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지식인의 삶: 이병주와 황용주
안 경 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작가를 만든 시대와 사람들
문자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익힌 세대에게 문인은 시대의 스승이었다. 그 세대에게 문인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고도의 훈련을 습득한 진인(眞人)이었다. 문학작품은 시대의 거울이자 개인과 공동체 삶의 성찰을 담은 경전인가하면. 대안정부를 세우자는 새시대의 격문이기도 했다.
나림(那林) 이병주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소설가였다. 한국문학사에 명멸했던 무수한 별들 중에 단 하나만을 고르라면 이병주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작품을 합치면 곧바로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총체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근대문예비평’이라는 전인미답의 지적 영역을 개척한 김윤식교수(1936-2018)는 이병주에 집착한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거의 모든 대한민국 작가의 글을 읽고 정성들여 평을 쓴 김윤식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붙들고 있는 작가는 다름 아닌 이병주였다.
"우리에게 청춘은 없었다. 우리는 청춘을 빼앗긴 세대다.“ 그는 탄식했다. 이민족의 압제에, 명분 없는 전쟁에, 끝이 보이지 않는 궁핍과 내일 없는 좌절에, 미처 품어보지도 못한 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불행한 세대라며 버릇처럼 쓰고 말했다. 그랬기에 작가로서는 축복받은 세대였다. “나라가 불행하면 시인이 행복하다(國家不幸詩人幸)” 그가 즐겨 인용하던 옛 중국시인의 구절이었으니. 3.1만세 사건 직후에 식민지 소년으로 태어나 지배자 일본의 제도 속에서 작가 의식이 형성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공식어와 집에서 사용하는 생활어, 두 언어로 나뉘어 엉킨 ‘이중자아’를 품고 살아야만 했다. 황국신민과 민족주의자, 가아(假我)와 진아(眞我)를 함께 갈무리하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익혀야만 했다. 이렇듯 아버지가 모르는 언어와 세상을 배운 그는 후일 그 언어와 세상을 거부하는 아들 세대를 상대로 답답한 말씨름을 해야만 했다.
10대의 반항아로 진주농업중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일본 유학, 학병, 해방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군사 쿠테타와 투옥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대학 교수에서 언론인을 거쳐 전업 소설가로 변신한 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세인의 사랑과 시샘을 함께 누렸던 72년에 걸친 그의 화려한 행장(行狀)을 일러 ‘사랑과 사상의 거리재기’로 명명한 적이 있다. ”사랑이 없는 사상은 메마르고 사상이 빠진 사랑은 경박하다.“
이병주에게 영향을 미친 많은 사람들 중에 황용주가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보다는 한반도의 주민으로 살고 싶다.“라던 그의 비장한 통일관은 ”나에게 조국은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이병주의 수사로 표출되었다. 박정희의 멘토로서 5.16 군사쿠데타를 ‘민족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혁명으로 표방하고, 박정희 집권 초기에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나라의 장래를 설계하던 황용주였다.
오래된 형사법 이론에서 ‘심리적 자타혼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행위자의 인식 속에 주체와 객체 사이에 혼돈이 일어나거나, 행위자 사이에 공유하는 강한 심리적 유대관계로 인해 구체적 행위자의 개별적 행위가 관련자 전체의 집단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을 지칭한다. 작가 이병주에게 동시대의 선배이자 친구인 황용주는 이병주 자신이기도, 타인이기도 했다. 닮고 싶은 선배이기도 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친우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일생에 많은 공통점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소년기의 민족의식, 일본 유학과 문학 수업, 학병 입소와 중국전선 복무, 해방 후 교직 종사, 남한 단독정부의 반대.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 남북한 UN 동시가입의 지지, 4.19와 5.16의 지지. 5.16 이후 체포와 필화사건 등등, 유난히 중첩된 생애를 걸었다. 또한 둘은 언론사 경력과 함께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착을 공유했다.
작가의 고향, 하동
작가에게는 고향이 따로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시인이 호기를 부렸다. 온 세상이 그의 몫이라고.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평화로운 마을 게르니카가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한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자 격노한 지식인의 하나다. 그는 ‘게르니카의 승리’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인민전선 공화군을 지원한다. 2차대전 후에는 멕시코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민중의 투쟁을 지원하며 자신에게는 고향도 고국도 없다고 공언했다. 민족보다 계급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음화(陰畫)로만 다가오는 그의 시구는 그가 자란 고향과 만난 사람들이 더해져야만 온전한 채색이 가능하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국제공산주의도 결국에는 국가와 민족 단위로 분화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고향과 조국은 정신적 삶의 버팀목이다.
고향이란 떠나서 그리워하고 이따금씩 되찾곤 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 숫제 평생토록 가슴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계의 명작 소설은 모두 향토문학이라는 수사도 일리가 있다. 어린 눈에 비친 고향의 산천과 풍물, 세속과 인간의 모습이 후일 문학작품으로 재현되어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여 가슴에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고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지성의 자격이 있다.“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신비주의 철학자, 빅토르 위고 (Hugh of Saint Victor, (c. 1096 –1141)의 말이다.
대한민국 소설가 이병주의 고향은 경상남도 하동이다. 그를 작가로 키워낸 정서적 자양분은 모두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남해바다 하동 포구가 배양한 것이다. 하동은 산과 강과 바다를 함께 어울러 안은 넉넉한 땅이다. 지리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요, 섬진강은 대천의 반열에 세워도 무리가 없다. 한려수도를 안은 남해바다는 실로 아름다운 물이다. 이 고장 태생의 시인 정공채(1934-2008)의 〈찬불이하동가 (燦不二河東歌)〉구절 그대로다.
“하동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하동이 어떠하냐 묻지를 말게나
산수 좋고 인물 좋고 풍광도 으뜸일세....
하동아, 둘도 없는 불이명향(不二名鄕)이며
한 군향(郡鄕) 안에 지리산, 섬진강, 한려수도
이름난 산과 장강(長江) 바다도 거느렸네
하동아, 우리 고향, 삼포(三抱)의 불이향.”
1921년 신유년 3월 16일, 북천면 옥정리 안남골, 합천 이씨 이세식(李世植)과 부인 김수조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난다. 고대하던 아들이라 더욱 기쁨이 넘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산모는 아이가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는 바로 그 순간에 환한 빛과 함께 부처님이 현몽했다고 손자에게 전했다. 그 아이는 72년 후에 서울에서 영면한다. 하동, 진주, 마산, 부산. 서울, 뉴욕, ,,, 태어난 곳과 머문 곳을 함께 ‘고향’으로 품은 대작가로 죽었다.
평론가 독자의 고향, 밀양
누군들 자신의 향리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까. 밀양 사람들도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양반은 양반대로, 상민은 상민대로 부당한 것, 낯선 것에 저항하는 전래의 성향은 밀양인의 자랑이다. 반상의 구분이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 굳이 조상의 신분을 들먹거리며 옛일을 되짚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두가 불의에 저항하는 밀양인이라는 자부심을 향토의 정신적 자산으로 여긴다. 정유재란의 영웅,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에 비견할 정도로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아랑의 설화가 탄생할 만한 전통이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밀양을 반역의 땅, 저항의 땅으로 그렸다. 이 지방출신의 문인, 김춘복은 소설 ?계절풍?에서 자신의 고향인 산내면 ‘쌈짓골’을 무대로 6.25 직전에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 새 세상을 그리던 민중의 핍진한 삶을 그렸다. 소설가 이문열의 자전적 소설 ?변경?에서 1950년대 말, 60년대 초 밀양읍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열 살 남짓 어린 나이에 이 고장에 흘러 들어와서 소년기를 보낸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자산이 이 시기에 이곳에서 배태되었다고 고백한다.
1918년 1월 3일, 밀양군 단장면 감물리, 창원 황씨 가문에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황대화의 둘째 아들이다. 비교적 일찍 개화에 동참한 대화씨는 총독부의 관리가 되어 인근의 의령군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화씨는 아들에게 항렬자(龍)에 덧붙여 구슬 주(珠) 자를 준다. 분명히 용의 여의주를 염두에 둔 큰 이름이다. 세상을 평정할 큰 꿈을 지니고 살아야 할 운명을 감지한 것일까. 김해 김씨, 부인이 꾼 예사롭지 않은 태몽에 취했을까. 작명가의 자문을 얻었다. 범상치 않은 시운을 타고 난 아이라는 것이다. 이후 용주의 일생은 무지개를 타고 나르던 용의 비상과 추락이었다. 그의 80 생애를 양분하면 전반은 정상을 향한 비상의 과정이었고, 후반은 순식간에 추락한 뒤에 보낸 울분과 좌절이 세월이었으니.
식민지 소년의 민족의식: 황상규와 이홍식
식민지 아이로 태어난 소년에게 강한 민족의식을 불어 넣은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병주에게는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룬 중부 이중식(李弘植)이, 용주에게는 밀양의 선각자, 백민 황상규와 약산 김원봉이 그들이다. 신간회 서기장을 지낸 황상규(1891-1931)는 용주의 조항(祖行)으로 의열단을 창단한 김원봉(1898-1958?)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이병주의 아버지 세식씨는 3형제의 막내였다. 바로 위의 형 홍식씨는 독립운동과 사상문제로 집안의 숨은 자부심과 함께 현실적인 부담이 되었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자료관의 기록에 적힌 공적을 바탕으로 2004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고 고향에 묻혀있던 유해는 11월 11일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고 고향 남포 마을 입구에 독립유공자 사적비가 세워졌다.
작품 「지리산」의 초입에 소년 이규가 ‘둘째 큰 아버지’와 함께 조부의 산소에 성묘하는 장면이 나온다. 1933년의 일로 설정한다. 그는 3.1운동(1919)과 6.10 만세사건(1926)으로 옥고를 치른 처지다.) 중부는 “감옥에 드나드는 바람에 자기 재산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재산까지 축을 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으로 계속 형제 등에 업혀 사는” 사람이다. 중부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결코 닮아서는 안 될 집안 어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의 세력은 나날이 강해만 가는데 그 강한 세력을 무작정 반대한다고 해서 무슨 보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중부의 목적은 막연한데 가족들의 고통은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이다. .. 중부는 과연 가족들에게 강요한 그 희생의 보상을 할 날이 있을까. 숙모를 방문한 것은 잘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이 무거운 가족들의 압력을 스스로 느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중부를 닮지 않으리란 마음을 다시 한번 다졌다.”
작가는 무거운 시대적 사명감에 충만한 양반 출신 민족주의자의 고뇌를 이렇게 표현했다.
”여하간 양반은 죄가 많아.“ 가지고 배운 사람이 없는 이웃을 보살피고 민족적 대의를 위해 살아야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과 각오를 다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중부는 자신의 아버지의 묘 앞에서 오열한다.“아들 가운데 가장 쓸모 없는 놈이란 핀잔을 받은 아들이 조카들을 데리고 성묘하러 왔다는 감상도 있었을 것이고, 가슴에 맺힌 남아의 포부를 펴보지 못한 채 병처럼 그것을 앓기만 해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눈물겹도록 안타까웠을 것이다.” 「지리산」의 후반에 작가는 규의 중부를 다시 등장시킨다. 행방이 오리무중이던 그는 결국 지리산 빨치산 부대에 몸을 의탁했던 것이다.
밀양의 소년, 용주에게 친척 할아버지 황상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에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김규식박사가 당시 고급 국제어였던 프랑스어를 익히지 조선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불란서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말을 들은 소년 용주는 장차 자라서 불어를 공부하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성장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프랑스 예찬론자가 된다. 또한 소년은 중국 땅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친척 아저씨 김원봉의 살아있는 신화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반항아 퇴학생
이렇듯 민족의식에 물들은 소년들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면서 일과를 시작하는 일본학교의 제도교육에 순순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용주도 병주도 이내 문제아가 되었고 마침내 학교에서 쫒겨난다.
마산에서 소학교를 마친 황용주는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한다. 이 해에 교사 현준혁이 조직한 마르크스주의 연구 모임인 ‘독서회 사건’이 발생한다. 이듬해 1933년, 용주가 2학년에 진입하기 무섭게 선배가 접근해왔다. 그 선배는 다름 아닌 조좌호(曺佐鎬, 1917- 1991)였다. 용주는 창원 출신 조좌호가 인도하는 스터디 그룹에 합류한다. 후일 용주는 이때의 일을 “젊음이 자산이고 이데올로기가 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고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다.”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의 명구가 어린 용주의 가슴에 훈장으로 달리게 된 것이다.
모임은 발각되어 대구경찰서에 넘겨진다. 주범인 조좌호는 고등계 형사에게 넘겨지고 종범인 용주는 아버지가 총독부 관리인 점이 참작되어 ‘선도조건부 퇴학’처분으로 마무리된다. 대구사범학교는 학년 정원 100명 중에 일본인 학생은 10명 남짓으로 절대다수가 조선인 학생이었다. 용주의 입학동기인 4기생 중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후일 동기생들은 그를 일러 ‘단군 이래 최고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듯 위대한 지도자로 민족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은 학생 시절에는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입학 성적이 우수한 관비생 용주를 가난한 사비생 박정희가 어떤 심경으로 바라보았을지 짐작할 수도 있음직 하다. 독서회 사건으로 퇴교 당한 수재 동급생의 잔상이 박정희의 뇌리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후일 1960년 부산에서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면서 멘토 황용주의 역할이 빛난다.
1936년 4월, 만 15세가 된 이병주는 5년제인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한다. 1933년 3월 양보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무려 3년을 학교에 다니지 않은 무적자로 지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주도하는 신교육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가세가 빈한한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세식씨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아들의 성정을 감안하면 만약 그가 인문학교에 몸담으면 사상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빠져 집안에 위해를 끼칠 위험이 크다는 이유였다. 형 홍식이 ‘사상쟁이’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결과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소년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에 들기까지 3년의 긴 ‘자율학습’ 기간을 거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병주는 일본책, 한문책, 가릴 것 없이 닥치는대로 읽었다. 아버지와 불편한 동거를 독서로 달래며 반항의 날들을 보냈다. 3년에 걸친 태업 끝에 소년 병주는 마침내 아버지에 굴복하고 농업학교에 진학한다.
이병주의 1936-1939년 진주농업중학교 학적부의 종합평가 란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첫째, 2학년 때인 1937년 10월 11일, 교사의 명령을 거역한 데 대한 징벌로 견책처분을 받은 사실이다. 4학년 부분에 보다 결정적인 문구가 담겨있다. “소화 14년 (1939년) 8월, 부친의 허락 없이 가출하여 내지(內地) 모 사립중학교에 입학. 결석계 없이 무단으로 1개월 이상 결석함, 부친이 호소하여 다시 돌아왔지만 본교에서 공부하려는 의지가 희박함.”
가출하여 장기 결석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자퇴처분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문제아 판정을 받고 학교에서 쫒겨난 셈이다. 이병주는 자신이 제적당한 정황에 대해 여러차례 글을 썼다. 무도한 일본인 교사에 지속적으로 반항하였고 선생의 폭행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고 방어적 폭력으로 맞선 것은 민족적 의분의 발로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처음부터 농업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퇴할 명분을 찾아 사건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봉건의 유교 전통사회에서는 아버지는 하늘이지만,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의식은 청소년에게 과감하게 아비의 세계를 벗어나는 의식의 가출을 부추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기존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부친의 허락 없이 가출하여 내지의 모 중학에 입학.’ 이는 단순한 의식의 가출을 넘어선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독립선언이다
일본유학: 프랑스 문학 탐구
선망의 교토3고
진주농업중학교에서 퇴교 당한 후 일본에 건너간 이병주의 행적은 각종 단편적인 퍼즐 조각들을 맞추어도 재생하기 어렵다. 부친의 동의없이 등록했다는 내지의 모 사립중학교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관부연락선」과 「지리산」의 구절구절에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추측하고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병주가 적어도 1년 이상 교토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관부연락선」의 유태림의 변이다. “고향의 중학을 집어치우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 가운데는 그런 것(교사의 자질이 낮은 것)도 있었다고 덧붙이지만 E는 일류학교를 제외하면 일본 내에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일본에 있는 중학으로 옮겨보니 어떻더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일본에 있는 중학교로 옮겨와선 후회도 했다. 후회를 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도 없어 학교를 등한히 하고 결국 검정고시를 통해서 중학을 졸업한 셈으로 된 것이다.”
“서경애의 오빠와 유태림은 일본 경도 S고교 동기동창이었다.” “경도는 동식이 고등학교 시절을 지낸 곳이었다.” “경도에는 나는 E를 몇 년 전에 하숙하고 있던 하나조노 초(花園町)로 데리고 갔다. 하나조노초는 경도역에서 전차를 타고 니시코엔마치(西京圓町)에서 내려 禪道장으로 일본 전국에 알려져 있는 묘심사 쪽으로 가면 된다. 부립이상의 뿔 옆으로 트인 지름길로 하나조노초에 들어섰을 때, 나는 고향에 돌아간 것같은 감상에 젖었다. 한 해 남짓한 세월을 살았을 뿐인 곳인데 꽤 깊은 애착이 내 마음속에 심어진 곳이기도 했다.”
1939년 봄, 고향의 중학을 졸업하고 건너온 교토의 이규는 두고온 진주의 춘색을 회고한다. ”진주의 봄은, 남강의 얼음이 녹아 그 맑은 흐름의 바닥에 하늘의 푸르름을 깔아 흰구름을 아로새기게 되는 무렵부터 시작한다. 4월이 되어 강안(江岸) 남쪽 죽림이 청색의 선도를 되찾아 백사(白沙)와 조응하면 서장대 서쪽의 들엔 샛노란 유채꽃이 황금의 담요를 펼치고 평거, 도동의 과수원은 일제히 꽃을 만발해서 산들 바람결에 향기를 시가 쪽으로 흘려 보낸다. 꽃 향기에 서린 아지랑이 저편 북서쪽으로 아득히, 아직도 백설을 인 채 지리산의 정상봉이 의연한 모습을 나타내면, 진주의 봄은 스스로의 봄을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 셈이 된다.“ 자퇴생 이병주의 심경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지리산」에서 이규는 진주중학 4학년 수료 후 교토3고에 입학한다. 1996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교토3고 졸업생 작가 후루야마 고마오(古山高麗雄, 당시 76세)가 언론 인터뷰에서 이병주가 교토3고를 다녔다는 말을 한다. ”그때 한국의 작가 이병주씨가 후배로 있었지요.“ 이병주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 구체적으로 어떤 인연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그 나이 청년이면 누구나 교토3고를 주목할 수 밖에 없다. 교토시민은 누구나 교토3고와 교토제국대학에 자부심과 선망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일본의 고도 교토가 이병주의 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김윤식이 내린 최종결론은 이러하다. “식민지 벽지 진주농림학교 중퇴생인 그는 고학으로 검정고시를 돌파하여 그토록 부러워한 명문 중의 명문인 교토3고에서 전면적으로 노출된 교양주의를 몸에 익혀 학병체험을 했고, 그 교양주의를 한 조각도 내치지 않고 증폭시키도록 강요한 해방공간의 조국에서 그는 온몸으로 몸부림쳤다.”
교토에서 이병주는 뚜렷한 학적이 없이 자유로운 독서와 통신강의록을 통해 검정고시를 치르고 중학 졸업자격을 획득한 후에 메이지대학 전문부에 진학했을 것이다. 박태영과 이규, 그리고 유태림과 이병주가 교토에 정신적 뿌리를 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교토에서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랑‘을 불태우고 있던 1938년 즈음, 앞서 문학의 길을 헤메던 조선인 선배들의 체취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당시 자신들은 의식했든 못했든, 정지용, 이양하, 염상섭, 김말봉, 오상순, 이장희,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문학적 혼이 이들의 시린 가슴을 애무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병주와 유태림이 떠난 쇼코쿠지(相國寺) 대숲의 빈 의자를 윤동주와 송몽규가 물려 받았을 것이다.
대구사범학교를 퇴학당한 황용주는 현해탄을 건넌다. 그리고 성실한 준비 끝에 1934년 가을, 자신의 바람대로 오사카 중학의 3학년 2학기에 편입하여 열심히 수학하고 신체를 단련하면서 모범적인 학생으로 과정을 마친다. 재학 중에 교토 3고에 월반 전입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졸업 후에도 다시 한 차례 정시 입학시험에서 실패한다. 실망을 추스르고 한때 세웠던 고등학교-제국대학의 꿈을 접고 사립대학인 와세다대학에 진학한다.
도쿄의 대학생: 프랑스문학의 영향
1941년 4월 만 20세가 된 이병주(大川炳注)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에 입학한다. (문예과는 오늘날 한국대학의 문예창작과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장래 작가가 되기를 준비하는 학과라고 김윤식은 평가한다.)
작가 이병주에게 있어 도쿄는 근대사상의 수용지이자 문학사상과 예술을 연마한 수련장이었다. 동시에 식민지 출신 지식청년의 에트랑제 정서에 빠져 다소 느슨한 일상을 죽일 변명과 핑계를 만들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도 했다. 「관부연락선」에서 유태림의 동급생 화자, 이선생의 입을 빌린다.
”이십 팔년 전에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투름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말하면 기묘한 학교였다. A대학 전문부, 문학과 (문예과) 라는 것이 정식 명칭인데 전문부 상과, 전문부 법과, 하다못해 전문부 공과하면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지만 전문부 문학과라는 학과는 도대체 뭣을 가르칠 작정으로 학생을 모집하고, 장차 뭣을 할 작정으로 학생들이 들어가고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학교, 학교라기보다는 강습소, 강습소라고 보면 학교일 수밖에 없다는 그런 곳이었다.
그것이 속해 있는 대학 자체가 격으로 봐서 3류도 못되는 4류인데다 학과가 그런 형편이니 여기에 모여든 학생들의 질은 물으나마나 한 일이다. 고등학교는 엄두도 못내고 3류대학의 예과에도 붙을 수 없는 패들이면서 법과나 상과쯤은 깔볼 줄 아는 오만만을 키워가지곤 학부에 진학할 때 방계(傍系)입학할 수 있는 요행을 바라고 들어온 학생은 나은 편이고 거의 대부분은 그저 학교 다닌다는 핑계를 사기 위해 들어온 학생들이었다. 그만큼 지능 정도는 낮았어도 각기 특징 있은 개성의 소유자들만 모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이 중학시절에 약간 불량기를 띤 학생들이고 이런 학교에 가도록 허용하는 집안이고보니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이어서 천진난만하고 비교적 단란한 30명의 학급이었다.“ 한마디로 자유분방한 청년, 적당히 탈선하고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타락할 청춘의 특권을 누린 청년들이었다.
이병주가 재학한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의 교과과정은 ‘연극영화’ 과목을 주로, ‘문예창작’ 과목을 보조로 편성하였다. 이병주는 연극, 영화 관련 과목을 집중적으로 수강했다. 학점 중 취득한 총 48개 과목 중에 연극, 영화 관련 과목이 17이나 된다.
이병주가 1945년 상해에서 「유맹(流氓)」이란 희곡을 쓰고, 1946년 진주연극회의 창립에 관여하여 송영의 창작극 〈개척자〉와 1947년 진주농대 개교 1주년 기념식 공연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연출한 데는 대학시절의 수업이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만년에 그가 프랑스의 작가 사르랭의 희곡을 번역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3년 9월 25일 이병주는 이 대학을 졸업한다. 3년 과정이 전쟁으로 인해 2년 반으로 단축된 것이다. 졸업장을 받기 한 달전인 1943년 8월. 고향 하동으로 서둘러 귀한하여 이웃 고을 고성의 함안 이씨 규수를 배필로 맞는다. 물론 집안이 주선한 중매결혼이다. 당초 계획대로 입학허가를 받아둔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채 이듬해 1월 20일 학병으로 입대하여 노예의 삶에 내몰린다.
1937년 8월, 황용주의 일기장에는 그때까지 키워오던 문학(작가)의 길을 단념하는 비장한 선언이 담겨 있다. 문학으로는 세상의 문제를 풀 수 없고 개인적 패배주의로 귀착되기 십상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청년시절에 갈망하던 ‘문학이라는 대로’를 버린 슬픔과 아쉬움을 안고 살았지만, ‘학병 동지’ 이병주가 학병 체험을 자산으로 삼아 작가로 대성한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황용주는 1941년 정월,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제2학원(문과 불문학 전공)의 입학시험에 합격한다. 와세다의 입학이 결정된 1941년 초겨울(2월) 용주는 귀국하여 사귀고 있던 이창희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는 함께 도쿄로 건너와서 신혼부부와 학생생활을 함께 만끽한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은 피할 수 없었다. 1943년 11월 초, 학병에 출진하기 위해 귀국한다. 와세다대학 4년 과정은 3년으로 단축되었다.
이병주와 황용주, 두 사람의 프랑스문학에 대한 열정은 연조가 깊다. 이병주는 양보보통학교 시절에 일본인 교장 부인이 일본에서 가져다 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감명을 받고 조선도 언젠가는 독립할 날이 있겠지요 라고 물어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일화를 기록했다. 그는 방대한 독서로 프랑스 문학을 탐독하여 자신의 지적 자양분을 비축하면서 나폴레옹이 검으로 이룬 것을 자신은 펜으로 이루겠다며 ‘한국의 발자크’가 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고 입버릇처럼 토로했다.
황용주의 남다른 ‘프랑스 사랑’은 소년시절부터 배태된 것이다. 유소년 시절 황상규 ㄱ 대구사범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일본 오사카 중학에 진학하면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 문학에 대한 관심을 배양한다. 앙시앵 레짐을 타파한 프랑스 혁명과 유럽의 근대사상과 민족주의의 결합에 결정적인 배경을 마련한 나폴레옹의 치적에 매료된다. 무엇보다도 문학을 포함한 프랑스 문화의 세련미에 매료된다. 그는 불문과 동급생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대학의 문집에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학병시절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프랑스어 수업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1947년 외동딸의 이름을 ‘란서(蘭西)로 짓고 후일 그 딸이 프랑스 유학을 거쳐 프랑스 예술가와 결혼하여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 사실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1952년 자신이 설립한 세종고등학교의 모표도 청, 홍, 백 프랑스 국기의 3색을 채택한다. 1954년부터 프랑스문화에 관한 계몽성 에세이를 쓰고 1958년에는 프랑스 소설을 번역, 신문에 연재한다. 그런가 하면 평생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해 원한을 지니고 살았고, 미국의 저급한 대중문화에 대해 노골적인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이러한 자신의 국제관과 정서는 한반도 중립국론과 유엔 동시가입론으로 뿌리내리고 박정희에게 대미 자주노선을 추구하도록 권고하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중매결혼과 연애결혼
신식 남편 – 구식 아내의 대비는 식민지 사회의 새로운 비극의 전형적 주제로 부각되었다. 신교육을 받은 유학생 남편과 삼종지도(三從之道) 밖에는 배운 것이 없는 구식 아내 사이의 불균형은 불합리한 중매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유학생 지식인들의 ‘불행한’ 가정생활에 관한 많은 에피소드가 누적되어 있다. ”동경, 연락선, 현해탄, 이 모든 게 조선 여인의 가슴을 난자한 원수였다. 개화 이래 얼마나 많은 착하고 선량한 여인들의 한숨과 눈물이 조선강토에 뿌려졌는가? “일본 동경 얼마나 좋기에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 타느냐.”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조선 여인의 탄가다. 일본유학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마음을 절절하게 대변한다. 그래서 “동경은 첩이다”라는 유행어도 나돌았다.
풍성하다 못해 난삽하기 짝이 없는 이병주의 사생활에 대한 구구한 소문도 그 근본적 원인이 이병주가 중매결혼으로 구식 아내를 맞이했던 사실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세간의 악의적인 풍문과는 달리 이병주는 평생 한 차례도 이혼하지 않았다. 고성 출신의 함안이씨 점휘여사 (1924-2016)와 평생 법적 부부로 살았고 죽어서도 무덤까지 나누고 있다. 그는 아내를 학대하지도 유기하지도 않았다. 비록 오래토록 침식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성의껏 생계를 보살폈고, 그리고 무엇보다 극진하게 대우했다. 부인 또한 잘나고 별난 사내를 남편으로 맞은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결코 속이 편할 리 없지만 묵묵히 그 운명을 감내해냈다. 어떤 모멸감을 겪더라도 결코 정처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젊은 시절에 진주 호국사에서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부인에게서 성성한 기품이 물씬하다. 나림을 사랑했던 많은 여인 그 누구도 이런 태산과도 같은 무게의 여인을 상대로 감히 이혼을 요구하고 나설 수 없었다. 이병주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에 대한 이병주의 마음을 억지로 추측하면 「관부연락선」에서 학병에서 살아 돌아온 유태림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출되었다고나 할까. “줄잡아 한 세대 위의 어른들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철벽을 뚫는 일이었다. 우리 나라의 결혼은 개인과 개인과의 결합이 아니고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다. 수천년을 헤아려 족보라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 집안이란 하나의 유기체다.” “고향에 돌아와서 중문에 서서 내 가방을 받으며 울음을 터뜨린 여자가 있었다. 아내였다. 나는 아내가 친정에 있지 않고 우리집에 와 있는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않았었다. 나를 남편이라고 해서 수 년이란 세월을 기다린 아내라는 생각이 일자, 그 순간 내 결심은 무너졌다.” 유태림의 친구, 이선생의 관찰 또한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나는 또한 유태림의 부인을 염두에 떠올려 봤다. 양반집에서 자라 예의범절은 의젓하며 유순하고 근면하겠지만 서경애와 같이 아기자기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센스와 재질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체포와 사랑의 결속
전남 여수 출신의 이창희는 광주 수피아여고를 졸업하고 일하면서 공부도 계속한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오사카에 건너간다. 그곳에서 오사카 중학교 학생 황용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39년 11월 어느 날, 둘이 데이트를 마치고 어둑어둑하여 집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인근에 잠복해 있던 사복형사 둘이 밀어닥친다. 두 형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즉시 방을 샅샅이 수색하여 용주의 책 몇 권과 노트와 일기장을 압수한다. 둘은 경찰서에 연행되어 수감된다. 창희는 2주만에 석방되나 용주는 한 달 이상 취조받는다. 유치장의 경험은 세상살이의 안목을 키워준다. 갇힌 안의 세계와 열린 바깥 세계의 단절이 주는 소외감을 다스리기 쉽지 않다. 일생동안 여러 차례 유치장과 구치소 신세를 졌지만 용주는 이때의 경험은 가장 ‘낭만적’이었다고 술회한다. 창희 역시 용주의 처가 되어 여러 차례 옥바라지를 했지만 이때가 가장 행복했노라고 회고한다.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특별한 행복감이 들기도 했다.
20일 후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온 아버지에게 창희는 인도된다. 창희는 혼자서는 나갈 수 없노라고 버틴다. 당돌한 딸은 아버지에게 그 사람은 연인을 넘어 동지임을 선언한다. “아버지도 결사운동 하셨잖아요?” 행여 아버지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할지 모른다는 위구심이 들었다. 용주의 석방도 성의껏 주선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조를 받아낸다. 열흘이 지났을까. 용주도 석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여수로 날아들었다. 편지에 시가 적혀 있다.
아네모네 꽃피면 즐거움에 넘치고
백가지 물고기 떼 그물을 찢고
아 나는 남국의 감옥에서
수려한 처녀의 환상과 동침한다
창희는 평생 이 구절을 외우고 살았다. 구십 노파가 되어서도 그 시절 그 감동, 그 사랑의 언어가 옥구슬처럼 혀 위에 굴렀다. 감옥은 사랑의 연병장이다.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에서 서경애는 유태림이 별 뜻 없이 빌려준 러시아 서적이 문제가 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사건이 확대되자 흠모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경의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그의 이름을 털어놓지 않는다. 감옥에서 만난 사회주의자 일본 여인은 이렇게 경애를 격려한다. “여자는 사랑으로 고문을 이겨내는 것이다.” 유태림은 기껏해야 회색분자 지식인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서경애는 강철과도 같은 정신 단련을 통해 진짜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창희에게는 용주가 곧바로 이데올로기였다. 열여덟에 물든 붉은 마음은 평생토록 벗어나지도 고치지도 못한 고질이 되었다. 반세기도 넘는 세월을 함께 보냈던 교주가 떠난 후에도 신도의 애절한 단심(丹心)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서경애와 유태림의 러브 스토리는 이병주의 상상력에 힘입어 환골탈태한 황용주 부부의 오사카 시절 에피소드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평생 한 여자와 사는 것은 특별한 행복이다. 여필종부는 관습적으로 공인된 법도였지만 그 법도를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남녀평등을 구현하는 실천적 지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용주가 누린 시대의 축복 중 가장 큰 축복은 자신의 손으로 배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아버지가 개화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장남도 아닌 둘째 아들이었다. 창희의 집안 또한 개화의 조류에 눈과 귀를 열고 있었다. 아내와 연인이 한몸인 여인, 그런 여인과 평생을 교류하면서 해로하는 즐거움은 많은 사내들의 꿈이다. 당시에 서신으로 사랑과 사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부부는 거의 없었다. 용주 부부는 개화된 근대어로 문물과 사상을 공유하는 남다른 축복을 누렸다.
학병세대의 대표적 인물
이른바 '세대'라는 자의적인 구분으로 한 인간의 삶을 도매금으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시대의 거울인 측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개개인에게 자양분이 되었든 독이 되었든 그들이 섭취한 공통된 시대적 삶의 조건이 있다. 1917년생에서 1924년생 사이의 일제말기 대학생은 일본군에 '강제 지원' 당한 공통된 경험이 있다. 이른바 ‘학병세대’이다. 학병 대상자들은 일제말기의 조선 최고 지식청년의 집적체였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민족정신을 말살당하기를 강요받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더하여 대일본제국의 지적수준을 투영하고 있던 집단이기도 했다. 당초부터 무모하기 짝이 없는 허영으로 판명났지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른, 결코 만만하지 않은 나라의 지적, 문화적 수준이 이들 학병 개개인의 식견에도 일정 부분 투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도지원병이 입대한다. 이공계와 사범계를 제외한 인문 사회계 대학생 또는 전문학교 재학생이 대상이었다. 1.20학병동지회의 기록을 채택한 정부의 보고에 의하면 학도지원 적격자 6,203명 가운데 4,385명이 입대했다. 입소를 거부한 사람은 2주간의 연성훈련을 거쳐 징용으로 끌어갔다. 입소자 4,835명 중 15%인 657명은 사망 내지 실종되었고 3,728명은 생환했다. 생환자의 40%인 1,531명이 북한에 정착하고 나머지 2,297명 정도가 남한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병 입대의 구체적 경로는 네 갈래로 분류된다. 첫째, 중국전선 배치, 둘째 국내 배치, 셋째 일본 본토로 향한 경우, 넷째, 버마 전선 배치다. 탈출자이든 잔류자이든 첫째 부류의 기록이 가장 풍부하다. 이병주와 황용주의 글도 이 부류에 해당한다. 둘째 부류는 해방 직후에 잡지 ?학병?(1946년 1월 창간)을 발간하여 정치운동을 편 부류로, 나남부대, 대구 제24부대 등 국내에 배치되었던 사람들이다. 셋째 부류는 1961년 방송작가 한운사의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각되었다. 넷째 부류는 뒤늦게 몇 사람의 체험이 공표되면서 최소한 역사적 사실만은 인식하게 되었다.
학병 경력자들은 후세인들에 의해 ‘친일파’로 도매금으로 분류되어 외면, 비난, 질시,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4.19 세대들이 대학생을 응원군으로 삼아 새로운 문화 권력의 주체가 되면서 학병세대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제기했다. 도대체 왜 불의의 제도에 항거하지 않았던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학병을 거부하고 민족을 위해 의로운 길을 택했어야 후세에 떳떳하지 않았는가? 이런 노골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실제로 징집을 거부하고 도피하여 후일을 도모한 극소수의 청년도 있었다. 그러나 학병의 거부는 예외였고, 지극히 비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사실상 '지원'은 허구였고 '강제‘는 현실이었다. 거부자의 집안은 풍비박산 났을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탈출한 사람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으로 탈출이 용이했고 ’임시정부 합류‘라는 탈출 후의 희망이 있었던 중국전선에 한정된 일이었다. 그마나 목숨을 걸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한 개인의 행적에 관한 평가는 후세인의 관념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학병 경력자 중에 장준하, 김준엽, 신상초 세 사람이 쓴 “3대 탈출기”는 후세에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학병들의 종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으로 복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학병의 전 과정을 마친 이병주와 황용주의 체험과 기록이 학병세대 기록의 정전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다. 학병 복무 당시의 이병주의 행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후일 작가로서 학병세대의 한을 대변한 공로가 혁혁하다. 그가 작품으로 항변한 ‘노예의 사상’ ‘용병의 철학’ 등은 당시 학병에 강제 동원된 식민지 조선 청년의 철학과 정서를 대변했다.
황용주는 중지(中支)의 학병 사이에는 리더로서 평판이 높았고 후일 박정희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더욱 주목 받았다. 황용주는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적극적으로 일본군 장교가 된다.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가운데 새 나라를 만들 꿈을 키우고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부터 귀국한 이듬해 3월까지 상해에 거점을 두고 광복군 주호지대 대대장으로 한적병사 수천 명의 일상을 인도했다. 두 사람은 소주 주둔 일본군60사단(일명 노코(矛) 2325 부대)에 60여명의 조선인 학병과 함께 배속되었다. 같은 내무반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상호 면식은 있었고, 특히 두 사람을 모두 잘 아는 정기영 등의 중계를 통해 친교를 맺었다.
이병주의 장교 복무 기록을 명시적으로 증언한 사람은 없다. 다만 1961년 10월 30일자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에 피고인 이병주가 1945년 8월 1일 자로 일본군 소위에 임관되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또한 그의 에세이 중에 그가 단순한 사병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구절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장교가 되기를 열망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종전에 임박하여 사단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수여한 장교 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병주는 종전 후 귀국 직전의 상해의 상황을 작품에서 냉소적인 관찰자의 시각에서 기록했다.
교직자의 삶 10년
1946년 봄, 상해에서 미군 LST 선을 타고 돌아온 이병주는 약간의 탐색기를 거쳐 그해 가을부터 진주농업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한다. 당초에는 서울에서 일자리를 도모했으나 잠시라도 부자가 함께 살고 싶다는 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열 살 이래 부모 곁을 떠나 살았지 않았던가? 옛 법도대로 아침 저녁 ‘쇄소응대(灑掃應對)’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못할지언정 아버지와 너무나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날들이 아니었나? 그렇게나 펄펄하던 분이 어느새 기력이 쇄잔한 노인으로 변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새삼 장남의 불효가 마음에 걸렸다. 이병주는 두 말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7년전에 퇴교 당한 바로 그 학교의 선생이 되었다.
“진주농고 교사 시절만은 그 회상에 언제나 쓴 맛이 따라온다. ... 결론적으로 말해 청춘으로서도 불성실한 청춘이었고 교사로서도 불성실한 교사였었다.” “해방직후 좌익의 횡포가 심할 때, 그땐 좌익이 합법화되어 있어 경찰이 학원 사태 같은 것을 돌볼 위력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무렵이다. 나는 그 횡포에 맞서 싸워 우익 반동이란 낙인을 찍혔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좌익 세력은 퇴조해 가는데 그 대신 학원에 우익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횡포에 대항해서 좌익계의 학생들을 감싸주지 않으면 안 될 입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런 결과 ‘좌익에 매수된 자’ 또는 ‘변절자’란 욕설을 뒷공론으로나마 듣게 되었다.”
실제로 이병주는 좌익으로 의심받아 경찰에 연행되어 반공가를 작사하고 석방된다. 그런가하면 6.25을 겪으면서 좌, 우 양쪽에 의해 모진 고초를 겪는다. 진주농고, 진주농대, 해인대학교를 거치면서 학생을 상대로 학문과 세상사를 강론하던 이병주는 1958년, 10년 교직 생활을 접고 국제신보의 주필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한다. 황용주가 떠난 자리다.
이병주와 같은 선편으로 귀국한 황용주는 자연스럽게 약산 김원봉의 비서로 일한다. 그러나 1947년 8월, 김원봉의 은밀한 월북으로 인해 운신할 무대를 잃었다. 마지막 보루는 단 하나, 고향뿐이다. 밀양에 돌아와 세종중 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혼을 쏟아붓는다. 교모와 교패도 교장의 고안이다. 기사도를 상징하는 방패 위에 청(자유) 백(평등) 홍(박애), 삼색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리고 뜻 있는 젊은 동지를 규합한다. 밀양읍뿐만 아니라 각 면마다 최소한 1개의 중학교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 많은 후배들 중에 특히 황의중과 의기투합한다. 황의중은 산내면 송백리에 세종중학교의 분교, 동강중학교를 설립한다. 분교인 만큼 동강의 교표도 세종학교와 동일했다. 1950년대 이래 두 황교장은 평생토록 교류의 끈이 잘린 적이 없었다. 반세기 후인 2000년, 황의중의 교직 50년을 기념하여 용주는 하서(賀書)를 쓴다.
학병 출신 중에 유독 교사가 많은 이유를 김윤식은 이렇게 정리한다. “귀국한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미친 정치꾼이 되지 않고 교사 노릇에 시종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교사는 지식인의 도장, 즉 지식이란 보편성을 갖춘 종교에 흡사한 것, 추상적 관념적 세계 속의 학습이기에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절대정신, 즉 철학(학문)의 영역이다.” 학병 출신 손만호의 수기가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우리 동지들 중에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이유는 물론 처음부터 교육계에 입지한 동지들도 있겠으나 그 대부분이 남의 죽음을 대행할 뻔한 전선에서 민족해방의 감격을 안고 귀국하여 조국이 필요로 한다면 심신을 바칠 각오였으나 방종의 자유와 걷잡을 수 없이 출렁이는 세파, 그리고 남북 대립의 난맥상으로 처신하기조차 어려운 세태로 변모해 갔으므로 1, 2년 동안 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교육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이 그만 천직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황용주는 1956년 세종학교를 물러나서 부산으로 진출한다. 부산대, 동아대 강사생활을 하다 국제신문을 거쳐 1958년에 부산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한다.
쌍두마차 주필시대
부산은 언론인 황용주와 이병주의 능력이 만개한 곳이다. 1958년 10월, 국제신문의 주필 황용주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김지태의 스카웃에 응해 부산일보로 옮긴다. 황주필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각고의 탐문 끝에 필적할 인재를 찾아냈다. 다름 아닌 황용주의 학병 전우 이병주였다. 마산의 해인대학에 적을 둔 이병주는 이미 황용주 주필의 추천으로 상임논설위원으로 위촉받아 국제신문에 논설을 쓰고 있었다. 부산일보의 황용주와 국제신문의 이병주가 함께 이끈 쌍두마차 ‘주필시대’ (1958- 1961)는 부산언론의 신화적 황금기였다. 이병주는 “내 인생 가운데 이 시기를 가장 아름답게 회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1975년 프랑스 여행 길에 이병주는 ‘고향’ 부산을 그리며 한껏 소망을 드러낸다. “플로베르는 프랑스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다. 그와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얘기지만 「예낭풍물지」를 비롯해 부산을 무대로 많은 작품을 쓴, 그리고 앞으로도 쓸, 나의 조상(彫像)을 내가 죽은 뒤 부산의 시민들이 해안통 어디에 세워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해 볼 수 없다.”
이전까지 정치, 사회 기사 일변도였다시피 했던 두 신문은 주필시대 동안 예술면이 한결 강화되었다. 두 사람은 청년 시절부터 문학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영상예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보다 넓게는 교양으로서의 예술을 강조했다.
두 신문은 자유당 시절 내내 경찰의 감시와 노골적인 협박을 버티어 냈다. 5.16 쿠테타 직후에 즉시 두 사람이 구속된 것은 이렇듯 경찰과의 오랜 구원이 크게 작용했다. 1996년에 부산일보가 펴낸 50년사에는 황용주주필의 시대를 일러 ‘민권투쟁의 선봉’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박정희와의 인연
1960년 초,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하면서 황용주와의 운명적인 재회가 이루어진다. 황용주의 주선으로 이병주도 몇 차례 회동한다. 이병주 자신도 여러 차례 기록을 남겼다.
황용주는 박정희의 이름으로 공간된 「국가와 혁명과 나」(1963)의 실질적 저자이다. 정수장학회의 입안자인 동시에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의 사부이다. 누구의 비유에 의하면 황용주는 박정희에게 유방의 장자방이자 이성계의 정도전이었다. 황용주는 5.16을 '민족혁명'으로 내세운 장본인이다. 그는 5.16을 4.19의 완성으로 믿었다. 양자를 합쳐 의식의 근대화, 제도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민족주의자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한국정치의 로드맵은 첫째,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다. 둘째, 강력한 공업화,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로 물질적 토대를 구축한다. 셋째, 통일을 위한 남북한 불가침 조약의 체결, UN의 동시가입, 남북 간의 차이를 해소하고 통일에 이르는 것이다.
두 신문은 4.19를 지지 환영했다. 특히 황용주는 3.15 마산의거와 후속동향을 국제적 이슈도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경찰의 보도 통제를 뿌리치고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찍은 부산일보 ‘특종’ 사진을 전국의 언론 매체와 공유함은 물론 일본, 미국 언론에까지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국제신문도 마찬가지로 4.19의 환영에 나섰다
두 신문은 1961년 5.16 ‘군사혁명’도 지지했다. 부산일보의 기사와 사설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황용주가 혁명의 ‘모의자’임를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5월 17일자 조간 “오늘 상오 정식으로 정권인수” 특호활자로 전한 기사와 “한국적 군사혁명의 의의”라는 제호 아래 군인이 주도하는 혁명의 불가피성, 정당성을 역설하고 5.18, 5.19 연이어 세부적 방향을 제시한다. 국제신문도 5.17일자 사설로 혁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5.18, 5.19 연이어 지지하는 내용을 싣는다. 이 논조는 두 주필의 돌연한 체포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두 주필은 5월 20, 21일 차례차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이들의 체포는 쿠데타에 관여한 군인들의 의도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황용주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박정희의 개입으로 1개월 여 만에 석방된다. 5.16 이후 미국정보기관은 황용주를 박정희 주변의 위험한 공산주의자 내지는 반미주의자의 괴수로 지목된 정황이 있다. 그러나 이병주는 10월 30일 혁명재판소의 판결로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복역한다. 이병주가 조기 석방된 배후에는 황용주의 노력이 있었다는 정황이 감지된다.
18년에 걸친 박정희 철권통치를 평가함에 있어 이병주와 황용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황용주는 박정희에 ‘공(功)’에 대해서는 예찬일변도인 반면 명백한 ‘과(過)’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에게는 박정희와 ‘과’를 직시할 수 있는 객관적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사상적 동지였던 박정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사적 우정과 신뢰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버림받았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친구를 숭앙했다. 이성적 사상가의 만년 모습은 너무나 비이성적이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일까?
반면 이병주는 박정희에 대한 사적인 원한을 감추지 않았다. 박정희의 사후에 소설과 칼럼을 통해 박정희의 정치적 비판에 더하여 인간적 단죄마저 서슴치 않았다.
필화사건: 평화적 중립국의 이상
이병주의 중립론
”반공을 국시의 제 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혁명공약‘ 제 1조의 선언처럼 쿠데타 정권은 4월혁명기에 완화된 극우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하는 데 일차적 목표를 두었다. 4월혁명과 더불어 일상적 자유와 민주의식이 피어나면서 민족의 자주성 내지는 주체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통일의 구호가 등장하고 노동운동이 되살아날 조짐이 보였다. 이와 동시에 이승만 정권 초기 혼란기에 일어난 각종 학살과 암살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요구가 일었다.
5.16군사정권은 이 모든 요구를 차단했다. 쿠데타 권력은 경찰의 사찰 자료를 바탕으로 혁신계 인사와 노동, 사회운동 세력, 그리고 진상규명 운동 관련자들을 일제히 검거한다. 1961년 5월 19일,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친공, 용공분자‘를 단호히 처단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그날 아침까지 이미 93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 5월 21일 현재 2,014명, 최종적으로 4천명에 달했다. 5.16 세력은 부정축재자와 3.15 부정선거 책임자, 자유당 간부들의 처단을 대중선전용으로 내걸었지만, 이들보다 민족주의, 진보주의 세력의 척결에 더욱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6월 22일 ’특수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공표한다. 총 4,000여명 구금, 608명 혁명검찰부 회부, 216명 기소, 190명 유죄판결의 결산이었다. 자유당 시절에 사형판결을 받고 집행되지 않았던 100여명이 일시에 처형되었다. 혁명재판부가 자화자찬한 성과다. ”혁신당, 사대당, 사회당, 통사당, 민자당 등 반국가행위단체의 중심인물들이었으며 그밖에 민통학련, 교원노조, 민족일보사건 등이 있는가 하면 4.19이후 혼란한 정세를 틈타 과거 ’빨갱이‘의 유족들이 억울한 옥살이 운운하며 위령비 건설, 형사보상금 청구, 처형 군경 색출 등을 빙자하면서 합법적인 토대를 구축하여 괴뢰전선에 고무동조한 소위 ’유족회‘ 사건 등이 모두 혁명심판을 받은 것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그해 1월 1일 국제신문 주필 이병주는 연두사를 집필한다. 제목은 “통일에 민족의 역량을 총집결하자!” 4.19 이래 봇물처럼 터진 통일의 논의를 중립국가의 건설로 유도하는 주장이었다.
“ ... 같은 국토를 갈라놓고 총과 총이 맞서 있다. 한풍설야 속에서 무장을 엄하게 한 장정이 한편은 북으로 한편은 남으로 경계의 눈을 부릅뜨고 있다. 누가 누구를 경계하는 것이냐? 어디로 향한 총부리냐? 무엇을 하자는 무장이냐?... 혜산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이 아담한 강토가 판도(版圖)로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처럼 복된 민주주의를 키워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렇게 되기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서 1961년의 해를 활용해야 한다. 통일을 위해 민족의 전역량을 집결하자! 이 비원의 성취를 위해서 민족의 정열을 집결하자!”
연두사를 쓰기 한 달 전에 이병주는 「새벽」지에 ’조국의 부재‘를 기고한 바 있다. 두 글의 내용은 동일하게 이병주의 정치철학을 지향하면서도 서로 보완되는 내용이다. 「새벽」 지의 주간 신동문은 1960년 연말호에 〈조국은 말한다〉라는 특집 제목을 정해놓고 마땅한 필자를 구하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신동문은 잡지 목차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낯익은 이름들에 식상해 있었다. 논객이 모자란다. 새 필자를 발굴해야 한다. 기자 김재섭의 추천으로 부산의 이병주가 적격자로 떠올랐다.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이 산하는 삼천리강산이란 시적표현을 가지고 있다. 삼천리강산이 삼천만의 생명이 혹자는 계산하면서 혹자는 계산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의 운명대로 살다가 죽는다. 조국은 또한 향수에도 없다. 기억 속의 조국은 일제의 지배 밑에 신음하는 산하와 민중. 해방과 이에 뒤이은 혼란을 고민하는 산하와 민중, 그리고는 형언하기도 벅찬 이정권의 12년이다.
역사 속의 조국은 신라와 고려의 명장(名匠)들의 업적으로 아직껏 빛나고 있지만 이건 전통으로서의 생명을 잇지 못하고 단절된 한때의 기적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진정 조국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을 때가 있었다. 8.15의 해방, 지난 4.19의 그 날. 이를 기점으로 우리는 조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 이름 밑에서 흔연히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조국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조 이래의 추세는 참신한 의욕을 꺾었다. 예나 다름없는 무거운 공기. 회색 짙은 산하. 조국이 부재한 조국.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조국의 그 정체다. 다시 말하면 조국은 언제나 미래에 있다. 희망 속에 있다. 그러면 어떠한 힘이 조국을 만들어 낼 것인가. 이 회색의 대중 속에서 어떠한 부류가 조국건설의 기사를 자처하고 벅찬 의욕과 실천력으로 등장할 것인가.“ 임헌영은 이병주의 이 글을 일러 분단시대 최고의 명논설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문제의 두 글로 인해 이병주는 옥살이를 치르게 된다. 5.16 군사정권이 세운 혁명재판소는 이병주에게 징역 10년 형을 선고한다.
황용주의 통일론 : 「세대」지 필화사건
「세대」는 1963년 1월에 창간된 월간 교양지다 1950년대 이래 전후 지식인들의 교양서였던 ?사상계?가 당국과의 불화와 내부갈등으로 문을 닫았다. 「세대」는 ?사상계?의 필자와 독자들을 유인했다. 지식인과 대학생 등 젊은 층에 접근하고 대화의 광장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창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잡지는 사실상 이낙선(1927-1989)의 주도와 재정적 지원 아래 창간된 것이다. 이낙선은 군사정권의 지적 대변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부산 시절의 군수기지 사령관 박정희의 수행보좌관으로 박정희와 황용주 사이의 연락병이었다.
1964년 봄부터 황용주는 이낙선의 부탁으로 일련의 논설을 기고한다. 황용주 자신은 이때까지도 대통령이 자신의 ’민족적 민주주의‘ 신념을 공유한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7월호부터 다섯 편의 글을 순차적으로 싣는다. “형극에서 공동의 방향으로 한국 민족주의와 그 방향”(1964. 7); “한국 지식인과 비판정신, 지성의 세계성과 정치권력의 국가성”(1964. 8); “맥카시즘의 한국적 구조:통일에의 비전을 살피면서”(1964. 9); “UN의 이상과 한국의 위치”(1964. 10).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된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1964. 11). 다섯 편의 글은 주제와 논지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름 아닌 ‘민족적 민주주의’와 민족의 주체적 통일론이다. 남북한의 동시 유엔 가입, 공업화를 통한 경제적 기반의 확립, 그리고 종국에는 통일이다.
이와 같이 일련의 논설로 지적 배경을 깔아둔 후에 용주는 11월호에 결정적인 주장을 개진한 것이다. 국회에서 야당이 문제 삼았고, 황용주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박정희 친위세력이 그의 제거 공작에 나선다. 결국 황용주는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유죄판겱을 받는다. 그리고 영원히 권좌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야인으로 지낸다.
이 사건으로 2개월 동안 자진 휴간한 ?세대?는 이듬해 1965년 6월호에 이병주의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게재함으로써 일약 스타 작가의 탄생에 기여한다. 이 작품은 중립, 평화통일론을 신문사설로 쓴 지식인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주축으로 플롯이 전개되는 일종의 ‘사상소설’이었다. 이병주 자신의 체험에 바탕한 작품이지만 황용주를 대입시켜도 무방했다.
같은 잡지에 평화통일론을 쓴 언론인 황용주를 감옥으로 보낸 직후에, 동일한 ‘용공사상’ 때문에 옥살이를 하고 나온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을 ‘발굴하여’ 싣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는 젊은 편집장 이광훈의 뱃심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세대?는 황용주의 필화사건으로 인해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한 홍보효과를 얻었다. 또한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발굴을 계기로 문학잡지로서도 흔들리지 않는 명성을 구축했다.
이병주와 황용주의 중립론, 평화공존론은 시대에 앞선 탁견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0년, 두 선각자의 희망과 예언대로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다시 엄습하는 불안: 1975년 사회안전법
억울한 옥살이에서 가까스로 석방되어, 조심스럽게 나름대로 자유롭고 양심적 지식인 소설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이병주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친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가 선포되고 7월 16일 사회안전법이 제정된다.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한편, 사회복귀의 전제로 교화가 필요한 인물에 대해 보안처분을 부과함으로써 국법질서와 사회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 법의 숨은 목적은 정권에 의해 사상범 또는 공안사범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형기를 마치고도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데 있었다. 법의 적용 범위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범 위반자, 기타 유사 법률에 의해 형기를 마친 사람들이었다. 이병주가 유죄판결을 받은 1961년 ‘특수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병주 자신의 소회다. ”소급법인 특별법 6조에 걸린 애매한 사람들도 있다. 내가 잘 아는 사람 하나는 6. 25때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고 20년 징역살이를 하고 겨우 출감했는데 이 법 때문에 다시 수감되었다. 그는 하도 억울하게 고초를 당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던 마음을 겨우 녹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적응하려던 찰나 그 꼴을 당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소설을 썼다.“
한 때 이병주와 돈독한 우의를 나누었던 리영희는 이병주가 사회안전법을 계기로 박정희정권의 비판자에서 조력자로 ‘전향’했다며 개탄했다.
”나는 그렇게 친했고 많은 문화적 영향을 나에게 미쳤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시대정신에 앞장섰던 그가 그런 사상전향식 글을 계속 발표하는 것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프고 참으로 착잡해졌어요. 한 지식인의 양심과 신념이 포악한 권력에 의하여 유린되어야 하는 반문명적 반인간적 참상과 얼마 동안 계속될지 모르는 반공 파쇼 체제의 감방생활을 감수하기도 어려운 기로에 선 한 지식인의 처지가 마치 나 자신일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못 견디게 서러웠어. “
황용주도 이때의 참담한 심경을 일기장에 적었다.
“ 일제시대에는 요시찰인으로 일경의 예비검속, 숙소내방, 열차호송을 당했지만 젊고 민족적 긍지에 차 있었기에 오히려 마음은 충족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내 조국에서 이 같은 처분을 받게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함이 속 시원하다.”(1975. 7. 7) “오늘 법안을 두고 여야 마지막 절충이 시도된다. 신문을 볼 생각이 없다. 두렵다.……여러 가지 현실적인 생각도 나지만 이럴 때일수록 철학적인 경지에서 나 자신이 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결론밖에 없다. 어제, 오늘 밤새도록 통음하다.”(1975. 7. 8) “어제 저녁 뉴스에 우연히 반공법 4조 위반을 삭제하는 여야 합의를 하지만 그래도 불안은 마찬가지다.” (1975. 7. 9)
전두환 옹호자 이병주
이병주와 전두환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상호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들의 초상」에서 이병주는 이승만, 박정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을 (단편적으로나마) 평가하는 글을 썼다. 이해관계 없는 독자의 입장에 볼 때 세 사람 중 전두환에게 가장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한국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세 대통령 각각의 비중을 감안할 때 이는 지극히 불균형적인 평가라는 인상을 풍긴다. 1988년 11월, 전두환이 후임자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의 길을 떠나기에 앞서 분노에 찬 어조로 발표한 ‘골목성명’의 최종 감수자가 이병주였음이 밝혀졌고 또한 백담사에도 두 차례 위로 면회를 갔다. 그리고는 공개적으로 전두환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글을 썼다. 또한 통행금지의 폐지, 해외여행의 자유 조치 등 국민 일상의 민주화를 앞당긴 전두환의 치적을 찬양했다.
2017년에 출간된 「전두환회고록」은 이병주의 글을 자신의 주장의 핵심적 전거로 밝힌다.
“작가 이병주씨는 「대통령들의 초상」이라는 책에서 (3김씨는) 만일 전두환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또 그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그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자가 설쳐대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환상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아쉬움이 증오의 밀도를 짙게 하고 적의를 증폭한다... ” “이런 정황인데다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움까지 감당해야 했다...”고 썼다. 그러니까 내가 권력의 갑옷을 벗자마자 화살 받이 과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예비되어 있던 일이다.“
황용주는 전두환과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일기장에는 박정희의 유업을 승계할 인물로, 전두환에 대한 기대 반 우려 반의 심경을 담은 내용이 보인다. 근본적으로 민주적 이상에 찬 자유주의자인 황용주가 민간인 학살로 얼룩진 광주사건에 대해 침묵했고, 김대중을 지역감정을 교묘하게 선동하는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으로 간단하게 치부하는 반면, 대통령 선거에서 그와 맞섰던 노태우와 이회창을 각각 지지한 것은 박정희와 자신을 동치시킨 ‘심리적 자타혼합’의 상태를 감안해야만 납득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들
1990년 9월, 이병주는 장기 체류를 예정하고 미국 뉴욕으로 떠나면서 측근 이종호에게 10년 전에 쓴 중편소설〈세우지 않은 비명〉을 건넨다. 그리고는 중편으로 남기기에는 아까운 이 글을 장편으로 만들어 오겠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다짐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92년 3월 10일, 이병주는 위중한 병자의 몸으로 서울에 되돌아 온다. 4월 3일 타계하기까지 병상에서 보낸 27일 간의 세부 정황을 이종호가 글로 남겼다. 입원 5일째부터는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였다. 6일째는 머리맡에 원고지와 펜을 갖다놓았다. 1주일 후, 일본에 체류하던 아들이 국제전화를 걸어오자 아버지는 병세가 호전되었다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사람은 모두 죽는다」(Tous les hommes sont mortels)의 이와나미(岩波) 문고판을 사 보내라고 주문한다.
4월 1일, 나림은 이종호에게 곧 퇴원할 테니 뉴욕으로 동행할 속기사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종호가 후보자를 데리고 나림을 찾은 것은 4월3일 오전 11시경, 면접에 통과된 여성은 이튿날 오전에 속기 준비를 하여 다시 병실을 방문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인오후 3시, 이병주는 각혈 끝에 숨을 멈춘다. “선생님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잠들고 있었다. 내가 처음 병실에 들렀을 때 링거주사 바늘을 꽂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종호의 의문대로 이병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죽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가장한 것 뿐인가? 속기사의 손을 빌어 남기고자 했던 최후의 유언은 무엇이었을까?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남기고 작가 이병주는 눈을 감았다.
작가가 애송하던 죽음의 문구다.
“내가 죽거든 슬퍼하지 말라.
슬퍼하는 척만 하라!
예술가란 원래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장콕토의 유언입니다.
이에 나는 기왕 다음과 같이 덧붙인 일이 있습니다.
어찌 예술가뿐이랴. 사람이란 원래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은 척만 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엔 죽음이란 게 없는 것입니다. 따지고 말하면 자의에 의한 죽음이란 없고 타의에 의해 죽은 척 만하고 있는 것이지.”
뜻을 알듯말듯한 이 당부를 이병주 자신의 유언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는 예술가였고 그가 남긴 작품들은 모두 예술품이었으니.
묻힐 선산도 없고 묘지를 장만해두지도 않았다. 황용주와 전 삼성물산 사장 안동선의 주선으로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공원묘지에 유택이 마련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안경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을 관 속에 함께 넣었다. 2020년 7월, 이병주의 역사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가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었다. 이 시점에 묘소를 찾은 독문학 박사, 풍수전문가 김두규의 감정에 따르면 이병주의 유택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안온한 곳에 자리잡은 길지다. 1993년 4월 3일 나림의 1주기에 도봉산 도봉서원 앞자락에 그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내 절 받으려고 네가 먼저 떠났나?” 이병주의 빈소에서 오열하던 황용주는 그로부터 9년 후인 2001년 8월, 아우의 뒤를 따랐다. 유일한 혈육인 딸, 란서의 회한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2001년은 5월 매실이 대풍이었다. 그때 담근 술을 아버지는 맛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가슴이 아팠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프랑스로 일부 가지고 왔다.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
아버지는 나팔꽃, 일본어로 아사가오(朝顔) ‘아침의 얼굴’이라는 이슬 머금은 나팔꽃의 청초한 모습에서 나와 두 아이의 얼굴을 본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의 인생에 엮인 수많은 꽃들을 생각하며 나팔꽃 한 덩쿨을 관 위에 올려드렸다. 평생 자유인을 갈망하면서도 속으로는 외로워했던 아버지, 평생의 신념이었던 민족적 민주주의와 이루고 싶었던 한반도의 통일, 사랑하는 아내,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나. 그 길고 찬연했던 일생을 모두 태워 보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모두 태워 보내고 남은 환상과 슬픔을 한줌의 가루로 남겨 작은 주머니에 담아 프랑스로 가져왔다. 이 한줌의 재가 그분의 인생을 총결산한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렇게 흔적도 없이 보낸 것이 잘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양지 바른 곳에 버젓이 자리 잡은 수많은 묘지들을 보면 그 작은 무덤 하나 마련해 드리지 못한 내 처지가 한없이 아픈 일이었다.”
”서울의 8월 폭염 속에 여행용 트렁크를 질질 끌며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다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 아버지 손을 잡았다. ‘아부지, 내가 왔습니다, 난섭니다. 일어나셔야 해요.’ 그 순간 아버지의 손에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왔다. 일순간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는 듯하더니 이내 스르르 가라앉았다. 아버지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참고 있던 나의 통곡이 터졌다. 아버지 얼굴에 가까이 대고 외쳤다. ‘아버지, 나야, 나, 일어나봐요. 눈을 떠봐요.’ 잠시 안간힘을 쓰는 듯이 한순간 눈동자가 힐긋하더니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외침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손에 아버지의 힘이 전달되는 듯, 입술이 달싹달싹 떨렸다. 마지막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 정희야! 아 란서야!’ 그리고는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땅에서 아내 이창희도 죽었다. 재가 된 내외의 유골은 창희의 고향 여수 앞바다의 바람이 실어갔다. 2020년 6월 5일, 밀양 산내면 동강중학교 입구에 ‘사은 기념비’가 세워졌다. 96세의 옛 동지 황의중이 정겹던 선배를 기리는 의식이었다. 비에 새겨진 4명의 이름 중에 황용주가 들어 있다. 그처럼 사랑하던 조국 한반도 땅에 남은 황용주의 유일한 흔적이다.
친구이자 형제였던 두 거물 지식인
두 사람은 세 살 차이로 학교나 경력에서 황용주가 앞섰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학병시절부터 말을 터는 ‘친구’로 지냈다. 만년에도 여러 학병 친구들이 즐겨 어울렸다. 이병주의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와 대담에도 엄정하게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허구적 요소가 담겨있고 이를 지적하는 황의 일기장 구절이 수차례 발견된다. 그러나 황용주는 자신이 관련된 문제에도 공개적인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 닿을 때마다 주위의 불평을 무마하여 이병주의 변론에 앞장섰다. 그때마다 그가 동원한 것이 ‘작가의 특권’과 ‘진의의 와전’이었다. 이병주의 ‘와세다 대학’ 학력 문제도 그 중 하나다. 황용주는 이병주가 토교에서 와세다 유학생들의 모임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며 ‘인우보증’을 서 주었다. 보다 높은 차원의 강론도 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겨 남의 나라 대학을 다닌 것도 억울한 일인데, 누가 진짜니 아니니 시비하는 게 무슨 챙피스러운 일이냐, 하며 크게 꾸짖기도 했다고 한다.
황용주가 이병주를 대하는 자세는 자랑스런 아우를 바라보는 형과 격동의 역사의 경험을 공유한 친우, 양 면의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 두 사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반대, 자유당 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한 확신, 문학을 포함한 인문, 예술에 대한 소양,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정보와 식견을 공유하는 동지적 친우였다. 때때로 이병주의 복잡한 사생활이나 과도하게 다채로운 역정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우이자 친우인 이병주의 작가적 ‘천재성’을 인정하면서 그 천재의 특권을 존중하는 특전을 부여했다.
문학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가진다. 문학작품의 저자는 저자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 어떤 작품도 허구뿐이거나 진실뿐일 수가 없다. 허구이든 진실이든 작가의 주장에 대해 기꺼이 특전을 인정하는 것이 독자 된 도리다.
황용주는 이병주에 대해 강한 부채의식을 지니고 살았다는 정황이 보인다. 즉 자신이 주도하여 이병주를 박정희와 교류하게 하였고, 5.16 직후에 함께 체포되었으나 자신은 1개월 여 만에 석방되었으나 이병주는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는 사실을 평생토록 부담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때때로 이병주가 이 사실을 은연중에 환기시키며 정서적 채권자의 행태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아우의 응석도 작가의 특권에 속하고, 형은 기꺼이 특전을 부여했다. 이병주가 「내일 없는 그날」을 부산일보에 연재한(1957. 8.1) 것도 황용주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1965년 「소설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정식으로 중앙무대에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에 이미 작가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당시까지 적어도 문학적 소양이나 이력에 있어 이병주보다 앞서 있던 황용주 자신은 프랑스 문학 작품의 ‘번역자’로 만족하면서 아우를 ‘작가’로 데뷔시켰다. 일찌감치 아우의 재능을 주목한 형의 우애와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병주는 황용주의 존재를 최소한 두 차례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첫째, 황용주의 후임으로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영입된 경위를 설명할 때와 둘째, 박정희와 함께 회동하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다. 두 곳에서 모두 황용주의 존재감을 부각시킴으로써 형이자 친구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작가 이병주는 이례적으로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소설(장편, 중편, 단편) 뿐만 아니라 에세이, 논설, 서간문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쓴 글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러한 공개적인 자료와는 별도로 일기와 같은 사적 기록을 남겼는지는 불명하다. 작가에게는 작품 이외에 별도의 일기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 황용주는 17세 이래 죽을 때까지 쓴 평생의 일기장을 남겼다.
맺음말: 전기 집필자의 비망록
역사는 기록과 기억을 두고 벌이는 후세인의 싸움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의 행장은 신화와 전설 속으로 물러나 불투명한 세인의 뇌리를 통해 전승된다. "태양빛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한 사람의 생애는 역사와 신화를 함께 아우를 때 비로소 공정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황용주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부인 이창희여사는 외동딸이 사는 프랑스로 떠났다. 떠나면서 선생이 쓴 평생 일기장을 내게 건네주었다. 무딘 필치로 그의 일생을 더듬는 데 10년 세월이 걸렸다.
“열정과 이상의 시대를 호령하던 단심(丹心)의 청년이 마흔 남짓에 타의에 의해 인생을 결산당하고, 그러고도 40년을 더 생존했던 사나이의 일생, 그 지식인의 삶이 그저 애절했을 뿐이다. 적지 않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보살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유해를 뉘일 한 뼘의 땅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사람, 대한민국 국민이기보다 한반도의 주민으로 남고 싶다‘ 라던 그의 간절한 염원이 안타까웠다. 어설픈 글로나마 그 망실된 한반도 주민의 유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황용주의 전기를 내면서 공개적으로 희망을 표출했던 이병주평전을 9년 후에야 비로소 펴내게 된다. “그의 작품과 행적은 반세기 넘게 내 관념을 지배한 이상이자 가슴을 짓누른 족쇄였다. 1965년 6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충격적인 감동에 며칠이나 잠을 설쳤다. 「관부연락선」,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사상소설에 혼을 앗긴 청년기의 여진이 후일 ‘법과 문학’이라는 지적 작업에 나선 단초가 되었다. 당초 지식인을 겨냥하던 작품의 주제와 소재가 무한정 확산되면서 작가에 대한 나의 애정도 산만해졌다. 그래서 챙겨 읽기를 포기하고 목전에 스친 작품만 건성으로 곁눈질하면서 적이 실망하기도 했다. 또한 넉넉한 만큼 올곧지 않게 느껴졌던 그의 행보에 비평의 초점이 흔들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 관견(管見)으로는 끝내 수용할 수 없었던 한 군인대통령을 엄호하는 만년의 그의 행보가 몹시도 당혹스러웠다.
되돌아보니 이 모든 것이 내가 미숙한 탓이었다. 말로는 선과 악, 미와 추, 성과 속,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다고 자처하면서도 실상은 외진 편견과 쏠린 아집 속에 살았던 것이다. 무릇 인간이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 어떤 주의나 사상도 마찬가지로 허점 투성이라는 사실을 왜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작은 생각과 인연에 긍긍할 뿐, 그처럼 늠연하게 늙어가지 못할까.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멍그적거리는 내 삶이 한심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이 책은 내 생애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놓는 인물전기다. 그가 떠날 때 보다 더 시들은 나이에 이제야 청년시절 이래 내 심신을 조이고 었던 주박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마지막 한 마디. 내가 격동기의 두 거물 지식인의 행장을 파고든 데는 내 마음 깊은 밑바닥에 두 분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나 단 한 줄의 수묵(手墨)도 남기지 않고 서둘러 떠난 내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추모의 염,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못하고 아비를 보낸 자식의 회한이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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