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디지털 문명과 인간의 자유

이강기 2022. 11. 21. 14:36
 
디지털 문명과 인간의 자유

 

  •  고현석 기자
  •  대학지성, 2022.11.13 09:49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26강_ 이종관 성균관대 교수의 「디지털 문명과 인간의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세 번째 섹션 ‘기술적 환경과 인간의 자유’ 제26강 이종관 교수(성균관대 철학과)의 강연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디지털 문명과 인간의 자유


이종관 교수는 “자유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 줄기를 다듬어내고 이를 특히 최근 급속한 발전 속도로 정치 경제 나아가 문화적 파급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과 관련지어 고찰”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디지털 기술이 출현한 이후 그리고 이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확산 속도가 가속화의 양상으로 보이는 이후, 표면적으로는 근대 이후 문명 발전의 핵심 가치인 자유가 증진되는 듯” 보이지만 심층에서는 여러 차원에서 “자유가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거나 아니면 가속적으로 훼손되어 결국 휘발할 리스크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오늘날 인간의 자유와 관련해선 “뇌 과학이나 양자역학 등으로 논하기도 하고 생명공학, 유전공학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며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물리주의 그리고 생물학주의의 지배력” 아래에서는 “아무리 인간 결단의 자유를 외쳐도 그것은 시대착오적 잡설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적 지식의 압도적 지배력을 삶의 진실성으로” 물리칠 여지는 있다며 나치 수용소를 경험한 한 사람의 말을 빌려 끝끝내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자유로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 자신의 삶의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있음을 역설한다.

 

지난 10월 22일, 이종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2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들어가는 말

사실 인간이 자유로운지에 관한 현대적 논쟁은 이에 관한 논의를 포기할 정도로 철학에서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삶 자체를 어떻게 이끌어 나아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자유에 대한 탐구는 포기될 수 없다. 

 

 

2. 근대 문명과 자유의 탄생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출현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서구 근대가 탄생시킨 이념이다. 그리고 자유란 이념이 근대 역사를 이끌어가는 견인차가 된 이후 이 질문을 둘러싼 논란은 그치지 않는다. 자유에 대한 많은 입장들이 난립하는 이유는 자유가 그만큼 철학적으로도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유가 철학적 나아가 학문 난제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근대 이후 역사에서 차지하는 이념적, 실천적 정치경제학적 위치는 너무도 명백하다. 즉 자유는 셸링 식으로 표현하면 근대 휴머니즘의 알파와 오메가요, 인권, 민주주의와 함께, 현대 문명 사회의 존립 근거이다.

 

물론 근대 문명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은 기술이다. 그리고 이 기술은 20세기 후반 들어서 디지털 기술로 변신하며 현대 문명을 가동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디지털 기술이 출현한 이후 그리고 이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확산 속도가 가속화의 양상으로 보이는 이후, 표면적으로는 근대 이후 문명 발전의 핵심 가치인 자유가 증진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심층에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자유가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거나 아니면 가속적으로 훼손되어 결국 휘발할 리스크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3. 디지털 기술과 자유

 

과학기술과 자유가 근대 문명이 전개되는 두 개의 중추인 이상 인간과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에서 자유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현대 철학 나아가 현대 학문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실 디지털 기술의 출현은 자유의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를 다루는 방식 자체에 엄청난 혁신을 가져왔다. 디지털 기술은 단지 여러 기술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 기술로서의 위상을 점령했다. 실로 20세기 이후 모든 문제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 연구는 신뢰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통념이 대세이다. 자유의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자유의 문제 역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연구되어야만 과학성 나아가 학문성을 인정받는 자유론이 될 자격을 얻는다.

. . . . .

 

6) 인간, 뇌 과학 그리고 성찰의 자유

 

인간은 과학적 연구에서 연구의 대상이라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바로 연구 대상 영역을 설정하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하이데거는 물리주의에 입각한 뇌 과학적 연구에서 노출되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두뇌 연구가 인간의 이해의 과학적 기초라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실재적 관계는 두뇌 과정의 상호작용일 뿐이며, 따라서 두뇌 연구 자체에서조차 하나의 두뇌가 다른 두뇌를 정보화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축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를테면, 휴가 중, 연구실을 떠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된 그리스 신의 동상을 감상할 때, 실제로 그리고 진정으로는 관찰자의 두뇌 과정과 그 전시된 신상을 생산한 그 어떤 조각가의 두뇌 과정이 만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인간은 두뇌를 연구한다. 그리고 자신을 뇌 과학의 연구 결과를 통해 해석한다. 최근에는 자신의 존재를 두뇌의 생화학적, 나아가 자신을 신경세포의 자기장 활동으로 환원하여 해석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두뇌를 연구하는 인간은 뇌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두뇌와는 다른 방식으로 두뇌를 사용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에 물리적 인과율에 구속된 물체가 아니라 그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결단을 통해 물리적 인과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불가능할 때, 도구와 기술을 개발하여 그 자유를 실현하려는 도전을 감행한다. 이렇게 스스로 결단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행하는 하나의 활동 방식이 뇌 과학이라는 지적 탐구 활동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대한다. 앞으로 뇌 과학이 자신하고 있는 활동의 존재 의미를 자각하는 활동으로 완성될 수 있기를. 그러면 그때 물질적 자연조차 근원적 자아로서 통찰했던 독일 관념론자들이 동경한 미래가 오지 않을까? 그 미래는 물질이 자연의 발전 과정과 문화의 발전 과정을 거쳐 정신과 물질의 통일성이 구현되는 상태일 것이다. 이 상태가 인간 지적 활동이 뇌 과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가 아닐까?

. . . . .

 

8. 맺음말: 자유로운 인간의 조건에 관한 유일한 진리

 

- 과학기술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과학기술에 관한 일반적 통념에 따르면 기술은 도구 혹은 수단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학기술은 힘의 학문, 즉 역학을 응용하여 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과학기술이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제공하는 효과는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노역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인류 문명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 나아가 확장시키는 양상을 띤다. 물리학, 즉 역학의 응용으로 효용화되는 과학기술이 지배 권력과 쉽게 유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지배 권력의 강화와 확장에서 자유는 타자에 대한 힘의 우월성을 확보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부산물로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플라톤이 법에 대해 남긴 명제를 패러디하면, 자유는 과학기술을 소유한 강자의 이익이다.

 

정녕 자유는 과학기술을 통해 힘의 지배력으로 행사됨으로써만 확보되고 향유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학기술을 통해 힘의 우월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그들은 지배당하는 자로 자유를 향유하는 자들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하는 정치경제적 위치에 배치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기술은 힘의 학문, 즉 역학을 응용하여 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을 통해 확보된 힘이 물리적 힘이건 권력이건 간에 과학기술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통제하는 민주적 정치경제 시스템이 부재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백하다. 과학기술은 반드시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에 전유되어 그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을 제외한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지유를 박탈하는 억압의 장치가 될 리스크를 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리스크가 현실화된 사례로 이미 당대 가장 발전된 과학기술 국가를 목격하고 있다. 20세기에는 나치 독일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푸틴의 러시아에서. 이런 사례를 목격함으로써 망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과학기술만으로는 결코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술의 개발에 앞서 어떤 사회 시스템을 디자인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다. 만일 인간이 여전히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이 글을 시작하면서 던졌던 인간 자유에 관한 가장 근본적이며 단순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보자.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이에 대한 엄청나게 복잡하고 긴 논쟁의 역사가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 현재의 연구에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자유에 대해 뇌 과학이나 양자역학 등으로 논하기도 하고 생명공학, 유전공학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며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흐름이 대세가 되고 있다. 진화론적 윤리학, 진화론적 역사철학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물리주의 그리고 생물학주의의 지배력하에서는 이미 우리가 시도한 바와 같이 아무리 인간 결단의 자유를 외쳐도 그것은 시대착오적 잡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과학기술적 지식의 압도적 지배력을 삶의 진실성으로 물리치고 인간 자유를 직관할 수 있게 답변해주는 한 인간이 있다.

 

그는 바로 신경생리학자이자 정신병리 치료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인간 빅터 프랭클이다. 그는 우리처럼 말의 유희를 통해 철학적으로 자유 존재 여부를 논증하지 않는다. 또 두뇌를 디지털로 영상화하여 자유의 존재 여부를 실험실 조작을 통해 판정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그가 처한 가장 생생한 역사적 현실에서 온몸으로 수년 간의 걸친 생생한 체험으로 우리에게 고백한다. 그가 인간의 자유 여부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역사적 현실은 자유를 향한 계몽적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참혹한 전쟁으로 폭발한 2차 대전의 나치 수용소에서였다. 이곳에 수용된 인간들의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은 모두 자신들의 몸까지 빼앗긴 극단적 자유 박탈의 역사적 현실이었다. 그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그 역시 자신의 몸까지 빼앗긴 최악의 자유 박탈 상황에서 프랭클은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모든 철학적 과학적 이론을 거부하고 그의 고백만을 진리로 인정한다.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 자신의 삶의 길을 선택하는 자유이다.”

 

불행하게도 최근의 역사적 현실은 자유에 대한 처절하고 생생한 프랭클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유에 관한 논의 자체를 무의미화하는 어쩌면 가장 극단적이고 잔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지 모른다. 현학적 나아가 대중문화적 영역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은 인공지능이 과연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어 인간을 공격할 것인가를 양자역학까지 개입시켜 논쟁하는 데까지 비화하고 있지만, 그 논쟁이란 구름으로 갈 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AI를 필두로 한 최첨단 디지털 기술이 사실상 자본 수익성 극대화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국제 헤게모니 쟁탈을 목적으로 전쟁기계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데 인간의 성능과 경쟁력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든 말든 가속적으로 존재론적 필요성을 상실할 것이다. 마치 철학과 인문학이 아무리 좋은 소리를 떠들어도 자본 축적과 군비 증강에 효율적 기여를 못하는 한, 방구석이나 연구실에 틀어박혀 구름 잡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상황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물론 최첨단 기술은 트랜스휴머니즘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이 예언하듯이 탈인간 멸인간의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과학기술자는 바로 물질체도, 기계도, 인공지능도 동물도 아니다. 과학기술자는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자는 인간인 이상 인간 자유의 존재 여부를 논하는 것조차 과학기술에 의해 박탈된 현재의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를 갖고 있다. 프랭클이 증언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나는 최첨단 연구에 인간으로서의 온 삶을 바치고 있는 열정적 과학기술자들이 내가 믿는 유일한 진리인 이 프랭클의 증언을 상기하기를 바란다. 과학기술자의 연구의 출발점은 그리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출발점은 바로 프랭클이 남긴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조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자유이다.”

 

아울러 프랭클이 인용한 니체의 잠언을 불러오며 이 글을 마친다.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하다면, 인간은 어떤 고난도 견디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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