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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전설적인 ‘일타강사‘, 세종대왕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강기 2023. 1. 26. 16:28

[이기환의 Hi-story] 고려의 전설적인 ‘일타강사‘, 세종대왕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주간경향, 2023.01.25
     

사진은 <평생도 8곡병> 중 과거 급제 장면. ‘전설의 고려 일타강사’는 고려 충렬왕 때 제자 10명을 한꺼번에 급제시킨 강경룡이라는 인물이었다. 130여년이 지난 조선조 세종 연간에서도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조정에서 공론화된다.|국립중앙박무관 소장

 

 

“(개성 용산동)…모퉁이에 한가로운 이 집을 지었는데…모든 선비들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어 공부에 뜻을 갖고….”

고려의 천재 문인이자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시(‘진수재·晉秀才)의 별장에 붙이다’)입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뒤따릅니다.

 

한마디로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진씨 성을 갖고 있는 진사 혹은 생원급 ‘일타강사’였던 것 같습니다. ‘진수재’ 같은 고려시대 ‘일타강사’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보입니다.

 

‘진수재’를 소개한 이규보 역시 학창시절 당대의 ‘일타강사’에게 배운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고려시대부터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기에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과거급제를 위해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를 이어 고액과외 받은 이규보 부자

이규보는 당대 최고 명문이었던 개성의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영재였습니다.

 

그런 이규보는 1183년(명종 13)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를 코 앞에 두고 족집게 고액과외를 받았습니다.

 

“공(이 이부)은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이규보)도 지난 묘년(1183·계묘년)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

 

무슨 얘기냐면 이규보는 그 해(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이때 아버지(이윤수·1130~1191)가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면서 이규보에게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을 붙여주었습니다.

 

이규보의 시에 “묘(卯)년에 이 이부라는 분한테 배운 적이 있다”고 했는데, 1183년이 바로 계묘년이었거든요.

 

‘1183년 이규보의 과외선생=이 이부’였다는 예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규보의 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에 나타나있는데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大丈)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겁니다.

 

“신대장은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여기서 ‘대장(大丈)’이라는 직책이 흥미로운데요.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장은 고려시대 죄인의 처벌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잡류직’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신 대장’의 신분은 일종의 구실아치(관청에 딸린 하급관리)였던 겁니다.

 

얼마나 유명한 ‘일타강사’였으면 그렇게 낮은 신분에도 천하의 이규보가 가장 아낀 아들을 가르쳤을까요.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풍자하는 풍속화이다. 과거 급제를 위해 온갖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안산시 소장

 

 

■고려~조선을 들썩이게 한 레전드 강사

그런데 고려시대 대표적인 ‘일타강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 명성이 후대의 조선조까지 알려진 ‘전설의 강사’였는데요.

 

이름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에까지 등장하니까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려사>를 우선 볼까요.

 

“이 노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어찌 공이 적다 하겠는가. 곡식을 내려주어라.”(<고려사> ‘세가·충렬왕’조)

 

때는 바야흐로 1305년(충렬왕 31)의 일입니다. 충렬왕(재위 1274~1308)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실렸는데요. 대체 벼슬에 오르지도 못한 유생(강경룡)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걸까요.

 

<고려사>와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은 물론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등에도 이유가 나오는데요.

 

“강경룡이 집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1305년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서 강경룡의 제자 10명이 모두 합격했다. 스승(강경룡)의 집에 합격한 제자들이 몰려가 스승을 뵈었다. 그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침 강경룡의 동네에 익양후 왕분(종친·고려 신종의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쳇말로 ‘강경룡 학원’의 소속학생 10명이 한꺼번에 과거(국자감시)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격생들이 스승(강경룡)의 집에 찾아와 하루종일 마을이 떠나가도록 잔치를 벌였다는 겁니다. 마침 그 마을에 살던 종친(익양후 왕분·생몰년 미상)이 왁자지껄한 소리에 자초지종을 파악한 뒤에 이를 임금(충렬왕)에게 고했다는 겁니다.

 

이에 익양후의 보고를 들은 충렬왕이 강경룡을 크게 치하하면서 곡식을 내려주었다는 겁니다.

 

고려시대엔 공교육을 맡은 국자감 말고도 개인이 개경에 세운 12공도, 즉 12개 사학이 유명했다. 그중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다. 천재문인 이규보도 그 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조 세종까지도 칭찬한 고려 ‘일타강사’

그런데 1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가 들어섰는데도 ‘강경룡 사례’가 ‘워너비’로 칭송 받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죠. 당시 지성균판사 허조(1369~1439)가 세종대왕 앞에서 갑자기 ‘강경룡’이라는 인물을 소환합니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옵니다.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법(<육전>)에 따라 특별포상 하신다면….”(1436년 10월8일)

 

이 무슨 말일까요. 허조는 “고려시대부터 한량·유생들이 서재(서당)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들어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개인이 서당을 시행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허조는 교육의 혜택이 고루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개국초임을 강조했습니다. 허조는 조정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 혹은 사설학원의 설립을 장려하자는 취지로 상소문을 올린 겁니다. 세종은 허조의 상소에 따라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습니다.

고려 최고의 천재 문인인 이규보도 1183년 과거(국자감시)를 앞에 두고 이이부라는 족집게 과외선생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고려 12대 명문사학

이러한 사교육 열풍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시대부터’ 예를 들어보죠.

 

교과서에 배웠듯이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992년(성종 11) 창설된 국자감이었죠.

 

국자감은 1123년(인종 1)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구요.

 

그런데 국자감 교육에는 신분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거든요. 그렇기에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다른 문을 두들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문벌귀족이 아니라 지방 향리 가문 출신인 이규보가 ‘사학(문헌공도)’를 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중 고려 전통의 명문사학은 개경에 설립된 ‘십이공도(十二公徒)’입니다. 명문 사학 12개 학교는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의 홍문공도, 노단의 광헌공도, 김상빈의 남산공도, 김무체의 서원도, 은정의 문충공도, 김의진의 양신공도, 황영의 정경공도, 유감의 충평공도, 문정의 정헌공도, 서석의 서시랑도,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고려사> ‘선거지·사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습니다. 이규보가 입학한 바로 그 학교죠.

 

“1155년(문종 9) 설립한 문헌공도에 양반의 자제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반을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얼마나 줄을 섰으면 9반으로 분반까지 했을까요. <고려사>의 구절이 가슴에 와 닿죠.

 

“과거를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최충의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가고싶은 대학, 가고싶은 직장에 가려면 명문 ‘문헌공도’에 입학해야 했다는 얘기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는 ‘일류병’은 어찌 그렇게 똑같을까요.

 

1481년(성종 12) 5월27일 성균관 진사 이적(생몰년 미상)의 한마디가 고금을 초월한 ‘일류병’을 상징적으로 일러줍니다.

“지금 인재선발은 오로지 과거에만 의존합니다. 과거로 출세하지 아니하면 ‘재주가 없다(비재·非才)’고 낙인찍고 으레 ‘별볼일 없는 관리(속리·俗吏)로 대우합니다.”(<성종실록>)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진수재(晉秀才)’라는 시쳇말로 당대 사설학원의 강사를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내용이다.

 

■문헌공도의 여름철 ‘모의고사’

각설하고 ‘과거 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니 과거급제를 위한 교육이 극성을 떨었죠.

 

특히 최고의 명문이라는 ‘문헌공도’의 교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정식 학기철은 물론이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인근 사찰(귀법사 등)을 빌려 50일간 이른바 ‘하과(夏課·여름철 특별과외)’를 열었습니다.

 

문헌공도 출신 선배들이 특별강사로 초빙되었구요. ‘하과’의 특별시험 중에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해서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는데요. 이런 시험을 불시에 치른다고 해서 ‘급작(急作)’이라고 했죠.

 

지금으로 치면 ‘수능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구요. 갓 급제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전수해준 겁니다. 문헌공도에서 시작된 ‘하과’는 다른 사학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답니다.

 

“12공도의 관동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림에 모여 학업을 입히다가 가을이 되면 파했다. 용흥사와 귀법사 두 절에 많이 머물렀다”(<보한집>)는 등의 기사가 보입니다. 문헌공도와 같은 사립학교에서 이렇게 극성을 떠니 국립학교는 가만 있었겠습니까.

 

공교육의 장인 국립학교에도 ‘하과’가 퍼졌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은 16~17살 때 국자감이 실시한 두 번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무려 24~25회의 장원을 차지했답니다.(<목은집>)

 

그래도 생각해보면 ‘하과’는 사학이든 관학이든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시한 공식 과외수업이라 할 수 있겠죠,

 

이것에 만족할 교육열이 아니었습니다. 이규보의 예에서 보듯이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던 이들은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고,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았으니까요.

이규보는 셋째아들(이징)의 개인교습을 ‘신 대장’이라는 과외선생에게 맡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시로 표현했다. 이규보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겠냐”고 사례했다.

 

■실패로 돌아간 일타강사의 과외

그렇다면 ‘사교육 열풍’은 과거를 위해, 출세를 위해 언제나 옳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장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최고 명문인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1등을 차지한 이규보의 예를 들어볼까요. 앞서 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코 앞에 두고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이 이부)를 붙여주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나 이규보는 그렇게 특별 과외를 받고도 그 해 시험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이규보는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낙방을 거듭한 끝에 4번째 도전에서 겨우 급제했습니다. 이규보 같은 천재라도 ‘일타강사’의 족집게 과외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마침 고려를 풍미한 사교육 열풍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평가한 분도 있네요. 조선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의 <금계집>은 최충의 문헌공도를 ‘디스’하고 있는데요.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치하고 후학들을 가르쳐 세상에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 그러나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속속 파고들어 깊에 연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경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을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황준량은 과거시험준비에만 몰두하느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참교육을 행하지 못한 고려의 사학을 개탄했던 겁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