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要資料 모음

'문명의 충돌'서 '찢어진 나라' 불렸던 이곳…지각판 대충돌까지 [지도를 보자

이강기 2023. 2. 18. 07:24

'문명의 충돌'서 '찢어진 나라' 불렸던 이곳…지각판 대충돌까지 [지도를 보자]

중앙일보

입력 2023.02.18 05:00

 직사각형 모양의 이곳은 어디일까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추가 정보를 드리자면,

힌트

① 케밥, 돈두르마 등이 있는 세계 4대 미식 국가 중 하나
② 영화 ‘스타워즈’ 배경이 된 신비의 땅이 있는 곳. 열기구 투어로 유명

OOOO 중부 카파도키아에서 여행객들이 열기구 투어를 하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③ 한국전쟁에 4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형제의 나라’

주변 지도를 살펴볼까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바로 감이 오셨죠? 유럽이면서 아시아이기도 한 튀르키예(터키)입니다. 전 국토의 97%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이고, 3%는 유럽 대륙의 끝인 발칸반도 남동부에 걸쳐 있습니다. 그래서 튀르키예를 ‘동서양을 잇는 다리’라고들 하죠.

인명피해 역대급…21세기 최악의 지진 

최근 강진이 발생한 튀르키예에 세계 곳곳에서 깊은 애도를 표하며 구조대와 구호품을 보냈는데요. 튀르키예는 지난 6일 남동부 가지안테프(규모 7.8)와 카라만마라슈(규모 7.5)에서 강진이 발생해 사망자 4만 명 이상, 부상자 10만 명 이상, 그리고 이재민 수백만 명에 달하는 21세기 최악의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한 구조대원이 지난 15일 튀르키예 남동부 하타이주의 한 마을에서 지진 여파로 붕괴된 건물 주변을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진 여파가 큰 튀르키예 10개 주(州)에서 건물 5만 채 이상이 붕괴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면서 약 20만 명이 건물 잔해에 갇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튀르키예 남동부와 인접한 시리아 서북부의 인명 피해까지 더해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서 안타까움이 커지고 있습니다.

동·서양 문명과 지각판 충돌 ‘찢어진 나라’ 

『문명의 충돌』을 쓴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튀르키예를 문명 충돌 가능성이 높은 ‘찢어진 나라(torn country)’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인 튀르키예는 5000년 역사 내내 아시아와 유럽,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충돌했죠.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기원전에는 서양의 그리스·로마 문화가 발달했고, 6세기 이후 몽골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튀르크족이 이주하며 동양 문화가 퍼졌습니다. 14~20세기 오스만 제국 시대 때 이슬람 문화도 발달하죠. 현재도 튀르키예는 가는 곳마다 모스크가 있는 이슬람 국가인데, 초기 기독교의 7개 교회도 있는 독특한 곳입니다.

유라시아판·아프리카판·아라비아판 사이에 낀 튀르키예(아나톨리아판)는 땅속에서도 강력한 충돌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각각의 지각판이 단층선에서 만나 서로 밀고 밀리며 압력을 쌓다가 지진을 일으키는 거죠.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하는 지진 지역으로 중국·이란과 함께 튀르키예를 꼽았습니다. 최근 25년 동안 규모 7 이상 지진만 7차례에 달했는데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특히 유라시아판과 아나톨리아판 사이 경계를 따라 위치한 ‘북아나톨리아 단층(1200㎞)’, 그리고아라비아판과 아나톨리아판 사이 경계를 따라 있는 ‘동아나톨리아 단층(550㎞)’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동안 강진은 주로 북아나톨리아 단층에서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동아나톨리아 단층에서 발생했습니다.

ADVERTISEMENT

동아나톨리아 단층에서 일어난 강진은 115년과 526년 안타키아 지진(규모 7.0~7.5)이 유명합니다. 25만~26만 명이 사망했는데요. 제대로 내진 설계가 안 됐던 고대·중세 시대라서 피해가 더욱 컸죠. 1268년 아다나 지역 지진(규모 7.0)으로는 6만 명이, 1872년 안타키아 지진(규모 7.2)으로는 180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후 큰 규모의 지진이 일어나지 않다가 올해 발생했습니다. 151년 동안 지각판끼리 마찰하며 눌린 압력이 대폭발한 거죠.

지난 6일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하타이주 알티뇌쥐의 올리브 과수원이 쪼개지면서 중간에 골짜기가 생겼다. 사진 DHA 트위터 캡처

이로 인해 지진 피해 지역인 안타키아~아디야만(320㎞), 카라만마라슈 북부(150㎞) 등에 단층 파열이 발생했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416㎞)보다 길게 땅이 갈라지거나 변화가 생긴 겁니다. 튀르키예 매체 DHA에 따르면 하타이주 알트뇌쥐 마을의 올리브 과수원은 땅이 쪼개져 골짜기(길이 300m, 폭 50m, 깊이 40m)가 생겼습니다.

강진 경고 무시, 부실 공사가 피해 키워

“지구 최후의 날 같다”는 CNN 기자의 표현처럼 어마어마한 지진이 일어난 건 맞습니다. 그래도 지진 예측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왜 최악의 인명 피해가 일어났을까요. 2000년 전부터 대지진을 겪어 온 튀르키예에서 아나톨리아 단층 연구를 소홀히 했을 리는 없습니다.

튀르키예 중부 카이세리에 있는 괵셀 튀르쾨쥬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전문가들이 몇달 전부터 아나톨리아 단층 움직임을 포착했고, 지진이 크게 일어날 수 있다고 관계자들에게 수차례 알렸지만 대부분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지난 6일 강진이 강타한 튀르키예 가지안테프에서 구조대원들이 파괴된 건물 잔해 속 생존자를 수색하고 있다. 건물 위층이 아래로 무너져 겹겹이 쌓이는 '팬케이크' 붕괴 현상이 나타났다. AP=연합뉴스

이번 지진으로 오래된 건물은 물론이고 신축 건물까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말라티아에선 지난해 완공된 고층 아파트가, 이스켄데룬에선 2019년에 지어진 16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붕괴했는데요.

튀르키예 강진최신 기사

부실 공사가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다층 건물 위층이 바로 아래층으로 떨어져 겹겹이 쌓이는 이른바 ‘팬케이크 붕괴’가 많았기 때문인데요. 철근콘크리트 건물에선 철근이 건물의 뼈대 역할을 하는데, 철근 간격이 듬성듬성하거나 불량 재료가 섞여 있으면 이런 형태로 무너지며 대형 참사를 빚게 됩니다.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UCL)의 데이비드 알렉산더 비상계획·관리 전문가는 “이번 지진의 위력이 끔찍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지어진 건물을 무너뜨릴 만큼은 아니다”며 “붕괴한 건물 대다수가 내진 설계 등 관련 건축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6일 지진이 강타한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의 도시 에르진. 불법 건축물을 용인하지 않은 시의 방침으로 건물 붕괴도, 사망자도 없었다. 사진은 지난 14일 에르진 전경과 외케슈 엘마솔루 에르진 시장. 사진 NBC 캡처

하타이주의 다른 도시 에르진과 비교해보면 부실 건축물이 화를 키웠다는 의혹에 확실히 무게가 실립니다. 에르진은 진앙에서 불과 110㎞ 떨어져 있지만, 이곳에선 무너진 건물도 사망자도 없었습니다. 그건 외케슈 엘마솔루 에르진 시장이 불법 건축을 엄격하게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엘마솔루 시장은 “난 불법 건축물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튀르키예의 건축 안전 규정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편에 속합니다. 1999년 북서부 이즈미트에서 규모 7.8에 달하는 대지진(사망자 1만7000여명)을 겪은 후 내진 설계 의무화 등 건물 안전 조치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감독 당국이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등 감시에 소홀했고, 튀르키예 내 건물의 50% 이상이 지진 규정을 충족하지 못한 불법 건축물로 나타났습니다.

튀르키예 남동부 항구도시 이스켄데룬에 있는 16층짜리 건물은 2019년(왼쪽)에 세워졌는데, 이번 지진으로 붕괴됐다(오른쪽). 사진 BBC 방송 캡처

게다가 1960년대부터 정부가 나서서 벌금을 받고 불법 건축 행위를 정기적으로 사면해왔습니다. 이번 지진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도 의회에서 추가 사면 조처를 논의할 예정이었다죠. 이번 지진 피해 지역에서만 최대 7만5000채의 건물이 사면받았습니다.

이렇게 얻은 30억 달러(약 3조7000억 원) 규모의 벌금은 부족한 예산을 메우는 데 썼다는데, 글쎄요. 진짜 제대로 쓰인 게 맞는 걸까요. 지진 등 재난 예방을 위해 사용한다며 지난 24년간 약 880억 리라(약 5조9000억 원) 규모의 ‘지진세’도 걷었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네요. 이번 지진은 분명 ‘천재(天災)’지만 ‘인재(人災)’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