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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싹트고 약혼하고 눈감은 그곳…퀸의 모든 것, 밸모럴성

이강기 2022. 9. 10. 08:44

첫사랑 싹트고 약혼하고 눈감은 그곳…퀸의 모든 것, 밸모럴성

중앙일보

입력 2022.09.10 05:00

 “밸모럴성에서 지낼 때보다 더 행복했던 순간은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2022)이 생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라고 밝혀온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의 밸모럴성에서 지난 8일(현지시간) 편안히 눈을 감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한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의 밸모럴성. 로이터=연합뉴스

 

이날 영국 BBC 방송과 호주 ABC방송 등은 “밸모럴성은 여왕이 엄격하게 통제된 군주의 모습을 벗고 온전한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장소”라며, 여왕과 밸모럴성의 인연을 조명했다.

     지난 1951년 밸모럴 성을 찾은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오른쪽) 가족의 모습. 그의 옆에는 조지 6세 국왕이 서있다. 사진 영국 왕실 제공

 

여왕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조지5세)·할머니(메리 왕비)와 처음 방문한 뒤 거의 매년 8~10월 가족들과 휴가를 이곳에서 보냈다. 드넓은 벌판과 숲, 농지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연어를 잡고, 사슴을 쫓아다니고, 스코틀랜드 지방의 춤을 췄다. 동생 마거릿 공주와 함께 일년 내내 밸모럴성에 갈 시간을 고대하고 달력에 날짜를 표기해뒀다. 2차 대전 때 밸모럴성 여행이 취소되자, 마거릿 공주는 “우리 여행을 망쳐놓은 히틀러는 대체 누구냐”고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8살이던 여왕이 미래의 남편이 될 필립공(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윈저·1921~2021)과 첫 만남을 가진 곳도 밸모럴성이었다. 필립공의 전기작가 잉그리드 스튜어드는 1946년 밸모럴성에서 필립공과 여왕이 결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해 여름 밸모럴성에서 두 사람이 약혼했고, 이듬해 공식 발표했다. 2020년 11월, 필립공과의 마지막 결혼기념일도 밸모럴성에서 보냈다. ABC방송은 “밸모럴성에서의 순간은 언제나 여왕의 인생에 하이라이트였다”고 전했다.


                                지난 1972년 밸모럴성 인근 농장을 찾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필립공. 사진 영국 왕실 제공

 

영국 총리들은 여왕을 만나기 위해 1년에 한번 이상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사실상 의무였다. 영국 총리 모두가 이곳 방문을 즐긴 건 아니었다. 마가렛 대처(1925~2013)는 이곳을 “연옥(purgatory)”이라 부르며 끔찍해했다. 존 메이저(79)는 “매일 아침 창밖에서 들려오는 백파이프 연주 소리에 짜증이 났다”고 회상했다. 토니 블레어(69)는 “초현실적이고 완전히 괴상한 것들의 조합”이라고 묘사했다.

 

다이애나비(1961~1997) 역시 밸모럴성을 끔찍하게 싫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찰스 3세 국왕과 1981년 신혼여행 중 일부 기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미국 유명 매거진 배니티페어에 따르면, 다이애나비는 성의 엄청난 규모,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 등에 우울함을 느꼈고, 방에서 나가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불을 끄는 것에 짜증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왕은 이곳에서 무장해제된 채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총리들을 불러 오락게임을 함께 하고, 게임에 진 사람에게는 음료수를 뿌려댔다. 필립공에게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라”고 소리치는 등 의외의 모습도 보였다고 ABC는 전했다. 여왕의 손녀 유제니 빅토리아 헬레나 공주는 2012년 “할머니는 그곳에서 가장 행복해하고, 그 성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2021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나무 심으며 활짝 웃고 있는 여왕. AP=연합뉴스

 

밸모럴성은 왕실 비극의 순간도 품어준 곳이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비의 교통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여왕은 다이애나비의 두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를 보호하기 위해 ‘조용한 안식처’인 밸모럴성으로 데려갔다. 두 왕자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들었다. 이들이 런던을 비운 뒤, 여왕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여왕은 곧 버킹엄궁으로 복귀했다.

1997년 다이애나비의 사망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가운데)이 해리 왕자(왼쪽), 찰스 왕세자와 함께 밸모럴성으로 들어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필립공 사망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올해 여왕은 밸모럴성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다. 지난 7월 윈저성을 떠나 밸모럴성을 찾았다. 여왕의 재위 기간 중 15번째 새 영국 총리인 리즈 트러스는 지난 6일 밸모럴성을 찾아 여왕을 알현했다.

 

ABC에 따르면, 서거 전 여왕은 밸모럴성에서 활기찬 모습이었다. 몇 주 동안 성 밖 여러 곳을 혼자 걷고, 심지어 말을 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여왕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밸모럴성에서 행복한 휴가를 보냈다”고 전했다.

박형수·김홍범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