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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아내 “한국행 후회 안해...‘배신자’ 오명 벗기려 책 썼다”

이강기 2023. 1. 24. 19:56

태영호 아내 “한국행 후회 안해...‘배신자’ 오명 벗기려 책 썼다”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낸 오혜선씨
北 최고 금수저 ‘항일 빨치산’ 가문 출신
두 아들 때문에 ‘충성’보다는 ‘자유’ 택해
남편은 다 해결해주는 ‘미스터 솔루션’
北선 한국 드라마 즐겨 봤지만
요즘 애청하는 프로그램은 ‘미우새’

 

조선일보, 2023.01.24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쓴 오혜선씨. 오씨는 "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대한민국에 산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김지호 기자
 

 

“남편이 의정활동을 시작하면서 악플 세례가 쏟아졌다. ‘배신자’에 ‘간첩’이라는 말에 울컥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을 냈지만 일 관련 얘기가 많아 대중적이진 않았다. 북한이 어떤 곳이며, 우리 가족이 어떤 심정으로 한국에 왔는지를 알리기 위해 책을 썼다. 그것이 내 소명이라 생각했다.”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 오혜선(55)씨가 최근 낸 회고록의 제목이다. 그의 남편은 태영호. 국민의 힘 의원이자 전(前)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다. 오씨의 작은할아버지 오백룡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로 노동당 군사부장을 지냈고, 부친은 고위 정치 장교를 양성하는 김일성정치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오씨는 명문으로 손꼽히는 평양외국어학원(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과 평양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북한 무역성에서 일했다. 태 의원과는 친구 소개로 만나 결혼, 31세와 26세 두 아들을 뒀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에서 오씨를 인터뷰했다.

 

 

◇”’금수저’가 왜 탈북했냐고? 엄마니까!”

 

-북한 최고 ‘금수저’인 항일 빨치산 가문 출신 엘리트가 왜 탈북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릴 때부터 권력이란 한순간의 춘몽(春夢)같다는 걸 알았다. 평양외국어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을 마칠 때쯤 수많은 친구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들 권세가의 자녀들이었는데 아버지가 숙청당한 거였다. 권력은 그 힘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았다.”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들이다. 2015년 여름 해외에 있는 외교관의 대학생 자녀들을 북한으로 들여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큰아이는 당시 대학생이었다. 선택할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은 영국서 9년 가까이 살았다. 자유의 맛을 이미 봤다. 아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면 반항하거나 폐인이 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래도 쉬운 결심은 아니었을텐데.

“내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복 언니가 있다. 아버지가 소련 유학 시절 만난 고려인 아내에게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가 유학을 마치고 평양에 왔는데 아내가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당의 불신을 샀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아버지는 충신의 삶을 택했다. 아내와 딸을 소련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평생 그 딸을 그리워하며 후회하며 사셨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봐 왔기에 내 삶은 충성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것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달리 내 아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쓴 오혜선씨. 북한에서 최고의 금수저로 꼽히는 '항일 빨치산' 가문 출신인 오씨는 "아이들을 위해 탈북을 감행했다"고 말했다./김지호 기자
 
 

◇”북에선 K-드라마 즐겼지만, 요즘엔 ‘미우새’ 본다”

 

-처음엔 한국행이 아니라 영국에 남길 원했다던데.

“50년 넘게 적대적인 관계로 살아왔는데 한국에 가면 우리가 이민자들보다 더 차별받을 것 같았다. 게다가 탈북을 하더라도 한국으로 가는 것보다 영국이나 미국에 가는 편이 북에 남은 가족들이 받는 불이익이 덜하다.”

 

-왜 마음을 바꿨나.

“남편이 한국행을 강하게 원했다. 한국에 가야 남북 통일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것이 북에 남겨둔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사명감을 남편은 가지고 있었다. 나는 사명감보다는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또 적응해야 하는 것이 걱정됐다”

 

-지금은 어떤가?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탈북민에 대한 시선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더라. 탈북민 정책도 잘되어 있고, 실향민들이 자기 친척 보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잘 해줬다. 물론 한국 사회도 쉽지만은 않았다. 자유를 누리려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점은?

“문화적인 차이. 처음에는 마트에 가서 점원에게 말도 못 붙였다. 북한 억양 때문에 주의를 끌게 될까봐. 은행이나 보험 같은 자본주의 개념도 낯설었다. 전세제도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북한에선 나라에서 집을 지정해주니까. 주변 분들에게 귀동냥으로 배우고 익혔다. 외래어가 많은 것도 어렵다. 한국에선 외래어를 쓰는 걸 지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외국에서 오래 산 나도 이런데 다른 탈북민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낸 오혜선씨. 오씨는 "다음에는 북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 보고 싶다"고 했다.
 

 

◇ “北에선 K드라마 즐겨 봤지만 요즘엔 ‘미우새’ 봅니다”

 

-북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들켜 처벌받을 뻔 한 이야기를 책에 썼다. 위험을 무릅쓸만큼 드라마가 재밌었나.

“에릭과 한예슬이 나오는 ‘스파이 명월’을 보다가 걸렸다. 현실이 힘드니까 순간이라도 도피하고 싶었다. 한국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은 행복했다. 긴장이 풀리고 힐링이 됐다. 우리도 통일이 되면 드라마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생겼다. 나뿐 아니라 다른 북한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거다.”

 

-요즘도 드라마를 보나?

“지금은 안 본다. 여기에 적응해야 하니까 한국사회를 잘 알 수 있는 ‘동치미’ 같은 리얼리티 쇼를 주로 본다. ‘미우새’나 ‘금쪽 같은 내 새끼’도 자주 본다. 나도 엄마니까. 엄마와 아이들의 관계가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한국 엄마들의 고민은 뭔지 궁금하다.”

 

-남북한 육아의 가장 큰 차이는?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는 것 같다. 북한에선 부모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게 많다. 아이가 말썽을 일으키면 가족이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한 부모들은 아이의 감정을 많이 돌보더라. 북한 부모들은 그럴 여력이 없다. 살아남기 위해 전쟁할 뿐이다. 한국 애들이 행복하다.”

 

-'북한의 대남 비난 행태’를 분석한 논문으로 이화여대 북한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는?

“행복하자고 남한에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존감이 떨어졌다. 남편도 아이들도 다 치열하게 사는데 나만 집에 혼자 있었다. 엄마로서 떳떳하지 않고 밥 먹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과·제빵·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북한학은 정치 바람을 많이 탄다. 지난 정권 때 공부하러 오신 분들이 ‘북한의 무료교육·무상의료라는 제도는 우리보다 더 좋다’고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말뿐인 복지가 실천되지 않아 국민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내가 북한학을 더 열심히 공부해 알려야겠다 생각했다.”

 

신장증을 앓았던 오씨의 큰아들은 1996년 태 의원이 덴마크로 발령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씨는 “복지국가의 의료제도를 경험하면서 ‘세금 없는 나라’라며 자화자찬하던 북한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나는 돈을 내고 제대로 된 치료와 교육을 받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기본적인 생활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 아래 살고 싶었다”고 책에 썼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 강남구갑 태구민(태영호) 미래통합당 당선자가 16일 새벽 서울 강남구 선거사무소에서 부인 오혜선(오른쪽)씨와 기뻐하고 있다. 2020.04.16./뉴시스

 

 

◇”남편 별명은 ‘미스터 솔루션’… 내가 원하는 건 다 이뤄줬다”

일견 수줍어하는 듯 보였지만 오씨는 쾌활한 달변가였다. “오래간만에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을 만나니 ‘터진 팥자루처럼’ 말이 쏟아진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외향적이고 열정적인 그였지만, 막상 한국에 오니 딱히 낄 데가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로웠던 그는 대학원에서 만난 이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면서 “자식뻘 되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고, ‘으쌰으쌰’ 해주니 고맙다”고 했다.

 

-남편이 국회의원 나간다고 했을 때 반대하진 않았나.

“반대했다. 망신만 당한다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통화하는 걸 들으니 정말 나가긴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미스터 솔루션(Mr. Solution)’이라고 부른다. 원하는 걸 남편에게 말하면 다 이루어졌으니까. 큰아이 살려야 하니 해외에 나가자고 했던 것도, 아이들 위해 북한을 떠나자 했던 것도. 그런 남편을 남들도 믿는데 내가 왜 못 믿어?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남편을 응원하게 됐다. 처음엔 서툰 나 때문에 남편에게 감점만 될까봐 나서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역구 여성회장님들과 밥도 먹고, 재미나게 하고 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남편에겐 소년 시절이 없었던 것 같다. 평양 사는 일반 백성이 똑똑한 머리 덕에 권세가의 자녀들과 경쟁하며 새로운 세상을 본 거다. 그래서인지 휴식할 줄 모르고 놀면 불안해 한다. 경호팀 사람들도 ‘의원님은 대체 언제 쉬냐. 저런 사람 처음 봤다’고 하더라. 아프고 힘들어도 쉬는 법이 없다. 남편에게 종종 말한다. ‘당신 몸은 당신 원망 많이 할 거야.’ 내가 이때까지 ‘옳은 건 옳은 거야’ 우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는 아버지 그늘 아래 자랐고, 결혼해서는 남편 뒤에 숨어 남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부부 맞냐. 당신이 훨씬 젊어보인다’ 하는데 우리 남편이 옆에서 세상 풍파를 막아준 덕인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우리 혜선이 왜 이렇게 순진할까. 젊어보인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냐’라고 한다.(웃음)”

 

-이번 책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던가.

“남편에게 초고를 보여줬더니 바쁘다며 계속 미루더라. 최근 남편이 어깨 수술을 받아 집에서 이틀 쉬었는데 내가 ‘남들 글은 잘 봐주면서 내가 꾸역꾸역 쓰는 걸 보면서도 한 번도 안 볼 수 있냐’고 한 소리 했다. 남편이 ‘잘못했다. 당신 책에 하루를 바치겠다’며 집 근처 카페에 나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읽고 들어오더니 ‘잔잔하게 잘 쓴 것 같다’고 하더라. 애들에게도 읽히면서 읽기 불편하거나 보탤 점이 있으면 이야기해달라고 했는데 ‘엄마, 잘 썼어요’라면서 힘을 줬다.”

 

-책을 쓰는 일이 힘들진 않았나.

“논문 쓰기 전에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이번 책을 쓰면서 열 번도 넘게 구성을 뒤집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닥치는대로 읽었는데 추리소설이나 에세이나 다 쓰는 법이 비슷하더라.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어떤 독자를 상대로 뭘 이야기할지가 확실해야 하며, 주제를 명확히 하려면 버리고 싶은 걸 대담하게 잘라버려야 한다고. 내가 쓴 글을 보니 뼈대는 ‘요만큼’인데 달린 건 ‘이만큼’이라 가지를 많이 쳐 냈다.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 덕에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것이 도움이 됐다. 대학 공부를 어려워하던 아이들에게 늙은 엄마가 책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북한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 이번 책을 쓰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북에 있는 친지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소설을 쓰면 좀 더 자유롭게 내가 살면서 보고 느꼈던 일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의 반대로 마지막에 바꿨지만, 오씨가 처음 생각했던 책 제목은 ‘고마운 대한민국’이었다.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에서 받은 게 정말 많다. 열심히 살아서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다. 미안하고, 죄스럽고, 안타깝기만 한 북한의 가족, 친척들에게도 꿈과 힘이 되고 싶다.”

오혜선씨의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더미라클
 
 
문화부 Books 팀장.

 

 

[데스크에서] 태영호 아내와 댓글부대

 

입력 2023.02.01 03:00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쓴 오혜선씨. 오씨는 "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대한민국에 산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김지호 기자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아내 오혜선씨를 최근 인터뷰했다(1월 25일 자 A23면). 오씨는 지난달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냈다. 인터뷰 기사에 댓글이 2000개 넘게 달렸다. 오씨의 탈북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 비난하는 댓글이 넘쳐났다. 북 정권에 호의적인 이들이 대한민국에 이토록 많을 줄 몰랐다.

 

오씨는 ‘내가 정말 배신자인가?’ 수없이 되물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록에 썼다. “‘배신’이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다. 살인자에게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자기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법적 절차도 없이 3대를 멸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북한 김씨 일가의 편에 선다면 ‘배신’이고 북한 주민들의 편에 선다면 ‘자유’일 것이다.”

 

북한에 대해선 사회주의 나라 국민조차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2017년 쿠바 여행을 갔을 때 체감했다. 쿠바는 이른바 북한의 ‘형제 나라’. 쿠바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피델 카스트로가 2016년 타계했을 때 김정은은 평양 주재 쿠바 대사관을 찾아 조의록에 ‘위대한 동지, 위대한 전우를 잃은 아픔을 안고’라고 썼다. 그런데 쿠바 사람들의 시선은 북한에 대해 싸늘했다.

 

아바나 시내에서 시가를 팔던 남성은 말했다. “쿠바 사람들은 김정은이 TV에 나오면 ‘저 독재자는 대체 어느 이발소에 다니길래 헤어 스타일이 저 모양이냐’라며 비웃는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기자가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라고 했더니 “북한이 ‘독재 국가’지, 어떻게 ‘공산주의 국가’냐”며 흥분했다. “공산주의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뜻한다. 북한이 그런 곳인가?”

 

오혜선씨는 한때 ‘평등한’ 북한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오씨는 대학생 때 평양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태국 의사에게 북한의 무상 의료·교육 제도를 설명하며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금 없는 나라”라고 자랑했다. 의사는 의아해하며 “세금을 받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운영되는 거냐” 물었다고 한다. 당시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오씨가 의문을 풀었던 건 남편 따라 해외 생활을 하면서였다. 신장증을 앓던 큰아들이 덴마크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걸 보면서 그는 세금을 거둬야 복지 제도가 작동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오씨는 지난 정권 때 북한학대학원서 만난 이들이 “북한의 무상 복지제도가 우리보다 더 좋다”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며 말했다. “말뿐인 복지가 실천되지 않아 느끼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오씨는 사선(死線)을 넘었고, 댓글부대는 선(線)을 넘었다. 오씨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씌운 이들은 북한의 실상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보다 못한 어느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

 
 
문화부 Books 팀장.
 
 
 

태영호 아내 오혜선 "영국선 반짝이던 아들, 北서 말라가 탈북"

중앙일보

입력 2023.02.18 15:00

업데이트 2023.02.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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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전 영국주재 북한공사)의 아내 오혜선 씨. 사진 채널A 캡처

 

“영국에선 반짝반짝하게 컸던 아이들이 북한에 가서 1년 만에 삐쩍 말랐어요. 인상도 항상 찌뿌둥했고요. 불량한 아이들로 변해가는 것 같아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더는 북한에 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도 탈북한 걸 고마워하고 있어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아내 오혜선 씨는 최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두 아들에게 탈북하겠다고 했을 때 반응이 어땠나’라는 질문을 받고 이처럼 답했다.

 

지난 1월 26일 탈북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출간한 오씨는 북한에서 핵심계층으로 꼽히는 이른바 ‘항일 빨치산 가문’의 딸이다. 그의 아버지가 김일성정치대학 총장을 지낸 오기수고, 작은 할아버지는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 빨치산 전우인 오백룡이다. 오씨는 북한에서 평양외국어학원과 평양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북한 무역성에서 일했다.

 

오씨는 북한에서 특권을 누리면서 살았지만 점차 북한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탈북해야겠다’는 계획과 결심으로 이어졌다.

 

“평양외국어학원 다닐 때 우리처럼 항일 빨치산 가문인 사람이 있었는데 온 집안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걸 보고 ‘아, 권력이라는 게 아무리 빨치산이라고 해도 한순간에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북한은 전망이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올해 31세와 26세가 된 두 아들, 이 아들들이 태 의원 부부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다.

 

“만약에 아이들이 없었다면 탈북 안 했을 것 같아요. 북한에 형제들도 있고. 2015년 여름 해외에 있는 외교관의 대학생 자녀들을 북한으로 들여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그때 큰아들이 대학생이었어요. 그냥 ‘아이들은 저렇게 살게 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탈북) 의지가 활활 타올랐습니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아내 오혜선 씨가 최근 탈북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를 출간했다. 사진 오혜선 인스타그램 캡처

 

탈북 후 이화여대 북한학과에서 북한의 대남 비난 행태를 분석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오씨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선친들을 능가하는 독재자’라고 평가했다.

 

“인민군 군부대들에 대한 훈련을 현지에서 지도하셨다는 기록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김정은을 소개하는 영화예요. 그걸 보면 바닷가에서 (김정은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장성들을 군복 입고 바다에 있는 목적지까지 헤엄쳐서 갔다 오게 하는 왕복 훈련이 나와요. 김정일조차도 저렇게 나이 많은 사람들을 바다에 내몰지 않았는데….”

 

오씨는 북한의 여러 부조리한 현실을 널리 알리고,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책을 집필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아이들은 영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알았고, 행복밖에 몰랐어요. 그런데 북한에 가서 1년 만에 삐쩍 마르고 인상도 찌뿌둥해졌어요. 아이들이 영국에서 살 땐 ‘내가 이렇게 하면 착한 아이다’ 하는 질서정연한 규범이 있었는데 북한은 법이 없는 나라니까 아이들도 점점 불량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를 소중히 여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책을 썼습니다.”

 

오씨는 “앞으로 북한 주민들의 삶을 좀 더 알리고, 북한 사람들과 대한민국 국민의 유대, 감정의 선을 이어주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책 출간 후 언론 인터뷰 등을 이어가고 있는 오씨는 18일 부산에서 사인회를 개최하는 등 독자와 직접 만나는 시간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지속할 예정이다.

 

하수영 기자 ha.su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