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의 퍼스펙티브] 식민지 근대화론 허구 드러낸 램지어 파동
박명림 연세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21.03.22 00:26 | 종합 25면 지면보기
근본 전제부터 오류인 램지어 논문
그래픽=최종윤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 ‘태평양 전쟁 중 성 계약’을 둘러싼 국제적 논란과 파동이 일반적 학술 논쟁의 범위를 훨씬 넘어 전개되고 있다. 다양한 전공과 분야의 내외 전문가들의 비판과 검증을 통해 해당 글은 학술적 증거 자료 결여와 사실 왜곡, 적용 이론의 중대한 오류로 결론이 나고 있다. 따라서 그 논문을 둘러싼 학술 논쟁은 이미 판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식민지 근대화론, 일제 때 한국 근대성이 형성·발전됐다고 전제하나
일본식 근대성은 산업화·민주화 진전으로 거의 완전히 뿌리 뽑혀
한국 발전은 일제 유산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이탈했기 때문에 가능
군사주의·침략전쟁·천황체제의 연장인 수령체제 북한이 일제 지속
그의 핵심 주장은 위안부 여성들이 강제로 성노예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과 동의에 근거한 계약을 통해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매춘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논문은 일본 국가의 개입, 강제 동원, 인신매매, 성노예 규정에 대한 거부는 물론이고,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서 위안부 여성들을 근대적인 자발적 경제 행위자이자 계약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이는 글 전체의 가장 중요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근본 전제를 유념할 때 우리는 내외에 확산된 그러한 역사 인식 자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반 일본의 한국(과 동아시아) 강제 점령에 대한 근본 시각을 말한다.
그것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 전제이기도 한, 일본 강점 시기의 근본 성격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요컨대 일본과 한국, 서구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식민지 근대성’, 또는 ‘식민지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일본의 한국 강점 시기를 한국의 근대 주체, 근대화, 근대성의 형성·발전·성취와 연결해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급속한 발전 이후 퍼지고 있는 이 사관은 객관적으로 허다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일제는 개인·자유 등 근대성 억압
무엇보다 일본 점령 하의 한국은 근대성의 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게 보아 근대성은 두 범주로 구성된다. 하나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련된다. 여기서는 주체(성)·개인·자유·자율·시민·주권·독립·민주·평등(의 지향)이 핵심 요소를 이룬다. 일본 강점기 동안 이 요소들은 철저히 억압·후퇴·탄압·지연됐다. 오히려 일제 종식 이후 회복·발달하기 시작했다. 혹여 그 시기 동안 이 부분이 일부 진전했다면 그것은 일제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일제에 맞선 세계성, 세계 일반의 진보 때문이었다.
근대성의 두 번째 범주는 경제·물질·시장·기술·의료·상업·공업·노동·기업과 관련된다. 식민지 근대성과 식민지 근대화 담론들은 이 차원에서 일부 양적 발전과 성장, 이후 한국 사회에의 기여를 말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만약 이 부문에서 일부 성장을 인정한다고 해서 근대성·근대화의 진전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물질 발달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법률·제도 정비와 기업 설립, 경제 발전이 일부 있었다고 해도, 그에 수반되는 학살·강제징집·성노예·인권유린을 포함한 가공할 인간적 희생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반인간적 근대화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일제 강점 시기 종반 한국에는 세 가지 근대성이 쟁투하고 있었다. 첫째가 일본의 전체주의 근대성이고, 둘째가 서구와 미국의 자유주의 근대성이며, 셋째가 소련의 사회주의 근대성이었다. 후자의 둘이 연합해 전자를 패퇴시켰을 때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근대성으로 쪼개졌다. 이때 한국에서 일본식 근대성은, 한국 고유의 근대성 요소들과 서구 자유주의 근대성이 융합된 특유의 복합적 근대성이 이끄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거의 완벽하게 뿌리가 뽑혔다. 이 ‘혼융적 근대성’이야말로 불꽃처럼 역동적으로 성취된 한국적 근대 실현의 모태였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개인성·주체성·시민성·국가조직·경제질서·사회문화·교육제도·헌정체제·국제관계 측면에서 일본적 속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한국은 건국 초기인 이승만 시기부터 일본 제국주의 유산 극복 노력에 관한 한, 일부 하급 친일파에 대한 처벌의 유예를 제외하고는 군국주의 철폐와 민주제도 도입, 토지 개혁과 시장경제 실시, 민족어(한글) 복원과 (임시) 민족정부의 헌법적 계승, 한·일 회담에서의 식민지 시혜론(식민지 근대화론)의 단호한 거부와 반박, 그리고 한·미 동맹을 통한 국제 관계 안정과 주변 국가의 침략 방지 장치 마련 등을 포함해, 매우 과감했고 적극적이었다. 인간은 용서하되 구조는 극복하는 경로였다. 문명을 이끌어온 인류사 보편의 발자취였다.
식민성은 근대성으로 연결될 수 없어
반면 북한(조선)은 반대로 일본 식민체제 지속에 가까웠다. 두 체제의 성격은 거의 동일했다. 전체주의, 군사주의, 침략 전쟁, 극단적 배외주의, 일인 숭배, 천황체제를 이어받은 수령체제…. 거의 모든 속성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제 폭압 체제의 부활이었다. 강점과 함께 천황의 조칙(한국의 국호를 개정해 조선이라고 칭하는 건)으로 강요된 국명(대한)의 박탈과 치욕적 지방 명칭(조선) 부과를 국호(조선)로 사용하는 것처럼 둘의 상동성을 상징하는 것도 없다. 국명은 물론 당(조선노동당), 군대(조선인민군), 영토(조선반도), 민족(조선민족), 언어(조선어)에서도 모두 일제가 강요한 명명을 사용했다.
실제 역사와 문명에 비추어 식민지 근대화론의 부당함을 살펴보자. 그것은 첫째, 이승만 시기의 빈곤과 저발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일본의 점령 통치로 인해 한국 근대화의 제도적·물질적·법적 교육적 토대가 놓였고, 이후 빠른 근대화를 이룩했다면 한국은 일본 점령 종식 이후에 지속해서 발전해야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 결과 1960년대 초까지 한국은 발전은커녕 혹독한 빈곤과 저발전에 시달렸다.
둘째, 식민지 근대화론과는 반대로 한국은 오히려 토지 개혁을 포함해 일제 유산의 극복 이후 미국의 원조, 중심부 자본주의와의 긴밀한 연계, 그리고 수출 주도 산업화 정책의 채택 이후 비로소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발전은 일제의 유산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이탈 정도에 비례했다.
셋째, 식민지 근대화론이 실제에 부합하려면 한국(남한)보다 조선(북한)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2차 대전 종전 이전 공업화 수준. 에너지 설비, 공장 시설, 자원 배분 면에서 한반도 북부는 남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정반대였다.
식민지 근대화론 망령 떨쳐내야
넷째, 동남아·중동·아프리카·카리브해·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해 장기 식민지를 경험한 어떤 나라도 식민 통치의 결과로 인해 근대화와 발전을 이룬 사례는 거의 없다. 한국보다 비교할 수 없이 긴 식민 통치를 받았던 그들은 왜 식민지 근대화론을 적용할 수 없는가? 한국만, 또는 일본에 의한 동아시아 일부 국가들만 예외인가? 아니다.
주목받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들이 밝혀냈듯 중심부의 근대성이 발전할수록 주변부의 식민성·노예성·종속성은 강화됐다. 근대와 식민, 근대성과 식민성은 시계열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대신 병행했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침략과 함께 이식된 것은 근대성이 아니라 식민성이었다. 인륜성·인간성이 아니라 노예성·노예상태였다. 주체성·인권·자유·평등의 폭력적 파괴였다. 인류사는 이를 확고히 증거한다.
인류 보편사에 비춰 침략과 강점 상태에서 식민성과 근대성, 노예성과 주체성, 폭력성과 자율성은 함께 발전하지 않았다. 식민지 근대성과 식민지 근대화는 성립 불가능한 허구이다. 이번 램지어 교수의 논문 파동을 계기로 우리는 이 허구적 망령을 떨쳐내고, 인간의 자율과 주체성, 자유와 평등의 관점을 확고히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과거는 미래의, 고난은 희망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우린 끝내 인간의 편에 서야 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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