는 것이다. 지금 국가가 통일되고 모든 행정이 중앙집권적으로 되어 있다고 하나 아직도 스코틀랜드의 고지에는 옛날 켈트어인 게일릭어를 사용하고 있고 웰스지방에는 웰스어가 학교에서 공부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에는 장로교, 웰스 지방에는 감리교, 그리고 또 잉글랜드에는 앵그리카니즘이 우세하여 있다. 이런 것은 영국 사회는 자유사회요 임의의 사회이므로 자연히 다원화되었던 것이고, 이러한 다원적 사회의 자유의사로서의 사회 여론은 모든 정치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개인과 국가 어간에 사회가 있어서 위로는 국가의 횡포를 막고 아래로는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의무를 느끼게 한다. 사회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있다고 하지만 개인은 국가보다 사회생활 그것은 자유 사회의 생활 을 통해서 자기의 행복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회의 힘이 국내 생활을 다원적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어서도 다원적인 국제 사회를 이룩했다. 일찍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나 또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그리고 인도 등은 영국의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건설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전제적 권력을 피해서 해외로 개척의 길을 취한 사회의 힘이었다. 인도나 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영국의 여러 컴퍼니(상사회사)가 개척한 것이요, 그것은 시민 계급이 여러 회사를 조직하고 이민을 이주시켰던 것이다. 인도에는 동인도상회가 하나의 국가적 기능을 발휘하면서 식민지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오늘날도 영국인은 미국을 2의 영국사회(Another English Society)’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도는 사회(동인도상회)가 개척한 것을 뒤에 국가가 이를 제국의 영토로 편입했고 오늘날 인도가 독립했다고 하는 것은 영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했다는 말이지 영국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 영국인은 인도가 독립하기 이전보다도 5000여명이 더 인도에 가서 일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이 국가로서는 인도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으나 사회로서는 인도와 긴밀한 관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이 국가의 힘으로 식민지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오늘에는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되었고 양자의 사회적 유대도 끊어지고 말았다. 영국은 중국 대륙에 있어서의 영국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중공을 승인하고 대만의 국민정부와는 국교를 단절했다. 이것은 사회가 국가보다 얼마나 중요하다는 본보기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영국은 지금 구식민지와 대등의 국제적 공동사회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국의 풍토다

 

종교가 제일이요 국가보다 사회가 중요한 나라, 영국의 정치 풍토는 두말할 것 없이 종교의식과 사회의식으로 이룩되었다고 하겠다. 영국 정치에서 종교적 양심과 도덕적 의식 그리고 사회 여론을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복지는 그러한 정치 풍토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영국의 정치풍토의 두드러진 특색은 타협(Compromise), 이해(Comprehensiveness) 및 양보(Concession)의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세계인이 경탄하고 부러워하는 바이다. 3C정신은 어디서 생겼느냐? 타협이라 이해라 또는 양보라 하는 미덕은 개방된 사회생활에서 생겨난다. 어느 사회든지 먼저 개방된 사회에서 3C정신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국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된 사회를 먼저 이룩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방된 사회의 사회의식은 상대적이다. 폐쇄된 사회의식이 절대적인 데 대하여 개방된 사회 사람은 모두 상대적 원리를 생활의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이 상대적 인생관은 너와 나의 대등 관계에서 생기는 이데올로기요,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해서 너의 생활도 완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폐쇄된 사회가 상하 계급으로 나뉘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사회의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에는 절대권이 지배하지만 개방된 사회는 상대권으로 유지되어 간다. 그리하여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거기는 필연적으로 서로의 이해와 타협과 양보의 정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는 권력자가 그저 지배하면 되는 것이나 개방된 사회는 각 개인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타협, 양보 그리고 이해만이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생활 위에서 영위되는 정치생활이니만치 어떠한 정치적 투쟁도 결국은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서로 양보함으로써 종당은 타협을 짓게 되는 것이다.

 

타협을 한다는 것은 벌써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니 이러한 가치 인정에서 나타난 타협의 정신을 정치면에서 많이 보게 된다. 영국에서는 소수 야당이 있으므로 여당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비록 소수의 야당이나마 그들의 의견에 존중히 여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영국의 정당은 적대(hostility) 관계가 아니고 대립(opposition) 관계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서 우리와 대립되는 반대의 의견을 가진 정당으로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야당과 여당은 서로 잡아먹으려는 적대 관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이 야당을 존종히 여긴다는 이야기와 우리나라에서는 야당을 못잡아치워서 애태운다는 말씀과는 운니(雲泥)의 차가 있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17세기 이래 어떤 정책이나 정략(policy)보다도 타협과 이해와 양보가 중시되어 왔고, 영국인 정치 생활의 깊은 본능적 충동(impulse)으로 하나의 습성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17세기 말 명예혁명과 18세기 초엽 월풀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이후부터 정당정치는 페어플레이(fair play)로서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타협해야 되는 것으로 되었다.

 

타협의 정신은 사회. 정치 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 대한 태도에도 있는 것이다. 영국은 진보하면 할수록 과거에 대한 존경도 증대되고 있다. 역사와 타협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므로 현재에 더 잘 살고 미래 창조의 어떤 계기를 얻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자는 심보다. 현재가 과거와 타협함으로써 역사적 전통이 계속되고 미래가 정상적인 코스를 향해 가는 것이다. 벌써 몇 해 전에 일본의 황태자 결혼이 있었는데 황태자비를 평민의 가정에서 택했던 일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의 지도층은 전통과 진보의 조화라고 말했다. 또는 새로운 일본의 상징이요, 옛날의 전통과 신시대 정신과의 조화 위에 새로운 황실의 존재양식을 뵈어주는 것이라고도 했으며 또는 고식전중(古式典中)의 새로운 공기라고도 평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신문의 평은 일본 귀족은 황태자비 하나 보낼 수 없도록 몰락했느냐?”“역사에 대한 너무나 허무감(虛無感)을 주는 일이 아니냐?”이었다. 전통적 왕실에 새로운 정신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지 꼭 평민의 피()가 섞여야 민주적이 된다는 법은 없다. 영국식대로 생각한다면 황실의 결혼은 귀족적으로 하고 새로운 시대적 정신만 군주가 가지면 그만이 된다. 여기에 대해서 전 총리 애틀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조지 5세를 높이 찬양하고 왕이 1차 대전 후 왕의 모든 특권을 의회에 내어맡기지 않았던들 모두 공화국 되던 판에 영국도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왕이 현명하였기 때문에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영국의 국가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의 모든 전통은 그대로 계속되나 거기는 항상 그 시대적 새로운 전통이 가미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새 후진국가의 독재자와 같이 과거의 역사를 무시하고 자기의 무식한 머리에서 짜내는 독선적 정치원리를 가지고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 역사와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유.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없다고 하겠다.

 

영국인의 타협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원리원칙의 타협이 아니고 어떤 방향. 지향에 있어서의 타협이다. 원리와 원칙의 타협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방향과 어떤 경향에 있어서의 타협은 무한하고 종말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학자 바커는 정당은 임의의 결사인데 그것은 여론에 움직이는 조직체라고 했다. 언제나 새로운 여론의 방향과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정당인 것이다. 이러한 타협의 정신은 가령 신문에 있어서 보면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의 기관지(London Gazette)가 있기는 하나 사회나 정치적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글은 게재하지 않고 관보의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 보수당이나 노동당에 기관지가 있으나 어느 편이든지 정권을 잡으면 신문은 중립을 지킨다. 야당일 경우에는 물론 야당지 노릇을 하는 것이지만, 즉 권력을 잡았으면 중립을 지켜야 되고 못 잡았으면 정부에 대해서 시비를 가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이란 것은 원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역사적 계기를 중심하고 생기는 것이니 그것을 균형이라고 해도 통하는 말이다. 타협은 결국 두 개의 세력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집권자들이 야당적(?)인 신문에 공갈, 협박, 회유 등등의 정책을 사용하여 천하의 신문을 모두 여당지로 만들지 못하면 밤잠을 못 자는 그러한 부류의 인간과 영국의 정치적 지도자와 비교한다면 보기에도 딱할 노릇이다.

 

이상으로써 영국인의 타협 정신에 대한 설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인은 생리적으로 상대방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는 본성을 가졌는지도 알 수 없다. 남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 이야기에 대립되는 의견을 만들고 거기서 중간적인 어떤 타협점을 얻어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대두하니까 영국적인 국가 사회주의라는 정책이 채택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두 편의 균형(타협)에서 생활의 원리를 얻으려고 하는 경향은 결국 물리학에서 보는 구심적인 경향과 원심적인 경향의 타협 또는 균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인의 이중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원심은 구심에 그리고 구심은 원심에 서로 가까워지려는 데서 타협 혹은 양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애틀리도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기를, 영국의 보수당은 더욱 리버럴하여가고 노동당은 더욱 컨서버티브하여 가고 있다고 했다. 애틀리는 하원 연설에서 우리는 젊은 여왕 엘리자베스에 충성하자! 그녀의 치세를 엘리자베스 1세 시대보다 낫기를 바라자!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가 오기를 기원하자! 좀 더 번영과 평화가 오기를 바라며 왕가의 만세를 부르자!”라고 했다(1952). 애틀리는 여왕으로부터 나이트(기사) 벼슬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고 보면 영국의 보수주의는 과거의 진보주의였고 오늘의 진보주의는 장래의 보수주의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 정당의 멤버 귀족들은 일찍이 왕의 전권에 항거하던 민권 대변의 집단이었는데 지금은 질서와 통일과 국가의 확호부동한 권력을 강조하게 되었고, 오늘의 자유의 수호자로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진보주의 정당은 자신이 보수화해지고 새로운 진보주의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영국의 정당 정치는 중간 치기다. 루소나 페인 같은 극단적 혁명주의와 드 메트르의 극단적 보수주의와의 중간노선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보수주의라는 말을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주의라고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 영국의 정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은 전체적으로 보수적 경향이 강한 민족이라는 인상을 준다. 섬나라 사람은 대체로 보수주의적이기도 하다. 메테르니히도 영국의 보수주의는 모든 계급 사이에 살아 있다고 하였고 영국은 가장 훈련된 곳이기 때문에 가장 자유스러운 나라라고 했다. 독크비르도 영국은 고풍(전통)에 의해서 혁명의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알기 쉽게 말하면, 어떤 자극에 대해서 그리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로 자기 자신이 반성하고 어떤 결단을 얻기까지의 시간적 문제로 해석되는 것이다 영국 국민성은 말하자면 보수와 진보의 복합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동남 지방인의 진보적 기질과 서북 지방인의 보수적 기질의 균형이요, 종합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종교에 있어서도 균형과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심적인 국가적. 전통적 종교인 앵그리카니즘과 원심적인 사회적. 진보적 종교인 퓨리터니즘이 백중지(伯仲之) 세력으로 영국인의 종교 생활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앵그리카니즘에 있어서도 캔터베리의 대주교와 요크의 대주교가 응분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하나의 지도자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고 있다.

 

그 밖에 왕과 의회의 관계도 그렇다. 의회(하원)의 결정은 여왕이 승인해야 되며 여왕이 승인한 후에야 의회의 결정이 효력을 나타나게 되어 있다. 또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여왕이 임명하나 이 대주교는 여왕의 대관식의 주재자가 된다. 요크의 대주교는 여왕(혹은 왕)의 배우자에 대한 대관에 주재자가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국 정치의 타협 정신에 대해서 다시금 반성하여 보자. 이 타협 정신의 연원은 역사적으로 깊이 연구하여야 될 것이나 근세에 내려오면서 종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서로 타협하기 이전 엘리자베스 시대에 성립한 앵그리카니즘은 대륙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로마 가톨리시즘의 타협 종교였다. 이것은 양파의 교리의 타협이라기보다는 당시 영국인의 종교생활의 방향에 있어서의 타협이었던 것이다. 그 뒤 곧 퓨리터니즘이 생겨나서 앵그리카니즘의 독주를 막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종교생활의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영국의 종교는 앵그리카니즘과 퓨리터니즘의 대립과 타협과 협조로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영국인을 기독교적 생활을 하게 하였고 종교가 제일이라는 말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와 자기 자신의 책임감은 모두 퓨리터니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현대 영국의 정치와 사회생활의 자유. 민주화는 퓨리터니즘의 공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영국은 앵그리카니즘과 자유 교회(과거의 퓨리턴 교회)는 서로 협조하여 기독교와 영국의 복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 영국의 정치가 어떻게 서로 타협하며 양보하면서 영국의 번영을 꾀하고 있다는 실례 두 가지를 말해 보고자 한다.

 

1951년 노동당 애틀리가 앞으로 2년여 집권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여론이 자기편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자 그는 곧 선거로써 국민의 여론을 물은 바 있었는데 그때 영국 국민이 보수당을 지지하자 애틀리는 곧 정권을 보수당에 이양하고 말았다. 1957년 맥밀란이 같은 보수당 이든으로부터 총리의 자리를 물려받자 그는 국민의 동의 여부를 묻기 위해 선거를 했는데 그때 국민은 맥밀란을 지지하여 그가 총리가 되어 임기를 마친 적이 있다. 이것은 무슨 소리냐 하면 영국의 정권은 국민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세워진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그대로 계속해서 받고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합법적으로 세워진 정권이니 아무리 비정(秕政)을 하였어도 임기 4(?)동안 그대로 버티고 있는 열등 인간과는 대비도 아니 된다는 말이다.

 

- 사상계 (196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