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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 이영훈 (1)

이강기 2015. 8. 29. 11:28

 

대한민국은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인식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1)


해방전후사의 인식 비판

[ 이영훈 / 2006-06-19 12:59 ]
"이 글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공동편집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EBS 라디오 기획특강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BS 라디오는 6월 19일부터 6일간 매일 12시 20분~13시까지, 40분간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을 방송할 예정입니다.

뉴라이트닷컴은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보다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 따라 이영훈 교수의 특강내용을 정리하여 매일 1주제씩 12일에 걸쳐 게재하기로 하였습니다. 특히, 시간 제한으로 방송되지 못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만큼 보다 폭넓은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역사인식이 널리 펴져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선 지주계급 등의 친일파들이 나라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반민족적인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주도해서 나라를 세우는 통에 민족정기가 흐려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부정부패 등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들의 역사적 근원을 따져보면 1949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강압적으로 해체하여 친일파 청산작업을 중단시킨 데 그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소수의 친일파들이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나라를 세우는 통에 민족이 분단되고 말았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 단정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민족분단의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다고 합니다. 북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통일의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것을 보고 마지못해 다음달 48년 9월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민족적이며 미국의 지배하에서 사실상 식민지와 다를 바 없는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전후 역사적 맥락을 보면 그것은 민족해방전쟁이자 민족통일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결코 생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년인가요, 동국대학교의 강모 교수가 그러한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학문의 자유에 기초해서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강 교수 한 사람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6.25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강모 교수의 이야기가 현행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검찰이 판단하여 그를 구속코자 하였을 때 현 법무부 장관은 건국 이후 최초로 자기에 부여된 법적 권리를 행사하여 이를 무산시켰습니다. 저는 법리가 어찌되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강모 교수가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얼토당토 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현 집권세력 가운데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6일간에 걸친 EBS 방송의 기획특강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이러한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사 이해가 참으로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려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논리적으로도 또 실증적으로 맞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저의 생각을 순차적으로 차근히 이야기해 가고 싶습니다.

우선 이런 이야기를 세간에 널리 퍼뜨리는 데 큰 공을 세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저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습니다. 바로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1989, 이하 『인식』)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이 책은 1980-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오늘날 30-40대의 한국 사람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의 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며, 여섯 권 모두 합해서 근 100만 권이 팔려 나갔다고 하는군요.

이 여섯 책에는 책마다 총론이 있습니다. 총론은 그 책의 내용과 성격을 집약해서 반영하지요. 그 총론을 중심으로 여섯 책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제1책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 주체에 대한 도덕적인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이 거칠고 감정적인 데가 많습니다. 언론인 출신 송건호가 쓴 총론을 보면, “해방 후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이 발생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은 신생정부임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참신한 기풍을 볼 수 없어 마치 노쇠국과 같았다”고 극렬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대한 이러한 일종의 도덕심판을 전제한 위에 『인식』이 나름의 논리체계를 세우기 시작하는 것은 제2권부터입니다. 제2권의 총론은 강만길 교수가 썼는데, 그의 유명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거기서 소개됩니다. 요컨대 식민지 시기에는 민족해방이 지상과제였듯이 해방 후의 분단시대에는 민족통일이 지상과제이다. 민족통일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완전한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성립하였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에 지상과제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정치는 민족정치, 경제는 민족경제, 사회는 민족사회, 문학은 민족문학, 예술은 민족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강 교수의 유명한 ‘분대시대의 역사인식’의 요지입니다.

이를 위해서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김구 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38선에 선 중간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자기가 속해 있는 남과 북의 체제에 매몰되지 말고 그로부터 나와 다시 휴전선에 선 중간자의 입장에서, 해방 후에 남과 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통해 분단이 고착되어 가는 과정을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2권이 역사학이라면 제3권에서는 사회경제의 분석과 그에 기초한 혁명이론이 제시됩니다. 제3권의 총론자는 박현채 선생입니다. 박 선생에 의하면 식민지기와 미 군정기는 식민지반봉건사회입니다. 인류사적으로 크게 보면 자본주의사회이지만,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지주제를 중심으로 반봉건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어 사회경제적 변혁이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적 토지개혁을 주요 과제로 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해방 정국 당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곧바로 수행할 여건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사회주의 정당이 대변하여 부르주아적인 토지개혁을 수행하고, 그렇게 농민의 지지를 확보한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하였습니다. 바로 2단계 혁명론입니다.

이러한 혁명론을 성공적으로 실천한 것이 다른 아닌 중국공산당에 의한 신민주주의혁명이지요. 모택동이 그 혁명을 사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지도하였지요. 그러한 모택동의 사상과 혁명이론, 곧 마오이즘을 해방 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수용하였습니다. 박현채 선생도 그러한 사상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혁명이론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1970년대까지 그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1980년대 중반부터 사상의 자유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마오이즘에 기초한 신민주주의 혁명이론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던 것이 바로 『인식』 제3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4권의 최장집과 정해구 교수가 함께 쓴 총론은 『인식』전체의 완성을 알리는, 『인식』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두 교수는 앞의 세 권까지의 도덕심판과 역사인식과 혁명이론을 전제한 위에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한 미국 연구자의 이른바 수정주의라 불리는 연구 성과를 전면 수용하면서 식민지기→해방→분단→한국전쟁에 이르는 전 역사과정을 총괄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야말로 스케일이 큰 논문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바는 북한정권의 성격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은 혁명적인 소련군의 지원 하에 혁명세력과 혁명적인 민중이 연합한 정권으로서 미제와 그와 결탁한 반민족ㆍ반혁명세력의 지배 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킬 ‘민주기지’였다는 것입니다. 한국전쟁도 남북한 정권의 그러한 성격 차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남북한 정권의 서로 다른 성격은 드디어 대규모 군사충돌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남한의 해방과 혁명은 좌절되고 분단 체체가 고착되었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대한민국 내부에서, 그것도 제도권에 속한 대학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된 아슬아슬한 대목이 제4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제5권의 총론은 김남식이란 분이 썼습니다. 여기서는 한층 더 대담무쌍하게 북한의 주체사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혁명국가입니다. 그 국가의 역사와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김남식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6권의 총론은 박명림 교수가 썼는데, 제4권의 총론과 대동소이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다섯 권까지의 책이 잘 팔리니까 한 권 더 만들어 본 정도의 의미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상과 같이 전체 여섯 권으로 펼쳐진 『인식』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몇 가지 명제는 논리적으로 상향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빠지면 다음의 것이 설명되지 않은 긴밀한 상호 의존관계에서 추상적인 역사이론으로부터 구체적인 사회변혁이론으로 발전해 가는 관계에 있습니다.

① 식민지 시기부터 식민지반봉건사회라는 사회경제의 성격에 규정되어 사회주의를 지향한 반제반봉건혁명이 전개되어 왔다.

② 해방 이후 반혁명적인 미국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미군정과 소수 반민족세력이 결탁하여 반제반봉건혁명을 좌절시켰으며, 그 결과 반식민지적 종속과 반봉건적 지주제의 착취가 사회경제의 주요 모순으로 온존하게 되었다.

③ 반면에 혁명적인 소련군이 들어온 북한에서는 반제반봉건혁명이 성공하였다.

④ 한국전쟁은 민주기지인 북한이 미국의 식민지적 지배 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성격을 지닌다.

⑤ 결국 식민지 시기에서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진 해방전후사는 미국 제국주의와 혁명적인 한국 민중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상이 『인식』의 핵심 명제라 할 수 있습니다. (특강 2에서 계속)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저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민족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자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2)

 

민족은 역사적 현상일 뿐 

[ 이영훈 / 2006-06-20 11:51 ]  조회 : 762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주장이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 내부에서, 그것도 명망있는 학자들에게서, 심지어는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어디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저는 알지 못합니다.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의식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공교육을 통해 심어줌으로써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나라를 보위할 국민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건국사를 날조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전통시대의 왕조처럼 용비어천가를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또 국가를 무조건 신성시하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런 국가주의적 발상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국가의 역사에 자긍심을 가지는 건강한 국민을 교육하는 일은 국가가 국가로 존립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의무와 같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는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우리 한국인들이 주장하는 데는 무언가 특수한 정신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 정신자적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에 관해 저는 평소 두어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왕조 시대부터의 사상적 전통입니다. 거기서는 정치와 국가는 어디까지나 도덕정치와 도덕국가로 존재하였습니다. 도덕은 충(忠)과 효(孝)와 제(悌)로 맺어지는 인륜을 말합니다. 인륜의 완성형태로서 정치가 이야기되었고 국가는 그 인륜의 제도화된 도덕을 말합니다. 이에 국가는 항상 도덕적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나라가 잘못 세워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의 발전을 위한 충정에서 하는 이야기라는 기묘한 논리가 거기서 성립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과거에 금방 합격한 새파란 신진관료가 원로대신을, 심지어는 국왕에 대해서조차 그 도덕적 잘못을 지적하면서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 그 선비는 참 훌륭한 선비라는 평판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지적 전통이 있어서 나라가 늘 도덕논쟁으로 시끄러웠던 것이 조선왕조 500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사회를 통합하는 공적 이념과 그것을 실현하는 정당적 폭력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근대적 이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의 이념과 사의 도덕이 전면적으로 혼돈을 일으키고 있지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나라세우기의 기초작업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무슨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을 동원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던가라는 정치학이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승만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사람이었다. 이러한 인신공격성의 도덕적 비난이 이승만 비판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소지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도덕적 흠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도 너무나 많은 흠결의 인격이었습니다. 한때 그는 동지들을 배신하고 혁명의 적으로부터 도움과 보호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는 음란하였으며, 결국 매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적 도덕으로 레닌을 비판해서는 과녁이 정확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다른 한 가지는 역시 성리학으로부터 물려 받은 도덕적이며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민족이라는 근본주의적 범주가 그것입니다. 민족통일이 되기 전에는 역사는 미완이다. 통일을 이루어야 근대 국민국가는 완성된다. 민족의 분단을 초래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등등입니다.


이러한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보통의 한국사람들에게 있어서, 특히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집권당에 속한 정치가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이란 것이 이념적으로 국가보다 상위 수준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완강히 부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보통의 한국사람과 정치가들에게 있어서 민족이 역사와 현실을 판단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 기준을 이루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저도 젊은 시절에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대학시절에 그 노래를 부르면서 누가 시키지도 아니하였는데도 통일의 전사가 되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경험은 보통의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은 경험하였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저는 감히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열정과 감성 체계로서의 민족은, 그것이 집단적이며 맹목적인 만큼,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힘이긴 합니다만, 또한 경우에 따라선 대한민국의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긴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으로 대한민국을 세계의 선진사회와 선진국가로 발전시키기는 역부족이며,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 막는 역사의 족쇄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우리끼리’라는 최근의 정치적 슬로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맹목적인 통일 논의가 통일을 이룩해감에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할 자유와 인권과 같은 문명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도외시함으로써 통일 논의 자체가 대한민국의 근본 이념과 선진 지향을 부정하는 방향의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초래할 위험성마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저는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역사인식의 밑바탕에는 민족을 지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일종의 근본주의적인 잘못된 사고방식이 가로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그 점에서 대해서만 좀더 자세히 말하고자 합니다.


민족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동일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어느 인간집단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라고 집단기억하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오랜 옛날부터 이웃 민족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으로 공동의 운명이었다는 그러한 의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그에 상응하는 상징과 신화를 발달시킵니다. 이들 상징과 신화는 보통 민족의 성립과 관련된 건국신화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우리 한민족은 단군 할아버지의 같은 자손이다. 바로 그러한 신화를 말합니다.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정치적 공동체 의식을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5천년이다. 5천년 전부터 우리 한국인은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서 운명의 공동체로서 존속해왔다. 이러한 이야기가 공적인 국가의례에서조차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등장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5천년이란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민족이란 것이 그러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 과연 민족이란 공동체 의식이 있었을까요. 저는 하나의 왕조라는 정치체제로 통합된 주민집단이, 피부색도 언어도 같은 주민집단이 공유했던 어떤 공동체 의식과도 같은 집단감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민족감정이라고 곧바로 이야기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저는 이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이영훈,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백두산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백두산에 올라 그 청명한 천지를 내려다 보면서 바로 여기가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이라는 느낌에서 커다란 흥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함이 보통입니다. 저도 꽤나 일찍, 1990년에 처음 백두산에 올랐는데요, 그때 그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같이 간 동료 교수들 가운데는 그러한 흥분을 한시로 지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곳에 강림하시었으니 여기서 우리 민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 기상을 이어 받아 만주고토를 수복하자.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뒤지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778년 서명응이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고급관료가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곳은 중국 땅도 아니고 조선 땅도 아닌 아득한 변방으로서 천년에 한두 사람이 올까말까 한 곳인데, 마침 내가 올라와 보니 이 산 위에 있는 큰 연못의 이름이 없구나, 그래서 내가 이름을 짓겠다고 하면서 太一澤이라고 하였습니다. 태극이 발원하여 삼라만상이 되었으니 삼라만상은 원래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명응이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는 백두산 천지의 청명하게 뻥 둘린 모습을 보고 태극을 연상해 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서 오늘날 백두산 천지에 올라 여기가 단군 할아버지가 강림한 곳이라고 울먹이는 한국사람의 모습을 원형이나마 조금이라도 찾아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18세기의 다른 어떤 사람은 백두산에 올라가서 "백두산이야말로 천하 으뜸인 중국 곤륜산의 적장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산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조선은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箕子) 성인이 세운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들 조선의 관료와 선비들은 우리 한국사가 기자로부터 시작한다는 기자정통설을 신봉하였습니다. 단군이 국조라는 의식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단군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만, 뒤편으로 제쳐져 있었고, 그 대신 기자가 전면에 나서 있었던 것입니다.


단군이 우리 한국인의 국조라는 의식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성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민족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또 단기라는 연호를 쓰고 개천절이란 국경일이 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국이 국조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민족이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민족이란 말은 1904년 노일전쟁 이후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민족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민족이란 말은 최남선 선생이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씀으로써 널리 대중화하기 시작하였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식민지기 내내 지식인 계층으로 그 보급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식민지기에 전통 유학자들이 쓴 생활일기를 몇 권 읽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거기엔 끝내 민족이란 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조선사람’(我朝鮮人), 이런 정도의 표현이 고작이었습니다.


조선왕조의 시대에 동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의 쓰임새도 자세히 따져 보면 민족과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으로부터 모두가 같은 임금의 신하라는 정치도덕적인 뜻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서는 우리 동양인은 모두 공자님의 가르침을 받은 하나의 동포라는 말에서와 같이 일종의 넓은 문화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겨레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것은 ‘겨레붙이’라고도 하여 피가 통하는 일가친척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요컨대 민족이라는 정치적 공동체 의식은 20세기에 들어 일제하 식민지기에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을 받으면서 소멸의 위기에 처한 조선사람들이 자신들을 하나의 정치적 운명공동체로 발견하고 새롭게 의식하면서 그런 말과 의식이 급속히 보급되어 갔던 것입니다.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신성시하는 것은 제가 아는 범위에서 말하면 1927년 최남선 선생이 지은 『백두산근참기』에서가 처음입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남북한의 두 국가가 민족의 상징으로서 백두산을 공통으로 강조하게 됩니다. 특히 북한에서 그러하였습니다. 백두산 밀영에서 빨치산들의 영웅적인 독립투쟁이 벌어졌다. 거기서 김정일 동지가 태어났다. 그날 밤 백두산 천지에 광명성의 별이 솟았다. 등등의 동화와 같은 신화가 만들어져 자라나는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주입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그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습니다만, 백두산을 신화화하는 경향이 줄곧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생일 땐 교과서 뒤편에 태극기와 함께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자”는 구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백두산은 어린 저에게 영봉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국사교과서도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남북한의 두 국가가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지어내기 위해 백두산을 활용한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조작입니다. 그것은 결국 20세기에 들어와 한반도의 주민집단이 제국주의의 억압하에서 자신들을 하나의 정치적 운명공동체로 의식하게 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입니다. 19세기까지 조선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정치적 공동체 의식이 없었습니다. 무언가 있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오늘날과 다른 형태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기자정통설이 그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민족이란 의식은 앞으로 21세기 중반쯤의 한국인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어색한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점점 국제화, 세계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의 인구증가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일정한 규모의 국민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이 불가피한 실정입니다. 벌써 농촌에 가면 신생아의 3할은 혼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한국들은 점점 피부색이 다양해지는 다인종사회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 통합시키기 위해는 한 조상의 자손이다, 피가 같다는 등의 인종적 관념에 기초한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어떤 보편적 문명 가치에 기초한 이념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민족주의는 점점 그 위력을 상실해 갈 것입니다. 그 대신 자유와 인권과 협동과 배려의 미덕으로 잘 훈련된 선진적 문명인들이 건설해가는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입니다. 이처럼 민족이란 것은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며, 유동적이며 경과적인 것입니다. 민족은 국가보다 상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국가는 어느 주민 집단을 하나의 문명적 질서로 통합시킴에 결할 수 없는, 그것이 결할 경우는 야만의 상태가 되고마는, 문명의 최고 수준이자 보장입니다.


민족이 분단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생겨난 국가를 잘못 생겨난 국가라고 저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실증적으로 분단의 과정이 어떠했던가와 별도로, 그 역시 중요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한 민족에 두 국가가 생겼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논리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민족과 국가와 통일에 관한 제 생각을 논리적인 기초에서부터 명확히 하기 위해 이 점을 강조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컨대 21세기의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을 선진 문명사회로서 건설해가기 위해서는 좁고 어두운 민족주의라는 집단감정의 함정에서 탈출하여 자유와 인권과 협동과 배려와 같은 인류 보편의 문명 요소에 입각하여 우리의 지난 역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같은 문명 요소를 정신의 본질로 하는 개개 인간을 역사의 단위 주체로 놓고 그들 문명 인간이 상호 협동하고 배려하면서 건설해가는 가족, 단체, 사회, 그리고 국가의 역사로서 한국의 해방전후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이룩해 가야 할 민족통일이란 역사적 대과제도 이러한 인류 보편의 문명 요소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앞으로 이러한 시각에서 20세기 한국사를, 특히 1930-50년대의 해방전후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합니다. (특강 3에서 계속)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저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수탈론 vs 식민지근대화론

 

<해방전후사 재인식> 특강 (3)

 

일본의 조선 동화정책이 낳은 조선 근대화 
[ 이영훈 / 2006-06-21 12:08 ] 

자유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인식과 민족주의에 기초한 낡은 역사인식은 1905-1945년간 일제하의 식민지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부터 크게 갈리고 있습니다. 현재 국사학계에서 주류를 점하고 있는 민족주의 역사인식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조선의 토지와 식량과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부정하고 우리 민족의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왜곡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식민지수탈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역사를 계급적인 관점에서 착취관계로 인식하는 맑스주의적 역사학과 경제학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령 한국에서 근대적인 역사학과 경제학은 1930년대부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초창기의 역사학자와 경제학자를 보면 대개 유물사관(唯物史觀)에 기초한 맑스주의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탈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실시함에 있어서 농민들로 하여금 소유 농지를 신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농민들 가운데 신고 기한을 놓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물경 전국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많은 토지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으며, 이 토지는 일본에서 온 이민농민이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회사에 헐값으로 넘겨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간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또 국사 교과서에는 일제가 생산된 쌀의 절반을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일본 경찰과 헌병이 총칼을 들이대고 절반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직접 쓰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문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일제는 조선인의 노동력을 수탈하였다고 합니다. 1940년대의 전시기(戰時期)에 약 650만 명의 조선인을 전선으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강제 연행하였으며, 끌고 가서는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와 같이 부려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조선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는데, 그 수가 수십 만에 이른다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깜짝 놀랄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교과서를 쓴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 교과서를 검토해 보면 1960년대까지는 이러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특히 1974년 이후 국정교과서 체제로 넘어가면서, 위와 같이 난폭한 서술들이 교과서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궁금하신 분은 저의 이전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이영훈,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시대정신』28, 2005)


앞서 소개하였듯이 수탈론은 193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수탈은 일종의 이론적인 것으로서 맑스주의적 수탈이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의 수탈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폭력적으로 뺏아가는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약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벌거벗은 약탈로서 수탈론이 1970년대부터 교과서에 등장한 것은 한국의 역사학계가 아직 일제하의 식민지기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능력과 자세가 부족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토지와 쌀을 빼앗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이 경제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어서 굳이 증명할 수고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집니다. 인구는 줄게 되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떠하였습니까. 정반대였습니다. 1910년의 조선인 인구는 대략 1600-1700만 정도였습니다. 1940년에는 2400만이었습니다. 일본과 만주로 나간 사람을 합하면 2600만 정도였습니다. 불과 30년의 짧은 기간에 50% 이상 인구가 증대하였는데, 이러한 인구증가 현상은 경제가 찌그러지고 있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밖에 경제사 연구자들의 정밀한 통계적 추정에 의하면, 식민지기 1910-1940년간에 걸쳐 한반도의 총소득은 연평균 3.7%의 속도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정도는 당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20세기 전반 세계자본주의는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선진국이라 해도 대개 2% 전후의 낮은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일본만이 유독 3-4%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는데, 우리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던 연고로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저의 이야기에 불쾌감과 짜증을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는데 전라도는 연평균 4% 성장하고 경상도는 연평균 -4%로 후퇴하는 일이 있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으로서 일제의 영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영토가 된 것을 두고 역사학자들이 식민지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일본이 경제성장한 것과 꼭 같은 정도로 한반도에서도 경제성장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날랐던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 하였습니다. 어쨌든 일본의 쌀값이 조선보다 높아서 시장원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된 것이지요. 그 결과 수출한 농민이나 지주에게는 수출소득이 발생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쌀을 처분했을 때보다 더 많은 소득이 발생하지요. 그러면 경제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수출대금으로 일본에서 면제품과 같은 공산품도 수입하고, 만주로부터 모자라는 식량도 사들이고, 은행과 회사에 투자도 하고, 공장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일제가 한반도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목적이나 방식부터 올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 목적은 이른바 ‘영구병합’이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통치사료를 보면 ‘영구병합’이란 말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옵니다.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한 20, 30년간 살다가 돌아갈려고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구히 살려고 왔습니다. 이 점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구병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무엇보다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같은 것으로 동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목적에서 일제는 자기 나라의 법과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그래야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넘어와서 자기 나라처럼 불편없이 편안하게 살 것 아닙니까.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그 문화와 정신을 빼앗아 일본인으로 만들어야 영구히 병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하기 위해 조선의 문화와 정신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지요. 새로운 문화와 정신을 도입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럴 목적에서 일제는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조선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2년에 발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입니다. 이때 시행된 일본의 민법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법을 놓고 보면 당초의 표현이 순서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근대적인 민법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해 민법학자들은 ‘사적(私的) 자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은 국가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재산권제도와 관련하여 첫째 ‘소유권 절대의 원칙’으로 나타납니다.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불가침이며, 국가도 이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약자유의 원칙’입니다. 이는 재산권을 양도하거나 처분함에 있어서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계약만이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향유하고 있는 재산권제도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통합하는 정치원리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자신이 자유민주주의를 아직 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정치원리를 천황제의 형태로 발달시켰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천황제 군국주의가 해체된 1945년 이후부터입니다. 그렇지만 일제는 천황제라는 정치체제 하에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원리로서 근대적인 민법을 서유럽에서 도입하여 자기식으로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크게 보아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을 근대사회라고 부르지요. 그 서유럽 기원의 근대의 요소가 식민지기에 조선에 이식된 것입니다. 바로 식민지 조선을 영구히 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고 병합하고 나아가 동화시킬 목적에서였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의 동화정책에 대해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민법과 상법이 이식된 식민지 조선은 결국 일본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었습니다. 1920년까지 모든 관세가 폐지되었습니다. 자본과 상품이 오고가는 데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그에 따라 두 지역간의 무역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무역이 발달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는 수출 무역을 주도로 고도성장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역이 늘면 경제는 성장을 하게 됩니다.


경제란 가계와 기업 간의 재화와 노동력과 소득의 흐름이지요. 여기다 수출과 수입이 더해지면 순환의 규모가 커지게 되지요.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일인당 소득수준도 증가합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자본이 들어와서 조선의 농토를 개간하고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인이 주체가 된 경제성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꾸 자본이 들어와서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조선의 토지와 지하자원과 공업시설은 점점 일본인의 소유가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 경제학적으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여 한반도의 경제적 자원을 일본인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영구병합과 동화정책에 따른 실질적인 수탈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만 사기와 폭력으로 인민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고대의 약탈국가나 중세의 정복국가들이 하는 짓입니다. 일제는 그러한 야만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근대사회였고 근대국가였습니다. 그들은 한반도를 영구히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였으며, 그 목적으로 투자를 하였던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식민지적 수탈의 결과로 조선의 사회와 경제도 근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이 공장을 짓고 농장을 세우면 조선인들이 노동자로 또 소작농으로 고용됩니다. 그에 따라 조선인의 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가운데서도 일본인을 본받아서 공장을 짓고 기업가로 성장하는 계층이 발생합니다. 앞서 근대 민법의 기본 정신을 말했습니다. 사적 자유의 원칙이지요. 조선인에게도 그러한 사적 자유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래야 동화니까요.


그런데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한 일본인이 조선의 모든 토지와 자원을 다 소유할 수 있습니까? 절대적으로는 여전히 조선인 소유의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 자산가 가운데 일본인에게 배우고 또 일본에 유학하여 상급학교를 졸업한 근대적인 인간집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선생과 정주영 선생도 모두 식민지기에 기업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1939년 말이 되면 그렇게 조선인으로서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일본인보다 많게 4천 명을 넘게 됩니다. 근대화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이었지만, 다수의 조선인들도 거기에 슬슬 참가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근대로부터 차별당하면서 근대를 학습하고 근대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지요. 그렇게 생겨난 근대적인 인적자본을 토대로 하여 나중에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갔을 때 이 땅에 우리 힘으로 근대경제와 근대사회와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역사의 우연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일제가 영구병합하고자 동화정책을 펼친 결과가 그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것을 두고 역사의 간지(奸智)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역사의 의의를 근대적인 법과 제도의 이식을 통한 조선의 근대화에서 찾는 학설을 가리켜 ‘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합니다.


지금 방송을 하고 있는 저와 같이 주로 경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어느덧 알게 모르게 저희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이름을 붙여주더군요. ‘식민지근대화론’에 관해, 곧 식민지기에 있었던 경제적 변화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에 실린 김낙년의「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과 주익종의「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이란 두 논문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저의 성급한 설명보다 훨씬 자세하고 유익한 설명을 거기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4)

 

 

 

근대적 의미의 법과 제도, 그리고 시장경제체제 

 

[ 이영훈 / 2006-06-22 11:23 ]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하였습니다. 영구병합과 동화정책의 구호가 그토록 요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황급하게 그들의 고향으로 철수해 갔습니다. 아무도 있어 달라고 붙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제가 철수한 다음 조선의 사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1905년 대한제국이 패망할 그 당시로 원상복구된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와 경제의 구조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들이 옛날의 그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경제학에서는 발전 또는 개발이라 합니다. 영어로 말해 development입니다. 이는 성장, 영어로 말해 growth와는 상이한 개념입니다. 성장은 사람의 키가 크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키가 160cm에서 170cm로 되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국민소득이 1천 달러에서 2천 달러로 되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개발, development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영어말의 기원은 생물학에서 나왔습니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과정, 바로 그것이 개발입니다. 모양과 기관이 바뀌고 복잡화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원래 어머니 배 속에서 금방 수정되었을 땐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지요. 그것을 두고 개발 또는 발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개발되었다거나 발전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회의 운동 원리와 그 사회의 부속 기관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어 마치 성충이 애벌레로 돌아갈 수 없듯이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는 것을 말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바로 그러한 개발이 식민지기의 한반도에서 일어났음을 주장하는 학설이지요. 인간들이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벌레가 성충이 되었는데, 영양상태와 소득수준이 좋아졌다든가 나빠졌다든가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지요. 무엇 때문에 그러한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의 변화가 생겨난 것입니까. 바로 앞서 설명드린 민법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법과 제도에 의해서이지요. 바로 그 이유로 1945년 일제가 이 땅에서 철수한 다음의 한반도는 결코 1905년 대한제국 당시의 조선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일제가 남긴 역사적 유산의 본질입니다.

 


 

일제가 남긴 역사적 유산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차근히 따져 보도록 합시다. 유산은 가시적인 물적 유산과 비가시적인 정신적 유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물적 유산과 관련하여 남한과 북한의 사정은 크게 달랐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는 북한에 의외로 풍부한 물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군수공업화의 결과였지요. 해방 후 1946년 현재 북한에서는 800개 이상의 대규모 공장이 가동 중이었습니다. 제철ㆍ제련ㆍ전기ㆍ화학 등, 당시로선 세계 첨단 수준의 공장들이 북한에 있었습니다. 특히 1939년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전기ㆍ화학공업의 대규모 공장은, 종업원 수가 3천 또는 6천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0개가 넘습니다. 기타 북한지역에 깔린 철도망은 인구당 철도 마일리지에서 일본 본토보다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인구당 발전량에서도 북한은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일제가 북한에 얼마나 많은 거대한 규모의 군사공업시설을 건설했는지는 최근에야 겨우 밝혀지기 시작한 새로운 연구성과입니다. 해방 후 이들 첨단 공업시설의 일부는 철거되어 점령군 소련의 전리품으로 넘어갔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은 북한정부에 정상 인계되었습니다. 그 상당 부분이 6.25 전쟁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됩니다만, 공장을 경영하는 고급인력이 존재하고 부품이 공급되는 한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흔히들 북한이 19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것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된 것은 북한이 일제로부터 받은 물적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1950년 김일성이 6.25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화기나 화약에 관한 한 북한은 이미 자체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남한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남북한의 경제구조나 경제력의 차이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6.25 전쟁을 도발하도록 유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이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물적 유산은 참으로 빈약하였습니다. 남한은 쌀농사 중심의 농업지대였습니다. 남한에서 가장 큰 산업은 수출 쌀농사였습니다. 공업시설이라곤 양조장ㆍ정미소와 같은 식품가공업이 주류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 밖에 서울, 부산, 대구와 같은 도시에 면방직ㆍ견직 등의 의류공장이 몇 개 있었음이 고작이었습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 부근에 기계공업이 일부 발달하였습니다만, 공장제수공업의 수준을 별로 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이들 남한의 공업시설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많이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남한은 일제가 남긴 또 다른 역사적 자산을 소중히 잘 보존하였습니다. 다름 아니라 근대적인 법ㆍ제도와 시장경제체제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원래 서유럽에서 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일제의 유산이라기보다 20세기 인류가 공유하는 문명의 자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여러번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러한 근대적인 법과 제도는 일제가 한반도를 영구병합하기 위해 이식한 것이었습니다.

 


 

해방 후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근대 문명으로서 법과 제도를 그대로 보전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일제는 1937년 이후 전시기에 접어 들면서 시장경제체제를 상당 부분 중지하고 국가사회주의적인 통제정책을 취합니다. 식량의 공출과 배급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는 해방 후 남한에서는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는 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북한은 풍부한 물적 유산을 받았지만, 일제를 통해 들어온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폐기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할 목적에서였지요. 1946년 북한은 ‘건국 20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일제가 통치의 목적으로 시행한 모든 법을 폐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일제의 재판기구를 인민으로부터 선발된 대표에 의한 인민재판기구로 대체한다”고 하였습니다.

 


 

재산권의 절대성을 보장한 민법이 폐지되면 어떻게 됩니까. 법에 의한 재판기구가 해체되면 그 사회의 인간들은 어떠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까. 그렇게 북한은 근대문명을 부정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비극적이게도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혁명의 열기에 들떠있던 당대인들이 그러한 문명사의 비극을 어찌 예감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간정신의 본질인 자유, 그 자유의 물적 토대인 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계승한 정신적 유산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계승했다기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적 능력이 스스로의 의지로 애써 축적해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일제시대에 걸쳐 크게 보급된 대중교육입니다. 대중의 교육열이 폭발하는 계기는 3.1운동이었습니다. 민족의 긴 장래를 위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이 움튼 것이지요.

 


 

1920년대의 대중교육은 적령기 아동의 취학율을 20-30%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교육열은 1920년대 후반에 주춤하였다가 1930년대가 되면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입학 지원생이 입학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소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해를 넘기면서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1930년대 말이 되면 적령기 아동의 취학율이 남자의 경우 60%를 넘게 됩니다. 이러한 교육열기에 밀려 일제도 할 수 없이 1946년 경부터 의무교육제를 시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할 정도였습니다.

 


 

중학교 이상의 고등교육도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일본으로의 유학생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1940년대가 되면 일본으로의 유학생이 거의 3-4만에 달하였습니다. 그 대부분은 주로 중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중학교가 턱없이 모자랐고 또 민족차별 때문에 입학하기가 까다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 차라리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편리하였습니다.

 


 

교육을 받게 된 조선인들은 총독부 부속의 각급 관서와 학교에 관리와 교사로 취직하였습니다. 그 수가 1940년경 거의 17만에 달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각종 회사나 은행이나 금융ㆍ수리조합 등의 기구에 종사하면서 근대적인 경제활동의 훈련을 받은 고급 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세한 실태와 그들이 해방 후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와 관련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에 실린 나미키 마사히토(?木眞人)의 「식민지기 조선인의 정치참여」가 매우 유익하니 꼭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인적 자본은 1920년대 이후 점포와 공장과 회사를 경영하는 상인과 기업가의 집단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이동하는 보부상을 대신하여 고정적인 점포를 소유하게 된 조선인 상인의 수는 20만을 넘게 됩니다. 1939년 조선인으로 5인 이상 종업원의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은 4천에 달하였습니다.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의 국민경제를 건설하는 데 둘도 없는 소중한 인적 자본으로 역할하였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에 실린 카터 에커트의 논문,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ㆍ공업화ㆍ사회변화」는 이렇게 근대를 학습하고 주체적으로 실천하게 된 인적 자본이 식민지 말기에 대략 전체 인구의 1할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지적하였듯이 해방 후 북한에서는 근대문명이 파기되었습니다. 이에 북한에서 살 수 없게된 많은 수의 근대적 인적 자본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월남한 동포가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200만은 넘습니다. 이 또한 남한이 향유하게 된 식민지기의 유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경제의 건설과정에서 북에서 내려온 기업가들이 큰 역할을 한 것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컨대 해방후 남한에서 성립한 메리야스ㆍ양말ㆍ고무신ㆍ유리 공장은 대개 북한에서 활동하던 기업가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것들입니다.

 


 

저는 이렇게 식민지기에 근대적인 부분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꾸로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는 바로 이들 계층을 모태로 하여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식민지기를 살았던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이 일제에 저항을 했는지 아니면 협력을 했는지, 그 경계선을 긋기란 대부분의 경우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직접 헌신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극적인 협력과 소극적인 저항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살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전체 주민의 1할에 해당하는 근대 부문에 종사한 사람들도 그러하였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하급 관료, 경찰, 군인, 교사, 기술자, 은행원, 회사원, 상공업자, 지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배자 일본인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일본인들과 일상적으로 얼굴을 맞대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농촌 면 단위에서 일본인은 많아야 10명, 보통은 5명 전후였습니다. 하급 관리와 경찰과 교사는 조선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농촌 주민이 일본인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차별을 받을 기회도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농촌 주민의 대다수는 마을과 친족 같은 전통적 생활공간에서 일본인으로부터의 차별을 모르고 지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도시부에서 일본인과 일상적으로 접촉하거나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았던 근대적 계층의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의 차별로 인해 농촌 주민보다 민족의식을 보다 일찍 각성하고 실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친일파도 많았습니다만, 동시에 차별과 억압에 반발하면서 내면에서 민족의식을 강화해 가는 사람의 숫자도 결코 적지만은 않았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그들은 그들이 익힌 근대문명의 노하우를 가지고 국민국가의 건설에 헌신할 수 있는 능력과 자세를 소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저는 식민지기에 성장한 조선인 출신의 근대적 계층을 두고 무조건 친일파라고 몰아치는 것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식민지 당시의 실태를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해방후 그들이 수행했던 커다란 역할을 무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친일과 반일의 복잡 미묘한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한번 더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특강 5에서 계속)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ebs.co.kr/Homepage/?progcd=0002420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 (5)

 

해방은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화에 따른 세계적 사건 

[ 이영훈 / 2006-06-23 16:33 ]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어떤 힘이 작용하여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가게 되었습니까. 이 문제는 해방전후사의 올바른 인식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난 50년간 역사의 진실이 그토록 완강하게 외면되어 왔던 것일까요. 우리 한국의 지성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무대로 전개된 전쟁의 역사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 잘 아시는대로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에 괴뢰국을 세웠습니다. 1933년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방에 또 하나의 괴뢰정부를 세웁니다. 1937년에는 드디어 남중국을 포함한 중국 전 연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중국과의 전면 전쟁을 벌입니다. 나아가 1941년 12월에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한 아시아ㆍ태평양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일련의 전쟁을 가리켜 일본사람들은 15년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일제는 무엇 때문에 15년 전쟁을 벌였을까요. 전쟁으로 대략 50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중국인들의 피해는 그것의 몇 배를 더 능가합니다. 대략 2천만 명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의 경제는 여타 선진국과 달리 고도성장 중이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해외수출이 크게 증가하는 등, 일본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축통화로서 미국의 달러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미국과 무엇 때문에 승산도 없는 무모한 전쟁에 돌입하였을까요. 그것은 인간 이성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역사의 수수께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숨김없는 사실은 우리 민족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헤게모니를 두고 일본이 미국과 벌인 전쟁 덕분에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8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비극의 현장에 우리 조선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어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지요. 그렇게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나서야 최후의 1인까지 본토를 사수한다고 결의를 다지던 일제는 드디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이지요.


국제정세에 밝은 독립운동에 종사하신 분들은 그러한 일제의 종말을 미리 예견하였습니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함석헌 선생은 성서의 표현을 인용하여 해방이 도적같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하였지요. 국제정세에 누구보다 밝은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도 일제가 패망한 소식을 듣고 넋이 빠진 듯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어부인에게 “여보, 우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를 해체시키는 통에 해방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다소 속이 쓰리더라도 이 점을 냉정하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에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해방전후사의 올바른 인식을 위한 진정한 출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방과 분단과 건국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큰 혼란이 빚어진 것도 이 점을 명확히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현대조선역사』(1983)란 책을 보면, “조선의 해방은 김일성이 조직 영도한 영광스런 항일무장투쟁의 승리가 가져다 준 위대한 결실이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김일성 연구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연군에 중대장급 지위에 있던 김일성과 그의 부하 50여 명은 일본 관동군의 추격을 받자 1941년 연해주 소련령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김정일이 출생한 것도 바로 그 곳이지요.


김일성이 귀국한 것은 1945년 10월입니다.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 스탈린은 연해주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까지 소환하여 그가 장차 북한에 세워질 자신의 대리정부의 책임자로서 적격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면접을 보게 됩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 만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소련군과 함께 소련군의 배를 타고 해방 두 달 뒤에 원산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실이 엄연히 이러함에도 북한의 역사책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쓰고 있는 것은 그 사회에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없고 위선의 전제권력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한국의 고등학교용 『한국근ㆍ현대사』라는 검인정 교과서를 봅시다. 가장 시장점유률이 크다는 금성사 출간의 교과서를 보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광복을 가져다 준 것은 연합군의 승리였다.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2005년판, 253쪽). 여기서는 북한과 같은 심각한 날조는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랬던가요. 우리가 바라는 방향은 무엇이었던가요. 이런 이야기가 정부가 검인정한 교과서에 버젓히 적혀 있음을 보면서, 솔직히 말해 저는 남한 역시 북한에 못지 않은 위선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에 관해선 곧이어 분단의 책임을 묻는 대목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독립의열단원들

다른 한편, 남한의 국정 『국사』교과서를 보면 1920년대 이래 만주와 중국에서 ‘무장 독립전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군은 드디어 1944년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드디어 연합군과 합동으로 국내로의 진격작전이 준비되었으나 일제가 너무 일찍 패망하는 통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애석해 하는 서술로 독립군의 역사는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많이 과장되거나 실태와 동떨어진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경 밖 만주벌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독자 전선을 형성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한 해로 한정되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서로 합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둡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그것이지요. 그렇지만 고정적인 진지나 전선을 구축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독립군은 연해주 소련령으로 퇴각합니다. 그 곳에서 여러 정파 간에 독립군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큰 내분이 벌어지고 그 틈을 타서 소련 적군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통에 수백 명이 사살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후 독립군이 독자의 전력으로 일본군과 유격전이든 진지전이든 독자의 전선을 형성한 적은 없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항일연군과 공산당 소속의 팔로군에 속한 조선 청년들의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과 중국 간 전쟁의 일환이었습니다. 독립군 독자의 전선이나 전투력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의 국제정세나 국제관계와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미국이나 소련의 연합군은 물론,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독자의 군사활동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러하기엔 임시정부의 통합력은 너무나 약했고 또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 세력은 이념이나 노선에서 너무나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주체적 조건의 제약도 큰 가운데 중국의 두 정부와 소련은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걸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미리 예민하게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1941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準繩)’을 임시정부에 강요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통제 하에 둡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임시정부의 조소앙 외무부장이 주중 미국대사에서 중국이 일본의 패배 후에 다시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입장은 정도의 차가 있겠지만 중국의 공산당 정부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강대국 간의 새로운 긴장관계가 벌써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러한 새로운 긴장관계의 국제질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발언권을 확보한 국제적으로 승인된 조선인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부속 영토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그 국제법적 지위는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할 당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한제국의 패망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한국의 현대사에 드리웠습니다. 그 깊은 상처는 분단 이후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도 대한제국의 패망이 남긴 어둡고도 긴 그림자 속에 속하고 있습니다. 1백~2백년 뒤 후대의 역사가는 2006년 오늘날까지도 대한제국의 패망 당시와 동시대성의 역사로 규정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점은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킨 국제정치적 계기는 대한제국을 패망시킨 구제국주의 시대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점이 보다 더 중요한 논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선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세계적으로 보아 1945년까지 존속한 제국주의 국제체제는 식민지 민족이 효율적으로 무장 독립전쟁을 전개한 결과로 해체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독립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식민지를 해방시킨 궁극적인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내재한 모순 그 자체였습니다.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제국주의자들은 근대를 이식하였습니다만, 근대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식민지 민중의 성장으로 제국주의 지배는 더 이상 불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근대화된 인간들을 무작정 오래 정치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저항도 커질 뿐 아니라 아무리 일방적이라고 하나 지배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수지타산은 많은 경우 손해였습니다. 생각처럼 제국주의는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점은 식민지인들의 근대적 실천이 강화될 수록 점점 더 명확해졌습니다.


제국주의의 이러한 모순은 이윽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가가 교체됨에 따라 백일 하에 벌겋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은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최대의 자원국이자 농업국이요 공업국이었습니다. 그런 미국에게 식민지라는 부속 영토는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를 자유무역체제로 통합하는 편이 미국의 국익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그래서 미국의 달러를 벌어들여서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사가는 국가들로 식민지들이 독립해 준다면, 그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수지맞는 장사였습니다.


이에 미국은 2차대전 당시, 전쟁이 끝난 다음에 식민지는 해방시킨다는 다짐을 받고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을 지원하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약속대로 전쟁이 끝나자 구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오래된 식민지로부터 철수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0년대까지 대략 150개 이상의 신생 독립국가들이 성립하였습니다. 대한민국도 어김없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컨대 해방 그 자체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화를 반영한 글로벌한 사건이었습니다. 해방 그것은 결코 일국사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해 좀더 부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헤게모니 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신생 독립국에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공업화의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이 점이 구제국주의와 결정적으로 상이한 포스트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본질입니다. 다만 주어진 가능성을 현실로 실현하는가 여부는 오로지 신생 독립국의 내부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우선 그 가능성을 명확히 인지한 다음, 그 실현의 경로를 구체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보면 몇몇 나라에서만 민주주의와 공업화가 성공하였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거기에 포함되지요. 그렇지만 해방 당시부터 그렇게 성공이 보장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정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해방은 다음 아니라 그러한 인류문명사로부터의 질문을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던지는 국제정치적 계기였습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특강>은 EBS 라디오 홈페이지(다시듣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