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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 이영훈 (2)

이강기 2015. 8. 29. 11:24

 

 

 

 

 

남북 분단의 원인과 책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6)

 

 

 

국내 시민사회의 미성숙과 미소간 냉전체제 

 

[ 이영훈 / 2006-06-24 12:06 ] 

 


 

 

 

지난번에 소개하였습니다만, 연합군에 의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교과서의 서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려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수되고 있음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런 이야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해방 이전에 우리 민족이 모두 합의한 나라세우기(state building)의 마스터플랜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전제조건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논리적 전제조건에서부터 불성립입니다. 지난 강의에서 지적해드린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방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재림하는 그 날처럼 도둑처럼 갑작스레 찾아 왔습니다.

 


 

해방 직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채만식 선생의 『역로』라는 소설이 재미있을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해방이 된 지 몇 달 뒤에 채만식 선생은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사기 위해 3시간이나 서 있었습니다. 그 긴 행렬에서 채만식은 한 친구를 만납니다. 그 친구는 긴 행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창구 앞으로 가 암표를 구입합니다. 어느 중학생은 창구 직원에게 거스름돈을 떼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의 질이 전보담 되려 떨어졌어. 걱정야.” 그 중학생의 말입니다.

 


 

혼잡한 열차 속에서 겨우 자리를 잡은 채만식 선생의 주변에서 열띤 정치 토론의 장이 벌어집니다. ‘늙은 농민’은 이승만을, ‘잠바 청년’은 여운형을 지지합니다. 어느 ‘시골신사’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찬양합니다. 열띤 토론은 천안역에서 중단됩니다. 유리창을 깨고 쌀보퉁이를 들이밀면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기어 오릅니다. 여기저기서 고함과 함께 싸움이 벌어집니다. 부산에서 천안까지 쌀을 구하러 온 사람은 영악한 농민들이 일본으로 쌀을 밀수출하고 있다고 성토합니다. 그렇게 채만식의 눈에 비친 세태는 어지럽고 어두웠습니다. “백성이 아직 어리구 철이 아니 나서 그런가”, 아니면 “나이가 너무 많아 늙어빠져서 노망 기운으루다 그러는 것인가.”

 


 

저는 이러한 채만식의 소설에서 해방 당시의 숨김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전상인의 「해방공간의 사회사」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거창한 정치사상이나 정치투쟁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관찰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름없이 살다간 보통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무기력하게 그 시대에 놓여졌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주체로 그 시대를 치열하게 겪어내고 적극적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그들의 일상생활을 규정한 것은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거창한 정치적 담론이 아니라 가문과 마을, 곧 그들의 전통적인 사회적 연망(緣網, network)이었습니다.

 


 

해방 직후는 의외로 평온하였습니다. 일본인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다시 걸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회는 문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통에 억눌렸던 온갖 소비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성한 쌀소비가 대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쌀이 해방이야”. “쌀이 민족이야”. 그리고 애국가, 태극기, 3.1절 등의 새로운 민족상징이 고안되고 널리 소비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해외동포들이 돌아왔습니다. 일본에서 도합 70여 만의 인구가 돌아왔습니다. 미국적 소비풍조, 영자신문, 기독교, 슈사인보이, 염색 미군복 등은 미국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지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쌀이 일본으로 밀수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방의 상징인 쌀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매점매석 등 쌀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 군정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여 일제가 시행한 공출제도를 잠시 복구하였습니다. 그러자 미 군정이 일정(日政)보다 못하다는 무책임한 투정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문과 마을을 떠나 시민사회라고 할만한 자율적인 결사체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전제조건이 결여된 가운데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래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가문과 촌락과 같은 전통적 연망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회사, 조합, 학교, 교회, 기타 우애단체 등등, 시민사회의 성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과 국가 간의 중간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강대했으며, 개인은 허약하였습니다. 개인과 국가 간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환형동물(環形動物)에 묘사한 바와 같은 속이 텅빈 단순 조직, 그러한 상태와 비슷하였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물러난 뒤 어떻게 그런 상태가 조성되었는지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과제입니다. 어쨌든 사회를 통합했던 유일한 자율적 질서는 관료제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람들은 무작위로 좌와 우로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분열하였습니다. 왼쪽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계급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공평하게 잘 산다는 사회주의의 미망(迷妄)을 추구하였습니다. 반면에 오른쪽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민족이란 이념에 이끌렸습니다. 그렇게 좌와 우로 갈라진 사람들은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인 계급이니 민족이니 하는 정치 원리에 이끌려 영문도 잘 알지 못한 채 대립하고 분열하였습니다.

 


 

제가 방문한 적이 있는 충청도의 어느 마을에서는 엉뚱하게 지주 가문이 좌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지배를 받던 마을의 하민들은 우에 가담하였습니다. 경상도 어느 마을에 가보니 거기서는 윤씨 집단과 정씨 집단이 대립하였는데, 윤씨가 좌로 가자 정씨는 무조건 우로 갔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우리 민족’이라 할 만한 의식과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단합이 성립해 있었더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상이한 견해와 이해관계를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사회가 넉넉히 성립해 있었더라면 어찌 바깥에서 들어온 계급이니 민족이니 하는 정치적 담론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대립하고 분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 힘이 아니고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것이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만한 전제조건은 없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촌락사회가 그러하였기 때문에 중앙의 정치가 마찬가지로 그러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가진 정치가들이 허심탄회하게 만나 서로 약간씩 양보하면서 분단만큼은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다짐을 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서울의 미 군정이 그러한 발상을 낸 적이 있습니다만, 서울에서조차 정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 본 적도 없거니와, 그 때문에 평양의 정치가들이 서울에 온 적은 소문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분단을 초래한 역사적 조건은 일차적으로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해서는 곤란합니다. 해방 정국을 규정한 외적인 국제조건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의 남과 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할 여지는 처음부터 적었습니다. 처음 1년 간은 두 강대국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만, 1946년 9월부터 모든 것은 너무나 명확하였습니다. 이른바 냉전이 개시된 것이지요. 미소간의 냉전이야말로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놓게 된 가장 중요한 힘이었습니다. 그 두 강대국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단은 당시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거절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과 북한에서는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는 정치세력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일제 하에서 근대 문명을 학습한 하급 관료와 테크노크라트형 지식인, 중소 상공업자들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중심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어쨌든 지배적 정치세력이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었다는 점에서 남북한 간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흔히들 분단의 책임을 1946년 6월 3일, 후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에 있다고 합니다만, 이는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비밀이 해제된 모스코바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정부를 세울 의지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에게 명확히 전달하였습니다. 이 점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이정식의 「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정식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1945년 9월 초까지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유동적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타협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둘째, 이러한 타협의 가능성은 9월 12일부터 10월 2일 사이 런던에서 열렸던 전승국(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소련) 외상회담에서 미국ㆍ영국과 소련 사이에 전후 처리를 둘러싸고 충돌이 노골화하면서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따라 소련 군정은 북한에 독자적인 행정기구를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넷째, 그 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과 중국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데, 그가 한국전쟁을 도발하게 된 데는 중국의 공산화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과 그의 협력자들이 북한을 완벽하게 장악한 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사실상 독자의 정부에 준하는 통치행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의 미 군정은 그의 협력자를 선택하는 데 오히려 주저하였지요. 미 군정에 참여한 미국의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매우 낭만적이게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그들은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박지향의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이라는 논문이 좋은 참고가 되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미군정에 참여한 미국 국무부의 자유주의자들은 중도 좌파는 물론, 온건한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하는 한 공산당 계열의 전국노동자평의회[全評]조차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들 미 군정이 한국의 노동운동을 무조건 탄압하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 군정의 자유주의자들과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민주적 또는 자주적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노조운동으로부터 정치세력을 분리하여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진정한 대표기관으로 만들려 했습니다만, 전평이 모험적인 극좌노선으로 불법적인 투쟁을 감행함에 따라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지향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전평이 정치 우선주의를 떠나 온건한 좌파 노동조직으로서 경제투쟁을 추구했더라면 미 군정으로서는 그를 탄압할 적절한 구실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미 군정이 추구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도자로 하는 좌우합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해설을 달 수 있습니다. 이윽고 1947년 미국에서 트루만선언이 나오는 등, 냉전이 사실상의 열전으로 달구어지면서 모든 낭만적 시도의 가능성은 봉쇄되고 맙니다. 미국은 미운 오리와도 같은 이승만을 협력자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끝까지 망설이고 주저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단호하게 김일성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선정하였던 소련의 스탈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이 요란스럽게 펄럭이는 가운데 다른 이념이나 정치세력이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닫혀 있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지는 것이 언제입니까. 1946년 7월이지요. 그런데 남한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런 절대 카리스마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말해 미국의 이해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조정과 타협의 여지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끝까지 봉쇄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해방 당시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는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외래 기원의 정치 원리를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잘 단합된 질서체로 통합할만한 문명능력은 아직 성립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체적 조건이 미비된 가운데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는 곧바로 냉전에 돌입하게 되는 두 강대국이 점령군으로 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협력자들에 의해 상이한 원리의 두 나라가 건립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민족의 분단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그 비극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앞서 소개한 교과서의 이야기가 왜 엉터리인지를 납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엉터리 이야기는 하루 빨리 교과서에서 추방되어야 합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건국의 문명사적 의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7)

 

자유민주주의, 근대 문명국가로서의 출발 

 

[ 이영훈 / 2006-06-26 11:16 ] 

 

 

오늘은 1948년 8월 15일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제헌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일체 인정되지 아니하며 여하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헌법 제9조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뭐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는가”라고 불평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지적해드리면, 우리 주변에는 헌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 한 번도 자세히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그러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간의 세월동안 헌법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읽어보라고 권유한 선생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헌법의 이념은 이렇다는 식으로 몇 마디로 요약된 개념을 공민시간에 듣고 달달 외워버렸던 것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 헌법을 읽어 본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나이 50이 되어서였습니다. 옆 방에 계시는 어느 법대 교수님이 『한국헌법사』라는 책을 저술한 다음 저에게 한 권 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을 차분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장도 좋지만 그 뜻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 이런 헌법을 이제야 읽다니, 그러고도 내가 명색이 대학교수인가”. 그런 반성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오늘이라도 서점에 들러 제헌헌법 이래의 역대 헌법을 구해서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중ㆍ고등학교에서 헌법과 그에 기초해 이루어진 건국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금성사에서 나온 『한국 근ㆍ현대사』교과서에서 그 예를 찾겠습니다. 이 말썽 많은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제4편 제1장 제3절인 ‘대한민국의 수립과 분단’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여러 차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란 표현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건국’이란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란 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옵니다. “통일 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의 반대 속에 1945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264쪽)

 


 

이렇게 대한민국은 ‘국민적 열망’을 누르고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무리하게 세워진 ‘남한만의 단독 정부’로 교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세워지기도 전에 무슨 국민이 있습니까. ‘국민적 열망’의 그 국민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입니까. 교과서의 서술이 참으로 한심한 수준입니다. 어쨌든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대한민국이 어떠한 이념에 입각한 근대국가인지, 그 헌법의 기초 이념에 관해 역사교과서는 단 한마디의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남한만의 단독정부의 수립’이라 하여 민족 분단이란 비극적 사건의 일환으로 처리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은근히 분단의 책임을 ‘국민적 열망’을 누르고 성립한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돌리고 있습니다.

 


 

1948년 8월15일, 그 날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이 한국의 문명사에서 있어서 지니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의의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단독정부’로 찌그러진 채 조만간 이룩되어야 할 민족통일과 더불어 사라질 운명에 있습니다. 도대체 한 나라의 성립과 장래를 그렇게 가르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다른 어디에 있습니까. 북한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진정 그렇다면 더 이상 쓴소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차근히 대한민국의 건국에 담긴 커다란 역사적 의의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첫째,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15-19세기 조선왕조의 시대에는 일반 민중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1899년 대한제국의 국제(國制)가 반포되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였습니다. 황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한다고 선포되었습니다. 이 국제와 관련하여 나중에 고종은 “정치는 관인(官人)이 하는 것이요 민(民)은 피치자로서 정치ㆍ결사는 물론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뒤이은 1905-1945년 일제하의 식민지기는 어떠하였습니까. 앞서 이 시기에 근대적인 법과 제도가 이식되었다고 했습니다만, 정치의 영역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파견한 총독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한 몸으로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3권을 통합한 전제군주나 다를 바 없었지요. 조선인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일정액 이상의 소득세를 내는 사람들에 한해서 지방의회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부분적으로 인정받았을 뿐이지요.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일본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를 몰랐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것은 그 때문이지요. 일본이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은 천황제 국가가 해체된 이후 미군의 점령체제하에서의 일입니다.

 


 

둘째, 자유와 인권은 법률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인권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자립적으로 영위할 토대로서 사유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제헌헌법 제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농지개혁은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이어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소유 농지의 상한 규모를 3정보로 정한 다음, 그 이상의 모든 농지를 지주로부터 유상으로 수용하고 소작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였습니다.

 


 

유상으로 수용, 분배한 것을 두고, 북한의 무상 수용, 분배보다 덜 개혁적이었다는 주장을 가끔 듣습니다만, 이는 잘못입니다. 유상으로 수용하고 분배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사유재산제도를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상 개혁은 이 핵심 원리의 부정입니다. 그래서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었지만, 무상 분배인 경우 그 소유권은 온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자기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닌데 어찌 온전한 사유재산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북한 당국은 매매나 저당 같은 재산권의 처분 행위를 제한하였습니다. 사적 지주를 없애는 대신 결과적으로 국가가 지주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토지를 나누어 준 지 얼마되지 않아 모두 회수하여 집단농장체제로 가지 않았습니까.

 


 

농지개혁이 실시된 결과 우리나라 농촌의 주민들은 모두 자작농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 있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가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722년 통일신라가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나누어 주었다”라고 한 기록이 처음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으론 당시의 ‘백성’이란 농촌사회에서 중상층의 지위에 있던 농민을 가리키며, 하층 농민까지 분배의 대상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유사 이래 농민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일대 쾌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떠한 변화가 생겨났습니까. 청취자 여러분은 위대한 시인 서정주의 “애비는 종이었다”는 시를 기억하실 겁니다. 양반 주인의 마름인 아버지가 주인의 호출을 받고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새벽 이슬 젖은 논길을 잠뱅이를 적시며 숨가쁘게 달려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더운 아비의 숨결에서 자식은 애비가 종의 신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한 종의 신분이 드디어 한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식민지기만 하더라도 농촌사회에서는, 특히 양반세력이 강한 반촌(班村)에서는, 종의 신분이 존속하였습니다. 제가 읽어본 1920년대 어느 양반가의 일기는 정월 초하루 집안의 종들이 찾아와 사랑에 앉은 주인을 향해 세배를 드리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날 주인은 일기에다 “비록 세상이 변하였지만, 주노(主奴) 간의 상하 의리는 변하지 않는구나”라고 감상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해가 바뀌면 주인집을 찾아 마당에서 개처럼 엎드리며 세배를 드려야 했던 종의 신분이 농지개혁으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농지를 분배받은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토지를 팔고 자기의 원신분을 모르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독립자영농으로 열심히 일하여 당대에 자식농사를 잘 지어 국민학교의 교사까지 시킨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야말로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빈농의 자식이라도 머리만 좋으면 대학에 다니고 판검사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앞에서 낭독해 드린 제헌헌법이 선포하고 있는 그대로 어떤 형태의 차별도 특수계급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은 건국의 이념이 농지개혁을 통해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제헌헌법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한 헌정사의 시련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선출을 둘러싸고 직선이냐 간선이냐가 주요 쟁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헌법의 기초 이념이 부정되어 본 적은 없습니다. 재판을 통하지 않고 인신을 구금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몇몇 특수한 정치적 사건을 제외한다면, 실제 있지도 않았습니다. 헌정사의 시련이 있었다고 해서 이러한 건국의 기초 이념까지 시련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아직도 그러한 중상모략성 건국사 비판이 가끔 들리곤 합니다만, 삼갈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건국의 기초 이념에서 근대국가였습니다. 그렇게 근대 문명국가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 1948년 8월 15일 그 날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저는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광복절’을 ‘건국기념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긴 하였습니다만, 우리 민족의 국제법 상의 지위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 날을 기념하여 ‘광복’이라 함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광복’이란 말은 1905년 대한제국이 망하기 이전에 무슨 광명한 빛이 있었다는 말인데, 사실 상놈이나 종놈의 신분의 사람들에게 무슨 빛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진정한 빛은 이들 하층 신분이 최종적으로 해방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찾아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정 기념해야 할 국민적 경축은 마땅히 대한민국의 건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미국사람들처럼 그 날이 되면 거리에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축제를 벌이는 ‘건국기념일’을 만들도록 합시다.

 


 

여기서 잠시 북한 땅에서 세워진 국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이와 관련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에 실린 키무라 미츠히코(木村光彦)의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 -북한 집산주의 경제정책의 연속성과 발전-」과 신형기의 「신인간-해방 직후 북한 문학이 그려낸 동원의 형상」이란 두 논문이 참으로 유익하게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1946년 북한 당국은 식민지기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근대적인 법과 제도와 사법기구를 철폐하였습니다. 그 위에 민족혁명과 사회주의의혁명이 요란한 구호로 외쳐졌습니다. 일제가 구축했던 전시경제체제는 조금도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다 더 강화되었습니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키무라 교수는 북한 민중에게 과연 ‘해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동원과 수탈을 강화하고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반 민중들에게는 ‘신인간’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지주, 친일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런 것들은 낡은 ‘구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철저히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획되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사회주의혁명이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만한 정신적 긴장의 새로운 인간상이 제시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항일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영웅, 개선장군 김일성이었습니다. 결국 일제의 천황을 대신한 것은 다름아닌 김일성이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그런대로 기다릴만 했습니다.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까짓 몇 년을 못 참겠습니까. 사회주의의 꿈을 좇아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수많은 지식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좀 자유롭게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주장했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다 숙청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북에서 소거된 1960년대 이후 북한의 수령체제는 그야말로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한 나머지 그 막다른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피를 흘리고 죽어 갔습니다.

 


 

작년인가요,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수용소의 노래』라는 책을 읽고 그 책의 저자 강철환 씨를 백안관으로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의 대통령도 읽은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들어 그 책을 사 보았습니다. 강철환 씨의 집안은 원래 평양에서 당 간부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무슨 영문인지 할아버지가 반동분자로 몰렸습니다. 그러자 당 보위부대의 다섯 요원이 집안에 들어와 지금부터 반동분자의 재산을 몰수한다고 무슨 쪽지를 낭독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구둣발로 마루의 어항을 차자 어항이 깨어지고 붕어가 마루에 뒹굴었습니다. 여인의 비명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온 집안의 값나가는 가재도구가 몰수되어 실려 나갔습니다.

 


 

이후 지금부터 함경도 요덕의 수용소로 간다는 선고가 낭독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온 가족이 수용소행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웬일인지 트턱에 함께 탄 어머니는 갑자기 내려졌습니다. 온 가족이 눈물로 어머니와 생이별하였습니다. 얼마 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한다는 서류를 보내왔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못 먹어 굶어 죽는 것은 참으로 큰 일입니다. 그것에만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는 국가의 폭력 앞에 어떠한 형태로도 자신을 방위할 수단을 갖지 못한 북한 동포의 노예적 처지에 진정 분노하시길 바랍니다.

 


 

남한에 비해 북한의 출발은 확실히 그럴듯했습니다. 혁명의 깃발이 높이 걸리고 노동자와 병사들의 힘찬 퍼레이드는 참으로 볼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엔 인간정신의 자유라는 근대 문명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부정되었습니다. 이윽고 북한은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그에 비해 남한의 건국은 그야말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가 만난 초대 정부의 한 관리는 참으로 혼란스런 시대였다고 회상하였습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조선인민공화국, 그런 나라를 탈출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실제 약 10만의 귀환동포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어수선함과 무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은 출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출발이 정당한 방향이었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룩해가는 성취는 볼만한 것이었습니다. “출발은 미약하나 나중은 장대하리라”는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정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를 기본 원리로 하는 건국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우리 건국사의 볼만한 점이었습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한국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는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8)

 

한반도 전체를 흡수하려는 소련의 주도면밀한 기획 

[ 이영훈 / 2006-06-27 11:57 ] 

대한민국의 건국사에서 언급을 생략할 수 없는 대목이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입니다. 이하 한국전쟁으로 통일해 부릅시다. 그 전쟁에서 남북한을 합하여 사상자 150만과 부상자 360만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상자의 수는 일제가 15년 전쟁을 치르면서 감당했던 수와 비슷합니다. 한국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던 전쟁인지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상자 5백만 이외에 수백 만의 이재민과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남한의 경우 산업시설의 4할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쟁 도중에 도처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마을내의 학살은 서로 죽이고 죽는 양변학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처참한 민족의 비극은 무엇 때문에 발생하였던가요.


우선 한 가지 명확히 전제해 둘 것은 한 나라를 세우는 정치과정은 일반적으로 특정의 정치이념이 다른 정치이념을 배제하는 폭력적인 과정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한 나라를 세우는 데 자유민주주의로 세울 것인가 공산주의로 세울 것인가를 두고 주민의 투표에 부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나라세우기의 예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최근에 동국대학교의 강모 교수가 해방 당시 남한 사람의 7할 이상이 사회주의를 선호했다고 하면서,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국가로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한국전쟁을 북한에 의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논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경솔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방 당시 전체 인구의 7-8할이 농민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소농(peasant)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농의 생활윤리는 집단적 생존과 평균주의적 공존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에 소농사회(peasant society)의 정치이념은 사회주의와 근친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소농사회는 자유와 인권 같은 문명요소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농민들이 보기에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 것이지요. 그런 농민들에게 건국의 방향을 결정짓는 권리를 위임할 수는 없지요. 농민들에게 한 표씩 나누어 준 다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한 쪽에 투표하라고 하면, 사회주의 편이 승리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나라를 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선진적이고 문명적이라고 믿는 이념을 나라의 기초 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모순되고 배치되는 다른 이념을 배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정치적 헤게모니를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였으며, 거꾸로 북한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배제함으로써 성립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하였습니다만, 남과 북의 건국사가 이러하였음은 남과 북에 상이한 이념을 갖는 점령군이 들어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점령군에 의해 선택된 협력자들에게 의해 나라가 세워졌다는 사실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북한에 살던 무려 200만의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무엇때문이었습니까. 공산주의라는 정치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따라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간 사람의 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제가 졸업한 대학교의 역사를 보니까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북한으로 올라간 교수들의 수가 적지 않더군요.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일생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결정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 운명적인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는 그 누구도 몰랐지요. 다만 역사의 신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그 결과를 내다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가운데 불완전한 지식의 인간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내려오고 또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건국의 정치과정은 특정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데올로기를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건국의 과정은 전쟁의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통하지 않고 한 나라가 세워지고 또 망하는 일을 인류의 역사에서 찾아 보기 힘듭니다. 미국도 조국 영국에 대해 반역의 전쟁을 벌인 결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미국이 전쟁을 통해 일본을 때려부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또 한 차례의 전쟁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은 우선 한반도 주민집단 간의 상이한 이념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내전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첫 날의 강의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면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과 정치체제를 방어한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이러한 국민적 기억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양보가 불가능합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는 건국사의 핵심을 이루는 그 전쟁에 대한 국민적 기억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 기억을 다른 식으로 바꾸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거나 쉽사리 용인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한 정치가는 국민들에 의해 소환되고 배제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믿는 이념을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만들어진 정당적 폭력체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저는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강모 교수의 주장에 결단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주장에 실정법상의 문제가 있다고 하여 검찰이 그 사람을 구속하고자 했을 때 법무부 장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법적 권한을 발동하여 막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한심한 경솔한 처사였습니다. 그 순간 대한민국 건국사의 기본 줄기가 잠시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내전만으로 벌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한국전쟁은 치열한 국제전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국제전이었으며, 남한과 북한은 그 대리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초 전쟁을 기획한 사람은 김일성이었으며, 그 계획을 승인한 사람은 스탈린과 모택동이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의『해방전후사의 재인식』2에 실린 김영호의「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 이론 -」이라는 논문이 참으로 좋은 참고가 되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이 논문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란 책을 구입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접근이 가능하게 된 모스코바의 구소련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의 의사를 표명한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코바회담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북침해 올 경우에 한해서 반격을 가할 수 있다고 하면서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선 김일성에게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해 있으며,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합의해서 그은 국제적 성격을 갖는 분할선임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했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는 것은 1950년 1월 30일의 일이었습니다. 10개월 사이에 몇 가지 중대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철수하였습니다. 연이어 10월에는 중국의 공산당 정부가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여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내쫓았습니다. 내전에 승리한 모택동은 1949년 12월 16일에 스탈린에게 중국과의 우호동맹을 제안합니다만, 스탈린은 망설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정부와 맺은 우호조약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연합군의 국제적 우호체제를 1944년의 얄타회담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얄타체제라 합니다. 소련은 그 얄타체제의 일환으로 미국과 협조하여 38선을 긋고 그 이북을 점령하였으며, 또한 일본의 북방 영토 사할린을 점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새롭게 부상한 국제 사회주의의 맹방인 중국 공산당정부와 우호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1월 22일의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얄타체제가 붕괴한 것이지요. 38선도 더 이상 우호적인 분할선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1월 17일, 김일성은 다시 남침 계획을 스탈린에 건의합니다. 드디어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38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을 승인하는 비밀 전보를 평양으로 날립니다. 결국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아시아에서 유리하게 전개된 전략적 상황을 적극 이용하여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한 공세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내로 흡수하려는 적극적인 공세정책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스탈린은 1950년 4월 극비리에 모스코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회담합니다. 그 자리에서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 대책으로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양해와 협조를 받도록 지시합니다. 이후 5월 13일 김일성은 북경의 모택동을 찾아 남침계획을 밝히고 협조를 구합니다. 모택동은 별도의 경로로 스탈린이 이미 그 계획을 승인하였음을 확인합니다. 연후에 만약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중국이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하지요. 곧바로 모택동은 만주 심양 부근에 9개 사단을 배치합니다. 아울러 소련과의 군사방위조약을 서둘러 체결합니다.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만약 미국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까지 진격하면 중국과 소련의 협공을 받아 미국은 커다란 실패를 맛볼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렇게 한국전쟁은 만주라는 광할한 지역을 덫으로 펼쳐 놓고 미국을 그곳으로 유인한 무시무시한 국제적 음모로서 기획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미국은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킬 방향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렇게 미국측에 의해서도 얄타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쪽마저 가지겠다는 스탈린의 군사적 공세를 묵과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한국전쟁은 냉전에서의 승기를 잡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양보할 수 없는 위신 전쟁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총체적 원인과 책임을 종래 미국에게 돌려온 이른바 수정주의 학설은 이렇게 전쟁의 발발과정을 소상하게 전하는 모스코바의 비밀문서가 공개됨에 따라 더 이상 발붙일 데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주도면밀하게 기획되고 추진된 국제전이었습니다. 전쟁의 양상이 형언하기 힘들만큼 참혹하게 전개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상 김영호 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끝으로 한 가지 더, 최근에 나온 키무라 미츠히코(木村光彦)의 연구성과, 『북조선의 군사공업화』라는 책에 근거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 관해 한 가지 더 추가하겠습니다. 키무라 교수는 김일성이 남침을 결심하게 된 것과 관련하여 북한에 우수한 군사공업시설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앞서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에서 잠시 지적하였습니다만,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군사공업으로서 제철ㆍ전기ㆍ화학 공업을 한반도의 북부지방에 대량으로 건설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소련군정을 거쳐 오롯이 북한정권에 인계되었습니다. 그런 생산시설과 더불어 일제가 비축한 원자재와 부품의 재고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해방 후의 북한경제는 남한에 비해 별 커다란 혼란이 없이 신속하게 공업생산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각종 원료자원과 동력을 북한지방에서 자급할 수 있는 공업시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약 800명에 달하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전쟁 전까지 억류된 것도 공업생산을 신속히 복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50년 전반까지 북한은 소총ㆍ기관총ㆍ박격포와 같은 소화기에서부터 총알ㆍ대포알ㆍ수류탄ㆍ각종 화약을 자체 생산하는 수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원래 일제가 평양에 건설한 종업원 6천 명의 평양병기제조소(平壤兵器製造所)란 시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해방 후 이 공장은 M정공(精工)이란 비밀암호명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전쟁 전에 김일성이 동 공장에 들려 병기와 폭탄 생산을 독려하였음이 이후 미군의 노획문서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북한의 사정에 비한다면 남한에서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일성이 볼 때 미군이 물러간 남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스탈린에게 남침의 계획을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던 힘은 일제가 만주와 중국을 쳐들어가기 위해 북한지방에 건설한 군사공업에 있었습니다. 일제가 건설한 군사공업이 후일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하는 군사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이로부터도 누가 군국주의 일제의 진정한 계승자인지를 쉽게 생각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이승만 대통령 바로 알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9)

 

실용주의-민족주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 

 

[ 이영훈 / 2006-06-28 12:01 ] 

대한민국을 세움에 있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로가 지대하였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간에는 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가득합니다. 첫날 강의에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송건호는 『해방전후사의 인식』1권에서 이승만을 친미 사대주의자이며 개인의 집권욕에 사로 잡힌 나머지 분단을 획책한 분단의 원흉으로 비난하였습니다. 그 밖에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분열가이며, 독선적 성격의 권위주의자이며, 술수에 능한 정치꾼이며, 친일파의 보호자이며, 부정부패의 주범이라는 온갖 비난이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들립니다.

 


 

이승만에 대한 온갖 비난은 거의 중상모략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음모와도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폄하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기획된 음모의 가장 중요한 고리가 바로 이승만 부정(否定)입니다. 문제의 중대성을 깨달은 다음, 저는 지난 며칠간 이승만에 관한 5-6종의 성향을 달리하는 연구서를 검토하였습니다. 제 나름의 관점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될 수 있는대로 공평하게 그의 일대기를 평가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직은 짧은 독서라 조심스럽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첫째, 이승만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에게 있어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나이 20세까지 과거시험을 위해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재필 선생을 통해 서구의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후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황제의 폐위 음모에 가담한 반역죄에 걸려 1899년 이래 근 6년간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됩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는 배재학당에서 들은 선교사의 설교를 기억해내곤 그의 영혼을 기독교에 의탁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정신세계에 관해 저는 많이 알지 못합니다만, 대강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몸으로 홀로 선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과 소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그의 구원을 대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 외롭게 선 자신의 책임으로 구원을 성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구원관에서 기독교의 정신세계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성리학의 전통 정신세계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인간은 부자(父子), 군신(君臣), 형제(兄弟), 장유(長幼), 붕우(朋友)와 같은 인간관계의 일환으로서만 그 존재론적 근거를 부여 받습니다. 그러한 우리 동양의 전통 정신세계에 비하자면 서구의 기독교는 고독이랄까 걱정이랄까 그러한 불안한 정신세계를 특질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개인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나 정치적 행위와 관련하여 자유주의로 자신을 표방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여기서는 더 이상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개종 이후 이승만의 일생은 종교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승만의 종교적 정신세계는 정치가로서 그를 자유민주주의의 비타협적인 실천가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서 공산주의와의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보기에조차 지나칠 정도로 고집불통의 반공주의자였습니다. 이후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취한 정치적 자세와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무엇보다 전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 이승만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정치의 실리적인 이해타협과 특히 국제정치의 냉혹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을 두 눈으로 목도한 사람입니다. 위정자의 정치적 선택이 어떻게 잘못되면, 한 사회가 정신적으로 어떻게 타락하면, 한 국가가 망하는지를 그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막아볼 요량에서였지요. 그 최초의 실패한 외교활동에서 이승만은 국제정치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이후 5년간 그는 하바드와 프린스턴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정치학박사를 취득합니다. 이후 그가 벌인 외교주의 독립운동은 그의 비판자들이 자주 지적해 왔듯이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럴듯한 성공을 거둔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패망한 나라의 무기력함을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는 어떠한 명분론에도 쉽게 현혹되지 않는 매우 철저한 현실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 정치가로 성숙하였습니다.

 


 

그 좋은 예를 저는 초대 헌법의 제정과정에서 봅니다. 유진오 등의 젊은 법학자들이 초안을 잡은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강하게 반발하며 대통령책임제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권력욕 때문일까요. 저는 6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정치의 일상적 행태를 보면서 아직도 내각책임제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1987년의 일인가요, 드디어 오랜 개발독재의 시대를 종식하는 대통령 선거가 행해질 때 어떠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YS와 DJ라는 두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을 먼저하겠다는 욕심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야당을 분열시키면서, 그렇게 출신 지역을 분열시키면서, 동시에 출마하지 않았습니까. 그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이었습니까.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많았고 또 2006년의 오늘날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권력을 코 앞에 두었다고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정치가들마저 분열하였다면, 그보다 40년 전 초창기 대한민국의 정치에 대화와 타협의 예술이라 할 내각책임제를 안정적으로 꾸려갈 능력이 부족했다고 보아도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이 내각책임제를 무산시킨 것은 초창기의 미약하고 혼란스런 국가는 강력한 리더쉽을 요구한다는 현실주의적 정치원리에 충실하였기 때문이지 그 자신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함에 주저하지 않는 정치 역량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는 인간들의 명예와 권력과 황금에 관한 헛된 욕망을 미끼로 자신의 정치세력을 조직하고 그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다음 이승만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그들을 버렸습니다. 이 같은 이승만의 정치 기술에 관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김일영의 「전시 정치의 재조명 -부산 정치파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란 논문이 흥미롭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일영 교수에 의하면 당대의 정치가로서 정치의 그러한 속성을 이승만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구사했던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는 확실히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권위주의 정치가 그의 개인적 치부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금욕적이었으며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정부에서 관료로 재직한 경력의 사람들은 그가 부족한 달러를 아끼기 위해 단돈 1달러의 지출도 직접 결재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정신 나간 외교관이 도오쿄 출장 중에 비싼 요리점에 들어갔다가 대노한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신생 후진국의 정치지도자로서 그런 미덕을 보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빈털터리로 죽었습니다.

 


 

셋째, 이승만은 시종일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미국에서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그는 끝내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에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음을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비난입니다. 그는 해방 이전부터 사사건건 미 국무성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의 하지 장관과 심하게 반목하였습니다. 미 군정이 좌우합작을 추진했기 때문이지요.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 노선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현실주의적 감각으로 볼 때 그것은 처음부터 공상이었습니다.

 


 

이승만의 실용주의와 민족주의가 그의 재임기간에 남긴 최대의 업적은 1956년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만, 미국은 한국과 같이 약소한 나라와 동맹을 체결함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미국을 군사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승만은 한반도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를 미국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외교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였으며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이 한갖 수사(修辭)가 아니었음을 미국은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거제도의 반공포로 수만 명을 기습적으로 석방하였기 때문이지요.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승만이 미국의 코를 세게 비튼 셈입니다. 그런 식의 무모한 외교를 당시 미국사람들은 “칼을 입에 물고 뜀을 뛰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드디어 미국은 한국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실용적인 계산에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합니다. 이승만은 대륙의 공산주의 국제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위할 가장 확실한 방호막을 한미동맹으로부터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미동맹을 체결하기까지 이승만이 펼친 능수능란한 외교에 관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권에 실린 차상철의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동맹」라는 논문이 좋은 참고서입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꼭 구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승만에 대한 온갖 모략성의 비난이 통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족특별행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중단시킨 사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설치되어 1949년 8월 말 공소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305명이 체포되고, 221명이 기소되었으며, 40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12명에게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당시의 재판기록을 읽어 보면 반미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처음부터 중대한 한계에 봉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등계 형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탄압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엔 재판이란 것이 일종의 도덕 훈계와 자기 반성의 형식을 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재산과 인명을 탈취하고 살상한 실정법 상의 범죄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검사가 범죄를 논증하고 변호인이 반론하는, 그렇게 법리를 치열하게 다투는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해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지적하였습니다만, 해방은 우리 힘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밀어내는 전쟁을 통해 해방을 성취했다면 친일파의 숙청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치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가 활약한 프랑스가 그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악질적인 친일파들은 전쟁 도중에 이미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처형을 면하기 위해 친일파들은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도망쳐야 했겠지요. 그렇지만 연합군이 일제를 항복시키는 통에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어진 해방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친일파를 숙청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과 도덕적 권위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어정쩡한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는 이미 좌파와 우파 정치세력 간에 가장 심각한 대립점의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좌우간의 대립에서만도 아니었습니다. 같은 우파끼리도 이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심각하였습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의 국일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귀국한 임시정부의 요인을 환영하는 자리가 한민당의 간부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장덕수가 “그럼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받아쳤습니다. 이후 더 소개하기 민망할 정도의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씁쓸한 일화는 당시부터 이른바 친일파의 숙청 문제가 나라세우기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앞둔 인간들을 얼마나 당혹하게 만들고 있었던가를 잘 들려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승만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초대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하자 일부 각료 중에 친일 경력의 소유자가 포함된 것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일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욕을 먹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에 공감합니다.

 


 

초대 정부의 경제부처에 근무했던 어느 나이 많으신 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정부의 관료들은 친미파, 친중파, 친일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친미파는 미국 출신으로서 소수의 고위직이었고, 친중파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로서 정치적 명분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실무 능력이 거의 결여된 사람들이었으며, 숫적으로 가장 많은 친일파는 일본에 유학을 하거나 국내 대학의 출신자들인데 정치적 입장이 가장 약하면서도 막상 실무 능력은 가장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정부의 실무 관료들을 동요시켰습니다. 제주도와 여수ㆍ순천에서는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이 전개 중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반민특위는 법적으로 주어진 1년의 기한으로 이미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대한제국이 패망하고 40년간이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다가 남의 나라 힘으로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로서는 역사의 업보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슴에 묻어둔 채 침묵함으로써 모두가 모두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 그러한 역사적 업보였습니다. 오랜 침묵 후에 역사의 성찰로서 후세에게 조용히 가르침으로 남길 그러한 업보였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초대 대통령의 고뇌에 가득찬 정치적 결단은 그러하였다고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승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고집불통이었다는 도덕적 비판에는 저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범한 정치적 실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라를 세운다는 몇 세기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지극히 중대한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한 역사적 인물을 개인적 성품이나 집권 이후의 몇 가지 정치적 과오로 덮어서는 공정한 평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추구한 정치적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그 나라를 반석에 놓기 위해 그가 추구한 국제정치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내외정에 걸친 그의 업적은 이후 장기적으로 어떠한 영향으로 남았는지 등등의 정치사적 시각에서 이승만은 재평가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시각에서 다시 볼 때 이승만은 그를 배제하고서는 대한민국의 출발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나라세우기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를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정중하게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람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까지 단독으로 그 얼굴이 전해지는 역사교과서에 왜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사진은 없습니까. 워낙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성의 비난이 중ㆍ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횡행하고 있어서 그 점을 새삼스레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영훈(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10) 결론: ‘민족주의사학’에서 ‘자유주의사학’으로

 

민족은 초역사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으로 유동하는 개념 

 

[ 이영훈 / 2006-06-30 11:15 ]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지난 20세기의 세계사를 가리켜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라고 하였습니다. 두 차례나 인류사에서 전례가 없는 대규모 세계전쟁을 치뤘습니다. 노동자의 1/3이 실업상태에 빠진 대공황이 자본주의 중심국가에서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인류의 영원한 이상으로서 사회주의 실험은 그러나 70년만에 실패로 판명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자본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 ‘영원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미국의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이라고까지 이야기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세기의 역사가 우리 민족만큼 극단적이었던 민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지옥과 천당을 오고가는 역사였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습니다. 세계지도에서 한 국가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토였던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영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곳의 주민집단은 남의 나라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언제 다시 독자의 국호를 회복할 수 있을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꿈과도 같은 소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60년간 대한민국은 비슷하게 독립한 원식민지 가운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론 세계11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1987년 이래 민주화시대가 열렸습니다. 보통선거에 의해 정권이 평화롭게 교체되는 고급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수령을 뇌수로, 당을 본체로, 인민을 지체로 하는, 그렇게 국가를 하나의 유기적 신체로 감각하는 기묘한 정치이론의 왕조체제가 거기서 생겨났습니다. 인민에게는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국제적으로 폐쇄된 경제는 70년대 이후 전면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여 90년대에 들어서는 근 3백만이 굶어 죽는 대규모 참극을 빚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이서 그렇습니까. 20세기의 역사에 관한 한국인들의 기억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 상스러운 조짐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건강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었던 과거라도 “아, 그 시절에는 정말 지독했어”라며 웃습니다. 반면 실패한 사람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아, 그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어.”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 찹니다. 저는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과거사에 대해 원망으로 가득 찬 분열적인 기억을 가져서는 건강한 미래를 꾸려가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문명의 역사를 보면 모든 성공은 그를 부정하는 실패의 암적 요소를 동반합니다. 문명을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사상, 문예 등 여러 수준 간의 부조화 때문입니다. 길게 번성한 문명은 이들 여러 수준 간의 모순과 긴장 관계를 슬기롭게 조화하는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종합과 성찰의 지성이지요. 그리고 그런 지성으로 훈련된 정치적 리더쉽이지요.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그런 지성이 부족하고 그런 리더쉽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근본적인 수준과 관련해서 솔직히 말하면, 21세기초 오늘날 한국의 지성도 빈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준에서 역사의 진정한 발전은 참으로 더딘 걸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지난 60년간의 건국사에서 경제와 정치는 볼만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지성의 수준은 여전히 초라합니다. 보기에 따라선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되살아나는 부문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성찰하고 교육할 능력이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사에 대한 기억이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러한 기억의 분열 증세가 신체의 외과적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 목하 진행 중인 ‘과거사 청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권이 들어선 이후 무려 13개의 특별법이 제정된 위에 연간 대략 15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멀리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비를 가리겠다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제가 이 작업에 매우 비판적인 이유는 청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개인사를 둘러싸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작업 그 자체가 장차 한국의 현대 문명을 실패로 내몰지 모를 불길한 조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공은 그 내부에 실패의 요인을 배태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요인으로서 불길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0세기의 역사에 아직도 시비를 가릴 문제가 남아 있다는 분열적인 기억에는, 그 한 증세로서 대한민국은 애시당초 잘못 태어났다는 건국사의 부정에는, 역사의 단위를 민족으로 설정하는 ‘민족주의 사학’이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민족을 기초 단위로 설정하는 한, 나라가 망하고 또 남북으로 두 동강 난 역사를 두고 제대로 된 역사라고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통일이 되어야 역사의 정의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엄한 신탁 앞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적 위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만간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설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의 이야기가 지나치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들과 딸이 배우고 있는 중ㆍ고등학교의 교과서가 여러분의 현대사와 통일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행간을 뒤지면서 세밀히 읽어 보십시오. 저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은 그렇게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민족은 20세기가 되어서야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 친근한 개념으로 다가온 것에 불과합니다. 또 민족은 앞으로 새롭게 전개될 역사와 더불어 신속히 다른 형태와 개념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그만큼 민족은 역사적으로 유동하는 개념입니다. 저는 지난 강의에서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민족이 분단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생겨난 국가의 역사를 잘못이라 할 어떠한 근거와 타당성도 없습니다. 분단된 민족이 하나로 통합되면 더 나은 국가의 역사가 펼쳐지리라는 기대 또한 어떠한 근거와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민족을 대신하는 역사의 기초 단위는 무엇입니까. 인류의 긴 역사에서 근대 문명은 이윽고 우리 인간의 본성을 ‘분별력 있는 이기심’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류의 문명사는 그러한 본성의 인간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고 분업하면서 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 보다 유기적으로 잘 통합된 질서를 만들어온 진화의 역사입니다. 가족, 친족, 마을, 협동조합, 시장, 계급, 이익단체, 학교, 교회, 관료제, 국가, 민족 등등이 그러한 문명적 질서체이지요. 바로 그러한 문명의 역사로 20세기의 한국사를 재구성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민족을 대신할 역사의 기초단위는 ‘분별력 있는 이기심’의 개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인간의 본성은 구체적으로 자유, 인권, 협동, 배려의 미덕입니다. 바로 그러한 본성과 미덕의 인간들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꾸려온 신뢰와 반목, 협동과 대립의 역사를 가족에서 국가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에 걸쳐 있었던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20세기의 역사입니다.


저는 그러한 역사학을 ‘자유주의사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컨대 20세기 한국사의 이해를 ‘민족주의사학에서 자유주의사학으로 바꾸자’ 그것이 제 이번 강의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번에 친구들과 함께 편집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도 제 나름으로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번 강의는 거기에 실린 훌륭한 논문들을 제 나름의 순서로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논문과 논문 사이의 공백은 제 나름의 논리와 실증으로 메꾸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저의 어줍잖은 이야기를 여기서 새삼스레 요약할 필요는 없겠지요.


한 가지, 미진한 감이 있어 부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국가의 문제입니다. ‘자유주의사학’에 있어서 국가는 초월적이거나 신성한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는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과 그들의 단체로부터 도출된 2차적인 존재입니다. 국가란 무엇입니까. 인간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기능입니다. 자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 그런 국가는 필요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을 영예롭게 대접하지 못하는 국가, 그런 국가는 없어져도 좋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국가가 없어질 가망이 없어 보이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면 더 좋은 나라로 찾아 가면 됩니다. 60년대 이후 대략 2백만명의 한국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조금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제 주변엔 미국 시민권자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점점 그러한 탈국가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국가는 소중한 것입니다. 국가의 역사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비판은 예의를 갖춘 다음 최소한의 수준에서 신중하게 제기해야 합니다. 선진국일수록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여러 가지 지표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애국심의 강도를 들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후진국으로 갈수록 국가에 대한 비판이 거칩니다. 망할 놈의 국가라고 하지요. 반면에 선진국의 국민은 애국하는 시민이지요.


국가가 왜 소중합니까. 국민을 안전하고 편하게 살게 하는 정치적 기능으로 국가는 본질적으로 정당적 폭력체입니다. 국가를 두고 도덕이니 정신이니 하지 마십시오. 국가는 본질적으로 마피아와 같은 폭력체입니다. 다만 같은 폭력체이지만 너만이 폭력을 행사하라고 모든 사람이 합의했다는 점에서 진짜 마피아와 다를 뿐입니다. 국가가 없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제각기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것을 두고 야만의 상태라고 합니다. 중세의 국가는 인간의 사회적 분수에 차별을 두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쪽의 불완전한 야만의 국가였습니다.


근대 국가는 정당방위가 아닌 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적으로 행사하는 폭력에 대해 그것이 어떠한 명분의 것이든 용인하지 않습니다. 신분의 형태로 사회에 가득했던 폭력을 깡그리 공권력으로 회수한 것이 바로 근대국가입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신분이 없어지고 사민평등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앞서 ‘건국의 문명사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헌법을 읽어드렸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안전하고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국가만이 정의로운 폭력을 행사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 정도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회과학의 원론이 아닌가’라고 하는 분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학자도 아닌 제가 배워서 알고 있는 원론을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 주변에 국가를 함부로 허물거나 새로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관념적 실체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제기되고 또 사회적으로도 큰 저항을 받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이제 눈치 챘을 것입니다. 국가를 연합하자니 연방제를 하자니 등등의 값싼 통일 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국가란 한 사회를 문명적으로 통합하는 정당적 폭력입니다. 국가가 그러할진대 문명의 기초가 상이한 두 국가를 합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또 인류의 역사에서 전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6년 전에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남북한의 통일방안이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낮은 수준의 연방제를 하거나 국가연합을 하자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의 두 국가를 아무리 느슨한 형태라 하지만 하나의 국가로 묶는 일은 귀신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이한 체제의 남과 북을 하나의 국가로 묶겠다는 발상은 ‘우리민족끼리’라는 깃발이 올려지면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생각과 이해관계를 접고 그 깃발 아래로 모일 것으로 착각하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펼쳐진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민족은 그렇게 초월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민족이 그렇게 마성(魔性)적인 통합력으로서 초월적인 실체라면 지난 60년간의 분단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이 지구상에서 피가 직접 통하는 부자형제의 상봉은커녕 통신조차 가로막는 저 기막힌 폐쇄적 정치체제를 어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새로운 ‘자유주의사학’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은 문명사에 기초한 진화론적인 통일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하루빨리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개방적인 시장경제체제로 변해야지요. 사유재산제도와 더불어 인권을 존중하는 그러한 문명의 사회로 바뀌어야지요. 그렇게 한참 바뀐 다음, 지금 한국이 미국과 FTA를 추진하고 있듯이, 남과 북이 시장을 통합하면, 그렇게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문명사에 기초한 진화론적 통일방안 이외에 어떠한 통일방안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해방전후사에 관한 저의 ‘자유주의사학’의 마지막 결론으로 강조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애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영훈 (서울대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그동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