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左派 학자가 본 高校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 결론에 따라 資料들을 선택…학자적 양심이 실종됐다

이강기 2015. 8. 29. 11:06
左派 학자가 본 高校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 결론에 따라 資料들을 선택…학자적 양심이 실종됐다    2012/05/13 15:01
 
 
월간조선 2005.3
左派 학자가 본 高校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결론에 따라 資料들을 선택…학자적 양심이 실종됐다

申福龍 건국대 정치학 교수

 


민중주의의 神話는 깨야


오늘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필자 자신의 正體性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모임의 분위기는 다분히 右派的이고,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매우 左派的인 성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 번도 스스로를 右派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굳이 이념적 스펙트럼이 무엇이냐고 선택을 강요한다면, 필자는 아마도 左派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가져왔다.

문제의 「한국 근·현대사」 저자들이 필자의 부족한 책을 여러 군데에서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도 필자에게는 부담스런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필자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마치 피고 측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으로 참석한 것 같아서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교과서를 읽어본 결과, 필자는 다음 몇 가지 문제점을 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첫째, 史觀(사관)의 문제다. 史觀의 분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를 左派 史觀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右派 史觀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획일적인 이념을 강요받는 시대는 불행하며, 한 사회 안에 左派的 사고를 가진 사람과 右派的 사고를 가진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어서 左派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늙어서 左派이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젊은 한때 左派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을 폭넓게 보아야 할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는 左右의 균형을 이루면서 보편적 지식을 폭넓게 가르쳐야 한다. 편식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타나는 左派的 시각은 단적으로 말해 민중주의(포퓰리즘)이다. 개발독재에 대한 반감 등 한국사회에서 左派가 나타난 배경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데는 상당한 논리적 무리가 있다.

역사 발전을 선박의 航進(항진)에 비교한다면, 민중은 선체의 기관일 수는 있어도 키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민중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神話(신화)이며 우리가 깨어야 할 하나의 迷妄(미망)이라고 생각한다.

史料의 편파적 취사선택과 왜곡

둘째, 자료와 방법론의 측면에서 해방정국에 관한 左派的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역사 記述(기술)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역사학자는 많은 史料(사료)들을 읽고, 거기서 도출된 결론에 따라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지금 左派 사학자들은 자료로부터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 결론을 뒷받침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정해진 결론을 충족시킬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으면 자료를 왜곡하거나 잘못 논증된 2차 자료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左派 사학자들이 이 책(금성출판사刊 「한국 근·현대사」)에서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설명하면서, 1차 자료들을 다 외면한 채 브루스 커밍스의 2차 자료를 인용해 쓴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다.

史料를 왜곡한 부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乙未사변)에서도 잘 나타난다. 금성출판사의 교재는 乙未사변 당시 서울에 있었던 러시아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의 수기를 인용하고 있다. 그 인용문에 의하면 『왕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가자,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 분 뒤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그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고 되어 있다.

필자가 갖고 있는 사바틴의 수기 원본에 의하면 『나는 당일 새벽 6시에 궁궐을 떠났으므로 왕비의 시해장면을 보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떠나기 이전까지 왕비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E. H. 카는 『역사학자가 정확성을 기하는 것은 美德(미덕)이 아니라 의무』라고 말했다.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呂運亨(여운형)을 해방정국의 주도세력으로 記述하고 있는 것도 이 교재가 균형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呂運亨이 카리스마를 갖춘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고, 국내파 독립운동가로서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부터 授權(수권)교섭을 받았다는 利點을 갖고 있었으며, 美 군정이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대중적 지지기반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呂運亨은 임시정부나 해방정국의 주도적 法統(법통)은 아니었다.

해방정국의 구도를 설명하려면 呂運亨의 상대방이었던 右派 민족주의를 똑같은 비중으로 다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성출판사의 필자들은 呂運亨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실수와 결함을 은폐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이 책은 親日청산에 대해서 매우 엄혹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呂運亨이 臨政(임정) 시절, 일본 밀정 아오키에게 臨政 기밀을 누출한 사실이라든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를 찾아가서 大東亞 전쟁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 선서를 한 사실,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를 교섭하면서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부터 자금 2000만 엔, 지금 돈으로 2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일본軍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는 여류시인 盧天命(노천명)의 詩를 소개하면서, 呂運亨이 조선총독을 찾아가서 싱가포르 점령을 축하한 사실은 거론하지 않았다. 盧天命을 친일파로 비판했다면, 呂運亨도 마땅히 비판했어야 균형 있는 역사기록이라고 생각한다.

左派의 잘못에 대해 눈 감고 있어

신탁통치 파동에 대한 記述도 공정치 않다. 필자는 「反託(반탁)은 애국이었고, 贊託(찬탁)은 賣國(매국)이었다」는 右翼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반면에 贊託은 통일로 가는 길이었고 反託은 분단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左派的 시각에도 동의할 수 없다.

左派들이 진실로 자주적이었고 분단의 극복 의지가 그렇게 강했다면, 당초에는 左派가 反託을 주장하다가 1946년 1월3일 새벽 소련의 지령을 받고 하루아침에 贊託으로 돌아선 사실이라든지, 朴憲永(박헌영)이 『한국은 장차 소련의 연방이 되어야 한다』고 1946년 1월8일자 외신과 기자회견을 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左派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어야 한다.

사실을 왜곡한 대표적 기술의 부분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부분이다.

필자는 제주 4·3 사건은 해방정국에서 右翼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양민학살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발생 동기가 單政 반대와 美軍 철수라는 左派들의 주장이나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고, 그에 동의할 수 없다.

4·3 사건을 이념이나 정치노선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그 자리에서 저질러졌던 죄상을 은폐하거나, 아니면 동족살해 죄상의 변명을 이념에서 찾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3 사건은 국가 혼란기에 주민들 간의 해묵은 敵意(적의)와 일부 右翼의 지각 없는 압제가 모순의 상승효과를 일으켜 벌어진 前근대적 학살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었다.

남북한의 정통성 문제

마지막으로 남북한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남한에서 單政을 수립하자 북한에서도 어쩔 수 없이 정권의 수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기록은 참으로 정직하지 않다. 남한이 먼저 單政을 수립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북한에서는 1946년 인민위원회가 설치됐고, 소련은 분단으로 가는 수순을 정확히 밟고 있었다. 소련은 약소국가에 대한 정책에서 미국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고, 북한에 대한 정보도 많았으며, 極東(극동)에서 不凍港(부동항)을 얻어야 할 필요도 절실했다. 소련은 노회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이 점에서 미국이 더 순진했거나 미욱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미국이 분단을 획책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통일을 체념하고, 분단의 수순을 밟은 것은 美蘇공동위원회와 左右 합작의 실패 이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논리의 모순을 느꼈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左派 이념을,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左派는 민족주의적이 될 수 없다. 마르크스가 『당신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한 것이 공산당 선언의 핵심이다. 이 책이 교묘하게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左派 논리가 대단히 어설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모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左派 정치인들의 재산 공개를 보면서도 느끼곤 한다. 「어떻게 左派들이 저렇게 재산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민중주의자들은 겸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자신들의 투쟁의 결실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은 향후 역사도 자신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迷妄에 집착하고 있다.

학자로서의 良識의 문제

이 시대의 청년 左派 역사학자들이 史學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그들은 자료발굴을 위해 끈질기게 천착했고, 右翼 일변도의 史學史에서 旣成(기성)의 고정관념을 깨고 사실을 再해석하는 과정에서 연구사에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 學界에서 경원시되는 이유는 保守를 反動으로 보는 그들의 독단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어른 없는 집안의 막된 아이들처럼 保守를 질타함으로써 학문의 연속성을 부인했다. 그들은 『우리는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없다』고 눈 똑바로 뜨고 대들었다. 그들은 학문에 있어서는 감정적이고, 인간적으로는 무례했다. 이것은 학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문에 대한 겸허함과 역사 속에서 明滅(명멸)한 수많은 非민족적, 非민중적 영웅들의 공적을 시인했어야 한다. 그들이 學統에 대한 감사함이 없이 가슴으로만 글을 쓰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시대 대표적 左派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申榮福(신영복) 성공회大 교수의 지적처럼 「관념의 野積(야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민중사관에 집착함으로써 理性보다는 감정으로 글을 쓰는 이상주의자라는 느낌을 준다. 孔子는 『思而不學則殆矣(사이불학즉태의)』라고 했다. 『온갖 생각을 하면서 책은 안 읽는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左派라고 생각하는 필자가 보기에도 금성출판사刊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학자나 교육자로서의 良心과 良識(양식)의 문제이다. 史觀이나 이념의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이다.●