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5)]
상해임정의 임시헌장을 기초한 소앙(蘇卬) 조용은
자유와 평등을 핵심 가치로 하는 ‘민주공화제’를 선언하다
국호 대한민국과 국가 체제를 규정한 뒤 임시헌장을 결정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 규정한 역사적 선언문으로 평가돼
조소앙은 상해의 대종교(大倧敎-단군 신앙) 지도자 신규식을 통해 망명했고, 망명 후 대종교에 입교했다. 29세 되던 1915년에는 신규식 등과 함께 대종교 중심의 신한혁명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뒤이어 31세 되던 1917년 7월에는 대동단결선언을 초안했고, 1918년 11월에는 개신교 계통의 여운형 등과 합세해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한편 조소앙은 33세 되던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4월 상해임정 창립 때는 임시헌장을 기초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소앙의 인생에서 상해 망명 시기는 특별히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상해 망명 시기의 조소앙을 추억하면서 소앙(蘇卬)이라는 그의 호를 친숙하게 여겼다. 1930년대 들어 ‘소앙(素昻)’으로 일원화됐지만 1919년까지만 해도 소앙(蘇卬)이 정식 호였던 것이다. 그 결과 조소앙(趙蘇卬)이라는 호가 이름을 대신하게 까지 됐다. 마치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 높은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이름 ‘한호’보다는 ‘한석봉’이라는 호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름 ‘용은’보다 호(號) ‘소앙’으로 더 잘 알려져
어려서 조부에게 한학을 공부하던 조소앙은 16세 되던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해 2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했다. 이로 본다면 10대 후반까지 조소앙의 핵심 가치관은 유교 성리학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조소앙은 18세 되던 1904년 최남선, 최린 등과 함께 황실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의 도쿄 제일중학교에 유학했다.
조소앙은 20세 되던 1906년 8월 무렵부터 아은(亞隱)이라는 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김인식 교수의 [소앙(素昻) 조용은(趙鏞殷)의 아호, 필명 상고(詳考)](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8, 2021년)에 의하면 아은이라는 호는 19대 조상 금은(琴隱) 조열(趙悅)과 연관된다. 조열은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등과 교류한 신진 사대부로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고향 경남 함안으로 내려가 거문고를 타며 은둔했는데, 그때 호를 금은(琴隱-거문고 타며 은둔)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은이라는 조소앙의 호는 을사늑약 이후 망국으로 치닫는 대한제국의 선비로서 조열을 뒤이어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이런 면에서 아은(亞隱-대를 이어 은둔)이라는 호는 유교 성리학자로서 조소앙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소앙은 아은이라는 호와 함께 상담생(嘗膽生)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상담생(嘗膽生)이란 와신상담이라는 중국 고사 그대로 국권을 찬탈한 일제에 복수하겠다는 유교 성리학자 조소앙의 지조를 상징하는 필명이었다.
한편 조소앙은 22세 되던 1908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는데, 이후부터 조소앙의 가치관이 크게 변했다. 우선 1909년 6월부터 조소앙은 기존의 ‘아은’을 버리고 ‘소앙(嘯卬)’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 ‘소앙(嘯卬)’이란 ‘울부짖는 나’ 또는 ‘부르짖는 나’라는 뜻이다.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후, 소극적이고 은둔적이던 ‘아은’을 버리고 적극적인 ‘소앙’을 호로 정함으로써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할 의지를 천명했다고 이해된다. 이 같은 의지는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조소앙은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9월부터 도쿄의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하는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1910년 7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해 11월에는 교리문답 시험을 치렀고, 마침내 1911년 10월 22일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소앙은 26세 되던 1912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해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27세 되던 1913년 상해로 망명했다. 조소앙은 그 즈음부터 ‘울부짖는 나’라는 ‘소앙(嘯卬)’ 대신 ‘예수님인 나’라는 ‘소앙(蘇卬)’을 자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인 나’라는 ‘소앙(蘇卬)’은 1909년부터 시작된 기독교 신앙의 결과로도 이해되는데, 아마도 이 세상 구세주인 예수님처럼 조소앙 자신이 조국의 구세주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즉 ‘소앙’이란 호는 메이지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한 법학 지식 그리고 자신이 섭렵한 유교·기독교·대종교 등의 종교 지식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추구하려는 마음의 표현이었던 듯하다.
메이지대 법학부 졸업한 뒤 상해로 망명
이광수는 이와 관련해 [나의 고백]에서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이광수는 1913년 11월 1일 오산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에 나섰다가 11월 중순경 상해에 들렀다. 그때 이광수는 이전부터 친하던 홍명희의 상해 2층 자취방에서 한 달 반 정도를 보냈는데, 당시 조소앙이 바로 옆방에서 자취했다. 그 당시 조소앙의 생활 모습과 호 ‘소앙’에 대해 이광수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전략) 홍명희가 있는 집에 갔다. 조용한 법조계의 길 가 이층집이었다. 아래층에는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이 혼자 있고 이층에는 홍명희, 조용은(趙鏞殷) 그리고 또 두 사람이 있었다. 조용은은 지금의 조소앙(趙素昻)이다. 그때 소앙(蘇卬)이라고 하였다. 나는 홍명희와 한 침대에서 잤다. 홍명희의 동경시대의 호는 가인(假人)이었는데, 여기 와서는 가인(可人)이라고 쓰고 있었다. 가인은 아담의 맏아들로서 하나님과 그 아버지 아담이 저를 세상에 나게 한 것을 원망하고 착한 동생 아벨을 죽여서 지구상에 첫 살인 죄인이 된 사람이다. 홍명희는 동경에서 내게 바이론의 신 ‘카인’을 빌려주어 읽게 하였거니와 그가 가인이라고 자호를 지은 것도 아마 여기서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 ‘옥중기’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는 악마주의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미가 있었다.
조용은은 그 때 날마다 ‘코란’을 읽고 있었다. 그의 호 ‘소앙(蘇卬)’은 ‘야소(耶蘇)가 내라’ 하는 뜻이었다. 후일에 그가 ‘육성교(六聖敎)’라는 것을 주장한 일이 있거니와, 그때에도 그는 종교적 명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서 ‘코란’을 읽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눈을 반쯤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하고 있었다.(중략)
외투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웬 일인지 모자들도 없었다. 원체 꿈지럭거리기를 싫어하는 가인은 엎드려서 오스카 와일드만 읽으면 그만이어니와, 소앙은 그래도 며칠에 한번은 불란서 공원에를 갔다. 나도 따라 가 보았다. 거기는 중국 여자 ‘아마’들이 서양 어린애들을 잔디 판에 놓고 놀리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이 노란 서양 아이들을 언제까지나 들여다보았다. 대단히 점잔을 빼는 소앙은 모자도 없이 양복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어슬렁 공원으로 돌아 다녔다. 공원 속이니 모자가 없어도 흉이 아닌 것이다. 어디다가 벗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고 공원 가장자리에 있는 산뜻한 양옥집 주인이 거닐러 나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하략)’
어려서부터 유교 성리학을 공부한 조소앙은 일본 유학 중이던 20대 초반에 기독교를 접하고 세례까지 받았다. 상해 망명 후에는 국조 단군을 종교화한 대종교에 입교해 단군교를 신앙하는 한편, 이슬람교의 코란도 열심히 읽는 등 민족 종교와 세계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조소앙은 단군,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무함마드 6성인(聖人)의 가르침을 통합한 ‘육성교(六聖敎)’를 1915년 경에 제창하기까지 했다.
이 ‘육성교’는 사랑과 평화, 평등을 강조한 여섯 성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추구하려는 것인데, 조소앙은 그것을 훗날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 경제, 교육에서의 균등)’로 정립했다. ‘육성교’와 ‘삼균주의’에서 나타나는 조소앙의 사상적 특징은 민족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육성교의 단군은 민족적 특징을 나타내지만 그 외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무함마드는 세계적 특징을 나타낸다.
일본 유학 중 기독교 접하고 세례 받아
이런 점에서 1918년 11월 기독교 계통의 여운형과 대종교 계통의 조소앙이 합세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했을 때, 신한청년당 전체를 대표하는 법률 전문가이자 종교 이론가는 단연 조소앙이었다. 그렇기에 신한청년당에서 3·1운동 이후 새로운 국가 이름, 새로운 국가 체제 등을 구상할 때 조소앙이 초안을 맡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조소앙은 상해임정의 헌법인 임시헌장(臨時憲章)도 기초했다.
이현희 교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사](집문당, 1983년)에 의하면 임시헌장은 국호 대한민국과 국가 체제인 총리제를 확정한 이후 결정됐다고 한다. 국호 대한민국과 국가 체제인 총리제가 결정된 시점은 대략 1919년 4월 11일 새벽 2시쯤이었다. 따라서 임시헌장은 새벽 3시 전후 결정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1회집(會集)-11 임시헌장의 의결’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즉 ‘4월 11일에 임시헌장을 기초(起草), 토의(討議)할 때 심사위원으로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 3인을 천(薦)하고 심사안을 30분 이내로 보고케 하자는 현순의 동의와 신석우의 재청이 가결되어 30분 후에 심사보고가 유(有)한 후에’라는 내용은 임시헌장을 기초한 시점, 사람, 방법 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기사록에 의하면 1919년 4월 11일에 임시의정원은 임시헌장을 기초·토의할 심사위원으로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 3명을 추천했다. 조소앙은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신익희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둘 다 자타공인 법률 전문가였기에 추천됐다. 반면 이광수는 임시의정원 서기였기에 추천됐을 듯하다. 따라서 당시 임시헌장을 주도적으로 기초할 수 있었던 사람은 조소앙과 신익희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 의하면 임시헌장을 기초하는데 겨우 ‘30분’만 허용됐다. 조소앙과 신익희가 아무리 빨리 기초한다고 해도 30분 안에 기초하고, 이광수와 더불어 토의까지 마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임시헌장일지라도 새 나라의 헌법인데, 30분 안에 기초하고 토의까지 마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면 임시헌장의 골격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고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30분 안에 기초·토의하라는 임시의정원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당시 이미 준비된 임시헌장의 골격은 다름 아닌 조소앙이 기초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는 ‘이봉수가 가지고 갔던 정부 조직 강령과 각원 명부’라는 증언이 있다. 3·1운동 이후 신한청년당에서는 상해임정 창설과 관련해 국내 민족 대표 33인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4월 1일 이봉수를 한양으로 파견했다. 그때 이봉수는 신한청년당에서 작성한 ‘정부 조직 강령과 각원 명부’를 가지고 갔는데, 이 정부 조직 강령과 각원 명부는 새 나라 이름, 새 나라 체제와 더불어 조소앙이 기초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는 ‘이봉수가 가지고 갔던 정부 조직 강령과 각원 명부’라는 증언이 있다. 3·1운동 이후 신한청년당에서는 상해임정 창설과 관련해 국내 민족 대표 33인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4월 1일 이봉수를 한양으로 파견했다. 그때 이봉수는 신한청년당에서 작성한 ‘정부 조직 강령과 각원 명부’를 가지고 갔는데, 이 정부 조직 강령과 각원 명부는 새 나라 이름, 새 나라 체제와 더불어 조소앙이 기초한 것이었다.
법률 전문가 자격으로 임시헌장 기초에 참여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 언급된 ‘정부 조직 강령’은 당연히 상해임정의 강령이었다. 이 정부 조직 강령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이 결정한 임시헌장에 부속된 6조의 ‘정강(政綱)’으로 이해된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議政院文書]에 의하면 임시헌장은 ‘전문(前文)’, ‘10조의 임시헌장’, ‘선서문’, ‘6조의 정강(政綱)’ 등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6조의 정강’은 ‘1.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及)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宣傳)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체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一依)함 5. 절대 독립을 서도(誓圖)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違越)하는 자는 적으로 인(認)’이다.
이 같은 강령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단연 1조의 ‘민족평등 국가평등 급(及)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宣傳)함’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평등 사상이 바로 조소앙의 ‘육성교’와 ‘삼균주의’였다는 사실에서, 이강령은 조소앙이 기초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아마도 조소앙은 기왕 자신이 기초했던 새 나라 이름, 새 나라 체제, 정부 조직 강령에 더해 상해임정 창설에 대비해 임시헌장 전문, 임시헌장, 임시헌장 선서문등을 준비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임시헌장의 골격이 준비돼 있었기에, 임시의정원에서는 30분 안에 그것을 검토해 보고하라고 결정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30분 동안 조소앙, 신익희, 이광수는 미리 조소앙이 준비한 임시헌장 전문, 임시헌장,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 등을 검토하고 곧바로 임시의정원에 보고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1회집(會集)’에 의하면 임시헌장 초안이 보고된 후, 제6조와 제8조가 개정됐다. 보고된 초안의 제6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의 의무가 유(有)함’이었는데, 이에 대해 ‘병역’을 첨가하자고 신석우가 동의하고 현순이 재청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급(及)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으로 개정됐다.
또한 초안의 제8조는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일생 우대함’이었는데, 이에 대해 ‘일생’이라는 기간을 삭제하자고 조완구가 동의하고 조소앙이 재청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으로 개정됐다. 그 이외는 초안 그대로 통과됐다. 이런 사실에서 상해 임정의 임시헌장은 조소앙의 초안 거의 그대로 통과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통과된 임시헌장은 전문(前文), 10조의 임시헌장, 선서문, 6조의 정강 순서로 구성됐으며 4월 13일 공포됐다.
임시헌장의 전문은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中外協應)하야 한성에 기의(起義)한 지 삼십유일(三十有日)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신인일치’의 ‘신(神)’은 단군 등 6성인을 상징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임시헌장의 전문은 ‘육성교’를 제창한 조소앙의 사상을 이해할 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임시헌장 제7조에도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라고 해 ‘신(神)의 의사’를 강조하였는데, 이 또한 ‘육성교’의 신과 관련해 이해할 수밖에 없다.
민주제와 공화제 결합해 ‘민주공화제’ 창작
총 10조항의 임시헌장 중에서도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조항은 제1조와 제4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로 함’이라는 제1조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로 계승돼 현재까지 이른다는 점에서 3·1운동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규정한 역사적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한인섭 교수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서울대학교 법학 50권 3호, 2009년)에 의하면 민주제와 공화제가 결합된 ‘민주공화제’라는 임시헌장 제1조의 용어는 당시까지 존재하지 않던 말로써, 조소앙의 독창적 작품이라고 한다. 조소앙은 ‘균등’ 또는 ‘평등’을 공화제의 핵심으로 생각해 ‘민주공화제’라는 결합 용어를 창작했다는 것인데, ‘육성교’ 내지 ‘삼균주의’라는 조소앙의 사상적 특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또한 조소앙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공화제’를 선언한 상해임정 임시헌장 제1조는 조소앙의 건국 정신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상해임정이 추구한 건국 정신 역시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信書), 주소 이전, 신체 급(及)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라는 임시헌장 제4조는 상해임정의 건국 정신은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았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조소앙이 기초한 임시헌장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었고 그 핵심 가치는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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