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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中人들

이강기 2015. 8. 29. 11:01

한양의 中人들  2012/02/28 11:48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 김홍도 그림으로 시첩 만들다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모일 때마다 시를 짓고 서문과 발문을 붙여 시첩을 엮었는데, 목판이나 활자로 간행하지는 않고 저마다 필사하여 간직했다. 팔기 위해서 만든 책이 아니라, 동인들이 돌려가며 읽고 즐기기 위해 만든 책이다. 사대부들의 모임을 기념하는 계회도(契會圖)를 참석자 숫자만큼 제작한 것처럼, 송석원시사의 시첩도 한번 모일 때마다 여러권 만들어졌다.

송석원시사 시첩에 그림까지

그날 지은 시와 산문만을 보통 편집했다. 하지만 규장각 서리 임득명(林得明·1767∼?)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날의 모습을 자신이 직접 그려 시첩을 만들었다. 재산이 넉넉한 시인들은 이름난 화원에게 그림을 부탁해 앞에 싣기도 했다. 비점과 도서를 붉은 색으로 찍고 비평을 붉은 글씨로 덧붙여, 시첩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풍조가 생겼다.

김의현의 시에는 “비록 적지만 또한 넉넉하다(雖少亦足).”라는 평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표지를 명필의 글씨로 꾸며 호화로운 서화첩(書畵帖)을 만들었다. 자연히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시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글씨에도 공을 들였다.

1791년 6월15일에는 송석원시사 9명이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다.

이날 지은 글들을 김의현(金義鉉)이 모아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라는 시첩을 만들었다. 이 시첩 앞에는 도화서의 동갑내기 화원인 이인문과 김홍도의 그림이 실려 있다.

첫 장에 실린 이인문의 그림 오른쪽 위에 “단원 집에서 그렸다(寫於檀園所).”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인문이나 김홍도 같은 화원들이 시인들의 모임에 직접 참석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김의현의 부탁을 받고 두 사람이 김홍도의 집에 모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원로 위항시인 마성린이 1797년에 김의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상 위에 놓인 ‘옥계청유첩’을 보고 발문을 덧붙여 써주었는데, 그때 이미 두 사람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김홍도 그림 한점은 900만원

이인문은 송석원에 중인들이 낮에 모인 모습을 그렸고, 김홍도는 밤에 모인 모습을 그렸다. 김의현은 당대 최고의 화가 두 사람의 그림을 같은 주제로 부탁해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유홍준(현 문화재청장) 교수는 “이인문이 구도를 잡을 때 항시 시야를 넓게 펼치는 반면, 단원은 대상을 압축하여 부상시키는 특징이 있다.”고 평했다. 이인문은 화면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의현은 평생 인왕산에서 서화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던 위항시인 시한재(是閒齋) 김순간(金順侃)의 아들로 자는 사정(士貞), 호는 용재(庸齋)이다. 대대로 경아전 생활을 하며 집안이 넉넉했기에 당대 최고의 화원 두 사람에게 그림을 부탁해 시첩을 장식했다.

강명관(부산대·한문학)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김홍도는 그림값으로 쌀 60섬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송석원시사의 후배격인 직하시사(稷下詩社)의 동인 조희룡(趙熙龍·1789∼1859년)이 위항인 42명의 전기를 지어 ‘호산외기(壺山外記)’를 엮었다. 여기 실린 ‘김홍도전’에 의하면 3000전을 주면서 그림을 부탁한 사람이 있었다. 상평통보 하나가 1푼, 열푼이 1전,10전이 1냥이다.3000전은 300냥인데,18세기 쌀 한 섬의 평균시세가 5냥이었으니, 김홍도는 쌀 60섬을 받고 그림 한폭을 그려준 셈이다.2006년 평균 산지 쌀값이 한가마에 15만원이었다고 하니, 요즘 시세로 치자면 900만원쯤 받았던 셈이다.

이 그림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다른 그림들은 얼마를 받고 그렸는지 알 수 없다. 하지 강세황(姜世晃·1713∼1791년)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 의하면 “단원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비단이 무더기로 쌓이고 재촉하는 사람이 문에 가득하여, 미처 잠자고 밥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김홍도의 그림값 자체가 당시 위항문화의 수준을 보여 주지만, 그러한 그림값을 지불해 가며 시첩을 장식했던 김의현의 태도에서도 송석원시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조선 후기 한양에 중인들이 대거 모여 살던 경복궁과 인왕산 자락 사이의 오늘날 모습. 현재 종로구 옥인동·통인동·누하동 등이 이에 속한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정조의 은혜 기려 시첩 제작

그림을 부탁한 김의현은 규장각 서리이다. 문예부흥을 꿈꾸었던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檢書)는 물론 서리까지도 우대하여 대대로 문장을 하는 집안에서 뽑았다. 또한 이들에게 쌀이나 돈도 자주 내리며 격려했다.

규장각 서리들을 다른 서리와 구분하여 사호(司戶)라 부르고, 그들이 근무하는 건물에는 사호헌(司戶軒)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정조는 무예에도 관심이 많고 활쏘기를 즐겼다. 정조가 1792년 10월30일 창덕궁 내원(內苑)에서 활을 쏘고 고풍(古風)으로 쌀 한섬과 돈 10냥을 사호헌에 하사했다. 고풍이란 예에 따라 상관이 하관에게 돈이나 물건을 내려주는 것이다.

규장각 서리들은 이 일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당시 규장각 직각이었던 서영보에게 그 사연을 기문(記文)으로 받아 판각하여 사호헌에 걸었다. 이 현판 끝부분에 규장각 사호와 서사관(書寫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덕구, 김의현, 박윤묵, 임득명, 김낙서 등이 모두 송석원시사 동인들이다. 규장각 서리 가운데 송석원시사 동인들이 많으며, 임금이 이들의 글재주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규장각 사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임금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시첩을 만들었다. 서영보의 기문을 판각하게 된 경위를 박윤묵이 쓰고, 유상우·김의현 등이 시를 지었다. 이 글들을 모은 시첩이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이다. 즉 “임금께서 활을 쏘시고 고풍을 내려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지은 글들을 모은 첩”이란 뜻이다.

송석원시사 동인들은 모일 때마다 시첩을 엮었다. 김의현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호화스러운 ‘옥계청유첩’을 만들고, 임금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어사고풍첩’을 만들었다. 일년 사이에 인왕산과 창덕궁에서 만들어진 이 두 권의 시첩은 송석원시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위항시인들이 주관하는 백일장인 백전(白戰)에 수백명이나 참석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수경이나 장혼이 한양 인왕산에서 커다란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항시인 이경민이 편찬한 위항인들의 전기집 ‘희조질사(熙朝 事)’의 천수경편에 의하면 “한달에 60전을 내게 하니…(줄임)배우는 아이가 많게는 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제자 가운데)나은 자가 못한 자를 가르쳤다.”고 했으니, 조를 나누어 가르칠 정도로 체계를 갖춘 기업형 서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혼의 서당에도 아들과 손자 또래의 제자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

▲ 19세기 서당의 모습. 훈장에게 매맞고 우는 아이를 친구가 왼쪽에서 위로해주고 있다. 러시아 장교들의 여행기 ‘내가 본 조선, 조선인’수록.
(가야넷,2003. 정성길 소장자료)

교정 보고 책 만드는 일로 반평생을 보낸 장혼

장혼(張混·1759∼1828)의 아버지 장우벽(張友壁)은 날마다 인왕산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그가 노래 부르는 곳을 가대(歌臺)라고 불렀다. 장우벽 자신은 글을 웬만큼 알았지만, 총명한 아들 장혼을 서당에 보내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도 쓸 데가 없는데다, 오히려 중인 신분의 한계를 탄식하며 처절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혼의 어머니 곽씨가 집에서 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 가난한 집안 살림은 장혼이 도왔다. 여섯살 때에 개에 물려 오른쪽 다리를 절었지만,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도맡아 했다.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가 1790년에 옛 홍문관 터에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고 여러가지 책들을 인쇄하여 반포하려고 하자, 오재순이 장혼을 사준(司準)에 추천하였다. 교정 보는 일을 맡은 사준은 정9품 잡직이었는데, 기술직 중인들이 맡는 말단 벼슬이었다. 그는 “원고와 다른 글자를 살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솜씨가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았다. 규장각의 여러 고관들 가운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그에게 일을 맡겼다.”고 한다. 책 한권을 다 만들면 의례 품계를 올려주는 법인데, 그는 번번이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 장혼이 목활자로 만든 서당교과서 몽유편.
“적은 봉급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받지만, 영예로운 승진은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유를 밝혀, 정조가 봉급을 더 많이 주었다. 모친상을 당한 3년을 빼고는 1816년까지 줄곧 사준으로 일하며, 사서삼경을 비롯해 ‘이충무공전서’ ‘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책들을 간행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장혼이 교정을 보았다.

장혼이 교정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나자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그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금속활자를 만들려면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 민간에서는 대개 목판으로 인쇄했는데, 재산이 넉넉하고 인쇄할 책이 많은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 문중의 책을 다 찍은 다음에는 그 활자를 남에게 빌려주며 돈을 받기 때문에 처음에 많은 자본을 들이면 어느 정도 상업성도 있었다.

돈암(敦岩)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누이가 순조의 생모 수빈 김씨였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지극한 총애를 입어 호조판서에 오르고 훈련도감을 맡았다. 그는 가통을 세우기 위해 5대 이하의 유고를 모아 ‘반남박씨 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했으며,1816년에 정교한 금속활자를 직접 만들어 세고와 함께 아버지의 문집 ‘금석집(錦石集)’을 인쇄하였다.

청나라 취진판(聚珍版) 전사(全史,二十一史)의 글자를 자본으로 인서체(印書體) 동활자 20만자를 주조한 것이다. 박종경이 개인적으로 만든 활자를 전사자(全史字), 또는 그의 호를 따서 돈암인서체활자(敦岩印書體活字)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주변에 빌려줘 여러 종류의 책이 만들어졌다. 박종경의 활자로 인쇄한 초기 십여종의 책은 대부분 장혼이 교정하였다.

목활자 만들어 서당 교재를 인쇄

인왕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장혼은 ‘천자문’ 말고도 여러가지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기 서당에 찾아오는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직접 찾아와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좋은 교과서가 필요했다.

중국의 역사와 인물 위주로 만들어진 ‘천자문’이 좋지 않은 교과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이미 비판해, 나름대로 대안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다.

장혼이 처음 만든 교과서는 ‘아희원람(兒戱原覽)’이다.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 보아야 할 내용을 가려뽑은 책이다. 정리자체 철활자를 빌려 1803년에 인쇄하였다. 그런데 남의 활자를 빌려오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했다. 그래서 인쇄 전문가였던 장혼은 스스로 필서체(筆書體) 목활자를 만들었다. 웬만한 책을 만들려면 금속활자를 10만개 넘게 주조해야 했는데, 장혼의 재산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무로 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윤병태 교수(전 충남대문헌정보·작고)는 이 목활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폭 12mm 내외, 높이 8mm 내외의 비교적 폭이 넓은 납작한 평면을 가진 활자로 보인다. 그 자체(字體)는 필서체로 되어 있으며, 다른 관주활자(官鑄活字)에 비해 약간 작은 아름다운 글씨체로 보인다. 활자의 자본(字本)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으나, 김두종은 초예(草隸)에 능한 장혼의 의장(意匠)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장혼이 처음 목활자로 인쇄한 교과서는 ‘몽유편(蒙喩篇)’과 ‘근취편(近取篇)’ ‘당률집영(唐律集英)’ 세권이다. 모두 “경오활인(庚午活印)”이라는 인기(印記)가 있다. 경오는 1810년이니 그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빨리 닳아서 찍을수록 글씨가 뭉툭해지는 단점이 있는데,1810년에 인쇄된 책들은 글자체가 비교적 정교하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크기가 작지만 만든 솜씨가 정교하면서도 글자 모양이 예뻐서, 이 활자로 찍은 책들은 금속활자본과 달리 부드러운 맛이 있다.

장혼이 직접 짓거나 편집한 책은 위항시인 333명의 시 723수를 천수경과 함께 편집한 ‘풍요속선(風謠續選)’에서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요약한 ‘동사촬요(東史撮要)’까지 24종이다. 그는 자신의 책만 인쇄한 것이 아니라 1816∼1818년 위항시인들의 책 5종을 자신의 목활자로 인쇄해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최성환이 이 활자를 인수해서 장혼의 제자나 후배 문집 5종을 인쇄했다. 그의 문집인 14권 분량의 ‘이이엄집(而已集)’은 끝내 간행되지 못해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그가 편집 인쇄한 책들을 통해 위항문화가 널리 퍼졌으며, 그의 서당 제자들이 금서사(錦西社)와 비연시사(斐然詩社)로 인왕산 시사의 대를 이었다.

■ 아희원람이란

‘아희원람(兒戱原覽)’은 고금의 사문(事文) 가운데 아이들이 찾아보아야 할 내용을 열가지 주제로 가려뽑은 책이다.

1803년에 제작된 본에는 동국(東國)·수휘(數彙)·보유(補遺)가 더 실렸다.

몽유편(蒙喩篇)은 낱글자로 배웠던 천자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어휘집이다. 상권에는 신형(身形)·연기(年紀)·칭호(稱號)·위분(位分)·명물(名物)의 기본어휘 1049개에 동의어나 유사어가 붙어 있다. 우리말 어휘도 383개나 실렸다.

하권은 인명록인데 덕행(德行)부터 이단(異端)까지 일곱 부류 1 441명의 이름을 실었다.

근취편(近取篇)도 어휘집인데 13장까지는 네글자로 된 속담과 고사숙어 1046개, 그 다음에는 세글자로 된 고사숙어 98개, 그 다음에는 두글자로 된 숙어 192개를 실었다.

아희원람은 윤병태 교수가 확인한 판본만도 7종이나 될 정도로 자주 인쇄돼 널리 읽혔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군악과 연희집단의 민간 공연

조선후기 한양의 모습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에서 대표적인 유흥지를 이렇게 소개했다.“놀이처 어디맨고 명의루 춘수루와/홍엽정 노인정과 송석원 생화정과/영파정 춘초정과 장유헌 몽답정과/필운대 상선대와 옥류동 도화동과/창의문밖 내달아서 탕춘대 세검정과…”. 이 가운데 송석원·필운대·옥류동이 인왕산에 있었으며, 창의문밖 내달아 탕춘대 세검정도 인왕산 뒷자락이었다.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京都雜志)’ 유상(遊賞)조에서는 탕춘대의 수석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흥지에서 흥을 돋우는 직업이 바로 악사와 기생이다. 악사들은 조선후기의 중인신분이었던 가객(歌客)들과 깊숙하게 어울리며 위항문학을 꽃피우는 역할을 했다. 조선전기에는 기생들이 모두 국가 소속이어서 영업을 하지 못했지만, 후기에 들어와서는 차츰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위항문학에 관여했다. 국가에서 행사 때에 기생을 동원했으나 재정이 취약해져 정식으로 봉급을 주기 힘들어 영업을 묵인한 것이다.

군악대가 상업적으로 연주하다

기생들을 통해서 춤과 노래를 비롯한 전통예술이 전승되었는데, 기생들은 혼자 영업하기 어려워 기둥서방을 두거나 연희집단에 소속되었다. 당시 군악대는 물론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군악을 연주했지만, 후기에는 민간초청에도 동원되어 연주하였다. 아울러 수시로 민가에서 일반 악사처럼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들 또한 위항문학 발전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용호영 악대는 25명, 총융청 악대는 13명인데, 취고수(吹鼓手)와 세악수(細樂手)로 나뉘어 연습했다. 취고수는 나발·대각·나각·징·자바라·북처럼 소리가 큰 악기를 연주했다. 세악수는 피리·대금·해금·장고 같은 소리가 작은 악기를 연주했다.

이옥(李鈺)이 장악원의 연주를 듣고 쓴 ‘유이원청악기(游梨院聽樂記)’에는 “용호영의 세악수가 군악을 한 번 연주하는 것만 못하다.”고 표현했다. 장안의 인기를 끌었던 군악대의 ‘매니저’ 패두(牌頭)가 거지 두목에게 협박을 당해 휘하의 악사와 기생들을 데리고 인왕산 뒷자락에서 무료로 공연한 기록을 소개한다.

▲ 오늘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었던 당시의 군악대인 총융청. 가운데 넓은 마당이 이 패두의 무리들이 연주했던 연무대이다.

용호영의 풍악이 으뜸

한양 도성 안에는 거지들이 언제나 수백명이나 들끓었다. 거지들은 자기들의 법대로 한 명의 두목을 뽑아 꼭지딴 을 삼았다.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행동을 꼭지딴의 지시대로 했으며, 이를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영조 경진년(1760)에 큰 풍년이 들자 임금이 널리 영을 내려 잔치를 베풀고 즐기게 했다.

용호영(龍虎營)의 풍악이 오영(五營)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이씨(李氏)가 그 우두머리로 있었다. 이른바 패두라는 것이다. 그는 본래 호탕하기로 이름이 나 한양 기생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당시에 주금(酒禁)이 엄해 상하 잔치에 술은 쓰지 못하고, 대신 기악(妓樂)을 즐겨 썼다. 특히 용호영의 풍악을 불러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불러오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겼다.

이 패두는 잔치에 불려 다니느라 아주 지쳐, 이따금 병을 핑계대고 집에 있었다. 그런데 한 거지가 찾아와 말했다.“거지 두목 아무개가 패두님께 청을 드렸습니다. 나라의 명으로 만백성이 함께 즐기는 이 좋은 시절에, 소인네들이 비록 거지이지만 그래도 나라의 백성이라 빠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날에 거지들이 연융대(鍊戎臺)에 모여 잔치를 하려는데, 감히 패두님께 수고를 끼쳐 풍악으로 흥취를 돋우고자 합니다. 소인 또한 그 덕을 잊지는 않겠습니다.”

이 패두가 상투 끝까지 화가 올라 호령했다.

“서평군(西平君)이나 낙창군(洛昌君) 대감 초청에도 내가 갈지 말지 한데, 거지 잔치에 부른단 말이냐?”

하인을 불러 내쫓자, 거지가 실실 웃으며 나갔다. 이 패두는 더욱 분통이 터졌다.

“음악이 이렇게까지 천하게 되었구나. 거지까지 나를 부리려고 하다니.” 얼마 뒤에 패두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내다보니 다 떨어진 옷에 몸집이 장대한 사내였다. 그가 꼭지딴인데, 눈을 부라리고 이 패두를 쏘아보며 소리를 쳤다.

“패두님 이마에는 구리를 씌웠소? 집은 물로 지었소? 우리 떼거지 수백명이 장안에 흩어져 있어 포도청 순라꾼도 어쩌지 못하는 줄 모르슈? 몸뚱이 하나에 횃불 하나면 너끈하다우. 패두라고 무사할 듯싶수? 우리를 이다지 업수이 여기다니.”

이 패두는 풍각쟁이로 한평생 떠돌아다닌 몸이라 시정의 물정에 훤했기에,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자네야말로 정말 사낼세. 내가 모르고 실수했네. 이제 자네의 청대로 하겠네.”

“내일 아침을 드신 뒤에 패두님의 기생 아무아무와 악공 아무아무들을 거느리고, 총융청(摠戎廳) 앞뜰에 크게 풍악을 차려주소. 언약을 어기지 맙시다.”

이 패두가 선뜻 승낙하자, 꼭지딴이 한번 더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가버렸다.

무료 공연시킨 거지두목 꼭지딴

이튿날 아침에 이 패두는 자기 무리들을 모두 불렀다. 거문고·젓대·피리·장고 등의 악기를 새것으로 가져오게 했고, 기생도 몇명 불러 모았다. 그들이 가는 곳을 묻자,“나만 따라오너라.” 하고는 총융청 앞뜰에 풍악을 차렸다. 온갖 악기는 자지러지게 울고, 기생들은 모두 춤을 추었다.

이때 거적을 둘러쓰고 새끼로 허리를 동여맨 거지떼가 춤추며 모여들었다. 개미들이 장을 선 듯, 떠들썩하게 어울렸다. 춤이 그치자 노래가 나오고, 노래가 그치자 다시 춤을 추었다.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아! 우리네 인생도 이런 날이 있구나.”

꼭지딴은 상좌에 버티고 앉아 꽤나 신났다. 기생들이 그 꼴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자, 패두가 눈짓을 하며 타일렀다.

“아서라! 얘들아. 웃지 마라. 저 꼭지딴이 내 목숨도 제멋대로 빼앗아 버릴 수 있단다. 너희 따위야 꼭지딴 앞에 파리목숨이지.”

해가 기울자 여러 거지들이 차례대로 둘러앉아서 저마다 자루 속에서 고깃덩이와 떡조각을 꺼냈는데, 다 잔칫집에서 얻어온 것들이었다. 깨진 기와조각이나 풀잎에 싸가지고 와서 저마다 바쳤다.

“소인들 잔치가 시작되었으니, 나리들 먼저 드시라고 바칩니다요.”

이 패두가 웃으며 사양했다.

“내가 너희를 위해 풍악은 잡혀주지만, 너희들 음식은 받지 않겠네.”

거지들이 히히덕거리며 굽신거렸다.

“나리야 귀하신 분인데, 거지 음식을 드시겠습니까? 그럼 소인들이 다 먹습지요.”

이 패두는 풍악과 가무로 더욱 흥을 돋웠다. 음식 잔치가 끝나자, 거지들이 다시 일어나 어깨를 들먹거리며 춤을 추었다. 한참 지나자 거지들이 자루에서 산자 등의 과자 부스러기와 나물 찌꺼기를 꺼내 기생들 앞으로 내밀었다.

“아씨들의 노고에 보답할 길이 없수다. 이거나마 가져다 집의 애기들에게 주시구려.”

기생들도 모두 싫다고 하며 받지 않았다. 거지들은 또 다 먹어치우고 굽신거렸다.

“여러분 덕분에 배불리 먹었습니다요.” 저녁이 되자 꼭지딴이 나와서 사례하였다.“우리들은 이제 또 저녁밥을 빌러 나섭니다. 여러분들 노고에 감사합니다. 다음에 길에서 뵙시다.”

그러자 거지떼가 한꺼번에 흩어졌다. 기생들은 하루종일 굶주린데다 지친 끝이라, 패두에게 원성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 패두는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쾌남아를 보았다.”고 탄식했다. 이 패두는 그 뒤에도 길에서 거지를 보면 그 꼭지딴이 생각났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해총’ 제4책 18세기 작가 성대중 ‘개수전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그동안 한양 인왕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중인들의 이야기를 몇차례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관청의 아전들이 많았지만, 역관이나 의원들도 있었고, 서당 훈장도 있었으며,인쇄전문가도 있었다. 조선시대 신지식인 이라고 평가되는 중인은 과연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본다.

▲ 조수삼의 후원자였던 영의정 조인영의 초상화.
중인의 직업은 수십가지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지으면서,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 우리나라 백성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부류를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았다. 벼슬하지 못한 선비는 농·공·상(農工商) 가운데 한 직업을 택해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혹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하여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그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직업은 네가지가 아니라 수십가지였다. 이 책의 총론에서 그 예를 들었다.

“종실(宗室)과 사대부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집안이 되고, 사대부보다 못한 계층은 시골의 품관(品官)·중정(中正)·공조(功曹) 따위가 되었다. 이보다 못한 계층은 사서(士庶) 및 장교·역관·산원(算員)·의관과 방외의 한산인(閑散人)이 되었다. 더 못한 계층은 아전·군호(軍戶)·양만 따위가 되었으며, 이보다 더 못한 계층은 공사천(公私賤) 노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노비에서 지방 아전까지가 하인(下人) 한 계층이고, 서얼과 잡색(雜色)이 중인 한 계층이며, 품관과 사대부를 양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안의 흥망성쇠에 따라 “사대부가 혹 신분이 낮아져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이 오래 되면서 혹 신분이 높아져 차츰 사대부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인은 전문직업인

이중환이 말한 중인은 서얼과 장교·역관·산원·의관 등의 전문직업인이다. 서얼은 물론 양반이지만 진출에 제한받기 때문에 저절로 중인과 한 부류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위항문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정조시대였는데, 정조(正祖)는 중인과 시정배(市井輩)를 이렇게 구분하였다.

“중인에는 편교(校)·계사(計士)·의원·역관·일관(日官)·율관(律官)·창재(唱才)·상기(賞技)·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녹사(錄事)의 칭호가 있다. 시정(市井)에는 액속(掖屬)·조리(曹吏)·전민(廛民)의 이름이 있다. 이것이 중인과 시정의 명분이다. 이들 밖에도 하천(下賤)의 복사역역자(服事力役者)들이 수만이나 되니, 군예(軍隸)·노복(奴僕)·공(工)·상(商)·용고(傭雇)같이 미천한 자들도 또한 낫고 못한 차이가 있다.”

정조가 말한 중인들의 직업을 요즘으로 치자면 장교, 공인회계사, 의사, 외교관 겸 동시통역사, 천문학자, 변호사와 법관, 서예가, 화가, 공무원 등이다.

정조는 중인 외에 시정(市井)과 하천(下賤)을 구분했는데, 이 세가지 계층을 아울러 당시에는 위항인(委巷人)이라고 했다.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인데, 넓은 의미의 중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숙영이 지은 서문에 “유희경은 본래 위항인이다.”고 했는데, 본래는 천한 종이었다.‘화곡집’ 서문에는 “아깝게도 황군은 위항인이다.”라고 했는데, 황택후는 금위영 서리였다.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만이 아니라, 훨씬 낮은 서리나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 바로 위항인이다.

위항인은 글자 그대로 위항(委巷)에 사는 사람이다. 위(委)는 곡(曲)이고, 항(巷)은 ‘이중도(里中道)’이다. 즉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 바로 위항이고,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위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로 내려가면서 양반보다 부유한 중인들이 많아졌으므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열가지 복을 누린 역관 조수삼

송석원시사 동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호는 추재(秋齋)로 한양 조씨이다. 그의 후배 조희룡은 그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는 풍채가 아름다워 신선의 기골이 있었다. 문장력이 넓고도 깊었는데, 시에 가장 뛰어났다.”는 칭찬으로 시작했다. 사대부의 풍채와 문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의 문집을 엮어준 손자 조중묵이 화원이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직업적인 역관이 아니었는데,28세에 이상원의 길동무로 처음 중국에 따라갔다고 한다.

“길에서 강남 사람을 만났는데, 같은 수레를 타고 가면서 중국말을 다 배웠다. 그 뒤론 북경 사람과 말할 때에도 필담(筆談)과 통역의 힘을 빌지 않았다.”

역관을 선택한 중인들은 사역원(司譯院)에서 몇년 동안 그 나라 말을 배웠는데, 그는 북경까지 가는 길에서 중국어를 다 배운 것이다. 여섯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뒤엔 역관의 신분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19세기가 되면서 서울의 모습이 바뀌자, 전에는 듣고 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조수삼은 그러한 이야기를 71편 골라서 ‘기이(紀異)’라는 시를 쓰고 그 앞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군상의 소묘이면서도 사회변화를 보여준다.

“내 나무(吾柴)는 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그는 (나무를 팔면서) ‘나무 사시오.’라 말하지 않고,‘내 나무’라고만 말하였다. 심하게 바람 불거나 눈 내리는 추운 날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내 나무’라고) 외치다가, 나무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 틈이 나면 길가에 앉아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었는데, 바로 고본 경서였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추위에도 열두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쪽 거리 북쪽 거리에서 ‘내 나무’라고 외치네.

어리석은 아낙네야 비웃겠지만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다오.”

고본 경서를 읽는 것으로 보아 나무 장사꾼은 양반계층에서 몰락한 지식인인 듯하다. 그래서 차마 다른 장사꾼들처럼 “나무 사시오.”라는 존댓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내 나무”라고 반말을 씀으로써 양반 선비의 마지막 체면을 세웠던 듯하다.

양반에 60년 뒤진 중인

그러나 송나라판 경서가 가슴속에 가득 찼어도 쓸 데가 없는 것이 당시 사회였고, 그런데도 끝까지 양반의 알량한 자존심과 경서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에 비하면 조수삼은 행복한 중인이었는데, 조희룡은 그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추재가 지닌 복이 모두 열가지라고 하면서, 남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지녀도 평생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가지란 첫째 풍도(風度), 둘째 시문(詩文), 셋째 공령(功令), 넷째 의학, 다섯째 바둑, 여섯째 서예, 일곱째 기억력, 여덟째 담론, 아홉째 복택, 열째 장수이다.”

8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장수하여 남의 부러움을 샀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공령문인데, 과거시험 때에 쓰는 시나 문장이다. 양반들은 대부분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답안지를 쓰기 위해 공령문을 배웠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면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고, 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문집에 공령시가 실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의 문집에는 공령시가 57편이나 실렸다. 그가 공령시를 잘 지었다고 소문났지만, 자기가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한 것이 아니라 양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연습한 것이다.

그는 61세에 경상도 관찰사 조인영의 서기로 따라갔는데, 실제로는 가정교사이다. 그는 83세에야 진사에 합격했는데, 영의정 조인영이 시를 짓게 하자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를 지었다.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년 전에는 스물 셋이었다오.

합격자 명부인 방목에 그를 유학(幼學)이라고 표시했으니,83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양반들은 20대 초반에 이미 진사에 합격하고 곧이어 문과에 응시했는데, 그는 60년이나 뒤처졌다. 시의 제목은 “진사시 합격자를 발표한 날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입으로 읊은 시”이다.

조인영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기쁨을 시로 표현해 보라는 주문을 한 것인데,“가까스로” 합격해 난삼을 걸친 기쁨과, 몇백 짐의 책을 외우고도 60년 늦게 합격한 중인의 한을 함께 표현했다.

그나마 영의정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전문직업을 지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면서도 신분적으로는 60년이나 양반에게 뒤진 것이 바로 중인의 한계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였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으며, 좁은 집들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으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는 위항인 가운데 주로 서리나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 가운데 하나인 수성동. 인왕산을 오르는 주요 등산로 가운데 하나여서, 세 선비와 동자가 산을 오르고 있다.

왕기 서린 인왕산

서울의 물길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이 물을 개천(開川)이라고 하였다. 백악의 남쪽, 인왕산의 동쪽 명당에 궁궐을 지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주민들은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종로를 경계로 하여 살았다. 왕족과 양반 관료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 이북의 지역, 지금의 율곡로 양쪽 일대에 모여 살았다. 즉 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의 북촌이 그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白岳·北岳)이다. 백악의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은 높고도 우람하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으며, 북악처럼 빼어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남성적이다.

그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할 무렵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의논도 있었다. 이는 전설이 돼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온 듯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겪고 나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다시 퍼져, 광해군 시대에 인왕산 기슭에다 경희궁(慶熙宮)을 세웠으며, 자수궁(慈壽宮)이나 인경궁(仁慶宮)도 세웠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綾陽君)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왕위에 올라 인조(仁祖)가 되었으니, 인왕산 왕기설이 입증된 셈이다.

장안의 명승지 인왕산

인왕산에는 왕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치도 좋았다. 서울의 명승지로는 반드시 인왕산이 꼽혔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는 필운대(弼雲臺)·청풍계(淸風溪)·반송지(盤松池)·세검정(洗劍亭)을 포함했다.

인왕산 자락의 명승지가 서울 명승지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서울의 5대 명승지 가운데 인왕동과 백운동이 모두 인왕산에 있었다.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심 가까이 있으니, 성안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명승지였다.

서울 시내에서 인왕산을 보면 앞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습을 인왕산의 전부로 알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이 부분에만 집과 관청이 들어섰고 사람이 살았으며, 역사가 이뤄졌다.

골짜기를 따라 여러 개의 마을이 생겼는데, 강희언(姜熙彦·1710∼1764)의 그림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뒤 몇개씩 합해져서 지금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몇개의 법정동이 합해져서 다시 행정동이 되었다.

사직동부터 체부동을 거쳐 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까지가 경복궁에서 볼 수 있는 인왕산의 동네들이다.

인왕산에는 약수터도 많아서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광복 이후에도 서울 사람들이 자주 찾아갔다. 그러나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며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러다가 입산통제 25년 만인 1993년 2월25일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져, 서울시민들에게 등산로가 다시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33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등산로가 14곳이나 되며,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인왕산의 네 구역

인왕산은 경치가 좋은 명승지면서 경복궁에서 가까운 주택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 건물이 모두 불타버려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양반과 중인들이 대대로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라는 이름에 비해, 이름난 정자들은 많지 않았다.

임금이 사는 경복궁이 너무 가까운 데다, 높은 곳에서 궁궐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이 일대에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제한이 있다.

그래서 인왕산에 지어진 집들은 시대마다 그 구역이 달랐다.

경복궁이 정궁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옆동네에 관청만 있었고, 주택들은 많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인왕산에 있었지만,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지 않는 옆자락이었다. 그의 살림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수성동(水聲洞) 기린교(麒麟橋) 부근에 따로 있었다.

수성동은 옥인아파트 자리라고 추정되는데,1960년대에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기린교를 없앴다고 김영상 선생이 증언하였다.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던 청풍계(지금의 청운동)나 위항시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옥류동(지금의 옥인동)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활기를 띠었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이 불타버려 오랫동안 폐허가 되자, 높은 곳에 집을 지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아전들이 관아와 거리가 가까운 인왕산 중턱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인왕산은 구역과 높이에 따라 고관들의 호화주택이나 별장, 위항인들의 초가집들이 섞이게 되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누상동이나 누하동, 필운동 일대에는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다음 회에는 인왕산을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안평대군과 무계정사, 안동 김씨와 청풍계, 김수항의 청휘각과 송석원, 필운대와 육각현 순으로 살펴본다.

■ 역사기록이 전하는 인왕산

인왕산은 역사 기록에서만 보더라도 명산으로 꼽을 만하다.

조선시대 차천로(車天輅·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인왕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무학(無學)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답했다. 이는 후에 인조반정으로 현재화된다. 또한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인왕산의 경치를 자랑했다.

한성 도성 안에 경치 좋은 곳이 적은데, 그중 놀 만한 곳으로는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줄임)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인데, 깊은 골짜기가 비스듬히 길게 뻗어 있다고 말했다.

유본해가 서울의 명승지와 동네를 소개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도 그 사실을 적시했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물 맑고 바위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가장 좋다.

이 동네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라고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세종이 당호를 지어준 비해당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혼인하면서 경복궁에서 살림을 내어 나간 뒤에, 인왕산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1442년 6월 어느날 경복궁에 들어가자 세종이 물었다.

“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이 시경에서 증민(蒸民)편을 외워 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됨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이 시는 노나라 헌왕(獻王)의 둘째 아들인 중산보(仲山甫)가 주나라 선왕(宣王)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에 윤길보(尹吉甫)가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인데,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따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이 즉위한 뒤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비해(匪懈)’ 두 글자에 담아 집 이름으로 내려준 것이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짓는 문인들의 관습이 유행하자 조선에서도 그런 풍조가 생겼는데, 안평대군은 무려 48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냈다.48경은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매화 핀 창가에 흰 달빛(梅窓素月)” “대나무 길에 맑은 바람(竹逕淸風)” 등의 네 글자로 명명되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먼저 그리고 안평대군이 칠언 화제시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인왕산 기슭 비해당으로 초청하여 48경을 함께 즐기며 차운시를 짓게 했다. 우리 조상들은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 그대로 산과 물을 즐겼는데, 안평대군은 한강가에도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담담정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

안평대군은 서적만 1만권을 소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서화·골동품을 수집하였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를 보면 안견(安堅)의 그림 30점, 일본 화승 철관(鐵關)의 그림 4점,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 명품 188점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곽희(郭熙)의 작품이 17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은 안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문인 학자들에게 인심을 얻자,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안평대군까지 처형하고는 이 정자를 빼앗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다.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가 되었다.

몽유도원도를 인왕산에 실현한 별장 무계정사

1447년 4월20일 밤에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가,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밖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입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몇 굽이 시냇물을 따라 벼랑길을 돌아가자 신선마을이 나타났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로 소개한 뒤에, 무릉도원은 중국과 조선 문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처음 가본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깨닫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그림이 바로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도연명 이후에 많은 문인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고,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청학동(靑鶴洞)을 찾아 글을 지었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 된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에 치지정(致知亭)에 올라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유영봉 교수 번역)

세간의 어느 곳을 무릉도원으로 꿈꾸었던가?

산관의 차림새가 오히려 눈에 선하더니 그림으로 보게 되니 정녕 호사로다

천년을 전해질 수 있다면 ‘내가 참 현명했구나’ 하리니.

안평대군은 꿈속에 거닐던 복사꽃 동산을 인왕산 기슭에서 실제로 찾아 별장을 지었다. 안평대군과 사육신의 문장은 상당수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이 그 별장에서 지은 시 아래에 안평대군의 글이 덧붙어 있어, 별장 지은 사연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묘년(1447) 4월에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들과 비교해 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칸으로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이에 잡언시 5편을 지어 뒷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비하고자 한다.” (유영봉 교수 번역)

안평대군 죽은뒤 무계정사 철거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집 이름은 글자 그대로 ‘무릉계에 자리한 정사’라는 뜻인데, 한시 5수 뒤에 “경태(景泰) 2년 신미”라고 쓰여 있어 1451년에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연대는 유영봉 교수가 최근의 논문 ‘비해당 사십팔영의 성립 배경과 체제’라는 논문에서 밝혀냈다.

수성동에 있던 비해당에서 인왕산 기슭을 넘어 무계정사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안평대군은 꿈속에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별장을 지어 문인학자들을 초청하고 시를 읊거나 활을 쏘며 놀았다. 하지만 단종실록 원년 5월19일 기사에는 이곳을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고 하며 안평대군을 비난했다.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란 뜻이다. 계유정난 직전에도 수양대군 파에선 안평대군이 무계정사 지은 뜻을 왕권탈취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인 10월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고 사간원에서 아뢰었으며,10월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 가운데 첫번째가 바로 이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의 문신 23명이 참여하여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6년 뒤에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종과 안평대군이 아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으며, 성삼문·이개·박팽년 등의 사육신은 3년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현전까지 폐지되었다.

무계정사는 곧 무너지고, 지금은 안평대군의 예언 그대로 그림만 1000년을 남아 전한다. 자하문터널 위 부암동사무소 뒷길을 따라 올라가다 돌계단을 오르면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긴 바위가 나타나고, 그 뒤에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오래된 건물이 서있다.

주소로는 종로구 부암동 329-1,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인데, 이곳이 바로 무계정사 터이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중인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권율과 이항복의 집이 필운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이다.1537년 3월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用卿)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中宗)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한양 주산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 공용경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이름 지었으며,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고 설명했다. 운룡(雲龍)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북악(백악)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 공용경이 지은 이름들은 별로 쓰이지 않았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살았던 집터에 ‘필운대’라는 이름으로 전할 뿐이다. 순조 때의 실학자인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필운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필운대는) 성안 인왕산 밑에 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그는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는 육각현(六角峴)이 있으니, 이곳도 역시 인왕산 기슭이다. 필운대와 함께 유명하다.

종로구 필운동 9번지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필운대 바위 앞에 서면 경복궁과 백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 해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가 없다.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구름만 깊었구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가객 박효관 영의정과 교류

그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 박효관을 비롯한 일행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유원 일행과 함께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기며 한시를 바위에 새기는 일을 돌봐주었던 듯하다.

위항의 가객이었던 박효관은 필운대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마련해 노래 부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유원도 시조에 관심이 깊어 당시 대표적인 시조 45수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했다.20종 이상의 시조집을 조사하여 45수를 뽑아내고 한시로 번역해 감상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므로 위항의 가객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악부(樂府)에도 관심이 많아, 칠언절구 100수의 연작시로 ‘해동악부(海東樂府)’도 지었다.(박효관의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필운대에 모였던 가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정선과 위항시인 칠송정서 풍류

인왕산에 오래 살았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인왕산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1676년 1월3일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부근에 있던 동네이다. 그런 인연으로 젊은 시절에는 난곡(蘭谷)이라는 호를 썼다. 청운동 일대에는 장동 김씨들이 살았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6형제가 다방면에 이름나 6창(昌)이라고 불렸다. 정선은 그 가운데 셋째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에게 글을 배웠다. 김창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제자백가와 시문(詩文)·서화(書畵)에 달통한 학자였다.

정선이 7세였던 1682년에 북악산 남쪽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선이 육각현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후배 조영석이 “농은당에서 육강현을 바라보았다.”고 썼다.

육강현은 육각현을 소리나는 대로 쓴 듯하고, 농은당은 김창흡의 형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집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왼쪽에 크게 그려진 집이 바로 농은당이고, 언덕 너머 솔숲 사이의 큰 바위가 필운대, 그 너머 고개가 바로 육각현이다.

송석원시사 동인 박윤묵이 장혼의 집에 들렸다가 주인이 없어 육각현에 올라가 지은 칠언율시가 전한다. 육각현 위에 세운 칠송정(七松亭)이라는 정자가 바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였다.

중인, 대원군을 움직이다

칠송처사 정훈서의 소유였던 칠송정에는 송석원시사의 선배인 정내교(鄭來僑·1681∼1759) 때부터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

한동안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가 1840년대에 위항시인 지석관이 수리하여 다시 옛모습을 찾았다. 박기열·조경식·김희령 등이 칠송정과 일섭원에 모였는데, 이 무렵에는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불렸다.

육각현 칠송정이 장안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뒤부터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며, 수많은 중인 서리들이 그의 사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천하장안’으로 불렸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네 사람이었다. 개화파 지식인 박제경(朴齊絅)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그 실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형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오도영을, 호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김완조와 김석준을, 병조에는 박봉래를, 이조에는 이계환을, 예조에는 장신영을, 의정부 팔도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윤광석을 뽑아서 맡겼다. 이들은 모두 대대로 아전 일을 보았던 집안의 후손들이어서 전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당하면 곧바로 판단하여 처리하였다. 대원군이 하나같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박제경은 대원군의 아전 정치를 비판적으로 기록했지만, 이 책에 평을 덧붙인 위항시인 차산(此山) 배전(裵琠)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위항시인으로 이름난 여러 명의 행정능력을 이렇게 칭찬했다.

운현궁에서 신임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민간의 기이한 재주꾼들이다. 윤광석·오도영·장신영 등은 글재주를 사랑할 만하고, 기억력도 놀랍게 총명하였다. 무리 가운데 뛰어나게 민첩하여, 사리를 훤하게 통달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도영과 장신영이 육각현 칠송정시사에 드나들며 시를 지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사업을 벌이던 대원군은 위항시인들의 시사를 격려하기 위해 칠송정을 수리해 주었다.

대원군은 박효관·안민영 등 가객들과도 친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는데, 박효관이 위항시인들보다 더 총애를 받자 칠송정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오횡묵(吳宖默·1834∼?)이 백운동에 집을 짓고 모임터를 옮겼다.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뒷골목이 바로 백운동 골짜기였다.

(정선이 인왕산에서 그린 그림들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